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1; 2021 > Article |
|
1) 주수완 교수는 보광전에 삼신불과 아미타불·약사불의 5존불을 모셨을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주수완, 「조선 전반기 불교건축과 예배상과의 관계에서 본 도상의미 연구」, 『강좌미술사』 36(2011), pp. 396-436. 필자는 5불 봉안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고에서 살펴볼 여러 정황상 삼불을 모셨을 가능성이 확률상 더 크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2) 박용진, 「고려시대 회암사의 역사와 국외 교류」,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회암사와 불교사』(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10-11; 오세덕, 「양주 회암사지 유구 분석을 통해 본 시기성과 조선시대 사찰에 미친 영향」,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Ⅵ-회암사의 건축』(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8), p. 80. 「회암사유 왕자승원경국사수적」에는 회암사 남루의 동벽과 서벽 등에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의 출가한 넷째 아들인 원경국사(元敬國師, ?~1183)가 직접 쓴 글씨가 있었다는 기록도 전하고 있다.
4) 지공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는 강호선, 「인도승려 지공화상의 입국과 그 영향」,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회암사와 불교사』(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96-137 참조.
5) 지공은 1326년~1328년 고려를 방문했었다. 지공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受記)와 나란타사 이야기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들과 분석은 박용진, 앞의 논문, p. 17-22 참조.
6) 나옹의 고려 후기 임제종의 도입에 대해서는 김용태, 「한국불교에서 임제종 수용의 역사적 의미」,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회암사와 불교사』(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212-252 참조.
9)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동문선(東文選)』 제73권 기(記)에 수록되어 있다. 「천보산회암사수조기」 중 앞부분의 기록에 따르면, 나옹이 입적한 후 그의 문도였던 절간익륜(絶磵益倫)과 각전(覺田)이 이색을 찾아와 중창의 시말을 기록하는 글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절간이 “보제(普濟, 즉 나옹)가 이미 입적하여 명(銘)을 쓰고 비석을 세웠다(普濟旣寂 浮屠銘立石矣)”라고 하며 이색에게 절의 중창에 대해서도 글을 남겨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이 글은 나옹의 비가 건립된 1377년 6월 이후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10) 宏壯美麗 甲于東國 遊覽江湖行遍者 皆曰 雖中國未之多見 非誇言也. 한국고전번역원 임창재의 1968년 번역을 참조하여 필자가 재번역. 별다른 설명이 없는 경우, 아래 번역들도 동일함.
11) 그러나 「천보산회암사수조기」의 행간을 읽어보면 당시 회암사의 상황이 상당히 위태로웠음을 알 수 있다. 이색은 나옹의 제자였던 각전이 글을 부탁하며, “우리 스승은 이미 돌아가시고 우리 무리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절의 이루어짐이 예전과 같을지 알 수 없다(吾師旣逝矣 吾徒皆散而之四方矣 寺之得如前日未可知也)”라 했다고 기록했다. 나옹의 입적 이후 그의 제자들이 흩어져 차후 회암사의 운영이 잘 유지될지, 나옹의 제자들의 명맥이 회암사에서 이어질지 불분명한 상태가 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2) 한지만, 「고려시대 선종사원과 회암사」,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Ⅴ-회암사의 건축』 (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7), p. 115; 한지만, 「회암사지 고원 영역의 전각 배치에 대하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30, no. 7(2014). 김상태는 7-8단지의 건물 유구는 「천보산회암사수조기」와 거의 일치하나, 5-6단지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김상태, 「회암사지의 건축사적 위치와 가치」,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Ⅴ-회암사의 건축』(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7), p. 64.
13) 「천보산회암사수조기」는 『東文選』 제73권 기(記)에 수록되어 있다. 본고의 번역은 김영재의 2018년 번역과 임창재의 1968년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을 원문과 대조하여 재구성했다. 김영재 번역은 김영재, 「청규로부터 본 회암사지의 건축적 특성과 그 의미」,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Ⅵ-회암사의 건축』(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8), p. 64 참조.
14) 위에 인용된 「천보산회암사수조기」 참조. 번역에 따라 나옹의 제자였던 각전이 15척 불상 7구를 모두 조성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천보산회암사수조기」원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10척 관음상만 각전의 시주로 볼 수 있다. 또한, 나옹이 중창을 맡았던 사찰의 주요 불상의 도상을 정하고 제작하는 중요한 문제는 당연히 나옹이 주도적으로 관여했을 것이며, 이를 모두 그의 제자가 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16) 요나라 칠불에 대해서는 Qi Lu, “Grassland, Urban Space, and Ways of Life: The Seasonal Imperial City Qingzhou in the Khitan Liao Dynasty, 1031CE-1125CE,”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2019), pp. 114-119; 于博, 「从辽塔造像看密教对辽代七佛造像的影响」, 『北方文物』 no. 3(2015), pp. 67-71.
17) 보광전지 발굴 결과에 대해서는 경기도박물관, 경기문화재연구원, 『檜巖寺Ⅲ-5·6단지 발굴조사 보고서(본문)』(경기도박물관, 2009), pp. 26-37, pp. 446-447, pp. 452-453 참조.
21) 고려시대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에는 현재 내진칸과 삼불의 크기가 맞지 않게 배치되어 있으나, 이 삼불은 수덕사 대웅전에 모셔졌던 원래의 불상들이 아니다. 이 석가·아미타·약사 삼불은 1639년에 제작되었으며, 전라북도 남원 귀정사(歸淨寺)에 있던 것을 이운해온 것이다. 또한 본존의 대좌만 1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는데, 이 본존 대좌는 내진을 이루는 칸에 맞게 안치되어 있다. 본존 대좌에 대해서는 정은우, 「수덕사 대웅전의 14세기 목조대좌」, 『美術史論壇』 16(2003) 참조.
22) Nancy S. Steinhardt, Liao Architecture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7), pp. 52-53, 56, 224; idem, “The Architectural Landscape of the Liao and Underground Resonances,” in Gilded Splendor: Treasures of China’s Liao Empire, ed. Hsueh-man Shen (New York: Asia Society, 2006), p. 45.
23) 보광전 발굴 때 약간씩 크기가 차이나는 소조 나발편들이 발굴되었는데, 이 소조편들이 보광전 주불의 나발들이었는지는 차후에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성을 기울여 제작한 대형불상들이었다면, 두부의 위치에 따라 나발의 크기를 조절하여 도식화를 피하고 좀 더 자연스러운 불상의 머리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24) 나옹의 생애와 중국에서의 활동은 이색이 찬한 「普濟尊者謚禪覺塔銘 幷序」와 각굉(覺宏)이 찬한 「高麗國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謚禪覺懶翁和尙行狀」 참조. 원문과 한글 번역은 이능화 편, 조선불교통사역주편찬위원회 역편, 『역주 조선불교통사 3』(동국대학교출판부, 2010), pp. 641-673. 이 두 가지 글은 원나라 황제가 나옹을 광제사에 머물게 했다고 적었으나,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은 황제가 나옹을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가 되게 했다고 적고 있다. 『나옹화상어록』의 해당 부분은 위의 책, pp. 675-676.
25) 원나라의 삼불상에 대해서는 심주완, 「동아시아 삼불상 도상 연구」(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21), pp. 144, 190-192 참조. 특히 원나라에서 숭앙되었던 티베트 불교에서 삼불상을 선호했으나, 원나라에서 유행했던 삼불은 석가삼세불·비로자나삼세불·삼신불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고 하며 삼불상의 봉안이 티베트 불교 사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선종 승려였던 나옹도 이러한 불전의 불상배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28) 한지만 교수는 3단지에 위치한 동쪽을 향해 지어진 정면 2칸 측면 2칸의 독립된 건물을 관음전으로 추정한 바 있다. 한지만, 앞의 논문(2017), p. 114, 도11 참조.
33) 불상의 소재면에서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목조나 건칠 또는 두가지 소재를 혼용했을 가능성과 빠른 중건 속도에 맞추기 위해 조성이 용이한 소조상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목재나 건칠 불상을 모셨을 경우 15척 불상의 흔적이 현 회암사 유구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된다. 회암사는 발굴을 통해 불에 타서 폐사된 것이 밝혀졌는데, 목조나 건칠은 화재에 전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4) 이경미, 「고려·조선의 法寶信仰과 經藏建築의 변천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pp. 44-45.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회암사 대장전의 월대 상부에서는 윤장대(輪藏臺) 하부 석재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재가 발굴되었다. 이경미는 윤장대가 고려시대 대장전 내부에 모셔져 있다가, 조선시대 월대로 옮겨지면 대장전 내불에 불단을 놓고 불상을 모셨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대장전 유구에서 뚜렷한 중창이나 변형의 흔적이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가능성은 일단 유보해 두고자 한다.
36) 아쉽게도 현존 대장전 건축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건축이다. 고려시대 대장전은 불상을 봉안한 경우도 있고 봉안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고려시대 대장전에 보편적으로 봉안한 불상의 종류에 대해서 확실히 알기는 어려우나 대부분 석가상 또는 비로자나상이었을 것이다. 석가모니불은 경전 안에 가르침을 설한 부처이고, 비로자나불은 법신(法身)으로서 경전 안에 불법(佛法)과 동일한 존격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부처는 대장전에 모시기에 가장 적합한 존격이다.
38) 설법전 유구에서는 불단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틀림없이 불상을 봉안했을 보광전 유구와 미타전·관음전 유구에서도 불단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불단 발굴의 여부만으로 불상의 안치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설법전 발굴유구에 대해서는 경기도박물관, 기전문화재연구원, 앞의 책(2003), pp. 75-78.
40) 이 주칸 거리는 2차, 3차 유구라는 점에서 추정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1차 유구가 2차, 3차 유구에 비해 작았을 것이라는 증거도 아직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1차 유구의 크기도 2차와 3차 유구와 유사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추정을 해 보았다. 차후 1차 유구에 대한 좀 더 정밀한 발굴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41) 동아시아 삼불은 심주완 박사가 최근 박사논문에서 매우 상세하게 다루었다. 심주완, 앞의 논문, pp. 1-437. 삼불에 대한 명칭은 통일이 되지 않아서 현재 학계에서 삼세불, 삼방불 등으로도 불린다. 김창균, 「조선시대 삼신삼세불 도상 연구」, 『강좌미술사』 32(2009); 황규성, 「조선시대 삼세불 도상에 관한 연구」, 『미술사학』 20 (2006).
42) 요나라 조양북탑 12층 사리공 동벽과 사리기에 새겨진 1043년 선각 삼불상처럼 주존이 노사나불인 예외적인 사례들도 간혹 존재하나, 이는 매우 특수한 사례이다. 조양북탑 삼불에 대해서는 Youn-mi Kim (김연미), “A Ritual Embodied in Architectural Space: The Uṣṇīṣavijayā Dhāraṇī and Yingxian Timber Pagoda from the Liao Empire,” International Journal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30, no. 2(2020), pp. 76-79, 91-93; Youn-mi Kim (김연미), “Eternal Ritual in an Infinite Cosmos: The Chaoyang North Pagoda (1043-1044),” Ph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2010), pp. 77-112 참조.
45) 이러한 기록은 이색의 「西天提納薄陀尊者浮屠銘」에 실려 있다. 지공의 법원사와 金씨 부인에 대해서는 윤기엽, 「在元 高麗人 관련의 大都寺院」, 『불교학연구』 11(2005), pp. 11-13 참조.
48) 「示淑寧翁主妙善」, 『나옹화상어록』. 원문과 한글 번역은 위의 책, pp. 734-736 참조. 숙녕옹주는 여주 신륵사 보제사리석종기(普濟舍利石鐘記)의 단월질(檀越秩)에 유일한 옹주로 등장하는 등 나옹을 특별히 따랐던 사람인 것 같다.
52) 『나옹화상어록』에는 대령소참(對靈小參) 등 죽은 이의 영가를 위해 했던 법문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미타불이나 극락정토가 언급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최상서청대령소참(崔尙書請對靈小參)」에는 무수한 불국토에 무수한 석가가 계심을 영가에게 설한다. 위의 책, pp. 706-707. 이를 통해 나옹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 현실세계가 그대로 극락이라는 선종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계속 그리워하는 여동생, 염불 수행을 주로 하는 신도들에게는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는 수행을 권하기도 했는데, 참선을 위한 근기가 적은 사람들에게만 간혹 이러한 타력수행을 권한 것 같다. 『나옹화상어록』의 관련 원문들은 앞의 책, pp. 736, 755, 760.
57) 회암사 보광전에 원경왕후의 자수불이 봉안되어 있었음은 김정희 교수가 밝힌 바 있다. 김정희, 「조선 전반기 회암사의 왕실후원자와 왕실발원 미술」,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 회암사와 왕실문화』(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15), pp. 37-41. 필자는 여기에 더해 자수불의 제작년대를 조금 더 좁혀 보고, 보광전 불상과의 관계를 추정해 보았다.
59) “乃令宮人繡成千佛一軸八難觀音梵王帝釋各一軸.” 한문에 띄어쓰기가 없는 관계로, 기존 번역들에서는 이 문장의 내용을 천불, 팔난, 관음, 범왕, 제석의 5폭의 자수불, 또는 천불, 팔난관음, 범왕, 제석의 4폭의 자수불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문맥상 천불은 확실히 1폭이고, ‘팔난’은 하나의 화제가 아니므로 ‘팔난관음’을 팔난에서 구제해 주는 관음 1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범왕과 제석은 보통 한쌍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고, 문맥상 ‘팔난관음’과 ‘범왕제석’이 대구를 이루기 때문에, 이 두 소재가 각각 한 폭을 이루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62) 보광전에 약사불, 아미타불, 관음 등을 주존으로 모신 경우도 있다. 분황사, 실상사, 남해 보리암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나 이들 보광전의 건축연대와 불상의 제작연대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66) 佛眞法身猶若虛空 應物現形如水中月 竪拂子云 釋迦老子來也 在山僧拂子頭上 現妙色身. 「內普說」, 『나옹화상어록』. 원문은 위의 책, p. 684. 번역은 필자가 수정 및 재구성.
67) 삼신의 명칭은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한역의 과정에서, 보신은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칭해지고, 화신은 색신, 응신(應身)으로도 칭해지는 등 다양한 명칭이 생겼다. 삼신사상의 발전과 내용에 대해서는, 李箕永, 「佛身에 관한 硏究」, 『佛敎學報』 3(불교문화연구원, 1966); ルーベン·L·F·アビト, 「仏身論の展開—三身説の成立をめぐって」, 『宗教研究』 52, no. 2(1978), pp. 111-131; John J. Makransky, Buddhahood Embodied: Sourcesof Controversyin India and Tibet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7); Guang Xing, The Conceptof the Buddha: Its Evolution from Early Buddhism tothe Trikāya Theory (London: Routledge Curzon, 2005); Nagao Gadjin, “On the Theory of Buddha-Body (Buddha-kāya),” trans. Hirano Umeyo. The Eastern Buddhist 6, no. 1(1973), pp. 25-53.
68) 천은사 불감에 대해서는 정은우, 「여말선초의 금동불감 연구-순천 송광사 高峰國師 불감을 중심으로」, 『불교미술사학』 15(불교미술사학회, 2013); 국립중앙박물관, 『천은사의 불교미술 (附錄 연곡사의 불교미술)』(국립중앙박물관, 2009), p. 76; 문현순, 「高麗時代 末期 金銅佛龕의 硏究」, 『美術史學硏究』 179(한국미술사학회, 1988), pp. 38-39.
69) 이곡(李穀, 1298~1351)의 「金剛山長安寺重興碑」에 따르면, 기황후는 1343년 (至正 3년)에 장안사를 중수했으며, 비로자나불·노나사불·석가불을 봉안했다고 한다. 각각의 법신·보신·화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삼신불임을 알 수 있다. 「金剛山長安寺重興碑」 원문은 『동문선(東文選)』 제 118권 비명(碑銘)에 수록되어 있다.
70) 수나라 때 활동한 천태대가 지의(智顗: 538~597)가 『妙法蓮華經文句』(T no. 1718, 34.1a-149a)에서 법신을 비로자나, 보신을 노사나, 화신을 석가모니불로 천명한 영향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이 세 가지 부처를 삼신을 형상화할 때 사용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삼신사상의 발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Youn-mi Kim (김연미), “A Ritual Embodied in Architectural Space: The The Uṣṇīṣavijayā Dhāraṇī and Yingxian Timber Pagoda from the Liao Empire,” International Journal of Buddhist Thought and Culture 30, no. 2(2020): 75-84 참조.
발굴단지와 서술 영역 | 「천보산회암사수조기」서술 내용13 |
---|---|
6단지 보광전 | 내가 보건대 보광전(普光殿)의 5칸은 남쪽으로 면했다. |
7-8단지 중심축 전각들 | 그 뒤에는 설법전(說法殿) 5칸이 있으며,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 1칸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 3칸이 있다. |
7-8단지 동서 전각들 | 정청의 동서에는 방장 2곳이 있어서 모두 3채인데, 동쪽 방장 동편에는 나한전 3칸이 있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전(大藏殿) 3칸이 있다. 입실료(入室寮)는 동쪽 방장 앞에 있어 서편으로 면했고, 시자료(侍者寮)는 서쪽 방장 앞에 있어서 동편으로 면했다. 설법전(說法殿) 서편에는 조사전(祖師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는 수좌료(首座寮)가 있으며, 설법전 동편에는 영당(影堂)이 있고 또 그 동쪽에는 서기료(書記寮)가 있어 모두 남쪽을 면했다. |
5-6단지 보광전 주위 전각들 | 영당 남쪽에 서편으로 면한 것은 향화료(香火寮)이고, 조사전 남쪽에 동편으로 면한 것은 지장료(知藏寮)이다. 보광전 동쪽 조금 남쪽으로는 전단림(旃檀林)이 있어 동운집(東雲集)이 서편으로 면했고, 서운집(西雲集)이 동편으로 면해 있다. 동운집 동쪽에는 동파침(東把針)이 있어 서편으로 면했고, 서운집 서쪽에는 서파침(西把針)이 있어 동편으로 면했는데, 천랑(穿廊)이 3칸으로서 서승당(西僧堂)에 접해 있고 보광전과 이어진다. |
3-4단지 전각들 | 정문(正門)은 3칸이다. 정문의 동쪽 랑(廊)은 6칸으로서 동객실(東客室) 남쪽에 접해 있다. 정문의 서편으로 열중료(悅衆寮) 7칸이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꺾이어 7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료(東寮)이다. 정문 동쪽에 서편으로 면한 5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객실이요. 그 서쪽이 동편으로 면한 5칸은 서객실(西客室)이다. 열중료 남쪽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쪽에 동편으로 면한 5칸은 욕실(浴室)이며, 부사료(副寺寮) 동쪽에 있는 건물이 미타전(彌陀殿)이다. 도사료(都寺寮) 5칸은 남쪽으로 면했으며, 그 동쪽에는 고루(庫樓)가 있고 그 남쪽에는 심랑(心廊) 7칸이 있어 미타전에 접해 있다. 그 북쪽에는 장고(醬庫) 14칸이 있으며, 고루 동쪽 11칸에는 고(庫)의 문이 있고, 누각으로부터 동쪽으로 4칸이 있으며, 또 꺾어져 북쪽으로 6칸이 있고 또 꺾이어 서쪽으로 2칸이 있다. 그 서쪽은 비어 있고 바로 정문(正門) 조금 동편에 종루(鐘樓) 3칸이 있고 종루 남쪽에는 5칸이 있는데, 사문루(沙門樓)이며, 종루 서편 동쪽으로 면한 것은 접객청(接客廳)이다. 종루에서 동북쪽으로 향하여 지빈료(知賓寮)가 있다. 접객청 남쪽 동편으로 면하여 양노방(養老房)이 있고 지빈료 동편 서쪽으로 면하여 전좌료(典座寮)가 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꺾이어 7칸이 있는데 향적전(香績殿)이요, 향적전 동쪽과 고루의 남쪽에는 원두료(圓頭寮) 3칸이 있어 서쪽을 면했다. |
2단지 전각 | 향적전 남쪽에 있는 4칸 마구(馬廐)다. |
불상 관련 기록 | 집이 모두 262칸이요, 불구(佛軀)는 15척(尺)이나 되는 것이 7구이다. 관음상(觀音像)은 10척으로서 각전(覺田)이 시주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