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Korean J Art Hist > Volume 311; 2021 > Article |
|
1) 잡상에 관한 연구는 조원창, 「고려시기 잡상연구」, 『지방사와 지방문화』 16/1(지방사학회, 2013), pp. 7-40; 윤나영, 「고려와 조선의 마루장식기와 연구」(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참조. 범자문 기와에 대해서는 엄기표, 「양주 회암사지 출토 범자 진언명(眞言銘) 기와의 특징과 의의」, 『문화재』 50/2(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pp. 4-25.
3) 명종 21년(1566)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566-1595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옛 회암사라고 쓴 1595년 기록으로 보면 이미 훼손된 후 시간이 좀 흐른 것으로 볼 수 있고, 늦어도 선조 초년기에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 이색, 『목은집』에 실린 「천보사회암사수조기」는 『회암사지박물관 개관 기념 묻혀있던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왕실사찰 檜巖寺, 그 위용을 드러내다』(회암사지박물관, 2012), pp. 96-98 참조. 이색은 “회암사는 승려 3,000여명이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중략) 높이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이 봉안되었으며, 아름답고 고와서 동국 제일이다.”라고 썼지만 이를 입증할 불상과 보살상은 파편도 발견되지 않았다.
6) 대좌의 상면 중앙에서 뒤편으로 19cm 간격으로 구멍이 두 개 뚫려있고, 반대쪽 면에는 13cm 간격으로 두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 수좌료지에서도 훼손이 심하지만 대좌로 보이는 석재가 나왔다. 『묻혀있던 조선 최대의 왕실사찰 檜巖寺』(경기도박물관, 2003), p. 81. 13cm 간격의 구멍이 있는 쪽이 윗면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불신편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7) 경기도박물관과 회암사지박물관에서 발간한 도록에 모두 갈색, 혹은 백색 사암으로 표기했다. 2001년에 발간된 경기도박물관·기전문화재연구원 보고서에서는 석재의 종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京畿道 楊州郡·경기도박물관·畿甸文化財硏究員, 『檜巖寺I』(2001), p. 235.
9) https://en.wikipedia.org/wiki/Tuff (검색일: 2021.5.10.) 이스터제도의 모아이 석상이 대표적인 응회암 조각상이다.
10) 이암, 역암 등 다양한 종류의 퇴적암에 대해서는 한국광물자원공사 홈페이지의 자료들을 검토했다. https://www.kores.or.kr/hmine/ro/ro03/ro0302/mineUser/getAboutRocks.do?mine_kind_c=10 (검색일: 2021.5.10.)
11) https://www.kores.or.kr/views/cms/hmine/ro/ro02/ro020101.jsp (검색일: 2021.5.10.) 우리나라에서 흔히 알려진 화성암은 제주도 용두암에서 볼 수 있다. 제주도의 많은 화성암은 비교적 큰 구멍이 눈에 잘 띄는 현무암이다.
12) 대부광산의 형성 연대는 화산이 폭발했던 당시 퇴적된 입자에 대한 칼륨-아르곤(K-Ar) 연대 측정을 통해 추정되었다. (검색일: 2021.05.12.)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101940000&pageNo=1_1_1_1
13) https://www.ecomuseum.kr/bbs/board.php?bo_table=collection&wr_id=19 (검색일: 2021.05.12.).
14) http://www.hantangeopark.kr/bbs/content.php?co_id=sight_01_07 (검색일: 2021.05.12.) 한탄강 지질공원 웹사이트 참조.
15) https://scienceon.kisti.re.kr/srch/selectPORSrchReport.do?cn=KAR2011060130 (검색일: 2021.05.28).
17) http://www.iksaeng.com/hub/hubMain.jsp?hubnos=tzp276af&with=kr&from=iks (검색일: 2021.05.28.)
18) 생기령 광산은 1907년에 개발된 광산이라고는 하지만 근대적인 광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기력에서는 고령토와 갈탄이 채굴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고령토보다 갈탄이 더 중요해서 갈탄을 캤지만 광복 후에는 고령토 생산에 주력하여 현지는 북한의 주요 도자기 생산지라고 한다. 생기령 광산에 대해서는 다음의 북한 정보 참조 (검색일: 2021.05.14.). https://nkinfo.unikorea.go.kr/nkp/search/search.do?eicode=S_336996&query=%EC%83%9D%EA%B8%B0%EB%A0%B9%EA%B4%91%EC%82%B0
19) <동아일보> 1997년 6월 25일자 기사 (검색일: 2021.05.13.).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19970625/7264447/1
21) 한지만·이상해, 「檜巖寺의 연혁과 正廳·方丈址에 관한 복원적 연구」, 『건축역사연구』 17/6(건축역사학회, 2008), pp. 45-65; 오세덕, 「양주 회암사지 유구 분석을 통해 본 시기성과 조선시대 사찰에 미친 영향」, 『불교미술사학』 28(불교미술사학회, 2019), pp. 101-125.
22) 회암사지 부도에 관해서는 다양한 연구들이 있다. 엄기표, 「檜巖寺址의 石造浮屠와 塔碑에 대한 考察」, 『문화사학』 21(문화사학회, 2004), pp. 765-805; 박경식, 「회암사지 부도탑에 대한 고찰」, 『회암사지 부도탑』(회암사지박물관, 2013), pp. 38-65; 강병희, 「楊州 檜巖寺址 浮屠塔」, 『회암사지 부도탑』(회암사지박물관, 2013), pp. 68-113.
23) 엄기표, 「양주 회암사지 출토 범자 진언명(眞言銘) 기와의 특징과 의의」, pp. 4-25; 윤여훈, 「楊洲 檜巖寺址出土 朝鮮時代 瓦當 硏究」, 『한국기와학회 학술대회 발표자료집』(2016).
25) 이봉춘, 「孝寧大君의 信佛과 조선전기 불교」, 『불교문화연구』 7/1(불교문화연구회, 2006), pp. 89-120. 그의 다양한 불사가 조선 초기 불교미술에 미친 영향과 의의에 대해서는 김정희, 「孝寧大君과 朝鮮 初期 佛敎美術 : 後援者를 통해 본 朝鮮 初期 王室의 佛事」, 『미술사논단』 25(시공사, 2007), pp. 107-150.
27) 흥천사 종에 대해서는 鄭永鎬, 「한국銅鐘의 특성과 樣式변천」 『韓國의 美 23: 金屬工藝』(中央日報 季刊美術社, 1985). 명문은 韓繼禧가 짓고, 글씨는 鄭蘭宗이 썼다고 한다.
28) 효령대군의 목격담은 『世祖實錄』 권33, 10년 5월 甲寅조.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005002_001 (검색일: 2021.05.29.)
29)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4013_001 (검색일: 2021.05.29.) 『세종실록』 세종 24년 4월 13일 庚申조. 단적으로 건물 중창을 둘러싼 유신들의 반대 상소와 이에 대응하는 세종, 성종 등의 태도를 보면 효령대군의 회암사 불사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이종수, 「조선시대 회암사의 역사와 위상」, 『회암사와 불교사』(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56-93.
31) 이수정, 「檜巖寺址 塔 硏究」, 『회암사지 부도탑』(회암사지박물관, 2013), pp. 151-152. 1464년에 있었던 『원각경』 강의 내용은 <圓覺寺碑銘>에 기록된 것이고, 원각법회는 『세조실록』에 실린 기사라서 이 두 사건이 연대는 맞지 않지만 같은 사안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효령대군이 간경도감에서 일을 했던 때이므로 별개의 사건일 수도 있다. 인용민, 앞의 글, p. 47.
33) 최소림, 「黑石寺 木造阿彌陀佛坐像 硏究: 15世紀 佛像樣式의 一理解」, 『강좌 미술사』 15(한국미술사연구소, 2000), pp. 77-100; 강희정, 「조선 전기 불교와 여성의 역할: 불교미술의 조성기를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41(아시아여성연구소, 2002), pp. 269-297.
34) 고재용, 「회암사지 평기와의 시기별 특성」, 『회암사의 기와』(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20), pp. 110-149; 이동준, 「회암사지 기와의 공급과 수요」, 『회암사의 기와』(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20), pp. 194-225.
35) 명 조각에 영향을 준 라마교 계통 불교조각과 원 지배 이후 고려의 티베트계 불상에 대해서는 문현순, 「明初期 티베트式 佛像의 特徵과 영향」, 『미술사연구』 13(미술사연구회, 1999), pp. 119-152; 정은우, 「高麗 後期菩薩像 硏究」, 『미술사학연구』 236(한국미술사학회, 2002), pp. 97-131 참조.
37)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최종준이 보시한 다라니가 들어있어 그의 졸년인 1239년경 조성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문명대, 「守國寺 高麗(1239년) 木阿彌陀佛坐像의 硏究」, 『미술사학연구』 255(한국미술사학회, 2007), pp. 35-65. 원래 이 불상은 철원 심원사에 봉안되었던 것이 이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복장발원문에서 1389년과 1562년 두 차례에 걸쳐 개금 및 중수가 이뤄졌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다라니의 판각연대와 불상 조성 연대가 일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1389년 개금발원문이 나온 만큼 이때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Stone Buddha Statue at Yeolamgok Temple Site, Namsan of Gyeongju2018 September;299(0)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