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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2; 2021 > Article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양식과 가치 연구*

Abstract

본 연구는 양주 회암사 석조불상(편)의 특징과 조성 시기를 고찰하였다. 양주 회암사지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까지 왕실의 지원을 통해 발전한 대표적인 왕실 원찰이다. 양주 회암사지는 16세기 후반에 소실되었으며, 1999년 이후 수 차례의 발굴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양주 회암사 석조불상〉은 완전한 형태가 없고, 훼손된 편이지만, 머리 형태와 몸체를 통해 다음과 같은 특징을 확인하였다. 머리 부분은 육계 위에 구멍이 있어서 정상계주를 얹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왼쪽 팔 부분의 Ω형 옷 주름, 그리고 두터운 법의 등이 특징이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아 15세기에 제작된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7년),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66년) 등 효령대군 등이 관여한 왕실발원 불상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조선 전반기 조각 양식은 명나라 영락(永樂, 1403-1424), 선덕(宣德, 1426-1435) 연간에 발전했던 티베트계 명 양식이 반영된 불상 양식과 매우 유사한 특징이 있다.
이와 같은 형식 특징을 고려할 때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은 효령대군이 중창 불사 시기를 전후한 15세기 전반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명 영락·선덕 연간(1402-1435)의 조각과의 친연성을 가진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은 조선 전반기 불상 조각이 동아시아의 불교미술 발전 흐름에서 공통가치를 교환하는 것을 반영한다.

Abstract

This study focus on the characteristics and of the Fragment of Stone Buddha of Hoeamsa Temple(檜巖寺).
As is well known, this temple had been developed rebuilding by supporting of the royal family from the late of Korea Dynasty to the early of Joseon Dynasty(朝鮮). The Hoeamsa Temple Site in Yangju(陽州) is believed to have been destroyed in a fire in the late 16th century, and various artifacts have been excavated after several excavations since 1999.
This Temple has been excavated a variety of Fragment of Stone Buddha statues. The Buddha statue of Hoeamsa Temple in Yangju has a hole on top of high usnisa(肉髻), and special folds in the left arm and a thick clothing style. It was reflects the sculptural Joseon style modified by the Tibet-Chinese style. This style is very similar to that of Buddha statues produced in the 15th century, supported by the royal family of Joseon. In particular, these statues were believed to have been produced around the first half of the 15th century when the temple was heavily fortified with the support of Prince Hyo-ryeong(孝寧大君).
It is also interesting to note that these statues show the sculptural features of the early Joseon Dynasty, reflecting the Tibetan-Chinese sculptures style, compared to those of the Buddhist sculptures in the first half of the 15th century during the year of Yeongrak (1403~1424) and Seondeok (1426~1435), the kings of the Ming Dynasty. This reflects the development of Buddhist sculpture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in line with the trend of Buddhist art in East Asia.

I. 머리말

양주 회암사(檜巖寺)는 여말선초에 왕실과 관련된 사찰로서 위용을 자랑하던 대표적인 왕실 원찰(願刹)이다. 회암사는 이색의 「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지공의 제자이자 공민왕(恭愍王)의 왕사(王師)였던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 ‘삼산(三山, 삼각산)과 양수(兩水, 한강과 임진강) 사이를 골라 머물면 불법이 자연히 흥한다’라는 지공의 수기를 받아 1372~1376년에 중창하였다. 당시 회암사에서 개최된 문수회(文殊會)에 많은 사람이 와서 시주하고자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고,1 이후 제자에 의해 262칸 규모의 사찰 조성 공사를 마쳤다. 당시 건물 배치는 남쪽을 향해있는 보광전 5칸과 그 뒤에 설법전 5칸, 그 뒤에 사리전 1칸, 그 뒤에 정청 3칸이 있었고, 정청의 동쪽과 서쪽에 각각 방장실이 있는데, 동쪽 방장실의 동쪽에 나한전 3칸 건물, 서쪽 방장실의 서쪽에는 대장전 3칸이 있었다. 그리고, 두 방장실 앞에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입실료와 시자료가 있었다고 하였다.2
조선 초의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왕사(王師)인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가 주석하면서 억불정책이 이루어지던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위상을 유지하면서 왕실의 후원 아래 대사찰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회암사는 조선 초 명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개성 영통사(靈通寺), 양주 회암사(檜巖寺)와 금강산을 구경할 만큼 명찰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3 이 시기는 5·6단지 건물지에서 출토된 〈청동금탁〉(1394년)을 통해 태조의 비 신덕왕후(1356~1396)와 그 일가가 후원한 중창 불사를 알 수 있다.4
이후에도 태종과 원경왕후의 기신재(忌晨齋)를 회암사에서 치르면서 효령대군(1396~1486)이 지원한 불사 현황이 세종 16년(1434)의 보광전 불사에 사용된 ‘효령대군 선덕갑인(孝寧大君宣德甲寅)’명 기와, 회암사 중수를 시작한 세종 18년(1436) 유물인 ‘효령 대군정통병진(孝寧大君正統丙辰)’명 수막새 등에서 확인된다.5 이때 집현전 제학 안지 등이 근자에 회암사의 승려들이 사찰을 더 세우고 새로 불상을 만들어서 확장하는 불사가 다른 때의 배가 된다고 비난하고 있다. 또, 성종 3년(1472)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1418~1483)가 부원군 정현조에게 명하여 회암사 중건 불사를 후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성종 21년 5월에 ‘회암사의 금불상과 은탑을 훔친 사건’을 논의하면서, ‘이것이 선왕과 선후가 조성한 것이다’라고 언급한 내용이 주목된다.6 여기에서 선왕과 선후는 세조(1417~1468)와 정희왕후를 지칭한 것으로 금탑과 은불상을 제작할 정도로 왕실의 재정지원이 막대한 규모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회암사에 대한 왕실의 지원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시기(1545~1565)에 절정에 달하고 있다. 회암사를 대규모로 중수한 후 조성한 400점의 불화 화기에서 “…이에 공경히 내탕금과 보화를 내어 양공(良工)에 명하여 석가, 미륵, 약사, 미타 부처와 그 보처 보살들을 모두 금선묘화로 각 50탱, 채색화로 50탱을 그려 모두 400탱을 조성하여 장엄하였다…”7라는 내용이 확인된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사찰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회암사는 명종 21년(1566)의 기록에서 송도의 유생들이 부사(淫祠)를 태워버린 이후 유림이 회암사를 태우려 한다는 소문에 대해서 명종이 걱정하는 내용8과 선조 28년(1595)에 ‘회암사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불에 탔다’9라는 기록에서 1566~1600년 사이에 회암사가 폐사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간에 임진왜란이라는 큰 사건이 있으므로 전란 중에 폐사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석조불상이나 청동불이 얼굴이 잘린 채로 담장지에서 확인된 2차 발굴조사를 통해 볼 때 유생들의 방화나 기타 원인으로 훼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인조 13년(1635)에 항산군 이정(恒山君 李楨)이 회암사에서 크게 불사를 벌여 파직되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회암사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0 이와 같은 회암사와 관련된 기록은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청동 금탁〉이나 많은 수량의 〈명문 기와〉 등을 통해서 중창 불사 및 발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홍무삼십년정축삼월일’명 수막새〉11는 태조 6년(1397)으로 왕사(王師) 무학(無學)의 승탑이 건립되던 시기로 가장 오래된 명문기와이다. 또한, 회암사지 출토 기와는 범자(梵字) 진언(眞言)을 담은 기와가 다른 어느 곳보다 많다. 이러한 까닭은 지공의 방문 후에 원나라 밀교가 고려에서 발전한 영향으로 추정되며, 조선 전기의 사찰에서 보이는 출토 기와와 비교해도 조선 전기 사찰에서 출토된 기와 형식과도 같다.12 그렇다면, 〈‘홍무삼십년정축삼월일’명 수막새〉의 제작시기인 1397년과 문정왕후가 사망한 1565년 이후 폐사 시기까지 고려하면, 현재 전하는 회암사지의 출토유물은 조선시대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양주 회암사지는 14차례의 발굴로 확인된 유적과 유물에서 조선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사세를 확장했고, 큰 위용을 자랑하던 조선 왕실의 불교 신앙을 대표하는 사찰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출토된 석조불상은 비록 파손되어 부분만을 보여주는 몇 점에 불과하지만, 그 현황과 특징들을 통해서 유교의 발전과 함께 불교가 탄압되던 시절에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교류와 해석에 의미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고고학적 유적지인 회암사에서 출토된 석조불상을 통해 조형 특징, 조성 시기를 밝히고 그 성격과 가치를 찾고자 한다.

Ⅱ.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현황과 양식

1. 석조불상의 현황

불상은 사찰의 건립 때 가장 중요한 예경 대상으로 건립 초기에 조성되는 경향이 있다. 「천보산 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건물 262칸에 15척(尺)의 불상이 일곱 개, 10척(尺)의 관음보살상이 있는 웅장하고 화려한 사찰이라 하였으나, 현재 완전한 불상은 전하지 않고 파손된 소조와 석조상의 남은 조각만 있다. 양주 회암사지에서 수습된 석제 유물 중에서 석조불 상류는 총 26점이 확인되었는데, 불상 22점, 보살상편 1점, 대좌 3점이다.13 출토품은 완전한 형태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파손된 예만 전하지만, 내구성이 강한 석조재료의 특성으로 특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중 석조불상 편 1점, 석조 불두 2점, 불좌상의 파편 3점, 석조대좌 등은 비록 편이지만 형식과 양식의 특징을 고찰할 수 있는 요소들을 보여준다. 이들 석조불상은 2차 발굴조사에서 8단지 나한전지·대장전지 7단지 서기료지와 6단지 서승당지 북쪽 지역, 그리고 북동쪽 담장지 부근 등의 지역에서 13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은 완전한 형태는 없고 모두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으며, 상의 일부가 접합되는 것이 모두 4점이다. 이 가운데 3점의 유물은 각 불상 편이 거리상 상당히 떨어진 부분에서 출토되었다.14 회암사지 3차 발굴에서 출토된 석제 유물은 모두 5, 6단지의 보광전지에서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석조불상은 회암사지 5·6·7·8단지의 주요 건물지에서 출토되어 당시 불상 조각의 특징을 반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출토 석제 불상은 비록 파손되어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이들 조각에서 나타나는 조형은 조선 전기 조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석조불상(머리)편 1〉(Fig. 1)은 회암사지 건물지 7·8단지 나한전지 남쪽 월대 아래에서 출토되었다. 원래 세 부분으로 깨진 상태로 출토된 것을 접합한 것이다. 얼굴은 갸름한 형으로 이목구비는 작지만, 콧방울이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귀부분은 적당한 크기이며 목의 삼도 부근에서 파손되어 있다. 머리카락은 나발이며 머리 중앙에 높이 1.4cm, 지름 2.8cm의 육계가 뚜렷하다. 머리의 중앙계주까지의 나발단은 7단이며 육계 부분은 3단이다. 정수리에서 귀밑머리까지 직선에 가까운 경사이다. 머리 중앙에 뚜렷하게 높은 육계가 있고, 정상에는 정상계주를 꽂았던 지름 1.5cm, 깊이 0.65cm의 원형 홈이 있다.
〈석조불상(머리)편 2〉(Fig. 2)는 회암사지 8단지 나한전지에서 출토되었다. 나발이 없는 민머리이며 머리 위의 육계 부분은 너비 4.6cm 정도이며 가운데 둥근 홈이 파여있어 정상 계주자리로 추정된다. 갸름한 얼굴에 눈썹과 눈은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게 얕은 음각선으로 표현하고, 코는 비교적 낮지만, 콧방울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입은 매우 작다. 머리와 육계가 따로 구분되지 않았지만, 정상부에 홈이 파여서 정상계주를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점의 석조불상 머리는 머리 위의 육계가 차이가 있지만 모두 정상계주가 있었던 둥근 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홈은 불상 조각에서 정상계주를 얹을 때 14세기 이후 나타나는 형식이다. 이 두 점 외에도 회암사지 출토품 가운데 둥근 홈이 있는 육계 부분만 있는 파편도 확인되므로 머리 위로 높게 솟은 육계와 정상계주를 한 형식은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평면적인 얼굴이지만 생각에 잠긴 듯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은 갸름한 형과 두툼한 형이 모두 보이며, 상호는 양옆으로 올라간 눈썹 선과 가늘고 긴 눈을 얕은 음각선으로 간략히 표현했지만, 코끝 양쪽으로 둥글게 표현한 콧방울과 인중과 입술 선이 명확한 작은 입은 매우 사실적이다.
〈석조불상편 3〉(Fig. 3)은 부드러운 회백색 사암제로 전체 높이 23.2cm로 얼굴은 8단지, 상체는 6단지, 하체는 서승당지 북쪽 석축 아래에서 출토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불상의 머리와 상체의 왼편 일부만 있는 형태로 머리 윗부분은 파손되었으나 나발 형태와 얼굴 상호, 턱에 있는 한 줄의 턱선으로 볼 때 〈석조불상(머리) 편 1〉과 같은 모습으로 높은 육계와 정상계주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갸름한 얼굴에 백호는 없으며 가늘고 긴 눈이 양옆으로 올라간 모습이 간략한 데 비해서, 콧방울과 입은 사실적이다. 두껍고 옷주름선이 간략한 법의는 대의(大衣) 자락이 목 뒤로 넘어가므로 부견의(覆肩衣)를 걸친 변형 편단우견이나 통견의 착의로 추정된다.
〈석조불상(몸)편 4〉(Fig. 4)는 높이 17cm로 7단지 주변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왼쪽 어깨 부위부터 대좌 부분까지 남아있고, 오른쪽과 뒷부분은 파손되어 있다. 왼손도 훼손되어 수인을 알 수 없으며, 다리는 오른쪽 다리를 위로 올린 길상좌를 취하고 있다. 법의는 옷 주름의 형태로 보아 편단 우견으로 보이며, 왼팔 대의의 Ω형 옷 주름과 왼쪽 다리의 대좌 위로 늘어진 주름 등 도식화된 옷 주름이 매우 뚜렷하게 표현되었다.
〈석조불상(몸)편 5 〉 (Fig. 5)는 동방장지 동북쪽 석축 윗부분에서 복장공으로 추정되는 원형 홈이 가슴 부위까지 패어 있는 상체 부분만 출토되었다. 목에 뚜렷한 삼도가 있으며 대의를 걸친 통견의에 승각기가 일부 보이는 차림으로 옷주름이 매우 두텁게 표현되었다. 왼팔에 넘겨진 대의 자락과 ‘Ω’자형 옷 주름이 표현되었다.
〈석조불상(몸)편 6〉(Fig. 6)은 왼쪽 일부분만 남아있지만, 왼쪽 옷깃이 반전된 옷 주름 형식을 보인다.
석조불상에서 수인을 살펴볼 수 있는 조각은 세점으로 파손된 몸체에 선정인이 확인되는 두 점과 두 손을 앞으로 모은 후 보주를 얹은 수인을 한 한 점이 확인된다. 선정인을 한 〈석조불상편 7〉(Fig. 7)은 회암사지 7·8나한전지 북서쪽 기단 밖에서 출토된 불상 몸체 부분으로 드러난 오른손 팔목 위로 옷 주름선이 보이므로 통견의 착의법을 한 것으로 보이며,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은 길상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석조불상편 8〉(Fig. 8)은 6단지 서승당지 내부에서 출토된 몸체 일부로 상체 일부와 하체의 왼쪽 부분이 없지만 선정인을 하고 통견의를 입고 오른쪽 다리를 올린 길상좌를 하고 있다. 수인은 손등이 정면을 보이는 형태로 왼손이 오른손 위에 포개어 있다. 앞의 조각에서 같은 길상좌임에도 발목 부근에서 옷을 묶고 있는 형식은 다른 형식이지만 앞으로 넓게 펼쳐진 Ω형 옷 주름이 같은 형식이다. 상 내부에 복장공이 깊게 파여있다.
〈석조불상편 9〉(Fig. 9)는 6단지 동쪽 석축단에서 출토되었는데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위에 둥근 보주를 올리고 있는 손의 모습만 남아있다.
회암사지 출토 〈석조대좌〉(Fig. 10) 앙련과 복련이 맞붙은 형태의 사암제 대좌로 6단지 보광전지 남서쪽 기단 밖에서 출토되었다. 너비 24cm의 크기로 고정을 위해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이러한 대좌는 고려 시대까지 사용되던 상·중·하대의 수미대좌에서 중대부분이 사라지고, 여말선초 조각에서부터 상대와 하대에 표현된 연꽃이 서로 잎을 맞대고 있는 형식이다.

2.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양식 특징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 1~6〉의 형식에서 높은 육계와 정상계주홈 편단우견과 통견의 두터운 법의 왼편에 Ω형 옷 주름과 왼쪽 옷깃의 접힘 자락, 그리고 〈석조대좌〉에서 중대석이 생략된 앙련과 복련이 맞붙은 형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소는 대체로 여말선초 조각 양식의 특징이고, 회암사지 석조불상에서 차별화된 특징이다.
불상 형식은 『불설조상양도경(佛說造像量度經)』에 근거한다. 양도경은 불상의 비례를 설명한 책으로 그 내용 중에는 육계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육계의 출현에 대해서는 머리카락을 길렀던 고대인들의 머리 손질인 상투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부처의 신성함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장엄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신성함을 최고의 형상으로 표현한 신앙 조형물인 불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머리의 요체로 상징화되었다. 육계는 초기 조각에서부터 나타나며, 이러한 형태의 미감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육계 위에 올린 정상계주는 조선 전기 불상 조각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이다. 부처의 육계에 관해서는 『경률이상(經律異相)』 4권, 『화엄경』, 『대승백복장엄경(大乘百福莊嚴經)』 등 여러 곳에서 언급되지만, 그 형태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은 『대승백복장엄경』에서 문수사리에게 머리의 형태와 머리카락의 모습, 정수리에 있는 둥글고 높은 육계 등 여래의 몸의 특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15
정상계주의 상징성에 관해서는 『경률이상(經律異相)』에서, ‘명월마니주(明月摩尼珠)는 대개가 용의 뇌 안에 있다. 중생으로서 복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절로 이를 얻는데, 마치 지옥에서 죄를 다스리는 기구가 저절로 나는 것과 같다. 이 보배를 여의주(如意珠)라고도 하는데, 언제나 온갖 보물이 나오고 의복과 음식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되기 때문이다. 이 구슬을 얻은 이는 독이 해를 끼칠 수 없고, 불이 태울 수 없다’16는 내용에서 구슬이 머리에 장식되며 예경되는 사상배경을 찾을 수 있다.
또한 『불정존승다라니경』에서 ‘일장보주(日藏寶珠)가 깨끗하여 티가 없고 청정하기 허공과 같으며 있는 곳마다 광명을 비추는 것과 같은 다라니’17라고 하였다. 이러한 보주의 역할은 『금광명최승왕경』 「여의보주품」에서 ‘다라니 명주(明呪)를 말하거나 경권(經卷)을 쓰거나 받아 지니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공경 공양하는 이는 천둥, 번개, 벼락과 모든 두려움, 고통, 근심이 없을 것이고 횡사를 모조리 멀리 여일 것이며, 갖은 독약, 저주, 방자와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 사자, 독한 뱀 내지는 모기까지라도 모두 해하지 못합니다’, 혹은, ‘이 신주들은 모두 큰 힘을 가져서 중생이 마음으로 바라는 일들이 모두 원만하게 하여 큰 이익을 얻게 할 수 있다’18라고 설명하는 등 여러 글귀에서 공경하는 신앙 근거를 읽을 수 있다.
육계에서 다시 정상계주가 나타나는 것에 대한 경전 근거를 찾기는 미비하다. 오히려, 밀교의 발전과 더불어 유행하는 다라니를 통해 육계 위에 올라가는 불상의 요체로서 정상계주를 상징화시킨 것은 아닐까하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불정심주다라니는 육계를 형상화시킨 다라니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불정심주는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1346년)의 복장물로 나온 1287년에 판각한 〈『대화수경(大華手經)』보주형 도상〉19에서 처음 확인된다.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에서 나온 『대화수경』에서 ‘불정심인’을 ‘현세의 어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후세에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영험을 지닌 것(佛頂心印若人帶持者今毋無難後世生極樂國土)’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도상은 〈서울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물에도 〈불정다라니〉가 확인되므로 고려 말에는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도상을 수막새에 표현한 회암사지출토 〈불정심인수막새〉(Fig. 11)가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 도상은 기존 연구에서 회암사지 출토 수막새의 불정존승다라니문양과 남원 승련사(勝蓮寺)의 돌에 양각으로 새긴 육자진언과 〈마애불정심주〉, 영암 도갑사에서 출토된 〈불정심인 수막새〉 등의 비교를 통해 조선 전기에 많이 사용되던 도상이며,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육자진언범자문 암막새〉에서 육자진언의 자획, 필법 등이 〈남양주 봉선사 동종〉(1469년), 〈남양주 수종사 동종〉(1469년)에 새겨진 육자진언과 유사하므로 회암사지출토 기와는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성과가 있다.20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대불정심주다라니 복장물과 정상계주가 함께 나타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에서 ‘대덕 5년(1301) 신축 5월 20일에 궁궐도감 녹사별장인 정승설이 인출했다(大德五年辛丑五月二十日」宮闕都監錄事別將丁承說印)’라는 간기가 있는 〈아미타삼존다라니〉(Fig. 12)와 함께 〈금강계다라니〉(1292년), 〈아자범자원상태장계만다라〉, 〈향낭〉 등 복장물이 확인되었다. 이 불상은 X-레이 촬영결과 정상계주도 신체와 같은 동으로 제작되어서 14세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복장물로 나온 〈아미타삼존다라니〉는 중앙에 「대불정심주(大佛頂心呪)」 도상을 표현하고, 그 옆에 ‘아미(阿彌)’·‘타불(陀佛)’이라고 존호를 표기하였다. 도상 양옆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쓰고 있다. 이러한 시대 흐름은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복장유물로 출토된 〈성불수구대다라니(成佛隨求大陀羅尼)〉(1375년)의 불정심주형 다라니 도상과 불상의 양식에서도 볼 수 있다.21 이 『제다라니』는 고려 우왕 원년(1375년)에 조성된 목판을 찍은 것이다.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조성 시기는 어깨선의 옷 주름선이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나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것과 유사하며, 앙련과 복련이 마주 보는 연화대좌 요소 등의 연관성을 볼 때 15세기 조성된 것22으로 추정되는 상이다.
이와 같이 육계를 상징화시킨 '불정심인'도상은 13세기부터 다라니의 발전과 함께 불복장으로 나타나고,조선 15세기경의 사찰 기와 및 불복장으로 발전하고 있으므로 이 시기에 육계 신앙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흥미로운 점은 회암사 출토 불상 머리에서 보이는 육계 위에 정상계주가 나타나는 머리 형식이 조선 전기에 들어와 일반화되는 시기와 같은 흐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정심주와 정상계주의 연계 관계를 명확히 해석하기에는 정상계주만을 다룬 경전 근거가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육계의 상징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변화된 장엄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화는 조선 전기에 새로운 불교양식이 들어와서 불교 도상의 의미와 상징성이 이해되고, 조형에 반영하는 공감대가 15세기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전기의 조각에서 일반화된 정상계주가 표현된 불상 중에서 연대가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확인되는 공통 요소를 비교하여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특징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상계주가 보이는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8년),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불좌상〉(1466년)과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82년)에서 표현된 정상계주는 조선 전기 조각 양식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조형 요소를 반영한 대표적인 예이다. 앞서 본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 1·2·3〉에서 보이는 머리 형식은 머리 시작선에서 육계까지의 나발단은 7단으로 14세기에 조성된 문경 대승사 불상과 같으며, 육계 위의 나발단은 3단으로 조선 전기에 제작된 영주 흑석사, 천주사, 왕룡사원의 상들과 같다. 이러한 특징은 금속으로 조성된 금강산 은정골 출토의 〈금동아미타삼존불좌상〉(1451년) 등의 높은 나발단과 다른 형식으로 목조조각과 더 가까운 형태이다.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 편 3·4·5·6〉의 착의법에서 편단우견, 부견의, 통견의 착의에 두꺼운 옷자락, 왼쪽 어깨에 Ω형의 옷주름, 왼쪽 옷깃의 접힘 자락 등이 표현되었다. 이와 비슷한 형식은 대체로 여말선초 조각부터 나타나지만, 앞서 본 불정심주의 형태나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같은 기년불상에서 정상계주와 법의 형식이 함께 나타나는 시기가 15세기임을 고려한다면 조선 전기 조각과 더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Fig. 13)의 법의 왼쪽에서 고려 후기부터 보이는 Ω형의 옷 주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상계주와 Ω형의 옷주름이 함께 표현된 것은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이 시기의 특징이다. 이들 불상 조각 얼굴의 선정에 든 명상에 잠긴 모습에 정상계주를 한 형식은 비록 석조와 목조라는 차이는 있지만, 매우 유사한 것으로 조선 초의 조각 양식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석조불상(몸) 편 6〉(Fig. 6)에서 나타난 왼쪽 옷깃의 접힌 옷 주름도 이들 상에서 확인되는 조선 전기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옷 주름선이다. 이와 같은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형식 특징은 조선 전기 기년작 불상들과 석조와 목조라는 차이는 있지만, 매우 유사한 조선 15세기 조각 양식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정상 계주를 한 조각이나 법의를 통해 회암사지 출토 불상의 존명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상의 성격을 알려주는 수인을 확인할 수 있는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 7·8·9〉에서 2점의 선정인 불상과 1점의 선정인 위에 둥근 보주를 올린 형식이 있다. 이러한 상의 성격은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불사에서 제작된 불상 존상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선 전기 왕실 발원으로 제작한 불상 기록에서 확인되는 존상은 효령대군이 발원·시주한 〈관악사 약사여래좌상〉, 〈미륵삼존상〉(1429년), 〈남양주 견성암 약사삼존불좌상〉(1456년), 명빈 김씨(明嬪 金氏, ?~1479)가 발원한 수종사오층석탑 출토 〈석가여래·지장보살·관음보살·천왕상〉(1493년),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懿淑公主, 1441~1477) 부부가 발원한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1466년)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평창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좌상〉은 의숙공주와 정현조가 후사를 얻기 위해서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문수보살·보현보살·미륵불·관음보살·지장보살·십육나한·제석천왕을 조성했다는 복장 발원문을 통해 당시의 다양한 신앙형태를 살필 수 있다. 또한, 문정왕후가 회암사를 중수하고 명종의 쾌유와 세자 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400점의 불화가 석가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 미륵불로 제작된 것을 고려한다면, 당시 회암사에 조성된 불상도 이러한 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현재 전하는 석조불상편으로 존상 성격을 명확히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다.
양주 회암사지 출토 〈석조불상편 7·8〉(Fig. 7·8)에서 보이는 선정인은 부처의 명상과 관계된 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작인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부터 나타나며, 고려시대에 제작된 〈통영 안정사 금동여래좌상〉, 〈개심사 금동여래좌상〉 등에서 통견의 착의를 한 선정인 불상을 볼 수 있다. 〈통영 안정사 금동여래좌상〉은 바닥면에 ‘사십일혜위등광불(四十一惠威燈光佛)’로 표기되어있는 53불 중 41번째 명호로 정확한 존명은 알 수 없지만, 미륵의 다른 이름23이므로 미륵불로 추정된다. 그런데, 고려 말에 제작된 선정인 불상은 두 손의 손끝을 사선으로 겹치고 있는 형식으로 두 손을 나란히 포갠 형식의 회암사지 석조불상과는 다르며, 관음보살상에서도 이러한 수인을 볼 수 있으므로 명확한 존명을 단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들 불상 편의 출토지가 나한전지와 승당지 근처이고, 수인 형태를 고려할 때 참선하는 나한을 형상화한 나한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편 9〉(Fig. 9)에서 보이는 동그란 보주를 올린 수인을 한 존상은 약사여래, 미륵불, 치성광여래가 있다. 약사여래의 형상은 『약사여래염송의궤』에서 형상을 묘사하고 있지만, 밀교경전인 『백보구초(白寶口抄),24 십충행법기(十种行法紀)』에 언급한 ‘약사유리광여래의 몸은 금색이며 결가부좌를 했고 왼손은 약호를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머리 위에 원광을 갖추고 있다’고 한 설명이 여말선초에 나타나는 형식과 일치한다.25 이러한 형식은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1346년)이나 일본 대마도 원통사(円通寺) 소장 〈금동약사여래좌상〉같이 왼손에 약합(藥盒)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한 고려시대의 약사여래좌상과 매우 유사하다.
조선 전기에 조성된 석조약사여래좌상은 〈거제 외포리 약사여래좌상〉처럼 보통 오른손은 항마인을 하고 왼손에 보주를 올린 형식이고,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몸)편 6〉과 같이 두 손을 모으고 보주를 올린 약사여래상은 〈서울 흥천사 석조약사여래좌상〉(1829년) 처럼 조선 후기에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제작된 〈고양 상운사 석조약사여래좌상〉(1497년)26이나 〈서울 호압사 석조약사여래좌상〉에서 두 손을 모으고 보주를 올린 형식이 나타나므로 이러한 형식의 약사여래상이 조선 전기부터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두 손을 앞으로 모아서 보주나 연봉오리를 들고 있는 수인을 미륵불의 용화수로 보기도 한다. 조선 전기에 의빈 권씨(懿嬪 權氏, 1384~?)의 원당인 보령 금강암에 제작된 미륵불인 〈보령 금강암 석불좌상〉(1412년)은 「영암비구창금강암비명(玲嵒比丘創金剛庵碑銘)」에서 태종의 후궁인 궁주 권씨[의빈 권씨]를 위해 아버지 권홍(權弘)과 딸 정혜옹주(貞惠翁主)가 시주발원하여, ‘무학대사 문인인 영암 왕상인(王上人)이 질 좋은 청석(靑石)을 찾아 미륵상을 조성’했다고 한 왕실 발원 불상이다.27 〈보령 금강암 석불좌상〉은 이중착의법을 한 통견의를 입고, 목은 짧아서 삼도가 간략하며 어깨는 좁고 양손은 배로 모아 왼손은 아래 오른손은 위로 용화를 받쳐 들고 있는 수인을 하고 있다. 지물 형태는 연봉오리처럼 보이지만 비편에서 미륵으로 언급되어 있으므로 미륵의 지물인 용화수로 해석된다.28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 〈서울 봉천동 마애미륵불좌상〉은 왼쪽으로 몸을 약간 튼 채 통견의를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연봉오리를 지물로 들고 앉아있다. 마애불 오른쪽에 있는 “미륵존불숭정삼년경오사월일 대시주 박산회 양주(彌勒尊佛 崇禎三年庚午四月日 大施主 朴山會兩主)”라는 명문으로 인조 8년(1630)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현재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미륵불은 두 손을 모으고 용화수로 보이는 연봉오리를 지물로 들고 있다. 따라서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보주를 든 석조불상은 약사여래상이 타당하다.
이처럼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편 7·8·9〉의 존상은 나한상, 약사여래상으로 판단되며, 기타 석조불상은 그 존명을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조선 전기에 조성된 석조불상과는 어떠한 형식의 연관성이 있을까? 조선 전기의 석조불상은 ① 보령 금강암 석불좌상(1412년), ② 당진 운정리 석불입상(1428년), ③ 예산 장신리 마애불상(1465년), ④ 진도 금골산 마애불상(1469~1471년), 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1471년), ⑥ 천안 장산리 석불입상(1476년), ⑦ 안양 망해암 석조여래입상(1479년), ⑧ 공주 일락산 마애지장보살입상(1465~1487년), ⑨ 서울 약사사 석불입상 (1490년), ⑩ 서울 상운사 석불좌상(1497년) 등이 확인되었다.29 이 중에서 〈보령 금강암 석불좌상〉, 〈당진 운정리 석불입상〉과 같이 외부에 노출된 석조불상은 비를 막기 위해 천개를 머리에 받치고 있는 형식이 많다. 〈예산 장신리 마애불상〉은 얕은 음각으로 표현된 마애불로 머리에 나발과 육계, 중간계주가 명확하지만 정상계주의 모습은 마모로 잘 보이지 않으며, 선정인을 하고 있다. 이처럼 정상계주 및 선정인, 법의의 착의는 조선 전반기 석조불상에서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지만, 회암사지 석조불상에서 보이는 양식 특징과는 차이가 있다.
결국,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에서 나타나는 형식은 조선 왕실에서 발원·시주한 조각에서 확인되는 특징과 연관성이 크다. 이러한 성격은 작가를 알 수 없지만 많은 왕실 지원 불사가 있었던 사찰의 조각에 같은 장인, 혹은 그 유파가 참여하여 비슷한 시대양식을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양주 회암사지 석조대좌〉(Fig. 10)는 연화문이 장식된 상대와 하대가 연결된 형식으로 이 시기의 대좌에서 많이 나타난다. 앙·복련 연화대좌를 갖춘 불상으로는 금강산 향로봉에서 출토된 〈금동아미타삼존불좌상〉(1429년, Fig. 14), 금강산 은정골 출토의 〈금동아미타삼존불좌상〉(1451년), 〈원각사탑 부조불상〉(1467년), 순천 매곡동 삼층석탑 출토 〈금동아미타삼존불좌상〉(1468년), 남양주 수종사팔각오층석탑 1층 탑신석 안에서 발견된 〈불보살상〉(1493년) 등이 있다. 연판 형식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앙련과 복련이 붙어 있는 이중연판대좌형식으로 15세기 조각에서 세트로 구성된 예가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형식은 15세기 이후 불상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므로 양주 회암사지 보광전 연못 주변에서 수습된 〈석조대좌〉30의 제작 시기를 15세기까지로 잡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회암사지에서 함께 출토된 〈석조불상〉 편은 투박하고 정상계주를 한 상호에서 새로운 형식을 보이면서도 두터운 통견의로 보이는 착의법은 전통적인 형식에 가깝다. 이러한 회암사지 출토 석불 조각형식은 티베트계 명양식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반영과 고려의 전통 양식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31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를 바탕으로 16세기까지 지속되는 중국의 불교 중흥정책을 고려할 수 있다. 명 목종(穆宗, 1567~1572 재위)의 비이자 명 신종(神宗, 1563~1620)의 모후인 자성태후(慈聖太后, 1546~1614)가 불교에 신심이 깊었기 때문에 융경제(隆慶帝)와 만력제(萬曆帝)의 통치기에는 중국 전역에서 사찰 건축을 비롯한 불교진흥정책이 활발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숭불풍조(崇佛風潮)가 황실 중심의 불교미술 발전을 가져왔고, 당시 유행하던 조각 양식도 사신의 교류 및 기타 교섭 관계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한 양식의 이해 및 수용은 당시 조선 사신들의 『사행록』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요녕지역의 백탑사(白塔寺)와 같은 사찰관람 등에서 공감대를 형성했을 가능성과 티베트계 조각양식이 주로 출토되거나 소장된 요녕성(遼寧省)의 유물 성격을 통해서 확인된다.32 이러한 조선 전반기의 사회정치적 구조에서 양주 회암사지 출토 석조불상은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불교 조각 특징을 반영한 양식이 확인되는 의미있는 작품들이다.

Ⅲ. 양주 회암사지 조각 양식과 가치

1. 양주 회암사 석조불상과 원·명 조각 양식 비교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특징 중에서 높은 육계 위의 정상계주가 주목된다. 정상계주의 등장은 조선 초 조각 양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장 차별화된 요소로 새로운 조각 양식이다. 조선 전반기의 불좌상에 나타나는 정상계주와 중앙계주의 표현은 원·명대 조각과 비교되는 요소가 많다. 조선 전기의 조각은 원대의 〈석가여래좌상〉(1336년)이나 명 선덕 원년 〈석가여래좌상〉(1426년, 북경 고궁박물원), 명 경태 원년 〈석가여래좌상〉(1450년, Fig. 15) 등에서 보이는 원·명대 조각 형식과 유사하다.
이러한 양식은 중국에서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발전한 한전불교(漢傳佛敎) 양식과 구별하여 장전불교(藏傳佛敎) 양식으로 분류되는 티베트의 불교 조각 양식을 반영한 것이다. 정상계주의 초기 형식도 티베트 자치구에 속해있는 10~13세기 조각에서 연원을 볼 수 있다. 상해박물관에 소장된 대리국(大理國) 성명(盛明) 2년(1163)에 제작된 〈대일여래좌상〉(Fig. 16)은 현재 중국 내륙에 있는 정상계주를 갖춘 기년작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은 정상계주의 표현 외에도 편단우견, 왼쪽 옷깃의 반전 옷 주름, 항마촉지인 등이 명 영락기를 비롯한 조선 전반기 불상형식과 매우 비슷한 형태적 요소가 많다.33
이 불상이 조성된 대리국은 중국 남쪽 지역 교통의 중요한 요충지로 송(宋)과 동남아시아의 티베트 문화가 모이는 입지 특성으로 다른 지역 문화가 융합된 조형 특징이 발전하였다.34 특히, 토번이 멸망한 후 분권국가였던 남조·대리국 시절에 조성된 대리의 숭성사(崇聖寺) 천수탑(千尋塔)에서 출토된 운남성 박물관 소장의 〈금동불좌상〉 등에도 둥근 얼굴형에 반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상계주의 표현이 나타난다. 따라서, 티베트불교가 발전하던 지역을 중심으로 늦어도 12세기경에는 정상계주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35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미술은 명 영종(英宗, 재위 1435~49, 1457~64), 무종(武宗, 재위 1505~21)시기에 친티베트 불교 정책을 쓰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무종은 스스로 대경법왕(大慶法王)이라 칭하며 북경에 사찰을 건립하고 토번 사람을 주지를 세울 만큼 불교를 신봉했는데, 그가 신봉하던 불교는 그들이 장전불교로 부르는 티베트불교였다.36 중국 내륙에서 티베트불교가 발전한 시기는 원대부터이다. 원대 궁정 물품 제작 기록인 『원대화소기(元代畵塑記)』에서 ‘대덕 9년(1305) 11월 4일에 네팔 승려이자 공예가인 아니가(阿尼哥)가 금동아미타불상 5구와 천수천안관음보살을 비롯한 보살상과 연화좌를 황후에게 봉헌했다’라는 내용37과 명대 어용감(御用監)의 불상제작을 기록한 『작중지(酌中志)』 권16-17의 ‘서번불상(西番佛像)을 티베트에서 공양하여 궁중 안의 영화전(英華殿)에 봉안했다’38라고 전한 기록 등에서 티베트계 양식이 원·명대에 황실을 중심으로 티베트계 조각이 수용되어 발전되는 과정이 확인된다.
티베트계 조각 양식이 반영되어 중국 내륙에서 조성된 가장 빠른 작품은 항주 비래봉(飛來峰)의 조각이다. 중국을 통일한 원나라는 남송(南宋)의 수도였던 항주지역의 한족을 융합하기 위해 불교를 발전시켰고, 그 대표적인 성과가 비래봉 석각이다. 항주 비래봉에서 원대에 조성된 조각은 1282~1292년에 제작된 것으로 13세기 티베트계 원 조각의 기준 양식이다. 또, 강남지역에서 가장 시기가 내려오는 티베트계 삼세불 <천주 벽소암(碧霄岩) 삼세불좌상〉(1292년, Fig. 17)은 원대 천주로감림관(泉州路监临官)이었던 당오씨(唐吾氏=서하인) 장군 아사(阿沙)가 청원산에 올라서 청량산의 기세에 감탄하여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오씨는 몽고족이 서하인을 불렀던 다른 명칭이다. 전형적인 티베트계 양식을 보여주는 이들 원대의 불상 머리 부분은 회암사 출토 석조불상과 매우 비슷하지만, 얇은 옷주름 형식은 회암사지 석조불상 착의법과 다른 형식이다.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두꺼운 착의법은 중국의 전통불교 착의법에 가까운 명대 조각과 친연성이 크다. 티베트 불교미술 양식으로 제작된 원 〈지원(至元) 2년명 석가여래좌상〉(1336년, 북경 고궁박물관 소장)의 얇은 밀착형 편단우견의 착의법은 원 〈지정 24년명 약사여래좌상〉(1364년, 중국 수도박물관 소장)에서 보듯이 한전불교 조각의 전통적인 착의를 반영하여 점차 두꺼워지다가 명대 이르러 완전히 두꺼운 착의로 정착하고 있다.
특히, 두꺼운 착의를 한 불상 조각은 명 영락·선덕(1403~1435) 연간의 조각에서 형식화되고, 중국 전통 조각 수법이 확대되고 티베트-명의 불교 조각형식이 서로 혼합39하면서 점차 중국 불상에서 네팔·티베트의 조각 특징이 약화한다. 명 영락·선덕 연간의 불상은 ‘영선궁정조상(永宣宮廷造像)’ 또는 ‘영선조상(永宣造像)’이라고 불리며 차별화되는 티베트 조각 양식을 반영한 조각 양식으로 명 영락기(1403~1424년) 이후 티베트 불교의 중흥기를 맞이하면서 정착되었다. 명 〈경태(景泰) 원년 약사여래좌상〉(1450년, 중국 수도박물관 소장)은 금 도금된 삼세불상 중 하나로 내륙의 승려 후원으로 조성되었다.40 〈경태 원년 약사여래좌상〉은 명 영락·선덕 연간의 불상 양식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이후 중국 티베트계 사찰에서 조성되는 불상 양식의 전형적인 예로 평가된다.41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영락·선덕 시기 불상 양식의 모본은 티베트[=서장]에서 유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선덕 연간에 건립된 티베트의 대표적 사찰인 백거사(白居寺)의 백거탑 역시 네팔 작가인 아니가(阿尼哥)에 의해 명 선덕 2년(1427)부터 10년에 걸쳐 완공된 탑인데, 안에는 13세기 말에서 15세기에 이르는 108개의 전당에 불상, 벽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42
이러한 조형성의 확산은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탄력을 받았다. 영락 8년(1410)에 완성된 영락판 『감주이(甘珠爾)』 경변상도와 선덕 6년(1431) 간행된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諸佛菩薩妙相名號經咒)』, 고궁박물원에 소장된 『명내부금장호심경(明內府金藏护心經)』 변상도 등 이 시기의 많은 경변상도를 통해 부처의 형상에 대한 기준을 볼 수 있다.43 이 변상도에서 보이는 도상형식은 티베트 조각과 완벽히 부합되지 않지만, 네팔과 티베트식이 결합한 ‘범상(梵像)’으로 지칭되는 공통 요소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에 네모형 얼굴과 건장한 어깨선을 한 네모진 형태의 전통적인 조각이 융합된 특징이 명 영락·선덕기 조각에서 공존한다. 이러한 형식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의 〈건칠석가여래좌상〉(1411년 추정, Fig. 29에서 보이며, 북경 수도박물관 소장의 〈석가여래좌상〉(1478년, Fig. 18) 등에서 티베트 조각 양식이 중국 전통 조각 양식으로 변화된 형식을 볼 수 있다. 이후, 명 가정기(嘉靖期, 1522~1566)에 도교를 숭상하게 되면서 티베트계 양식은 점차 한전양식으로 변화가 더욱 진행되었다.

2.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의의

조선 전반기에 집중된 양주 회암사의 중창 불사는 명나라 영락·선덕 연간에 황실을 중심으로 유행하는 티베트 불교양식이 발전하는 시기에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회암사의 불교 미술이 왕실의 후원으로 이 시기의 미술 양식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크다. 이와 같은 티베트계 양식과의 연계성은 조선 전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사료에서 명의 사신과 불교가 관련된 내용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성의 확산은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탄력을 받았을 것이다.
『세종실록』의 세종 13년(1431) 9월 2일에서 ‘장정안(張定安)이 가지고 온 『반야심경(般若心經)』·『금강경(金剛經)』·『아미타경(阿彌陁經)』과 『관음경(觀音經)』 세 권을 회암사(檜巖寺)에 보내어 간직하게 하였다’44라고 한다. 당시 판각된 경전에는 사경 변상이 일반적으로 포함되어있으므로 명나라 사신 장정안이 가져온 경전의 사경을 통해 도상을 파악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당대의 존상 특징은 명대 홍무·영락·선덕 연간에 발행된 〈대수구다라니신주경변상〉(1426년, Fig. 19)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이 경변상에 나타나는 머리형, 착의를 비롯하여 길상좌 아래로 펼쳐진 옷 주름선 등이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 7·8〉과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도상 형식은 ‘태종 17년(1417)에 북경에 다녀온 사신 노귀산 등이 명 황제가 하사품으로 가져온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諸佛如來菩薩名稱歌曲)」 (1417년, Fig. 20) 일백 본을 각종 사사(寺社), 각사(各司), 여러 경대부(卿大夫)의 집까지 여러 곳에 반포하였다’45는 기록과 세종 1년(1419) 12월 10~11일 실록에서 ‘명칭가곡을 외우는 소리가 천하에 퍼져 있고, 공화(空花)와 불상(佛像)의 상서를 그린 그림이 파다하여,……’와 ‘명칭가곡과 같은 책은 존숭해야 하며, 승려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라’46라는 글 등을 통해서 중국의 경변상도 형식이 조선에서 확산하고, 불상의 조형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들어온 여러 종류의 〈경변상도〉(Fig. 19·20)는 정상계주와 대의 착의법 등에서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과의 공통 요소가 확인되므로 조선 전반기 조각과 명 15세기 조각 양식이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흐름에서 같은 궤도를 걷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양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석조불상은 비록 편에 불과하고, 적은 수량이지만 정상계주, 왼쪽 어깨의 Ω형 대의 옷주름 등은 15세기 명나라 조각 및 경변상도뿐만 아니라 조선 왕실 발원 불상에서 나타나는 양식과 같음을 볼 수 있다.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복장기」에 의하면, 세조 4년(1458)에 효령대군, 의빈 권씨, 명빈 김씨, 광덕대부 연창위가 발원하여 아미타불·관세음보살·지장보살 삼존상을 조성하여 정암산 법천사(法泉寺)에 봉안했던 것이다.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세조 12년(1466)에 조각승 성료(性了)와 혜정(惠正)이 팔공산 미륵사에서 미타삼존상[아미타·관음·지장]으로 조성하여, 성종 1년(1470)에 환성사로 옮겨 첫 점안을 한 뒤 두세 차례 점안하여 성종 5년(1474)에 봉안을 마무리하였다. 「조성기」와 「중수기」(1716년)에 의하면, 세조 장헌대왕, 예종대왕, 효령대군 등의 왕실 사람들과 많은 승속이 시주하여 제작한 왕실 발원 불상이다.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82년)은 「복장기」를 통해 정수사에서 아미타·관음·지장보살 삼존상으로 조성되어 영조 5년(1729)에 팔공산 운수암에서 수리하여 칠곡 천주사로 옮겨진 불상임을 알 수 있지만, 발원자에 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억불정책 시기에 왕실 발원 불사의 조각 양식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왕실에서 관여한 불상일 가능성이 크다.
왕실 사람들의 복을 기원하거나, 제사의 기능을 담당한 사찰을 원찰이라고 한다. 원찰에는 원당이 설치되어 있는데 한 개의 사찰에 여러 개의 원당이 설치되기도 한다.47 조선시대의 원당사찰은 봉안 유형에 따라 위패, 어진, 어필, 태실 원당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어진 봉안 사찰은 태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묘향산 보현사, 강화 전등사, 금강산 유점사 등이 있으며, 태실 봉안 원당은 곤양 서봉사, 성주 선석사, 예천 명봉사, 영천 은해사, 예천 용문사, 보은 법주사 등이 있다. 그리고 왕과 왕비의 기신제(忌晨祭)를 지낸 속초 신흥사도 있다. 그러나 세조가 자신의 원당사찰로 1464년에 건봉사를 지명한 경우처럼 살아서 추복 사찰 기능을 한 사찰도 원당이라 할 수 있다.
양주 회암사도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왕실의 원찰[원당]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언급되고 있다. 효령대군이 회암사를 1434~1436년에 중창하여 자신의 원찰로 삼았고, 의숙 공주부부가 회암사 중창하여 원당으로 삼고, 수륙재를 설치한 일을 정현조가 아뢰는 기사48를 통해서 양주 회암사가 원당이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명종실록』 권9 명종 4년 9월 8일자에, ‘……정인사(正因寺)는 덕종 대왕의 능침사이고 회암사는 태종대왕의 능침사인데, 유생들이 난입하여 소란을 피워서야 되겠는가? 봉은(奉恩)·봉선(奉先) 두 사찰의 예와 같이 방(榜)을 걸어 금하라’라고 태종대왕의 능침사찰로 언급되어 있다. 역시, 『명종실록』 권21 명종 11년 9월 3일에, ‘회암사는 유명하고 큰 사찰이어서 모든 능의 기신재를 비록 여기에서 설행하지만, ……’라고 하여, 회암사가 모든 능의 기신재를 설행하는 조선 초 대표적인 왕실 원당사찰 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회암사는 15세기 대표적인 조선 왕실 원당사찰로서 든든한 왕실 후원세력을 바탕으로 당시에 유행하는 불교 미술의 형식을 가장 빨리 도입 발전시킬 수 있었던 지위에 있었다. 회암사의 조각 양식은 이러한 회암사의 위상을 반증하는 의미를 지닌다.
양주 회암사지의 석조불상이 지닌 형식 특징인 머리 부분의 정상계주, 갸름한 얼굴형, 콧방울과 입의 사실적인 묘사, 착의에서 두꺼운 대의와 왼쪽 어깨의 Ω자형 대의 옷 주름, 연꽃잎이 마주한 대좌형식 등에서 조선 전기 왕실 발원 조각 양식의 15세기 기년작과 많은 유사점을 가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은 15세기에 조성된 왕실 발원 불상에서 나타나는 가장 유행하는 새로운 형식을 반영한 조각으로 원·명대 왕실에서 성행한 티베트계 조각 양식의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15세기 조선 기년작과 친연성이 크다. 그러므로,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의 조성시기는 효령대군이 세종 17년(1435) 3월에 회암사와 흥천사 중수에 재물을 보시하고, 세종 21년(1439) 4월에 회암사 중수에 관여한 일이 언급된 『세종실록』49의 기록과 양주 회암사지 발굴에서 출토된 효령대군과 관련된 명문 기와의 연대인 1434~1436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의 최신 양식을 반영하여 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즉, 양주 회암사는 조선 전반기의 대표적인 조선 왕실 원찰로서 다양한 왕실 지원 불사를 통해 15세기 전반의 최신 조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Ⅳ. 맺음말

어느 시대나 문화재 대상 및 기념물을 바라보는 사회정치적 관점은 기념물의 보존과 대상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화된 유산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대상 유산 연구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기념물 보존을 위한 가치 설정과 문화유산의 중요성이 주목받는다. 특히 종교유산은 종교가 유산을 창조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는 공동체 사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자신의 나라 안에서 그들만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와의 차별화를 통해 인류 공통의 유산가치를 통해서 문화유산의 보존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양주 회암사지는 조선 왕실 원찰로서 조선의 신앙기반인 불교와 정치철학인 유교 문화가 어우러진 사찰로 15세기 전후 동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불교와 유교의 충돌과 조화를 담고 있다. 지금은 훼손된 고고학적 유적지인 양주 회암사지는 조선시대 왕실 사람들의 영적인 정체성의 원리를 담아 종교적 감수성을 고스란히 전달하고자 구체화한 조선 왕실 원찰의 특별한 사례이다. 그런데,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은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파손된 형태로서 유산가치를 증명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현황은 회암사지 출토유물뿐만 아니라 모든 유형문화재가 안고 있는 문제로서 유산가치에서 본질이 훼손될 수 있는 대상이다.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은 완전한 형상(形像)이 없고, 부분 형태만을 추정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머리 부분의 정상계주 홈, 착의법에서 왼쪽의 Ω형 옷주름, 앞깃의 접힘 형태 등의 뚜렷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이 조선 왕실에서 시주·발원한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58년),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466년) 등에서 볼 수 있는 15세기 조각 양식과 같은 요소를 보여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양식은 당시 명 영락·선덕 연간(1402~1435)에 황실을 중심으로 티베트 조각양식이 유행하는 시대 양식을 수용한 최신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은 효령대군의 회암사 중창 불사와 관련된 명문기와 시기인 1434~36년을 전후한 15세기 전반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통해서 당시 조선 전기 조각 양식이 문화교류를 통해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공통가치를 교환하는 흐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양주 회암사지 석조불상은 15세기 왕실 발원 불사에서 제작된 조각의 정형성을 형태 요소에서 15세기 동아시아 조각양식의 특징을 반영한다. 이것은 양주 회암사지가 지니 조선 왕실 원찰이라는 성격을 증명하고 있는 요소로 세계유산(World Heritage)에서 시대를 아우르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증명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인 진정성(Authenticity)을 충족하는 가치가 크다.

Notes

1) 『고려사(高麗史)』 권133, 「열전신우(列傳辛禑)」, “中外士女無貴賤爭帛布·果餠施與猶恐不及寺門塡咽”.

2) 이색, 앞의 책(한국고전종합DB; ITKC_BT_0020A_0440_010_0070_2008_010_XML).

3) 『태종실록』 1년 10월 22일, 2월 3일, 3년 11월 17일.

4) 〈청동금탁〉 명문: 洪武二十七年甲戌六」功德主嘉靖大夫判內侍府事李得芬」施主貞信宅主許妙淨」咸陽郡夫人朴妙湛」寧順宅主朴氏」(?)城翁主尹氏」檢校門下侍中李崇」王師妙嚴尊者」朝鮮國王」王顯妃」世子, 경기도박물관·경기문화재단, 2009, 『회암사』 Ⅲ, pp. 440-441 재인용.

5) 효령대군에 의한 회암사 불사 기록은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 4월 23일 경신 3번째 기사 등이 있다.

6) 『성종실록』 240권, 성종 21년(1490) 5월 20일(http://sillok.history.go.kr/id/kia_12105020_006).

7) …恭捐帑寶爰命良工釋迦彌勒藥師彌陀皆補處俱各金畵五十彩畵五十幷四百幀莊嚴畢脩…諸道人使之禮敬於朝夕常以華封之祝堯爲山家務…, 박은경, 「조선 전기의 기념비적인 四方四佛畵」, 『미술사논단』 8(한국미술연구소, 1998) 재인용.

8) 『명종실록』 32권, 명종 21년 4월 20일(http://sillok.history.go.kr/id/kma_12104020_003).

9) 『선조실록』 64권, 선조 28년 6월 4일(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6004_002).

10) 경기문화재연구원, 앞의 보고서(2009), p. 467.

11) 경기문화재연구원, 『회암사지』 Ⅱ(2003) 참조.

12) 엄기표, 「양주 회암사지출토 범자진언명 기와의 특징과 의의」, 『문화재』 50(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pp. 19-20.

13) 경기문화재연구원, 『회암사』 Ⅵ(2017), p. 150.

14) 경기문화재연구원, 『회암사』 Ⅱ(2003), p. 364.

15) 『대승백복장엄상경(大乘百福莊嚴相經)』 권1, …一者首分圓滿二者髮際嚴好三者髮色靑紺四者髮香芬馥五者髮甚柔軟六者髮不紛亂七者髮不稀穊八者髮常增長九者髮本波委十者髮端螺旋十一者髮狀花輪十二者髮如德字……一者頂有肉髻 圓好高勝…(K0245 v11, p. 522a20).

16) 『경률이상(經律異相)』(K. 1050) 1권 58쪽 5줄(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17)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 1권(K. 0321 v11, p. 1277a01).

18)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권7, 「여의보주품(如意寶珠品)」 (K.127, https://abc.dongguk.edu/ebti/c2/sub1.jsp).

19) 강인구, 「서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복장유물」, 『미술자료』 18(국립중앙박물관, 1975), pp. 13-14 참조.

20) 엄기표, 「남원 승연사 마애 범자진언의 조성 시기와 의의」, 『선문화연구』 18(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5), pp. 405-406.

21)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으로 출토된 제다라니(諸陁羅尼) 1권 1첩(수진본)은 1375년(우왕 원년) 조성된 목판을 후대 찍은 불교기록유산이다. 「2020년도 문화재청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제4차 회의록」, p. 162.

22) 정은우·유대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의 특징과 제작시기」, 『미술사논단』 45(한국미술연구소, 2017), p. 69.

23) 정은우, 「여말선초의 금동불감 연구-순천 송광사 高峰國師 불감을 중심으로」, 『불교미술사학』 15(불교미술사학회, 2013), pp. 112-113.

24) 『대정신수대장경도상(大正新脩大蔵經圖像)』, 권7, 「백보구초(白寶口鈔)」, 1215, 일본의 료손이 편찬한 밀교 경전으로 각 존상의 도상법에 관해 자세하게 적혀 있다.

25) 中國社會科學出版社, 『佛教小百科 23—佛教的持物』(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3), p. 42.

26) 이 상은 두 손을 보수한 흔적이 있으므로 원래부터 약사여래였는가를 단정할 수 없지만, 사찰에서 약사여래로 신앙해 왔다.

27) 『영암비구창금강암비명(玲嵒比丘創金剛庵碑)』, “朝鮮大祖康獻王王師無學門人玲嵒玉上人觳犖确…得靑石… 彌勒像之曰然則金剛之意明矣轤轆之義…永樂十年壬辰季冬上澣宮主權氏願堂主判漢城權弘翁主李氏”; 문명대, 「조선시대 불교조각사론」, 『삼매와 평담미』(예경, 2003), pp. 169-170.

28) 손태호, 「보령 금강암 석불좌상연구」, 『불교학연구』 53(불교학연구회, 2017), pp. 56-58.

29) 정성권, 「조선 전기 석조불상 연구-편년과 양식적 특징을 중심으로」, 『불교미술사학』 24(불교미술사학회, 2017), p. 175.

30) 경기도박물관, 『회암사』(열린아트, 2003), p. 81. (도 69 참조).

31) 김경미, 「조선 전반기 티베트계 명양식 불교조각의 영향연구」(고려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14.), p. 104.

32) 김경미, 「조선 불교조각과 접경지 요동의 종교유산과의 교류 고찰」, 『민족문화연구』 83(민족문화연구원, 2019.) 참조.

33) 김경미, 앞의 논문(2019), p. 365.

34) 李玉珉, 『佛陀形影』(國立故宮博物院, 2011), p. 196(Fig. 12 참조).

35) 김경미, 앞의 논문(2014), pp. 96-97.

36) 山口瑞鳳·矢崎正見, 이호근·안영길 옮김, 『티베트불교사』(民族社, 1990), p. 75.

37) 段成式·黃休復 편, 『元代畵塑記』(人民美術出版社, 1964), p. 29.

38) 『酌中志』 卷十六 「內府衙門識掌」-卷十七 「大內規制紀略」 (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603329).

39) 陽伯達, 「秀麗多彩的元明靑彫塑」, 『中國美術全集』 6-彫塑編(人民美術出版社, 1988), pp. 5-6; 송은석, 「통도사성보박물관 소장 금은제아미타삼존불좌상 연구」, 『불교미술사학』 3(불교미술사학회, 2005), p. 112 재인용.

40) 대좌 앞부분 상판에 새겨진 ‘大明景泰元年歲次庚午圓授廣善戒壇傳法宗師龍泉寺住持道觀施金鍍’낙관에 의하면 龍泉寺 住持 道觀의 시주로 1450년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41) 黃春和, 『漢傳佛像時代與風格』(文物出版社, 2010), p. 228.

42) 桑吉扎西 王丹炜, 「白居寺建筑与壁画艺术」, 『法音』 5(中國佛敎協會, 2009) (http://www.chinabuddhism.com.cn/ys/ys/2013-06-24/3131.html).

43) 周心慧, 『中國古代佛敎版畫集』 二(學苑出版社出, 2001) 참조.

44)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 9월 2일, 張定安出所齎 《般若心經》, 《金剛經》, 《阿彌陁經》, 《觀音經》三卷, 藏于檜巖寺(http://sillok.history.go.kr/id/kda_11309002_005).

45)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12월 20일(http://sillok.history.go.kr/id/kca_11712020_001).

46)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10일, 4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12010_004); 12월 11일 6번째 기사(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12011_006).

47) 박병선, 「조선후기 원당 연구」(영남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2), p. 2.

48) 『연산군일기』 44권, 연산 8년(1502) 6월 2일 기사.

49) 『세종실록』 권67, 세종 17년(1435) 3월, 『세종실록』 권64, 세종 21년(1439) 4월 기사. 효령대군이 회암사 중수에 기여한 일은 『세종실록』 권67, 세종 17년(1435) 3월 기록에 회암사와 흥천사 중수에 재물을 보시, 『세종실록』 권64, 세종 21년(1439) 4월 기록에 회암사 중수에 관여한 일 등이 확인된다.

Fig. 1.
<석조불상(머리)편 1> Sŏkchobultu,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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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석조불상(머리)편 2> Sŏkchobultu,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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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석조불상편 3> Sŏkchobulsangp'yŏn,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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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석조불상(몸)편 4>, Sŏkchobulsangp'yŏn,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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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석조불상(몸)편 5> Sŏkchobulsangp'yŏn,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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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석조불상(몸) 편 6>, Sŏkchobulsangp'yŏn,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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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석조불상편 7>, Sŏkchobulsangp'yŏn,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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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석조불상편 8>, Sŏkchobulsangp'yŏn,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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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석조불상편 9>, Sŏkchobulsangp'yŏn,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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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석조대좌>, Sŏkchodaejwa,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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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불정심인 수막새>, Pulchŏngshimin sumaksae,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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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아미타삼존다라니>, Amit'asamjon tarani, Korea 1301CE. Mun'gyŏng Taesŭng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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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 좌상>, Yŏng ju hŭksŏksa mokchoamit'ayŏraejwasang, Chosŏn 1458CE. Yŏngju hŭksŏ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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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금동아미타삼존불좌상>, Kŭmdongamit'asamjonbulchwasang, Chosŏn 1429CE. P'yŏngyangyŏksa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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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석가여래좌상>, Sŏkkayŏraejwasang, China. Myŏng 1450CE. Beijing Capit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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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대일여래좌상>, Taeiryŏraejwasang, China. Taeri 1163CE. Shanghai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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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천주 벽소암 삼세불좌상>, Ch'ŏnju pyŏksoam samsebulchwasang, China. Yuan 1292CE. Ch'ŏnju Pyŏkso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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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석가여래좌상>,Sŏkkayŏraejwasang, China. Myŏng 1478CE. Beijing Capit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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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대수구다라니신주경> 변상, Illustration of the Mahāpratisarādhāraṇīsūtra, China. Myŏng 1426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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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제불세존여래보살존자 명칭가곡> 변상, Illustration of Songs for the Names of Various Buddhas and Bodhisattvas, China. Myŏng 1417CE. National Library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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