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20;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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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十王經』(P.2003) [杜斗城, 『敦煌本《佛說十王經》校錄硏究』 (蘭州: 甘肅敎育出版社, 1989), pp. 3-22]. 잘 알려져 있듯이 현재 전하는 『시왕경』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1900년(혹은 1901년) 敦煌 莫高窟 17굴에서 발견된 50여 점의 필 사본 두루마리 문서이다. 이들 문서에서 이 경전은 여러 명칭을 가지지만 이 글에서는 『시왕경』으로 통칭한다. 『시왕경』 관련 주요 연구로 다음을 참조. 杜斗城, 앞의 책; Stephen Teiser, Scripture on the Ten Kings and the Making of Purgatory in Medieval Chinese Buddhism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4); 蕭登福, 『佛道十王地獄說』 (臺北: 新文豐出版公司, 1996). 여기서 蕭登福은 『十王經』이 7세기에 등장했다고 하지만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2) 필자는 『시왕경』의 유통 시기와 관련하여 『시왕경』에서 강조하는 예수재와 망인재(亡人齋)가 9세기 말 불교도 사이에서 시행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에 주목한다. 근래에 四川省 南充市 營山縣 太蓬山에서 발견된 「大蓬秀立山普濟寺衆修十王生七齋記」는 文德 원년 12월(889) 여성 불교도 24명(혹은 그 이상)이 참여했던 시왕생칠재(예수재)에 대한 기록으로서 현재 透明岩이라고 불리는 암벽에 새겨졌다. 王雪梅, 「四川營山《大蓬秀立山普濟寺衆修十王生七齋記》校錄整理」, 『西華師範大學學報』 哲學社會科學版 2014.6 (2014), pp. 6-10. 이를 통해 예수재의 공덕을 언급한 『시왕경』이 당시 불교도 사이에 유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敦煌 발견 필사본 『시왕경』 중 (소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에 한정하여) 가장 이른 기년을 가진 것은 BD1226이며 그 연대는 서력 기원 908년에 해당한다. Teiser, 앞의 책, p. 240.
3) 『十王經』 등장 이전의 불교미술 및 문헌 자료에서의 시왕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Teiser, 앞의 책, pp. 19-84; 張總「初唐閰羅圖像與刻經: 以《齊士員獻陵造像碑》拓本爲中心」, 『唐硏究』 6 (2000), pp. 1-17; 張總 「十王地藏信仰圖像源流演變」, 『信仰、實踐與文化調適』 上冊, 第四屆國際漢學會議論文集, 康豹, 劉淑芬 主編 (臺北: 中央硏究院, 2013), pp. 193-202.
4) 근래의 조사,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현재 전하는 이 도상형식의 가장 이른 사례는 四川 資中 西巖 羅漢洞 41호감(893)과 敦煌 莫高窟 8굴 남벽 문 상단 벽화(890년대)이다. 劉易斯, 「四川資中西巖羅漢洞浮雕造像調査與分析」, 『大足學刊』 4 (2020), pp. 145-146; 王惠民, “敦煌所見早期披帽地藏圖像新資料,” in Tenth-century China and Beyond: Art and Visual Culture in a Multi-centered Age, ed. Wu Hung (Chicago: The Center for the Art of East Asia, University of Chicago, 2012), pp. 274-276.
5) 敦煌 莫高窟에서 발견된 지장시왕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Arthur Waley, A Catalogue of Paintings Recovered from Tun-huang by Sir Aurel Stein, K.C.I.E. (London: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and of the Government of India, 1931), pp. 113-114, 239-240, 277-278, 312-313; 河原由雄, 「敦煌畵地藏圖資料」, 『佛敎藝術』 97 (1974), pp. 99-123; 松本榮 一, 『燉煌畵の硏究』 圖像篇, 復刻版 (京都: 同朋舍, 1975), pp. 374-389; Nicole Vandier-Nicolas, Bannières et peintures de Touen-houang conservées au Musée Guimet, vol. 2 (Paris: Editions de la Centre National pour Recherche Scientifique, 1974), pp. 237-257; Roderick Whitfield, The Art of Central Asia: The Stein Collection in the British Museum, vol. 2 (Tokyo: Kodansha Ltd. in co-operation with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1983), pp. 318-319; ジャック・ジエス 編集, 『西域美術: ギメ美術館ペリオ・コレクション』 2 (東京: 講談社, 1995), pp. 317-325; Lokesh Chandra and Nirmala Sharma, Buddhist Paintings of Tun-Huang in the National Museum New Delhi (New Delhi: Niyogi Books, 2012), pp. 178-182. 근래에 敦煌에서 새로 발견된 관련 자료에 대해서는 張小剛, 郭俊葉, 「敦煌“地藏十王”經像拾遺」, 『敦煌吐魯番硏究』 15 (2015), pp. 95-109, 敦煌의 지장시왕도 및 관련 문헌의 개관으로 羅慶華, 「敦煌地藏圖像和“地藏十王廳”硏究」, 『敦煌硏究』 1993. 2 (1993), pp. 5-14; 羅世平, 「地藏十王圖像的遺存及其信仰」, 『唐硏究』 4 (1998), pp. 373-414를 참조.
6) 四川 지역 불교 석굴, 석각 등의 연구사를 개관한 張媛媛, 「四川地區佛敎摩崖造像發現與硏究」, 『石窟寺硏究』 5 (2014), pp. 196-218에서는 1980년대 초 이전을 연구의 ‘개시기’, 1980년대 초부터 20세기 말까지를 ‘발전기’, 21세기 초부터 논고 작성 당시까지를 ‘번영기’로 구분하였다. 2010년대의 연구를 개관한 李飛, 「川渝地區石窟及摩崖造像調査硏究綜述(2011-2020)」, 『四川文物』 (2021), pp. 83-103를 함께 참조. 四川 지역 지장시왕상의 개관으로 江滔, 張雪芬, 「9-13世紀四川地藏十王造像硏究」, 『成都考古硏究』 3 (2016), pp. 331-346을 참조. 총 19기의 지장시왕감을 검토한 江滔, 張雪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四川 지역 지장시왕상의 특징을 제시하였다. 첫째, 감실의 형태는 가로가 긴 장방형이 다수이며 이른 시기에는 감실이 상하 두 단으로 구분되지만 점차 단층형으로 바뀐다. 둘째, 시왕의 심판을 강조하던 부조 장면이 지옥의 형벌이 두드러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셋째, 지장시왕상은 仁壽-資中 일대, 安岳-內江-大足 일대, 大足 일대의 세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나열된 지역의 순서는 조성연대의 순서를 반영한다(p. 340). 여기서 江滔, 張雪芬의 분석을 상세히 검토하지는 않겠지만,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四川 지역의 지장시왕상에 지옥의 형벌 장면이 두드러진다는 언급에 대해서는 상세한 재검토가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이하 이 글의 논의를 참조. 한편 근래에 간행된 지장보살 관련 논저에서 四川 지역의 지장시왕상이 빈번히 언급된다는 점도 주목된다. 張總, 『地藏信仰硏究』 (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3); Zhiru, The Making of a Savior Bodhisattva: Dizang in Medieval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尹富, 『中國地藏 信仰硏究』 (成都: 四川出版集團巴蜀書社, 2009).
7) 劉長久, 胡文和의 논고 이래로 여러 연구에서 73호감을 “지옥변상” 혹은 “지옥변”으로 지칭하였다. 劉長久, 胡文和, 「四川石刻造像藝術概述」, 『社會科學硏究』 1985.6 (1985), p. 71; 胡文和, 「論地獄變相圖」, 『四川文物』 1988.5 (1988), pp. 20-22; 傅成全, 唐承義, 「四川安岳石刻普査簡報」, 『敦煌硏究』 1993.1 (1993), pp. 38-39; 劉長久 主編, 『安岳石窟藝術』 (成都: 四川人民出版社, 1997), pp. 9, 71; 胡文和, 「四川石窟中‘地獄變相’圖的硏究」, 『藝術學』 19 (1998), pp. 44-47; 中國石窟雕塑全集編輯委員會 編, 『中國石窟雕塑全集』 8: 四川, 重慶, 重慶: 重慶出版社 (1999), p. 105; 胡文和, 『安岳大足佛雕』, 佛敎美術全集 9 (北京: 文物出版社, 2009), p. 184. 다음 논저에서는 “지옥변상”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73호감(및 64호감)에 지옥 장면이 묘사되었다고 서술하였다. 張總, 앞의 책, 2003, pp. 195-196; Zhiru, 앞의 책, pp. 152, 154; 成都文物考古硏究所 等, 「四川安岳縣圓覺洞摩崖石刻造像調査報告」, 『南方民族考古』 9 (2013), pp. 416, 419, 424; 王劍平 等, 「四川安岳圓覺洞造像的初步硏究」, 『成都考古硏究』 2 (2013), pp. 340, 344; 胡文和, 胡文成, 『巴蜀佛敎雕刻藝術史』 下 (成都: 巴蜀書社, 2015), p. 79; 于春, 王婷, 앞의 책, pp. 176, 208. 이와 다른 의견도 있다. 陳明光은 망자의 심판과 징벌을 구별해야 하며 따라서 73호감은 지옥변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더 이상의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았다. 陳明光, 「石窟遺存《地藏與十佛、十王、 地獄變》造像的調査與硏究」, 『大足石刻考察與硏究』, 北京: 中國三峽出版社, 2002, pp. 257-260.
8) 胡文和, 앞의 논문, 1988, pp. 20-22에서 이러한 견해가 처음 제기되었다(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 이후 胡文和의 몇몇 논저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반복된다. 胡文和, 앞의 논문, 1998, pp. 44-47; 胡文和, 앞의 책, 2009, p. 184. 劉長久 主編, 앞의 책, pp. 9, 71-72에서는 (아마도 胡文和, 앞의 논문, 1988에 동의하여) 73호감에 목련과 그의 어머니가 표현되었다고 하였다. Zhiru, 앞의 책, 2007, 154-156에서는 劉長久 主編, 앞의 책, p. 71를 인용하며 73호감(“84호”)에 목련이 묘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반면 주 8에서 언급한 陳明光의 논고는 이러한 견해에 부정적이다.
9) 무성(武成) 3년(910)의 기년이 있는 66호감(69호)의 명문에서 볼 수 있듯이 73호감이 조성되었던 10세기 전반 무렵이 산은 ‘靈居山’으로 불렸던 듯하다. 于春, 王婷 앞의 책, p. 183. 圓覺洞과 관련한 다른 문헌 기록은 王劍平 等, 앞의 논문, pp. 354-355의 주 1을 참조.
10) ‘圓覺洞’이라는 이름은 경력(慶歷) 4년(1044) 혹은 경원(慶元) 4년(1198)에 작성되었으며 현재 8호감(15호)으로 불리는 석각 비문 「普州眞相寺新建圓覺洞記」에서 확인된다. 胡文和, 『四川道敎佛敎・石窟藝術』 (成都: 四川人民出版社, 1994), p. 75; 于春, 王婷, 앞의 책, pp. 24-25.
12) 于春, 王婷, 앞의 책, pp. 193-194, 199, 207. 감실 간의 중복관계가 파악되기 이전에는 73호감의 조성연대가 후촉대보다 늦지 않을 것이라는, 구체적으로는 941년에 조성된 71호감(82호)과 같은 시대일 것이라는 의견이 제기된 바 있다. 胡文和, 앞의 논문, 1988, p. 20. 이후 중국의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 연대에 동의했던 듯하다. 한편 헨릭 쇠렌센은 조형양식으로 보아 73호감(84호)의 연대가 10세기 전반일 것으로 추정했다. Henrik H. Sørensen, The Buddhist Sculptures at Yuanjuedong in Anyue: The History and Art of a Buddhist Sanctuary in Central Sichuan Province (Copenhagen: Seminar for Buddhist Studies, 1999), pp. 57-58.
14) 『佛說盂蘭盆經』 [T685 16: 779a-c]; 「目連緣起」(P2193) [黃征, 張湧泉 校注, 『돈황변문교주』 6, 전6권, 전홍철, 정병윤, 정광훈 옮김, 서울: 소명출판, 2015, pp. 11-42]; 「大目乾連冥間救母變文」(S2614) [黃征, 張湧泉, 앞의 책, pp. 43-140]. S2614는 말미의 간기(刊記)에서 이 문서의 필사가 정명(貞明) 7년(921)에 완료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大目乾連冥間救母變文」(S2614) [黃征, 張湧泉, 앞의 책, p. 140].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목련이야기의 기원과 발달에 대한 간략한 개관으로 Victor Mair, “Notes on the Maudgalyāyana Legend in East Asia,” Monumenta Serica 37 (1986- 87), pp. 83-93을 참조. 한편 胡文和는 『佛說盂蘭盆經』에서 말하길 청제부인이 죽은 후 아귀지옥(餓鬼地獄)에 떨어졌다고 했는데, 이는 아귀도(餓鬼道)에서 환생하였다는 구절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佛說盂蘭盆經』 [T685 16:779b].
15) 胡文和 앞의 논문, 1988, pp. 20-21. 「目連緣起」(P2193) [黃征, 張湧泉, 앞의 책, pp. 19, 21]를 함께 참조. 이에 대해 張總은 혹자는 73호감의 주존을 목련으로 보는데 목련이 왜 시왕명부(十王冥府)를 주재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張總, 앞의 책, 2003, p. 196의 주 1.
16) 업경은 당대에 들어 사후세계의 망자가 생전에 행했던 일을 비추는 거울로서 널리 알려졌고, 당대 말에는 시왕신앙으로 편입되어 염라왕(閻羅王)에게 전속(專屬)된 사후 심판의 도구로 인식되었다. 姜守誠, 「‘業鏡’小考」, 『成大歷史學報』 37 (2009), pp. 23-26. 『시왕경』에서 업경은 다음의 두 찬문 중 언급된다. “재일을 지키지 않고 계를 범하며 닭과 돼지를 살육하면, 업경에 [그 일이] 비추어지니 업보란 허황되지 않다. 이 경과 함께 그림과 상을 만든다면 염[라]왕은 [망자를] 풀어주고 죄를 없애기로 판결할 것이다.” 『十王經』(P2003) [杜斗城, 앞의 책, p. 5]. 번역은 필자. 이하 출처를 밝히지 않은 번역문은 모두 필자가 옮긴 것이다. “다섯 번째 7일, 염라왕은 송사하는 소리를 멈추게 한다. 죄인의 마음은 원통하여 달갑지 않다. 머리채 잡혀 고개를 들고 업경을 바라보니, 비로소 생전의 일을 분명히 알게 된다.” 『十王經』(P2003) [杜斗城, 앞의 책, p. 11].
18) “‘나는 네 어미고 너는 내 아들이다. 모자의 정은 그 무겁기가 산과 같거늘 내가 한 말은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험담을 사실로 여기는구나. 네가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니 나는 이레 안으로 목숨이 다하여 아비지옥에 떨어지도록 [나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다.’ …… 모친은 주문을 외웠고 명계(冥界)에서는 이 사실을 진즉에 알게 됨에, 이레가 채 못되어 모친은 죽어서 아비지옥에 떨어져 간단없는 고통을 받게 되었다.” 「目連緣起」(P2193) [黃征, 張湧泉, 앞의 책, p. 14. 판독문(p. 13)과 비교하여 번역문을 일부 수정]. 敦煌 발견 필사본 문서 중에는 胡文和가 인용한 이상의 「목련연기」, 「대목건련명간구모변문」 이외에 본래 표제는 없지만 현재 ”목련변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텍스트가 하나 더 있다(BD 8444 [成 096]). 여기에서도 청제부인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졌다고만 할 뿐 사후 심판에 대한 내용은 없다. 「目連變文」(BD 8444) [黃征, 張湧泉, 앞의 책, pp. 142-143].
21) P2003, P2870, S3961, 일본 久保惣記念美術館 소장본, P4523/SP80(Ch.cii.001)을 말한다. 그 중 P4523/SP80은 삽도만이 있는 두루마리이다. 禿氏祐祥, 小川貫弌, 앞의 논문; Stephen Teiser, “Picturing Purgatory,” in Images de Dunhuang: Dessins et peintures sur papier des fonds Pelliot et Stein, ed. Jean Pierre Drège (Paris: Ecole francaise d’ExtrêmeOrient, 1999), pp. 169-197을 참조.
23) 헨릭 쇠렌센도 73호감에 대한 간략한 서술 중 업경이 실제로는 염라왕에 속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아울러 그는 73호감에 축약된 사후세계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로 지장, 시왕, 업경에 비친 죄인을 꼽았다. Henrik Sørensen, “The Meeting of Daoist and Buddhist Spatial Imagination: The Construction of the Netherworld in Medieval China,” in Locating Religions: Contact, Diversity, and Translocality, eds. Reinhold F. Glei and Nikolas Jaspert (Leiden; Boston: Brill, 2017), p. 272. 그러나 그가 꼽은 구성 요소가 사후세계의 그것이 될 수는 있어도 73호감의 부조 장면을 적절히 대변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하 필자의 논의와 비교.
24) 주 9를 참조. 胡文和는 73호감 하단이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보고 가운데 업경을 중심으로 한 장면을 청제부인과 연관 지었다. 따라서 그의 의견을 따르는 연구들은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73호감 하단이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에서도 그러한 구분법을 볼 수 있다. 張總 앞의 책, 2003, p. 195; 成都文物考古硏究所 等, 앞의 논문, pp. 424-426; 王劍平 等, 앞의 논문, p. 344; 于春, 王婷, 앞의 책, pp. 205-206.
25) 이외에 73호감의 주존이 지장이 아니라 목련으로, 지장 대좌 아래에 있는 동물을 개로 보았던 胡文和의 의견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지장의 대좌 양 옆에는 승려(우)와 웅크려 앉은 동물(좌)이 있다. 胡文和가 개로 보았던 이 동물은 실제로는 사자일 것이다. 지장, 승려, 사자의 조합은 대력(大曆) 13년(778) 도명화상(道明和尙)이 죽어서 염라왕을 만난 후 이승으로 돌아오기 직전 지장과 사자(獅子)를 만났다는 이야기인 「還魂記」(S3092)의 내용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陳明光도 이점을 거론하며 73호감을 목련이야기와 연관 짓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陳明光, 앞의 논문, pp. 257-260. 이 조합은 四川 지역의 지장시왕상에서는 드물지만 비슷한 시기 敦煌의 지장시왕도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敦煌 발견 지장시왕도 13점 중 9점에서 이 조합이 확인된다. 다음을 참조. 河原由雄, 앞의 논문, pp. 115-123; Teiser, 앞의 책, 1994, pp. 230-232. 명문을 가진 대표적인 예인 MG 17662(太平興國 8, 983)에는 승려와 사자 옆의 방제에 각각 “南无道明和尙”, ”南无金毛師(獅)子”(원 괄호 내의 글자는 통용자이다. 필자의 추가)라는 묵서가 있다. Vandier-Nicolas, 앞의 책, vol 1, p. 243. 이와 더불어 왜 목련이 시왕을 주재하는지 설명되지 않았다는 張總의 언급(주 15)과 함께 불교미술 속 목련이 두건을 쓴 모습으로 묘사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목련이야기 관련 미술자료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樊金詩, 梅林, 「楡林 窟第19窟目連變相考釋」, 『段文傑敦煌硏究五十年紀念文集』, 敦煌硏究院 編 (北京: 世界圖書出版公司, 1996), pp. 46-55(내용은 축약되었지만 도판이 추가된 Fan Jinshi and Mei Lin. “An Interpretation of the Maudgalyayana Murals in Cave 19 at Yulin,” Orientations 27.10 [1996], pp. 70-75도 함께 참조); Rostislav Berezkin, “Illustrations of the Mulian Story and the Tradition of Narrative Painting in China (Tenth-Fifteenth Centuries),” Religion and the Arts 20.1-2 (2016), pp. 5-28.
26) 이 여섯 명 중 오도전륜왕의 책상 바로 아래에 있는 좌측의 세 명은 우측의 세 명보다 체구가 휠씬 작다. 염라왕의 심판장에서도 망자는 옥졸에 비해 상당히 작은 체구이다. 이로 보아 좌측의 세 명은 망자일 듯하다. 반면 우측의 세 명은 시왕의 권속이거나 아니면 망자의 살아있는 가족, 즉 공양자일 수도 있다. 삽도본 『시왕경』에서도 시왕의 심판장에 불상, 경전 등을 들고 서 있는 인물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들은 정제된 복식을 하고 있어 망자로 보기 어렵다. 망자는 대개 헐벗었거나 칼 등의 형구를 차고 있기 때문이다. 禿氏祐祥, 小川貫弌는 공양물을 든 인물을 망자의 유족인 공양자로 본다. 禿氏祐祥, 小川貫弌, 앞의 논문, pp. 280, 282-285.
29) 禿氏祐祥, 小川貫弌는 이 삽도의 망자가 사후 추선의 공양도 효과 없는 중죄를 저지른 자이며 그럼에도 지장의 대자비심으로 구제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S3961의 마지막 삽도에 등장하는 승려는 지장으로, P2003과 久保惣記念美術館 소장본의 마지막 삽도에 등장하는 승려를 지장의 응화신(應化身)인 도명으로 보았다. 禿氏祐祥, 小川貫弌, 앞의 논문, pp. 285-286. 그러나 미쉘 수와미는 S3961, P2870, 구보소기념미술관 소장본의 마지막 삽도가 『시왕경』 삽도의 명문인 것으로 보이는 P3304v 중의 “대목건련, 여기 철상지옥에서 옥졸을 교화하여 어머니를 구할 때”(大目乾連, 於此鐵床地獄, 勸化獄卒救母時. 표점은 수와미)”라는 구절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실제로 S3961의 마지막 삽도는 지옥성 문 앞에서 승려가 목에 칼을 찬 여성에서 수저로 밥을 떠서 먹이는 광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P2870과 久保惣記念美術館 소장본의 마지막 삽도에 등장하는 승려와 망자도 목련과 그의 어머니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두 삽도 모두에서 상의를 벗은 망자는 남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Michel Soymié, “Un recueil d'inscriptions sur peintures: Le manuscrit P. 3304 verso,” in Nouvelles contributions aux etudes de Touen-houang, ed. Michel Soymie (Geneve: Librairie Droz, 1981), pp. 170-171, 177-178.
31) 같은 安岳縣에 있는 聖泉寺 지장시왕감은 전체 규모나 구도 등 여러 면에서 圓覺洞 73호감과 상당히 유사하며 세부 장면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聖泉寺 지장시왕감의 하단에도 문이 등장한다. 張總, 廖順勇은 삽도본 『시왕경』과의 비교를 통해 이 문을 지옥의 문으로 보았다. 張總, 廖順勇, 「四川安岳聖泉寺地藏十王龕像」, 『敦煌學輯刊』 2007.2, 2007, pp. 43-44. 이는 73호감 하단의 문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는 데에 있어 좋은 참조가 된다. 더욱이 여기에서는 망자가 반쯤 열린 문 앞에 자리하고 있어 그가 확실히 문밖으로 나오는 중이라는 인상을 준다. 한편 聖泉寺 지장시왕감의 지옥문 왼쪽에는 승려로 보이는 인물과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張總, 廖順勇은 이를 목련이 어머니에게 밥을 먹이는 장면이라고 하였다. 앞의 논문, pp. 46-49. 필자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 29에서 언급한 P3304v, S3961도 떠오른다.
35) 염라왕의 좌측에는 세 명의 판관이 의자에 앉아 있고 오도전륜왕의 우측에도 마찬가지로 세 명의 판관이 있었을 것이지만 72호감으로 인한 파손으로 현재는 두 명의 판관만을 볼 수 있다. 이들 주변에는 “曹判官”, “生▒判官”(이상 염라왕 구역), “▒判官”, “趙判官”(이상 오도전륜왕 구역)이라는 명문이 있다. 于春, 王婷, 앞의 책, p. 207. 선악동자(善惡童子), 판관 등 시왕의 권속과 관련된 문헌자료의 연구로 다음을 참조. Michel Soymiè, “Notes d’iconographie chinoise: Les acolytes de Ti-tsang (I),” Arts Asiatiques 14 (1966), pp. 45-78; “Notes d’iconographie chinoise: Les acolytes de Ti-tsang (II),” Arts Asiatiques 16 (1967), pp. 141-170.
39)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지만 73호감의 염라왕 구역에 등장하는 동물과 관련하여 필자는 닭, 뱀, 돼지가 등장하는 P4523/SP80의 염라왕 삽도를 눈여겨본다(Fig. 8). 이 동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논의된 바 없다. 생사륜도(生死輪圖)의 중앙에 삼독(三毒), 즉 탐진치(貪嗔癡)를 상징하는 동물로서 비둘기(혹은 닭), 뱀, 돼지가 등장하는 것이 떠오르지만 아직은 섣부르게 이들을 연관 짓고 싶지는 않다. 다음을 참조.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 卷 34, 「展轉食學處」 [T1442 23:811b]; Stephen Teiser, Reinventing the Wheel: Paintings of Rebirth in Medieval Buddhist Temples (Seattle and London: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6), pp. 11 ff. 이외에 사후심판을 주관하는 시왕이라는 관념이 정립되기 이전인 당 정관(貞觀) 13년(639)의 기년을 가진 제사원헌릉조상비(齊士員獻陵造像碑)와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별개의 비석받침에는 염라왕의 심판 광경이 선각되어 있다. 여기에는 닭, 뱀, 돼지 이외에도 다수의 동물이 등장한다. 張總, 「初唐閰羅圖像與刻經: 以《齊士員獻陵造像碑》拓本爲中心」, 『唐硏究』 6 (2000), pp. 2-3, 6-8.
40) 남북조시대(南北朝, 386-589)부터 지옥도가 유행했다는 것을 문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이에 비해 현재 전하는 지옥도는 매우 적고 단편적이다. 송대 이전으로 한정한다면 그 중 상당수가 敦煌 일대의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지옥 장면일 것이다. 敦煌의 지옥도에 대해서는 일부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다음을 참조. 殷光明, 「敦煌石窟中的地獄圖像與冥報思想」, 『敦煌壁畵藝術與疑僞經』, 北京: 民族出版社, 2006, pp. 260-349; Costantino Moretti, “Scenes of Hell and Damnation in Dunhuang Murals,” Arts Asiatiques 74 (2019), pp. 5-30. 아울러 문헌 기록에서 보이는 중세 중국 지옥도의 사회적, 종교적 역할을 분석한 Stephen Teiser, “‘Having Once Died and Returned to Life’: Representations of Hell in Medieval China,”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48.2 (1988), pp. 433-464를 함께 참조.
41) 73호감을 지옥으로 보았던 기존의 연구(주 7을 참조) 중에서는 다음의 두 논고에서 “지옥시왕”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해당 부분의 내용은 양자가 거의 동일하다). 成都文物考古硏究所 等, 앞의 논문, p. 344; 王劍平 等, 앞의 논문, p. 424.
42) 수많은 관련 연구를 여기에 모두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敦煌 지역에서 발견된 필사본 『시왕경』의 교감과 관련 사안들에 대한 논의를 통해 『시왕경』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던 杜斗城도 시왕을 “지옥시왕”으로 지칭했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그러나 그는 敦煌 발견 삽도본 『시왕경』 중의 심판 장면은 말 그대로 심판 장면일 뿐 일각에서의 인식과 달리 지옥변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杜斗城, 앞의 책, p. 152. 이러한 그의 비판적 접근이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듯하다. 한편 이 글의 참고문헌에 제시된 논고 중 시왕을 지옥의 왕으로 지칭하거나 불교미술에 등장하는 시왕의 심판 장면을 지옥의 묘사로 본 것으로는 주 8에서 언급한 논저 이외에 다음이 있다. Waley, 앞의 책; Vandier-Nicolas, 앞의 책; Whitfield, 앞의 책; 金岡照光, 「敦煌における地獄文獻」, 『講座敦煌』 7: 敦煌と中國佛敎, 牧田諦亮, 福井文雅 編 (東京: 大東出版社, 1984); Teiser, 앞의 논문, 1988; 羅慶華, 앞의 논문; 蕭登福, 앞의 책; 羅世平, 앞의 논문; 殷光明, 앞의 논문; 姜守誠, 앞의 논문; Chandra and Sharma, 앞의 책; 張媛媛, 앞의 논문; 王娟 앞의 논문.
43) 천(天), 인(人),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이 육도를 이루지만 지장시왕도를 비롯하여 敦煌의 불교미술에서 확인되는 육도는 이러한 전형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닐 슈미드는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敦煌의 육도가 이전 시대의 불교문헌에서 말하는 아수라가 포함되지 않은 오도(五道) 관념과 불교의 환생 개념을 도입한 도교적 요소가 어우러진 특수한 지역적 세계관인 것으로 설명한다. David Neil Schimid, “Revisioning the Buddhist Cosmos: Shifting Paths of Rebirth in Medieval Chinese Buddhism,” Cahiers d’Extreême-Asie 17 (2008), pp. 293-325.
44) 敦煌 발견 필사본 『시왕경』은 지옥과 관련된 경전(“지옥경전”, “지옥문헌” 등)으로 분류되곤 한다. 吉岡義豐, 「スタイン敦煌文書中の密敎關係經典目錄」, 『道敎と佛敎』 1 (東京: 日本學術振興會, 1959), pp. 465-466; 金岡照光, 앞의 논문, pp. 574-578; 道端良秀, 「敦煌文獻に見える死後の世界」, 『講座敦煌』 7: 敦煌と中國佛敎, 牧田諦亮, 福井文雅 編 (東京: 大東出版社, 1984) pp. 505, 508-509, 517-522. 그러나 의아하게도 『시왕경』은 지옥에 떨어지면 고통을 받는다는 정도 이외에 지옥에 대한 별다른 내용을 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