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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08; 2020 > Article
조선후기 봉황문(鳳凰紋) 청화백자를 통해 본 분원(分院)의 청화백자 제작과 화본(畫本)*

Abstract

본 연구는 봉황문(鳳凰紋)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궁중 공예품의 문양과 화본(畫本)의 관계를 밝히고 조선후기 분원(分院)의 새로운 청화백자 제작 특징을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조선시대 봉황의 도상(圖像)은 명(明)으로부터 화본으로 전해졌다. 조선 왕실은 화본을 통해 봉황문의 양식을 규제하는 한편 이를 지속적으로 계승하였다.1752년 관요(官窯)가 분원리에 고정(固定)되고 1754년 이후 분원에 화원(畫員)이 파견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으나 청화백자의 생산량은 점차 증가하였고 화원이 그렸음직한 다양한 도상이 나타난다. 따라서 화원을 대체한 화장(畫匠)이 화본을 활용하여 청화백자의 문양을 시문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청화백자 제작에 활용되었던 어화본(御畫本)의 기록은 이러한 추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화본은 사옹원(司饔院) 분원과 타 관아의 관원, 그리고 장인 사이에 협업을 가능케 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조선후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민간의 청화백자 수요는 급증하였고 이는 1753년 『시폐(市弊)』와 『공폐(貢弊)』의 기록과 사번(私燔)의 성행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화본은 조선 왕실과 사대부가 향유하던 문양을 대중화(大衆化)시키고 공예품의 규격화(規格化)와 정형화(定形化)를 이끌어 내었다. 이와 관련하여 봉황문 청화백자는 화본이 조선후기 분원의 청화백자 제작에 영향을 미쳤음을 증명할 수 있는 사례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Abstract

In regard to an array of white porcelain with phoenix design painted in underglaze cobaltblue, this paper examines the relation between certain illustrated manuals and design patterns of craftworks for the royal court’s use. The examination is expected to shed new light on the ways in which a group of official kilns called bunwon produced the new type of white porcelain in the late Joseon period. Pictorial motifs of phoenixes, introduced via painting manuals from the Ming dynasty, made their way into the Joseon court. While the royal families put regulations on the image’s stylistic variations through illustrated manuals for design, they nevertheless encouraged its constant use.
No literary evidence confirms that any court painters were sent to the bunwon since the official court kiln was settled and established in Bunwon-ri (present day Gwangju, Gyeonggi Province) in 1752—more accurately since 1754; however, the gradual increase in production of cobalt-painted white porcelain and the emergence of multiple images—which court painters most likely created for the white ware—provide circumstantial evidence that artisan painters, substituting more privileged court painters, took advantage of illustrated manuals for design for decorative patterns on white porcelain. In addition, a number of sources suggest that illustrations drawn by the King were to be transferred on blue and white porcelain, supporting the use of certain illustrated manuals. Cooperation among the official bunwon, other regional kilns, and private craftsmen could have been possible through the illustrated manuals.
With the commercial and industrial growth of the late Joseon dynasty came the exploding public demand for white porcelain with cobalt-blue paintings. Its popularity is indicated by the publications Sipye and Gongpye—report of market evils, report of tribute evils—from 1753, and also by the prevalence of illegal, surreptitious production of the white wares around that time. The illustrated manuals contributed to the popularization of design patterns that had been confined within the upper class, in addition to the standardization of craftworks. The phoenix design, in particular, is thus notable as a significant example that shows the manual’s role in the production of the white porcelain from the late Joseon period.

Ⅰ. 머리말

문헌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1754년(영조 30년) 이후 분원에 도화서 화원이 파견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1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 청화백자의 생산량은 급증하였을 뿐만아니라 청화백자에는 화원이 그렸음직한 다양한 도상이 확인된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관요가 과거와 달라진 생산 체제에서도 ‘화본(畫本)’을 활용하면서 안정적으로 청화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봉황문 청화백자를 통해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고자 하였다.
동물 소재가 회화에서 단독적으로 사용되는 동시에 공예품에서도 주문양으로 장식될 수 있는 경우는 한정적이었다. 특히 공예에서 동물 소재를 선별할 때, 그 상징적인 의미가 공예품의 용도 및 형태와도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제한적이었다. 그중에서 봉황은 회화의 단독 소재로 사용되었고, 공예품의 주된 문양으로 장식되었다. 도자는 기물의 중심부에도 시문되어 다른 동물 소재에 비해 비교적 폭넓게 활용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제까지 도자사 분야에서 봉황문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다.
봉황문이 시문된 도자 기물은 대체로 고려중기 상감청자와 조선후기 청화백자로 양분되어 있다. 이에 대한 선행 연구는 봉황문을 청자 혹은 백자에 표현된 여러 문양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단편적으로 정리하였다.2 따라서 봉황문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구체적인 조형 양식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특히 봉황문과 화본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연구 대상 시기를 조선후기로 한정하여 봉황문 청화백자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그 특징을 밝히고자 하였다.3 조선후기는 현존하는 봉황문 공예품의 재질이 다양하고 수량이 풍부하여 청화백자와 다른 공예품을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울러 이에 관한 문헌 또한 자세히 남아 있어 많은 도움을 준다.
봉황 도상은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폭넓게 확인된다. 특히 공예품 전반에 장식된 봉황문은 일정 부분 양식적인 공통점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회화의 소재였던 봉황이 문양으로 도안화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공예품에 장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황이라는 장식 소재는 궁중에서 시작하여 민간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화본으로 대표되는 도안체계의 존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본 연구를 통해 봉황문에 보이는 화본의 영향을 살펴봄으로써 이전과는 구별되는 조선후기 관요의 청화백자 제작 특징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하여 봉황문 청화백자를 통해 화본이 공예품에 미친 영향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Ⅱ. 공예품과 화본의 봉황문 비교 검토

조선의 봉황문은 일찍이 조선전기에 명으로부터 전해졌으며, 공예품의 제작에 활용할 봉황문 화본이 존재했다. 이와 관련하여, 세종이 공조(工曹)에 화본을 내려 첨(韂)과 표통(表筒)에 장식될 그림을 화본 양식대로 그릴 것을 명한 사례가 있다. 이는 외교와 관련된 사안이었기 때문에 기물의 품질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공조의 장인들은 필요에 따라 화본을 활용하여 기물의 완성도를 높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 공예품의 문양과 화본의 관계

조선은 개국 당시 중국으로부터 용과 봉황의 도상을 수용하였고, 명의 용봉(龍鳳) 도상을 그대로 따른 화본이 존재했다. 화공(畵工)들은 화본을 바탕으로 중국에 보낼 표전통과 보자기에 용과 봉황을 그대로 모사해야 했다. 기록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용봉의 도안을 한 획도 틀림없이 모사해야 했으나 눈알 혹은 발톱을 그리지 않아 중국으로부터 견책을 받았다는 대목이다. 용과 봉황은 중국에서 황제를 상징하는 만큼, 조선의 왕실에서도 외교적인 차원에서 용봉의 문양에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황문의 화본은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된 봉황 관련 의례기물의 도설을 통해 그 형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Fig. 1).
  • ①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진상할 다래(韂)와 표통(表筒)을 고쳐 그리게 하고, 화본(畫本)을 공조로 내려 보내며 인하여 전지하기를, “지난번 성절표(聖節表)에 절할 때에 보니, 표통의 그림이 뜻과 같지 아니하므로 특별히 화공에게 명하여 고쳐 그려서 내려 보내는 것이니, 이후로는 진헌(進獻)하는 다래와 표통은 이 양식대로 그리게(樣畫) 하라.” 하였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금슬(琴瑟)과 그림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이와 같이 지시한 것이었다.4

  • ② 예조와 공조에 전지하기를, "대저 그림에서 가는 획(細畫)이 있고 없는 것을 사람들이 쉽게 알지 못하여, 중국에 보내는 표전통(表箋筒) 및 보자기(袱)에 그린 용봉(龍鳳)의 몸과 날개 등이 한 획(一畫)도 틀림이 없어야 할 것인데, 국초(國初)에 중국에게 이미 견책을 받았으나, 그 뒤에 혹은 눈알을 그리지 아니하고 혹은 발톱을 그리지 아니하여, 배표(拜表)하는 날에 이르러서야 그릇됨을 알고 관리들이 탄핵을 입은 자가 있으니, 금후로는 표전통과 보자기에 그린 용의 몸·발톱·머리·뿔·귀·눈·코·입(支爪頭角耳目鼻口) 따위와 그린 봉(鳳)의 발·발톱·털·날개·입·눈(足爪毛羽口眼) 따위를 다시 자세히 살피고 검열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 하였다.5

또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숙종 어필 현판> 2건은 지금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제작연대를 알 수 있다는 시기적 측면과 봉황의 도상과 관련한 문양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Fig. 2, Fig. 3). 두 현판에 장식된 봉황의 꼬리는 여러 가닥으로 풍성하게 표현되었는데, 원을 그리는 단선들이 이어진 구불구불한 형태와 긴 선이 하나로 뻗은 형태로 각각 다르게 묘사되어 양자의 형태가 서로 다르다. 이와 같이 봉황은 명칭에서도 드러나듯 암수를 구별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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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의 도상은 한대(漢代) 이전에는 통일되지 못하다가 송대(宋代)에 정립되어 암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영조법식(營造法式)』에 수록되어 있다.7 이러한 도상이 명대(明代)를 거쳐 조선시대 봉황문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현판의 제작과 관련하여 동원된 인력이나 필요 물품에 대한 정보는 의궤를 참고할 수 있다. 동일한 어필 현판에 대한 내용은 아니지만, 외규장각 의궤 중 『숙종인현왕후명릉개수도감의궤(肅宗仁顯王后明陵改修都監儀軌)』에는 명릉 향대청(香大廳)의 어필 현판 조성에 별공감각(別工監刻) 1인이 8월 23일부터 25일까지 간검(看檢)하고, 모사사자관(模寫寫字官) 1인이 3일, 화원(畫員) 1인이 5일, 소목장(小木匠) 1명이 3일, 인거장(引鉅匠) 2명이 1일, 조각장(雕刻匠) 1명이 2일, 칠장(漆匠) 1명이 3일, 각수(刻手) 1명이 3일, 금장(金匠) 2명이 3일을 일한다고 명시되어 있다.8 이때, 화원의 경우 1인이 5일을 일하는 것은 다른 장인에 비해 비교적 작업일이 더 많은 편이다.9 의궤를 통해 짐작하건대, 어필 현판에 화원이 문양을 장식할 때는 그 대상이 어필인 만큼 문양의 주제 선정에서부터 시문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계획된 절차대로 엄격하게 진행되었고, 이에 활용될 준비된 문양 화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봉황문이 장식된 또 다른 궁중 유물로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영조 죽책함(英祖竹冊函)>(이하 흑칠죽책함)과 <장조비 옥책함(莊祖妃 玉冊函)>(이하 주칠옥책함)이 있다(Fig. 4, Fig. 5). 흑칠죽책함은 1721년 연잉군(延礽君) 시절의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될 때에 내려진 죽책을 보관하는 데 사용된 것이며, 주칠옥책함은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추가로 올리면서 제작한 옥책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다. 흑칠죽책함과 주칠옥책함의 장식무늬 구성은 거의 유사하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왕실 의례에서 신분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봉황문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적으로 용은 왕을, 봉황은 왕비를 상징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조선 궁중에서는 왕 역시 봉황문이 장식된 예기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 생활 속에서도 봉황 장식을 향유하였다.
해당 두 책함은 제작과 관련한 의궤가 확인되지 않지만, 흑칠죽책함과 관련하여 거의 동시기의 다른 의궤인 『민회빈복위선시도감의궤(愍懷嬪復位宣諡都監儀軌)』와 『단의빈예장도감의궤(端懿嬪禮葬都監儀軌)』에 유사한 흑칠함에 대한 도설이 잘 남아있어 이를 비교해 볼 수 있다(Fig. 6).10 의궤의 도설과 기물은 서로 동일한 형태로 제작되기 때문에 의궤의 도설은 곧 화본과도 같다. 이처럼 공예품의 제작에서 화본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2. 봉황문 청화백자 제작과 화본

조선의 관요가 백토와 번목의 조달을 위해 약 10년 주기로 요장을 이설하였음은 늦어도 인조 26년(1648) 무렵에는 언급되며,11 그 대안인 고정론은 숙종 23년(1697)에 제기되었다.12 이 계획은 영조 27년(1751)에 구체화되었고,13 최종 시행은 영조 28년(1752)에 이루어져 광주 남종면 분원리에 요장을 고정하였다.14 따라서, 분원으로의 재료 조달이 개선되었으니 요업의 방식도 자연스레 개선될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고, 이를 위해 이전의 요장과는 구별되는 요업 체계의 혁신적인 변화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요의 운영 체제 변화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조의 재위 기간 중 1754년(영조 30년) 이전의 어느 시점까지, 즉 조선전기에는 청화백자용준을 번조할 때에 맞춰 화원을 분원으로 매년 파견했기 때문에 문양이 시문된 화기(畫器)가 매우 귀하게 취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후로는 이전과 달리 청화백자의 제작과 사용이 대폭 증가하였으므로 그 정도를 흙처럼 흔하다고까지 비유하였다.15 이는 분원이 1752년에 고정되고 겨우 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의 상황이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화원의 파견 여부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화백자는 지속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이전의 관요와는 구별되는 특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때, 분원에서 청화백자의 화본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화백자 화본이 존재했음은 18세기 문집 『동포집(東圃集)』에서 확인된다. 아래 기록은 사옹원의 제거(提擧)로 분원의 백자 생산에 관여했던 영조가 직접 그린 산수, 난초, 국화, 매화 그림을 작은 백자호 제작에 사용하라고 명한 내용이다.16 이는 실제로 이루어졌고, 이후에 영조가 내린 그림 6폭 중 5폭을 김시민(金時敏, 1681∼1747)이 소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영조가 아직 왕세제였어도 그의 그림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청화백자의 화본으로 사용한 후에도 이를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 ③ 이 작은 그림 5폭은 바로 우리 금상(今上) 전하께서 잠저에 계시면서 주원(廚院)의 제거(提擧)를 맡아보실 때 그리신 것이다. 일찍이 어떤 관원이 번조소(燔造所)로 간다고 고하기에, 상(上)께서 문득 앉은 자리에서 유지(油紙)를 가져다 손바닥 크기로 6조각을 잘라 수묵으로 그리셨다. 순식간에 마치셨는데 산수가 둘 난초가 하나 국화가 하나 매화가 둘이었다. 관원에게 주시며 “너는 이것으로 소호(小壺)를 구워오너라.” 명하셨고 관원은 곧 하교대로 하여 바쳤다. 그 6폭 종이그림은 번조소 관원이 얻게 되었는데 미천한 신하가 일찍이 지극한 정성으로 그것을 구해 그중 5폭을 얻었으니 빠진 것은 매화 1폭뿐이다. … (생략) 예전에 우리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는 필법이 조맹부(趙松雪)보다 고매한 묵묘(墨妙)로 작은 그림(小畫) 그리기를 좋아하셔서 만기지가(萬機之暇)에 대략 붓을 휘둘러 보태시니 크고 작은 종이(牋)가 민간에 흩어졌는데 그것을 얻은 사람은 마치 커다란 옥(拱璧)처럼 그것을 보배롭고 귀중히 여겼다. 지금 전하의 이 묵(墨)도 가히 성조(聖祖)에 맞설 만하니 어찌 더욱 성대하지 아니한가. 초야에 있는 천한 신하가 우연히 이를 얻었는데 많기가 5장이나 되므로 삼가 하나의 첩(帖)으로 꾸며 이로써 영세토록 집안을 지켜주는 보배로 삼고자 하니 어찌 기이하고도 다행스럽지 않은가. 갑진(甲辰, 1724) 겨울 10월 임신(壬申)에 벼슬 없는 신하 김시민(金時敏)이 손 모아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삼가 쓰다.17

지금까지 위의 기록은 영조가 어떤 주제의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내용의 측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외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영조가 자신의 어화(御畫)를 어떤 종이에 그렸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화는 바탕의 재질에 따라 그 목적이나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18 유지는 내습성과 내구성이 좋으며 반투명하기 때문에 시야를 가리지 않아 문양을 장식할 기물에 겹쳐 활용하기 적합하여 주로 화본에 사용된다.19 따라서 위의 기록에서 영조가 유지에 그린 수묵화는 청화백자의 문양 제작에 활용될 목적이 분명했던 화본(이하 어화본)임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성종 또한 작은 수묵화를 그리기 좋아했고, 이를 그린 크고 작은 종이가 민간에 퍼져 나갔다는 내용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그림들 또한 어화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여러 방면에서 다양하게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영조가 그린 청화백자 어화본이 존재했음은 또 다른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서화에 뛰어났던 영조는 여러 차례 그림을 그려 청화백자 어화본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래 기록에 따르면 영조의 또 다른 청화백자 어화본에는 채색이 되어 있었으며, 이는 고종이 재위했던 1875년까지도 궁중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 ④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여러 곳에 봉안된 열성조의 어필(御筆)은 찬란하여 볼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열성조의 필법(筆法)이 모두 공경할 만하지만 영묘조(英廟朝)는 그림 솜씨도 정말 훌륭하였다. 사옹원 제거로 있던 때에 사기(砂器) 화본(畫本)을 채색하여 숙묘(肅廟)에게 봉헌했던 것이 지금 대내(大內)에 봉안되어 있다.” 하였다.20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위의 기록과 관련한 실물이나 청화백자의 제작에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본은 발견되지 않았다.21 그러나 채색된 화본의 사례로 복식의 제작에 활용되었던 자수 화본이 전해지므로, 이를 참고하면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다(Fig. 7). 수본의 색은 수를 놓을 부분의 실색과 일치하는 색으로 채색되어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자수가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을 예측할 수 있다. 흉배 수본에는 “차견양 유록운문 한단질 삼십쌍(此見㨾 柳緑雲紋 漢緞質參拾雙)”이라는 명문이 확인되는데, 중국에서 수입한 유록색의 운문이 있는 비단에 30쌍(參拾雙)을 만들 견양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견양이라는 것으로 보아 유지에 먹으로만 그린 보통의 화본과는 달리 일회용으로 사용되지는 않고 범본(範本)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화본과 견양은 각각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 혼동을 일으킨다.
현재까지 화본에 대한 연구는 주로 어진이나 초상화의 초본, 불화의 초본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었으며, 산수화의 초본이 연구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최근에는 공예품에서의 화본과 견양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22 ‘화본(畫本)’이란 그림의 근원 혹은 바탕이 된다는 의미로서 대부분의 그림을 통칭할 수 있어 용처나 용례가 매우 광범위하다.23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화본의 용처에 대한 범위 설정을 공예품의 제작에 참고하기 위해 평면에 그려진 그림으로 좁혀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24
화본과 더불어 주목할 것은 ‘견양(見樣)’이라는 용어다. 이는 문헌에서 대체로 공예품의 입체적인 실물 형태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25 이와 관련하여 경기도 광주 우산리 9호 가마터에서 <“견양(見樣)” 명 백자편>이 출토된 사례가 있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Fig. 8).26 그러나 견양이 화본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특히 종이에 실물 형태를 그린 ‘지견양(紙見樣)’의 경우에는 화본과 동일한 용도로 보인다.
그러므로 밑그림으로서의 지견양은 화본과 마찬가지로 기물의 조형이나 장식 문양과 같은 정보들을 내포하여 일종의 도면 혹은 도안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27 따라서 다양한 견양 중에서도 지견양만큼은 큰 범주에서 화본에 속할 수 있으므로 본 연구에서는 화본이 지견양을 포괄할 수 있는 더 큰 개념의 용어라고 판단하였다. 비교적 후대의 기록이지만 지견양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과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참고할 수 있다. 본(本)과 견양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어 둘의 의미가 서로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⑤ 박인오(朴仁五)가 집리 사통을 가지고 와서 전해 주어 살펴보니 “공사청의 전교(傳敎)에 의하면, 낙타완(駝駱椀)이 너무 작아서 쓸 수 없다.” 라고 하고, 대본(大本) 지견양(紙見樣)을 보내왔다. 시간을 늦출 수 없어서 인오에게 노자 2냥을 주어 분원(分院)으로 보냈다.28

조선시대 궁중 공예품에 활용된 화본은 도화서 화원이 그림을 담당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궁중 복식의 자수 문양이 있다. 자수 화본으로 사용될 그림을 화원이 그려 상의원에 전달했는데,29 상의원 관원은 흉배와 견룡의 화본 제작이 기한 내에 완료될 수 있도록 모든 일정을 관리하였다.30
  • ⑥ 상의원에서 아뢰기를 “감선(減膳)할 때의 세자빈(世子嬪)의 반발(飯鉢) 셋, 중궁전(中宮殿)의 다완(茶椀) 하나, 세자의 반발 하나를 십품(十品) 은(銀)으로 만들어 들이도록 하셨는데, 본원(상의원)이 저장한 은이 단지 1백 30냥뿐이기에 감히 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세자빈의 감선 때의 반발은 사옹원(司饔院)이 만들기를 청했는데, 비록 평소 때의 반발을 사용하더라도 되니 만들지 말고, 중궁전의 다완 및 세자궁의 반발은 곧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니, 다시 들여야 한다.” 하였다.31

  • ⑦ 이목이 사옹원 관원이 전하는 도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오는 18일 회맹연(會盟宴) 때에 동서로 입시(入侍)하는 종재(宗宰)들이 쓸 초엽배(草葉盃)의 원수(元數) 8부(部) 내에 동서로 나누어 쓸 것 각 4부를 만들어 갖추도록 당초 상의원에 공문(公文)을 보냈는데, 상의원 계사에 대한 복계(覆啓)내에, ‘하루 동안 사용하는 데 불과하니, 사옹원 주다방(酒茶房)에서 쓰던 것을 취해 쓰도록 하소서.’ 라고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32

  • ⑧ 윤석래가 사옹원 관원이 전하는 제조의 말로 아뢰기를, “본원(사옹원)의 봉사 윤연(尹淵)이 진상용 자기(磁器)를 굽는 일로 이미 하직 인사를 하고 번소(燔所)로 내려 갔습니다. 어제 정사에서 그를 상의원 직장으로 옮겨 제배하였는데, 교체하는 데 폐단이 있을 뿐 아니라 제반 잡물들을 서투른 자에게 맡길 수는 없습니다. 규례대로 본원(사옹원)의 직장(直長) 중 한 사람과 서로 바꾸어 감동(監董)하는 데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33

상의원은 임금의 의대 및 궁궐 안의 재화와 금보 등과 관련된 일을 주관했기 때문에 이곳에 소속된 여러 분야의 장인들은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을 제작했다.34 이와 같은 사실은 7개 관청으로 구성된 공조의 관아 중에서도 상의원에 속한 장인의 수가 68종목에 597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도 증명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상의원의 규모와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35 상의원에는 다양한 종목의 장인들이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궁궐 내에서 소용되는 전반적인 공예품의 제작 과정에 관여했기 때문에 다른 관아와의 협업이 가능했으며, 특히 사옹원과의 교류도 일부분 확인되어 주목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진상해야 할 국용 물품을 대납 혹은 전용하기도 하고 관원들이 서로 이동하기도 하였다.36 이러한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상의원의 자수 화본이 사옹원 분원의 청화백자 제작에도 문양의 도안으로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37
덕온공주가 1837년 가례에서 착용했던 홍장삼 수본은 제작연도와 사용자가 정확히 밝혀진 궁중복식 자료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Fig. 9). 앞길본의 도안을 살펴보면, 하단의 파도 위로 규형의 암석과 영지가 외곽에 배치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구멍이 뚫린 괴석 위에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 서 있는 봉황 주위로 3송이의 모란이 둥글게 둘러져 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문양이 18세기의 청화백자호에서도 확인되어 주목된다.
국보 제263호 <백자청화산수화조문호>는 동체부 4면의 화창(花窓) 안에 각각 산수문이 2면, 학문이 1면, 봉황문이 1면에 청화로 시문되었다.(Fig. 10). <덕온공주 홍장삼 수본>과 국보 제263호 <백자청화산수화조문호>의 봉황문은 봉황, 괴석, 모란의 소재뿐만 아니라 구멍 뚫린 괴석을 밟고 선 봉황의 자세, 봉황과 괴석을 둘러쌓은 모란의 구성, 전체적인 묘사와 표현이 유사하다. 따라서 조선후기 청화백자의 문양과 궁중복식의 수본 도안이 서로 영향관계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자의 문양을 비교하기에 앞서 이들의 제작 시기로 추정되는 18세기와 19세기의 시기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화본이라는 것은 배포가 쉽고 확산이 빠르며, 정형화된 도상은 대를 이어 전해지고 계승된다. 대표적으로 명대의 『고씨화보(顧氏畵譜)』, 『정씨묵원(程氏墨苑)』,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비롯한 화보류에 수록된 봉황의 도상은 조선시대를 거쳐 대한제국기 및 근현대의 회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38 이와 같이 기물의 제작 시기가 서로 다를지라도 도상은 화본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백자청화산수화조문호>와 <덕온공주 홍장삼 수본>은 화본이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관련된 봉황문의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수본과 청화백자 모두 화원이 제작에 관여한 것과 관련하여, 화원의 화본 제작과 활용은 의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화원은 도감이나 청에서 1, 2, 3방(房) 혹은 각 소(所)에 속하면서 도설(圖說), 기화(起畫), 전금(塡金), 인찰(印札), 보획(補劃), 북칠(北漆) 등 그리는 것과 관련된 모든 일을 수행하였다.39 이때 기물 제작을 위한 화본 또한 화원이 담당하였다. 용상을 만들 때 조각장이 사용할 용그림을 출초(出草)하기 위한 화본에 유지 두 장이 필요하다는 기록과,40 제기의 화본을 위해 화원 한 명을 보낸다는 기록,41 관의(棺衣) 자수본에 초주지 두 장이 필요하고 선수화원(善手畵員) 다섯 명이 담당한다는 기록 등이 의궤에서 확인된다.42 일반적으로 의궤의 공장질(工匠秩)이나 장인소용질(匠人所用秩), 조작질(造作秩), 품목질(稟目秩), 감결질(甘結秩)에는 화원이 사용하는 물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물품 중에는 화본을 그리기 위한 유지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Ⅲ. 조선후기 봉황문 청화백자에 나타난 화본의 영향

공예품의 제작 단계에서 화본의 활용은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기에 공조의 관아뿐만 아니라 사옹원 분원에서도 필요에 따라 청화백자 제작에 화본을 활용하였다. 이와 같은 정황은 조선후기에 일어난 청화백자의 수요 증가라는 사회적 측면과 이에 대한 공급 확대라는 분원의 요업적 측면을 통해 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조선후기 봉황문 청화백자는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물질 자료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1. 청화백자의 수요 증가와 공급 확대

1752년 분원의 고정 이후, 화원이 분원에 파견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하는 언급과 함께 “청화백자가 흙처럼 흔하다”는 1754년(영조 30년)의 기록 사이에서 상공업의 급성장에 따른 민간의 청화백자 수요 증가와 사번 성행을 뒷받침하는 자료로서 『시폐(市弊)』와 『공폐(貢弊)』가 주목된다. 이는 1753년(영조 29년)에 비변사(備邊司)에서 서울의 시전상인(市廛商人)과 공인(貢人)의 상소와 그에 따른 조처를 기록한 것이며, 또한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진 절목이다. 『시폐』와 『공폐』에는 관원(官員)들이 시전상인이나 공인에게 요구하는 역이나 물품 대금에 대한 폐단으로 인해 상공인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 잘 나타나 있다.43
『시폐』의 내세기전(內貰器廛) 상인들의 상언(上言)을 살펴보면, 여러 상사(上司)와 아문(衙門)에서 기물의 값을 치르지 않고 미리 가져다 사용하고 해를 넘겨 염가를 지급하며, 난전(亂廛)을 하는 자들은 세가(勢家)의 종(奴)이니 금억(禁抑)할 수 없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44 또한 『시폐』의 가장 뒷면에 적혀있는 무제(無題)의 내용 중에는 혼궁(魂宮)의 제기 중에서 사옹원의 사기가 아닌 것이 있어 신칙(申飭)하였으나, 부족할 시에는 사기계(沙器契)에서 가져다 쓴다고 하였기에 해당 낭청을 감처(勘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45
『공폐』의 반사기계인(盤沙器契人) 공인들의 상언을 살펴보면, 반사기 등물(等物)은 한번 취용(取用)한 후에는 파손되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며, 궁가(宮家)나 액정(掖庭) 및 각사(各司)의 하인들이 차용(借用)한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각처(各處)의 정례(定例) 외의 책납하는 22조목에 대한 비변사의 제사(題辭)는, 앞으로 부당한 진배는 시행하지 않으며 이를 어기는 관원은 죄로 다스린다고 하였다.46 이외에도 사기계인(沙器契人) 공인들은 각사(各司)의 하인들이 근거 없이 빙자(憑藉)하여 기물을 번번이 가져다 쓰거나, 정례 진배 수량보다 넘치게 받고 파손되는 즉시 가져다 쓴다고 하였다. 덧붙여 사옹원 분원이 번조하는 사기가 부족하여 번번이 사기계로부터 빌린다고 하였다.47
이와 같은 상공인들의 곤궁한 처지를 야기하는 폐단에는 대부분의 관사와 관원들이 관련되어 있었으며, 분원이 번조하는 정례 자기의 부족은 사번의 성행과 무관하지 않았다. 사번의 성행은 관요의 존재 이유와는 상반되는 현상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요업기술의 개선과 발달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후기 봉황문 청화백자의 수요와 공급에도 영향을 미쳤다. 해당 내용을 생산지, 소비지, 전세품의 현황을 검토하며 살펴보자.
먼저, 생산지의 경우 경기도 광주 분원리 요지에서 접시로 추정되는 봉황문 청화백자편이 출토되어 분원에서 봉황문 청화백자를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48 분원리 이전의 금사리 요지에서도 청화백자의 생산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나, 분원리에 이르러 최대의 생산량을 달성하였다. 다음으로, 소비지의 경우 경희궁지와 숭례문에서 소형의 운봉문호와 운봉문시(匙) 청화백자편이 출토되어 사대문 안 궁궐 인근에서 봉황문 청화백자를 소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49 마지막으로, 전세품의 경우 입호, 원호, 병, 합(발), 접시, 시, 연적, 지통과 같은 다양한 기종이 확인되고 있어 조선후기 청화백자의 수요 증가와 더불어 분원의 봉황문 청화백자의 생산과 공급 또한 활발했던 것으로 확인된다.50
봉황의 도상은 궁궐건축부터 궁중유물과 민간유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애호되었고, 세화(歲畫) 은사(恩賜)51나 관복(官服) 하사(下賜)를 통해 민간으로 직접 전해졌다. 홍장삼을 비롯한 수의(繡衣)에 장식되는 한편, 혼례 이후 가정에서 사용되는 기물이나, 아동의 복식에도 부부의 화합과 다산을 상징하는 길상적 의미로 장식되었다. 19세기 화원 선발시험인 녹취재(祿取才)에서 가장 많이 출제된 영모(翎毛) 화제는 봉황이었다.52
봉황문은 길상문의 한 종류로서 청화백자에 시문되었으며, 건강과 장수, 부귀영화, 벽사 등의 주제에 대한 문양이 청화백자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청화백자에는 민화의 양식이 반영된 길상문이 유행하는 것이 특징적이다.53 이때, 일부 민화는 궁중 장식화가 민간으로 양식 전이가 이루어진 것이며, 화원이 그린 궁중회화를 비롯한 다양한 그림들이 광통교(廣通橋) 인근과 지전(紙廛)에서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궁중양식 장식화의 대중화(大衆化)를 앞당겼다.54 이는 문양의 대중화와도 관련이 있다.

2. 화본을 통한 문양의 대중화

궁중의 회화와 화본은 모두 화원의 화풍이 동일하게 반영되었지만, 회화의 소재였던 봉황이 무늬로써 공예품에 장식되기 위해서는 봉황의 특징들이 강조와 생략을 거쳐 조형이 단순하게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봉황문의 어떤 조형적 요소가 화본을 통해 지속되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조선후기 봉황문 청화백자에서 봉황의 도상은 『산릉도감의궤』의 주작과 비교할 수 있다.55 특히, 영조 연간을 기준으로 『산릉도감의궤』의 주작 도상이 봉황에서 참새와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주목된다(Fig. 11, Fig. 12).56 명칭은 주작이지만 외형을 현대의 조류 분류법을 통해 살펴보면, 맹금(猛禽)과 명금(鳴禽)에 견주어 볼 수도 있다. 특히 맹금형은 명대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통용되던 봉황의 도상과도 유사성이 확인된다.57 따라서 산릉도감의궤의 주작도는 봉황의 도상 이해를 돕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앞서 살펴본 국보 제263호 <백자청화산수화조문호>의 제작 시기를 『선의왕후의릉산릉도감의궤』(1730)와 『승정원일기』의 영조 30년(1754) 기사 내용을 토대로 짐작해볼 수 있다. 문양의 시문에 봉황문 화본을 활용했다는 가정 하에 해당 유물은 주작의 도상 변화를 기점으로 늦어도 1750년대 이전에는 생산되었으며 화원이 문양을 시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Fig. 10).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의궤의 주작도를 비롯한 봉황문과 관련된 궁중 유물을 종합적으로 비교 후 양식을 분석한 결과, 목의 깃털이 한 가닥씩 둥글게 말려 있다가 뻗어있는 모습이나, 꼬리 깃털이 시작되는 부분에 3점으로 둥글게 말려 있는 묘사가 공통적인 양식으로 확인되었다.58 이러한 요소는 『세종실록』 오례의 예기 도설 사례와 같이 15세기에 이미 확인되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해당 양식이 명으로부터 조선에 전해진 봉황문 도상의 원형이라 판단하여 봉황문의 고식적(古式的) 양식이라고 정의를 내렸다(Fig. 13).
이와 같은 봉황의 묘사는 『세종실록』 오례의 예기 도설뿐만 아니라 어필 현판과 책함의 봉황문에서 확인되며, 꼬리 깃털은 확인할 수 없으나 목 깃털의 경우 『산릉도감의궤』의 <주작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전반적으로 화원의 화풍이라 할 수 있다. <주작도>의 주작 도상이 변화하는 1750년대의 시점에서 봉황의 도상은 맹금형을 유지하는 한편, 이러한 고식적 양식이 지속적으로 계승되는 사례가 <백자청화산수화조문호>와 <덕온공주 홍장삼 수본 앞길본> 및 <9등적의본>이다.
이러한 궁중 유물들의 사례를 통해 고식적 양식이 묘사된 봉황문 청화백자의 시문 집단은 화원이거나 화원과 교류가 있는 인물일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직까지 청화백자운봉문호의 봉황문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화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궁중의 복식 <9등적의본>에 표현된 봉황문과 주제 및 구성의 측면이 유사하여 이를 참고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서로의 영향관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Fig. 14).59
화본을 활용한 청화백자의 제작과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청화백자용준(이하 용준)이라 할 수 있다. 도자 기물 중 상징과 용도에 있어 최상위에 위치했던 용준은 제작 규범 또한 매우 엄격하여 화본으로 대변되는 의궤 도설이 조선시대 전체를 걸쳐 확인된다.60
이와 관련하여 청화백자운봉문호는 청화백자용준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양자가 서로 영향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청화운봉문호>(동원500)의 문양을 살펴보면, 봉황의 날개와 꼬리의 깃털이 비행 방향과는 반대로 날리고 있어 주목된다(Fig. 15). 이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위적인 묘사가 이루어진 이유는 해당 문양의 자체적인 변화 과정 중에 나타난 현상이 아니라 다른 문양에서 갑작스럽게 영향을 받아 그 양식이 일부분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비행 방향과 반대로 날리는 털의 묘사는 18세기의 청화백자용준에서 용의 갈기 표현과도 동일하다.
더 나아가 양자는 19세기 이후에 진행되는 전체적인 양식 변화를 함께 한다. 청화백자운봉문호와 청화백자용준은 동체부의 주문양에 포함되는 운문과 보주문 그리고 구연부, 견부, 저부의 보조문양 구성이 유사하다. 결론적으로, 청화백자운봉문호는 청화백자용준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문양적 측면 그리고 기형적 측면의 양식 변화가 동일하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천공을 비행하는 신령한 동물의 도상은 권위와 상징이 뒤따르기 때문에 사용되는 경우의 수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청화백자호 중에서 청화백자용준을 이토록 적극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청화백자운봉문호의 사례가 가장 압도적이다. 이와 같이 청화백자운봉문호는 유물의 양식 비교를 통해 청화백자용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청화백자용준의 용을 시문한 주체가 운봉문호의 봉황을 함께 시문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용과 봉황이 함께 시문된 19세기의 청화백자합을 근거로 제시하여 증명할 수 있다(Fig. 16).
조선후기의 분원에 화원이 지속적으로 파견되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청화백자의 생산량은 점차 증가했기에 화원이 부재했을지라도 화장(畫匠)이 화본을 활용하여 청화문양을 시문했을 가능성이 크다.61 분원의 고정 이후 청화백자의 생산량 증가는 화본을 활용한 화장의 역할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조선후기 분원은 진상을 위한 정례적인 번조와 별번(別燔) 이외에도 사번(私燔)이 성행하면서 청화백자의 생산이 급증하였는데, 그로 인해 조선왕실의 권위와 품격을 상징하던 청화백자의 가치는 점차 사라졌으나 민간에서의 사용은 활발해졌다.62 수요의 증가에 따른 공급의 확대를 위해 장식 문양의 규격화와 정형화가 이루어진 청화백자는 분원에 소속된 한정된 인력과 시간이라는 조건 안에서도 문양의 화본을 활용하여 생산량의 증가와 품질의 유지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홍장삼 수본에는 앞서 살펴본 봉황문 이외에도 다양한 장식문양이 그려져 있어 공예품 및 청화백자와의 장식문양과 비교가 가능하다. 홍장삼에 장식된 다양한 문양은 모두 청화백자에서도 빈번하게 볼 수 있는 문양이다(Table 1). 식물문의 경우 여러 종류의 화목이 존재하는데, 청화백자에 많이 시문되었던 모란, 불수감, 석류, 매화, 국화, 복숭아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화조도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화목이었던 목련이나 철쭉까지 홍장삼 수본에서 동일하게 확인되어, 조선후기 청화백자 문양의 경향이 궁중복식의 장식문양과 흐름을 함께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본 논문에서는 대표적으로 철쭉 무늬를 소개하고자 한다(Figs. 17~18). 뿐만 아니라 분재문이나 수복강녕 등의 길상 문자문 역시 청화백자와 수본 및 금박본에서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63
덧붙여, 궁중의 보자기에 나타나는 장식문양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궁중 보자기에는 원형의 봉황문을 중심으로 문자문, 화문, 보문, 과실문과 같은 길상문양들이 장식되어 있다(fig. 19). 이 문양들은 앞서 살펴본 청화백자의 문양과도 거의 동일한 양식을 보이기 때문에 이들은 문양의 시문 집단이 같거나, 화본을 활용하여 문양의 양식을 지켜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수복(壽福)자는 도안화된 문양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분원의 공소 이후 청화백자는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에 공납되었는데64 공납에 필요한 수량을 모두 맞추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장인들은 생계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청화백자를 생산해야 했다.
  • ⑨ “맑음. 익준(益俊)이 이학산(李鶴汕)과 동반하여 상경하였다. 화청장(畵靑匠) 품삯 때문에 실랑이질하여 경빈(京賓), 기웅(基雄)과 온종일 수복(壽福)을 화청하였다.65

재질 및 형태와 용도가 서로 다른 공예품을 하나로 관통하는 중심적인 문양 도안이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궁중 공예품의 제작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아에 속한 관원이나 장인이 함께 협업할 수 있는 업무의 효율성은 수공업 체제의 작업구조에서 매우 유익하고 경제적인 것이다.
화보나 의궤처럼 장식문양의 도안 역시 서책의 형태로 정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조사로는 조선시대에 장식문양을 집대성한 도안집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서책의 형태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증명하기 어렵다. 다만, 낱장 단위로 전해지는 수본의 사례를 통해 도안 유통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다. 수본은 종이에 싸거나 봉투에 넣어 보관했던 것으로 확인된다.66 이러한 방법은 수본의 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이는 얇고 가벼워 소지하기 용이하기 때문에 화본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간편하고 빠르게 유통될 수 있다.

Ⅴ. 맺음말

그림의 근원 혹은 바탕이 되는 밑그림을 의미하는 화본(畫本)은 도화서 화원(畫員)이 그림을 담당하였으며, 궁중에서는 필요에 따라 이를 활용하여 공예품의 생산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공예품과 화본의 봉황문(鳳凰紋)을 비교 검토하여 조선후기 관요(官窯)의 새로운 청화백자 제작 특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조선의 봉황문은 조선전기에 명(明으)로부터 화본으로 전해졌고, 다양한 공예품의 제작에 화본이 활용되었다. 조선후기 1752년 관요의 고정(固定)은 재료의 원활한 수급과 요업의 개선을 이끌어냈다. 상공업의 급성장에 따른 민간의 청화백자 수요 증가와 이에 따른 폐단은 1753년 『시폐(市弊)』와 『공폐(貢弊)』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분원(分院)이 번조하는 정례 자기의 부족은 사번의 성행과도 관련이 있다. 이 시기에 분원은 자기의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청화백자의 공급을 확대해야 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1754년 이후에는 분원에 도화서 화원이 파견된 기록이 확인되지 않으나, 화본을 활용한 화장(畫匠)이 화원을 대체하여 지속적으로 청화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청화백자 제작에 활용되었던 어화본(御畫本)과 관련된 기록은 이와 같은 추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되며, 채색된 사기(砂器) 화본과 관련된 기록 또한 이를 뒷받침해준다.
아울러 공예품의 실물 형태를 의미하는 견양(見樣) 중에서도 평면형 도화 형태의 지견양(紙見樣)은 화본의 범주에 포함된다. 화본은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 제작 전반에 통용되었으며, 화원의 화본 제작과 이를 공예품의 제작에 활용하는 것은 다양한 의궤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화본은 사옹원 분원과 타 관아의 관원 및 장인 사이의 협업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화본은 조선왕실과 사대부가 향유하던 문양을 대중화시키고 공예품의 규격화와 정형화를 유도하여 전체적인 품질을 유지하면서도 생산량의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 이와 관련하여 봉황문 청화백자는 화본이 조선후기 분원의 청화백자 제작에 영향을 미쳤음을 규명할 수 있는 사례로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Notes

1 『承政院日記』 61冊, 英祖 30年(1754) 4月 29日.

2 박선경, 「국보 제 263호 白瓷靑畵山水花鳥紋大壺에 대한 연구(Ⅰ)」, 『丹豪文化硏究』 2(용인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 1997), pp. 31-61; 김윤정, 「高麗後期 象嵌靑磁에 보이는 元代 磁器의 영향」, 『美術史學硏究』 249(한국미술사학회, 2006), pp. 163-205; 최경화, 「조선 후기 청화백자 문양과 민화와의 상관성 고찰」, 『한국문화연구』 34(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18), pp. 151-186. 이 외에도 다양한 논문에서 도자와 관련된 봉황문을 단편적으로 다루고 있다.

3 한국도자사에서 조선후기에 대한 구분은 분원리 가마터의 운영 기간을 기준으로 상한을 1752년으로 설정하는 한편, 해당 시기를 ‘분원리 시기’로 정의하기도 한다. 정양모, 「朝鮮白磁의 變遷」, 『朝鮮白磁展Ⅰ』(호암미술관, 1983), pp. 55-65; 강경숙, 『韓國陶磁史』(일지사, 1989), pp. 414-417; 최경화, 「朝鮮後期 分院里 時期 官窯白磁 硏究: 1752-1895년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14), pp. 1-3. 본 연구에서도 1752년 분원의 고정(固定)을 가마터의 특징 구분점으로 파악하지만, 이설된 각 가마터의 도자 제작 경향이 서로 단절되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변화되는 부분을 고려하여 조선후기의 범위를 1700년 이후로 규정하는 의견을 따른다. 장남원, 「朝鮮時代 後期 白磁의 새로운 傾向」,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183(한국미술사학회, 1989), pp. 33-34, 45-46; 전승창, 「조선 관요의 분포와 운영체계 연구」, 『미술사연구』 18(미술사연구회, 2004), pp. 10-13. 향후 금사리 가마터의 발굴이 전면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더욱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도자사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개진될 것으로 기대한다.

4 『世宗實錄』 28券, 世宗 7年(1425) 5月 3日.

5 『世宗實錄』 85券, 世宗 21年(1439) 6月 19日.

6 꼬리 형태에 따른 봉황의 암수 구별은 아직 연구자마다 시각이 다르다. 그 이유는 꼬리 형태를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나타나는 일정한 규칙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러 공예품에서 봉황문의 비행 자세는 다양하게 나타나며, 한 쌍이 동일한 꼬리 형태로만 표현되는 경우도 많아 양식적으로 암수 구별을 아주 엄격하게 지킨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무리하게 암수를 정의하지 않으려 하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자료를 검토하여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만 기존 연구 중에서 꼬리가 구불구불한 형태는 수컷인 봉으로, 뻗은 형태는 암컷인 황으로 구별한 견해와 이와 반대의 견해는 다음의 자료를 참고했다. 葉喆民, 『中國陶瓷史』(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 2006), p. 421; 『조선청화(靑畵) : 푸른빛에 물들다』(국립중앙박물관, 2014), p. 162.

7 김현지, 「한국과 중국 鳳凰圖의 도상과 상징 연구」, 『미술사연구』 26(미술사연구회, 2012), pp. 17-19.

8 『肅宗仁顯王后明陵改修都監儀軌』(1744) 移文秩 同日(甲子八月二十三日).

9 동원된 인력에 대하여 별공감각, 모사사자관, 화원은 인(人)이라 하고, 이외의 장인은 명(名)이라 하여 관직과 업무에 따라 차등을 두고 있다. 공예품의 제작 과정에서 화원의 역할은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10 김세린 연구자는 해당 두 의궤에 수록된 <화금흑칠내함>의 도설을 통해 화원의 화본제작 및 기화작업을 통한 회장식이 공예품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김세린, 앞의 논문(2019), pp. 190-192.

11 『承政院日記』 103冊, 仁祖 26年(1648) 11月 9日.

12 『承政院日記』 370冊, 肅宗 23年(1697) 3月 12日.

13 『備邊司謄錄』 122冊, 英祖 27年(1751) 2月 1日.

14 『與地圖書』 京畿道 楊根 物産條.

15 『承政院日記』 61冊, 英祖 30年(1754) 4月 29日.

16 해당 기록에서 확인되는 어화본의 하달은 시기적으로 분원이 고정되기 이전이며 화원의 관요 파견이 지속되던 시기이므로 화원은 이를 활용하여 청화백자를 제작할 수 있다. 이후 분원의 청화백자 생산량이 증가하는 경향이 강해지므로 해당 어화본이 임모를 통해 유포되거나, 어화본으로 제작한 청화백자 자체가 견양으로 활용되어 생산량 증가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7 『東圃集』(1761) 卷7, 謹題 御畫帖子後. 해석문은 다음의 논문에서 인용하였으며 일부 수정하였다. 이수미, 「朝鮮後期 山水文 靑畵白磁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13), pp. 19-20.

18 손계영, 「조선시대 古文書에 사용된 종이 분석」, 『한국기록관리학회지』 5(한국기록학회, 2005), 79-105; 장연이,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에 사용된 종이 연구: 문헌 기록을 중심으로」(용인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pp. 77-79.

19 『아름다운 궁중자수』(국립고궁박물관, 2013), p. 230.

20 『承政院日記』 131冊 高宗 12年(1875) 3月 25日.

21 예외적으로 청화백자용준에 대한 의궤의 도설은 현전하는 청화백자의 화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정혜 연구자는 조선시대에 의궤도(儀軌圖)는 그림에 설명이 수반되는 도식(圖式) 혹은 도설(圖說)이라는 포괄적인 명칭으로 불렀으며 형식에 따라 좁은 의미로는 반차도(班次圖), 견양도(見樣圖) 또는 도형(圖形), 건물도(建物圖) 등으로 지칭한다 하였다. 이때 견양도는 의물(儀物)의 형제, 용도, 치수, 제작과정, 소용 물목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이를 보완하는 도형이라 정의하였다. 박정혜, 「궁중회화의 세계」, 『왕과 국가의 회화』(돌베개, 2011), pp. 45-76.

22 이수미, 윤진영, 「조선 후기 초상화 초본(草本)의 유형과 그 표현기법」, 『美術史學』 24(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0), pp. 323-353; 권지은, 「조선후기 佛畵草本의 종류와 의미에 관한 연구」, 『미술문화연구』 9(동서미술문화학회, 2016), pp. 1-24; 남아름, 「朝鮮後期 靑畵白磁鳳凰紋壺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17), pp. 57-79; 이수나, 「공예의 형식 설계, 견양(見樣)」, 『陶藝硏究』 26(이화여자대학교 도예연구소, 2017), pp. 173-192; 이수나, 「대한제국 황실복식의 제작기준, 견양(見樣)」,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7(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9), pp. 7-34; 김세린, 「조선시대 금속공예 入絲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9), pp. 185-213.

23 ‘화본’과 유사한 용어로 ‘도본(圖本)’이 확인되며, 양자는 대체로 동일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내용까지는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기에, 본 연구에서는 화본에 집중하여 논의를 전개하였음을 밝힌다. 향후 이러한 부분이 보완된 후속 연구를 지속할 예정이다.

24 도자사에서 화본 혹은 견양과 관련된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다. 김윤정, 「고려청자 문양의 詩 · 畵적 요소와 도상의 독창성」, 『美術史學』 28(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4), pp. 351-375; 전승창, 앞의 논문(한국미술사학회, 2009), pp. 54-56; 오영인, 「15세기 초반 경상도 상주목 일대 화기(花器)의감조(監造) 배경과 견양(見樣)으로서의 의미」, 『문화재』 52(국립문화재연구소, 2019), pp. 112-129.

25 이수나 연구자는 견양을 평면형 도화, 실물대 모형, 축소 모형의 3종류로 분류하였으며, 본(本)은 무늬나 문양을 주로 다루는 데 반해, 견양은 입체적 모양 형태인 양(樣)으로써 보다 확장된 개념이라 정의하였다. 즉, 평면형 도화는 지견양의 범주에 속한다. 이수나, 앞의 논문(2017), p. 184; 앞의 논문(2019), p. 13.

26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朝鮮白磁窯址 發掘調査報告書』(1993), p. 11.

27 최공호, 『한국근대공예사론-산업과 예술의 기로에서-』(미술문화, 2008), p. 209.

28 『荷齋日記』 1, 辛卯年(1891) 11月 11日.

29 권혜진, 홍나영, 「국립 고궁박물관 활옷 수본에 관한 연구」, 『한국의류학회지』 32(韓國衣類學會, 2008), pp. 1255-1263; 명유석, 김영란, 「조선시대 순조, 고종 년간의 자수·금박 활옷에 대한 연구」, 『동양예술 』 32(한국동양예술학회, 2016), pp. 1-14; 이민주,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국립고궁박물관, 『궁중복식 본』(2014).

30 『承政院日記』 27冊, 仁祖 7年(1629) 7月 25日.

31 『中宗實錄』 54券, 中宗 20年(1525) 7月 22日.

32 『承政院日記』 1冊, 仁祖 3年(1625) 4月 14日.

33 『承政院日記』 32冊, 英祖 1年(1725) 3月 7日.

34 김소현, 「조선시대 상의원의 왕실복식 공급체계 연구」, 『服飾』 57(한국복식학회, 2007), pp. 11-28; 이민주, 「『尙方定例』의 편찬 과정과 특징: 왕실복식의 用節을 중심으로」, 『장서각』 27(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pp. 70-108.

35 윤국일 역, 『경국대전(經國大典)』(여강출판사, 2007); 한국법제연구원 역, 『대전회통(大典會通)』(한국법제연구원, 2000).

36 김귀한, 「조선 16세기 왕실의 관요 백자 소비 확대와 辛酉貢案」, 『야외고고학』 39(한국문화유산협회, 2020), pp. 73-92.

37 화원의 화본 제작과 이를 공예품의 제작에 활용하는 것은 현재 다수의 의궤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봉황문에 집중하기 위해 상의원과 사옹원의 교류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남아름, 앞의 논문(2017), pp. 51-56.

38 김현지, 앞의 논문(2012), pp. 36-38.

39 박정혜, 「儀軌를 통해서 본 朝鮮時代의 畵員」, 『미술사연구』 9(미술사연구회, 1995), pp. 203- 290; 홍선표, 「화원의 형성과 직무 및 역할」, 『화원』(삼성미술관 Leeum, 2011), pp. 336-356; 유재빈, 「정조대(正祖代)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의 업무와 실상」, 『미술사와 시각문화』 19(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7), pp. 66-97.

40 『南別殿重建廳儀軌』(1677), 一所, 丁巳五月二十四日. “龍牀一坐造作時 彫刻匠所用畵龍出草次 及蓮葉畵本出草次 破油芚二張”.

41 『孝純賢嬪殯宮魂宮都監儀軌』下(1752), 魂宮都監三房鑄成所儀軌, 稟目秩. “一祭器畫 本次 畫員一人定送事”.

42 『孝懿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下(1821), 孝懿王后殯殿魂殿都監三房儀軌, 甘結. “一棺衣畵黼 所入唐粉五兩 唐大楪 唐沙鉢楪匙 磨子各三 箇阿膠二兩 畵本次草注紙二張 善手畵員五人及所”.

43 최주희, 「大同法 시행 이후 중간비용의 처리양상과 科外別役의 문제」, 『대동문화연구』 92(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5), pp. 95-128.

44 조영준 역, 『시폐』(아카넷, 2013), pp. 112-115.

45 조영준 역, 위의 책(2013), pp. 266-270.

46 조영준 역, 『공폐』(아카넷, 2019), pp. 320-325.

47 조영준 역, 위의 책(2019), pp. 520-524.

48 『조선시대 마지막 官窯 廣州 分院里 白磁窯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006), p. 56.

49 『분원백자전 I: 조선후기 청화백자』(경기도자박물관, 2009), p. 293; 『숭례문 발굴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11), p. 360.

50 남아름, 앞의 논문(2017), pp. 46-50, 97.

51 『明皐全集』 明臯全集卷之二 明臯徐瀅修汝琳著, 松楸屛伏之中 忽蒙歲饌歲畫恩賜. “珍包十襲自天宮. 屛野微臣記聖聡. 名果美魚山海錯. 祥獜瑞鳳畫圖中. 歲畵四幅. 分寫四靈. 平生曷有涓埃報. 尺寸都歸造化功. 門薄雙懸仍正席, 村人欣覩歲時風.” 국문 해석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강민경 연구자의 도움을 받았다. 남아름, 앞의 논문(2017), p. 40.

52 강관식,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 下』(돌베개, 2001), pp. 140-147.

53 전승창, 앞의 논문(2002), pp. 255-278; 최경화, 앞의 논문(2018), pp. 151-186.

54 윤진영, 「조선 말기 궁중양식 장식화의 유통과 확산」, 『조선 궁궐의 그림』(돌베개, 2012), pp. 334-405.

55 김주미, 「三足烏·朱雀·鳳凰·圖像의 성립과 친연성 고찰」, 『역사민속학』 31(한국역사민속학회, 2009), pp. 275-277.

56 주작 도상의 변화 원인에 대해서는 향후 더 많은 자료의 축척을 기대하며, 해당 내용은 후속 연구에서 보완하고자 한다.

57 김현지, 앞의 논문(2012), p. 29.

58 중국 강서성 경덕진 주산(珠山) 명청어요지(明淸御窯址)에서 출토된 명대 봉황문 청화백자에도 이와 동일한 묘사가 확인된다. 『景德鎭珠山出土永樂官窯瓷器』(首都博物館, 2007), p. 91, 104, 107, 169.

59 이 외에도 봉황흉배 및 귀주머니의 수본을 참고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장품(유물번호 창덕18408, 창덕18454 등 다수)의 사례가 있다.

60 구혜인, 「조선시대 주준(酒樽)용 백자용준(白磁龍樽)의 문양과 왕실 의례와의 관계」, 『미술사학보』 48(미술사연구회, 2014), p. 11의 [표1] 참조.

61 전승창, 「朝鮮後期 白磁裝飾의 民畵要素 考察」, 『미술사연구』 16(미술사연구회, 2002), pp. 276-277; 방병선, 「조선 후기 사기장인 연구」, 『미술사학연구』 241(한국미술사학회, 2004), p. 13. 본 논문에서는 “화장”을 화원에 대응되는 존재로서 “그림을 그리는 장인”이라는 의미로 지칭하였다. 늦은 시기이긴 하지만 『荷齋日記(하재일기)』나 『朝鮮陶磁名考(조선도자명고)』(『分廚院報謄(분주원보등)』)의 기록에 “화청장(畫靑匠)”이라는 존재가 분명하게 확인되기 때문에 화장과 함께 화청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62 방병선, 위의 논문(2004), pp. 15-16; 최경화, 앞의 논문(2014) pp. 12-16; 이종민, 「朝鮮 官窯에서의 私燔 실태와 영향」, 『역사와 담론』 86(호서사학회, 2018), pp. 347-380.

63 박혜원, 「朝鮮末期 壽福字文 靑畵白磁 硏究」(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pp. 60-81.

64 구혜인, 「분원공소기(分院貢所期, 1883-1895) 왕실용 백자의 진상체계와 진상용 백자의 성격」, 『역사와 담론』 81(호서사학회, 2017), pp. 35-41.

65 『荷齋日記』 丙申年(1896) 1月 7日.

66 수본 보관지와 봉투는 국립고궁박물관의 소장품(유물번호 창덕18449, 창덕18450, 창덕18423, 창덕18456-13, 창덕18457-3)을 참고할 수 있다.

Fig. 1.
『세종실록』 오례의 봉황문 관련 예기 도설, Illustrated Explanations of Ritual Object with phoenix design by Five Rites of King Sejong’s Annals, 15th c. CE, Joseon Dynasty,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from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www.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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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숙종어필 “가애죽림(可愛竹林)” 현판>, Signboard with inscription of “Ga Ae Juk Rim” of King Sukjong’s Handwriting, 1692 CE, Colors on wood, H. 56cm, W. 164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hangdeok20316),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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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숙종어필 초서칠언절구 현판>, Signboard of heptasyllabic quatrain written in cursive script of King Sukjong’s Handwriting, 1694 CE, Colors on wood, H. 80.4cm, W. 108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hangdeok20638),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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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영조 죽책함(英祖 竹冊函)>, Case for King Yeongjo’s formal appointment letter made of bamboo, 1721 CE, Lacquer wear with gold, H. 27.4cm, W. 41cm, D. 26.8,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ochaek262),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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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장조비 옥책함(莊祖妃 玉冊函)>, Case for Queen Heongyeong’s formal appointment letter made of jade, 1795 CE, Lacquer wear with gold, H. 34.5cm, W. 33.5cm, D. 24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ochaek171),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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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화금흑칠내함>, 『민회빈복위선시도감의궤(愍懷嬪復位宣諡都監儀軌)』, Lacquer case with gold, Record of ceremonies (Uigwe) for Crown princess Minhoe’s reinstate, 1718 CE, Joseon Dynasty, Colors on paper, National Museum of Korea, Seoul, from Oegyujanggak Uigwe (www.museum.go.kr/uig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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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쌍호흉배 채색수본>, Colored Il-lustrated Manual for Design of Rank Badge with Tigers, 19th c. CE, Joseon Dynasty, Colors on oiled paper, H. 24.7cm, W. 23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hangdeok18422),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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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見樣”명 백자편>, White Porcelain Fragment of Dish with inscription of “Gyeon Yang(Sample)”, late 15th~early 16th c. CE, Joseon Dynasty, Excavated at Usanri kiln site, Gwangju, Gyeonggi provine,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Seoul, from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Report of Excavation Research at Usan-ri no. 9 White Porcelain Kiln Site, p.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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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덕온공주 홍장삼 수본> 앞길본 일부, Part of illustrated manual for design of Princess Deogon’s wedding red robe for Queen, 1837 CE, Joseon Dynasty, Ink on oiled paper, H. 35.4cm, W. 67.3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hangdeok9903),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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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백자청화산수화조문호>, White porcelain baluster jar with landscape and bird with flower design painted in underglaze cobalt-blue, 18th c. CE, Joseon Dynasty, H. 54.8cm, Yongin University Museum, Gyeonggi province, National Treasuer No. 263, from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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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주작도>, 『선의왕후의릉산릉도감 의궤(宣懿王后懿陵山陵都監儀軌)』, Red bird, Record of ceremonies (Uigwe) for Queen Seonui’s royal tomb construction, 1730 CE, Joseon Dynasty, Colors on paper, National Museum of Korea, Seoul, from Oegyujanggak Uigwe (www.museum.go.kr/uig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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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주작도>,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 의궤(仁元王后明陵山陵都監儀軌)』, Red bird, Record of ceremonies (Uigwe) for Queen Inwon’s royal tomb construction, 1757 CE, Joseon Dynasty, Colors on paper, National Museum of Korea, Seoul, from Oegyujanggak Uigwe (www.museum.go.kr/uig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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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봉황문의 고식적 양식, Definition of classical style by comparing feather expressions in the phoenix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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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9등적의본> 겉길본 일부, Part of illustrated manual for design of ceremonial robe of nine-tier for Crown Princess, 19th c. CE, Korean Empire, Colors on paper, H. 147cm, W. 108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hangdeok18425),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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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백자청화운봉문호>, White porcelain baluster jar with cloud and phoenix design in underglaze cobaltblue, 18th c. CE, Joseon Dynasty, H. 28.9cm, National Museum of Korea (dongwon500), Seoul, Author took a picture in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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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백자청화운룡봉문합>, White porcelain Bowl with Lid with cloud and dragon and phoenix design in underglaze cobalt-blue, 19th c. CE, Joseon Dynasty, H. 12.9cm, National Museum of Korea (bongwan500), Seoul, from emuseum (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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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홍장삼 수본> 일부, Part of illustrated manual for design of wedding red robe for Queen, 19th c. CE, Joseon Dynasty, Ink on oiled paper, H. 36.2cm, W. 53.1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hangdeok9906),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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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백자청화척촉문병>, White porcelain bottle with azalea design painted in underglaze cobalt-blue, 19th c. CE, Joseon Dynasty, H. 34.2cm, National Museum of Korea (duksu1455), Seoul, from emuseum(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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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봉황문인문보>, Wrapping cloth with phoenix design, 19th c. CE, Joseon Dynasty, colors on hemp, H. 73.5cm, W. 70.7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hangdeok7979), Seoul, fro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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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Illustrated manual for design of Wedding red robe for Queen in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Accession number Illustrated manual for design Pattern Inscription
Changdeok 9903 Front Rock, Ornamental rock, Wave, Peony, Phoenix ·
Sleeve Center: Plum blossom, Peony, Peach, Magic fungus, Buddha’s hand, Pomegranate, Lotus, Magnolia Border: Auspicious emblems (Double-lozenge, Horn, Handscroll, Fan, Double-gourd, Plantain shaped fan, Canopy, Umbrella) ‘장삼슈초 뎌동궁’
Changdeok 9904 In Rock, Coin, Wave, Peony, Chick of phoenix, Phoenix ·
Out ·
Back Peach, Peony, Magic fungus, Flaming jewel, Phoenix ·
Changdeok 9905 Sleeve Rock, Coin, Wave, Peach, Peony, Lotus, Bird ·
Back Rock, Coin, Wave, Magic fungus, Lotus, Bird ·
Changdeok 9906 Sleeve Plum blossom, Pomegranate, Lotus, Peach, Magnolia, Buddha's hand, Magic fungus, Magnolia ‘‘사매당좌’, ‘사매당우’
Sleeve Magnolia, Pomegranate, Plum blossom, Buddha's hand, Peach, Azalea, Chrysanthemum ‘사매아래당좌’ ‘사매아래당우’
Unknown Pomegranate, Lotus, Peach, Peony ·

REFERENCES

『經國大典』.

『貢弊』.

『南別殿重建廳儀軌』.

『大典會通』.

『東圃集』.

『分院磁器貢所節目』.

『備邊司謄錄』.

『續東文選』.

『肅宗仁顯王后明陵改修都監儀軌』.

『承政院日記』.

『市弊』.

『新增東國輿地勝覽』.

『與地圖書』.

『朝鮮王朝實錄』.

『荷齋日記』.

『孝純賢嬪殯宮魂宮都監儀軌』.

『孝懿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강경숙, 『한국도자사』, 일지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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