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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8; 2023 > Article
山西省 寶寧寺 水陸畫의 후원자 계층과 활용 양상의 변화: 明 황실의 下賜와 淸代 重修 기록을 중심으로*

Abstract

中國 太原市 山西博物院에 소장된 寶寧寺 水陸畫 136점은 明代에 제작된 軸형 수륙화 가운데 거의 전체가 갖춰진 작품이다. 불화 외에도 康熙 甲申년(1704)과 嘉慶 20년(1815) 수륙화 중수 기록과 공양자 명단이 남아 있다. 기존 연구에서 부속 문서로만 언급된 이 기록들은 보녕사 수륙화에 대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보녕사 수륙화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이 작품의 下賜에 대한 것이다. 몽고 지역의 유목 부족이 보녕사가 위치한 山西省 右衛城을 위협하고, 土木의 변으로 혼란한 상황 속에서 명 황실의 건재함을 변방에 보여 주려는 의도로 하사된 것으로 보인다.康熙 甲申년(1704) 중수에는 右衛城에 주둔한 八旗駐防 주도로 지역 내 모든 紳士와 商賈闔會이 단체로 참여했다. 18세기경 보녕사 수륙화 중수는 참여한 각 집단의 소속감을 증대시키고, 동시에 지역에서 집단의 명성과 영향력을 높이고 널리 선전하는 방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19세기에 접어들면 보녕사 수륙화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 보녕사에서는 매년 浴佛節에 수륙화를 진설했고, 재원을 끌어오기 위한 방편으로 수륙화를 활용했다.본 연구에서는 제작 이후 수륙화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로 시선을 옮겨 후원자 계층의 변화와 수륙화 기능이 달라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보녕사 수륙화의 중수기록은 명대부터 청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그림이 정치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변화에 맞게 사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Abstract

The 136 Water-Land paintings from Baoningsi, now at the Shanxi Museum in Taiyuan, China, are a set of hanging scrolls of the Ming dynasty that have been preserved almost completely. In addition, three documents related to the paintings survive: two records on the repairs to the paintings made in the Jianshen Year of the Kangxi Emperor’s reign (1704) and the twentieth year of the Jiaqing Emperor’s reign (1815), and a list of patrons who contributed to the repair. Although previous studies only mention them as supplementary documents, they offer new insights in the understanding of the paintings.
The earliest record on the Baoningsi Water-Land paintings is about their bestowment by the emperor. As the Youyu area in Shanxi, where Baonignsi is located, was being threatened by the nomadic Mongol tribes and the chaos of the Crisis of Tumu at the time, the paintings were likely gifted to make a display of the Ming imperial power.
In 1704, the Eight Banners garrisons stationed in Youweicheng led the patronage for the paintings’ repair, with the local gentry and merchants also participating. In the eighteenth century, this was a way to bring people together and for local groups to demonstrate their power and exercise social influences. In the nineteenth century, the paintings’ social function changed once again. They were displayed every year on Buddha’s Birthday and was instrumental in bringing in financial contributions to the temple.
This study has focused on the changing roles of the Water-Land paintings. The records of their repairs enables the understanding of different functions a set of paintings can have according to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from Ming to late Qing.

Ⅰ. 머리말

수륙화는 四聖六凡의 존격을 그린 불화로, 아귀를 위한 시식 의례의 일종인 水陸會에서 사용된 의식용 그림이다.1 축 형식 수륙화의 경우 중국에서는 70점에서 120점 정도로 조성되었고 山西省 지역에서는 대부분 벽화 형태로 전한다. 수륙회 기록은 당대부터 청대까지 문헌에서 비교적 고루 확인되나 현재 전하는 수륙화는 대부분 명청대에 제작된 것이다.
현재 太原市 山西博物院에는 136폭으로 구성된 寶寧寺 水陸畫가 소장되어 있다(Fig. 1).2 이 수륙화는 화폭으로 조성된 중국 수륙화 가운데 전체 원상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작품이자, 명 황실에서 하사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3 보녕사 수륙화에는 100폭이 넘는 수륙화 외에도 康熙 甲申년(1704)의 중수가 기록된 강희 乙酉년(1705) 문서와 공양자 명단, 嘉慶 20년(1815)에 기록된 중수 문서가 함께 전하고 있어 수륙화의 내력과 중수 이력까지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보녕사 수륙화의 중수 기록과 공양자 명단은 불화에 부속된 문서로 언급될 뿐 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본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다루지 못했던 보녕사 수륙화의 이후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보녕사 수륙화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겠다. 먼저 보녕사 수륙화의 전반적인 구성을 살펴보고, 수륙화가 처음 산서성에 하사되었던 시기에 전쟁과 관련하여 보녕사에서 수륙화가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 보고자 한다. 중수에 비해 제작시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기에 인접한 시기 황실이 주도한 수륙회 기록과 수륙화 등을 참고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후 이루어진 두 차례의 중수에 참여한 후원자 계층의 성격을 분석하고, 후원자에 따라 수륙화가 원래 기능과 달리 얼마나 다양한 맥락에서 활용되었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시대에 따라 변화한 수륙회의 모습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Ⅱ. 보녕사 수륙화의 구성과 특징

山西省 右玉縣(옛 右衛城)에 위치한 보녕사는 天順 庚辰년(1460)에 조성된 사찰이다. 원래 대웅보전(정전), 천왕전, 좌우에 鍾樓와 高樓, 30여 칸의 背殿, 碑樓 등의 전각이었으나 전쟁으로 파괴되고 현재는 대웅보전과 천왕전만 남아 있다.4 보녕사 수륙화는 근대까지 보녕사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중일전쟁의 여파로 여러 기관을 거쳐 山西博物院이 소장하게 되었다.5 정확한 조성 연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보녕사 수륙화는 명 황실에서 변방인 산서성에 하사한 작품으로 중국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보녕사 수륙화는 여래도 9폭과 보살도 10폭, 아귀도 1폭을 비롯해 명왕도 10폭, 나한도 8폭, 보살·天神·地神·水神·冥府十王 등 다양한 존격이 표현된 69폭, 往古人物을 그린 12폭, 지옥과 孤魂을 표현한 17폭 등 모두 136폭으로 구성된다(Fig. 1). 130폭이 넘는 이 불화는 민간 발원 수륙화와 비교할 때 섬세한 표현과 장식성이 돋보인다. 불보살을 비롯해 명왕, 천신, 나한의 옷에는 다양한 문양이 시문되어 있고 금니 표현도 다수 확인된다.6 존상의 얼굴은 이마와 코, 턱 등을 중심으로 밝게 명암이 표현되어 있으며 윤곽은 먹과 붉은 선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전체 136폭 가운데 여래도 9폭과 보살도 10폭, 아귀도 1폭의 경우 상단에 별도의 방제가 없고 중앙에 정면형의 존상이 결가부좌를 한 모습이다(Fig. 2, 3). 나머지 불화는 상단 향좌측과 향우측에 ‘左’나 ‘右’로 시작하는 방제가 적혀 있다. 그 뒤로는 1부터 59까지 숫자가 매겨져 있어서, 법회에서 좌우 양측으로 순서를 나누어 진설했음을 알 수 있다(Figs. 4,5,6,7,8,9). 대부분 송대부터 이어진 구름 속에서 하강하는 전형적인 수륙화 구성과 인물 양식을 갖추고 있다. 좌·우 6번부터 9번에 해당되는 나한도만 수륙화 형식이 아닌 일반적인 나한도의 구성을 보인다(Fig. 10).7 방제 순서대로 수륙화를 좌우에 배치하면 모든 존상이 중앙을 향해 나아가는 듯한 모습이 된다. 이 광경은 마치 법회 공간에 신이 강림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은 136폭만 전하지만 원래 보녕사 수륙화의 구성은 이보다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좌, 우로 적힌 번호 가운데 일부 번호가 결실되거나 또는 중복된다(table.1). 《水陸道場神鬼圖像》에도 150점의 삽화가 그려진 것을 보면 보녕사 수륙화 역시 일부 화폭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天地冥陽水陸儀文』을 보면 불보살을 제외하고 좌우 60位씩 水陸牌位가 배치되기에 보녕사 수륙화도 방제가 적힌 불화가 좌우 각각 60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8 좌우 대칭을 맞추어 진설되었던 것으로 가정한다면 원래 보녕사 수륙화는 정면형의 불보살을 그린 불화 20점, 방제가 있는 불화가 좌우 각각 60점씩 120점, 아귀를 그린 불화 1점 등 적어도 141폭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9
보녕사 수륙화는 섬세한 표현과 더불어 명대 제작된 축 형식의 수륙화 가운데 전체 구성이 가장 잘 남아 있기 때문에 명 成化 연간(1465~1478)에 판각된 《水陸道場神鬼圖像》과 함께 15세기경 명대 수륙화의 전모를 살펴볼 수 있다는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졌다.10 기존 연구에서는 다른 수륙화와 양식을 비교하거나 주변 정황을 중심으로 보녕사 수륙화의 제작 시기와 제작 원인, 제작 주체 등 조성 맥락을 중점적으로 논의해왔다.11 이 수륙화는 중국 남송대 수륙화의 전통적인 구성을 이으면서, 《水陸道場神鬼圖像》 삽화를 바탕으로 도식화되는 청대 수륙화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중국 수륙화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녕사 수륙화에는 다양한 시각적인 도상 외에도 그을음과 연기 자국 등 오랜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제작된 이후 모종의 목적으로 여러 번 사용되었음을 암시한다. 작품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되고, 사용자들은 기존과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작품을 경험하기도 한다. 특히 오랜 시간 다수의 사용자가 접근할 수 있는 불교미술은 제작 뿐 아니라 사용의 맥락까지 살펴봐야 한다.12 그런 관점으로 볼 때 보녕사 수륙화와 함께 전하는 문서는 보녕사 수륙화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Ⅱ. 명 황실의 보녕사 수륙화 下賜

1. 보녕사 수륙화의 하사

보녕사 수륙화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이 불화의 하사에 대한 것이다. 수륙화와 함께 전하는 1705년 중수문과 1815년 중수문에는 수륙화가 어떻게 사찰에 전해지게 된 것인지 그 내력이 적혀 있다.
恒城(山西省 大同市 옛 지명)에 군사가 주둔(駐防)한 이래로 무릇 이 절은 오래된 사찰이었다. [사찰의] 이 곳 저 곳이 빛나고 밝아서 보녕사는 더욱 아름다웠다. 사원 내에는 변방을 진압하기 위해 하사한 수륙화 1堂이 전한다. 묘한 상은 장엄되어 있고 필적이 예사롭지 않다. (하략)13
1705년 중수기록에는 변방을 진압(鎭邊)하기 위해 하사되었다고 적혀 있으며, 1815년 중수 기록에도 역시 이 수륙화가 변방 진압을 위한 하사품이라고 되어 있다.14 누가 언제 하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사역에 남아 있던 석각비 「敕賜寶寧寺記」(1474)에 景泰 乙亥년(1455) 착공이 시작되어 天順 庚辰년(1460)에 완공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수륙화 하사의 상한 연대는 1460년으로 추정된다.15
보녕사 수륙화의 제작과 하사가 이루어진 시점이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명대 궁정화가가 조성한 기년명 수륙화와 비교해서 그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보녕사 수륙화의 <비로자나불도>(Fig. 11)를 경태 5년(1454) 명 황실 발원 <비로나자불도>(Fig. 12)와 비교해보면 마치 같은 초본을 사용한 것처럼 세부적인 표현이 동일함을 알 수 있다.16 티베트 영향이 나타나는 육계를 제외하고 부처 상호, 대좌 아래로 떨어지는 대의 자락과 覆肩衣 끝단의 용 문양, 대좌와 배경 장식 모두 거의 동일하다. 성화 13년(1477) 명 황실 발원으로 추정되는 <약사십이신장도>(Fig. 13)에서도 경태 5년명 수륙화의 특징이 그대로 확인되기 때문에 보녕사 수륙화는 이 두 불화와 인접한 시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7
또한 보녕사 중수 기록을 바탕으로 본다면 명 황실 주도로 15세기 중후반경에 조성되어 하사 상한 시기인 1460년부터 1474년 사이에 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18 1474년 「敕賜寶寧寺記」에는 사찰 완공 후 비문이 흩어져 결실이 바로 서지 못했고, 命에 따라 사찰을 중수하고 석공에게 비를 세우게 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석각비의 인명 일부가 훼손되었지만 수비군 玉林衛의 무관직을 비롯해 환관기구 중 하나인 禦馬監의 太監인 常正이 적혀 있다.19 수도인 北京과 한참 떨어진 변방 사찰 보수에 태감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다. 특히 상정 이름 앞에는 황제의 명으로 파견되었음을 의미하는 ‘欽差’가 적혀 있어 태감의 사적인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보녕사 수륙화처럼 100폭이 넘는 불화 제작은 변방 민간의 재원으로 충당하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20 또한 민간 발원 수륙화에서는 불보살이라고 하더라도 단색과 명암으로만 장식된 경우가 많다. 주요 존격 뿐 아니라 일반 재가신도의 옷에도 섬세하게 문양이 표현되어 있는 보녕사 수륙화는 화폭에 표현된 섬세한 필력과 전체 규모로 보아 후대 기록에 전하는 것처럼 명 황실에서 발원한 불화로 보인다. 「敕賜寶寧寺記」 이후 보녕사와 명 황실의 관계가 확인되지 않기에, 1474년 태감 상정이 황실의 명으로 보녕사를 중수하러 왔을 때 수륙화가 함께 하사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2. 황실 주도 水陸會의 목적과 수륙화 하사의 정치적 의도

그렇다면 왜 수도인 북경 인근이 아닌 변방에 대규모 수륙화가 하사되었던 것일까. 보녕사 수륙화가 하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15세기 중후반경에는 몽고 지역의 유목 부족이 보녕사가 위치한 山西省 右玉縣을 위협했던 시기였다. 이곳은 만리장성 경계선과 근접한 군사지역이었으며 인근에는 ‘오랑캐를 죽이는 입구’라는 뜻의 殺胡口라는 협곡이 있었다(Fig. 14). 명나라는 초기부터 몽고 지역의 유목 부족을 경계해서 인근에 大同右衛, 玉林衛, 右玉林衛를 설치하여 방어진을 구축했다. 하지만 명의 북방 견계선은 몽고 내부에서 이어진 瓦剌과 韃靼의 세력다툼으로 위협받았다. 특히 正統 14년(1449)에는 瓦剌의 수장 也先(1407~1455)이 山西省 大同을 급습했고, 이에 正統帝(이후 天順帝, 재위 1435~1449, 1457~1464)가 親征에 나섰지만 포로로 잡히는 土木의 변이 발생했다. 1년 만에 전 황제가 살아 돌아오기는 했지만 몽고 부족과의 전쟁으로 이복형제간에 황제 자리가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있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변방에서는 1473년까지 크고 작은 전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21 남아있는 문헌 자료와 역사적 정황, 우위성의 지리적 특수성을 생각한다면, 산서 북방 지역의 만리장성과 인접한 보녕사에 수륙화를 하사하고 법회를 개최하여 전쟁으로 혼란했던 民心을 안정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륙회는 원래 아귀와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천도 의식이지만 황실에서 정기적으로 주최했던 수륙회는 정권 안정이 주된 목적인 경우가 많았다.22 오대에는 전쟁 중에 죽은 병사를 위로하기 위해서도 수륙회가 설행되었다.23 1048년에는 遼와의 전쟁으로 죽은 군사를 기리며 普安院에서 수륙회가 열렸고, 1070~1080년대에는 西夏와의 전쟁으로 죽은 군사를 기리며 수륙회가 거행되기도 했다.24 1127년 여진족과의 전쟁 이후에는 군사들을 위한 의례가 정기적으로 열렸고, 황실은 浙江省 金山寺의 수륙의례를 후원하게 되었다. 황실의 금산사 수륙회 후원 전통은 원과 명초까지 이어졌다.25 명 洪武帝(재위 1368~1398)는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죽은 영혼을 구제하고자 재위한 1368년부터 지속적으로 수륙회를 비롯해 널리 천도한다는 의미의 廣薦法會를 열었다.26 중국 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건국 초기에 고려 왕족의 천도를 위해 정기적으로 水陸齋를 개최했다.27 민간에서도 자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거나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있으면 그 원혼이 현실에 화를 불러온다고 여겼고, 황제가 나서서 영혼을 위로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처럼 전쟁으로 나라에 큰 혼란이 일어났던 때 체제를 정비하고 안정시키고자 국가적으로 수륙회가 거행되었다.
보녕사에 수륙화를 하사한 것은 민심 안정에 더해 명 황실이 여전히 건재함을 변방에 보여주려는 정치적 의도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대 황실에서 개최한 수륙회 가운데 이와 유사한 사례가 확인된다. 명 홍무제는 집권 초부터 극단적으로 사찰을 통합하고 불교를 규제했기 때문에 그가 거행한 수륙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불교적 목적보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짙었다. 洪武 元年(1368) 대장군 徐達(1332~1385)의 원 수도를 정복한 후에는 불교의 사무를 관리하는 善世院에 명하여 수륙회를 거행하였고, 홍무 5년(1372) 정월 광천법회에서는 홍무제가 군신을 이끌고 직접 예불에 참여했다. 예불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달은 북쪽으로 이동한 北元을 정벌하기 위해 황명을 받아 다시 출정에 나서게 되었다.28 경태 5년(1454) 8월에 완성된 황실 발원 수륙화 역시 景泰帝(재위 1449~1457)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조성되었다(Fig. 15). 경태제 재위 기간에는 비정상적인 추위와 가뭄,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1453년에는 전 황제(정통제)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후계로 세웠던 아들 주견제(朱見濟, 1448~1453)가 사망하였다.29 포로로 잡혔다가 1년 만에 돌아온 전 황제(정통제)가 太上皇이 되어 살아있었던 만큼 경태제의 황제 자리는 위태로웠다.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수륙화를 펼쳐서 만든 장엄한 광경을 군신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지 않았을까. 보녕사 수륙화 역시 황실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변방을 진압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100폭이 넘는 평면의 이미지는 신을 소환하는 2차원의 장소이면서 황실의 권력과 힘이 미치는 범위를 재확인하는 공간이었다.

Ⅲ. 1704년 1차 보녕사 수륙화 重修

1. 右衛城 권력 집단의 변화와 1차 중수

보녕사 수륙화의 중수는 강희 甲申년(1704)에 이루어졌다. 중수가 이루어진 이듬해인 1705년에 지역의 문묘 제사를 주관하고 교육을 담당하는 敎諭였던 鄭祖僑가 중수 정황을 적은 문서와 여기에 자금을 보탰던 사람들의 명단을 두 장으로 나누어 작성했다. 이 두 장의 중수문은 동일한 중수 기록을 전하고 있지만 시주자의 신분에 따라 내용이 다르게 작성되어 있다. 하나는 팔기군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Fig. 16), 다른 하나는 大同府 관직에 있는 사람과 紳士·상인 등 일반 공양자가 기록된 문서이다(Fig. 17).30
먼저 첫 번째 중수문에는 보녕사의 주지였던 廣居가 장군, 都統과 여러 사람을 모으고 八旗의 여러 관직에 있는 자들이 재물을 내어 불화를 중수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31 하단에는 840명이 넘는 팔기군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적힌 費揚古는 建威將軍이자 歸化城將軍으로 奉國公에 봉해졌던 청 황실 宗室이었다. 뒤이어 副都統 직위에 있던 禪布와 拜音布가 적혀 있다. 그 뒤로는 일렬로 鑲黃旗協領, 正黃旗協領, 正白旗協領, 正紅旗協領, 鑲白旗協領, 鑲紅旗協領, 正藍旗協領, 鑲藍旗協領, 火器營協領의 이름이 적혀 있고 마지막으로 八旗佐領, 八旗驍騎校, 鐵匠, 甲兵의 무관직과 그에 해당되었던 사람들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다. 팔기군 공양자 명단에 기재된 인물의 인적사항은 산서 지역의 지방지 『朔平府志』(1733)와 『山西通志』(1734)에서 살펴볼 수 있다. 문서에서 첫 번째로 적힌 費揚古는 宗室 費揚古로 표현되는 愛新覺羅 費揚古였다. 『淸史稿』에는 그가 청 太祖의 15번째 아들이었던 豫親王 多鐸(1614~1649)의 아들이라고 기재되어 있다.32 禪布는 정람기 만주인으로 1699년에 좌익부도통으로 부임했으며 拜音布(白音布)는 1695년에 우익부도통으로 부임했다. 팔기군 협령들의 경우 발음에 의거하여 적었기 때문에 지방지에 기록된 한자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부임 시기과 소속으로 각각을 대응시킬 수 있다.33
보녕사 수륙화 중수에 팔기군의 장군과 부도통, 협령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점은 수륙화 하사 이후 100여 년이 지나며 이 지역에 나타난 권력 집단의 변화를 보여준다. 팔기군은 만주족의 부락 전투 체계를 기반으로 창설된 군사 및 행정 제도였다. 도성이나 전국의 전략적 요충지, 교통의 중심지에는 팔기군이 배치되었고 이들은 국가 간 전쟁이나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동원되었다. 내몽고 지방 요충지에 주둔하는 팔기군은 八旗駐防으로 구분되었으며 이들은 녹봉과 銀兩을 지급 받는 직업군인이면서 정착 지역에서 농업이나 수공업 분야에 종사하기도 했다.34
보녕사 수륙화의 두 번째 중수문에는 중수에 참여한 또 다른 집단, 신사와 상인이 강조되어 있다. 중수문에는 중수를 주도한 보녕사 주지 廣居의 忠心과 성품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뒤이어 장군과 더불어 大人의 주도로 성 내 신사와 商賈合會에게 재물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하단에 붙은 공양자 명단에는 克什圖(欽差督理殺虎口外驛傳道事戶部員外卽加二級)와 뒤이어 大同府 관직에 있던 萬密達·孫塔·佛保 등을 비롯해 丙子年에 과거에 합격한 賈維城, 壬午年에 합격한 정조교 본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35 앞선 중수문에서 팔기군의 이름이 위계에 따라 나열되어 있다면, 이 중수문에는 관직에 있는 이들 뒤로 지역 내 모든[闔境] 신사와 商賈闔會에서 재물을 낸 이들의 이름이 시주한 금액에 따라 열거되어 있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右玉縣에서 팔기군은 중요한 권력 집단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팔기군이 주둔하게 된 것은 准噶爾의 지도자 噶爾丹(1649~1697)과의 전쟁 준비 때문이었다. 보녕사가 위치한 우위성은 지세가 험난하고 북으로는 만리장성, 동서 양면으로는 산맥, 아래로는 하류가 돌아 흐르는 지형으로 방어에 적합했다. 주변에는 농경지가 있어 병사를 주둔시키기에 좋았으며 내몽고로 진격하기에도 용이했다. 康熙帝(1661~1722)는 전쟁을 앞두고 1694년에 팔기군을 주둔시켰으며, 대장군 棟鄂 費揚古를 우위성에 부임시킨 뒤 西路軍의 총수로 임명하여 군사를 모으도록 지시하였다.36 『朔平府志』에 기록된 1694년 右衛八旗駐防의 인원은 5천명이 넘는다.37 이는 팔기주방의 창설 병력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이었다. 또한 장군이라는 직책 역시 청 전역의 팔기주방 가운데 9명에서 11명 정도 밖에 없었던 직위였다. 중수문에 기록된 費揚古는 23년 동안 건위장군으로 재임했으며, 내몽고 親征 당시 강희제는 費揚古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38 다른 주방과 달리 우위성에서는 팔기군의 거주지가 한족 거주지와 구분되어 있지 않아서 오랜 시간 이 지역에서 중요한 권력자로 군림했던 費揚古의 영향력은 지대했을 것이다. 또한 중수에 참여한 공양자들의 이름과 『朔平府志』에 기록된 군사 정보를 분석해보면, 대부분이 강희제의 西路軍으로 내몽고 전쟁에 참여했던 군사였음을 알 수 있다.39

2. 八旗駐防의 영향력 선전

팔기군의 보녕사 수륙화 중수는 이처럼 지역의 권력 집단이 종교 시설의 여러 활동에 관여하는 현상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명·청대에는 지역에서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보하고 이를 과시하려고 사원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신사들은 한때 저명했던 사원을 지역의 명승지로 만들어 자신의 지역적 배경을 만들고자 했다.40 유서 깊은 사원의 존재는 지역의 문화적인 우월성을 증명해 주었다. 인맥을 바탕으로 활동하는 상인 집단 역시 자신들이 모시는 수호신의 사원을 상인의 이해관계를 위한 장소로 변모시켰다.41 상인들의 사회적 공간으로 활용되는 사원의 모습은 산서 지역에서도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42
右玉縣에서도 이와 유사한 후원 방식이 확인된다. 팔기주방이 右玉縣에 주둔하며 군사 업무 뿐 아니라 지역의 종교 시설 중수에 지속적으로 관여한 모습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보녕사 수륙화 외에도 右玉縣 지역에 현재 남은 堡나 廟宇의 비문에는 당시 주둔하던 군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馬營河村의 五聖廟의 중수에도 이들이 관여하였다.43 雍正 연간(1722~1735)에는 당시 건위장군이었던 宗室 申慕德이 朔平府 北嶽廟의 중수문을 작성하기도 했다.44 팔기군 팔백 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과 지역 내 모든 신사와 상인의 참여 명단은 순수한 공덕의 강조라기보다 중수 불사를 주도한 군사 집단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녕사는 18, 19세기까지 하사받은 수륙화로 인해 황실과 관련된 장소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더해 수륙화가 鎭邊 목적으로 하사되었다는 것은 보녕사가 위치한 우위성의 군사적인 기능을 암시했기에 宗室을 필두로 한 군사 집단의 정체성을 선전하기에도 적합했다. 보녕사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대규모 수륙화 중수 사업 역시 지역 권력 집단의 이익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공공사업이지 않았을까. 또한 보녕사는 우위성의 문무관원이 朝賀하는 右玉縣의 공적인 장소이기도 했다.45 중수문에서 수륙회 設行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수륙화 중수 이후 법회도 함께 열렸을 가능성이 크다. 우위성 사거리 중심부 근처에 위치하여 지역민의 시선이 집중되는 보녕사에서 수륙회가 개최되었다면 수륙화 중수에 참여한 후원자 계층의 위상은 더욱 주목받았을 것이다(Fig. 18).
중수문이 보녕사 수륙화 한 폭과 거의 비슷한 크기로 장황되어 전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보녕사에서 열렸을 법회에 100여 폭의 수륙화와 두 폭의 중수문이 함께 걸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법회가 열릴 때만 진설되는 수륙화와 달리 중수를 기록한 문서는 사찰에 상시 걸렸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선전 효과는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두 번째 중수문에만 시주받은 금액이 적혀 있기 때문에 중수에 필요한 대부분의 재물은 신사와 상인 집단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費揚古를 비롯한 팔기군은 재정적인 부분보다는 지역에 군림하는 지도자로 중수 사업에 권위를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팔기군 명단으로만 구성된 중수문은 지역의 권력 계층으로 팔기군이 수행해야 했던 사회적 역할을 보여준다. 보녕사 수륙화 중수는 참여한 각 집단의 소속감을 증대시키는 방법이자 동시에 축제처럼 열리는 법회를 통해 지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영향력을 공고히 다지고 널리 선전하는 매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Ⅳ. 1815년 2차 보녕사 수륙화 중수

1. 연례 행사로 확장된 수륙회

2차 중수 기록에 따르면 19세기 보녕사 수륙화는 18세기와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게 된다. 가경 20년(1815)에 보녕사 주지 源緖가 다시 표구한 일을 기록한 이 중수문에는 수륙화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Fig. 19) 가경 연간의 중수문에는 이전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사항이 추가되어 있다. 강희 연간의 중수문에는 장군의 공적을 칭송했을 뿐 수륙화를 언제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가경 연간의 중수문에는 수륙회의 원래 목적과 관계없는 석가모니의 탄신일인 浴佛節에 수륙화를 진설하여 의례를 행하고 신도들에게 시주를 받는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46
시아귀회에서 시작되어 황실의 장례 의식으로 설행되던 수륙회는 점차 그 목적이 분화되었다. 이런 변화는 북송부터 확인된다. 洪邁(1123~1202)가 편찬한 『夷堅志』에는 퇴마의식의 하나로 수륙회가 거행된 사례가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영혼 협상의 수단으로 수륙회가 등장한다.47 송대 뿐 아니라 명말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수륙회가 이용되었다. 명말 새로운 수륙의궤를 유행시킨 雲棲 祩宏(1532~1612)은 심각한 가뭄으로 고생하는 마을을 위해 기우제를 겸한 수륙회를 열었고 때로는 호랑이를 교화시키기 위해서 시식 의례를 개최하였다.48 이밖에도 사원의 전각, 다리, 제방 건설을 기념하거나 황태후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한 수륙회도 있었다.49 이처럼 수륙회의 목적은 망자 영혼 구제를 넘어 다양해 졌지만 기본적으로는 특정 날짜에 개최되거나 매년 정기적으로 열려야 하는 의식은 아니었다.
또한 민간에서 수륙회가 설행되면서 영혼을 위로하는 대표적인 의례 중 하나인 盂蘭盆齋와 혼재되는 모습도 나타났다. 원래 수륙회는 비정기적인 행사라는 점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7월 15일에 개최되는 우란분재와 구분된다.50 하지만 청대가 되면서 우란분재와 점차 혼재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增修敎苑淸規』에 따르면 수륙당이나 참회를 위한 전각에서 우란분재가 열렸고,51 山西省 지역에서는 7월 15일 中元節에 수륙회를 열어 망자를 천도하였는데 이를 盂蘭盆會라고 지칭했다.52 또한 19세기 보녕사의 예처럼 욕불절에도 수륙회가 개최되었다. 명말 청초에 활동한 임제종 승려 道忞(1596~1674)은 4월 8일에 수륙도량을 9일 밤낮으로 열어 민생을 어지럽히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기록하였다.53 금지령을 통해 역으로 청대 초기에 이미 욕불절에 수륙회가 함께 열리고 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 사찰의 財源, 보녕사 수륙화

매년 석가모니의 탄신일 법회에 걸렸던 보녕사 수륙화의 모습은 변화한 사찰의 상황과 수륙회의 변화를 반영한 현상으로 보인다. 청말 변경 지역의 사묘는 정기적인 수입을 얻기 어려웠고 사묘에서 모시는 신의 탄신일 법회는 사묘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보녕사와 같은 지역 사원은 특별한 고정 수입이 없었고 사원 운영은 종교적인 의례를 제공하고 받는 보수나 신도의 시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 사찰은 특별한 고정 수입 없이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종교적인 의례를 제공하고 받는 보수가 사찰 재정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큰 규모의 사찰이 아니면 대부분의 중소 사찰들은 신도의 시주에 의지했다. 농촌 지역의 사찰은 지방지에 따로 기록될만한 규모의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소유한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 만으로 사찰을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도들이 향과 기름 구입비로 기부하는 돈, 종교적인 의식을 제공하고 받는 보수에 의지해야 했다. 河北省 定縣의 승려들은 평상시에 사묘의 전답에서 농사를 짓고 가끔 喪家에 불려가 장례 의식을 해주었다고 한다.54 이렇듯 사묘에서 제공하는 의식이 사원의 중요한 재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륙회는 사원의 중요한 경제 활동의 하나였다. 근대 승려 法舫(1904~1951)은 중국에 있는 모든 절들이 스스로를 선종이라고 지칭하지만 경전을 외우고 참선하거나 수륙을 위한 내단으로 변했고 승려들은 스스로를 선승이라고 말하지만 속죄 의식을 전문으로 하는 종교인으로 전락했음을 지적한다.55 雲棲 祩宏의 『竹窓隨筆』에는 세속적인 목적으로 수륙회가 이용되는 상황이 훨씬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음이 나타난다.56
山西省 지역의 수륙회 비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다른 지역 수륙회에 대한 기록을 통해 수륙회가 얼마나 화려했고 거행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청말에 7일간 열리는 수륙회의 기본적인 가격은 200냥이었다. 청 말에 출판된 소설을 보면 수륙회를 연 사람이 첫날에 銀子 500냥을 절에 희사하는 장면이 나온다.57 은과 동전의 가치가 수시로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 청나라에서 은 1냥은 동전 1,000文의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은자 500냥은 동전으로 따지면 500,000문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당시 청대 궁정 화원의 월급은 11냥밖에 되지 않았다.58 일반 신도들은 함께 돈을 모아야만 수륙회를 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에 규모가 작은 사원은 발원자와 비용을 협상했지만 대규모 사원의 경우 5,000원까지 올려서 요구했다.59 항주의 한 사원은 放焰口가 열리는 2주간 가짜 돈을 태우는데 매일 1,500원이 필요했다고 한다.60
19세기가 되면 右玉縣에는 수륙회 같이 비용이 많이 드는 의식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적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1737년 대부분의 군사 병력이 수원성으로 옮겨지면서 지역의 중요한 후원 계층이 사라졌고, 보녕사 재정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팔기주방은 군사집단이었지만 이들의 주둔이 변방 지역의 군수 시장 발달을 촉진했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 경제적으로 중요한 집단이었다. 1년에 약 50만 석의 군량을 받는 팔기군은 녹봉으로 생필품을 구매하며 지역의 중요한 소비계층이 되었고, 지역 상인은 군영의 무역에 의지했다. 우위성 근처 살호구에도 많은 상인이 모여 있었다.61 팔기주방의 이동은 자연스럽게 우위성 상인 집단의 이주를 불러왔을 것이다. 18세기 중반경 보녕사가 있던 우위성에서 그나마 부유했던 군사 집단과 상인 집단이 단체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주도적인 지배 집단이 부재했던 19세기 초 삭평부에서 보녕사 수륙화는 사원의 재원이 되었다. 19세기 보녕사는 공양자를 위해 수륙회를 거행하기보다 공양을 받기 위해 수륙회를 열었다. 중수제기에 기록된 “사방에서 시주가 모두 모이며 우러러 배례하였다”는 욕불절에 수륙화가 어떻게 기능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욕불절은 사람을 끌어 모아서 한 번에 많은 시주를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사묘에서 모시는 신의 탄신일에는 사람들이 모이며 香會가 연일 이어졌고 4월 8일이 되면 유명한 사찰에는 士女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62 山西省의 다른 지역에는 같은 날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는 욕불 의식 뿐 아니라 다른 신들의 제사도 열렸다. 山西省 五峯山의 聖母祠나 唐太宗廟, 巾山神廟에도 매년 4월 8일 각 사묘의 신을 위한 의식이 있었다.63 삭평부에서도 4월 8일에 聖母廟에서 자손의 복을 빌었다.64 이처럼 욕불절은 다른 사묘의 종교 활동도 함께 이루어지는 날이었기 때문에 보녕사에 걸린 수륙화는 여러 종교 행사 가운데 보녕사의 의식을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몽고와의 전쟁도 끝났기에 우위성에서 욕불절에 열렸던 수륙회는 망자 구제의 의식이라기보다 지역의 평안과 主神인 석가불의 탄생을 기념하며 사람을 끌어모으는 법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역에서는 종교적인 정체성보다 신이 가진 속성이 했기에 불교, 유교, 도교, 민간의 신이 혼합된 수륙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과 여러 직업군의 신앙처가 될 수 있었다. 수륙화에 담겨진 무수히 많은 기능적인 天神과 地祇은 우위성의 군인, 관원, 상인, 농민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사찰에 걸린 불화는 여러 신들이 강림하는 모습을 재현하였다. 부처와 보살, 나한, 천왕, 여러 신중과 往古人物, 잔인한 지옥 장면으로 구성된 수륙화의 나열은 시각적으로 사람을 매혹시킬 뿐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과 관심을 이끌어냈을 것이다. 특히 석가모니의 탄신일인 욕불절 기간의 수륙화는 이런 관심을 더욱 고조시켜 사람들을 집결시켰고 보녕사는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많은 재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Ⅴ. 맺음말

보녕사 수륙화의 하사와 중수 기록을 바탕으로 수륙화의 의미와 기능이 변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보녕사 수륙화 외 右玉縣 내 인근 지역에 현재 전하는 수륙화가 없기 때문에 하사된 이후 이 수륙화가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수 기록을 통해 명청대에 걸친 보녕사 수륙화의 활용 방식에는 주변 환경의 변화가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전하는 명·청대 수륙화는 주로 민간에서 조성되거나 기록의 부재로 발원자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반면 명대 황실과의 관련성을 바탕으로 청대까지 지역 내 주요 집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보녕사 수륙화는 중수에 참여한 집단의 특성, 제작 이후 수륙화 사용의 맥락까지 복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본 연구에서는 보녕사 수륙화 제작 이후 사용의 맥락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았다. 미술사에서 작품의 원래 조성 의도와 맥락을 추론하는 연구는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제작 시점을 중심으로 할 경우, 제작 이후 수백 년 동안 작품이 사용되는 긴 시간을 간과하게 만든다. 특히 보녕사 수륙화처럼 이후 기록이 풍부한 경우 새로운 관점과 시각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보녕사 수륙화에 대한 기록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흐름에서 수륙화의 역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원래의 하사 의도와 다르게 시대가 지나자 보녕사 수륙화는 국가 중심부 권력보다 지역 집단의 결집이나 사찰의 이익을 위한 매개체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보녕사 수륙화의 시간적인 층위를 살펴보면서 명대부터 청 말에 이르기까지 한 세트의 그림이 정치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변화에 맞게 수용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Notes

1) 본 연구에서 주로 다루는 명청대 문헌에는 水陸會, 水陸大會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여기서는 ‘水陸會’로 지칭한다. 수륙회는 水陸道場, 水陸聖會, 水陸佛事 등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며, 한국에서는 주로 水陸齋라고도 불린다. 수륙회의 명칭과 기본 내용에 대해서는 望月信亨 主編, 『(望月)佛敎大辭典』(東京: 世界聖典刊行協會, 1974), p. 2878; 牧田諦亮, 「水陸會小考」, 『中國佛敎史硏究』 卷2 (東京: 大東出版社, 1981-1984), pp. 213-235; Daniel B. Stevenson, “Text, Image, and Transformation in the History of the Shuiliu Fahui, the Buddhist Rite for Deliverance of Creatures of Water and Land,” in Cultural Intersections in Later Chinese Buddhism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 pp. 30-70; Edward L. Davis, “Appendix: Huanglu Jiao and Shuilu Zhai,” in Society and the Supernatural in Song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 pp. 227-241.

2) 보녕사 수륙화 전체 사진은 山西省博物館 編, 『寶寧寺明代水陸畫』(文物出版社, 1988) 참고. 2019년부터 2020년까지 20점에 대한 보존처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張慧敏, 「山西博物院藏右玉寶寧寺水陸畫保護與修復探討」, 『明日風尚』 18 (2021), pp. 79-81 참고.

3) 보녕사 수륙화 관련 중국 연구는 吳連城, 「山西右玉寶寧寺水陸畫」, 『文物』 Z1 (1962), pp. 88-90; 李德仁, 「山西右玉寧寺元代水陸畫論略」, 『美術觀察』 第8期 (2000), pp. 88-90; 陳姿妙, 「明代山西寶寧寺水陸畫探討—以佛教題材為例」, 中國文化大學 碩士論文 (2007); 趙慶生, 「山西右玉寶寧寺水陸畫造型藝術再認識」, 『文物世界』 第2期 (2007), pp. 59-63; 趙慶生, 「傳承文化遺產弘揚民族藝術—寶寧寺明代水陸畫臨摹劄記」, 『文物世界』 第5期 (2012), pp. 60-63; 陳俊吉, 「寶寧寺水陸畫裝飾風格與粉本傳承研究」, 『史物論壇』 第7期 (2008), pp. 127-205; 陳俊吉, 「山西寶寧寺水陸道場繪畫研究」, 國立臺灣藝術大學 碩士論文 (2009a); 陳俊吉, 「寶寧寺水陸畫的繪畫製作年代與賞賜年代探究」, 『書畫藝術學刊』 第6期 (2009b), pp. 357-393; 陳俊吉, 「寶寧寺水陸畫的佛與菩薩像之繪畫技法探究」, 『兩岸重彩畫學術研討會』 (2009c), pp. 393-418; 吳承山, 「右玉寶寧寺水陸畫初探」, 『文物世界』 第6期 (2010), pp. 44-47 참고. 기존 한국 연구자의 관련 논문은 金廷恩, 「조선시대 三藏菩薩圖의 기원과 전개 - 중국 明代 水陸畫와의 비교」, 『東岳美術史學』 8 (2007. 6), pp. 125-148 참고.

4) 陳俊吉, 앞의 논문(2009a), pp. 96-101 참고.

5) 1928년 훼손을 염려한 사찰 측이 내몽고의 綏遠城으로 수륙화를 이관했고, 이후 大同雲岡古迹保養所을 거쳐 1955년에는 山西省 文物管理工作委員會 소유로 넘어가며 山西博物院이 소장하게 되었다. 李德仁, 앞의 논문, pp. 88-90; 孔有生, 「山西右玉寧寺水陸畫探究」, 『文物世界』 第5期 (2005), p. 62.

6) 명대 민간 발원 수륙화에서는 불보살을 제외한 나머지 천신의 옷이 강렬한 색과 복잡한 옷주름으로만 장식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륙벽화의 경우 청대가 되면 장식성을 위해 여러 문양이 삽입되는 경우가 있지만 섬세하지 못하고 도식화된 모습이다. 100폭이 넘는 화폭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황실 발원에 비해 민간 발원 수륙화에서는 섬세한 표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폭 이상 확인된 기년명 민간 발원 중국 수륙화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 萬曆 18년(1591) 수륙화(신수13565, 신수15301) 등이 있다. 이외 도록으로 출간된 적은 없으나 중국 山西博物院 소장 강희 8년(1669) 수륙화가 2019년 山西博物院 특별전시에 소개되기도 했다. 추후 중국 내 수륙화 자료가 더 공개된다면 구체적인 양식 비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7) 명 成化 연간(1465-1478)에 판각된 《水陸道場神鬼圖像》에 그려진 나한은 구름 속에서 한 방향을 향해 하강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기에 보녕사 수륙화의 나한도는 일반적인 수륙화의 나한과 다른 구성임을 알 수 있다. 《水陸道場神鬼圖像》의 세부적인 도상과 보녕사 수륙화가 모두 일치하지는 않지만 수륙화로 그려지는 존상 구성은 거의 동일하다. 翁連溪, 李洪波 主編, 『中國佛敎版畵全集』 卷18 (北京: 中國書店, 2014) 참고.

8) 戴曉雲, 『天地冥陽水陸儀文交點』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4) 참고.

9) 보녕사 수륙화의 원래 구성에 대해서는 유수란, 「명·청대 寶寧寺 水陸畫의 후원자와 기능」, 서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16), pp. 10-17 참고.

10) 명 景泰 5년(1454) 발원 수륙화나 1443년 御用監 李童이 궁정 화가를 불러서 조성한 北京 法海寺 벽화와 함께 명대 전기 불화를 대표하는 기준작으로 여겨졌다. 陳俊吉, 앞의 논문(2009a) 참고.

11) 중국 학자의 연구는 대부분 제작 시기를 추정하거나 도상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수준에 그쳐 있다. 다만 대만 학자인 陳俊吉는 戴曉雲의 연구를 바탕으로 수륙의궤에 근거하여 보녕사 수륙화 도상이 『天地冥陽水陸儀文』을 따르고 있음을 밝혔다. 陳俊吉, 앞의 논문(2009a) 참고.

12) 같은 존상을 그린 불화도 공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관자에게 수용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나, 의례와 의식 수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전각 내부와 외부로 이동해 온 조선시대 후기 불화에 대한 연구가 참고가 된다. 정명희, 「이동하는 불화: 조선 후기 불화의 의례적 기능」, 『미술사와 시작 문화』 10 (2011), pp. 100-141.

13) “恒城自駐防以來 凡寺宇古刹 處處煥然 而寶寧寺尤為美備 寺中相傳有 敕賜鎮邊水陸一堂 妙相莊嚴 非尋常筆跡所同…” 「康熙乙酉年重裱題記」

14) “…溯其由來 蓋敕賜以鎮邊疆而為生民造福者也…” 「嘉慶二十年重裱題記」

15) “大同西路右衛城寶寧寺於景泰乙亥請勒 天順庚辰蓋造 碑文既攜,但未果立(중략)命石工修琢高合 擇吉建立 以垂不朽 予故庸書 以此記歲月雲旨 大明成化十年秋月吉旦 承事郎大同府通判淮南曹書.” 「敕賜寶寧寺記」. 해당 원문은 吳承山, 앞의 논문, pp. 46-47 참고.

16) 景泰 5년 수륙화에 대해서는 カロリヌジス.ヴ=ェルマンド(Caroline Gyss-Vermande), 明神洋 譯, 「明, 景泰5年在銘 「水陸齋圖」をめぐる圖像學的考察」, 『佛教藝術』 215 (1994), pp. 104-124 참고.

17) 명대 황실 발원 불화에 대해서는 Marsha Weidner, “Buddhist Pictorial Art in the Ming Dynasty(1368-1644): Patronage, Regionalism & Internationalism,” in Latter Days of the Law: Images of Chinese Buddhism, 850-1850 (Lawrence, KS: Spencer Museum of Art;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4), pp. 51-87 참고. 한편 1609년 慈聖皇太后(1546~1614) 발원 수륙화에서는 존상의 턱이 강조되고 얼굴이 다소 짧아지며 평면적이고 도식화된 신체 표현이 나타난다. 자성황태후 발원 수륙화에 대해서는 首都博物館, 『畫中三千界: 首都博物館館藏明清道釋人物畫像展』(北京: 文物出版社, 2023) 참고.

18) 기존에는 수륙화 하사의 상한 시점인 1460년부터 正統帝(天順帝)의 재위 마지막 해인 1464년 이전에 불화가 하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변방에 계속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발원 주체를 正統帝로 한정지을 단서가 부족하기에 시기를 수정하였다.

19) “欽差分守大同西路御馬監太監常正、 欽差遊擊將軍後軍府督僉事謙、 欽差分守大同西路右參將都指揮使李鎬…” 「敕賜寶寧寺記」.

20) 명 만력 9년(1581) 山西省 聞喜縣 郭氏 일가가 <四天王圖> 1점을 조성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銀五百이었다. 許志平, 『中國佛畫之美 佛陀篇: 善綠無量』 (臺北: 應眞藏, 2006), p. 16.

21) 1473년 명군의 대승으로 이후 13년 동안 북방 경계 지역에서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陳俊吉, 앞의 논문(2009b), pp. 369-375.

22) Phillip E. Bloom, “Descent of the Deities: The Water-Land Retreat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Visual Culture of SongDynasty (960~1279) Buddhism,” Ph.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2013), pp. 153-154.

23) 後晉 天福 7년(942) 高祖(892~942)가 內班衛 延韜를 鎭州(현 하북성 正定)에 보내 수륙단을 세우고 전쟁으로 죽은 자를 구제하도록 하였다. “…七年正月遣內班衛延韜鎮州開置水陸道場.” 王欽若, 楊億, 『冊府元龜』 卷52, 晉高祖 天福 7年 正月.

24) 『續資治通鑑長編』 卷162, 宋 仁宗 慶歷 8年 閏正月 甲辰; 『續資治通鑑長編』 卷389, 宋 哲宗 元佑元年 10月 乙酉朔; 『續資治通鑑長編』 卷273, 宋 神宗 熙寧 9年 2月 辛酉.

25) Bloom, 앞의 논문, pp. 45-48.

26) 광천법회는 널리 초도한다는 의미를 더욱 강조한 것으로, 洪武 元年과 2년에는 冥暘水陸, 水陸會로 기록되나 洪武 3년부터 5년까지는 법회 이름이 ‘廣薦’으로 기록된다. 홍무 4년의 廣薦佛會는 元年과 2년에 수륙회가 거행되었던 蔣山寺에서 열렸다는 기록이 있기에 같은 의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楚石梵琦禪師語錄』 X1420, 71:658c; 『釋教部彙考』 X1521, 77:53b-53c.

27) “上命設水陸齋於觀音見巖三和寺 每春秋以爲常 爲前朝王氏也” 『太祖實錄』, 太祖 4年(1395) 2月 24日

28) 『明史』 卷2 本紀 第2, 太祖二 洪武 5年 正月 甲戌.

29) 토목의 변 이후 경태제 재위 기간 중 발생한 자연재해와 변고에 대해서는 Timothy Brook, The Troubled Empire: China in the Yuan and Ming Dynasties (Cambridge, MA.: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pp. 95-97 참고.

30) 보녕사 수륙화의 전모를 소개한 『寶寧寺明代水陸畫』(1988)에서는 1705년 중수문 중 일부만 소개되어 있다. 2019년 산서박물원 특별전 ‘蓮花與世相’에서 두 점으로 구성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두 중수문을 구분하기 위해 팔기군에 대한 내용을 적은 중수문을 첫 번째 중수문, 일반 공양자 명단이 있는 중수문을 두 번째 중수문으로 나뉘어 분석했다.

31) “恒城自駐防以來 凡寺宇古刹 處處煥然 而寶寧寺尤為美備 寺中相傳有 敕賜鎮邊水陸一堂 妙相莊嚴 非尋常筆跡所同 但歷年已久 而香燭薰繞 金彩每多塵蔽 住持廣居立志重新 已非一日 客歲冬募懇將軍都統諸大人以暨八旗諸公捐資攢裱 俾向之塵封者今則光彩倍增 輝煌奪目矣 欲誌其善 以傳不朽 屬於弁言以記之 至於將軍諸大人之美蹟 別有瑱珉 茲亦不能盡敘耳 時 康熙乙酉季春吉旦 邑人鄭祖僑書.”

32) 『淸史稿』 卷218, 列傳 第5 豫通親王多鐸. 이 費揚古는 그보다 앞서 건위장군으로 임명되었던 棟鄂 費揚古와 구분하기 위해 宗室 費揚古로 기록되었다. 그는 正藍旗 소속으로 1696년(강희 35)에 부임했다. 23년 동안 이 지역에서 장군으로 있었으며 후에 奉國公에 봉해졌다. 비양고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유수란, 앞의 논문, pp. 44-47

33) 위의 논문, pp. 47-48.

34) 팔기제도의 확립에 대해서는 임계순,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2000), pp. 28-26 참고. 팔기주방에 대해서는 마크 C. 엘리엇, 이훈·김선민 옮김,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pp. 253-257 참고.

35) 지방지에서 克什圖과 萬密達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으나, 孫塔, 佛保 등 일부 사람들의 경우 大同府에 부임한 시기와 관직을 찾아볼 수 있다.

36) 『朔平府志』 卷12, 藝文志上, 碑記, 創建朔平府署碑記.

37) 『朔平府志』 卷5, 職官志, 八旗駐防官員.

38) 오카다 히데히로 지음, 남상긍 옮김, 『강희제의 편지』 (경인문화사, 2014), p. 190.

39) 유수란, 앞의 논문, p. 52.

40) 신사 계층과 불교 후원의 관계에 대해서는 Timothy Brook, Praying for Power: Buddhism and the Formation of Gentry Society in Late Ming-Qing Societ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참고.

41) 인맥으로 활동하는 상인에게 지역의 공공사업은 중요한 기회였고, 이들은 지역 사회의 중심이 되는 사원의 대규모 사업을 후원했다. 조영현,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민음사, 2011), pp. 360-366.

42) 산서 상인은 중국 최대의 鹽湖와 관련된 관우 설화를 바탕으로 관우를 財神으로 여기고 관우 사당인 關帝廟를 자신들의 會館으로 삼았다. 오성근 외 지음,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이산, 2007), pp. 568-570.

43) 彭栓紅, 「多元文化共存的邊塞古城: 右衛鎮」, 『山西大同大學學報(社會科學版)』 28卷 6期 (2014), p. 40; 馮俊傑, 劉梅, 「長城要塞殺虎口滿族駐軍修複的明代樂樓」, 『戲劇』 第3期 (2007), pp. 86-97 참고.

44) 『朔平府志』 卷11, 藝術碑記, 重修朔平府北嶽廟碑記.

45) 『朔平府志』 卷4, 建置祠祀. 右玉縣.

46) “…每於歲之浴佛節森然陳設 焚香頂禮 四方檀那咸畢集而瞻拜焉…” 이 중수문은 아직 실물로 공개되지 않았다. 강희 연간의 중수문으로 보아 이 중수문 역시 하단에 시주자 이름이 적힌 축 형식일 가능성이 있다.

47) 洪邁, 『夷堅志』 卷12, 吳旺訴冤; 卷17, 滄浪亭.

48) 운서주굉 지음, 연관 옮김, 「수륙의문」, 『竹窓隨筆』 (불광출판부, 1991), pp. 511-512.

49) Bloom, 앞의 논문, pp. 184-191. 조선 『英祖實錄』의 1753년 기록에 따르면, 청 皇太后 壽宴 후 13省에서 水陸齋를 개최한 기록이 확인된다. 『英祖實錄』, 英祖 29年 1月 11日.

50) 아귀를 위한 의례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우란분재는 목련이 그의 어머니를 餓鬼道에서 구제해내는 『佛說盂蘭盆經』(T685)에서 파생된 의례이고 수륙회는 면연귀왕이 아난에게 나타나서 아귀도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준 『佛說救拔焰口餓鬼陀羅尼經』(T1313), 『佛說救面然鬼陀羅尼神呪經』(T1314), 『瑜伽集要救阿難陀羅尼焰口軌儀經』 (T1318)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51) 수륙회가 盂蘭盆齋의 부분으로 인식되면서 우란분재와 함께 7월 15일로 고정된다. 常建華, 『歲時節日裏的中國』 (北京: 中華書局, 2006), p. 165. 중원절, 7월 15일의 수륙회는 근대기까지 이어진다. Holmes Welch, The Practice of Chinese Buddh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pp. 185-187.

52) 『(光緖)山西通志』 卷99, 風土記上, 右民俗.

53) “上于庚子孟春 爰下罪己之言 一切修禳諸事敕俱停止 特於四月八日嚴修水陸道場九晝夜 以忞生遐陬未之或見也” 道忞, 『布水臺集』 卷4.

54) 양경곤 지음, 중국명저독회 옮김, 『중국사회 속의 종교』 (글을 읽다, 2011), pp. 460-462.

55) 牧田諦亮, 앞의 논문, pp. 213-214 재인용.

56) “…而敢建道場者 化募資費 累月累年始克成就 陳設繁文 以致士女老幼紛至沓來 如俗中看旗看春 交足摩肩 男女混亂 日以千計….” 운서주굉, 앞의 책, pp. 511-512.

57) 李寶華, 『官場現形記』 卷38.

58) 朴正原, 「朝鮮前期 水陸會圖 硏究」, 『美術史學硏究』 270 (2011. 6), p. 44, 각주 25 재인용.

59) 위의 책, pp. 190-191.

60) H. C. DuBose, Dragon, Image, and Demon: the Three Religions of China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London: Partridge, 1886), pp. 459-461.

61) 우위성 근처의 살호구는 명대부터 말 교역이 활성화 되어 있었고 강희제 재위 동안에는 전시 대비로 세금을 면제받기도 하였다(『聖祖仁皇帝實錄』 卷44, 康熙 13年 正月 辛巳). 右玉縣의 중요한 소비 계층으로 활동한 팔기군에 대해서는 段友文, 张鑫, 「多元文化視野下邊關古鎮保護模式研究—以山西右玉縣右衛鎮爲例」, 『西北民族研究』第4期 (2013), pp. 136-138 참고.

62) 『(同治)徐州府志』 卷11.

63) 『山西通志』 卷165, 166, 167.

64) 『朔平府志』 卷3, 方與風俗, 齊.

Fig. 1.
山西博物院 특별전 ‘蓮花與世相’ 전경 View of the Shanxi Museum’s special exhibition “Shanxi Museum’s Col lection of Shuilu Religious Paintings of Qing and Ming Dynasties”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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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作家未詳, <觀音菩薩圖> Unidentified artists, Avalokiteshvara,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26× 62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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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作家未詳, <鬼魂圖> Unidentified artists, Hungry Ghosts,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05×61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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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作家未詳, 〈右第十九行日月前救兵戈難摩利支天諸神眾〉 Unidentified artists, Marici,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18×62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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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作家未詳, <右第二十四主風主雨主雷主電風伯雨師眾> Unidentified artists, Deities in Charge of Wind, Rain, Thunder and Ligntening,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16.5×61.5 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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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作家未詳, <右第四十三起教大師面然鬼王眾〉 Unidentified artists, Great Monk Qijiao and the King of the Ghosts Mianran,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17×60.5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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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作家未詳, 〈左第十三天藏菩薩〉 Unidentified artists, Divyagarbhah Bodhisattva,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20×61.5 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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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作家未詳, <左第二十一北極紫微大帝〉 Unidentified artists, Deities of the Polar Star,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17×60.5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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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作家未詳, <左第四十七往古帝王一切太子王子等眾〉 Unidentified artists, All Emperors and Crown Princes of Ancient Times,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18×61.5 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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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作家未詳, <右第九阿氏多尊者荼畔吒迦尊者〉 Unidentified artists, Sixteen Arhats (Ajita and Cudapanthaka),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20×61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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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作家未詳, 〈毘盧遮那佛圖〉 Unidentified artists, Vairocana, ca. 1460-1474, Ming, Colors on Silk, 148×76 cm,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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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作家未詳, 〈毘盧遮那佛圖〉 Unidentified artists, Vairocana, 1454, Ming, Colors on Silk, 154.7×96cm, Spencer Museum of Art (ⓒ Spencer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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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作家未詳, <藥師十二神將圖> Unidentified artist, Bhaishajyaguru with Bodhisattvas of the Sun and Moon and the Twelve Guardian Generals, 1477, Ming, Colors on silk, 137.4×80.6cm, University of Oregon Museum of Art, Murray Warner Collection of Oriental Art (Marsha Weidner, Latter Days of the Law: Images of Chinese Buddhism 850-1850, p.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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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右玉縣疆域山川邊關城堡總圖, 『朔平府 志』 卷4 “Map of the Mountains, River, Frintier Passes, and Castles in the Territory of Youyu Country,” Shuoping fu zhi vol. 4,1733, Qing, Harvard Library (Harvard Library, https://hollis.harva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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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作家未詳, 〈等覺位十地菩薩〉 Unidentified artists, The Bodhisattvas of the Ten Stages in Attaining the Most Perfect Knowledge, 1454, Ming, Colors on Silk, 140.8×79.3cm, The Cleveland Museum of Art (The Cleveland Museum of Art, https://www.cleveland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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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팔기군 명단이 있는 강희 연간 중수문 Inscription detailing the remounting of painting in the reign of Kangxi with the Names of the Eight Banners, 1705, Qing, Ink on Paper, Shanxi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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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반 공양자 명단이 있는 강희 연간 중수문 Inscription detailing the remounting of painting in the reign of Kangxi with the Names of Participants, 1705, Qing, Ink on Paper, Shanxi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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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府城全圖, 『朔平府志』 卷4 “Map of Shuoping fu city,” in Shuoping fu zhi vol. 4,1733, Qing, Harvard Library (Harvard Library, https://hollis.harva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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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가경 연간 중수문 Inscription detailing the remounting of paintings in the reign of Jiaqing, 1815, Qing, Shanxi Museum (Shanxi Museum, Baoningsi mingdai shuiliuhua, fig.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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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보녕사 수륙화에서 결실되거나 중복된 번호 Missing or Duplicate Numbers in Water-Land Paintings from Baoningsi
좌 Left 우 Right
결실 Missing number 11, 28, 41, 45 48, 50
중복 Duplicate number 17, 27, 4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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