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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0; 2021 > Article
洪錫龜(1621-1679) 印章의 造形

Abstract

1968년 5월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알려진 홍석구의 묘에서 83방의 인장이 출토되었다. 홍석구는 17세기에 직접 인고를 그리고 인장을 새겼던 문인전각가였다.
홍석구의 생애를 李端夏의 「墓誌銘」과 鄭澔의 「墓碣銘」을 통해 재구성하여 그의 관직생활이 잦은 罷職과 復職, 그리고 外職으로 전전하며 進退과 은거를 반복했음을 밝혔다. 그의 개인적 불행이 전각에 전념하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인장의 양식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安東 金門에 영향을 받아 小篆과 玉筯篆을 비롯한 篆書 38체 등 書壇에 소개되었던 다양한 古篆體를 활용한 수준 높은 인장을 남기고 있다. 또한, 17세기 인장에서 유행하던 朱白相間法을 창의적으로 변형한 章法을 적용하고 孔方錢形 印章의 章法에서도 실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詞句印의 경우, 인문과 상형의 결합에 탁월한 조형감각이 두드러진다. 香佐兒, 酒甁, 投壺의 형상으로 인문을 암시하고, <第一江山>, <橋上老人>, <大明天下一書生> 등 인장은 인문으로 상형을 시도하였다. 인문과 상형의 결합이라는 양식적 특징은 漢代 印章을 모범으로 삼았던 명대 인장과는 다른 조선 인장의 예술적인 성취로 주목된다.

Abstract

In May 1968, 83 seals were excavated from the tomb of Hong Seok-gu, one of the literati in the mid-Joseon dynasty. Hong was a literator who designed and engraved the seal by himself in the 17th century.
The lifetime of Hong Seok-gu was reorganized through the Buried Epitaph(墓誌銘) by Lee Dan-ha(李端夏) and the Tombstone Inscription(墓碣銘) by Jeong Ho(鄭澔). which revealed that he was often dismissed from the public office and assigned to the local government. Therefore, he repeatedly resigned and retired from his office. It is assumed that his personal misfortune allowed him to devote his time and space in engraving the seals.
The style of his seals was influenced from the famous Andong Kim clan(安東 金門). He carved high-quality seals using various ancient seal script(古篆體) introduced in the calligraphy circles(書壇) with 38 seal script(篆書) including small seal script(小篆) and jade chopsticks seal script(玉筯篆). In addition, he applied composition techniques(章法) which were creatively transformed from the method of putting both depressed and embossed engraving into one seal(朱白相間法), a popular way in the 17th century. He also held his experimental point of view in the composition techniques of the seals shaped of an ancient coin(孔方錢).
Regarding the poetry seal(詞句印), his brilliant sense of modeling is noticeable in combining literature with figuration. Shapes such as a small table for a incense burner(香佐兒), a liquor bottle(酒甁), and an arrow throwing pot(投壺) implied literature, while seals carved with <Jeilgangsan(第一江山)>, <Gyosang-noin(橋上老人)> and <Daimyoung-cheonha-ilseosaeng(大明天下一書生)> were employed to attempt shaping with literature. The characteristic of this style is recognized as an artistic accomplishment of the seals in the Joseon dynasty, which was different from the seals of Ming dynasty following the style of the Han dynasty.

Ⅰ. 머리말

1968년 5월 20일, 남양홍씨 중앙종친회는 경기도 화성군 조산읍 원리 국사봉 아래 언덕에 있던 洪錫龜(1621-1679), 洪鎭宗(1649-1702) 부자의 묘 이장 작업을 진행하였다. 경부고속도로가 노선계획상 이곳을 통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장 작업을 진행하던 중에 홍석구묘 발치 쯤에서 白磁墓誌合 1점이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墓誌石이 아닌, 다양한 크기의 印材로 제작된 印章 83방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Fig. 1). 조선중기 문인전각가로 알려져 있던 홍석구의 인장 실물들이 약 3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출현한 것이었다. 이 인장들은 보존을 위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1
출토된 實印 예로서는 최대 규모인 홍석구 인장은, 실제 문인전각가의 무덤에서 출토되어 眞贋의 여부를 고민할 필요 없는 중요한 인장 자료로서 국내 인장 전문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김양동은 <第一江山> 인장의 회화성과 예서로 새긴 성명인의 웅장함에 주목하여 조선에서 최초로 인장을 예술적 미의 세계로 인식한 인물로 평가하였고, 박철상과 고재식 역시 김상헌의 추종자로서 회화성을 강조하고 옥저전을 많이 사용한 전각가로 평가하였다.2 최근에 조선시대 印章論에 관한 고찰과 함께 官印, 藏書印을 중심으로 시기별 특징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조선시대 인장에 관한 구체적인 양상이 상당 부분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다.3 그중 구자훈은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전적에 날인된 장서인 4천여 건의 시기별 특징을 분석하여 장서인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인장사를 구체적으로 조명하였다. 그는 홍석구에 관해서 간략한 생애와 함께 장서인으로 사용된 3방과 『근역인수』에 수록된 일부 인장을 분석하여 17세기 당시 유행하던 ‘경화권 전각양식’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당대 일류 문인전각가로서 동생 洪有龜(1632-1683)와 朗善君 李俁(1637-1693)를 비롯한 많은 문인들에게 직접 인장을 새겨주었고 후대 문인들의 장서인에서도 그의 인장 양식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혔다.4 그러나 이상의 연구는 장서인을 비롯한 몇몇 일부 인장에 국한되었고, 당대 문인전각가로 가장 유명했던 김상헌의 추종자이자, 인장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전각가라는 평가를 뒷받침할 만한 인장 전반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本考에서는 조선, 특히 17세기 인장사의 맥락에서 洪錫龜 묘 출토 印章을 중심으로 인문 조형상의 특징에 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Ⅱ. 17세기 篆書와 印章 애호

홍석구가 생존했던 17세기는 임진왜란으로 입은 전화를 극복하는 와중에 북방 여진족 국가인 後金에 의한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정치사회적으로 커다란 동요를 경험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외환이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건국된 조선에서 지배적인 세계관이었던 華夷觀에 따라 미개하다고 여긴 오랑캐에 의해 자행되었고, 종국에는 中華를 자처했던 明과 後金(淸)이 교체되는 상황에까지 치달으면서 유교국가로서의 세계관과 자존심에 상당한 충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충격은 현실을 자각하고 청을 배워야한다는 北學이 대두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한편으로는 기존 성리학적 세계관을 더욱더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멸망한 明을 대신해 조선이 禮와 仁을 기치로 小中華를 자처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전반적인 분위기와 함께, 문예계에서 두드러지는 현상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尙古主義의 심화이다. 즉, 유교적 이상국가였던 삼대로의 회복을 절실하게 희망했던 당시의 조선 문인들에게 옛 古典과 이 고전을 적은 글씨인 古文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증대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에는 古書가 드물 뿐만 아니라 中朝의 문헌도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요즈음 선비들이 여기에 대해 참으로 어렵게 나온 것임을 생각하여 변함없이 이를 애완한다면 그 漑鬵, 膏黍의 느낌을 스스로 마지못할 것이요, 그 經典章句의 뜻을 깨닫는다면, 風化를 復古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金生의 功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그 淳朴雅俗한 기와 묽거나 진한 서법에 대해서는 저절로 아는 자가 있어 알아줄 것이다.5
1663년에 발간된 김진흥의 『篆大學』에 쓴 당시 西人의 領袖 宋時烈(1607-1689)의 서문이다. 주된 내용은 篆書古文으로 쓴 경전이 옛 선량한 풍속으로 교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고문을 숭상하는 풍조는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남인계통의 학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이 꼭 고문으로 글을 써서 올리는 것은 그 말씀이 순임금과 우임금께서 사용하신 말씀이고 그 글이 순임금과 우임금께서 쓰신 글이고, 그 글자가 순임금과 우임금께서 사용하셨던 글자이니 이를 통해 舜임금과 禹임금의 시절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도 이대로 따라 행동하신다면 순임금과 우임금의 治世를 이루실 것입니다.6
이 글은 남인의 영수였던 許穆(1595-1682)이 『書經』의 한 편인 「皐陶謨」를 古文으로 써 올리면서 쓴 것으로 그 또한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古文學 연구를 통하여 고대 중국의 至治를 펼쳤던 三代의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7 이렇게 고문을 숭상하는 문인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많은 篆書名家들이 등장하였다.
병자호란 척화의 상징이 된 安東 金門의 金尙容(1561-1637)은 두터운 小篆體(玉筯篆)8를 구사하여 〈崇仁殿碑〉 頭篆을 남기고 있으며 아우인 金尙憲(1570-1652)도 전서에 능하였다. 李正英(1616-1686) 역시 엄정한 小篆體 서예를 구사하였다.9 허목은 古文에 바탕한 미수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고안해내어 〈陟州東海碑〉 등을 남겼으며, 呂爾徵은 〈三田渡碑 篆額〉을 썼다. 또한 전서에 관한 관심을 반영하듯, 전문서적도 연이어 등장하였는데, 許穆의 『古文韻府』, 『金石韻府』, 『古文韻律』, 景惟謙의 『篆韻便覽』(1651), 金振興의 『篆大學』(1663), 『篆海心鏡』(1675) 등이 저술되었다. 특히 이들 전서 관련 서적들은 중국의 문자학 자료를 바탕으로 삼대의 문자로 알려진 독특한 고문과 전서 38체 등 다양한 전서체를 소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明末의 인장 유행풍조가 전래되어 애호하는 문인들이 증가하고, 직접 인장을 새기는 文人篆刻家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10 이미 중국은 송원대 이래 米芾(1051-1107), 趙孟頫(1254-1322), 吾丘衍(1276-1311), 王冕(1310-1359) 등 서화가들이 전각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로 발전시켰고, 명대 들어 16세기부터 文人篆刻의 개조인 文彭(1498-1573), 何震(1530-1605)을 필두로 하여 많은 문인전각가들이 활동하였다.11
이에 張維(1587-1638)는 宋代 『圖書譜』를 접하고 제 名公들도 이를 애호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12 李萬敷(1664-1732)는 金尙憲과 許穆이 전각을 애호하고 직접 새겼고, 이 영향으로 인장을 소장하려는 문인들이 날로 늘고 있다고 소상하게 밝히고 있어서 이 두 문인을 주축으로 17세기 문인전각이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
특히 金尙憲의 경우, 印章을 애호하는 자신의 소회와 직접 새긴 인장 25방을 기록한 「群玉所記」라는 글을 남겨서 당시 篆刻文化를 선도하였다.
淸陰居士에게는 印章이 수십 개가 있다. 옥에 아로새긴 것이 차곡차곡 함 속에 가득하여 찬란한데, 그것들을 여러 겹으로 잘 싸서 金臺山에 있는 석실 안에 보관한 다음, ‘羣玉之所’라고 이름 붙였다. 거사는 천성이 질박하고 솔직하여 평소 취미를 가지고 수집하는 것이 없지만, 유독 이것만은 아주 좋아하여 바람둥이가 미녀를 좋아하듯 아무리 다른 좋은 것이 있더라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14
척화신으로 충절의 상징이었던 金尙憲이 직접 인장을 새기고 은거처에 인장의 보관을 위해 群玉之所라는 장소를 마련하였다는 언급은 洪錫龜를 비롯한 후배 문인들에게 篆刻이 완물상지하게 하는 ‘조충소기’라는 금기를 상당히 해소해 주었던 것이다.15 또한 그의 손자이자 홍석구와 가깝게 교류하였던 金壽恒(1629-1689)은 자신의 인장애호를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전각은 참으로 작은 재주다. 그러나 공자도 “장기나 바둑이라도 둘 수 있지 않느냐. 그거라도 하는 것이 그냥 시간이나 보내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마음을 쓰는 곳이 없는 사람을 심하게 꾸짖은 말이다. 하물며 오늘날에 와서도 倉頡과 篆書의 서법을 보려면 오히려 여기에 의지해야 하니, 또한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나는 본래 전서에 익숙하지는 못해도 좋아하는 것은 거의 性癖에 가깝다. 그래서 내심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장기나 바둑을 좋아하면서도 이것만은 도리어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걸 괴이하게 여겨왔다.16
이상과 같은 古文을 통한 三代 風化로의 복귀라는 상고적 사고로 전서와 인장을 애호하는 분위기 속에서 홍석구는 문인 전서가이자 전각가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문인전각가들이 제작하였던 인장의 경향은 그동안 古書의 藏書印을 중심으로 일정한 경향을 도출하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인장의 경향으로 印文의 서체는 小篆, 특히 玉筯篆이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 垂露, 剪刀, 柳葉篆 등 다양한 전서체가 사용되었다. 章法에 있어서는 朱白相間法, 呼應疏密法, 盤曲塡密法, 挪讓法 등의 기법이 미적인 수식을 위해 활용되고, 형태는 方形과 天圓地方形 외에 香爐形, 鐘形, 壺形 등 기물형 인장이 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17 다음에서 소개하는 그가 남긴 인장들은 이를 실물로 증명하는 자료라고 하겠다.

Ⅲ. 홍석구의 생애와 인장

현재까지 알려진 홍석구 인장자료는 묘 출토 實印과 印譜, 그리고 서책 등에 날인된 印影과 현대의 출판물로는 『槿域印綬』에 수록된 사례들이 있다. 묘 출토 실인은 인문의 내용별로 분류하면 本貫印 8방, 姓名印 8방, 字印 6방, 號印 12방, 別號印 3방, 科擧印 3방, 詞句印 34방, 干支印 1방, 封緘印 1방, 住所印 5방, 藏書印 1방, 綜合印 1방이다.18 (Table 1)
본고의 대상인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實印 이외에 홍석구의 인장이 날인된 印譜로는 수원박물관 소장 『圖書帖』(Fig. 2)이 남아있다. 총 4면으로 1-2면에 걸쳐 인영을 오려붙인 첨지형식의 홍석구 인장이 수록되어 있고, 洪命元(1573-1623), 洪禹翊(1656-?), 洪禹鼎(1680-?) 등 홍씨 문중의 인사들과 尹斗緖(1668-1715) 등 후대 문인들의 인장도 날인되어 있다. 『圖書帖』에 날인된 홍석구 인장은 흐려진 인영을 포함하여 70방가량이며 <洪錫/龜章>, <國寶>와 <水竹居>라고 새긴 봉함인을 제외하고 모두 묘 출토 實印의 印影이다. 또 다른 인영자료는 홍석구의 필첩과 장서에 날인된 예들이다. 수원박물관 소장 『東湖臨書帖』과 『春夜宴桃李園序』에서 『동호임서첩』 말미에 찍힌 인장(<隱岩/之章><庚寅/聯璧>)은 출토인에 포함된 인장이지만, 『춘야연도리원서』에 천원지방인 형태의 사구인 <碧山不負吾/白鷗閑似我>은 새로 발견된 인영으로 이번 논고의 자료로 추가하였다. 장서에 날인된 경우는 고려대학교 소장 古書에 날인된 사례가 3방이 있는데, 역시 모두 출토 실인에 포함된 사례이다.19 마지막으로 『근역인수』에 수록된 55방 중 51방이 출토인에 해당하며, <洪錫/龜章>, <國寶>, <唐城/世家>, <還山/弄/明月> 4방은 누락되어 있다.
또한 홍석구는 동생 洪有龜와 아들 洪鎭宗 그리고 주변의 문인들에게 선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홍진종 묘에 출토된 인장실물 10방을 포함하여, 인영으로는 홍유구 관련 <唐城/世家>, <洪有/龜印>, <字余曰/聖則>이 남아있고, 李廷龜의 손자인 李翊相(1625- 1691)과 종친이자 예원에 많은 기여를 한 朗善君 李俁(1637-1693)가 홍석구에게 인장을 선물받고 답례한 편지글들이 남아있다.20 이들을 비롯하여 동시대 다른 문인들의 인장에도 그가 제작하여 선물한 인장들이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1 종합하면 현재까지 홍석구가 새긴 인장은 100여 방 정도이며, 따라서 대다수에 해당하는 83방의 출토 실인만으로도 그의 인장경향을 살피는 데는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홍석구 인장자료에서 다음의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우선 본관인, 성명인, 자인, 호인, 사구인 등 종류별 인장의 수량이 동일 시기 다른 문인들이나 후대의 문인들과 비교해보면 매우 많다. 이는 아들인 洪鎭宗의 묘에서 출토된 인장이 성명인 2방, 본관인 2방, 자인 2방, 사구인 3방, 장서인 1방로 모두 10방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인문도 다양해서 성명인의 경우만 하더라도 기본적인 <洪錫/龜印>(Fig. 3-A)에서부터 <唐城洪/錫龜父>(Fig. 3-B)·<洪錫/龜國/寶記>(Fig. 3-C)까지 여러 가지 인문을 사용하였고 서체도 소전, 옥저전, 方塡書(Fig. 3-E), 隸書(Fig. 3-D) 등 다양하다. 이는 홍석구의 인장이 實用印의 단계를 넘어선 자유로운 예술적 구상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특히 34방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詞句印은 문장이나 시문의 구절을 새겨 넣은 인장을 말하는데, 姓名印이나 字印, 號印에 비해 인문의 선택이 자유롭고 자수의 변화가 다양하여 장법 구성과 字體 선택에서 창의적인 인면구성이 가능하다. 이는 뒤에서 심도있게 논의하겠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사실은 출토 인장 가운데 많은 호인이 있어서 이를 통해 그의 생애를 유추하는 단서로 삼을 수 있는 점이다. 관련 인장은 號印 12방과 別號印 3방으로 총 15방에 이르는데, 이 중 <浯溪>(Fig. 4-A), <九曲山人>(Fig. 4-B), <東湖>(Fig. 4-C) 등 기존에 알려진 호 이외에도, <三十六宮/道人>, <一草/亭>, <藏六/居士>(Fig. 4-D), <六用/齋>, <隱岩>, <立石/山主>, <蒼蒼/室>, <蒼蒼/翁>, <湖翁> 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자료로 판단해 보면, 浯溪와 九曲山人, 隱岩은 고향의 지명에서 유래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용한 호로 보이며, 東湖, 湖翁, 蒼蒼室, 蒼蒼翁 등은 인문의 내용상 말년의 은거지와 연관된 호이고, 藏六居士와 六用齋는 자신의 성명자인 龜(거북)와 관련한 호로 확인된다.22
마지막으로 홍석구 인장은 중국의 인장에서 많이 보이는 側款[邊款]이 거의 없다. 측관은 인장의 옆면에 作者나 혹은 인장의 受領人이 인장을 제작하게 된 연유나 인문의 의미 등을 새겨놓은 것인데, 이 때문에 인장의 제작연도라든지 인문의 명확한 의미를 분석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23
따라서 홍석구의 생애가 기록된 문헌자료를 조사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1차 사료가 될 문집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행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스승 李植(1584-1647)의 아들이자 그와 친분을 나눴던 李端夏(1625-1689)가 그를 추모하기 위해 남긴 묘지명과 노론계 문신인 鄭澔(1648-1736)의 묘갈명이 남아있어서 출신 가문과 관직생활을 중심으로 한 그의 인생 궤적을 구성할 수 있다.24 또한 그의 출토 인장 중에는 인생의 주요 장면을 보여주는 인문 사례들이 있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홍석구는 본관이 南陽(지금의 華城)으로, 자는 國寶, 호는 浯溪, 九曲山人, 東湖 등을 사용하였다. 天啓 1621년(辛酉) 윤2월(辛卯) 9일(辛巳) 문중의 세거지인 楊根(지금의 양평)에서 아버지 洪浚과 어머니 청주 韓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탄생과 관련하여 주문방인 <惟辛酉/吾以降>(Fig. 5-A)25과 공방전 형식으로 태어난 연월일시를 <辛酉/辛卯/辛巳/丙申/一七三/六八八>(Fig. 5-B)에 새겼다. 또한 <家住楊/江九曲洞>(Fig. 5-C)은 그의 집이 楊江(남한강) 변의 구곡동임을 기록하였다.
그의 가문 시조는 당말에 국인의 교화를 위해 건너온 八學士 중 한 사람으로 당시 임금이 唐城(南陽의 옛 이름, 지금의 華城)으로 성을 내려주었다고 전한다. 임금의 賜姓을 기념하는 <賜貫/唐城> (Fig. 6-A, B)과 친외가문을 표시한 <唐城世家/西原外裔>(Fig. 6-C) 등 6방에 달하는 본관인은 이를 영예롭게 여겼음을 알려준다. 가로세로 2.3cm에 불과한 작은 인면에 자신의 출계와 이름, 자, 호 등 25자를 새겨놓은 종합인 <唐城賜貫銀/樹前令禮史/雲孫洪氏錫/龜國寶浯溪/九曲山人印>(Fig. 6-D)에서도 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10여 세에 經典大意를 통달하고 운필이 뛰어나서 인가의 편액을 두루 썼다. 어린 영재로 소문이 자자하였던 듯, 세자(후에 孝宗)가 불러서 시험해보고 가죽신을 벗어서 하사하기도 하였다. 16세(1636년)에 초시에 합격하였는데, 이 무렵 역학에도 심취하여 1년의 날수를 헤아리거나 천문기기에도 관심을 보였다. 특히 나무를 깎아 혼천의를 만들어서, 후에 星官이 모범으로 삼았다고 하여 손재주도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19세(1639년)에는 澤堂 李植(1584-1647)에게 배워 그의 문인이 되었고, 25세인 乙酉年(1645년) 생원 초시에 수석을 하였는데 부친의 초시 합격 나이와 같았다. 28세 되던 戊子年(1648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예를 다하였고, 30세인 庚寅年(1650년)에 탈상하고는 바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동생인 洪聖龜도 함께 합격하여 겹경사를 맞이하게 된다. 감격스러운 집안의 경사를 맞아 홍석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丙戌司馬/庚寅 文科>(Fig. 7-A)인과 <庚寅/聯璧>(Fig. 7-B)인을 새겼고, <司馬兩/世比齡/文科一/榜聯璧>(Fig. 7-C)은 부친과 같은 나이에 초시에 합격하고 동생과 같은 해 문과에 함께 급제한 사실을 기념하는 인장이다.
그러나 홍석구의 관직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가 않았다. 조정에서는 그를 괴원(承文院)에 발탁하는 문제가 논의되었으나 이조좌랑 李海昌(1599-1651)이 光海君 때 그의 선친이 인목대비 폐모를 주장하는 흉소에 관여했다고 탄원하며 반대하였다. 논의 끝에 조정은 假注書 및 監造官으로 제수하였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32세 되던 1652년 春秋館 記事官으로 뽑혀서 『인조실록』을 편수하는 데 공을 세워 6품 전적이 되었고, 같은 해 茂長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 무렵 공주 갑사사적비의 頭篆(Fig. 8)을 썼다. 1658년 38세 때에는 文兼宣傳, 良才察訪, 戶曹佐郎을 지내고 겨울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근신하였다. 이후로는 순탄한 관직생활이 이어져서 戶曹佐郎兼春秋館記注官, 端川府使를 역임하였고, 46세 때인 1666년에는 玉印篆文書寫官으로서 후에 숙종이 될 세자의 인전을 써서 廏馬를 내려받고,26 定平府使로 승급하였다. 세자의 인전을 썼다는 사실에서, 인장분야에서 그의 명성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趙復陽(1609-1671)이 홍석구를 천거하는 과정에서 현종이 그를 篆文을 잘 쓰는 인물로 인식하였다는 일화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松谷(조복양)이 임금의 하교를 받는 자리에 뽑고자 하여 公(홍석구)이 관리로서의 재주와 문예를 모두 갖추어 등용할 만하다고 하니, 현종이 하교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은 전문을 잘 쓰는 자이구나”라고 하였다. 공이 듣고는 웃으면서 “주상께서 末技로 이름을 아시다니, 사대부는 마땅히 잡예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며 正大自重함이 이와 같았다.27
순탄한 관직생활을 지내는 듯 하였으나 중년이던 48세 때(1668년)부터 험난한 관직 생활이 이어지게 된다. 이 해 아우 홍성구가 潭陽府 守令이 되자 갑자기 대사헌의 탄핵이 있었는데, 역시 이해창이 주장했던 흉소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그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이듬해인 1669년에 탄핵의 원통함을 현종에게 직접 상언하여 선친에 대한 신원이 허락되었다.28 50세인 1670년 관직에 복귀하여 開城經歷, 平山府使를 지냈는데, 죄인이 국문을 받다가 사망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29 이후 복직되어 國子監 校正官, 禮賓正, 守禦使, 長城府使를 역임하고 1677년 57세에 羅州牧使로 부임하였는데, 전 목사 尹以益(1616-?)의 무고로 또 파직된다. 무오년(1678년) 봄에 海州牧使로 임명되었다가 어사 趙祉錫(1648-?)의 감찰로 다시 파직되었다. 이후 지병이 깊어진데다가 관직생활에 대한 염증이 극에 달한 듯, 承文院參校로 선발되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東湖(Fig. 4-C)에 은거하다가, 59세 되던 1679년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말년에 그가 동호에서 은거하는 모습은 李頤命(1658-1722)이 적은 墓碣銘에 보인다.
옛적 내가 20세 때 동호에서 공을 뵈었는데, 큰 키에 멋진 구렛나루 수염을 한 모습이 빛이 났었다. 작은 집에서 江을 내려다보며 왼쪽에는 그림을, 오른쪽에는 史書를 두고 맑게 감상하며 손님을 머무르게 하고 玄談으로 이치를 해석하셨다.30
이이명이 약관인 20세 무렵이면 1678년 경으로, 이 시기는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시기이다. 이 만시는 동호에서 거주하던 그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적은 것으로, 강가 작은 집에서 그림과 사서를 가까이 두고 손님과 현담을 나누며 지냈던 말년 생활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17세기가 붕당 간의 경쟁이 매우 치열한 시기였다고는 하지만, 홍석구의 경우는 진퇴 횟수가 유난히 잦았다(Table 2). 명문가 출신으로 관료생활의 시작부터 부친의 누명, 갖가지 불미스러운 일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주로 지방의 외직을 전전하다가 사직하게 된 그의 관직생활에 관해 이단하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그(홍석구)가 두루 외직으로 임명되어 명성과 공적이 빼어나게 두드러져서 大臣宰臣이 서로 벼슬에 천거하였으나, 마침내 힘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 점점 군이 퇴락하여 끝나게 되었다. 재덕을 품었으나 세상에 펼치지 못하였다. 내가 그것을 생각하니 통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군은 평소 영욕을 얻고 잃게 되는 가운데서도 과연 흔들리지 않았으나, 만년에 군의 아우가 부사가 되어 言官의 論劾을 당하니, 당시의 모함에 대해 앞서 사퇴하였다.31
홍석구의 인장 중에는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는 듯한 인문들이 있다. 크기가 작은 주문 방인 <用之則行/舍之則藏>(Fig. 9-A)은 『논어』 「述而編」에 나오는 구절이다.32 공자가 안연에게 당부하는 말로, ‘세상이 나를 써주면 내 뜻을 펴고 나를 버리면 물러나 숨는다’라고 해석되며, 뜻을 펼 수 있을 때만 관직에 나아가야지 영달을 위한 벼슬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소전체의 주문방인인 이 인장은 인문의 진행방향이 ‘상-하’가 아닌 ‘우-좌’방향으로 썼으며 ‘之則’을 위아래로 두 번 읽히도록 배치하였다.
유엽전의 주문방인 <一笑/而已>(Fig. 9-B)는 ‘한번 웃고 말 뿐이다’라는 의미인데, 환로에 우여곡절이 많음을 허탈해하는 마음이 나타난 듯하고, 주문방인 <從吾/所好>(Fig. 9-C)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쫓으리라’라고 해석되는데, 출처는 『논어』 「술이편」33으로 ‘세상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의미로, 그가 애호했던 인장을 자신의 길로 암시하였다. 위 세 인장은 관직의 잦은 진퇴에 대한 각오와 허탈함, 그리고 하고싶은 일인 인장을 하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담긴 인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의 인생에서 반복되었던 낙향과 은거와 관련한 인문이 많다. 사구인 중에서 8개 정도가 낙향, 은거와 연관이 있는데, <振衣/千仞/岡濯/足萬/里流>(左思(250?-305?)) (Fig. 10-A), <歸去來/山中山中/酒應熟>(陶淵明(365-427))(Fig. 10-B), <用拙/存/吾道>(杜甫(712-770))(Fig. 10-C), <歸臥/龍門/八節灘>(白居易(772-846))(Fig. 10-D) 등은 모두 귀향과 은거를 노래한 구절들로 실제 이 중국의 옛 시인들은 벼슬길에서 배제되거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은거하여 당시에도 은일의 상징처럼 회자되었던 인물들이다.
나머지 <栗里> 관련 인장은 모두 4방으로(Fig. 11, 23-A, C), 그중에 은자의 정원을 뜻하는 ‘三逕’과 결합하여 ‘栗里三逕’으로 판독되는 인장들이 2방이다. ‘율리’는 도연명이 은거했던 마을 이름이며, ‘삼경’은 서한말 張詡가 은거하면서 꾸몄던 정원을 이르는 말이다.34 즉, 도연명이 은거하던 고향 집의 정원이라는 뜻인데, 홍석구가 실제 은거했던 마을 이름이 율리였을 가능성도 있다.35
이렇게 낙향과 은거를 주제로 한 사구인들은 관직에의 진퇴를 반복하였던 홍석구의 인생이 반영된 것이며, 순탄하지 못했던 관직생활은 오히려 정서적, 시간적으로 전각에 전념하게 된 배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직접 인장을 새겼다는 내용의 기록은 김상헌의 증손자인 金昌翕(1653-1722)이 애도를 위해 쓴 다음의 만시에 보인다.
육예의 숲에서 유희하며 울연히 역법에도 노닐었는데, 정묘한 뜻은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고 혼천의와 丹靑에도 박식하였네. 집에는 石鼓文을 걸어놓고 책상에는 華山의 옥돌(璞)을 쌓아놓고서 낭낭한 예악기인 듯, 담박하게 머물다간 나그네라네.36
여기서 석고문은 秦代 소전 이전의 전서인 大篆으로 새긴 고문을 말하며, 책상 위에 璞이 쌓여있다는 것은 그가 직접 인장을 새겼음을 나타낸다. 또한 단청에도 박식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홍석구가 당대 회화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Ⅳ. 尙古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시도

홍석구가 정확히 언제, 누구로부터 전각을 배웠으며, 일생의 어느 시기부터 문인전각가로 활동하였는지 근거로 삼을 만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다만 그의 생애에서 보듯이 어릴 적부터 글씨에 능했으며, 46세에는 玉印篆文書寫官으로 선발되어 세자의 인전을 썼을 정도로 40대 무렵에는 전각에 상당한 명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전각으로 유명했던 안동 김문과 밀접하게 교류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의 스승 이식이 청의 배척을 주장하다가 김상헌과 함께 1642년 중국 심양으로 유폐되었을 정도로 안동 김문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전각에 대한 애호를 표명했던 金壽恒과는 1662년 단천부사로 나아가는 송별시를 주고받는 모임을 갖고 1664년에는 함께 함경도의 칠보산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친분을 나눈 사실을 보면 그의 전각학습이 안동 김문과 밀접하게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37
본 장에서는 홍석구 인장의 양식적 경향을 출토인장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장 전체를 언급하기는 불가능하므로 상고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시도라는 관점에서 양식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인장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1. 옥저전과 고전체 전통의 계승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기 인장에서 옥저전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그 이유로는 16세기 이래 전서에 뛰어났던 안동 김문의 金尙容(1561-1637), 김상헌(1570-1652)과 그 자손들이 小篆의 일종으로 唐 李陽氷(8세기 중반)이 창안한 옥저전을 서예는 물론, 인장에도 즐겨 사용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에 관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16세기 말과 17세기의 문학 경향인데, 이 시기는 先秦과 兩漢의 고문에 대한 인식에 명대 전후칠자 문학이 수용됨에 따라 의고문이 성행하였다.38 이 경향은 김상헌은 물론이고 許穆(1595-1682) 등 당색과는 큰 상관없이 문학론으로 채택되었다. 그런 가운데 唐宋古文의 기운은 주로 서인 쪽에서 출현하였다. 진한고문 계열인 김상헌조차도 산문은 韓愈(768-824)와 曾鞏(1019-1083)을 따랐다고 평가되기도 하였으며, 홍석구의 스승인 이식은 당송고문을 추종한 문학가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나중에 김창협을 중심으로 하는 당송고문그룹의 형성으로 나아갔으며, 당송고문은 서인의 대표적인 산문 경향이 되었다. 당송대 전서의 전형이었던 이양빙의 옥저전은 이러한 배경 하에 적극적으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인영의 사례를 보면(Fig. 12), 김상용과 김상헌 등 안동 김씨 가문의 인사들은 성명인, 자인, 호인에 주문이나 백문을 가리지 않고 소전계열의 두꺼운 옥저전을 많이 사용하였다.39 안동 김씨 가문 옥저전 인장의 특징은 두꺼우면서 단단한 필획과 함께, 轉折을 둥글게 처리하고 같은 행 좌우 글자의 가로획 높이를 정연하게 맞추어 원만하면서 장중한 미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당시 홍석구가 새긴 인장도 옥저전으로 유명했던 사실은 다음의 만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업적은 靑箱에 의탁하여 드러났고, 명성은 玉筯를 새김에 머물렀으니, 시를 짓고도 시사에 나아가지 않고, 만사를 앞에 두고 홀로 눈물 흘린다.40
이 만시 내용처럼 홍석구도 성명인과 자인, 호인에 주로 옥저전을 사용하였다. 다만 안동 김문의 인장보다 전절부분은 좀더 각이 진 반면, 획의 비수차이가 있고 좀더 부드럽고 원만한 경향을 보여주는데, 초기의 호인인 <浯溪>(Fig. 4-A)는 옥저전을 채용하였으면서도 두 글자의 가로획의 높이가 다르고 수획의 처리가 다소 어색하지만, <藏六/居士>(Fig. 4-D)에서는 가로획의 높이가 통일되고 길게 늘어뜨리는 수획의 처리가 안동 김문의 인장과 거의 흡사하며, <洪錫/龜印>(Fig. 3-A)에서는 원만하고 유려한 획과 함께 글자의 크기를 조절하는 나양법이나 획을 구부려서 여백을 채우는 반곡전밀법을 사용하여 역시 가로획의 배열을 일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홍석구는 당시의 인장 경향과 유사하게 옥저전뿐만 아니라 『전대학』(Fig. 13) 등 전서학습서에 수록되어 古篆으로 알려진 다양한 전서체들도 印篆으로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인장 중에서 성명인과 자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장에 다양한 전서체를 적용한 사례들이 있다. 가문의 영예를 뜻하는 <唐城世家/西原外裔>(Fig. 14-A)는 墳書/科斗篆/奇字篆/刻符書/芝英篆/玉筯篆/垂露篆/龍爪篆 등 8체를 섞어서 쓰고 있는데, 긴 장방형의 인면에 2개의 변곽을 나누어 새긴 방식이나 유려한 印面의 구성이 김상헌의 <庚寅司馬/丙申文科>(Fig. 14-B)인과 거의 유사한 구성을 보여준다.
또한 <衆人/當惜/分陰>(Fig. 15-A) 이나 <湖翁> (Fig. 15-B은 墳書와 奇字篆 한 가지 古篆體를 채용하여 구성한 인장으로 해당 문자의 구성원리에 따라 인고를 그려 새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사구인 <臥游> (Fig. 15-C)(奇字篆), <橋/上老人>(Fig. 25-A)(鐘鼎書), <一笑/而已>(Fig. 9-B)(柳葉篆), <振衣/千仞/岡濁/足萬/里流>(Fig. 10-A), <淸眞>(Fig. 15-D)(古篆) 등도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김상헌과 함께 양대 문인전각가로 손꼽히던 허목은 북인 중 徐敬德(1489-1546) 계열의 학문전통을 계승하여 六經을 통해 선진유학으로 접근하려는 사상을 보였고, 산문에서 진한 이전의 고문을 따랐다. 서예와 인장에 있어서도 周의 東遷 이후 문자인 鳥蟲書, 蝌蚪篆과 <衡山神禹碑> 등의 古文字을 참고한 眉叟篆을 구사하는 상고주의를 표방하였다.41 그는 당시 유행하던 전서체들에 대해서는 ‘漢唐 이래 나온 문자가 모두 14종인데, 芝英·飛白·金錯·玉筯 따위가 7종이며…… 이런 것들은 모두가 고문이 아니니 秦漢 이후로 풍기가 천박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오직 李陽氷의 玉筯體 만은 지금까지 쓰이지만, 비루하고 졸렬하여 볼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극렬히 비판하면서 진한 이후에 발생한 옥저전과 다양한 고전체를 배격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42
따라서 옥저전과 다양한 고전체는 허목의 인장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허목은 先秦의 고전을 참고하여 스스로 창안한 眉叟體를 성명인, 호인, 사구인 등 인장 종류와 상관없이 적용하였다. 허목의 성명인 <許穆><齊陽/許穆/文父>(Fig. 16-A, B)에서 보이는 특이한 자형에 뭉툭한 기필과 수필 표현, 좌우로 휘어지는 완만한 곡선의 垂劃 등은 그가 지향했던 先秦 시대 篆字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성명인에서 주로 쓰이는 ‘印’ ‘章’ ‘記’ 등의 허사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장의 미적인 장식보다는 先秦의 古篆字體를 부각하려는 의도로 보여, 김상헌을 필두로 하는 안동 김문과 홍석구가 남긴 서인계 인장과는 명확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2. 새로운 장법의 시도

장법은 원래 배열하여 하나의 문장을 이룬다는 의미로, 인장에서는 인면에 문자를 배치하는 법식을 말한다. 홍석구의 인장 대부분은 전통적인 장법이 적용하고 있지만, 새로운 章法을 시도한 사례들도 있어 주목된다. 우선 주백상간법을 변형한 사례들인데, 주백상간법이란, 주문과 백문을 한 인면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조선에서는 字印이나 4자나 9자 인에서 많이 보인다. 중국에서는 이미 한대에 유례가 있을 정도로 오래된 기법이며, 특히 명대 전각가들이 漢印을 추숭하는 풍조로 인해 일부 私印에서 간간히 사용되었다.43 17세기 일반적인 주백상간인은 姜栢年의 <晉山姜/栢年叔/久之章>(Fig. 17-A)의 사례처럼 朱文과 白文에 두툼한 소전을 주로 사용하여 구성하였고 주와 백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백문의 굵기를 조정하였다. 그러나 홍석구의 경우, 백문의 획 두께를 최대한 두툼하게 처리하거나 方塡書로 구성하여 마치 전체가 주문인처럼 유사하게 조성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는데 <南益家風/西原公相>(Fig. 17-B) <立石/山主>(Fig. 17-C)가 그러한 경우이다. 다른 방식의 변형사례도 있는데, 주문방인 <碧山不負吾/白鷗閑似我>(Fig. 17-D)는 5언시 댓구 10자를 3개의 크기로 나누어 각 열을 2·1·2자의 글자로 배치하였으며, 중간 十에 배치하는 글자들을 두툼하게 처리하였다. 또한 山과 白, 不과 閑의 자체를 거의 유사한 대칭으로 구성하였다. 사실 ‘碧山不負吾’ ‘白鷗閑似我’는 동일 시의 구절이 아니라, 이 인장을 위해 다른 두 시의 구절을 조합한 것이다.44 즉, 좌우대칭으로 통일된 시각적 효과를 위해 자형을 고려하여 시 구절을 선택하고 이를 주백상간과 유사한 효과를 위해 구성해 낸 것이다.
엽전형태인 孔方錢의 인문배치에도 파격이 보인다. 당시 공방전은 홍주원의 <一架亭/主人>(Fig. 18-A)처럼 주로 別號印으로 사용된 사례가 많다. 이런 경우 가운데 열을 우선 읽고 우→좌의 순서로 읽게 된다. 홍석구의 경우는이 공방전 형식에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자신의 사주 간지인 <辛酉/辛卯/辛巳/丙申一七三 六八八>(Fig. 18-B)을 새기거나 혹은 앞서의 <碧山不負吾/白鷗閑似我> 같은 시구를 적어 넣었는데, 읽는 순서가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Fig. 18-C). 이는 시각적 효과를 위해 기존의 일정한 법칙이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구성한 장법이다.
방형인의 장법으로 <江漢/裔>(Fig. 19)는 또 다른 파격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인문의 의미는 ‘江漢의 후예’로 강한은 원래 중국 揚子江과 漢水가 합류하는 武昌 漢口 漢陽 지방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조선에서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여 흐르는 한강의 별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45 지금의 양평지역 즉, 남한강변을 세거지로 하는 가문의 후예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서체는 기필과 수필 부분이 가늘고 유연한 곡선이 특징인 古篆으로 세 글자를 1:2(kjah-310-202106-002i1.jpg)로 배치하였다. 거의 모든 획이 유연한 곡선인데, 부수가 같은 江과 漢을 위아래로 배치하면서 중복되는 水변을 길게 늘이고 나머지 글자들은 위아래로 여백이 거의 없이 한 글자처럼 보이도록 결구하였다. 좌열의 裔도 위아래로 늘이고 역시 우열의 江漢과 여백없이 배치하면서 裔의 좌우 긴 垂劃과 水변의 중간 垂劃을 마치 한강의 물결처럼 요동치듯 출렁이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조응하는 효과를 의도하여 전체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문자로 보이도록 고안하였다. 이상 위의 인장들은 홍석구가 일반적인 장법들을 탈피한 파격적인 인면 구성을 시도하여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부각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3. 象形과 결합한 詞句印

Tabe 1에서 보듯 홍석구는 34방이 남아있는 자신의 사구인에 적게는 2자에서 많게는 10자에 이르는 글귀를 새겼고, 인전으로 다양한 전자체를 적용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상형과 인문을 결합시킨 독특한 구성방식의 인장들을 남기고 있다. 홍석구 스스로 인장에 관해 남긴 글이 전무한 상황이지만, 그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김상헌의 「群玉所記」에서 그 전거를 찾을 수 있다. 김상헌의 「群玉所記」에는 인장에 대한 애호와 함께 직접 제작한 인장 25방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적혀있다. 아래 글은 그중 현재 인영이 확인되는 인장에 관한 설명이다.
‘淸陰’이라고 새긴 것은 거사의 호를 새긴 것이다. 방형이며, 옥저이며, 양획이다. 그 형상은 마치 두 어린아이가 짝을 지어 玉戚(옥도끼)을 세워 두고 周庠(주대 학교)에서 勺(주공이 만든 악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그 앳된 모습이 볼 만한 것과 비슷하다.
‘明哲保身’이라고 새긴 것은 변형된 倒薤法이며, 방형이고 양각이다. 은은한 자태에 이슬을 머금고 있는 것이 마치 鮫女가 이별의 눈물을 흘릴 때 눈물방울이 알알이 진주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白 沙’라고 새긴 것은 여러 가지 체로 새겼으며, 양각이다. 기괴하고 매우 비정상적인 것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 마치 曾點의 기상이 천길 허공 위에서 봉황이 날개 짓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46
김상헌은 자신의 인장에 관해 인문의 내용, 형태, 전체의 종류, 주백문 구분에 관해 언급하면서 마지막으로 주관적인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 언급되는 내용은 주로 고전의 인물이나 상황인데, 역시 尙古精神을 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47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김상헌이 인문에서 특정한 상형을 연상하는 점이다. 주문방인으로 옥저전을 쓴 <淸陰>(Fig. 20-A)에서는 두 어린아이가 마주보고 勺에 맞추어 춤을 추는 모습을, 주문방인으로 도해 전을 사용한 <明哲/保身>(Fig. 20-B)에서는 鮫女의 눈물을, 주문원형인으로 여러 가지 체를 사용한 <白 沙>(Fig. 20-C)는 심지어 증점의 기상을 떠올린다. 이는 김상헌이 인장을 구상할 때, 인문의 형상을 감안해서 도안하였음을 의미한다. 실제 <淸陰>은 긴 수획들이 사람의 다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明哲/保身>에서는 수획의 끝에 눈물방울 같은 조형이, <白 沙>에서는 자가 破子되어 하늘을 나는 새와 그것을 바라다보며 비상하는 새가 보인다.48
홍석구도 「군옥소기」의 이 내용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여기서 살펴볼 인문의 상형화에 중요한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실제 홍석구 인장 중에 김상헌 인장과의 연관을 보여주는 사례가 <白雲山>(Fig. 21-B)이다. 백운산은 양근군 옥천면과 용문면의 경계가 되는 산으로 안동 김문의 별업이 있던 산이며,49 주변이 남양 홍씨의 세거지이기도 하다. 이 인장은 『槿域印綬』에 김상용의 인장으로 수록되어 있다. 호리병형 변곽 안에 위쪽 타원 부분에는 ‘白’자를, 아래 타원 부분에는 ‘雲山’을 윤곽에 맞추어 변형한 물형인이다. 특히 ‘雲’자와 ‘山’자를 위아래로 연결한 방식이 주목된다. 홍석구의 <백운산>(Fig. 21-A)인은 김상용의 <백운산>인을 모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형이 약간 다를 뿐 거의 같은 인장임을 알 수 있다.
홍석구가 상형과 인문을 결합하는 방식은 象形이 印文化한 경우와 印文이 象形化로 경우로 구분된다. 사구인 중 印形에 각종 기물을 활용한 사례를 物形詞句印이라고 한다. 홍석구 사구인 중에 기물의 형상이 인문을 대신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첫 번째 사례는 <開卷肅然>(Fig. 22-A)이다. 印形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향로와 향로대인 香佐兒인데, 각종 의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권숙연’의 인문은 향좌아(Fig. 22-B)의 다리를 비우고 새겨 넣었다. 인문의 출처는 남송대 학자인 眞德秀의 <心經贊>에서 “밝은 창 비자 나무 책상에 맑은 대낮 향을 사르고 책을 펴고 숙연한 자세로 나의 마음을 섬기노라(明窓榧几 淸晝鑪薰 開卷肅然 事我天君)”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개권숙연’의 앞 구절인 “대낮에 향을 사르고”를 향좌아 위에 향로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여러 다른 인장에도 적용되었다. <守口>(Fig. 22-C)라는 인문이 주자형 수병의 몸통에 새겨져 있는데, 이는 〈明心寶鑑〉에서 朱文公이 말한 “守口如甁(防意如城)” 구절을 연상시킨다. 즉, ‘병과 같이 언행을 조심하라’는 의미의 인장으로 뚜껑이 있는 주자 형태의 병이 인문을 대신한다.
자신의 성명을 기념한 <肇錫余以嘉名/錫龜>(Fig. 22-D)는 원형의 비석을 진 귀부형의 인장이다. 이 인문은 앞서 언급한 <惟辛酉/吾以降>과 유사하게 屈原의 「離騷經」에서 유래한 문구로, ‘나에게 좋은 이름, 錫龜로 지어 주시니’라고 해석된다. 「이소경」 원문 구절(肇錫余以嘉名)에서 자신의 이름과 일치하는 ‘錫’을 중앙에 강조하고 ‘龜’는 귀부로 표현한 것이다. 인문의 순서가 역시 일반적인 사례를 벗어나 있는데, 이는 당시 문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시구인데다가 하단에 나의 이름(余名)을 붙여서 새기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다음은 상형을 직접 인문으로 변형한 경우인데, 은거를 나타내는 인장으로 앞에서 소개하였던 <栗里/三逕>이 해당된다. 이 인문은 향로형과 투호형으로 제작되었다. 향로형 인장(Fig. 23-A)은 양 손잡이를 ‘三’과 ‘逕’으로 상형화하였고, 향로의 뚜껑, 귀 부분과, 몸통의 바깥 선까지는 경유겸의 『전운편람』에서 참고한 ‘栗’자(Fig. 23-B)를, 몸통의 안쪽 문양과 다리 부분은 ‘里’자를 변형하여 위아래로 조합한 상형이다. 얼핏 봐서는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향로의 상형에 가깝게 상형해낸 조형감각이 돋보인다. 앞에서 본 <백운산>인의 문자 결합과 유사한 방식으로 보다 정교하게 진전되었다.
투호형 인장은 남아있는 유례로 보면, 17세기 전반까지는 거의 보이지 않다가 홍석구를 비롯한 동시대인의 인장으로 몇 예가 남아있다. 투호관련 상형은 후대이긴 하지만 徐有榘(1764-1845)의 『林園十六志』에서 참고할 수 있다. 화살을 던진 결과를 나타낸 여러 상형 중에서 투호 가운데 홍석구의 <栗里/三逕>(Fig. 23-C)에서처럼 단지에 화살이 3개가 꽂혀 있는 모습은 ‘散箭’이라고 한다. 중앙단지와 귀단지 3곳에 마름모꼴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통 부분에는 상하로 2개의 화문이 장식되었는데, 3개의 마름모꼴은 역시 『전해심경』의 ‘栗’ (Fig. 23-D)에서 보이는 3개의 밤송이 모양의 형상을 문양으로 표현하고, 통 부분의 화문은 ‘里’를 나타내는 문양이다. 이는 홍석구의 또 다른 투호형 인장 <歸去來/山中山中/酒應熟> (Fig. 10-B)에서 3개의 단지 부분과 통을 포함한 거의 모든 부분을 인문으로 채웠다는 사실에서도 방증된다.
17세기 전반까지 물형 사구인은 鼎形, 香爐形, 鐘形, 注子形, 樽形이 제작되었고, 인문도 本貫, 字, 別號, 齋官名 같은 내용이 새겨졌다.50 이와 달리 홍석구는 향좌아나 주자, 투호 같은 기물형에다가 각 물형으로 연관되는 사구를 새겨 넣어 문학화 경향을 띠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홍석구의 물형인 형식의 사구인들은 이후 문인들의 인장에서 그대로 모각하거나 또는 동일한 형식에 인문을 교체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즉, <開卷肅然>은 18세기의 南獻敎가, <守口>인은 역시 18세기 徐宗奭이 사용하였던 사례를 『槿域印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시대인인 李時媒의 경우, 향로형의 <完山世家>인은 홍석구의 향로형 <율리삼경> 인처럼 향로의 상형을 刻符書 자체의 인문으로 상형한 예인데, 이시매의 인장으로 함께 소개된 <장육/거사>인은 홍석구의 <장육/거사>인과 거의 동일하다.51 향로 형상을 활용하여 인문을 구성한 방식이나 동일한 인장을 사용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이 인장들은 홍석구가 선물한 인장일 가능성이 크다.
물형 사구인과는 반대로 方形 詞句印은 인문을 상형으로 변형하는 방식이 활용되었다. 특히 홍석구는 김창흡과 이이명의 만시 등에서 회화를 애호하고 정통하였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어서, 당시 그가 감상하였던 회화에서 다양한 모티브의 상형을 인장에 채용하였을 것이다.
처음 소개할 인장은 홍석구 인장 중 가장 많이 알려진 <第一/江山>(Fig. 24-A)으로, 1606년 입조한 명의 사신 朱之蕃이 조선의 풍광을 극찬하면서 대동강 가 練光亭에 편액으로 내걸었던 문구로 유명하다.52 인문을 보면, 우측의 第자는 상하로 길게 조성하고 그 아래 ‘一’자는 필획이 보다 복잡한 ‘弌’자로 형태는 다소 납작해졌다. 좌열의 ‘江山’은 전체적으로 납작하게 변형하면서 위아래는 여백으로 처리하여 상하로 대칭을 이루게 구성하였다. 자체는 ‘江’과 ‘弌’은 小篆體, 第는 옥저전에 옹이 같은 마디를 주어 변형하였고, 山은 획의 비수가 분명한 奇字篆을 채용하였다. 그런 가운데, ‘江’자가 ‘第’자 영역을 침범하고, ‘弌’의 길게 뺀 획이 좌측의 ‘山’ 아래를 지나 하단 변곽까지 연결된다. 또한 ‘第’의 이체자인 ‘苐’의 부수 ‘艸’를 위로 뻗는 가지처럼 표현하고, ‘江’자의 경우, 획을 곡선으로 변형하여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상형화하였다.53
이를 염두에 두면, 이 인장이 당시 산수화의 경물 포치로부터 착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화가 李澄(1581-?)의 <瀟湘八景-平沙落雁>(Fig. 24-B)과 비교해보면, 우측 하단의 ‘弌’ 자는 전경의 토파를, 수목의 옹이를 가진 ‘第’자는 토파 위에 나무를, 좌열 ‘江’과 ‘山’은 원경의 강과 중경의 산을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인장의 호응법과 대칭구도 등 전각법식을 적용하는 동시에, 산수도의 기본 요소인 山, 水, 土, 木을 편파구도와 원근법으로 절묘하게 상형을 표현한 인장이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의 사구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인문이 ‘橋/上老人’ 즉 다리 위의 노인으로 판독되는 인장으로 주문방인이다(Fig. 25-A). 서체는 점획의 사용이 두드러지는 鐘鼎書 계통이다. 인면 우측에는 ‘橋’자를 두고 좌측에는 ‘上老人’을 배치하였다. 글자를 3:1로 배치하는 경우는 인면에 획을 균등하게 배분하기 위한 장법인데, 이 경우는 세 글자가 있는 부분의 밀도가 높은 편이다. 이러한 비대칭의 배치는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인데, ‘橋’의 부수인 ‘木’의 가로획이 짧게 변형되어 있고, ‘喬’와 ‘人’의 아래로 향하는 두 획들이, 김상헌의 「군옥소기」의 묘사처럼, 사람의 다리가 연상된다. 즉, 이 인장은 ‘다리 위의 노인’이라는 의미를 감안하여 印稿를 구성한 것이다. 통상 산수도에서 노인은 지물로 지팡이를 들고 侍子를 동반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傳 姜希顏의 〈高師渡橋圖〉(Fig. 25-B)를 참고하면 ‘上老人’ 부분은 노인을, ‘橋’자의 부수인 木은 지팡이를, 나머지 喬는 侍子를 구현한 것이다.
다음 사구인 <大明天下/一書生>(Fig. 26) 역시 자연의 상형을 형상화한 인장이다. ‘大明 하늘 아래 한 서생’으로 풀이되는 이 인장은 인면의 상부 약 1/2 정도에 옥저전의 ‘大明’을 배치하고 그 아래에 天下, 그리고 좌우 여백에 소전체 一書/生을 배치하였다. ‘大明’의 표기 방식은 인장면의 절반 정도로 커진 ‘大’ 아래로 파자된 ‘明’자를 품는 형상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는 해와 달이 있는 하늘 아래 사는 한 서생을 문자의 형태로 구현한 것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홍석구의 상형과 결합한 사구인은 김상헌이 밝힌 인장의 상형성에 영향을 받아 물형 사구인의 상형을 통해 인문의 일부를 표현하고, 인문의 篆字를 변형하여 인문과 연관된 象形을 표현하는 독창적인 인장구성으로 발전시켰다. 더욱이 김상헌이 인문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상형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과는 달리 인문의 뜻과 연관된 상형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보다 진전된 방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전각가였던 홍석구의 인장을 인문의 조형이라는 관점으로 살펴보았다. 우선 문집이 남아있지 않는 홍석구의 생애를 이단하의 「묘지명」과 정호의 「묘갈명」을 통해 관직생활을 중심으로 구성하여 그의 관직생활이 잦은 진퇴과 은거를 반복했음을 인문을 보완하여 밝혔다. 그러한 불행이 오히려 전각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인장의 인문 조형 분석을 통해, 홍석구는 기본적으로 서인계였던 김상헌의 안동 김문의 영향을 받아서, ‘옥저전’을 비롯한 전서 38체 등 서단에 소개되었던 다양한 전서체를 활용하고 주백상간법, 호응소밀법, 반곡전밀법, 나양법 등 장법을 사용한 수준 높은 인장을 남겨서 17세기 소위 ‘경화권 전각양식’의 주요한 인장경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상당수의 인장에서 새로운 인문의 조형을 시도하였는데, <立石/山主>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당시 유행하였던 주백상간법을 변형한 章法을 적용하고, 공방전형 사주 인과 방형인장 <江漢裔>의 장법에도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구성을 통해 다채로운 장법을 구성하였다. 사구인의 경우도 김상헌의 「군옥소기」에서 인문의 상형에 주목한 인장 품평의 영향을 받아, 인문과 상형의 결합에 탁월한 조형감각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향로, 주병 등 기존 물형인 이외에 향좌아, 투호, 거북 등을 선보여서 물형인에 다채로움을 더했으며, ‘第一江山’, ‘橋上老人’, ‘大明天下一書生’ 등에서 현대의 타이포그래피를 연상시키는 그의 인문조형 감각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문과 상형의 결합이라는 양식적 특징은 漢代 印章을 모범으로 삼았던 명대 인장과는 다른 조선 인장의 예술적인 성취로 주목된다.

Notes

1) 南陽洪氏 大宗中 中央宗會, <洪錫龜 인보 족자>(1968년 6월) 발문 참조. 이 <홍석구 인보 족자>에는 홍석구 인장 83方과 아들 홍진종의 인장 10方 등 총 93방이 수록되어 있으며, 논문에 제시한 인영 도판은 이 족자에 날인된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2) 金洋東,「韓國 印章의 歷史」, 『韓國의 印章』 전시도록(국립민속박물관, 1987), p. 195; 박철상, 「문인전각가의 등장과 장서인」, 『문헌과 해석』 통권25호(2003 겨울), pp. 78-80; 고재식,「한국 전각사 개관」, 『印, 한국인과 인장』(한양대학교 개교 72주년 기념 특별전도록, 2010).

3) 成仁根, 『조선시대 印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具貲訓, 「朝鮮朝의 藏書印·藏書家 硏究: 고려대학교 소장본을 대상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4) 具貲訓, 앞 논문, pp. 247-251, 291-292.

5) “噫, 今日不惟古書之罕有 中朝文獻 亦不可復見矣 今世之士 於此苟思其所自之不易 愛玩無斁 則其於漑鬵膏黍之感 自不能已 而因以了其經傳章句之指 則其風化之復於古也 亦庶幾焉 然則金生之功 亦不爲細矣 若其醇駁雅俗之氣 濃廉淡肉之態 則自有知者知之矣.”

6) 許穆, 『記言別集』 卷之三 疏箚 「書進皐陶謨箚」, “臣必以古文書進者 其書虞夏之書 其文虞夏之文 虞夏之際可想也 殿下遵而行之 亦虞夏之治也.”

7) 정주하, 「허목의 상고주의적 고문인식 고찰」, 『서예학연구』 제34호(한국서예학회, 2019.3).

8) 玉筯篆은 小篆體의 자형을 기본으로 변형된 서체로서 玉筯라는 명칭은 唐 篆書名家였던 李陽氷의 전서를 이르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소전과는 별도로 33체, 38체의 하나로 소개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원래 장식체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원대부터 小篆體의 변형으로 소개되었다. (鄭枃, 「書要篇」, 『衍極』 卷2)

9) 李完雨, 「서예」 『서울2천년사19-조선시대 서울의 과학기술과 예술』, pp. 521-525.

10) 박철상, 「문인전각가의 등장과 장서인」, 『문헌과 해석』(문헌과해석사, 통권25호, 2003년 겨울), pp. 71-80.

11) 吳淸輝, 『中國篆刻學』, pp. 25-45.

12) 張維, 『谿谷漫筆』 卷1, 漫筆, ‘宋晁補之之字无咎, 蘇門四學士之一也. 篤愛古印章悉錄古今印璽之法謂之圖書譜, 今世諸名公亦有癖此者.’

13) 李萬敷, 『息山集』 卷20, 「群玉識」, ‘我東則淸陰相公最名大家, 眉叟先生亦嘗喜焉, 二家所藏, 各百餘箇, 皆手所刻也, 近世大夫士效而畜者益衆, 然終不及二公之博且盡焉.’

14) 金尙憲, 『淸陰集』 권38, 「群玉所記」, ‘淸陰居士有章數十枚。 欹劂次玉。 纍纍滿函。 燦然爛然。 巾之襲之。 閣之于金臺之山石室之內。 命曰群玉之所。 居士性樸拙。 平生無玩好。 無藏畜。 獨於此嗜之。 若淫者之好好色。 雖有他好。 不與易也。’

15) 金尙憲의 「群玉所記」에 관한 자세한 해석과 영향에 관해서는 박철상, 「조선후기 문인들의 인장(印章)에 대한 인식의 일면」, 『漢文敎育硏究』 35호, pp. 218-223 참조.

16) 金壽恒, 『文谷集』 卷26, 「題李生松齊篆章帖」, “篆刻小技也 然孔子曰,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己, 此甚責其無所用心者也. 況於今得睹倉籒遺法, 尙賴有此, 則又曷可少哉.”

17) 고재식, 「한국 전각사 개관」, 『한국인과 인장』 한양대학교 개교 72주년 기념 특별전 도록, p. 143. 및 구자훈, 앞 논문, pp. 203-204 참조.

18) 이러한 인장의 분류방식은 전통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며, 한·중·일의 인장 관련 연구서에서 인문의 내용별로 분류하는 경우,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연구편의상 사용하는 용어로 본 논문에서는 字號印은 字印과 號印으로 나누고, 履歷印은 綜合印으로, 籍貫世家印은 本貫印 등등으로 표기하였다. 향후에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관한 정리가 필요하다.

19) 구자훈, 앞 논문, pp. 249-250. 주문방인 ‘惟辛酉吾以降’, 백문방인 ‘司馬兩世比齡文科一榜聯璧’, 주문방인 ‘東湖’가 이에 해당한다.

20) 李翊相, 『梅澗集』 권4, 「謝洪國寶錫龜 贈圖書」, p. 432; 李俁, 『百年錄』, 「答洪國寶書」(황정연, 『조선시대 서화 수장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6, p. 207 재인용).

21) 구자훈, 앞 논문, p. 251.

22) ‘藏六居士’와 ‘六用齋’는 ‘藏六’과 ‘六用’이 거북과 연관되어 이름의 ‘龜’와 연결될 수 있다. (朴光一(1655-1723), 『遜齋集』 第八卷, 「藏六堂記」, ‘藏六’의 뜻은 대체로 거북이 六用을 감춘다는 데에서 취한 것이다. (其藏六之義, 盖取諸龜藏六用也.), 송나라 범성대(范成大)의 〈習閑〉 시에 “한가로움을 익혀 게으름이 되고 게으름이 바보가 되니, 육용을 모두 감추어 움츠리고 있는 거북과 같다. [習閑成懶懶成痴, 六用都藏縮似龜.]” 하였다. (《石湖詩集 卷29 習閑》)

23) 金洋東, 「韓國 印章의 歷史」, 『韓國의 印章』 전시도록, 국립민속박물관, p. 194.

24) 李端夏, 『畏齋集』 卷8, 「洪錫龜墓誌」,; 鄭澔, 『丈巖集』 卷16, 「牧使洪公墓碣銘」.

25) 이 인장의 인문은 전국 초나라 시인인 屈原의 『離騷經』 한 구절인 “경인년에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惟庚寅吾以降)”를 빌려서 자신의 생년을 표시한 것이다.

26) 『顯宗改修實錄』 8年 丁未(1667) 3月 20日(甲午) 간원이 이경석·이단석·김익렴 등에 관한 논의를 거두기를 청하다.

27) 鄭澔, 앞의 글. ‘松谷則欲選爲制誥之任。 榻前薦公吏才文藝俱可用。 顯廟下敎曰。 此人乃善書篆文者也。 公聞之。 笑曰。主上以末技知名。 士大夫不當留心於雜藝也。 其正大自重又如此。’

28) 『顯宗改修實錄』 10년 기유(1669) 5월 13일(을사) 전 정평 부사 홍석구가 자기 아비의 원통함을 씻어 줄 것을 청하다.

29) 『顯宗改修實錄』, 14년 계축(1673) 7월 18일(을유).

30) 李頤命, 『疎齋集』 卷十三, 「海州牧使洪公墓碣銘」, ‘墓碣昔余弱冠, 拜公東湖, 長身美髯, 風儀燁如. 小閣俯江, 左圖右史, 淸賞留賓, 玄談析理.’

31) 李端夏, 앞의 글, ‘其歷試外任, 聲績茂著, 大臣宰臣, 交相尉薦, 而竟無有力振之者, 遂使君落拓以歿. 才德抱負, 不能大展於世. 余念之, 未嘗不痛惜. 然君平素處得失榮辱之際, 未嘗有動於中, 晩年, 君弟府使君被言官論劾, 蓋以向時誣謗爲頭辭. 君方在北府, 以爲事達天聽, 冤及泉壤, 此而不暴, 無以爲人, 遂棄官歸.’

32) 『論語』 第七章, 「述而篇」, ‘孔子께서 顏淵에게 말했다. “세상이 나를 써주면 내 뜻을 펴고 나를 버리면 물러나 숨는 것은 오직 나와 자네가 그 사람일 것이다.” ’ (子謂颜淵曰:“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33) 『論語』 第七章, 「述而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를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내 비록 채찍을 잡는 천직이라도 하겠지만,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닌 바에야 내가 좋아하는 바를 좇으리라.” (子曰 富而可究也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34) 栗里는 현재의 江西 九江市 南陶村 서쪽이다. 晋 陶潛(淵明)이 일찍이 여기서 거주하였다. 白居易, 『長慶集』 七 「訪陶公舊宅試」: ‘柴桑古村落, 栗里舊山川.’ 三徑(逕)의 의미는 다음에서 유래하였다. 西漢 말, 王莽이 專權을 잡자, 兗州刺史 蔣詡가 병을 핑계로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세 길을 열어서 오직 求仲 羊仲만 왕래하게 하였다. 나중에 三徑은 집의 정원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다……晋 陶潛 『陶淵明集』 五 「歸去來兮辭」에는 “三徑就荒, 松菊猶存.”이라고 하였다. (吳澤炎 등 編纂, 『辭源-縮印合訂本』(1987.9) p. 842 및 p. 19)

35) 홍석구 가문의 세거지는 현재 楊平郡 지역으로 관내 靑雲面에 栗里라는 지명이 확인되지만, 홍석구와 연관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36) 金昌翕, 『三淵集』 권1, 「洪海州錫龜挽」, ‘遊戲六藝林, 蔚然遊夏學, 精意妙 入神, 圭臬丹靑傳, 堂掛石鼓文, 几績華山璞, 琅琅禮樂器, 聊以澹留客.’(번역은 박철상, 「조선후기 문인들의 인장(印章)에 대한 인식의 일면」, 『漢文敎育硏究』 제35호, p. 224 참조).

37) 金壽恒, 『文谷集』 卷2 詩, 「送洪同年國寶錫龜出守端川」, 「寄松都經歷洪國寶」, 「與端川利城兩使君 同訪七寶山途中有作」.

38) 이성민, 「‘秦漢古文派’의 성립배경과 秦漢古文에 대한 인식」, 『한국어문학연구』 48(동악어문학회, 2007.2).

39) 고재식, 앞의 글, p. 143.

40) 任相元, 『恬軒集』 卷八 「挽洪海州錫龜」, ‘宦拙三朝後, 才高一代前, 吹噓煩日下, 寂莫臥江邊, 業托靑箱顯, 名留玉筯鐫, 詩成違入社, 臨挽獨潸然.’

41) 김동건, 「미수 허목의 전서 연구」, 『미술사학연구』 210(한국미술사학회, 1996).

42) 許穆, 『記言』 原集 上篇 「古文」, “漢唐來 諸作十四 芝英 飛帛 金錯 玉筯之類七 曹,劉王衛韋史之作又七…… 皆非古文 可見秦漢以降 風氣淺薄嗟乎”; 『記言』 別集 卷之六, 「答人論古文」 “惟陽氷玉筯文字 至今用之 而鄙拙無足可觀.”

43) 文彭, 『印章集說』, 朱白相間法(이승연 편역, 『전각의 이해』, 이회, p. 109).

44) 푸른 산은 나를 저버리지 않고, 흰 갈매기는 한가로움이 나와 같도다. 碧山不負吾: 金克一(1522-1585) ‘狂客’의 한 구절. 白鷗閑似我: 黃庭堅 ‘江南水色碧於天’의 한 구절.

45) 江漢을 漢江의 의미로 사용한 예는 홍석구보다 한 세대 정도 앞선 張維(1587-1638)의 시에 많이 보인다. ‘풍채 고상하신 분 회포 맘껏 푸셨는지, 한강 그 큰 이름 길이 기억하리(風雲高興愜, 江漢大名存)’ ‘뱃길로 한강 물 거슬러 올라, 다섯 묘역 동시에 이장하게 되었네(片舟泝江漢, 五喪同時擧)’ (張維, 『谿谷先生集』 28권, 五言律詩, 「次正使游漢江韻」/같은 문집, 25권, 五言古詩, 「金而好改葬挽詩」).

46) 金尙憲, 『淸陰集』 38권, 「群玉所記」, ‘曰淸陰者, 居士號也. 方形也, 玉筯也. 陽畫也. 其象如二童子綴耦, 間植玉戚, 周庠舞勺, 幼儀可觀.’/‘曰明哲保身者, 變倒薤法也. 方也陽也. 幽姿帶露, 如鮫女泣別, 點點成珠.’/‘曰白鷗沙者, 雜體也. 陽也, 恢奇卓詭, 迥拔常倫, 如曾點氣象, 鳳翔千仞.’

47) 박철상, 「조선후기 문인들의 인장(印章)에 대한 인식의 일면」, 『한문교육연구』 제35호(2010), pp. 221-223.

48) 중국 인장에도 이러한 인장이 象形印으로 명명된 사례가 있는데, 鳥자를 날아가는 새의 형상으로 하고 鳥鼠를 새와 쥐 형상으로 새겼다고 한다. 徐官, 『古今印史』, 象形印(이승연 편역, 『전각의 이해』(도서출판 이회, 2000) p. 60).

49) 金昌協, 『農巖集』 第24卷, 記, 「白雲山遊覽記」 참조.

50) 구자훈, 앞의 논문, pp. 126-202 참조.

51) 남헌교의 <開卷肅然>는 『근역인수』, p. 242 /서종석, <守口>인은 같은책, p. 372 /이시매의 <完山世家> <藏六居士>는 같은 책, p. 134 참조. <장육거사>의 경우, 李時楳의 호가 六隱齋인데, 이 六隱이 거북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역시 거북이를 의미하는 장육거사라는 인장을 새겨준 것이다.

52) 『薊山紀程』, 권1, 出城, 계해년(1803, 순조 3) 11월[1일-22일] 조

53) ‘江’과 ‘山’의 회화성에 대해서는 이미 김양동, 박철상이 주목한 바가 있었다. (김양동, 위 논문, p. 195; 박철상, 「문인전각가의 등장과 장서인」, 『문헌과 해석』 통권25호(2003년 겨울), pp. 78-80.)

Fig. 1.
홍석구묘 출토 印章과 白磁墓誌合,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Seals and White Porcelain Epitaph Case excavated from Hong Seokgu’s Grave, Korea University Museum (photo from the exhibition ‘Korean and Seals’ catalogue, Hanyang University Museum,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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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圖書帖』, 수원서예박물관 소장 Doseocheop, 28.7×31.6cm, Suwon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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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A. <洪錫/龜印>, Hongseok/guin, 3.7 ×3.7cm, B. <唐城洪/錫龜父>, Dangseonghong/seokgubo, 1.8 ×1.8cm, C. <洪錫/龜國/寶記>, Hongseok/guguk/bogi, 4.4×4.4cm, D. <洪錫/龜章>, Hongseok/gujang, 2.0×1.9cm, E. <洪錫/龜印>, Hongseok/guin, 3.7×3.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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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A. <浯溪>, Ogye, 1.0×1.0cm, B. <九曲山人>, Gugok/sanin, 2.0×2.8cm, C. <東湖>,Dongho, 3.7×3.7cm, D. <藏六/居士>, Jangyuk/geosa, 3.3×3.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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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A. <惟辛酉/吾以降>, Yusinyu/oigang, 2.0×2.0cm, B. <辛酉/辛卯/辛巳/丙申/一七三/六八八>, Sinyu/sinmyo/sinsa/byeongsin/ilchilsam/yukpalpal, 3.0×3.0cm, C. <家住楊/江九曲洞>, Gajuyang/ganggugokdong, 3.7×3.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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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A. <賜貫/唐城> Sagwan/dangseong, 4.0 ×4.0cm, B. <唐城/賜貫>, Dangseong/sagwan, 3.1×3.1cm, C. <唐城世家/西原外裔>, Dangseongsega/seowonoeye, 4.0 ×2.0cm, D. <唐城賜貫銀/樹前令禮史/雲孫洪氏錫/龜國寶浯溪/九曲山人印>,Dangseongsagwaneun/sujeollyeongyesa/unsonhongssiseok/gugukboogye/gugoksaninin, 2.3×2.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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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A. <丙戌司馬/庚寅文科>, Byeongsulsama/gyeonginmungwa, 1.5 ×3.0cm, B. <庚寅/聯璧>, Gyeongin/yeonbyeok, 4.7 ×4.7cm, C. <司馬兩/世比齡/文科一/榜聯璧>, Samayang/sebiryeong/mungwail/bangyeonbyeok, 2.8×2.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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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洪錫龜, <甲寺事蹟碑> 頭篆, Hong Seokgu, Gapsasajeokbi title, circa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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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A. <用之則行/舍之則藏>, Yongjijeukaeng/sajijeukjang, 1.2×1.2cm, B. <一笑/而已>, Ilso/i-i, 1.6×1.6cm,C. <從吾/所 好>, Jong-o/soho, 2.3×2.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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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A. <振衣/千仞/岡濯/足萬/里流>, Jinui/cheonin/gangtak/jongmalliryu, 3.5 ×3.8cm, B. <歸去來/山中/山中/酒應熟>, Gwigeorae/sanjung/sanjung/jueungsuk,, 4.4 ×2.3cm, C. <用拙/存/吾道>, Yongjol/jon/odo, 3.7 ×3.7cm, D. <歸臥/龍門/八節灘>, Gwiwa/yongmun/paljeoltan, 4.4×4.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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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栗里>, Yulli, 1.8×1.2cm /<栗里>, Yulli, 2.0×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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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A. <金/尙容/印>, Gim/sangyong/in, 2.6×2.6cm, B. <金尙/寬>, Gimsang/gwan, 2.1 ×2.1cm, C. <淸陰>, Cheongeum, 2.2×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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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金振興, 『篆大學』, Gim Jinheung, Jeondaehak, preface dated to 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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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A. <唐城世家/西原外裔>, Dangseongsega/seowonoeye,, 4.0 × 2.0cm, B. 金尙憲, <庚寅司馬/丙申 文科>, Gim Sangheon,Gyeonginsama/byeongsinmungwa, 3.5× 1.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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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A. <衆人/當惜/分陰>, Jungin/dangseok/buneum, 3.0×3.0cm, B. <湖翁>, Ho-ong, 3.5×3.3cm,C. <臥游>, Wayu, 5.2×5.2cm, D. <淸眞>, Cheongjin, 3.1×3.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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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許穆, Heo Mok, A. <許穆>, Heo Mok 2.9×2.9cm, B. <齊陽/許穆/文父>, Jeyang/heomok/munbo, 4.1×4.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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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A. 姜栢年, <晉山姜/栢年叔/久之章>, Gang Baeknyeon, Jinsangang/baeknyeonsuk/gujijang, B. <南益家風/西原公相>, Namikgapung/seowongongsang, 3.8×2.2cm, C. <立石/山主>, Ipseok/sanju, 2.4×2.4cm, D. <碧山不負吾/白鷗閑似我>, Byeoksanbulbuo/baekguhansaa, 3.3×3.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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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A. <洪柱元, <一架亭/主人>, Hong Juwon, Ilgajeong/juin, B. <辛酉/辛卯/辛巳/丙申/一七三/六八八>, Sinyu/sinmyo/sinsa/byeongsin/ilchilsam/yukpalpal, 3.0 ×3.0cm, C. <碧山不負吾/白鷗閑似我>, Byeoksanbulbuo/baekguhansaa, 2.8×2.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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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江漢裔>, Ganghanye, 3.7×3.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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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金尙憲, Gim Sangheon, A. <淸陰>, Cheongeum, 2.2×2.2cm, B. <明哲/保身>, Myeongcheol/bosin, 2.5 ×2.5cm, C. <白 沙>, Baekgusa, 1.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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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1.
A. <白雲山>, Baegunsan, 3.9×1.8cm, B. 金尙容, <白雲山>, Gim Sangyong, Baegunsan, 3.4×1.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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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2.
A. <開卷肅然>, Gaegwonsugyeon, 4.4 ×1.9cm, B. 香佐兒(『進饌儀軌』), Hyangjwaa(Jinchanuigwe), C. <守口>, Sugu, 3.0×1.6cm, D. <肇錫余以嘉名/錫龜>, Joseogyeoigamyeong/seokgu, 3.8×3.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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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3.
A. <栗里/三逕>, Yulli/samgyeong, 2.9×2.1cm, B. 栗(『篆韻便覽』), Yul(Jeonunpyeollam),C. <栗里/三逕>, Yulli/samgyeong, 2.7×1.2cm, D. 栗(『篆海心鏡』), Yul(Jeonhaesim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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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4.
A. <第一/江山>, Jeil/gangsan, 3.0×3.0cm, B. 李 澄, <瀟湘八景-平沙落雁>, Lee Jing, Sosangpalgyeong-pyeongsanaga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37.6×40.3cm,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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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5.
A. <橋/上老人>, Gyo/sangnoin, 2.9×2.9cm, B. 傳 姜希顏, <高師渡橋圖>부분, 비단에 담채, Attributed to Kang Heean, Gosadogyodo(part), ink and light color on silk, 22.2× 21.5cm,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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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6.
<大明天下/一書生>, Daemyeongcheonha/ilseosaeng, 3.0×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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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홍석구 인장 현황, Existing state of Hong Seokgu’s seals
Items Excavated seals Doseo cheop Geunyeog insu Excavated seals Doseo cheop Geunyeog insu
Family seal Namikgapung/seowongongsang Dangseongsega/seowonoeye
Ganghan/ye Dangseong
Sagwan/dangseong Ye/sagong/hu
Dangseong/sega Dangseong/sagwan
Name seal Hongseok/gujang (clergical script) Hongseok/gujang (clergical script)
Hongseok/guguk/bogi Hongseok/guin
Hongssi/seokgu Dangseonghong/seokgubo
Hongseok/guin Hongseok/guin
Courtesy name seal Gukbo Gukbo/ssi
Gukbo/bo Gukbo
Gukbo Gukbo/bo
Pen name seal Ho-ong Ipseok/sanju
Gugok/sanin Eunam/jijang
Dongho(small) Changchang/ong
Samsib/yuk/gung/doin Samsibyukgung/doin
Eunam Dongho(big)
Ogye Jangyuk/geosa
Other pen name seal Ilcho/jeong Yugyong/jae
Changchang/sil
Civil service exam seal Byeongsulsama/gyeonginmungwa Samayang/sebiryeong/mungwail/bangyeonbyeok
Gyeongin/yeonbyeok Samayang/sebiryeong/mungwail/bangyeonbyeok
Poetry seall Gwigeorae/sanjung/sanjung/jueungsuk Gwiwa/yongmun/paljeoltan
Jungin/dangseok/buneum Piljeo/yeonha/hyungjung/guhak
Cheongjin Jinui/cheonin/gangtak/jongmalliryu
Jeongmuk Yongjijeukaeng/sajijeukjang
Seowonsanggi/bukchangcheongpung Yullisamgyeong (arrow throwing type)
Jugan/cheongju Sosim/igik
Gaegwonsugyeon Yullisamgyeong (incense burner type)
Jangsimallangjeon Taeho/yeonwol
Joseogyeogigamyeong/seokgu Cheongsi/yumi
Noryeokgachanban Dongseok/seodae
Wayu Sugu
Byeoksanbulbuo/baekguhansaa Daemyeongcheonha/ilseosaeng
Gyo/sangnoin Cheongjin
Yangseongnyeong Sucheon/ilsaek
Yusinyu/oigang Jeil/gangsan
Jong-o/soho Yongjol/jon/odo
Ilso/i-i Baegunsan
Zodiac signs seal Sinyu/sinmyo/sinsa/byeongsin/ilchilsam/yukpalpal
Sealing seal Suwolsim
Address seal Gajuyang/ganggugokdong Yulli
Gugok/sangeo Yulli
Yulli
Book collection seal Jangyukjae/doseogi
Overall seal Dangseongsagwaneun/sujeollyeongyesa/unsonhongssiseok/gugukboogye/gugoksaninin
Hong Seokgu’s Seals Images excluding from excavated Seals
Doseocheop Hongseok/gujang*, Gukbo*, Sujukgeo Doriwonseo Byeoksanbulbuo/baekguhansaa (ancient coin type)
Geunyeoginsu Dangseong/sega, Dangseong/sega*, Gukbo*, Hwansan/nong/myeongwol * same seals
Hong Jinjong’s seals Dangseong/sega, Sagwan/dangseong, Hong/jinjong, Hongjin/jongin, Jongnobo, Jongno, Seronmun, Jangsimallangjeon, Hanjigoun, Jeonghakgajang
Table 2.
홍석구의 官職 進退 양상, Hong Seokgu’s appointment and retirement
Age(year) Appointment Retirement
30(1650) Appointed as Gajuseo after passing civil-service exam Same year False accusation by Lee Haechang
32(1652) Appointed as Chunchu-gisagwan 48(1668) Impeachment by Daesaheon
50(1670) Appointed as Gyeongnyeok of Gaeseong 52(1672) Dismissal from Busa of Pyeongsan
52(1672) Reinstated to Gyojeonggwan of Gukjagam 57(1677) Dismissal from Busa of Naju because of false accusation by Yun Iik
58(1678) Appointed as Busa of Haeju 58(1678) Dismissal because of report by Eosa Jo Jiseok
Same year Appointed as Gyeomgwan of Goewon and Chamgyo of Seungmunwon Same year Retired to Dongho after resig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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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ed and edited by Lee Sŭngyŏn,Chŏn'gagŭi ihae, tosŏch'ulp'an ihoe, 2000.

Edited and written by Wú Qīnghuī, Zhōngguó zhuànkèxué, Xīlíngyìnshè chūbǎn,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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