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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1; 2021 > Article
倭館窯에서 제작된 ‘立鶴文(타치즈루) 양식’ 茶碗의 성립 과정*

Abstract

임란 이후 현재 부산에 설치된 왜관 안에 있었던 왜관요를 대표하는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을 중심으로 제작 연대, 다완의 형태와 문양도상의 성립 배경에 대하여 도자자료 뿐 아니라 역사적 문헌사료와 회화자료까지 활용가능한 자료들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검토함으로써 왜관요의 성격에 대해 규명해보고자 하였다.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초량왜관 선창지 출토 유물이나 왜관요 출토편, 문헌에 나타난 근거들을 종합해볼 때, 두모포왜관에서 초량왜관 시기까지 이어지는 긴 기간에 걸쳐 제작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통형잔과 제기의 굽 모양을 본뜬 할굽이 조합된 형태는 왜관요가 성립되었을 당시에 장군가에서 선호되고 있었던 고려 말기의 통형잔과 조선 전기 연질백자 제기의 형태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문양에 대해서는 고려 후기의 상감청자에 나타난 간략한 새 문양과 기존에 일본에서 오랫동안 장수의 상징으로 선호되어 왔던 학의 이미지, 남송의 화가 牧谿의 회화 속에서 차용된 학의 도상,그리고 거기에서 모사화 등으로 다시 파생된 狩野派의 학의 도상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같이 '왜관요 입학문 양식'은 고려청자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왜관요가 생겼을 당시 일본 장군가에서 선호되고 권위의 상징이었던 고려 후기 통형잔, 상감청자의 학문, 조선 연질백자 제기, 장수의 상징으로 기존에 선호되던 학의 이미지, 그리고 牧谿에서 파생된 학의 이미지 등 여러 이미지가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본 속에서 형성된 고려, 조선 도자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조선의 지방 사기장이 제작한 것이므로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들은 조선 도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은 한국 도자는 물론 일본 도자의 양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가 엇갈리는 주변성(周邊性)을 지니는 것이다.

Abstract

The Japan House (Korean: waegwan; Japanese: wakan) in the port city of Pusan, was a Japanese outpost during the Chosŏn dynasty. In the period 1639 to 1718, the Sō clan of Tsushima, commissioned made-to-order ceramics here, reflecting Japanese requirements, and a long-standing Japanese enthusiasm for kōrai chawan (“Korean tea bowls”), as demanded by the tea authorities in Japan. The focus of this paper is a group of tea bowls with decoration of standing cranes, the most representative type of made-to-order tea bowls produced at the Japan House kilns. Historical records and recent excavations of kiln sites have revealed that the type of tea bowl with standing crane design enjoyed popularity and continued to be produced until the closure of the Japan House kilns. A bowl of the deep, cylindrical shape adheres closely to early Koryŏ prototypes, while its notched foot resembles those of soft porcelain bowls made for ritual use. The subject of its design motif can be traced back to the ubiquitous cranes of Koryŏ inlaid celadon. The ethereal crane, traditionally associated with longevity, was popular in East Asian pictorial culture. The standing crane design on this type of tea bowl displays a combination of influences from the crane painting by the Southern Song painter Muqi (act. ca. 1240-75) and its reinterpretation by the Kano painters. This paper seeks to def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Japan House kiln products by examining its best-known type of tea bowl with decoration of standing cranes. It elucidates how the tea bowl with standing crane design is clearly not an imitation of early Koryŏ celadon but shows a range of decorative styles that reflect the tastes of the Edo-period daimyo tea world. While adapted to the tastes of Japanese consumers, the tea bowl with standing crane design produced at the Japan House kilns display influences from regional kilns in Chosŏn Korea. In this light, the type of tea bowl with decoration of standing cranes manifests a hybrid state of shifting boundaries and demarcations where Japanese and Korean influences coexisted and encountered with difference.

Ⅰ. 머리말

근현대 미술에서 금기시되는 모방이라는 행위는 과거의 동양미술에 있어서는 理想的 행위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중국 남조의 화가인 謝赫이 언급한 ‘畵之六法’ 중 ‘傳模移寫’라는 말이 전하는 바와 같이 전근대의 모든 시기를 통틀어 과거 미술품의 모방은 창작에 있어 반드시 행해져야할 행위로 간주되었다.
일본 미술의 여러 분야 가운데에서도 ‘傳模移寫’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도자에서는 중국 도자나 한국 도자의 모방이 자주 일어났고 이러한 모방 제작을 ‘寫し(우츠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작 도자사 연구에 있어 ‘寫し’는 유물의 진위 문제와 결부되는 부분이 있어 한동안 학술적 연구 주제로 다루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최근 들어 일본 도자의 ‘寫し’에 관한 논고들이 몇 편 발표되기 시작하였다.1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조선시대 동래부, 현재 부산에 설치된 왜관(倭館)과 그 왜관 내에 있었던 가마(倭館窯)에서 제작되었던 주문 茶器의 존재에 주목하고자 한다. 일본 사절들이 머무는 시설은 고려시대부터 있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제포,염포, 부산포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對馬(쓰시마) 사람들이 왜관의 재설치를 요구하였다. 1598년에 絶影島(현 부산광역시 영도)에 임시 왜관이 열린 후 1607년에 豆毛浦(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에 공식적으로 왜관이 설치되었다. 그 후 왜관은 1671년에 草梁(현 부산광역시 중구 용두산 일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왜관요의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늦어도 1639년 8월 16일부터 두모포왜관 밖에서 다기들을 번조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이 합당하다.2 그 후, 1644년 혹은 1663년까지는 동래부가 ‘왜관 내’로 생각하던 위치에 가마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3
현재까지 왜관요에 대한 연구사를 살펴보면 역사학적 문헌사료나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연구가 주로 이루어져서 전세품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이를 바탕으로 한 미술사적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4 왜관요 다기들은 고려청자나 분청사기의 ‘寫し’라는 맥락으로 이해되어 양식적 연구가 부진하였다. 사료를 중심으로 왜관요 연구를 이끈 泉澄一도 왜관요를 ‘조선과 對馬(쓰시마)의 타협의 산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5 그러나 필자는 왜관요다기들은 단순한 고려, 조선 도자의 ‘寫し’가 아니라 새로운 양식의 창조였다는 관점에서 본 논문에 임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막연하게 언급되어온 왜관요의 성립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왜관요 다기 중에서도 상징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立鶴(타치즈루) 양식’의 성립 과정과 도상에 대하여 논의함으로써 왜관요의 위상을 새롭게 조망하는 하나의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Ⅱ. 유물 개요와 편년

1. 유물 개요

일본에서 왜관요에서 제작된 도자기를 흔히 ‘御本(고혼)’이라고 한다. ‘御本’이라는 용어는 왜관요 다기들의 색상이나 모양 등을 적은 주문서류나 그림도안에 따라 제작된 데서 유래한 말로 ‘높은 사람이 의뢰한 주문서’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御本’을 제작한 가마는 한일 양국 모두 일반적으로 ‘釜山窯(부산요)’라고 한다. 그러나 학술적으로 생각할 때 ‘御本’이라는 말은 정의가 애매하고 이제 부산지역에서 여러 요장이 발굴된 사실을 감안하면 부산요라는 용어도 타당하지 않다.6 서 있는 학(立鶴)문양은 왜관요의 상징적 문양으로 인식되어 18세기에 들어서 일본 국내의 여러 가마에서 ‘寫し’가 제작되기도 했다. 명칭에 대해서는 앞으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본고에서는 이러한 주문방식과 서 있는 학의 도상이 들어있는 다완을 ‘왜관요 입학문 양식’로 칭하도록 하겠다.
현재까지 전시나 출판물 등을 통해 공개된 ‘왜관요 입학문 양식’을 지니는 다기는 총 6점으로 그중 다완이 5점, 나머지 1점은 水指(미즈사시)로 다회에서 사용되는 물을 담고 뜨는 그릇이다. 아울러 『大正名器鑑』이라는 1920년대에 알려진 명품 다기를 수록한 책에 2점이 확인된다(Table 1).7 또한 1945년까지 일본 골동시장 판매목록인 소위 賣立目錄(우리타테 목록)에는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38점인데 水指 7점, 술잔 1점, 나머지는 모두 다완이다.8 이와 같이 다완기종이 다수의 자료확보가 가능한 점에서 검토 가능한 자료로 판단되었다.
이상으로 살펴본 일람을 종합해보면, 기종은 대부분이 다완이며, 水指도 간혹 보인다. 근대 이후에 알려진 자료로는 46점이 확인되는데, 賣立目錄에 등재된 233점에 달하는 井戶茶碗(이도다완)에 비교하면 그 양이 훨씬 적어 한정된 주문에 따라 제작된 것임에 틀림없다. 水指는 그 크기를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다완의 경우 크기는 대동소이하다. 기형은 구연이 살짝 외반된 통형이며 굽은 3군데에 홈을 넣은 특징적인 割高臺(와리코다이)이다. 동체의 양면에는 서 있는 자세의 입학문이 흑백상감되었다. 학의 모습은 공통적으로 부리를 위로 치켜들고 양다리를 앞으로 내미는 듯한 자세로 표현된다. 학의 얼굴과 꼬리는 흑상감, 몸체는 백상감으로 나타내었고, 동체와 날개는 구갑문과 같은 網狀으로 표현하였다. 기본적으로 전면에 시유하는데, 일부 유약을 입히지 않은 부분도 있어 마치 원경 산수와 같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소성받침의 흔적은 없고 완의 내면에 대체로 모래가 부착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2. 사료에 보이는 ‘왜관요 입학문 양식’

‘왜관요 입학문 양식’을 지니는 다완은 江戶 시대(1603-1868년), 茶匠으로 유명했던 大名(다이묘) 小堀遠州(고보리 엔슈, 1579-1647)와 역시 大名이자 茶를 애호했던 細川忠興 (호소카와 타다오키·三齊, 1563-1646)를 위해 디자인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德川家光 (토쿠가와 이에미츠, 1623-51년 재위)가 밑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일화를 기록하고 있는 사료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었는데 관련 사료들을 재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하였다.
· 『逾好日記(유코우닛키)』는 姬路藩(히메지, 현 효고현) 번주인 酒井忠以(사카이 타다자네, 宗雅, 1756-1790)의 일기이다.11 天明7년(1787) 정월 3일에 다회에 「茶碗 御本立鶴」라는 기록이 있다. 酒井忠以는 다도를 즐겼던 다이묘로 유명하다.12 이 기록이 ‘御本立鶴’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첫 기록으로 18세기 후반에는 이 명칭이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酒井忠以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 『名物目利聞書(메이부츠메키키쇼)』는 小堀遠州가 선호했던 다완에 대한 구전내용들을 기록한 사료로 알려져 있으나 저술된 시기 등은 불명확하다.13 다만 이 사료의 내용 중에 細川忠興의 칠순 연회 때에 받은 御本立鶴 다완에 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遠州가 선호하던 왜관요 다완 중 立鶴文이 있는 통형(완)으로 3군데에 홈을 판 굽에 앞뒤에 학문이 있었고 당시 희소한 물건으로 높은 가격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사료의 내용에서 이다완을 누가 細川忠興에게 물려준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 『銘物集(메이부츠슈)』는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맨 뒷장에 1910년이라는 기록이 있을 뿐 역시 연대나 필자는 알 수 없다.14 그런데 이 사료의 내용 중에는 앞서 살펴본 문헌들에 덧붙여 江戶시대 3대 장군인 德川家光으로부터 받았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며, 다완의 모습을 묘사한 삽화가 제시되어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앞 문헌과 비슷하다.15
우선 『名物目利聞書』 등에 기록된 細川忠興이 칠순을 맞이하여 德川家光의 초대를 받았다는 다회는 『三齊公傳書』 寬永15年(1638) 9월 7일의 기록이 있어 실제로 열렸던 다회임을 알 수 있다.16 이 다회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細川忠興를 위해 열린 것인데 오직 忠興 자신만 단독으로 초대를 받았다고 하며, 그 밖에 小堀遠州는 물론 다완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또한 이 사료의 1638년 이후의 모든 다회 기록에서도 御本立鶴茶碗에 관한 기록은 없다. 그리고 野村美術館 소장의 <御本立鶴茶碗>(Table 1-2)과 같이 전해진 상자에 붙어 있던 貼紙에는 小堀遠州가 정월 삼일간 大福茶를 마셨다는 내용이 적혀있으나 연대는 불확실하다.17 한편 小堀遠州의 茶會記에는 御本立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18
이 밖에 德川家光이 立鶴의 밑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江戶시대 사료에서는 그러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마 이 이야기가 근대기에 淺川伯敎(아사카와 노리타카)의 『釜山窯と對州窯』에서 德川家光이 밑그림을 그렸다고 언급한 내용이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9
이상과 같이 왜관요가 운영되었던 당시의 다기 주문 기록에도 小堀遠州, 細川忠興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 당시 기록으로는 증명하기 어렵다. 그런데 『逾好日記』의 기록으로 늦어도 18세기 후반에는 ‘御本立鶴’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된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유물의 연대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유물로 추정하는 제작 연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왜관요 입학문 양식’을 지니는 다완은 小堀遠州, 德川家光, 그리고 細川忠興의 관계 속에서 성립되었다고 막연하게 믿어져 왔는데, 그 생산시기는 대개 두모포왜관 시기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639년 두모포왜관이 설치되고 안팎으로 일본인 주문 다기를 제작하기 위한 가마가 생겨나기 이전에 경남 양산 법기리 가마에서는 이미 일본인의 주문 다기를 번조하기 시작하였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조사에서는 이 가마터에서 ‘왜관요 입학문 양식’편이 발견되지 않았다.20 양산 법기리 가마터에서 번조된 일본인 주문 다기는 굵은 모래가 섞인 내화토받침을 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기는 이와 같은 받침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시유법 또한 주목되는 부분으로, 전세품 중에서 Table 1-4의 다완을 제외하고 모두 전면에 시유되었다. 두모포왜관에서 제작된 다기들의 실체에 대하여서는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 많지 않으나, 1624년경부터 1678년까지 對馬 島主가 상주하던 일본 金石城(카네이시죠) 유적에서 다수의 다기들이 출토되어 참고할 만하다.21 金石城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굽바닥까지 전면 시유되거나 굽 주변에 유약을 입힌 유물이 많이 확인되는 한편, 초량왜관 가마터에서 수습된 파편은 대부분 굽 주변을 제외하고 시유되어 있다.22 초량왜관 가마터 수습품 중에서도 전면시유된 청자편이 확인되나 태토빚음받침으로 제작방식에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전후의 유적출토품의 시유방식이나 받침법의 비교를 통해 ‘왜관요 입학문 양식 ‘이 두모포왜관 시기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초량왜관 선창지 주변 유적에서는 조사의 의해 층위별로 유물이 확인된 바 있다.23 이 유적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Ⅷ층과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해당되는 Ⅶ층에서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기’와 유사한 도편이 출토되었다(Fig. 1). 아쉽게도 교란층이지만 학의 일부로도 추정되는 흑상감 문양편이 출토되었다(Fig. 2). 이는 늦어도 초량왜관 가마가 시작된 1671년, 17세기 후반에는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기’가 제작되었음을 실질적으로 뒷받침 하는 출토자료이다.
「自元禄十四年至宝永弐年御誂物控」(1701-1705)는 어용화가나 大名들을 비롯한 일본인 주문자의 다완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주문서첩으로, 여기에서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한편, 왜관요를 관리하던 對馬藩은 대마도 내에서도 왜관요를 모방하는 다기를 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가마가 1726년에 開窯된 志賀燒(시카야키)이다.24 이 가마조사의 수습편 중에는 왜관요 다완들보다 간략화된 立鶴文 茶碗편을 확인할 수 있다.25 「自元禄十四年至宝永弐年御誂物控」와 志賀燒의 양상을 참고로, 18세기 전반에는 입학문이 이미 흔하게 이용되었던 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근거들을 종합해보면 ‘왜관요 입학문 양식’은 시유법이나 제작 기법에서는 두모포왜관 시기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발굴 성과로는 늦어도 17세기 후반에는 나타나며 그 후에도 계속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왜관요 입학문 양식’이 제작되고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학의 문양에도 있다(Table 2). 문양은 학의 자세에 따라 몸이 >자형을 이루는 형식(1형)과 다리를 똑바로 하고 서 있는 형식(2형)으로 나누어진다. 세부 표현에 있어도 1형은 새의 날개를 고려청자의 학문과 같이 비교적 세밀하게 시문하였으나 2형은 그물 모양으로 변화하면서 1형에 시문된 학 머리 위의 백상감 점문이 없어진다. 특히 志賀燒에는 2형만이 나타나므로 학문을 시문하는 데 있어서 다리의 표현이 변화해 갔을 가능성이 높다. 2형의 다완과 志賀燒의 시유법은 굽 주변의 태토를 노출시키는 것으로 초량왜관 가마터의 수집 편과 상통된다. 따라서 ‘왜관요 입학문 양식’의 연대는 굽부분을 시유하지 않는 방식이나 소성받침법, 생산유적의 출토유물과 비교해 볼 때 두모포왜관 안팎에서 다기 번조가 시작되면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문양의 형식 변천을 관찰할 수 있을 정도의 긴 기간 즉, 초량왜관 시대에도 계속해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다음으로 성립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 ‘왜관요 입학문 양식’의 성립배경에 관한 고찰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다수의 정황에 비정하여 ‘왜관요 입학문 양식’은 두모포왜관 시기에 이미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고 후대에 왜관요의 상징이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왜관요 성립 계기와도 관련성이 깊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관하여 泉澄一은 왜관요가 성립된 계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酒井忠勝(사카이 타다카츠, 1587-1662)이나 柳生宗矩(야규 무네노리, 1571-1646), 그리고 에도성 茶坊主(성에서 차에 종사하던 승려)와 같은 德川家光의 주변 인물들과의 관련을 보는 것이 小堀遠州이나 德川家光가 밑그림을 그렸는지 여부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26 필자도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바이며, 德川장군이나 주변 중신들이 왜관요 혹은 ‘왜관요 입학문 양식’의 성립에 있어서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 장에서는 德川家光 재위 시기에 일어난 宗義成과의 관계, 왜관요 주문, 그리고 德川家光의 다회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 제시하면서, ‘왜관요 입학문 양식’의 성립 배경에 관해 고찰하도록 하겠다.

1. 역사적 배경 및 형태의 성립 과정

1) 柳川一件(야나가와 잇켄)과 왜관요 성립

본 장에서는 泉澄一이 소개한 왜관요 다기 기록을 정리한 후 그의 저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문헌과 對馬藩 번주인 宗義成(소우 요시나리, 1604-1657)이나 장군과 주변 중신 관련 사항을 더하여 같이 정리해보았다. 그 결과, 일본사 연구에 있어 논쟁이 많은 소위 ‘柳川一件’을 계기로 ‘新渡茶碗’ 혹은 ‘今燒茶碗’이라는 기록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柳川一件’ 이란, 임란전쟁 이후 화해 과정에서 對馬藩이 조선과 원활하게 화평을 맺고자 하여 일본 국서를 수차례 위조하여 조선으로 보냈던 사건으로, 이 사실이 德川幕府에게 알려지자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對馬藩의 家老(가로, 중신)였던 柳川調興 (야나가와 시제오키)이 宗義成으로부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여 막부에게 국서 위조를 밀고하였다고 보고 있다.27 1627년 10월, 肥前(히젠)영토 2000석을 두고 柳川調興과 宗義成이 대립하기 시작하였고 위서 문제가 터지자 1633년 5월 13일 老中들이 宗義成를 尋問하였다. 이듬해에도 조사는 이어져 柳生宗矩, 酒井忠勝 외에 土井利勝(도이 도시카츠), 阿部忠秋(아베 타다아키), 그리고 松平信綱(마쓰다이라 노부쓰나)등이 柳川調興과 義成를 심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1월 8일에는 보다 자세한 조사를 위해 土井利勝 家臣인 横田角左衛門(요코타 가쿠자에몬)과 松平信綱 신하 篠田九郎左衛門(시노다 쿠로자에몬)이 對馬藩으로 파견되었다. 결국 막부, 즉 家光이 내린 결론은 柳川를 단죄하고 宗義成을 조선 무역의 중심으로 삼은 것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막부가 본격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기 시작한 1634년 1월 14일에 처음으로 宗義成를 통한 조선 다완의 주문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에 사료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무려 6번이나 다완 주문이 확인된다.28 이러한 다기들이 ‘新渡高麗茶碗’(새로 제작되어 일본으로 건너온 고려다완)이나 ‘今燒高麗茶碗’(지금 번조한 고려다완)으로 기재되어 있어 새로이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헌납 상대는 다름 아닌 ‘柳川一件’ 사건 해결에 힘을 쏟은 家老인 酒井忠勝, 柳生宗矩, 土井利勝, 阿部忠秋, 松平信綱과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이어서 아마도 宗義成이 德川家光 주변의 중신에게 다완을 헌납하고 자신의 입지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책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다도구를 바치면서 권력자와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는 관행은, ‘柳川一件’ 이전에도 있었던 일로 2대 장군 德川秀忠(도쿠가와 히데타다, 1605-1623년 재위) 시기부터 활발해진다. 秀忠는 소위 數寄屋御成(수키야오나리)이라고 하는 다도를 중심으로 한 정치활동과 이를 통해 권력 장악을 이룬 장군으로 유명하다.29 다회가 정치적 공식 행사의 하나가 되면서 肥前(히젠), 上野(아가노)는 조선 도자를 모방한 다기를 만들고 장군에게 헌상함으로써 우호적 관계를 도모하려 했다.30 宗義成의 경우도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柳川一件을 통해 이루어졌던 다기 헌납으로 오히려 장군 혹은 주변 중신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장군과 중신들의 다기 주문이 늘어났고 안정적으로 다기를 수급하기 위해 두모포왜관 안팎에 가마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宗義成에게 난처한 사건이었으나 조선에 대한 도자기 주문생산이라고 하는 영역에 의도치 않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왜관요는 이와 같은 성립 배경 때문에 ‘장군가의 기호에 맞는 다기’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2) 酒井家와 왜관요의 관계

여기서 泉澄一이 지적한 왜관요 성립에 영향을 미친 여러 인물들 가운데, 酒井忠勝과 왜관요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사료를 추가로 언급하고자 한다. 酒井忠勝은 주로 조선통신사 접대를 담당하였고 다도를 즐기고 좋은 다기를 소유하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31 또 德川家光이 수없이 酒井忠勝의 집을 방문하는 등 장군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와 관련하여 宗義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도 주목되는데, 家光에게 진상되는 조선다완, 또는 왜관요 다완은 오직 酒井忠勝을 경유하여야만 했다는 사실로 다른 누구보다 주목되는 인물이다. 구체적으로는 1637년 9월 29일, 1638년 11월 2일의 두 차례이다.32 1638년 12월 7일에 宗義成은 德川家光의 다회에 초청을 받았는데, 泉澄一은 宗義成이 家光의 다기 주문을 직접 받았던 기회가 있었다면 바로 이 다회라고 지적하면서 酒井忠勝이 家光 주문에 대해 宗義成에게 전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33 또한 이 주문이 동래부에도 전해진 것이 사료를 통해 확인된다.34
德川家光은 차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点前(테마에, 순서에 따라 차를 달이는 예법)은 그리 능숙하지 못했고 또 數寄屋御成의 횟수도 줄어들었다.35 泉澄一의 추측과 같이 오히려 다도를 즐기고 名器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酒井忠勝이야말로 다기 주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새로 『德川實紀』를 보면, 1639년 8월 26일 德川家光이 酒井忠勝의 저택에 방문하여, 忠勝이 주문한 도기의 제조과정, 혹은 완성된 주문 도기들을 훑어보았다는 기록이 있다.36 여기에 기록된 도기는 왜관요가 아니겠지만 과연 酒井忠勝이 다기의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앞장에서 살펴본 『逾好日記』를 쓴 酒井忠以는 酒井忠勝의 종가인 酒井雅樂守(사카이 우타노카미)와 酒井忠淸(사카이 타다키요)의 5대 후손이었다. 江戶시대에 수많은 다회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忠以가 쓴 다회기에서만 御本立鶴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37 酒井忠勝과 혈연관계에 있는 酒井忠以가 남긴 기록은 酒井忠勝이 ‘왜관요 입학문 양식’을 지니는 다완의 성립까지도 관여했을 가능성까지도 추측케 하나 앞으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여하튼, 酒井忠勝은 宗義成에게 장군가가 선호하는 다기에 대해 소상히 전해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장군가 기호에 맞는 다기’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3) 형태의 성립 과정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은 대부분 통형잔으로 동체에 물레흔을 크게 살렸고, 굽 3군데에 홈을 넣은 할굽이 있는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의 성립 배경을 문헌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泉澄一은 『邊例集要』에서 임진왜란이 종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11년부터 1634년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동래부에 대한 다완 주문이 기재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다완 주문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38 여기서 새로운 사료를 소개하면, 『御本丸御茶湯記』의 1623년 여러 다이묘들을 불러 다회를 베푼 일이 있었는데 1월 11일 御書院飾(고쇼인카자리, 즉 실내 장식)에 ‘藤袴(후지바카마), 심채발로 高麗四方鉢’이라는 기록이 있고39 1월 13일 宗義成가 초대받은 다회에서는 ‘심채발로 高麗四方鉢, 다완으로 ‘引木鞘(히키키노사야)’가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40 ‘藤袴’나 ‘引木鞘’는 현재도 德川美術館에 전해지는 것으로 고려 14세기 후반에 해당하는 청자 통형잔이 다완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Fig. 3). 이러한 고려 후기의 통형잔은 일본 다도의 대성자인 千利休(센리큐)가 높이 평가하였고 德川 장군가에서도 높은 선호도를 가지고 있었다. ‘高麗四方鉢’은 역시 현재 德川美術館에 소장되어 전해지는데 이것은 16세기 대의 경남 지방 연질백자 제기이다. 이상과 같이 통형잔과 백자 제기의 형태는 장군이 직접 다이묘들을 불러 개최한 다회를 통해 일종의 권위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肥前에서는 장군가에 바치는 헌물로서 일부러 할굽, 즉 제기 모양의 다기를 준비하였을 정도로 지방 다이묘들에게 권력의 이미지와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41
이러한 제기 다리 모양의 다기와 관련하여 또 다른 새로운 사료를 소개하겠다. 『二三代將軍御會記』에 기록된 1629년에 열린 德川家光의 다회에서는 ‘新渡高麗茶碗’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2 또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二代三代將軍御會記』와 거의 같은 내용이 기재된 慶應大學 소장 『御會記』에는 ‘割高臺 (와리코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제기와 같이 굽에 홈을 넣은 할굽 다완으로 이해된다. ‘割高臺’ 다완은 藤堂高虎(토우도 타카토라)가 바친 것도 있어 현재 일본 香雪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다(Fig. 4).43 이 사료에서는 德川家光이 ‘割高臺’ 다완을 여러 번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횟수는 12회 정도에 달한다. 그리고 앞서 제시했던 『三齊公傳書』에는 德川家光이 ‘高麗古織割高臺’ 라는 다완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4 이 또한 할굽 다완으로서 이것이 당시 장군가에서 선호되는 형태였음을 유추할 수 있으며, ‘割高臺’ 다완의 사용빈도 추이를 보면 전형적인 장군가의 다완으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이 통형잔 형태에 割高臺가 겸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왜관요가 설치되었을 당시 시대 배경상 장군이 선호했던 양식이었고, 격식이 높은 형태로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해석된다. 양산 법기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吳器茶碗 중에서도 할굽을 이룬 완이 있으나 왜관요의 다완은 주문자의 지위가 보다 높은 장군가의 기호가 반영되고 여러 가지 요소가 ‘혼합’되는 점이 다른 특징이라 하겠다.45

Ⅳ. 도상으로 보는 立鶴文의 성립 과정

1. 고려청자와의 비교 -六鶴圖를 중심으로

서 있는 학의 도상적 기원은 중국 唐代 화가 薛稷이 창시하고 五代 화가 黃筌이 발전시킨 소위 六鶴圖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육학도란 여섯 가지의 자세를 취한 학을 그린 畵題로 즉, 唳天(고개를 들고 부리를 벌려 하늘을 향해 우는 모습)(Fig. 5)·警露(목을 빼고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는 모습)·啄苔(고개를 밑으로 늘어뜨리고 부리로 땅을 쪼는 모습)·舞風(바람을 타고 날개를 퍼덕이면서 춤을 추는 모습)·疏翎(고개를 돌려 부리로 날개를 다듬는 모습)·顧歩(걸어가며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보는 모습)을 소재로 한 도상이다.46 이러한 육학도의 도상이 고려청자에도 시문되었던 점은 이미 연구된 바 있다.47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의 입학문 중 가장 흔한 1형은 唳天(고개를 들고 부리를 벌려 하늘에 향해 우는 모습)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필자는 상감청자에 나타난 六鶴圖의 편년을 시도한 바 있는데, 하한은 14세기 후반 경으로 이즈음에 고려청자에 있어서 六鶴圖 계열의 문양은 소멸되었다고 보았다.48 14세기 후반 상감청자에 나타나는 서 있는 자세의 새 도상은 이제 蒲柳水禽文의 맥락으로 시문되는 경우가 많고 반드시 학으로 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서 있는 모습이라든지 흑상감으로 부리를 표현하거나 눈과 같은 세부 표현이 생략된 점은 상통된다(Fig. 6).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에 나타나는 학문양의 경우 흑상감으로 표현된 얼굴, 양다리를 앞으로 내미는 자세, 발가락이 강조되는 점, 백상감으로 그물과 같이 표현된 몸통과 날개 등은 고려후기 청자와는 다른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 만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2. 일본 전세, 출토 고려 상감청자와의 비교

위에서 예로 들었던 고려후기 상감청자 가운데 나타난 입학문 중에는 ‘왜관요 입학문 양식’의 특징적인 학문과 유사한 예도 찾아볼 수 있어서, 일본인들이 고려 상감청자에 나타나는 입학문을 시각적 이미지로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일본출토 상감청자 자료와 전세품 청자 중에 학문이 상감된 자료를 검토해 보겠다.
일본에서 이루어지는 고고학 조사는 행정 발굴(구제 발굴)이 많아 조사지도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으나, 고려청자의 일본 내 출토는 항구유적을 제외하면, 京都(교토)나 鎌倉(가마쿠라)와 같은 중근세의 문화, 정치 중심지에 집중된다. 이것은 고려청자가 고급품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여러 출토 유물 중, 청자의 파편에 음각, 상감을 아울러 학문양이 시문된 예가 福岡(후쿠오카) 博多(하카타) 유적에서 1점,49 大坂(오사카)에서 1점,5 京都에서 1점, 鎌倉 유적에서 15점으로 모두 운학문이다.51 이러한 가운데 鎌倉小町 2丁目 402번지 9外지점에서는 소나무가 상감된 매병편이 출토되어 주목을 끈 바 있었다. 한성욱은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송하인물문매병>과 같은 도상이었을 가능성을 들어, 나무를 중심으로 서 있는 학의 도상으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근대 이전부터 일본에 전세되는 고려청자 중에는 일본 本間美術館(혼마미술관) 소장 <청자상감운학모란문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청자반양각쌍학문침> 등이 있는데 모두 운학, 혹은 쌍학도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일본에 전해지는 고려청자 가운데 학문양이 나타난 예는, 유적출토품과 전세품을 아울러서 대부분이 운학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육학도계열의 음각 혹은 상감청자는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으로 고려청자가 유입된 시기는 무역도자의 흐름상 14세기 후반의 사례가 가장 많았으므로 일본인들에게는 대체로 14세기 후반의 말기청자나 여말선초의 청자, 혹은 분청사기에 대한 인식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52 이러한 배경 속에 ‘왜관요 입학문 양식’에는 고려후기의 간략한 鳥文이 새겨진 상감청자의 시각적 이미지가 담겨져 있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모방을 넘어 독자성의 부분으로 보아야 할 점에 대하여 회화자료를 토대로 아래와 같이 분석해 보았다.

3. 일본 중근세에 나타나는 학의 상징성과 도상

일본에서 학은 장수의 상징으로, 특히 平安(헤이안)시대에는 공예품 등에 주로 장식되던 대표적 문양이었다. 거울이나 칠공예품에는 학이 소나무 가지를 물고 나는 모습의 松喰鶴(마츠쿠이즈루)문이 자주 등장하는데, 소나무와 길조를 나타내는 새의 이중 조합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鎌倉시대 13세기 이후의 蓬萊鏡(호우라이쿄우)에는 학이 주문양 모티브로 나타난다. 蓬萊鏡란 『源平盛衰記(겐페이세이스이키)』에 나타난 今樣 (이마요우, 헤이안시대에서 가마쿠라시대에 유행되었던 노래)를 묘사하였는데, ‘봉래산에는 千歳로 万歳 千秋가 쌓이고 소나무 가지에 학이 둥지를 틀고 바위 위에는 거북이 논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53 15세기에 들어가면 전각과 해를 추가하는 長生殿鏡으로도 같은 도상이 이어진다. 蓬萊鏡, 長生殿鏡에 시문된 문양은 마치 육학도 중 ‘舞風’과 같이 두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펴고 서로 마주보는 도상이다. 이외에도 날개를 펴는 학은 왜관요가 생기기 이전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칠기, 염직품 등 다양한 공예품에 장식되어 왔으며 오랫동안 장수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정착되어 있었다(Fig. 7).
일본에 전해지는 회화 가운데 한 마리의 학을 크게 확대하여 그린 그림으로는 대표적으로 교토 大德寺(다이토쿠지) 소장의 牧谿筆 <觀音猿鶴圖>가 유명하다. 이 그림은 足利 (아시카가) 3대 장군 義光(요시미쓰, 1358-1408)에서 8대 義政(요시마사, 1435-1490)로 전해졌으며, 장군가의 명물로 당시부터 유명하였다. 이어서 今川義元(이마가와 요시모토, 1519-1560)에게 전해졌다가 妙心寺(묘신지) 제35세 太原崇孚(타이겐 소후, 14956-1555)를 거쳐 大德寺로 들어온 것이다. 학은 고개를 들고 부리를 벌리고 위로 향해 우는 모습으로 唳天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날개의 깃털까지 한 올 한 올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걸어가듯이 양다리는 크게 벌어져 있는데 뒤쪽 다리는 발을 떼는 듯이 반쯤 올라간 묘사가 움직이는 순간을 포착한 듯한 효과를 더하고 있다. 남송시대 당시 그다지 평가가 높지 않았던 목계 그림이 일본에서는 다이묘와 같은 상류층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長谷川等伯(하세가와 토하쿠) 등을 비롯한 당시 명성이 높았던 일본 화가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들을 통해 지적되었다.54 특히 에도시대에 어용화가로 활약하였던 狩野派(카노파) 화가들이 목계를 많이 模寫하였고 유명한 <觀音猿鶴圖>의 모사본도 찾아볼 수 있다.55

4. 狩野派 및 德川家光의 그림과의 관계

‘왜관요 입학문 양식’은 唳天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한 마리만 확대시켜서 시문한 것으로 고려 상감청자보다 牧谿의 도상을 연상케 한다. 특히 흑상감으로 표현된 얼굴은 고려청자보다 牧谿의 도상에 더 가깝다. 이와 더불어 德川家光와 동일한 시대에 狩野派 화가이면서 후대에 이어지는 기틀을 만든 狩野探幽(카노 탄유)의 <竹鶴圖>는 주목할 만하다(Fig. 8). 여기에서 학의 모습은 <觀音猿鶴圖>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부리는 다물었고 3개의 발가락이 크게 벌어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부 묘사의 변화로 인해 狩野探幽의 학은 앞으로 걸어가는 약동적 모습보다 정숙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변용되었다.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기들은 장군이나 중신 주변에서 사용되었던 다기임을 생각하면 어용화가인 狩野派 회화와 관계성을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허리에서 몸을 크게 접는 듯한 ‘왜관요 입학문 양식’ 1형의 학은, 蓬萊鏡, 牧谿, 狩野派 도상의 틀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기서 家光이 다완의 밑그림을 그렸다는 일화를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장군으로 유명하고 신하에게 직접 그린 그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寛政重修諸家譜』에는 德川家光이 신하에게 그림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무려 26회나 나오는데 이는 다른 어떤 장군보다 많은 횟수이다.56 『古畵備考』(1850년)에는 장군가의 그림 창고에 德川家光이 그린 「木兎紙小立 唐人紙墨繪鶴小立紙」가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화풍은 狩野探幽와 유사하고 솜씨가 지극히 대단하다고 전한다.57 다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德川家光의 그림은 狩野探幽와 같이 세련되는 화풍이 아니라 오히려 민화를 연상케 하는 아주 소박한 그림들이다. 아쉽게도 「鶴小立紙」는 전해지지 않지만 「木兎紙小立」와 관련되는 그림을 보면 아주 간략하고 해학적 그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鶴小立紙」를 유추하는 데 있어서는 家光의 넷째 아들이자 5대 장군인 德川綱吉 (도쿠카와 츠나요시)이 1705년 이후에 그렸던 <松鶴圖>를 검토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생각된다(Fig. 9). 이 그림에서 학은 부리를 밑으로 내린 자세이지만 다리를 부자연스럽게 앞으로 하는 등, 전문화가가 아닌 사람이 그린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과 유사하여 家光의 학 그림을 예측하는 데 참고가 된다. 家光가 다완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하는 설은 이와 같이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였고 ‘왜관요 입학문 양식’의 독특한 도상적 특징이 이러한 토쿠가와 장군들의 독특한 화풍과 연결된다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관요 다완의 주문자들이 일본의 정치 권력자들이었음을 생각할 때 밑그림은 어떤 사람이 그려도 결국 당시 일본 기호가 반영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왜관요 입학문 양식’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는 왜관요에서 실제로 다완을 제작하였던 조선 사기장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관요에서 다완 제작에 종사하였던 조선 사기장들은 하동, 진주, 양산, 기장 등 경상남도 지방 사기장 혹은 옹장이다. 문양도 역시 이러한 사기장이 시문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일본의 여러 배경 속에 형성된 이미지들이 다시 조선에서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58 늦어도 15세기에 사라졌던 상감 기법이 1570년대에 나타난 일본인들의 주문으로 인하여 경남지방에서 제작된 彫三島(호리미시마) 등의 주문다완에서 재현되었고 이는 이 지역의 사기장 사이에는 상감 기법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59 이와 같이 경남지역에서 제작되었던 주문다완의 양식은 한국의 미술사적 맥락에서는 흐름을 벗어나는 이단적 존재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일본 도자와 한국 도자 양쪽에 속하는 주변성(周邊性, marginality)을 지니는 독자적 존재라고 하겠다.

Ⅴ. 맺음말

이상과 같이 본고에서는 왜관요를 대표하는 ‘왜관요 입학문 양식’을 지니는 다완의 제작 연대, 형태와 문양도상의 성립 배경에 대하여 도자자료뿐 아니라 역사적 문헌사료와 회화자료까지 활용 가능한 자료들을 통하여 광범위하게 검토함으로써 왜관요의 성격에 대해 규명해보고자 하였다.
먼저 ‘왜관요 입학문 양식’을 지니는 다기들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초량왜관 선창지 출토 유물이나 왜관요 출토편, 문헌에 나타난 근거들을 종합해볼 때, 두모포왜관에서 초량왜관 시기까지 긴 기간에 걸쳐 제작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통형잔과 제기의 굽 모양을 본뜬 할굽이 조합된 형태는 왜관요가 성립되었을 당시에 장군가에서 선호되고 있었던 고려말기의 통형잔과 조선 전기 연질백자 제기의 형태에서 파생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문양에 대해서는 고려 후기의 상감청자에 나타난 간략한 새 문양과 기존에 일본에서 오랫동안 장수의 상징으로 선호되어 왔던 학의 이미지, 남송의 화가 牧谿의 회화 속에서 차용된 학의 도상 그리고 거기에서 모사화 등으로 다시 파생된 狩野派의 학의 도상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와 같이 ‘왜관요 입학문 양식’은 고려청자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왜관요가 생겼을 당시 일본 장군가에서 선호되었던 고려 후기 통형잔, 상감청자의 학문, 조선 연질백자 제기, 장수의 상징으로 기존에 선호되던 학의 이미지, 그리고 牧谿에서 파생된 학의 이미지 등 여러 이미지가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관요 입학문 양식’ 다완은 단순한 ‘寫し (우츠시)’도 ‘타협의 산물’도 아닌 14세기 이후 일본의 정치 권력자를 중심으로 한 다도 문화 속에서 권위의 상징이 된 고려, 조선 도자의 모티브 등이 선택적으로 조합되어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일본 속에서 형성된 고려, 조선 도자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조선의 지방 사기장이 제작한 것이므로 ‘왜관요 입학문 양식’은 조선 도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왜관요 입학문 양식’을 지니는 다기는 한국 도자는 물론 일본 도자의 양쪽 경계를 넘나들며 서로가 엇갈리는 주변성(marginality)의 의미를 지닌다. 왜관은 조선과 일본 양국의 공적인 인적 교류가 일어나는 공간이었고 ‘왜관요 입학문 양식’은 그 공간의 성격을 잘 반영하는 양식이라 하겠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 도자사에 있어 영향이라는 말로 看過되는 주변성에 대한 의미를 찾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Notes

1) 여러 일본 도자기 중에서도 ‘우츠시(寫し) ’를 가장 많이 지향하고 제작한 가마는 바로 교토(京都)를 중심으로 생산된 京燒(쿄야키)이다. 근현대 미술의 관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이었던 ‘우츠시’를 쿄야키를 중심으로 미술사적으로 올바르게 평가하려는 시도로는 이하와 같은 연구가 있다.   尾野善裕, 「仁阿弥道八と建仁寺」, 『天才陶工 仁阿弥道八』(東京: サントリー美術館, 2014), p p. 197-201; 前崎信也, 「近代陶磁と特許制度―清風與平から見た 「写し」 をめぐる京焼の十九世紀―」, 『写しの力―創造と継承のマトリクス』(京都: 思文閣出版, 2013), pp. 73-109.

2) 泉澄一, 『釜山窯の史的研究』(大阪: 關西大學出版部, 1986).

3) 이 분야에 대한 연구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淺川伯教, 『釜山窯と對州窯』(東京: 彩壺會, 1930)에는 倭人求請謄錄 甲申(1644) 6월 12일의 기록에 땔감이나 가옥(假屋) 건축에 대한 요구가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이즈음에 왜관 안에 가마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泉澄一도 앞의 책에서 아사카와의 학설에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문헌만으로 왜관 안에 가마가 설치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필자는 『邊例集要』 癸卯(1663)에 ‘自館中’이라는 기록으로서 그 이전에 설치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4) 대표적 논저는 주3과 4를 포함하여 다음과 같다.  森村健一(모리무라 켄이치), 「粉青沙器から釜山窯系へ展開-15-17世紀における日本遺跡出土品と比較して-」, 『考古歷史學誌』 8(동아대학교, 1992), pp. 355-375; 茶道資料館, 『高麗茶碗 御本とその周辺』(京都: 1992); 赤沼多佳, 「注文の高麗茶碗」, 『高麗茶碗 御本とその周辺』(京都: 茶道資料館, 1992), pp. 90-105; 赤沼多佳, 『高麗茶碗』(東京: 至文堂, 2001); 片山まび·永井正浩, 「韓国·東亜大學校博物館所蔵の釜山窯出土片について」, 『東洋陶磁』 43(東京: 東洋陶磁學會, 2014), pp. 93-125; 鈴木裕子, 「近世都市江戸における文献史料からみた高麗茶碗の動向」, 『江戸遺跡研究』 5(東京: 江戸遺跡研究會, 2018), pp. 1-21; 三井記念美術館, 『茶の湯の名碗  高麗茶碗』(東京: 2019).  방병선, 「17-18세기 동아시아 도자교류사 연구」, 『美術史學硏究』 232(韓國美術史學會, 2001), pp. 131-155; 앞의 필자, 「조선 후기 도자의 대외교섭」, 『朝鮮 後半期 美術의 對外交涉』(예경, 2007), pp. 253-284; 片山まび, 「부산(釜山) 고관요(古館窯)에 대한 고찰(考察) -위치(位置), 기술(技術), 그리고 의의(意義)를 중심으로-」, 『東洋美術史學』 3(동양미술사학회, 2015), pp. 49-88; 카타야마 마비, 나가이 마사히로,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부산요 출토편에 대한 고찰」, 『博物館硏究論集』 22(부산박물관, 2016), pp. 125-183; 권상인, 「倭館窯에 관한 小考」, 『차문화·산업학』 32(국제차문화학회, 2016), pp. 1-28; 김현지, 「조선후기 釜山 新官窯 연구-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신관요 수습유물을 중심으로-」,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7; 허현정, 「조선후기 倭館窯의 運營」,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19; 앞의 필자, 「조선후기 왜관요의 자원 수급」, 『항도부산』 39(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20), pp. 205-239.

5) 泉澄一, 앞의 책(1986) 참조.

6) 부산지역의 강서구 녹산동 가마터(東亞細亞文化財硏究院, 『釜山 菉山洞 靑磁窯址』, 2012), 기장 상장안 및 하장안 가마터(釜山博物館, 『機張 上長安遺蹟』, 2011; 『機張 下長安遺蹟』, 2013) 등 정식 발굴조사에 따른 성과에 따라 왜관요라고 지칭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으로 생각된다. 그 밖에 『부산박물관 학술연구총서 제43집 釜山도자기 천년의 지혜를 담다』(부산박물관, 2014)에 부산요에 해당하는 여러 가마터가 소개되었다.

7) 高橋義雄編, 『大正名器鑑』 7(東京: 大正名器鑑編纂所, 1926). 현재 일본 다도구 연구에 있어 기준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연구 논문 등에 반드시 인용되고 다루어지는 책이다.

8) 賣立目錄은 일본 茶器 연구에 있어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문헌이다. 데이터베이스는 다음과 같이 공개되어 있다. 東京國立文化財硏究所編, 賣立目錄 검색 사이트.  https://www.tobunken.go.jp/archives/%E6%96%87%E5%8C%96%E8%B2%A1%E9%96%A2%E9%80%A3%E6%83%85%E5%A0%B1%E3%81%AE%E6%A4%9C%E7%B4%A2/%E5%A3%B2%E7%AB%8B%E7%9B%AE%E9%8C%B2%E4%BD%9C%E5%93%81%E6%83%85%E5%A0%B1/

9) 전근대의 일본인의 이름은 같은 한자라도 다양한 발음이 존재하였는데, 기록이 없는 한 정확한 발음표기를 알 수 없으므로 가장 일반적인 표기로 제시하였다. 즉 두 가지 이상의 발음이 있는 경우 일반적으로 높은 빈도로 사용되는 발음을 사용하였다.

10) 銘(메이)란, 명문이 쓰여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독자적 다기 감상법으로 그릇에 애칭을 붙인 것이다.

11) 粟田添星, 『酒井宗雅茶會記』 村松書館(東京: 1975); 谷晃, 『わかりやすい高麗茶碗のはなし』(京都: 淡交社, 2014), p. 137.

12) 茶道資料館, 『姫路藩主 酒井宗雅の茶と交遊』(京都, 2012).

13) 『名物目利聞書』此のうち立鶴筒形三ツ割高臺にて前後に鶴紋有之是ハ細川三斎老人への賀の御給はりし時参り候よし當時高料にて世に數少なし.

15) 『銘物集』 宗甫公好之立鶴の茶碗高麗御本手本也筒かたニて割高台前後に鶴之画有一説ニ細川三斎七十之賀ニ被召候時御茶ニ被下候尤江戸二の丸の御囲ニて此説座敷杖をはめし有之しとなり 즉, ‘엔슈가 선호한 입학다완은 왜관요에서 제작된 것이다. 통형이며 할굽이 있고 동체의 앞뒤에 학 그림이 있다. 일설에는 細川三斎가 칠순축하를 위해 德川家光의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받은 다완이라고 한다. 또한 기록하기를, 에도성 니노마루(二の丸, 제2곽)의 오카코이(御囲)에서 축연이 열렸는데, 그때 (산사이가)연회자리에서 지팡이를 짚었다(허용되었다는)’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16) 松山米太郎, 『茶道四祖伝書 二 三齊公傅書全』(東京: 秋豊園, 1933). 大福茶(다이후쿠차)란, 정월에 장수를 기원하며 마시는 차로, 다시마와 매실에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 마신다.

17) 상자의 뒷면에 붙어있는 첩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遠州好本歌御本焼 立鶴茶碗 遠州好本歌 御本焼 立鶴茶碗 遠州公正月三箇日以此 茶碗喫大福矣三井崇清 所持之效公之致有年 吉見喜斎請求焉亦准 偖之做而珍翫之也」.

18) 小堀宗慶編, 『小堀遠州茶會記集成』(東京: 主婦の友社, 1996).

19) 淺川伯教, 앞의 책(1930), p. 171 참조.

20)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남도 동부지역 가마터 지표조사 보고서』(2018); 서유리, 「경상남도 동부지역 가마터 조사 자기편의 양상과 의의」, 『경상남도 동부지역 가마터 지표조사 보고서』(국립중앙박물관, 2018), pp. 214-243.

21) 片山まび, 앞의 논문(2015); 尾上博一, 「金石城跡出土の高麗茶碗の整理と分類ー研究の糸口としてー」, 『西海考古』 8(長崎: 西海考古同人會, 2012), pp. 159-170; 오노우에 히로카즈, 「쓰시마 출토 조선시대 도자기」, 『계간 한국의 고고학』 8(주류성출판사, 2021), pp. 40-47.

22) 카타야마 마비·나가이 마사히로, 앞의 논문(2016) 참조.

23) 나동욱·카타야마 마비, 「초량왜관 추정 선창지 주변 출토 유물에 관한 조사 개요」, 『博物館硏究論集』 24(부산박물관, 2018), pp. 137-186.

24) 泉澄一, 『近世対馬陶窯史の研究』(大阪: 關西大學出版部, 1992).

25) 厳原町教育委員会, 『志賀窯跡ー対州窯採集遺物-』(對馬: 2004).

26) 泉澄一, 앞의 책(1986) 참조.

27) 최근 池內敏의 연구에서는, 柳川가 宗氏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배지의 장악을 둘러싼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池內敏 「 「柳川一件」の歴史的位置」, 『譯官使·通信使とその周辺』(名古屋: 「訳官使·通信使とその周辺硏究会」 2020, pp. 51-66).

28) 泉澄一, 앞의 책(1986)을 참고로 하고 원문을 재확인한 결과 1934년에 주문된 다기는 다음과 같다. 화살표 방향으로 헌납되었다.  2월 14일, 掛川藩主·青山幸成→ 幕府馬方. 高麗白茶碗 5개.  3월 28일, 宗義成→ 規伯玄方, 高麗茶碗 4개.  4월 16일, 宗義成→ 酒井忠勝, 新渡高麗茶碗 8→ 酒井忠勝, 5개 반납/石川千左衛門(酒井의 신하?), 高麗茶碗 2개 花房勘兵衛(御書院番), 고려다완 1개/以酊菴, 高麗茶碗 1개.  4월 17일, 宗義成→ 柳生宗矩,今燒高麗茶碗 8개.  8월 17일, 平松右衛門督 高麗新渡茶碗 1개/宗義成→ 龍慶(에도성 茶湯僧?) 高麗荒茶碗 2개.

29) 池ノ谷匡祐, 「数寄屋御成の展開と衰退」, 『史観』 173(東京: 早稲田大學史學会, 2015), pp. 1-27.

30) 大橋康二, 「肥前のやきものと高麗茶碗」, 『高麗茶碗―論考と資料』(京都: 河原書店, 2003), pp. 159-169; 尾崎直人, 『福岡市美術館叢書5 筑前高取焼の研究』(福岡: 海鳥社, 2013).

31) 新宿歴史博物館, 『酒井忠勝と小浜藩矢來屋敷』(東京: 2010).

32) 泉澄一, 앞의 책(1986)을 참고로 하고 확인 가능한 원문은 모두 다시 확인하였다. 1637년 9월: 宗義成→ 酒井忠勝→ 家光, 新渡高麗茶碗 1상자 20개. 1638년 11월 2일: 酒井忠勝→ 家光, 조선다완 1상자.

33) 泉澄一, 앞의 책(1986) 참조.

34) 『倭人求請目錄』庚辰五月十九條. 大君以下大小將官皆以求請, 他無繼用之路不得已送人燔造.

35) 渡邊良次郎, 「德川家光と茶道」, 『國學院雑誌』 89(東京: 國學院大學, 1988), pp. 314-326; 石井智恵美, 「 『茶會集』 の評釈 (二): 正保元年の山里茶會」, 『教育學部紀要』 53(埼玉: 文教大學教育學部, 2019), pp. 298-276.

36) 『德川實紀』(大猷院記), 寬永十六年八月二十六日 「又茶亭にて陶器製造のさま御覧にそなふ」.

37) 『逾好日記』이후에는 酒井忠以의 다기를 물려받은 松平不昧의 다회기 기록에 나타나는데 같은 유물로 해석된다.

38) 이하 사료는 禮曹에서 廟堂한테 보낸 狀啓인 점으로 미루어,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의 주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邊例集要』 卷之十二 求貿 亥三月,府使趙存性時,倭人持書契請陶鑄茶器甫兒·瓦器等物,使金海匠人陶給緣由,馳啓。 無回下 四月,牛黃羊口·鷹子·陶器求貿書契頭倭橘智種等,賫來呈納是白乎等,以同書契,捧上上送爲 白乎旀,各樣物種,報本道分定入給,而其中鷹子段,減數許貿計料事 啓。

39) 『御本丸御茶湯記』元和九年正月十一日   「御書院飾 一、 藤はかま せい高し…引而 高麗四方鉢」.

40) 『御本丸御茶湯記』元和九年正月十三日   「上様御上檀被成御座…宗對島守…引而 高麗四方鉢…一、 御茶碗 引木のさや」.

41) 大橋康二, 앞의 논문(2003) 참조.

42) 矢部誠一郎, 「資料:『二三代将軍御会記』」, 『茶の湯文化學』 8(東京: 茶の湯文化學会, 2001); 中路のぶ代, 「〈研究ノート〉茶の湯における中国青花(染付) 磁器受容の様相ー十七世紀前半を中心にー」 『東洋陶磁』 44(東京: 東洋陶磁學会, 2015), pp. 123-151.   고려다완이 사용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寬永4(1627)    2월27일 家光 다회:高麗割高臺(藤堂高虎 바침).    5월3일 家光 다회:三嶋曆(인화분청) 다완.    6월25일 家光 다회:高麗割高臺(藤堂高虎 바침).    9월13일~16일 秀忠 다회:高麗다완.   寬永5(1628)    1월18일 秀忠·家光 다회:高麗割高臺(土井利勝 바침).    1월19일~1월20일 家光 다회:高麗割高臺(土井利勝 바침).    2월13일 家光 다회:高麗割高臺.    3월13일 家光 다회:高麗 千鳥(井戸).    3월22일 秀忠 다회:三嶋香合.    4월3일 秀忠 다회:阿けの井戸.    6월11일 秀忠 다회:三嶋曆, 銅壺之間에 高麗茶碗.    10월6일 家光 다회:高麗割高臺.   寬永6(1629)    1월28일 家光 다회:茶碗 新渡高麗(割高臺).    2월13일 家光 다회:茶碗 新渡高麗(割高臺).    4월29일 家光 다회:茶碗 高麗割高臺.    5월23일 家光 다회:茶碗 高麗割高臺.

43) 中路のぶ代, 위의 논문(2015) 참조.

44) 松山米太郎, 앞의 책(1933) 참조. ‘古織’은 무장이자 茶匠으로 유명하던 古田織部(후루타 오리베: 1544-1615)로 그가 디자인했다고 전해진 ‘割高臺’ 다완은 현재 도쿄 畠山記念館(하타케야마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45) 국립중앙박물관, 앞의 책(2018) 참조.

46) 小川裕充, 「黄筌六鶴図壁画とその系譜∼上∼薛稷·黄筌·黄居采から庫倫旗1号遼墓仙鶴図壁画を経て徽宗·趙伯·牧谿·王振鵬,浙派·雪舟·狩野派まで」, 『国華』 1165(東京: 国華社, 1992), pp. 3-22; 黄筌六鶴圖壁畫とその系譜(下)薛稷·黄筌·黄居采から庫倫旗一號遼墓仙鶴圖壁畫を經て徽宗·趙·牧谿·王振鵬、 浙派·雪舟·狩野派まで」, 『国華』 109(4), (東京: 国華社, 2003), pp. 7-25.

47) 홍선표, 「전통 花鳥畫의 역사」, 『朝鮮時代繪畫史論』(文藝出版社, 1999), pp. 525-526; 김윤정, 「고려청자 문양의 詩·畵적 요소와 도상의 독창성」, 『美術史學 』 28(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4), pp. 351-382; 片山まび, 「象嵌青磁にあらわされた 「六鶴図」 について」, 『吉岡庸暢先生古希記念論集 陶磁器の社会史』(富山: 桂書房, 2005), pp. 29-40.

48) 片山まび, 앞의 논문(2005) 참조.

49) 森本朝子·片山まび, 「博多出土の高麗·朝鮮陶磁の分類試案ー生産地を視座として」, 『博多研究會誌』 8(博多研究會, 2000), p. 57, 圖32.

50) 市川創, 「天碧く雲たなびき-天満出土の高麗青磁-」, 『葦美』 113(大阪市文化財協会, 2004).

51) 한성욱, 「日本 鎌倉出土 高麗青瓷의 硏究」, 『東亞文化』 창간호(東亞文化硏究院, 1999), pp. 153-207. 이 논문에서 언급된 운학문은 小町1丁目120番地1地点에서 1점, 若宮大路周辺遺跡(小町1丁目扇ケ谷線路)에서 2점, 小町2丁目345番2地点 2점, 千葉地東遺跡 2점, 今小路西遺跡, 御成町625番3地点, 本覚寺, 東勝寺, 報國寺, 覺園寺. 米町遺跡, 和賀江島遺跡에서 각 1점씩이다.

52) 片山まび, 「對馬, 北部九州と高麗陶磁」, 『石堂論叢』 40(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1996), pp. 161-184.

53) 『源平盛衰記』 「蓬莱山には千歳ふる、 万歳千秋重れり、 松の枝には鶴巣食い、 巖の上には亀遊ぶ」.

54) 山下裕二, 「日本人にとっての牧谿」, 『牧谿』(東京: 五島美術館, 1996), pp. 102-108.

55) 五島美術館編, 「東京國立博物館蔵 狩野派牧谿作品模本一覧(東京大學東洋文化研究所東アジア美術研究室所蔵写真資料)」, 『牧谿』(東京: 五島美術館, 1996), pp. 130-139.

56) 『寛政重修諸家譜』에 기재된 德川家光 그림은 다음과 같다. (久能山東照宮博物館, 『德川歴代將軍の書画』 (1971), pp. 217-218).  松平清昌<清昌像>(권21), 松平忠實<岩に鶺鴒>(권27), 松平忠隆<竹に雀>(권31), 土岐頼久<翡翠>(권293),  坂洞菴<鶺鴒>(권299), 浅野寧子<枯木に小鳥>(권309), 安倍信成<野馬>(권355)·<枯木に木兔>(권355), 牧野信成<梟>(권367), 牧野親成<木に鴗>(권367), 杉浦政清<木兔>(권528), 岡本諸品<翡翠>(권593), 永井尚政<画(寛永八年)>(권619), 大久保忠昌<翡翠>(권705), 小河政勝<雀>(권887), 三宅康広<枯木に鳥>(권1004)·<若松(扇面)>(권1004), 神尾元珍<団扇>(권1044), 大岡直政<花鳥風月四季二幅>(권1064), 大草公継<松>(권1066), 大草高盛<猿>(권1067)·<梅>(권1067), 三枝守清<梅>(권1151), 服部順定<樹に鳥>(권1358), 数原宗和<神農>(권1359), 狩野尚信<画>(권1433).

57) 『古畵備考』 卷五 柳營武家二  「御畵府庫 御畵 木兎紙小立 唐人紙墨繪 鶴小立紙。探幽に似て極見事也。 」.

58) 왜관요로 파견된 지방 사기장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倭人求請謄錄』 己卯八月十六日條(1639) 河東, 晋州 匠人.  『倭人求請謄錄』 壬申十月七日條(1690) 梁山沙器匠, 機張沙器匠

59) 카타야마 마비, 「호리미시마 다완에 나타난 모방의 문제」, 『모방의 미학』(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13). pp. 142-151; 永井正浩, 「遺跡出土資料からみた彫三島」, 『河上邦彦先生古希記念献呈論文集』(2015) pp. 357-368.

Fig. 1.
<왜관요 다완편>, Sherds of a bowl excavated from a dock of the Japan House, level Ⅷ, Joseon Dynasty; late 17th - early 18th century, Bus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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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왜관요 다완편>, Sherd of a bowl excavated from a dock of the Japan House, Joseon Dynasty; late 17th - early 18th century, Bus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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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三島筒茶碗 銘 藤袴>, 德川美術館, Tea bowl named Fujibakama, Goryeo dynasty, H. 11.2cm, Tokugawa A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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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割高台茶碗 長束割高台>, 香雪美術館, Tea bowl named Natsuka-wari-kōdai, Joseon Dynasty; 16th century, H. 8.9cm, Kosetsu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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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靑磁象嵌六鶴文梅甁> (부분), 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Detail of maebyeong with decoration of six cranes, Goryeo Dynasty; 12th-13th century, Celadon with inlaid design; H. 29.2cm,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Reprinted from Tōyōtōji no tenkai (Osaka: Museum of Oriental Ceramics, 1999), 104, Fig.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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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靑磁象嵌蒲柳水禽文大楪> (부분), Detail of large dish with decoration of willows and waterfowl, excavated from the site of Dori-po, Muan in South Jeolla Province, Goryeo Dynasty; 14th century, Diam. 18.3cm,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Maritime Cultural Heritage. Reprinted from Muan Doripo Haejeo yujeok (Mokpo: National Maritime Museum, 2003), 90, Fig.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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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長生殿鏡> (부분), 東京國立博物館, Detail of mirror with design of Chōseiden (The Palace of Eternal Youth), Muromachi period (1392-1573); 16th century, Bronze; D. 11.1cm, Tokyo National Museum (Col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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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狩野探幽, <松鶴圖>, 東京藝術 大学, Kanō Tan'yū (1602-1674), Pine and Crane, Edo period (1615-1868), Hanging scroll, ink and light color on silk; 104.6×44.7cm, University Art Museum at the Tokyo University of the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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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德川綱吉筆, <松鶴圖>, 大津市歴史博物館, Tokugawa Tsunayoshi (1646-1709), Pine and crane, Hanging scroll, ink and light color on silk, Edo period (1615- 1868), Otsu City Museum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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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立鶴文이 시문된 倭館窯 茶器 일람표, List of tea vessels with decoration of standing crane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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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2.
立鶴의 변천표, Progression of stylistic change in standing crane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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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倭人求請目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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