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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1; 2021 > Article
회암사 보광전 주존 불상에 대한 종합적 추정*

Abstract

고려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가장 큰 사찰로 손꼽혔고 많은 왕실후원을 받았던 회암사(檜巖寺)의 중심불전은 보광전(普光殿)이었다. 본고는 여러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종합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 회암사 보광전에 모셔졌던 불상들의 크기, 갯수, 형태, 도상, 종교적 의미 등을 추정해 보았다. 회암사 중창의 내용을 기록한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의 내용, 최근 회암사지 발굴조사 결과, 동시기 중국과 한국 불전의 불상배치 방식을 토대로 분석할 때, 중창 당시 지어졌던 보광전에는 15척 크기의 불좌상 3구를 모셨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또한, 회암사를 중창한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의 사상과 활동, 그리고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회암사 보광전을 위해 시주했던 자수불들의 도상을 토대로 분석해 보았을 때, 보광전에 모셔졌던 삼불상은 ‘아미타-석가-약사’ 또는 ‘아미타-비로자나-약사’의 조합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중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으며, 이러한 삼불상은 회암사 북쪽 구역에 봉안된 또 다른 15척 불상들과 함께 사찰가람의 동서축을 따라서는 불법승 삼보(三寶)를, 남북축을 따라서는 삼신(三身)을 형상화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Abstract

The main Buddha hall of Hoeamsa 檜巖寺, the monastery that received heavy royal patronages from the late Koryŏ to the early Chosŏn period, was a building known as Pogwangjŏn 普光殿 built in the 14th century. Unfortunately, little is known about the Buddhist statues that had been enshrined in Pogwangjŏn because the monastery fell into ruins two centuries later. Based on comprehensive analyses of historical records and archaeological excavations of the monastery site, this paper attempts to infer the iconography, size, shape, number, and religious meanings of these lost Buddhist statues. The Records of the Restoration of Hoeamsa on Mount Ch’ŏnbo (Ch’ŏnbosan hoeamsa sujogi 天寶山檜巖寺修造記) and archaeological remains suggest that three Buddha status as tall as fifteen ch’ŏk 尺, which would be 4.39-4.6m in modern measurement were enshrined in the monastery’s main hall. Based on the teaching and life of the monk Naong Hyegŭn 懶翁惠勤 (1320-1376) who built the hall and the iconography of embroidered Buddhist hanging scrolls donated by the Queen Wŏn’gŏyng 元敬 (1365-1420), we can infer that these three statues comprised either Amitābha-Śākyamuni-Bhaiṣajyaguru Buddhas, or Amitābha-Vairocana-Bhaiṣajyaguru Buddhas, perhaps the latter in higher chances. These threes Buddhas, as this paper suggests, were designed to embody the trikāya 三身 and the triratna 三寶 along the north-south and the east-west axes of the monastery layout.

Ⅰ. 머리말

고려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가장 큰 사찰로 손꼽혔고 많은 왕실후원을 받았던 회암사(檜巖寺)의 중심불전은 보광전(普光殿)이었다. 14세기 중창 때 지어졌던 이 중심전각에는 예경을 위한 대형 불상들이 모셔졌을 것이다. 그러나 회암사는 16세기 중반 이후 폐사되어, 이 불상들 또한 화려했던 사찰의 건물들과 함께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현재로써는 이 불상들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남아 있는 상태이다. 본고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회암사 보광전의 주존 불상들의 개수, 크기, 형태, 도상, 종교적 의미에 대해 현재로써 가능한 추정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절대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의 영역일 것이다. 그러나 회암사 중창의 내용을 기록한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수록된 약간의 단서, 최근 수십 년간 진행된 회암사지 발굴의 성과, 회암사 중창의 주역이었던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의 사상과 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어느 정도의 추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가 회암사 보광전에 시주했던 자수불의 내용 역시 이 불상들의 도상 추정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종합적 분석을 통해 본고는 중창 당시 지어졌던 보광전에는 15척 크기의 불좌상 3구를 모셨을 가능성이 크며, 이 삼불은 ‘아미타-석가-약사’ 또는 ‘아미타-비로자나-약사’의 조합을 이루고 있었을 것임을 추론해 볼 것이다. 또한 이 삼불상들은 회암사 경내 북쪽 구역에 봉안된 또다른 15척 불상들과 함께 사찰가람의 동서축을 따라서는 불법승 삼보(三寶)를 형상화하고, 남북축을 따라서는 삼신(三身)을 형상화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도록 하겠다.1

Ⅱ. 고려말 회암사 중창과 「天寶山檜巖寺修造記」

회암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최자(崔滋, 1188~1260)가 엮은 『보한집(補閑集)』에 수록된 「회암사유왕자승원경국사수적(檜巖寺有王子僧元敬國師手蹟)」에 대정 갑오년(1174)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를 들렸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12세기 중엽 이전에는 이 절이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 14세기 초중반의 회암사에 대한 기록들도 간간이 남아 있다. 이색(李穡, 1328~1896)이 찬한 「태고사원증국사탑비(太古寺圓證國師塔碑)」에는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3)가 13세인 1313년에 회암사에서 출가했다고 전하고 있기도 하다.3
그러나 회암사가 한국에서 가장 큰 사찰로 부상하게 된 것은 1374년 시작된 나옹혜근의 대대적인 회암사 중창 이후이다. 나옹은 1340년 회암사에서 출가하였고 회암사 중창 도중 입적하였기 때문에, 그의 승려로서의 인생은 회암사에서 시작하여 회암사에서 마무리지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옹의 회암사 중창은 인도 출신 승려 지공(指空, ?~1363)과의 만남과 관련이 있다.4 나옹은 1347년 원나라에 입국하여 지공을 친견하게 되는데, 지공은 삼산(三山)과 양수(兩水) 사이에 머무르라는 수기(受記)를 준다. 나옹은 귀국 후 삼산과 두 물줄기 사이에 위치한 터를 회암사라고 하며 이를 회암사 중창의 이유로 삼았다. 또한 지공이 예전에 고려를 방문했을 동안 회암사를 방문하고 그 터의 산수가 인도의 날란다사와 매우 비슷하다고 했다는 이야기 역시 회암사 중창에 힘을 실어주었다.5
나옹은 임제종(臨濟宗)을 수용하여 한국 불교사에서 큰 획을 그은 선종 선사이다.6 나옹은 고려말 선종의 내부단결과 불교세력의 결속을 위해 회암사 중수라는 거대한 불사를 기획한 것으로 생각된다.7 그러나 고려말은 신흥사대부들이 새로운 권력층으로 떠오르던 시대였다. 왕실의 막대한 후원과 일반백성들의 지대한 관심을 얻었던 회암사의 대규모 중창은 곧 신흥사대부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반불교 세력의 공격으로 나옹은 회암사 주지 자리에서 추방되었고, 1376년 4월 서둘러 회암사 중창 낙성식을 올린 뒤 영원사로 가던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하게 된다.8 즉, 나옹은 회암사의 중창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중창된 회암사의 거대한 규모와 화려함을 잘 기록하고 있다.9 중창 후 회암사의 건물들은 262칸에 이르렀다고 한다. 또한 “크고 웅장함과 아름답고 수려함이 동국(東國)에서는 제일이다. 이것을 유람하기 위하여 강호에서 모여드는 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중국에서도 이런 절은 많이 볼 수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라 하였다”10라는 기록에서 당시 회암사의 화려함과 위용을 엿볼 수 있다.11
장엄함과 아름다움이 “동국에서 제일”이라 칭송되는 사찰로 재탄생한 회암사의 중심 불전은 바로 보광전이었다. 「천보산회암사 수조기」 역시 중창된 전각들을 기록하며 보광전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한지만 교수에 따르면, 이색이 기록한 건물의 크기와 위치 등은 발굴된 건물들의 유구와 거의 대부분 맞아 떨어진다(Fig. 1).12 이색이 기록한 건물들의 순서를 현대에 발굴된 구역들과 비교해 보자. 1990년대 말부터 진행된 발굴로 그 전모가 드러난 회암사지터는 남쪽에서부터 북쪽까지 차차 고도가 높아지는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낮은 지대부터 가장 높은 지대까지 1단지부터 8단지로 구분하여 발굴했으며, 그중 보광전은 제 6단지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Fig. 2). 「천보산회암사수조기」 중 건물들에 대한 기록과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단지들을 한눈에 보기 쉽도록 대조해 보면 Table 1과 같다. (건축물의 명칭은 굵게 표시했다.)
Table 1의 대조에서 보여주듯이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보광전을 중심으로 사찰가람을 설명하고 있다. 즉, 회암사의 주불전인 6단지의 보광전을 가장 먼저 서술한 뒤, 사찰의 중심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7단지와 8단지에 위치한 설법전, 사리전, 정청을 설명하고 이어서 동서에 배치된 건물들을 언급하며 8단지에서 7단지로 내려온다. 그 후 보광전을 둘러싸고 있는 6단지와 5단지 건물들을 서술하고 지대가 더 낮은 4단에서 2단지로 이동하며 건물들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Ⅲ. 회암사의 주요 불상에 대한 추정

본 장에서는 보광전을 포함한 회암사 전각에 모셔진 주요 불상들의 배치와 도상을 추정해 보도록 하겠다.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보광전의 불상에 대한 추정에도 매우 중요한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중창된 회암사는 “집이 모두 262칸이요, 불구(佛軀)는 15척(尺)이나 되는 것이 7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14
고려시대 15척의 불상은 그 높이가 얼마나 되었을까. 고려시대 도량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사찰 건축들은 대체로 일정한 도량형을 사용했다. 문헌상의 기록이 아니라, 현존하는 고려시대 사찰건물에 실제 사용된 척(尺)의 길이를 살펴보면, 수덕사 대웅전 건축에 사용된 척은 29.257-29.786cm, 부석사 무량수전은 30.32-30.43cm, 봉정사 극락전은 30.70-30.73cm이다.15 불상도 사찰 건축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도량형을 사용하였다면, 15척 부처의 상은 그 높이가 4.39-4.6m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러한 회암사의 대형 불상 7구는 어떤 종류의 부처를 형상화하고 있었으며 사찰의 어느 건물에 봉안했을지 여러 방법을 통해 추정을 시도해 보도록 하겠다.

1. 보광전 칠불 안치 가능성 검토

만약 7구의 불상이 모두 보광전에 모셔졌었다면, 우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도상은 과거칠불(過去七佛)이다. 그러나 과거칠불은 두 가지 이유에서 보광전에 모셔졌을 가능성이 희소하다.
첫째, 과거칠불은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도상이 아니다. 과거칠불은 북량(北涼, 397~439) 등 중국 고대국가에서 많이 만들어졌으며(Fig. 3), 중국 북방과 몽고 지역 등을 통치했던 요나라(遼, 907~1125)에서도 특히 유행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예가 1020년에 조성된 요령성 의현의 봉국사(奉國寺)에 안치된 거대한 과거칠불들이다(Figs. 4, 5). 이 불상들은 좌상의 형태로 제작되었는데 높이가 8.6m가 넘으며, 그중 중앙에 안치된 불상은 높이가 9.5m에 달한다. 칠불의 앞에 모셔진 보살입상들의 크기도 약 2.5m이다. 요나라의 불탑 외벽과 사리공에 봉안된 소탑에서도 과거칠불이 흔히 등장하며, 호국과 관련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Fig. 6).16 이와 달리 고려에서는 과거칠불이 유행한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옹이 중창을 주도했던 사찰에 갑자기 이러한 도상이 선택되었을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둘째, 발굴유구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의 기록을 고려할 때, 보광전의 내부 공간은 구조상 7구의 칠불보다는 삼불을 모시기에 더 적합해 보인다. 발굴 결과 보광전지에서는 1차-3차 유구가 발굴되었으며, 1차 유구의 크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차와 3차 유구에는 정면 5칸(약 25m) 측면 5칸(약 21m)으로 규모와 위치가 동일한 크기의 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Fig. 7).17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1차 유구도 정면 5칸이었을 가능성이 크며,18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 또한 나옹이 중창한 보광전을 정면 5칸의 건축으로 기록하고 있다.19 한지만 교수 역시 고려말 보광전을 정면 5칸 측면 5칸의 건축으로 상정하고 있다.20 이 경우 불상을 안치하는 내진 공간은 통상 양측 맨 끝 칸을 제외한 불전의 정면 중앙 3칸이 된다. 즉, 3구의 불상을 모시는 것이 적합한 것이다. 물론 약간의 예외도 있겠으나, 고려·조선시대 사찰의 중심 불전을 살펴보면, 그 불전과 동시기에 조성된 불상은 보통 예경자가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한 부처가 한 칸에 안치되도록 공간을 구성한 경우가 많다. 고려시대 지어진 부석사 무량수전은 주벽인 동벽 3칸 중 양측 끝칸을 제외한 중심한 칸에 소조여래좌상을 모셨다.21 이러한 불상 봉안 경향은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구례 화엄사 대웅전과 각황전·법주사 대웅보전 등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주벽이 5칸이 경우 중심 3칸에 3구의 불상을 봉안했다(Fig. 8). 보살상 등의 협시상들이 추가로 배치될 수는 있으나, 예경의 주요 대상이 되는 부처는 통상 한 칸에 한분 씩만 모시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요나라 봉국사 대웅전도 과거칠불을 이루는 7구의 불상을 중심 7칸에 각각 한 구씩 봉안할 수 있도록 정면 9칸으로 설계했다(Figs. 9, 10). 즉, 칠불을 모시기 위해, 내진이 7칸이 나오도록 9칸 불전을 건축한 것이다. 이러한 불상의 안치 방식은 일본 불교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22
만약 15척 불상을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만들었을 경우는 칠불을 보광전에 우겨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나, 주불전의 불상을 그처럼 격식에 맞지 않게 모셨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 현존하는 한국의 대형불상들의 비례를 고려했을 때, 15척 불상을 입상으로 제작한다면 대좌의 폭을 약 2m 정도까지 줄일 수 있는데, 보광전 내진 3칸의 길이가 약 15m이기 때문에 불상을 다닥다닥 붙여 배열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옹의 회암사 중창불사는 전국이 들썩였을 만큼 대규모의 왕실 후원 불사였다. 그러므로 칠불을 보광전에 모셨다면, 보광전의 내진을 형성하는 주칸 간격을 좁히거나 건물의 폭을 늘려서 칠불에 적합한 격식을 갖춘 정면 9칸 불전을 지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예경의 주요 대상으로 모셔지는 주불전의 불상들은 대부분 좌상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5칸 보광전에는 칠불보다는 삼불을 모셨을 확률이 더 크다 하겠다.23
회암사의 주불전에 삼불을 봉안했다면, 여기에는 원나라에 오래 머물렀던 나옹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수 있다. 나옹은 1347년부터 1358년까지 원에 머물렀으며, 원나라 수도 연경(燕京, 현재의 북경)에 위치한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의 인가를 받고 원나라 순제(順帝, 재위 1333~1370)에 의해 연경 광제사(廣濟寺)의 주지 역할을 맡는 등 괄목할 활동을 했다. 또한 중국 남부의 절강성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과 강서성, 중국 북부의 하북성과 산서성 등지를 순례하였다.24 원나라는 주요 사찰의 중심 불전에 삼불상을 병렬로 배치했다고 한다.25 원나라에서 활동했던 나옹 역시 이러한 원대 대형사찰의 주불전에 봉안된 삼불상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고, 그가 귀국 후 대대적으로 중창한 회암사의 주불전인 보광사도 유사한 형식으로 계획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회암사 15척 불상 7구의 봉안처

위의 추론을 통해 회암사 보광전의 구조는 세 구의 부처를 모시기에 적합했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색이 기록한 15척 불구(佛軀) 중 세 구가 보광전에 모셔졌다면, 나머지 15척 불구 네 구는 사찰의 어느 전각에 안치되었던 것일까. 우선 건축물의 이름을 통해 이러한 15척 부처를 모셨을 가능성이 있는 건물들을 추려내 볼 수 있다.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약 50개에 달하는 다양한 건축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건축물의 종류는 전(殿)·청(廳)·료(寮)·당(堂)·실(室)·루(樓)·고(庫)·방(房) 등으로 다양하다.26 이 중 대형 불상을 모셨을 가능성이 큰 건물들은 전(殿)이다. 사찰의 다양한 공간에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는 소형 불상들을 모실 수 있으나, 사찰을 찾는 신도들의 예경 대상이 되는 대형 불상은 아무래도 전(殿)이라는 가장 높은 격식의 건축물에 모시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광전 외에 높이 4.39-4.6m에 이르는 15척 불상를 모실 수 있는 건물은 설법전·사리전·나한전·대장전·조사전·관음전·미타전·향적전의 8개로 축약된다. 이 중 사리전·관음전·향적전의 세 건물은 먼저 제외할 수 있다. 첫째, 회암사의 가장 높은 지대인 8단지 중심에 자리잡은 사리전은 진신사리를 모신 정면과 측면 각 한 칸의 특수한 건물로,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모시는 공간이므로 별도의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을 것이다.27 둘째, 관음전에는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기록된 나옹의 제자 각전이 시주한 10척의 관음상이 주존으로 모셔졌을 것이다.28 셋째, 향적전은 부엌과 식당으로 사용하는 건축이기 때문에,29 대형 불상을 예경하는 공간과는 거리가 있다.
이렇게 세 건물을 제외하고 다섯 개로 축약된 후보군 중에서 다시 조사전을 제외할 수 있다. 조사전의 건물지 규모는 정면이 3칸(주칸 거리 3.06-3.09m)이고 측면은 1칸(주칸 거리 4.19m)인 소형 건물이기 때문에, 15척 불상을 모실 수 있는 공간을 형성하기 어렵다.30
조사전도 제외하면, 설법전·나한전·대장전·미타전의 네 건물이 남게 된다. 이 네 개의 건물에 15척 불구 네 구를 봉안했다면, 각각 어떤 종류의 부처가 모셔졌을까. 우선 미타전은 전각의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었을 것이다. 나한전과 대장전은 8단지 중심에 위치한 정청을 가운데 두고 동서에 대칭으로 위치하고 있다. 두 건물은 동일하게 정면 3칸·측면 2칸이며, 건물의 크기도 유사하다.31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두 건물지 모두 내부 중심에서 불단의 흔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이다. 대장전지에서 발굴된 불단 크기는 길이 2.8m, 폭 1.5m가량이고, 나한전 불단 장대석의 길이는 2.6m이다(Figs. 10, 11).32 건물과 불단의 크기로 보면, 15척 불상은 대좌의 크기를 줄일 수 있는 입상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33 나한전의 경우에는 나한상들의 중심에 불상을 안치하게 된다면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대장전 건축은 한국 사찰가람에서 고려 전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는데,34 대장전에 불상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보통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을 중심 존격으로 모셨다.35 회암사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36 고려시대 설법전에 봉안된 불상에 대해서는 문헌기록이나 고고학 자료가 적다.37 그렇지만 아래에서 설명하겠듯이 노사나불을 봉안했다면 회암사의 전체적인 가람배치가 나옹의 사상과 균형을 이루게 된다.38

3. 보광전 삼불상의 도상과 종교적 의미

회암사 보광전에 삼불상을 모셨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면, 이 세 구의 불상은 어떤 종류의 부처들이었으며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었을까. 이것은 풀기 어려운 난제이지만, 현재 활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현재로써 가능한 추정을 해보고자 하며, 이들 불상이 삼보와 삼신을 형상화하는 가람배치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짚어보겠다.

1) 입상과 좌상의 문제

우선 보광전 삼불의 형태는 입상보다는 좌상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첫째, 주불전에 봉안되는 중심 불상은 입상보다는 좌상의 형태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같은 15척이라 하더라도, 입상에 비해 좌상인 경우에는 전체적인 부피와 대좌의 크기가 훨씬 더 커지게 된다(Fig. 12). 따라서, 보광전에 봉안된 불상들을 좌상으로 만들면, 나한전·대장전·설법전 등에 봉안되었을 입상의 불상들과 규모와 격식 면에서 차별화를 둘 수 있어 주불전인 보광전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 현존하는 신라와 고려의 대형 불좌상들의 높이와 무릎폭 너비의 비율을 토대로 계산해 보았을 때, 높이가 4.39-4.6m인 15척 불상의 좌우 폭은 3.4-3.7m 정도이거나 더 좁았을 것으로 추정된다.39 발굴된 보광전의 정면 내진의 주칸 거리가 각각 5.15m, 5.14m, 5.27m이므로 이 정도 크기의 불좌상을 봉안하기에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40

2) 도상의 문제

삼존불의 도상에 관한 추정은 조금 더 복잡하다. 원나라와 고려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삼불상이 존재했다.41 그러나 그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삼불의 중심 존격은 보통 석가모니불 또는 비로자나불이었기 때문에,42 일단 그 추정의 폭을 줄여 볼 수 있다. 아래에 상술하겠듯이, ‘아미타-석가-약사’ 또는 ‘아미타-비로자나-약사’가 보광전에 모셔졌을 가능성이 크며, 둘 중에서도 특히 후자의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추정을 위해, 기존 선종 사찰에 모셔졌던 주존 불상들, 나옹이 중국에서 머물렀던 사찰의 주존 불상, 나옹의 불교사상과 활동 등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조선초 원경왕후의 시주로 보광전에 걸렸던 자수불과 조선 전기 회암사에 대한 기록 등도 이러한 추정에 좋은 단서를 보태줄 것이다.

(1) ‘아미타-석가-약사’ 삼불의 가능성

우선 나옹이 중창한 회암사가 선종사찰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말여초에서 고려말까지 선종사원의 주불로 모셔졌던 불상의 종류가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선종 사찰에 봉안되었던 주존불들은 비로자나·약사·삼신불·석가·아미타·노사나 등으로 상당히 다양하게 나타나서,43 회암사 보광전 주불을 추정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더욱이 나옹은 임제(臨濟)라는 새로운 선풍(禪風)을 수용했었기 때문에, 회암사의 가람은 고려의 기존 선종사찰의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선행연구에서 밝혀졌듯이, 나옹이 중창한 회암사는 남송시대(南宋時代, 1127~1279)에 정립되어 원명대까지 발전했던 선종사원의 가람제도를 계승하는 동시에, 여기에 회암사가 위치한 산수의 지형에 따른 변형을 가하고 고려적 특성을 가미했다.44 즉, 회암사의 가람은 한국 사찰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이고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보광전에 모셔진 불상들도 단순히 기존 한국 선종사원의 전통을 답습하여 선택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나옹이 원나라 연경에서 지공을 친견했던 법원사와 주지로 머물렀던 광제사의 주불전에 모셔졌던 불상들이, 이후 그가 중창한 보광전 불상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의 부재로 인해 이 두 사찰의 주존 불상이 무엇이었는지 현재로써는 알기가 어렵다. 지공이 머물렀던 법원사는 원나라에 와 있던 고려 여인 김씨(金氏)가 저택을 한 채 구입하여 지공을 위한 절로 만들었던 사찰로,45 아마도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아쉽게도 지공의 법원사는 오늘날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현재로써는 불전에 모셔졌던 불상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46 광제사의 경우는 원나라 말기에 폐사된 뒤 명나라 경태(景泰, 1450~1456) 연간에 완전히 다시 건축되었기 때문에 원대에 봉안되었던 불상에 대한 자료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면 나옹의 불교사상과 활동을 통해 그가 중요시했던 부처를 알 수 있을까. 1363년 초간된 후 1379년 재간된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을 보면,47 나옹은 사상과 수행 면에서 전형적인 선종스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이자 왕실인물인 숙녕옹주 묘선(淑寧翁主 妙善)에게도 쉬지 않고 화두를 들 것을 당부했을 만큼 나옹은 선수행을 강조했다.48 자신의 주장자를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날카로운 칼”에 비유하거나,49 “위로는 우러러야 할 어떤 부처도 없고 밑으로는 구제해야 할 중생도 없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그의 선종 승려로서의 태도가 잘 드러난다.50
『나옹화상어록』을 통해 이러한 나옹이 가장 중시했던 부처는 한 명의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내려왔던 석가모니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종승려로서 당연한 측면이기도 하다. 석가모니는 선종의 맥인 역대조사의 시초이자 선종 제1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의 어록에서 단순히 “부처”라고 하면 석가모니불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노자의 고향인 박주(亳州)에서 왔다고 하는 도사(道士)가 나옹에게 예배하자 “노군이 석가에게 예배하는구나”라고 하며 스스로를 석가모니에 비유한 일화도 기록되어 있다.51 더욱이 눈에 띄는 점은 죽은 이를 위해서조차 아미타불의 정토가 아닌 석가불의 불토(佛土)를 강조하며 모든 곳이 불토임을 설하는 점이다.52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겠듯이 나옹은 석가를 단순히 역사적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모든 곳에 항상(恆常)하게 편재하는 법신(法身)과도 연결되는 존재로 생각했다. 따라서 『나옹화상어록』에는 법신의 개념 또한 중요하게 등장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나옹이 중국 여러 지방을 순례했을 때 친견하고 예경했다고 유일하게 기록된 불상이 육왕사(育王寺) 석가상뿐이라는 점이다.53 나옹은 십 여 년간 중국에 머무르며 많은 불상을 보았을 것이나, 절강성 육왕사 석가상을 예경한 사실만을 「나옹화상행장」에 기록한 것은 그가 특별한 의미를 두고 이 불상을 찾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나옹의 사상과 활동을 보면 그가 석가모니불을 가장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체적인 회암사 가람배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사찰의 가장 높은 지대인 8단지가 석가불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8단지 중앙에 정청 앞에는 사리전이라는 특별한 독립건축물을 세워 석가의 사리를 모셨다. 사리전와 정청을 동서에서 호위하고 있는 나한전과 대장전 역시 석가모니불과 관련된 건축이다. 따라서 8단지 전체가 석가를 위한 구역이 되는 것이다.
회암사에서 석가와 그의 진신사리가 중요했던 전통은 아마도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듯하다. 조선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때 회암사에서 석가여래의 사리가 분과하였는데,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이 그중 25매를 가져와 왕과 왕비가 내전에 봉안하자 또 다시 사리가 102과로 분과하는 이적이 있었다고 한다.54 이러한 이적이 실제 일어난 것인지 정치적인 목적으로 꾸며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러한 이적을 회암사와 연결시킨 사실은 회암사 석가사리가 이때까지 매우 영험하게 여겨졌음을 알려준다. 또한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법회(圓覺法會)를 베풀자 감로(甘露)가 내리고 여래가 모습을 나타내며 사리가 분신한 기적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55 불사리는 드문 예를 제외하고는 석가의 사리이기 때문에, 이 또한 조선시대 전반기까지 회암사가 석가모니불과 특별한 관련이 있는 절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회암사 보광전에 봉안되었던 삼불의 중심에도 석가상이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심 불상의 좌우에는 과연 어떤 부처를 형상화한 불상들이 모셔졌을까. 고려말에 유행했던 삼불상의 도상들을 고려할 때, 가운데 석가불이 안치되었을 때는 ‘아미타-석가-미륵불’ 또는 ‘아미타-석가-약사불’의 조합이 가능하다.56 이 두 가지 도상 중에 보광전에 봉안되었던 것은 어느 쪽일까.
조선 초기 회암사 보광전에 봉안되었던 원경왕후의 자수불들이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왕비였던 원경왕후는 자수불화들을 회암사에 봉납했는데,57 이 자수불화들의 발문이 권근(權近, 1352~1409)의 시문집인 『양촌집(陽村集)』에 남아 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이 자수불이 보광전에 걸렸음을 알 수 있다.58
이 자수불들은 언제 제작되었을까. 권근의 발문에서 원경왕후가 “중궁 정비전하(中宮靜妃殿下)”로 칭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자수불들은 원경황후가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어 왕비가 된 1400년 음력 11월 이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문을 찬한 권근은 1409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자수불의 하한연도는 1409년이다. 즉,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하고 겨우 26년 내지 35년 후에 이 자수불들이 제작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회암사에는 주불전의 대형 불상들을 다시 만들 만큼 큰 중창이 없었다.
그러므로 원경왕후가 궁인들에게 명하여 자수불을 제작했을 당시에도 회암사 보광전에는 나옹이 기획했던 불상들이 그대로 안치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수불들은 보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들의 도상을 고려하여 그 내용을 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보광전을 위해 만들어졌던 자수불들이 어떤 도상을 담고 있었는지 다행히 권근의 발문에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경왕후는 “궁인(宮人)을 명하여 천불(千佛) 1축(軸)과 팔난관음(八難觀音)·범왕과 제석(梵王帝釋) 각각 1축씩 수놓아 만들었다”고 한다.59
이러한 자수불의 도상들, 특히 천불과 범왕제석은 예경을 위한 단독 존격으로 봉안하기보다는 더 높은 존격을 보조하는 역할로 사용하기에 더 적합한 존격들이다. 즉, 원경왕후는 이미 보광전에 모셔져 있었던 삼존 불상을 위해 이 자수불들을 발원하여 시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아미타-석가-미륵불’ 또는 ‘아미타-석가-약사불’의 두 가지 가능성 중에 후자가 더 적합함을 알 수 있다. 팔난에서 구제해 주는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협시로 여겨지며, 범왕과 제석은 약사불과 도상 내용상 짝이 잘 맞기 때문이다.60 천불은 석가불과 짝을 이룰 수 있는 도상이다. 반면, 자수불의 도상 중에 미륵불과 짝을 이루기에 딱히 적합해 보이는 도상은 없다. 이를 통해 보광전 삼불상의 좌우에 놓여졌던 불상은 아미타불과 약사불임을 알 수 있다.

(2) ‘아미타-비로자나-약사’ 삼불의 가능성

다음으로 보광전 삼불상의 중앙에 석가가 아닌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고려 후기 유행했던 삼불상들의 예를 볼 때, 비로자나가 중심에 놓이는 조합은 ‘아미타-비로자나-약사불’ 또는 ‘아미타-비로자나-미륵불’이 있었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노사나-비로자나-석가’를 조성하여 삼신을 조형화한 삼불도 존재했다.61
이 중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원경왕후의 자수불이 보광전 삼불상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면, 이 세 가지 조합 중 가능한 것은 ‘아미타불-비로자나불-약사불’뿐이다. 다른 삼불상 조합들은 천불·팔난관음·범왕제석이라는 자수불의 도상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천불 자수불은 석가뿐만 아니라 비로자나와도 짝을 이룰 수 있다. 비로자나불은 모든 부처의 근본이 되는 몸을 가진 법신(法身)이기 때문에 비로자나불의 몸에서 천불과 같은 무수히 많은 부처들이 현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불 자수불은 비로자나를 위해, 팔난관음은 아미타를 위해, 범왕제석은 약사를 위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아미타불-비로자나불-약사불’이 보광전에 모셔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첫째, 보광전이라는 불전의 이름 자체가 삼불의 중앙에 모셔졌던 불상이 비로자나였을 것임을 강하게 시사한다. 오늘날 보광전 또는 보광명전(普光明殿)은 흔히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으로 알려져 있다.62 이러한 상황은 고려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시대 기록 중에 보광전 또는 보광명전이라고 불렸던 전각에 봉안된 불상의 종류를 알 수 있는 경우를 확인해 보면 비로자나불 그리고 노사나불을 모셨던 기록들이 확인된다. 그중 신광사(神光寺) 보광명전은 나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주목된다. 나옹은 중국에서 귀국한 뒤 잠시 신광사의 주지 소임을 맡게 되는데, 『나옹화상어록』에 수록된 「신광사입원(神光寺入院)」을 보면, 나옹이 신광사 보광명전에 이르러, “비로자나의 꼭대기를 밟는다 해도 그는 더러운 발을 가진 사람이오. 말해 보시오.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손으로 불상을 가리켰다는 내용이 있다.63 이 기록에 의해, 나옹이 신광사에 주지로 머무르던 당시 그곳에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명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나옹이 중창한 회암사의 주불전 역시 삼불의 중심에 비로자나불이 있었기 때문에 보광전이라고 이름짓게 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둘째, 『나옹화상어록』을 살펴보면 나옹은 비로나자불 또한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는데, 비로자나불은 마치 무한한 허공과도 같이 온 세계에 편재해 있는 법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옹화상어록』에 수록된 「시굉장주(示宏藏主)」에서 나옹은 화두 참구를 통해 찾아야할 궁극적인 대상을 “비로자나 법신의 주인”64으로 칭하고 있다. 다른 설법에서도 “깨달음의 성품은 허공과 같고… 부처의 몸은 법계에 두루하다”65고 설하는 등 부처의 근본되는 불신은 무변무상하게 편재하는 법신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나옹은 그가 중시했던 석가모니불의 근본이 되는 존재 역시 법신(즉, 비로자나)으로 생각했다. 법신은 불법(佛法) 그 자체와도 동일한 존재이자 다른 수많은 부처의 근본이 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불교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입내보궐(入內普說)」은 나옹이 궁궐에 들어가 베풀었던 설법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석가모니 역시 이러한 법신에서 현현한 것으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나옹은 “부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 물건에 따라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 물 속의 달과 같다”라고 하며 자신의 불자(拂子)를 들어 똑바로 세운 뒤, “늙은 석가가 이곳에 이르러 산승의 불자 위에서 현묘한 색신(色身)을 나타내는구나”라고 설했다고 한다.66 여기에서 나옹은 석가모니불을 비로자나의 법신에서 현현한 색신, 즉 화신(化身)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석가모니불보다 더욱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존재는 법신 비로자나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삼신(三身)사상이 존재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약 4세기부터 부처 몸에는 항상하고 무변하는 법신, 완전하고 원만한 몸을 가진 보신(報身), 잠시 세상에 나타나는 화신(즉, 색신)이 있다고 설명했던 삼신사상이 생겨났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종파에 관계없이 이 삼신사상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67 『나옹화상어록』에서 법신, 보신, 색신(즉, 화신)과 관련된 내용이 종종 등장하고 있어 나옹 또한 삼신사상에 매우 친숙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보광전 삼불은 중심에 법신을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안치한 ‘아미타-비로자나-약사’의 조합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고 여겨진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으나, ‘아미타-비로자나-약사’는 나옹화상의 원불로 전해지고 있는 구례 천은사 금동불감의 벽면에 부조로 표현된 삼불의 조합과도 정확하게 일치한다(Fig. 13).68 천은사 불감이 나옹의 원불이라 칭해지는 정확한 근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제 나옹의 원불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나옹이 조성했던 유명한 불상과 도상이 일치하거나 나옹과 어떤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나옹의 원불로 인식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금동불감의 도상도 회암사 보광전 삼불과 어느 정도 연관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나옹은 삼신사상에 익숙했다. 그렇다면 왜 회암사 보광전의 삼불을 법신 비로자나를 중심에 모신 삼신불(三身佛)로 조성하지 않았을까. 고려말에는 이미 보신 노사불·법신 비로자나·화신 석가모니를 조성하여 삼신을 형상화하는 도상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삼신을 조성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하기 삼십 여 년 전에 기황후(奇皇后, 1315~1369)가 황제와 태자를 위하여 중창한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 삼신불이 모셔졌던 사례가 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옹이 법신 비로자나라는 형이상학적 부처의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를 안치한 이유는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며 기복과 관련된 부처들을 절을 찾는 일반 신도들의 기대와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회암사 보광전과 같은 대형사찰의 중심 불전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써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신도들의 예경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나옹은 대중적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회암사의 중심 전각에는 ‘아미타-비로자나-약사’라는 대중에게 조금 더 친숙한 도상으로 구성된 삼불을 모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옹은 회암사의 전체적인 사람 배치를 통해 삼신과 삼보라는 교리적으로 중요했던 개념도 구현했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설법전에 봉안된 15척 불상이 노사나불이었다면, 회암사 8단지에서 6단지로 내려오는 남북 중심축을 따라서는 법신·보신·화신의 삼신이 구현되게 되기 때문이다. 첫째, 8단지 중심에 위치한 사리전에 봉안된 석가모니불의 사리가 석가모니불로 대표되는 화신을 구현하게 된다. 둘째, 7단지 중심에 위치한 설법전에 모셔진 노사나불은 보신을 형상화하게 된다. 셋째, 6단지 중심에 위치한 보광전의 중심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은 법신을 형상화한다(Fig. 14).70 이러한 회암사의 전체적인 불상 배치는 조선초에 제작된 불화인 주린지(十輪寺) 소장 <오존불회도(五尊佛會圖)>에서 나타나는 삼신과 약사·아미타의 결합과도 유사한 점이 있어, 회암사지 불상의 배치가 후대 한국의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Fig. 15).71
여기서 더욱 주목되는 점은 회암사는 불상과 사리의 배치를 통해 삼신과 삼보를 결합한 매우 특별한 사찰가람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사찰의 가장 높은 지대인 8단지의 동서 축을 이루고 있는 세 건물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사리전·대장전·나한전이다. 이 전각들은 각각 불·법·승을 상징하여 불교의 삼보를 이루게 된다. 부처의 사리는 불(佛), 대장전의 대장경들은 부처의 가르침인 법(法), 나한전에 모셔진 나한들은 승(僧)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불법승 삼보 역시 나옹이 중시했던 사상적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72 따라서 회암사 동서축과 남북축을 통해 나옹이 중시했던 삼보와 삼신이 모두 구현되게 되는 것이다(Fig. 16).
만약 회암사 설법전에 노사나불이 봉안되어 있었다면, 아마도 보관(寶冠)형 노사나설법인(盧舍那說法印)의 불상이었을 것이다. 『나옹화상어록』에 실린 「시중(示衆)」을 살펴보면, 나옹이 화두를 통해 깨달으면 비로소 “노사나불의 관(盧舍冠)”을 정수리에 쓸 수 있고 보신과 화신불의 머리에 앉을 수 있다고 설하는 대목이 나온다. 보관을 쓰고 양팔을 들어 양손을 바깥으로 향해 설법인을 취하는 노사나설법인의 노사나불은 11세기 중국에서부터 등장했다.73 북송 1022년작인 항주 비래봉의 시대 노사나 불회(盧舍那佛會) 부조상이 현재 알려진 가장 이른 예이다(Fig. 17). 「시중(示衆)」의 내용을 통해 나옹이 생각했던 노사나불은 이러한 보관형 노사나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설법인을 취하기 때문에 사찰 대중을 위한 설법을 베푸는 설법전에 모시기에도 아주 적합한 도상이라고 할 수 있다.

Ⅳ. 맺음말

본고에서는 나옹의 사상과 활동, 회암사의 발굴유구, 「천보산회암사수조기」 등의 문헌기록, 동시대 동아시아 사찰의 불전과 불상 등을 분석하여, 그가 중창한 회암사의 보광전에 모셔졌던 불상의 도상과 형태, 신앙적 의미 등을 추정해 보았다. 불전 내진 한 칸에 부처 한 구씩을 봉안하는 통상의 불상 안치법을 고려할 때 정면 5칸의 보광전에는 좌상의 15척 삼불을 봉안했을 것이다. 문헌과 실물 자료를 종합적으로 살펴본 결과, 보광전에 안치된 삼불은 ‘아미타-석가-약사’였을 가능성도 있고, 더 높은 확률로는 ‘아미타-비로자나-약사’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나아가 본고에서는 회암사의 전체적인 사역에 봉안했던 불상들의 종류와 봉안처에 대해서도 함께 추정한 결과, 회암사는 불상과 가람의 배치를 통해 삼신과 삼보를 모두 구현한 불교역사상 매우 특이하고도 독창적인 사찰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즉, 「천보산회 암사수조기」에 기록된 15척 불상들이 설법전·나한전·대장전·미타전에도 각 한 구씩 봉안되었을 것임을 밝히고, 8단지 구역은 동서축을 따라 불·법·승 삼보를 구현하고, 6단지에서 8단지 남북축을 따라서는 법신·보신·화신의 삼신을 구현하도록 불상과 전각이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짚어보았다.
물론 이러한 회암사의 불상들은 이미 오래전에 소실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종합적인 추정은 절대적인 답을 제공하기보다는 가장 큰 확률의 제시해 주는 것이다. 본고의 추정은 현재 필자가 구할 수 있는 자료와 주어진 시간의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앞으로 새로운 자료나 좀 더 세밀한 발굴 자료가 나오면, 후속 연구에 의해 보광전 불상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나 더 세밀한 추정이 나올 가능성 또한 열어두며 본고를 마치고자 한다.

Notes

1) 주수완 교수는 보광전에 삼신불과 아미타불·약사불의 5존불을 모셨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주수완, 「조선 전반기 불교건축과 예배상과의 관계에서 본 도상의미 연구」, 『강좌미술사』 36(2011), pp. 396-436. 필자는 5불 봉안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고에서 살펴볼 여러 정황상 삼불을 모셨을 가능성이 확률상 더 크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박용진, 「고려시대 회암사의 역사와 국외 교류」,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회암사와 불교사』(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10-11; 오세덕, 「양주 회암사지 유구 분석을 통해 본 시기성과 조선시대 사찰에 미친 영향」,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Ⅵ-회암사의 건축』(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8), p. 80. 「회암사유 왕자승원경국사수적」에는 회암사 남루의 동벽과 서벽 등에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의 출가한 넷째 아들인 원경국사(元敬國師, ?~1183)가 직접 쓴 글씨가 있었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3) 14세기 회암사 관련 다른 사료들에 대해서는 박용진, 앞의 논문, p. 11-14.

4) 지공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는 강호선, 「인도승려 지공화상의 입국과 그 영향」,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회암사와 불교사』(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96-137 참조.

5) 지공은 1326년~1328년 고려를 방문했었다. 지공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受記)와 나란타사 이야기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들과 분석은 박용진, 앞의 논문, p. 17-22 참조.

6) 나옹의 고려 후기 임제종의 도입에 대해서는 김용태, 「한국불교에서 임제종 수용의 역사적 의미」,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회암사와 불교사』(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212-252 참조.

7) 김윤곤, 「나옹혜근의 회암사 중창과 반불논의 제압기도」, 『대구사학』 62 (2001), p. 62.

8) 김방룡, 「나옹혜근의 원나라 유학과 귀국 후 활동」,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회암사와 불교사』(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158-159.

9)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동문선(東文選)』 제73권 기(記)에 수록되어 있다. 「천보산회암사수조기」 중 앞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나옹이 입적한 후 그의 문도였던 절간익륜(絶磵益倫)과 각전(覺田)이 이색을 찾아와 중창의 시말을 기록하는 글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절간이 “보제(普濟, 즉 나옹)가 이미 입적하여 명(銘)을 쓰고 비석을 세웠다(普濟旣寂 浮屠銘立石矣)”라고 하며 이색에게 절의 중창에 대해서도 글을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이 글은 나옹의 비가 건립된 1377년 6월 이후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10) 宏壯美麗 甲于東國 遊覽江湖行遍者 皆曰 雖中國未之多見 非誇言也. 한국고전번역원 임창재의 1968년 번역을 참조하여 필자가 재번역. 별다른 설명이 없는 경우, 아래 번역들도 동일함.

11) 그러나 「천보산회암사수조기」의 행간을 읽어보면 당시 회암사의 상황이 상당히 위태로웠음을 알 수 있다. 이색은 나옹의 제자였던 각전이 글을 부탁하며, “우리 스승은 이미 돌아가시고 우리 무리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절의 이루어짐이 예전과 같을지 알 수 없다(吾師旣逝矣 吾徒皆散而之四方矣 寺之得如前日未可知也)”라 했다고 기록했다. 나옹의 입적 이후 그의 제자들이 흩어져 차후 회암사의 운영이 잘 유지될지, 나옹의 제자들의 명맥이 회암사에서 이어질지 불분명한 상태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2) 한지만, 「고려시대 선종사원과 회암사」,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Ⅴ-회암사의 건축』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7), p. 115; 한지만, 「회암사지 고원 영역의 전각 배치에 대하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30, no. 7(2014). 김상태는 7-8단지의 건물 유구는 「천보산회암사수조기」와 거의 일치하나, 5-6단지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김상태, 「회암사지의 건축사적 위치와 가치」,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Ⅴ-회암사의 건축』(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7), p. 64.

13)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東文選』 제73권 기(記)에 수록되어 있다. 본고의 번역은 김영재의 2018년 번역과 임창재의 1968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을 원문과 대조하여 재구성했다. 김영재 번역은 김영재, 「청규로부터 본 회암사지의 건축적 특성과 그 의미」,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Ⅵ-회암사의 건축』(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8), p. 64 참조.

14) 위에 인용된 「천보산회암사수조기」 참조. 번역에 따라 나옹의 제자였던 각전이 15척 불상 7구를 모두 조성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천보산회암사수조기」원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10척 관음상만 각전의 시주로 볼 수 있다. 또한, 나옹이 중창을 맡았던 사찰의 주요 불상의 도상을 정하고 제작하는 중요한 문제는 당연히 나옹이 주도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며, 이를 모두 그의 제자가 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15) 김영필, 「韓國傳統建築의 尺度 硏究」(조선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pp. 121-126 참조.

16) 요나라 칠불에 대해서는 Qi Lu, “Grassland, Urban Space, and Ways of Life: The Seasonal Imperial City Qingzhou in the Khitan Liao Dynasty, 1031CE-1125CE,”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2019), pp. 114-119; 于博, 「从辽塔造像看密教对辽代七佛造像的影响」, 『北方文物』 no. 3(2015), pp. 67-71.

17) 보광전지 발굴 결과에 대해서는 경기도박물관, 경기문화재연구원, 『檜巖寺Ⅲ-5·6단지 발굴조사 보고서(본문)』(경기도박물관, 2009), pp. 26-37, pp. 446-447, pp. 452-453 참조.

18) 위의 책, p. 34.

19) 본 논문에서 앞서 인용된 「천보산회암사수조기」 참조.

20) 한지만, 앞의 논문(2017), p. 114, 도11의 보광전 평면도 참조.

21) 고려시대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에는 현재 내진칸과 삼불의 크기가 맞지 않게 배치되어 있으나, 이 삼불은 수덕사 대웅전에 모셔졌던 원래의 불상들이 아니다. 이 석가·아미타·약사 삼불은 1639년에 제작되었으며, 전라북도 남원 귀정사(歸淨寺)에 있던 것을 이운해온 것이다. 또한 본존의 대좌만 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는데, 이 본존 대좌는 내진을 이루는 칸에 맞게 안치되어 있다. 본존 대좌에 대해서는 정은우, 「수덕사 대웅전의 14세기 목조대좌」, 『美術史論壇』 16(2003) 참조.

22) Nancy S. Steinhardt, Liao Architecture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7), pp. 52-53, 56, 224; idem, “The Architectural Landscape of the Liao and Underground Resonances,” in Gilded Splendor: Treasures of China’s Liao Empire, ed. Hsueh-man Shen (New York: Asia Society, 2006), p. 45.

23) 보광전 발굴 때 약간씩 크기가 차이나는 소조 나발편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소조편들이 보광전 주불의 나발들이었는지는 차후에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성을 기울여 제작한 대형불상들이었다면, 두부의 위치에 따라 나발의 크기를 조절하여 도식화를 피하고 좀 더 자연스러운 불상의 머리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24) 나옹의 생애와 중국에서의 활동은 이색이 찬한 「普濟尊者謚禪覺塔銘 幷序」와 각굉(覺宏)이 찬한 「高麗國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謚禪覺懶翁和尙行狀」 참조. 원문과 한글 번역은 이능화 편, 조선불교통사역주편찬위원회 역편, 『역주 조선불교통사 3』(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pp. 641-673. 이 두 가지 글은 원나라 황제가 나옹을 광제사에 머물게 했다고 적었으나,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은 황제가 나옹을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가 되게 했다고 적고 있다. 『나옹화상어록』의 해당 부분은 위의 책, pp. 675-676.

25) 원나라의 삼불상에 대해서는 심주완, 「동아시아 삼불상 도상 연구」(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1), pp. 144, 190-192 참조. 특히 원나라에서 숭앙되었던 티베트 불교에서 삼불상을 선호했으나,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삼불은 석가삼세불·비로자나삼세불·삼신불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고 하며 삼불상의 봉안이 티베트 불교 사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종 승려였던 나옹도 이러한 불전의 불상배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26) 본 논문에서 앞서 인용된 「천보산회암사수조기」 참조.

27) 통도사,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 등 진신사리를 모신 곳은 통상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28) 한지만 교수는 3단지에 위치한 동쪽을 향해 지어진 정면 2칸 측면 2칸의 독립된 건물을 관음전으로 추정한 바 있다. 한지만, 앞의 논문(2017), p. 114, 도11 참조.

29) 김영재, 앞의 논문, p. 56, 표1 참조.

30) 불상의 크기와 불전의 크기에 대한 연구로는 한정호, 「東아시아 古代佛殿의 規模와 佛像의 相關性硏究」, 『文物硏究』 24(2013) 참조.

31) 나한전은 동서 길이 11.5m·남북 길이 8.8m이고, 대장전은 동서 길이 12.5m·남북 길이 9.3m이다.

32) 발굴된 유구에 대해서는 경기도박물관, 기전문화재연구원, 『檜巖寺Ⅱ-7·8단지 발굴조사 보고서』(경기도박물관, 2003), pp. 53-62 참조.

33) 불상의 소재면에서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목조나 건칠 또는 두가지 소재를 혼용했을 가능성과 빠른 중건 속도에 맞추기 위해 조성이 용이한 소조상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목재나 건칠 불상을 모셨을 경우 15척 불상의 흔적이 현 회암사 유구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된다. 회암사는 발굴을 통해 불에 타서 폐사된 것이 밝혀졌는데, 목조나 건칠은 화재에 전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4) 이경미, 「고려·조선의 法寶信仰과 經藏建築의 변천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pp. 44-45.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회암사 대장전의 월대 상부에서는 윤장대(輪藏臺) 하부 석재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재가 발굴되었다. 이경미는 윤장대가 고려시대 대장전 내부에 모셔져 있다가, 조선시대 월대로 옮겨지면 대장전 내불에 불단을 놓고 불상을 모셨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대장전 유구에서 뚜렷한 중창이나 변형의 흔적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은 일단 유보해 두고자 한다.

35) 신주연, 「현 東國寺 봉안 金山寺 大藏殿 釋迦三尊像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21), pp. 80-81.

36) 아쉽게도 현존 대장전 건축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건축이다. 고려시대 대장전은 불상을 봉안한 경우도 있고 봉안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 대장전에 보편적으로 봉안한 불상의 종류에 대해서 확실히 알기는 어려우나 대부분 석가상 또는 비로자나상이었을 것이다. 석가모니불은 경전 안에 가르침을 설한 부처이고, 비로자나불은 법신(法身)으로서 경전 안에 불법(佛法)과 동일한 존격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부처는 대장전에 모시기에 가장 적합한 존격이다.

37) 홍병화, 「우리나라 사찰건축에서 奉佛과 講說공간의 변화과정」, 『건축역사연구』 19(2010), pp. 111-112.

38) 설법전 유구에서는 불단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틀림없이 불상을 봉안했을 보광전 유구와 미타전·관음전 유구에서도 불단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불단 발굴의 여부만으로 불상의 안치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설법전 발굴유구에 대해서는 경기도박물관, 기전문화재연구원, 앞의 책(2003), pp. 75-78.

39) 이는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과 석굴암 본존불 등의 비율을 토대로 계산한 수치이다.

40) 이 주칸 거리는 2차, 3차 유구라는 점에서 추정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1차 유구가 2차, 3차 유구에 비해 작았을 것이라는 증거도 아직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1차 유구의 크기도 2차와 3차 유구와 유사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추정을 해 보았다. 차후 1차 유구에 대한 좀 더 정밀한 발굴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41) 동아시아 삼불은 심주완 박사가 최근 박사논문에서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다. 심주완, 앞의 논문, pp. 1-437. 삼불에 대한 명칭은 통일이 되지 않아서 현재 학계에서 삼세불, 삼방불 등으로도 불린다. 김창균, 「조선시대 삼신삼세불 도상 연구」, 『강좌미술사』 32(2009); 황규성, 「조선시대 삼세불 도상에 관한 연구」, 『미술사학』 20 (2006).

42) 요나라 조양북탑 12층 사리공 동벽과 사리기에 새겨진 1043년 선각 삼불상처럼 주존이 노사나불인 예외적인 사례들도 간혹 존재하나, 이는 매우 특수한 사례이다. 조양북탑 삼불에 대해서는 Youn-mi Kim (김연미), “A Ritual Embodied in Architectural Space: The Uṣṇīṣavijayā Dhāraṇī and Yingxian Timber Pagoda from the Liao Empire,” International Journal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30, no. 2(2020), pp. 76-79, 91-93; Youn-mi Kim (김연미), “Eternal Ritual in an Infinite Cosmos: The Chaoyang North Pagoda (1043-1044),” Ph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2010), pp. 77-112 참조.

43) 자료 조사에 도움을 준 고수경, 이서희, 김하영 연구조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44) 김영재, 앞의 논문, pp. 36-74; 한지만, 앞의 논문 (2017), pp. 90-119.

45) 이러한 기록은 이색의 「西天提納薄陀尊者浮屠銘」에 실려 있다. 지공의 법원사와 金씨 부인에 대해서는 윤기엽, 「在元 高麗人 관련의 大都寺院」, 『불교학연구』 11(2005), pp. 11-13 참조.

46) 북경에 현존하는 법원사는 당나라 때 개창되고 원나라 때까지 민충사(憫忠寺)로 불렸던 대형 사찰로 지공이 머물렀던 절과는 다른 사찰이다.

47)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 1379년 재간본의 원문과 한글 번역은 이능화 편, 조선불교통사역주편찬위원회 역편, 앞의 책, pp. 674-770 참조.

48) 「示淑寧翁主妙善」, 『나옹화상어록』. 원문과 한글 번역은 위의 책, pp. 734-736 참조. 숙녕옹주는 여주 신륵사 보제사리석종기(普濟舍利石鐘記)의 단월질(檀越秩)에 유일한 옹주로 등장하는 등 나옹을 특별히 따랐던 사람인 것 같다.

49) 「神光寺入院」, 『나옹화상어록』. 원문과 번역은 위의 책, 2010, pp. 676-678.

50) 「解制上堂」, 『나옹화상어록』. 원문과 번역은 위의 책, pp. 710-712.

51) 「解制日上堂」, 『나옹화상어록』. 원문과 번역은 위의 책, pp. 741.

52) 『나옹화상어록』에는 대령소참(對靈小參) 등 죽은 이의 영가를 위해 했던 법문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미타불이나 극락정토가 언급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상서청대령소참(崔尙書請對靈小參)」에는 무수한 불국토에 무수한 석가가 계심을 영가에게 설한다. 위의 책, pp. 706-707. 이를 통해 나옹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 현실세계가 그대로 극락이라는 선종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계속 그리워하는 여동생, 염불 수행을 주로 하는 신도들에게는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는 수행을 권하기도 했는데, 참선을 위한 근기가 적은 사람들에게만 간혹 이러한 타력수행을 권한 것 같다. 『나옹화상어록』의 관련 원문들은 앞의 책, pp. 736, 755, 760.

53) 「高麗國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謚禪覺懶翁和尙行狀」. 원문과 번역은 위의 책, pp. 649-670.

54) 「興天寺新鑄鍾銘幷序」. 원문과 한글 번역은 위의 책, pp. 2:155-159. 회암사에서 분과한 사리 중 일부는 흥천사 사리각에 봉안되었다.

55) 『조선왕조실록』 세조 10년 갑신(1464) 5월 2일.

56) 고려말 석가삼세불의 종류에 대해서는 심주완, 앞의 논문, pp. 194-199.

57) 회암사 보광전에 원경왕후의 자수불이 봉안되어 있었음은 김정희 교수가 밝힌 바 있다. 김정희, 「조선 전반기 회암사의 왕실후원자와 왕실발원 미술」,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 회암사와 왕실문화』(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5), pp. 37-41. 필자는 여기에 더해 자수불의 제작년대를 조금 더 좁혀 보고, 보광전 불상과의 관계를 추정해 보았다.

58) 『조선왕조실록』 세종 16년 갑인(1434) 4월 10일.

59) “乃令宮人繡成千佛一軸八難觀音梵王帝釋各一軸.” 한문에 띄어쓰기가 없는 관계로, 기존 번역들에서는 이 문장의 내용을 천불, 팔난, 관음, 범왕, 제석의 5폭의 자수불, 또는 천불, 팔난관음, 범왕, 제석의 4폭의 자수불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문맥상 천불은 확실히 1폭이고, ‘팔난’은 하나의 화제가 아니므로 ‘팔난관음’을 팔난에서 구제해 주는 관음 1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범왕과 제석은 보통 한쌍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고, 문맥상 ‘팔난관음’과 ‘범왕제석’이 대구를 이루기 때문에, 이 두 소재가 각각 한 폭을 이루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60) 범왕(즉 범천)과 제석이 약사불의 협시로 등장하는 불화에 대해서는 박재업, 「高麗時代 藥師佛畵 硏究」(원광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참조.

61) 고려말에 비로자나삼세불에 대해서는 심주완, 앞의 논문, pp. 190-193, 199-207 참조.

62) 보광전에 약사불, 아미타불, 관음 등을 주존으로 모신 경우도 있다. 분황사, 실상사, 남해 보리암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이들 보광전의 건축연대와 불상의 제작연대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63) 「신광사입원(神光寺入院)」, 『나옹화상어록』. 원문과 번역은 이능화 편, 조선불교통사역주편찬위원회 역편, 앞의 책, pp. 676-678.

64) 毗盧師法身主.「시굉장주(示宏藏主)」, 『나옹화상어록』. 원문과 번역은 위의 책, p. 723.

65) 「自恣日趙尙書請普說」, 『나옹화상어록』. 원문과 번역은 위의 책, pp. 686-690.

66)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竪拂子云 釋迦老子來也 在山僧拂子頭上 現妙色身. 「內普說」, 『나옹화상어록』. 원문은 위의 책, p. 684. 번역은 필자가 수정 및 재구성.

67) 삼신의 명칭은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한역의 과정에서, 보신은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칭해지고, 화신은 색신, 응신(應身)으로도 칭해지는 등 다양한 명칭이 생겼다. 삼신사상의 발전과 내용에 대해서는, 李箕永, 「佛身에 관한 硏究」, 『佛敎學報』 3(불교문화연구원, 1966); ルーベン·L·F·アビト, 「仏身論の展開—三身説の成立をめぐって」, 『宗教研究』 52, no. 2(1978), pp. 111-131; John J. Makransky, Buddhahood Embodied: Sourcesof Controversyin India and Tibet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7); Guang Xing, The Conceptof the Buddha: Its Evolution from Early Buddhism tothe Trikāya Theory (London: Routledge Curzon, 2005); Nagao Gadjin, “On the Theory of Buddha-Body (Buddha-kāya),” trans. Hirano Umeyo. The Eastern Buddhist 6, no. 1(1973), pp. 25-53.

68) 천은사 불감에 대해서는 정은우, 「여말선초의 금동불감 연구-순천 송광사 高峰國師 불감을 중심으로」, 『불교미술사학』 15(불교미술사학회, 2013); 국립중앙박물관, 『천은사의 불교미술 (附錄 연곡사의 불교미술)』(국립중앙박물관, 2009), p. 76; 문현순, 「高麗時代 末期 金銅佛龕의 硏究」, 『美術史學硏究』 179(한국미술사학회, 1988), pp. 38-39.

69) 이곡(李穀, 1298~1351)의 「金剛山長安寺重興碑」에 따르면, 기황후는 1343년 (至正 3년)에 장안사를 중수했으며, 비로자나불·노나사불·석가불을 봉안했다고 한다. 각각의 법신·보신·화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삼신불임을 알 수 있다. 「金剛山長安寺重興碑」 원문은 『동문선(東文選)』 제 118권 비명(碑銘)에 수록되어 있다.

70) 수나라 때 활동한 천태대가 지의(智顗: 538~597)가 『妙法蓮華經文句』(T no. 1718, 34.1a-149a)에서 법신을 비로자나, 보신을 노사나, 화신을 석가모니불로 천명한 영향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이 세 가지 부처를 삼신을 형상화할 때 사용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삼신사상의 발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Youn-mi Kim (김연미), “A Ritual Embodied in Architectural Space: The The Uṣṇīṣavijayā Dhāraṇī and Yingxian Timber Pagoda from the Liao Empire,” International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30, no. 2(2020): 75-84 참조.

71) 주린지 소장 불화에 대해 말씀해 주신 익명의 심사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72) 나옹의 삼보에 대한 가르침은 『나옹화상어록』의 「正朝六道普說」에 잘 설명되어 있다. 원문과 번역은 이능화편, 조선불교통사역주편찬위원회 역편, 앞의 책, pp. 702-705. 나옹은 선종 승려답게 불법승 삼보를 강조하면서도, 불보와 법보를 마음으로 연결짓고 있다.

73) 노사나불의 도상과 변천에 대해서는 조수경, 「朝鮮時代 說法印 盧舍那佛畵 圖像 硏究」(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5) 참조.

Fig. 1.
Buildings of Hoeamsa 檜巖寺 in the Late Koryŏ period (Han Chiman [Han Jiman], “Koryŏ sidae Sŏnjong sawŏn kwa Hoeamsa”, p.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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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Site Plan of Hoeamsa (ⓒKyŏnggi munhwajae yŏn'guwŏ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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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Northern Liang Stupa Dedicated by Gao Shanmu 高善穆. Northern Liang 428CE. Gansu Provincial Museum (ⓒ Gansu Provinci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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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Main Buddha Hall of Fengguosi 奉國寺. Yi Prefecture, Liaoning Province, China. Liao dynasty 1020CE (ⓒXinhua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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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Seven Buddhas of the Past at the Main Buddha Hall of Fengguosi. Yi Prefecture, Liaoning Province, China. Liao dynasty ca. 1020CE (ⓒPhotograph by Youn-m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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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Seven Buddhas of the Past on the Miniature Wooden Pagoda, Excavated from the Qingzhou White Pagoda 慶州白塔. Liao dynasty 1047-1049CE (ⓒPhotograph by Youn-m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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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Archaeological Remains of Pogwangjŏn 普光殿 at the Hoeamsa site (Kyŏnggido Pangmulgwan and Kijŏn Munhwajae Yŏn'guwŏn. Hoeamsa Ⅲ,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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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Plan of Kak’wangjŏn at Hwaŏmsa. Kurye County, South Chŏlla Province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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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Plan and Photography of the Seven Buddhas of the Past at the Main Buddha Hall of Fengguo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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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Archaeological Remains of the Tripitaka Hall at the Hoeamsa site (Kyŏnggido Pangmulgwan and Kijŏn Munhwajae Yŏn'guwŏn.Hoeamsa Ⅱ,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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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Archaeological Remains of Arhat Hall at the Hoeamsa site (Kyŏnggido Pangmulgwan and Kijŏn Munhwajae Yŏn'guwŏn. Hoeamsa Ⅱ,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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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Coomparison of the Volumes of a Standing Statue and a Seated Statue with the Same Height (ⓒYoun-mi Kim and Min-jun H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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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Gilt-bronze Portable Shrine of Ch’ŏnŭnsa in Kurye County, Koryŏ 14th century, Treasure no. 1646 (ⓒCh’ŏnŭ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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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The Three Bodies of the Buddha (trikāya) Embodied along the North-South Axis of the Hoeamsa Precinct (ⓒPhotograph by Youn-m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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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Comparison of the Five Buddhas Enshrined at Hoeamsa and the Buddhas Painted in the Assemblies of the Five Buddhas at Jurinji 十輪寺 (ⓒYoun-m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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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The Three Jewels (triratna) and the Three Bodies of the Buddha (trikāya) Embodied along the East-West Axis and the North-South of Axis of the Hoeamsa Precinct (ⓒYoun-mi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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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Crowned Rocana Buddha with Preaching Mudra, Feilaifeng 飛來峰 in Hangzhou, Zhejiang Province. Northern Song dynasty, 1022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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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회암사지 발굴단지와 「천보산회암사수조기」 서술 내용 대조
발굴단지와 서술 영역 「천보산회암사수조기」서술 내용13
6단지 보광전 내가 보건대 보광전(普光殿)의 5칸은 남쪽으로 면했다.
7-8단지 중심축 전각들 그 뒤에는 설법전(說法殿) 5칸이 있으며,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 1칸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 3칸이 있다.
7-8단지 동서 전각들 정청의 동서에는 방장 2곳이 있어서 모두 3채인데, 동쪽 방장 동편에는 나한전 3칸이 있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전(大藏殿) 3칸이 있다. 입실료(入室寮)는 동쪽 방장 앞에 있어 서편으로 면했고, 시자료(侍者寮)는 서쪽 방장 앞에 있어서 동편으로 면했다. 설법전(說法殿) 서편에는 조사전(祖師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는 수좌료(首座寮)가 있으며, 설법전 동편에는 영당(影堂)이 있고 또 그 동쪽에는 서기료(書記寮)가 있어 모두 남쪽을 면했다.
5-6단지 보광전 주위 전각들 영당 남쪽에 서편으로 면한 것은 향화료(香火寮)이고, 조사전 남쪽에 동편으로 면한 것은 지장료(知藏寮)이다. 보광전 동쪽 조금 남쪽으로는 전단림(旃檀林)이 있어 동운집(東雲集)이 서편으로 면했고, 서운집(西雲集)이 동편으로 면해 있다. 동운집 동쪽에는 동파침(東把針)이 있어 서편으로 면했고, 서운집 서쪽에는 서파침(西把針)이 있어 동편으로 면했는데, 천랑(穿廊)이 3칸으로서 서승당(西僧堂)에 접해 있고 보광전과 이어진다.
3-4단지 전각들 정문(正門)은 3칸이다. 정문의 동쪽 랑(廊)은 6칸으로서 동객실(東客室) 남쪽에 접해 있다. 정문의 서편으로 열중료(悅衆寮) 7칸이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꺾이어 7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료(東寮)이다. 정문 동쪽에 서편으로 면한 5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객실이요. 그 서쪽이 동편으로 면한 5칸은 서객실(西客室)이다. 열중료 남쪽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쪽에 동편으로 면한 5칸은 욕실(浴室)이며, 부사료(副寺寮) 동쪽에 있는 건물이 미타전(彌陀殿)이다. 도사료(都寺寮) 5칸은 남쪽으로 면했으며, 그 동쪽에는 고루(庫樓)가 있고 그 남쪽에는 심랑(心廊) 7칸이 있어 미타전에 접해 있다. 그 북쪽에는 장고(醬庫) 14칸이 있으며, 고루 동쪽 11칸에는 고(庫)의 문이 있고, 누각으로부터 동쪽으로 4칸이 있으며, 또 꺾어져 북쪽으로 6칸이 있고 또 꺾이어 서쪽으로 2칸이 있다. 그 서쪽은 비어 있고 바로 정문(正門) 조금 동편에 종루(鐘樓) 3칸이 있고 종루 남쪽에는 5칸이 있는데, 사문루(沙門樓)이며, 종루 서편 동쪽으로 면한 것은 접객청(接客廳)이다. 종루에서 동북쪽으로 향하여 지빈료(知賓寮)가 있다. 접객청 남쪽 동편으로 면하여 양노방(養老房)이 있고 지빈료 동편 서쪽으로 면하여 전좌료(典座寮)가 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꺾이어 7칸이 있는데 향적전(香績殿)이요, 향적전 동쪽과 고루의 남쪽에는 원두료(圓頭寮) 3칸이 있어 서쪽을 면했다.
2단지 전각 향적전 남쪽에 있는 4칸 마구(馬廐)다.
불상 관련 기록 집이 모두 262칸이요, 불구(佛軀)는 15척(尺)이나 되는 것이 7구이다. 관음상(觀音像)은 10척으로서 각전(覺田)이 시주한 것이다.

13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東文選』 제73권 기(記)에 수록되어 있다. 본고의 번역은 김영재의 2018년 번역과 임창재의 1968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을 원문과 대조하여 재구성했다. 김영재 번역은 김영재, 「청규로부터 본 회암사지의 건축적 특성과 그 의미」,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Ⅵ-회암사의 건축』(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8), p. 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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