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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근대기 일본인의 조선백자 수집과 연구: 1920년대 후반을 중심으로

Abstract

근대적인 한국도자사 연구는 고려청자의 발견과 함께 시작되어 최초로 서양인들이 컬렉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야마요시 모리요시(山吉盛義, 1859~미상)나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郎, 1866~1942)가 한국도자사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면서 조선왕조를 처음으로 한국도자사 속에 평가하였고, 그 후에는 수집과 연구 모두 일본인이 주도하게 된다. 1920년대 들어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1884~194),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에 의해 조선백자 수집, 평가와 연구 등 선구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수집, 연구, 그리고 도자기에 대한 일반인들의 흥미라는 세 가지 점이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한국도자에 대한 인식이 심화되어 온 것이다.浅川형제와 柳宗悦의 선구적 활동은 당장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1925년 고려다완인 고쇼마루(御所丸)의 고가 낙찰에서 1926년 계룡산 소동으로 일반인들의 흥미를 끄는 상징적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조선 고미술, 고도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모았고, 그것이 1930년대 조선백지를 포함하는 조선공예붐으로 이어졌다고 보인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면 조선시대 공예품이 대거 일본으로 보내지게 된다.나아가 1930년대부터 40년대 전반에 걸쳐 ‘취미 교양’을 추구하는 사회적 계층이 출현하면서 한국인 수집가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근대에 한국도자 수집과 연구면에서 일본인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역할은 1930년대부터 이행 조짐이 시작되고 있었다.

Abstract

The study of Korean ceramics in the modern period was initiated by the discovery of Koryŏ celadon. The first collectors were mainly Europeans and Americans but it was not long before Japanese scholars, namely Yamayoshi Moriyoshi(1859-?) and Yagi Shozaburo(1866-1942), attempted to establish the history of Korean ceramics, introducing Chosŏn dynasty into the history for the first time. Thereafter, Japanese scholars and collectors dominated the study and collection of Korean ceramics. In the 1920s, the Asakawa Noritaka(1884-1964) and Takumi(1891-1931) brothers and Yanagi Muneyoshi(1889-1961) pioneered the collection, evaluation, and study of Chosŏn white porcelain. The collecting, academic research, and public interest were the three main elements that were closely connected to strengthen the understanding of Korean ceramics.
The pioneering activities of the Asakawa brothers and Yanagi did not have a large impact at first, but the high price attained by Goshomaru, a Koryŏ tea bowl, in an auction in 1925, and the so-called Gyerongsan uproar of 1926 attracted public attention, resulting in the 1930s craze for Chosŏn crafts including Chosŏn white porcelain. Large amounts of Chosŏn craft items were shipped from Korea to Japan in the 1930s.
From the 1930s to the 1940s, a new social class emerged in Korea that valued culture and refinement, and collections by Koreans rapidly increased. Although the early role of Japanese collectors and scholars in modern collection and study of Korean ceramics cannot be disputed, by the 1930s, Koreans were starting to take over the role.

Ⅰ. 머리말

근대에 한국도자사 연구가 시작되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고려청자의 ‘재발견’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도자의 분청과 백자에 대한 평가 확정이다. 이 두 사건은 상당히 대조적인 과정을 거쳤다. 고려청자는 19세기 말 무덤에서 발견되자마자 그 가치가 널리 인정되어 수집과 연구가 시작되었다. 반면에 조선백자는 1919년 이후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 1884~1964), 아사카와 타쿠미(浅川巧, 1891~1931) 형제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활동을 거치면서 점차 인지되어 1930년대에 이르러 특히 일본인들 사이에서 조선백자를 비롯한 조선공예 붐을 일으켰으며,1 여기서 그 가치가 사회적으로 확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선백자 평가의 단초가 된 浅川형제와 柳宗悦 등의 다양한 활동이 곧 조선백자의 시장적 가치로 연결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으나,2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그 과정에는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1930년대 조선공예 붐의 중요한 계기가 된 1920년대 후반의 양상이다.
이하 본고에서는 이 1920년대 후반의 양상에 대해 수집과 연구, 그리고 일반인을 포함한 미술, 고도자 취미, 이들 세 가지가 서로 관계하면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각종 잡지와 신문기사를 통해 그 경위를 추적하고 밝히고자 한다.

Ⅱ.한국도자사 연구의 초창기

한국도자의 근대적이고 본격적인 수집과 연구는 고려청자의 재발견과 함께 시작되었다. 1876년 이후 조선왕조가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순차적으로 개국하면서 먼저 피에르 루이스 주이(Pierre Louis Jouy, 1856~1894)와 윌리엄 가울랜드(William Gowland, 1842~1922) 같은 서양인들이 조금 이질적인 도자기의 존재를 알아채고 기록으로 남겼다. 다만 처음에는 고려청자임이 인식되지 않았고, 오래된 무덤에서 비에 씻겨 드러난 것을 한국인이 부산의 일본인 거류구로 가끔 가지고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3 다음 단계에서 특히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 훗날 주한공사가 될 미국인 호레스 엔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다. 의료선교사로서 1884년 한국에 도착한 알렌은 벌써 그해부터 고려청자를 수집하기 시작해 1898년까지 컬렉션을 완성했다고 한다.4 이것이 아마도 근대 최초의 고려청자 컬렉션일 것이며 알렌의 이 컬렉션은 현재 미국 프리어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알렌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한국 주재 초대 영국 영사 윌리엄 리차드 칼즈(William Richard Carles, 1848~1929)이다. 칼즈는 1888년 출간된 그 저서에서 과거 고려의 도읍 송도(개성)에서 출토되었다는 도자기를 언급하며 정밀한 삽화를 게재하고 있다.5 그것은 틀림없는 고려청자이며, 칼즈는 고려청자의 존재를 서적 속에서 처음으로 명확히 지적한 것이다.6
한편 알렌에 이어 본격적인 고려청자 컬렉션을 형성한 것은 1896년부터 1899년까지 경성의 일본공사관에서 근무했던 야마요시 모리요시(山吉盛義, 1859~미상)이다. 그 고려청자는 개성부(開城府) 오래 된 무덤[古塚]에서 나온 것으로 종류의 많음과 수량 면에서 당시 최고의 컬렉션이었다고 한다.7 山吉盛義는 1899년 12월 일본미술협회에서 ‘米渓書屋書畫古器物展覧會’를 개최하여 한국 재임 중 모은 서화와 고기물을 전시하였는데, 그 중 상당수는 고려청자였다. 또한 그 행사장에는 ‘古高麗窯源流’라는 제목의 도자기 계보도가 걸려있고, 단군, 삼한, 삼국에서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는 도자사의 흐름을 素焼, 釉窯, 象嵌, 彫刻 등의 기법으로 간결하게 보여 주었다. 도쿄제국대학 인류학교실에서 한반도로 파견되어 인류학적,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한 야기 쇼자부로(八木奘三郎, 1866~1942)가 1904년에 “한국의 도자기에 대해 그 분류를 시도한 사람은……山吉盛義 씨 외에 있다고 들은 적이 없다”고 기술하고 있어,8 처음으로 한국 도자사의 전체상을 보여주려 한 것은 山吉盛義였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 도자사는 고려시대에서 끝나고 있다. 山吉盛義는 고려청자 컬렉션 도록을 1900년에 간행하여 도자사의 시기 구분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는데, 거기에는 역시 조선시대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9
이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八木奘三郎는 1901년 발표한 논문에서 한국 도자사를 제1기 新羅焼, 제2기 高麗焼, 제3기 朝鮮焼로 구분하고,10 처음으로 조선시대를 한국 도자사 속에서 평가했다. 그러나 八木奘三郎의 경우도 조선시대에 관해서는 ‘새로운 양식[新式]인 청화백자의 작품’이 있지만, 근년에는 그것도 쇠퇴하여 ‘사기가 조잡한 것과 초벌구이 종류’가 많다고 적었을 뿐이다.11 八木奘三郎는 1904년 논문에서 이 도자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 도자기 중 ‘미술품의 부류’에 들어가는 것은 고려시대 ‘청자, 백자[고려백자], 상감이 든 3종’이며, 조선시대 ‘청화백자’는 “계통적 연구에는 매우 유익한 자료”이지만 미술품으로서 가치는 결정하기 어렵다고 했다.12 또한 八木奘三郎는 ‘분청사기[미시마(三島)]’에도 언급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의 것으로 편년하고 있다.13
원래 고려청자는 근대 이후, 즉 갑신정변(1884년) 이후 사회질서 문란에 따른 도굴의 횡행, 청일전쟁(1894~95년), 1897년 기공된 경인철도를 비롯한 각종 철도 건설, 러일전쟁(1904~05년) 등과 관련된 토목공사에서 잇따라 땅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것이 도굴을 더욱 조장하여 머지않아 특히 일본인들 사이에서 ‘고려청자 광(狂)시대’가 도래하여 1911~12년경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한다.14 이렇게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가운데 앞서 서술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조선도자에 관해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八木奘三郎가 한국 도자사에 포함시켰지만 미적 가치는 인정하지 않았고, 또 1912년에 간행된 『李王家博物館所蔵品写真帖』에서도 ‘분청사기[미시마(三島)]’를 고려도자의 일종으로 평가하면서도 조선백자는 게재되지 않았듯이 이 무렵까지도 조선백자에 대한 평가가 낮아 수집하려는 사람도 없었다. 이상이 한국 도자의 수집과 연구를 둘러싼 1910년 전후의 상황이다.15
이상을 통해 근대 한국 도자연구 초창기에는 조선백자를 비롯한 조선도자가 일본인에 의해 처음으로 한국도자사에 편년되었지만, 그 평가나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되지 않았으며 고려시대로 인식되었던 ‘[미시마(三島)]’의 분청사기를 제외하고는 조선백자에 주목하는 연구자나 수집가는 거의 전무했음을 알 수 있다.15

Ⅲ.일본 연구자의 연구와 평가

1910년 전후까지의 조선백자에 대한 그러한 관심과 평가의 저조함을 역전시키는 것이 아사카와(浅川)형제와 柳宗悦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자 형인 浅川伯教는 1913년에, 동생 浅川巧는 이듬해 1914년에 한국으로 건너갔다. 浅川伯教가 조선백자를 비롯한 조선도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경복궁 터와 경희궁 터에서 출토된 도편을 발견한 것이다. 浅川伯教가 한반도로 건너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복궁에서는 다양한 토목공사가 이어졌다. 1915년 부지 내에서 시정5주년기념 물산공진회가 열렸고, 그해 말 이곳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이 개관한다. 그리고 1916년부터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립이 시작되었다.17 그러던 어느 날 浅川伯教가 땅에서 파낸 수많은 도편을 살펴보니 ‘분청사기[미시마(三島)]’의 것이 많았고, 여기에 조선 초기로 보이는 백자가 섞여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건국자 이성계가 1395년에 건축하여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출병에 의해 전소된 왕궁이다. 그래서 浅川伯教는 통설과 달리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아울러 경희궁을 비롯한 각 시대의 옛터를 조사하여 “각 시대 도자기의 대체적인 변천”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18 그리하여 浅川伯教는 상당히 이른 단계부터 조선시대 도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4년 浅川伯教는 처음으로 柳宗悦를 방문했을 때 선물로 조선 청화백자를 지참했다. 柳宗悦는 그 ‘형상미(形状美)’에 놀라 그동안 신경도 쓰지 않았던 도자기 속에서 인간의 따뜻함과 고귀함, 장엄함을 읽었다고 기록한다.19 그리고 1916년 이후 조선을 자주 여행하며 浅川형제와 함께 도자기를 비롯한 각종 골동품을 모으게 된다.20 이 무렵 조선백자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여전히 낮은 상태이며, 따라서 조선백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도자를 비롯한 각종 공예품을 최초로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柳宗悦와 浅川형제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21
다만 柳宗悦가 본격적으로 조선백자를 비롯하여 조선공예에 관여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柳宗悦에게 있어서 다음의 큰 전기가 된 것은 1919년 3·1독립운동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사건 이후 柳宗悦는 일본 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朝鮮人を想う)」는 글을 기고하고, 일제의 조선 통치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柳宗悦가 이 글에서 조선의 예술을 논하면서 그 특징으로 ‘선의 미’를 제기하고 한 예로서 ‘고려의 자기’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22
고려청자가 아름다운 것임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고려청자가 어떻게 뛰어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때까지 자세히 검토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한번 이를 접한 사람은 모두 그 탁월한 기능에 놀라지 않는 자가 없다”,23 “우아한 멋이 깊고 함축적인 것은 고려청자의 특색”,24 “뛰어난 기교의 작품”,25 등으로 평가되었을 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柳宗悦의 조선예술론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비애의 미’론이 제기되고 비판도 받았으나 조선백자를 포함한 한국 도자에 대해 그 미적 특질을 처음 본격적으로 분석하고자 한 것은 柳宗悦이었다고 할 수 있다.
柳宗悦는 3.1독립운동 다음 해인 1920년에는 “나는 요즘 거의 조선의 일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며,26 조선의 예술에 관한 평론을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하고, 한국 여행을 반복한다. 1920년 5월 여행 때는 浅川巧의 집에서 처음으로 <백자청화동화연화문호>(Fig 1)를 보고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감정에 젖어” “모든 것이 꿈꾸는 것 같다”며 일기에 써,27 그 훌륭함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이를 통해 浅川형제가 1920년 5월 시점에 <백자청화동화연화문호>를 이미 입수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柳宗悦와 浅川형제는 1921년 1월에 조선민족미술관 구상을 발표할 무렵까지 도자기 이외의 가구류 등을 포함하여 조선 공예품을 이미 300~400점 정도 수집했다.28 또한 같은 해 6월 이후 한 달 사이에 300점 가까운 작품을 수집했다.29
柳宗悦의 「선의 미(線の美)」론은 고려청자에서 촉발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柳宗悦는 곧 조선백자도 논하게 된다. 먼저 「도자기의 미 (陶磁器の美)」(1921년 1월)에서 “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李朝30에서는 인정할 만한 예술이 없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종종 고려의 작품에 필적할 수 있는 위대한 작품을 발견했다.……조선이 李朝에 있어 한층 선명하게 독립의 기풍을 보였다”고 적었으며,31 「조선민족미술전람회에 대해(朝鮮民族美術展覧會に就て)」(1921년 5월)서는 “조선민족의 특색은 오히려 李朝期의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서술했다.32 조선백자의 미적 특질을 처음 본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 것도 柳宗悦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상과 같은 경위를 바탕으로 柳宗悦와 浅川형제들이 조선백자론을 명확히 제기한 것이 잡지 『시라카바(白樺)』의 「李朝陶磁器」特集號 (1922년 9월)였다. 柳宗悦은 본 호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李朝는 말기이고 타락하여 도자기에도 거의 볼 것이 없다는 무모한 단정을 타파하는 데 있다”, “李朝의 자기에 어떤 것이 있는지 일반인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 첫 소개를 시도하고자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3 이 특집호에서 가장 중요한 논고가 浅川伯教의 「이조도기의 가치 및 변천에 대하여(李朝陶器の価値及び変遷に就て)」이다. 浅川伯教는 여기서 처음으로 조선도자의 시기 구분을 하여 ‘초기: 분청사기[미시마(三島)] 전성시대’, ‘중기: 경질백자시대’, ‘후기: 청화백자 전성시대’, ‘말기’ 총 4기로 나눠 각 시대에 각각 100년간, 150년간, 200년간, 50년간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를 배정했다(Fig 2). 즉 조선도자에도 ‘역사’가 있음을 밝히고 이를 통해 조선도자의 훌륭함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관한 세키노 타다시(関野貞, 1858~1935)의 미술공예론 중 일부를 니시카와 히로시(西川宏)가 ‘정체론’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34 한국의 역사 자체를 정체된 것으로 보는 것은 당시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류적인 시각이기도 했다. 浅川伯教의 역사관은 그들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당시 그 혁신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구분에서 볼 수 있듯이 종래에는 주로 고려시대로 여겨졌던 ‘분청사기[미시마(三島)]’를 浅川伯教는 분명히 조선시대 초기로 편년한 것은 주목된다.
浅川伯教는 상기와 같은 시기 구분을 도출함에 있어 설치 연대를 어느 정도 특정할 수 있는 옛터의 도편을 살펴보고, 나아가 『조선왕조실록』기타 문헌에 의해 정치사상의 역사 구분을 도자사와 조합하였다. 소비지유적 출토 도편에 의한 고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방법을 한국도자 연구에 처음 도입한 것도 浅川伯教이며, 그 공적은 매우 크다. 이에 대하여 예를 들면 동시대의 권위있는 대표적인 도자연구자인 오쿠다 세이치(奥田誠一, 1883~1955)는 조선 초기에 대해 “이조 초기의 도자기는 무엇에 의거하여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우리는 이를 우리나라 무로마치(室町)시대 이래 전래된 다기 중 대명물(大名物) 등으로 칭송받고 존중된 것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35 일본에 전래된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은 다완류에 의거하려 하고 있어 방법론의 차이는 뚜렷하다.
한국도자사 전체에서 조선시대의 위상에 대해 浅川伯教는 “조선의 도기는 李朝에 이르러 진정한 고유의 색채를 표현하고 있다”며, 이 시대에 처음으로 중국의 영향을 벗어났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중국의 것은 이성이 이기고 있지만 조선 것은 인정미가 이기고 있다”며 조선도자에는 인간다운 따뜻함이 있다고 주장했다.36 이러한 점은 柳宗悦와 공통된다. 두 사람은 교류를 거듭하면서 거의 같은 인식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李朝陶磁器」特集號에서 浅川伯教의 논문이 조선도자의 역사적 변천을 밝혔다면, 한편 柳宗悦의 「李朝窯漫錄」은 조선도자의 외견적 특징을 망라하여, 동물, 식물, 자연물, 기하학 등 각종 문양과 더불어 기법, 유약의 종류, 기형, 기종을 분류하였다.37
「李朝陶磁器」特集號 간행에 앞서 1921년 5월 柳宗悦와 浅川형제는 도쿄(東京)에서 ‘朝鮮民族美術展覧會’를 개최해 조선시대 공예품 전반을 처음 일본에 소개한 데 이어(Fig 3), 나아가 1922년 10월 경성에서는 조선도자만을 모은 ‘李朝陶磁器展覧會’를 열었다(Fig 4). 3일간에 걸쳐 열린 경성에서의 전시회는 “관람객 약1,200여 명, 그 중 3분의 2는 조선인, 출품 점수 4백여 점”이었다고 한다.38 浅川巧의 일기에 따르면 그 해 1월 시점에서 조선민족미술관을 위해 사두었던 수집품이 ‘스무 지게와 짐수레 한 대’였으며, 浅川巧 자신이 4, 5년간 모은 것도 거기에 보탰다고 한다.39 浅川巧는 그 외에 9월 시점에 연적을 300여 종이나 소유하고 있었다.40 柳宗悦와 浅川형제는 1922년경까지 이러한 분량의 공예품과 도자기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22년 10월에 열렸던 상기 ‘李朝陶磁器展覧會’는 출품 점수 ‘4백여점’ 중 약 100점은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 1858~1930), 오바 즈네키치(小場恒吉, 1878~1958), 오이시 요시키(大石善喜, 미상),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의 출품이었다.41 柳宗悦와 浅川 형제 이외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조선도자를 입수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여 일본인 컬렉터의 증가가 엿보인다. 이 중 언어학자이자 역사학자인 鮎貝房之進는 고려청자의 수집으로 특히 유명하며, 또 사업가로 저명한 富田儀作은 조선공예품 수집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신구(新旧) 미술공예품을 수집 진열한 富田儀作의 조선미술공예관은 浅川巧에 따르면 목공품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李朝焼[조선도자]’는 진열되어 있지 않았다.42 조선백자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한국인에 대해서는 『白樺』 「李朝陶磁器」特集號에서 柳宗悦가 “나는 아직까지 조선 사람들에게서 자국의 도자기를 사랑하고 그것을 수집하고,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사람을 원했었지”라고 했다.43 1920년대 초반에는 한국인 중 흥미를 갖는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浅川형제와 柳宗悦 이외의 이 시기 조선백자 연구의 중요한 연구자로서는 전술한 奥田誠一를 들 수 있다. 奥田誠一는 주로 柳宗悦의 「李朝窯漫錄」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조선시대라도 좀 더 중국의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4 이외에 加藤灌覚가 『朝鮮陶磁器概要』라는 매우 상세한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조선시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45
『白樺』 「李朝陶磁器」 特集號가 발간된지 약 반년 뒤인 1923년 1월 奥田誠一가 “최근 柳宗悦군이나 浅川伯教군에 의해 이조자기의 예술적 가치는 고조됐다. 종래 세상 사람에 의해 버려지고 돌보지 못했던 우리 조선도자기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두 사람의 덕이다”라고 기록했다.46 그리고 1924년에는 조선민족미술관이 개관하였다(Fig 5). 다만 이듬해인 1925년이 되어서도 『京城日報』 편집자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자기의 청화백자 연구는 오늘날까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이 방면의 것은 호사가들에게도 조금도 알려지지 않은 매우 흥미로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柳宗悦 씨가 겨우 한두 편의 연구를 발표하고 있지만 충분히 꿰뚫어 보지 않는 감이 있다.”47
이처럼 1919년 이후 柳宗悦들의 다양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전반에는 조선백자를 비롯한 조선도자가 바로 세상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그동안 연구의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1920 후반의 상황이며, 1930년대 조선백자를 비롯한 조선도자 평가 확산의 계기가 되는 이 시기의 양상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보고자 한다.

Ⅳ. 수집과 평가의 확산으로-1920년대 후반의 양상

앞서 언급한 경성일보의 1925년 2월 7일의 기사에서 단 10개월 만에 발행된 1925년 12월 5일 『京城日報』가 “최근 조선에서 고도자기에 대한 취미성이 향상되고 있다”고 전했다.48 1925년 말에 갑자기 고도자 취미가 확산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에는 같은 해 11월 9일에 일본에서 열린 이노우에(井上) 후작 가문의 소장품 매각에서 조선에서 만들어진 고려다완인 고쇼마루(御所丸)가 10만9500엔이라는 고가에 낙찰돼 “호사가의 화제 중심이 되고 있다”49 는 점이 관련돼 있다고 생각된다(Fig 6). 또한 이것을 전하는 『京城日報』는 이 매각 직후에 경성에서 치뤄진 고모리 시노부(小森忍, 1889~1921)와 浅川伯教의 강연회가 “세간의 흥미를 끌었다”고 서술함과 동시에, 고려도자는 “비싼 것으로, 완전한 것을 손에 넣는 것은 오히려 곤란”하지만, 그것에 비해 조선 청화백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50
“이조의 청화백자는 가격도 싸고 그 무늬나 형태도 일반 인사들에게 이해되기 쉽기 때문에 상당히 민중적이 된다. ……실로 숭고한 동양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술적 내용을 가진 것을 겨우 10엔 내외로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은 한반도에 사는 사람을 위해 행복이다.”
또한, 浅川伯教의 강연회는 경성일보 본사 내청각(来青閣)에서 개최되었는데, 조선총독부 기관지(機關誌)였던 경성일보 등 당시 총독부 소관 언론들이 조선도자의 사회적 홍보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이상으로 보아 1925년 12월 말경에 이르러서야 조선백자가 일반인에게도 서서히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상황이 나타난다. 즉, 1919년 이후 柳宗悦와 浅川형제의 활동과 더불어 거기에 御所丸 다완의 고가 낙찰과 浅川伯教와 小森忍의 강연회로 인해 주로 일본인 거류민을 중심으로 한 일반인들도 서서히 그때까지 관심을 갖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고도자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겹치듯 1926년 말부터 27년 전반에 걸쳐 일어난 것이 ‘계룡산 소동(鶏龍山騷動)’ 이었다. 원래 계룡산에는 고려자기 가마터가 산재해 있다는 전설이 있고, 1924년 12월 만철요업시험장(満鉄窯業試験場) 기사(技師)인 小森忍가 동학사 부근에서 가마터를 십여 군데 발견하였다.51 다만 보도된 것이 한국어 신문이었다는 점과 짧은 간단한 내용 때문인지 이 소식은 별다른 화제가 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도자 연구자 구라하시 토지로(倉橋藤治郎, 1887~1946)에 따르면 1926년 말부터 ‘계룡산 소동’이 시작되었고, 그 소동의 크기는 “최근 10년 동안 없었던 일”이었다.52 계룡산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는 일본에서 예로부터 ‘미시마(三島)’라 불리며 귀하게 여겨져 온 고려다완의 한 종류이며, 또한 이를 통해 三島의 생산지 중 하나가 밝혀졌으므로 특히 일본인 도자애호가들에게는 분명 큰 사건이었다. 더구나 소동은 곧 일종의 투기가 돼 ‘발광자’까지 나왔다고 한다.53
이때의 소동을 당시 『朝鮮新聞』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선내는 물론 멀리 오사카 방면에서 속속 뛰어들어 매입에 열중하고 있지만……, [발굴을 위해 땅값이] 점점 더 기세가 올라 시세가 치솟고……농민들의 기쁨은 또 각별하다……, [주민들은] 일은 그럭저럭 하면서, 한 덩어리를 파면 천엔이 되는 돈벌이 일에 취해 있다……공주에서는 다년간의 불황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듯한 기세로 바로 고려자기 덕분이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54
이러한 소동은 일찍이 고려청자를 둘러싸고 개성 부근에서도 일어났으나 그것이 다시 발생한 것이다. 투기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도자기에는 흥미가 없던 일반 민중들조차 도자기 찾기에 열중한 것은 이후 도자기 취미의 확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가마터의 이러한 난굴한 상태를 보고 조선총독부는 고적조사사업의 일환으로 1927년 9월부터 10월까지 노무리 켄(野守建, 미상)들에게 발굴조사를 시키고, 1929년에 『鶏龍山麓陶窯址調査報告』를 간행하였다. 이 조사는 조선도자의 가마터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계룡산 소동이 있었던 다음 해인 1928년 7월 경성에서 『李朝陶器展』이 개최되었는데, 출품된 약 3백 점의 작품은 조선민족미술관과 골동상 외에 ‘住井, 阿川, 鮎貝, 渡辺, 松井, 中村, 土井 등 여러 수집가들’ 소장품이었다.55 또한 이 때 ‘일품(逸品)’이라는 말도 사용되고 있어, 이 시점까지 전시회에 출품할 수 있는 뛰어난 조선백자를 소유한 수집가가 상당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연구로는 奥田誠一가 새로운 논문에서 종래의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여 한국 도자사를 ‘원시기’ ‘청자기’ ‘분청사기[미시마하케메(三島刷毛目)]기’ ‘청화백자기’의 4기로 나눈 후, ‘분청사기[미시마하케메(三島刷毛目)]기’이야말로 “조선도기의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해 냈으며”, “가장 특색 있는 조선도기 발달의 황금시대”이고, 이어지는 ‘청화백자기’도 “조선 특유의 의장이 두드러져 조선도자로서 독보적인 양식이 나타나고 있다”며 마침내 조선백자를 높이 평가했지만, “또한 거기에 타락의 길이 열렸다”며 역시 평가를 일부 보류했다.56
1920년대 후반의 연구 상황과 관련하여 또 하나 중요한 것은 浅川伯教가 한국 전역의 가마터 조사를 본격화한 것을 들 수 있다. 그 발단은 浅川伯教가 일본 근대 다인을 알게 된 데 있었다. 에도(江戸)시대에 번성했던 다도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무사나 공가(公家)가 몰락함에 따라 일단은 쇠퇴했지만 새롭게 성장해 온 신흥 기업가들에 의해 다시 번성하게 된다. 浅川伯教는 특히 고려다완에 관심이 있었던 그런 기업인들로부터 연구조사비를 지원받아 전국 각지의 가마터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57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 조선시대 공예품이 대량으로 일본으로 유입된다. 다만, 이때도 붐의 배경으로서 미술품 전반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중 하나의 구체적인 예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1930년 2월 15일부터 동서고금 미술품을 모은 ‘진장품(珍藏品) 전람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는 한반도 거주 개인이 소유한 명품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고자 한 것으로,58 이는 초기 한국인 컬렉터의 존재를 보여주는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시품은 서화가 많았던 것 같지만 기물도 포함돼 있고, 한반도 각지에서 문의가 쇄도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59 모인 출품수는 700점이 넘어,60 동호인들 사이에서 놓칠 수 없는 진품전으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61
한편, 일본에서는 1931년 2월에 오사카의 골동상 무라카미 슌쵸도(村上春釣堂)가 東京에서 ‘朝鮮陶磁木工展観’을 개최했는데, ‘이조의 것(李朝のもの[조선시대 공예])’가 많고, 그 골동품 가격이 특별히 고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62 이듬해인 1932년 10월에는 東京에서 조선민족 미술관의 소장품과 東京의 여러 사람들 소장품으로 ‘李朝陶磁器展’이 열렸고,63 또 같은 해에 두 차례 걸쳐 요정의 반스이켄(晩翠軒)에서 ‘朝鮮工藝品展覧會’가 개최되었다(Fig 7).64 계속해서 1933년에는 오사카(大阪)에서 ‘朝鮮古陶器展覧會’가,65 같은 해 11월에는 東京에서 ‘東洋古美術展’이 개최되었다.66 1932년 晩翠軒에서 열린 ‘朝鮮工藝品展覧會’에서는 준비를 위해 주최자 아오야마 지로(青山二郎, 1901~1979)가 浅川伯教의 협력을 얻으면서 한반도에서 도자기를 사들였는데, 그 양은 ‘화물 열차[貨車] 한 대분’이었다고 한다.67 그 외에도 ‘조선’을 내걸은 각종 전시회와 즉석 판매회를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한반도에도 거주한 적이 있는 화가 나라사키 테츠고(楢崎鉄香, 1898~미상)에 의하면, 1932년경 조선도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일본에서도 차차 전람회가 개최되거나 팬의 왕래가 활발해져……조선에서는 이조의 것이 깃털이 자라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했다. 곧, 교토와 오사카의 골동품 가게에도 조선시대 청화백자가 진열되고, 나고야(名古屋)에서 만든 동화백자 가짜가 경성으로 역이입(逆移入)되어 오게 되었다.”68
희귀성이 높은 동화백자의 가격이 비싸 인기가 많았음은 당시 전시회 목록과 기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같은 조선백자를 포함한 조선도자 붐의 보다 기본적인 배경으로 실은 1920년대 중반부터 30년대 전반에 걸쳐 일본에서 도자사 연구가 한창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도자 애호가들도 끌어들여 ‘학문 연구와 취미의 세계가 혼연일체’가 된 것이었다.69 『도자(陶磁)』(1927년 창간)나 『차완(茶わん)』(1931년 창간)과 같은 도자기 전문 잡지가 창간된 것도이 무렵이다.70 또한 이 시기에 도자기 취미가 대중화된 한 요인으로 일본에서의 시노(志野)요지(1930년)와 가라츠계(唐津系)요지,71 그리고 계룡산에서의 분청귀얄 발굴 등이 지적되고 있다.72
바로 이러한 시기에 浅川伯教가 자신의 조사를 집대성하여 1934년 東京와 大阪에서 개최한 것이 ‘朝鮮古陶史料大展覧會’였다(Fig 8). 이 전시회에서는 조선도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배경으로 浅川伯教의 학술조사 성과가 구체적인 형태로 제시되었다. 행사장에는 커다란 조선지도가 펼쳐졌고, 조선 전역 400여 곳에서 수집한 도편 1만여 점을 각각의 출토지 위에 놓고 제작지가 확실한 완제품도 참고로 전시했다. 그리고 별도의 행사장에서 진행한 강연에서는 고려시대 도자사를 초기(태조~성종), 중고기(목종~헌종), 중기(숙종~고종), 후기(원종~충정왕), 말기(공민~공양왕) 의 5기로 나누고, 조선시대는 초기(태종~성종), 중기(연산군~인조), 후기(효종~헌종), 말기(철종~효태왕)로 시기 구분하여 각각의 특징을 논하였다.73 도편이라는 확실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국의 분포상황과 역사적 변천을 밝히는 이 전시회는 그야말로 浅川伯教 도자연구의 도달점이었다.
이에 앞서 1931년에는 浅川巧의 『朝鮮陶磁名考』(조선공예간행회, 공정회출판부)가 출판되었다. 이 ‘조선’은 조선시대의 의미로 당시 급속히 잊혀져 가던 여러 오래된 도자기의 명칭과 그 용도를 그림과 함께 기록하고 있다(Fig 9). ‘朝鮮古陶史料大展覧會’와 『朝鮮陶磁名考』는 浅川형제의 도자연구의 도달점이며, 오랜 세월에 걸친 두 사람의 연구는 이 시점에서 마무리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이제 이조도자기의 감상은 당연히 정점에 달하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리고 팬들은 모든 분야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고, 그 가격은 최고치에 이른다”(1937년),74 “올해는 봄 이후 잇달아 조선 고미술 전시회가 교토(京都)-오사카 [京阪間] 사이에서 개최되었다. 십여 차례에 걸쳐 조선 도자기는 눈사태처럼 밀려 들어온다” (1938년)는 말들이 신문에 등장했으며,75 나아가 1942년에는 柳宗悦도 “최근에는 이조의 것이 오히려 병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비싼 값을 부르는 것을 보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고 감회를 표현하고 있다.76 그리하여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해서 도자기를 비롯한 조선시대 많은 공예품이 공급되면서 붐을 더욱 가속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전시회 관계에서 특필할 점은 1930년대 들어 신문에 한국인 수집가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77 먼저 전술한 1930년의 ‘진장품(珍藏品) 전람회’의 출품자 중에 한반도 거주 일본인에 섞여 한국인의 이름이 보이며, 그 필두는 치과의사 함석태이다.78 함석태는 과거 東京의 한 노인네 집에 살 때 그 노인이 골동품을 취미로 삼았는데, ‘조선의 오래된 도자기’를 사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사다 보니 스스로도 조선의 고물(古物)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79 이 외에 이한복, 김용진 등의 이름이 보인다. 『京城美術倶楽部創業二十年記念誌』도 일찍부터 수집을 시작한 한국인으로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에서 공부한 화가 이한복과 치과의사 함석태 두 사람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80
1933년 5월에는 ‘이조도기 수집가’로 알려진 화가 도상봉이 3백 점을 출품하여 전시회를 열었고,81 같은 해 10월에는 이태준이 東京에서 ‘다년 수집의 이조고도자 전관(展観)’을 개최하였다.82 이태준은 부모가 남긴 연적으로 기명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깨닫고 부엌에 무엇이 있나 찾아보았으나 최근의 공장 제품뿐이고 오래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후 오래된 도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무렵에야 비로서 柳宗悦나 浅川伯教의 일이나 조선 고도자가 널리 골동품계에서 상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83
그리고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성의 고미술상 이희섭이 운영한 문명상회이다. 1934년부터 1941년까지 문명상회는 東京와 大阪에서 조선고미술, 고공예 전시판매회를 7차례 열어 많은 공예품을 일본으로 가져왔다. 일본의 대표적 고미술상인 마유야마 쥰키치(繭山順吉, 1913~1999)에 따르면, 1941년 전시 판매회에서는 柳宗悦가 조선시대 청화의 초화문호로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 <청화초화문면각호>(Fig 10)가 출품되었다고 한다.84 이것은 浅川巧의 옛 소장품으로 1945년 이후 아타카(安宅) 컬렉션이 되어 현재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이다.
또한 『京城美術倶楽部創業二十年記念誌』에 따르면 미술품이 해외로 유출될 것을 우려한 이영개는 “조선에서도 당장 조선의 고미술품을 조선에 둬야 한다는 의기를 보이며”, “현재 [한] 반도인 수집가도 매년 증가해 미술구락부 매출에서도 총액의 절반은 [한]반도인 측이 사들이는 형국”이라며, 부호인 전형필은 미술관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85 한국인 수집가들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浅川巧『朝鮮陶磁名考』 이외에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전문 서적으로는 조선총독부편 『朝鮮古蹟圖譜』 제15권(조선총독부, 1935)과 다나카 토요타로(田中豊太郎) 의 『李朝陶磁譜 磁器篇』(聚楽社, 1942)이 편찬되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박물관, 이왕가박물관, 조선민족미술관, 개인 수집가 등으로부터 우수품을 모은 도보(圖譜)로서 당시 조선도자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개별적인 연구로는 오쿠다이라 타케히코(奥平武彦, 1900~1943)의 「朝鮮青花白磁考」(1934)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청화백자에 대한 기사를 검토하였고,86 야마다 만키치로(山田万吉郎)의 「이조청화의 민간 사용에 관하여(李朝染付の民間使用に就て)」(1934)는 조선왕조시대에는 청화백자의 민간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설을 정정하고, 청화백자의 분류를 시도하였다.87 분청사기에 대해서는 奥平武彦가 「사호를 새긴 미시마(司号を刻める三島)」(1935)에서 장흥고 등의 명문의 의미를 밝혔으며,88 山田万吉郎의 「무안 출토 미시마고(三島考)」(1935)는 전라남도 무안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로 이른바 ‘미시마[분청사기]’의 다양성을 주장했다.89 山田万吉郎가 그것을 더욱 자세하게 전개한 것이 「분청귀얄(三島刷毛目)의 변천」(1938)이다.90 이렇게 해서 분청사기, 백자 모두 보다 상세한 연구가 진행되려 하고 있었다.
이상으로 1920년대 후반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백자를 비롯한 조선도자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게 되었으며, 계룡산 소동과 御所丸 다완의 고액 낙찰 등 사회적으로도 화제가 되는 사건을 통해 수집가나 애호가 등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1930년대 이후로 이미 浅川형제와 柳宗悦 등의 꾸준한 활동으로 거론되었던 조선백자의 평가는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게 된 것이다.
필자가 이미 지적했듯이91 서양에서는 고려청자와는 대조적으로 조선도자에 대한 평가가 매우 늦어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윌리엄 허니(William Honey)의 1944년 저작을 기다려야 했고, 그 이전 조선도자에 대한 평가는 극히 낮았다고 할 수 있다.92

Ⅴ.맺음말

근대적인 한국도자사 연구는 고려청자의 발견과 함께 시작되어 최초로 서양인들이 컬렉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山吉盛義나 八木奘三郎가 한국도자사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면서 조선왕조를 처음으로 한국도자사 속에 평가하였고, 이 시점부터 이후에는 수집과 연구 모두 일본인이 주도하게 된다. 1920년대 들어 浅川형제와 柳宗悦에 의해 조선백자 수집, 평가와 연구 등 선구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본고에서는 浅川형제와 柳宗悦의 선구적 활동에 당장 큰 사회적 반향이 없었음을 지적함과 동시에 1925년 御所丸 다완의 고가 낙찰에서 1926년 계룡산 소동으로 일반인들의 흥미를 끄는 상징적 사건들이 1920년대 후반에 이어지면서 조선 고미술, 고도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쏠린 양상을 밝혔다. 그런 속에서 수집과 연구, 그리고 일반인을 끌어들인 미술, 고도자 취미, 이 세 가지가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즉 기존에 주목받지 못했던 이 시기가 1930년대 조선백자, 조선공예 붐이 개화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나아가 한국인의 수집과 연구가 등장하는 배경을 새로운 자료를 통해 밝혔다. 즉, 1930년대부터 40년대 전반에 걸쳐 한국인 수집가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 현상을 『京城美術倶楽部創業二十年記念誌』는 자산가들이 나타나 ‘취미 교양’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는데,93 맞을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계층이 분명히 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현상은 도자 수집면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개성의 청년 한수경은 1934년까지 높은 수준으로 고려청자 재현에 성공하여 浅川伯教로 부터 칭송을 받았으며,94 그 기술은 똑같이 재현에 임한 富田儀作 등 일본인을 뛰어넘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자 및 미술사 전반의 연구자로는 고유섭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근대에 한국도자 수집과 연구면에서 일본인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역할은 1945년 8월 광복을 기점으로 갑자기 한국인의 손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늦어도 1930년대부터 그 이행의 조짐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Notes

1) 長谷部楽爾, 「高麗青磁をめぐって」 (1983), 『東洋陶磁史研究』 (中央公論美術出版, 2006), pp. 457-468; 長谷部楽爾, 「李朝陶磁をめぐって」 (1985), 『東洋陶磁史研究』, (中央公論美術出版, 2006), pp. 469-477; 野々上慶一, 「李朝白磁と私」, 『李朝白磁抄選』 (創樹社美術出版, 1984), pp. 137; 伊藤郁太郎, 「近代日本の李朝陶磁受容史」, 『芸術新潮』(1997. 5), pp. 66-68; 高崎宗司, 『朝鮮の土となった日本人 増補新版』 (草風館, 1998), pp. 44-45.

2) 土田眞紀, 『さまよえる工藝 柳宗悦と近代』 (草風館, 2007), p. 298.

3) 鄭銀珍, 「近代における高麗青磁-再発見から再現 へ」, 『陶説』 735 (2014. 6), pp. 53.

4) Horace N. Allen, Copy of a Certified Catalogue of a Collection of Ancient Korean Pottery (The Seoul Press, 1901), pp. 6-7. 본 도록은 프리어갤러리의 Louise Cort 씨로부터 제공받았다. 알렌의 고려청자 수집, 컬렉션 전체적 상황에 대한 언급은 鄭銀珍, 위의 논문, pp. 53-57. 이후에 이루어진 다른 선행연구로 미국내의 고려청자 컬력션 형성에 대한 검토는 김윤정, 「근대 미국의 고려청자 Collection 형성과 연구 성과의 의미」, 『石堂論叢』 66 (2016), pp. 387-429.

5) William Richard Carles, Life in Corea (Macmillan and Co., 1888), pp. 139-141.

6) 고려청자 연구의 초기 단계에서 서양인이 큰 역할을 한 점에 대해서 처음으로 지적한 연구는 西田宏子, 「高麗鐡繪青磁에 대한 考察-鐡繪青磁의 盤을 中心으로-」, 『美術資料』 29 (국립중앙박물관, 1981), pp. 35-42. 그 이후 서양에서 한국도자의 인식과 수용, 컬렉션에 대해 검토한 논문은 鄭銀珍, 「朝鮮陶磁と浅川伯教」, 『浅川伯教・巧兄弟の心と眼―朝鮮時代の美』 (美術館連絡協議会, 2011), pp. 12-15; 鄭銀珍, 앞의 논문, pp. 53-57. 이후의 다른 선행연구로 김윤정은 서양에서 한국도자에 대한 인식과 수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김윤정, 「근대 미국에서 한국 도자에 대한 인식 변화와 그 배경」, 『미술사학』 32 (2016), pp. 291-320; 김윤정, 「근대 유럽에서 한국도자에 대한 인식 변화와 그 배경」,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6 (2018), pp. 29-59.

7) 塩田力蔵, 「山吉氏の高麗陶器に就て」, 『大日本窯業協会雑誌』 8卷 95號 (1900), p. 406.

8) 八木奘三郎, 「韓国の美術」, 『国華』 169 (1904. 6), p. 9.

9) 山吉盛義, 尾形圭助, 『古高麗美痕』 (画報社, 1900). 山吉盛義가 1900년에 『古高麗美痕』에서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한국도자사 전체상을 최초로 제시하였으나, 조선백자는 언급(평가)하지 않고 고려청자를 둘러싼 평가기준이나 ‘미적’ 가치관을 보여준 것을 지적한 연구는 鄭銀珍, 「近代韓国陶磁史研究--浅川伯教・巧兄弟の活動を軸として」 (立命館大学大学院博士学位論文, 2013), pp. 67-68. 이후 山吉盛義를 중심으로 초기 일본인과 고려청자의 연구에 대해 자세히 검토한 논문으로는 片山まび,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일본인과 고려청자-山吉盛義를 중심으로」, 『문물』 6 (2016), pp. 173-199.

10) 八木奘三郎, 「韓国古代の陶器摸様」, 『東京人類学会雑誌』 185 (1901. 8), pp. 450-451.

11) 八木奘三郎, 각주 10의 논문, p. 452.

12) 八木奘三郎, 각주 8의 논문, p. 9.

13) 위의 논문, p. 10. 또한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는 이러한 八木奘三郎의 연구를 고도자의 연구방법을 古窯址 발굴조사에 착안하여 실행한 개척자로서 높이 평가하였다 小山富士夫, 「八木奘三郎先生の業績」, 『陶磁』 10卷 2號 (1938. 7), pp. 24-26.

14) 三宅長策, 「そのころの思ひ出-高麗古墳発掘時代」, 『陶磁』 6卷 6號 (1934. 12), p. 70.

15) 古窯 조사로는 마시미즈 쇼로쿠(真清水蔵六)가 1910년부터 12년까지, 또 八木奘三郎가 1913년과 1915년에 古窯跡를 조사했다.

16)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고고유물과 도자기 등 조선공예품, 회화, 조각 등을 대량 수집한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의 오구라 컬렉션은 1921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하여 30여 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사토우 아키오, 「오구라 컬렉션에 대하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pp. 8-9. 다만 각 유물의 구입연도가 불분명하여 본고에서는 고찰 대상에서 제외한다.

17) 徐東帝, 西垣安比古, 「デ・ラランデの京城都市構想図と景福宮敷地平面図に関する研究」,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 79卷 699號 (2014. 7), p. 1211.

18) 이상의 연구 발단에 대해서는 浅川伯教, 「朝鮮の美術工芸に就いての回顧」, 和田八千穂·藤原喜蔵共編, 『朝鮮の回顧』 (近沢書店, 1945), pp. 272-273.

19) 柳宗悦, 「我孫子から 通信一」, 『白樺』 5卷 12號 (1914. 12), p. 334.

20) 浅川伯教, 앞의 논문, pp. 273-274. 또한, 柳宗悦와 조선의 공예품에 관한 연구는 水尾比呂志, 『評伝 柳宗悦』 (筑摩書房, 2004); 杉山亨司, 「柳宗悦と「朝鮮」をめぐって」, 『日本民藝館所蔵 朝鮮陶磁図録』 (日本民藝館, 2009), pp. 104-109. 등 다수가 있다. 또한 한국에서의 柳宗悦 연구는 박계리,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朝鮮民族美術館」, 『한국근현대미술사학』 9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01), pp. 41-68.

21) 일설에 의하면, 이보다 일찍 조선시대 도자기의 가치를 인정한 인물로 원래 대만에서 경찰관을 하고 있던 宇津宮, 이왕가박물관 촉탁의 宮沢陶川, 창경원의 정원을 조성한 정원사 大館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佐々木兆冶述, 『京城美術倶楽部創業二十年 記念誌: 朝鮮古美術業界20年の回顧』 (京城美術倶楽部, 1942序), pp. 34-38.

22) 柳宗悦, 「朝鮮人を想う」 (1919. 5), 高崎宗司編, 『朝鮮を想う』 (筑摩書房, 1984), p. 6.

23) 伊藤弥三郎,西村庄太郎, 「高麗焼の価値」, 『高麗焼』 (非売品, 1910), p. 5.

24) 李王家博物館編, 「陶器」, 『李王家博物館所蔵品写真帖』 (李王職, 1912). p. 13.

25) 八木奘三郎, 각주 8의 논문, p. 11.

26) 柳宗悦, 「朝鮮の友に贈る書」 (1920. 6), 高崎宗司編, 앞의 책, p. 39.

27) 柳宗悦, 「彼の朝鮮行」 (1920. 10), 高崎宗司編, 각주 22의 책, pp. 65-66.

28) 柳宗悦, 「「朝鮮民族美術館」に就ての報告」 (1921. 2), 高崎宗司編, 각주 22의 책, p. 94.

29) 柳宗悦, 「六号雑記」 (1921. 9), 高崎宗司編, 각주 22의 책, p. 100.

30) 사료 인용문 중에서는 조선시대와 조선도자, 조선공예 명칭으로 ‘이조(李朝)’가 사용되고 있다. 이 시대의 도자나 공예가 일본에서 수용될 당시의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원문 그대로 두었다.

31) 柳宗悦, 「陶磁器の美」 (1921. 1), 高崎宗司編, 각주 22의 책, p. 89.

32) 柳宗悦, 「朝鮮民族美術展覧会に就て」 (1921. 5), 高崎宗司編, 각주 22의 책, p. 95.

33) 柳宗悦, 「編輯余録」, 『白樺』 (1922. 9), p. 90.

34) 西川宏, 「日本帝国主義下における朝鮮考古学の形成」, 『朝鮮史研究会論文集』 7 (朝鮮史硏究会, 1970), p. 109.

35) 奥田誠一, 「朝鮮の陶磁器に就て(八)」, 『国華』 392 (1923. 1), p. 234.

36) 浅川伯教, 「李朝陶器の価値及び変遷に就て」, 『白樺』 (1922. 9), p. 2, 7.

37) 柳宗悦, 「李朝窯漫録」, 『白樺』 (1922. 9), pp. 64-86.

38) 柳宗悦, 「京城での展覧会、 その他」 (1922. 12), 高崎宗司編, 각주22의 책, p. 174.

39) 浅川巧, 「日記」 (1922. 1. 12), 高崎宗司編, 『浅川巧 全集』 (草風館, 1996), p. 14.

40) 柳宗悦, 「挿絵説明」, 『白樺』 (1922. 9), p. 89.

41) 柳宗悦, 「京城での展覧会、 その他」 (1922. 12), 高崎宗司編, 각주22의 책, p. 174.

42) 「柳宗悦宛浅川巧書簡」 (1922. 12. 12), 高崎宗司編, 각주39의 책, pp. 239-240.

43) 柳宗悦, 각주 37의 글, pp. 85-86.

44) 奥田誠一, 「朝鮮の陶磁器に就て(九)」, 『国華』 393 (1923. 2), pp. 267-274.

45) 加藤灌覚, 「朝鮮陶磁器概要」, 『朝鮮史講座』 (朝鮮史学会, 1923~24), pp. 243-293.

46) 奥田誠一, 「朝鮮の陶磁器に就て(八)」, 『国華』 392 (1923. 1), p. 233.

47) 黒岩治徳, 「朝鮮磁器の染付(一)」, 『京城日報』 (1925. 2. 7).

48) 「古陶磁の蒐集流行 朝鮮の古什器を集める趣味」, 『京城日報』 (1925. 12. 5).

49) 「高麗文化の粋を蒐めた 古代陶磁器展」, 『京城日報』 (1925. 11. 23). 다완의 이름은 ‘석양(夕陽)’, 낙찰자는 후지타(藤田)재벌의 藤田徳次郎였다. 東美研究所編,『東京美術市場史』, (東京美術倶楽部, 1979), p. 59.

50) 앞의 기사, 『京城日報』 (1925. 12. 5). 小森忍는 만철요업시험장 기사이며, 이 강연회는 11월 24일에 개최되었다.

51) 「高麗磁器の窯跡発見」, 『時代日報』 (1925. 1. 11).

52) 倉橋藤治郎, 「陶器を売るに当り」, 『茶わん』 35 (1933. 12), pp. 69-70.

53) 小野賢一郎, 『陶器を中心に』 (万里閣書房, 1928), pp. 337-338.

54) 「鶏龍山麓孔岩里で高麗焼を発掘 小皿が忽ち千円と 夢のやうな話」, 『朝鮮新聞』 (1927. 3. 18).

55) 「李朝陶器展」, 『京城日報』 (1928. 7. 22).

56) 奥田誠一, 「東洋陶磁器の鑑賞 三 朝鮮陶磁器発達史概説」, 『陶磁』 1卷 3號 (1928. 4), pp. 2-4.

57) 이에 관해 자세한 것은 鄭銀珍, 『韓国陶磁史の誕生と古陶磁ブーム』 (思文閣出版, 2020) 第7章第2, 3節에서 논했다.

58) 「美術骨董会の一大宝庫開かる」, 『京城日報』 (1930. 2. 7).

59) 「珍蔵品展近づく 蒐集家の注視の的となる 名作逸品次々と集まる」, 『京城日報』 (1930. 2. 10).

60) 「明日から開く 待たれた珍蔵品展 出品七百点を突破」, 『京城日報』 (1930. 2. 21).

61) 「時価五万円の巨然の山水 陳列替へ第二日の本社珍蔵展」, 『京城日報』 (1930. 2. 22).

62) 「朝鮮陶器の展観」, 『陶磁』 3卷 3號 (1931. 3), p. 43.

63) 「李朝陶磁器の陳列」, 『東京朝日新聞』 (1932. 10. 10朝刊); 「雑信-李朝展」, 『陶磁』 4卷 4號 (1932. 10), p. 62.

64) 森孝一, 「青山二郎年譜」, 『青山二郎全集』下 (筑摩書房, 2003), pp. 425-427.

65) 「雑信-朝鮮古陶器展覧会」, 『陶磁』 5卷 3號 (1933. 8), p. 67.

66) 「雑信-東洋古美術展」, 『陶磁』 5卷 4號 (1933. 10), p. 63.

67) 「朝鮮物は下手なるが故に美しからず」, 『別冊太陽 青山二郎の眼』 (平凡社, 1994), p. 22.

68) 楢崎鉄香, 「朝鮮陶磁器漫筆【2】」, 『京城日報』 (1937. 12. 3).

69) 竹内順一, 「日本陶磁研究史序説(1)」, 『陶説』 567 (2000. 6), p. 70.

70) 伊藤郁太郎, 앞의 논문, p. 68.

71) 가라츠(唐津) 도자기의 선구적 연구자인 후루타치 쿠이치(古舘九一, 1874~1949)가 고가라츠 (古唐津)의 요지 발굴, 연구에 착수한 것도 1930년 이후의 일이다. 青柳恵介, 『唐津 やきものルネサンス』 (新潮社, 2004), p. 68.

72) 江守名彦, 「陶磁器趣味(三)」, 『茶わん』 44 (1934. 9), pp. 72-73.

73) 浅川伯教, 「朝鮮古陶器の研究に就きて」 (1934. 7); 浅川伯教, 「朝鮮古陶器講義」 (1934. 7) 양쪽 다 손으로 쓴 원고이다.

74) 楢崎鉄香, 「朝鮮陶磁器漫筆(8)」, 『京城日報』 (1937. 12. 19).

75) 楢崎鉄香, 「揚る朝鮮陶磁器熱(上)」, 『京城日報』 (1938. 6. 28).

76) 柳宗悦, 「「高麗」と「李朝」」 (1942. 10), 『柳宗悦全集』 6 (筑摩書房, 1981), p. 357.

77) 한국인 수집가에 대한 최근의 연구로 柳川陽介, 「朝鮮人蒐集家たちの書画骨董認識-1930-40年代を中心として」, 『韓国朝鮮の文化と社会』 20 (2021), pp. 86-102가 있다. 본 논문은 東京文化財研究所의 田代裕一朗 씨로부터 교시를 받았다.

78) 「所蔵家―鑑識家 出揃って応援」, 『京城日報』 (1930. 2. 20).

79) 「趣味人巡礼記 咸錫泰氏」, 『毎日申報』 (1928. 3. 16).

80) 佐々木兆冶述, 앞의 책, pp. 40-41.

81) 「李朝陶器展観」, 『朝鮮新聞』 (1933. 5. 29).

82) 「雑信-李朝古陶磁展」, 『陶磁』 第5卷 第4號 (1933. 10), p. 62.

83) 李泰俊, 「破片的な話」, 『陶磁』 第5卷 (1933. 12), pp. 48-49.

84) 繭山順吉, 『美術商のよろこび』 (非売品, 1988), p. 44.

85) 佐々木兆冶述, 앞의 책, pp. 41-42. 이영개는 사업가다. 전형필의 미술관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이며, 1966년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86) 『陶磁』 第6卷 第4號 (1934. 11), pp. 1-17.

87) 『陶磁』 第6卷 第4號 (1934. 11), pp. 18-29.

88) 『陶磁』 第7卷 第2號 (1935. 6), pp. 1-11.

89) 『陶磁』 第7卷 第2號 (1935. 6), pp. 28-45.

90) 『陶磁』 第10卷 第6號 (1938. 12), pp. 1-29.

91) 鄭銀珍, 각주 6의 논문, p. 15.

92) 1944년에 윌리엄 허니(William Honey)가 처음으로 조선도자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그 독자적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였다(William Honey, The Art of the Potter (Faber and Faber, 1944). pp. 56-72).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는 조선왕조시대는 조선도자기 쇠퇴의 시대라고 논했다 (Andre Eckardt, 권영필 역, 『에카르트의 조선미술사』 (열화당, 2003), p. 313). 그리고, 1928년에 홉슨(Robert L. Hobson)은 조선도자를 「질이 떨어지고」 「조잡」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R. L. Hobson, The George Eumorfopoulos Collection: Catalogue of the Chinese, Corean and Persian Pottery and Porcelain, vol. 6, Ernest Benn, 1928, p. 35).

93) 佐々木兆冶述, 앞의 책, p. 41.

94) 鄭銀珍, 앞의 책 第5章 「高麗青磁再現史」에서 자세히 소개했다.

Fig. 1.
<백자청화동화연화문호>, JAR, porcelain with lotus design in underglaze cobalt-blue and copper-red paint, Joseon dynasty, Height 44.6cm, 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gift of Mr. ATAKA Ei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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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浅川伯教, <李朝陶器時代表>, A sakawa Nori-taka, “Chronology of Chŏson Period Pottery Ware,” 1922(A sakawa Noritaka, Shirakaba, p.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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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朝鮮民族美術展覧會>, Korean Ethnicity Art Exhibition, 1921 (Photo courtesy of the Japan Folk Crafts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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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李朝陶磁器展覧會>, Chŏson Dynasty Ceramics Exhibition, 1922 (Photo courtesy of the Japan Folk Crafts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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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朝鮮民族美術館 展示室>, Exhibition Rooms of the Korean Ethnicity Museum of art, 1924, (Photo courtesy of the Japan Folk Crafts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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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御所丸茶碗>, Goshomaru Tea Bowl, Chŏson, (Edit. TTobiken - kyusho, Tokyo bijutsu shijoshi, p.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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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晩翠軒에서 열린 ‘朝鮮工芸品展覧會’의 회장 풍경>, “The Korean Crafts Exhibition” held at the Bansuiken Pav ilion (Nonomura Keiichi, Richo Hakuji Shusen, 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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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朝鮮古陶史料大展覧會』, Chosen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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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浅川巧, <항아리 스케치와 명칭>, A sakawa Takumi, Drawings and Names of the Jars, 1931 (A sakawa Takumi, Chousen Touji Meikou, p.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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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백자청화초화문각호>, Beveled Jar, blue-and-white porcelain with floral plants design, Chŏson, H. 24.7cm, 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gift of Mr. ATAKA Teru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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