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8;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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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연구에서 주로 다루는 명청대 문헌에는 水陸會, 水陸大會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여기서는 ‘水陸會’로 지칭한다. 수륙회는 水陸道場, 水陸聖會, 水陸佛事 등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며, 한국에서는 주로 水陸齋라고도 불린다. 수륙회의 명칭과 기본 내용에 대해서는 望月信亨 主編, 『(望月)佛敎大辭典』(東京: 世界聖典刊行協會, 1974), p. 2878; 牧田諦亮, 「水陸會小考」, 『中國佛敎史硏究』 卷2 (東京: 大東出版社, 1981-1984), pp. 213-235; Daniel B. Stevenson, “Text, Image, and Transformation in the History of the Shuiliu Fahui, the Buddhist Rite for Deliverance of Creatures of Water and Land,” in Cultural Intersections in Later Chinese Buddhism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 pp. 30-70; Edward L. Davis, “Appendix: Huanglu Jiao and Shuilu Zhai,” in Society and the Supernatural in Song China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1), pp. 227-241.
2) 보녕사 수륙화 전체 사진은 山西省博物館 編, 『寶寧寺明代水陸畫』(文物出版社, 1988) 참고. 2019년부터 2020년까지 20점에 대한 보존처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張慧敏, 「山西博物院藏右玉寶寧寺水陸畫保護與修復探討」, 『明日風尚』 18 (2021), pp. 79-81 참고.
3) 보녕사 수륙화 관련 중국 연구는 吳連城, 「山西右玉寶寧寺水陸畫」, 『文物』 Z1 (1962), pp. 88-90; 李德仁, 「山西右玉寧寺元代水陸畫論略」, 『美術觀察』 第8期 (2000), pp. 88-90; 陳姿妙, 「明代山西寶寧寺水陸畫探討—以佛教題材為例」, 中國文化大學 碩士論文 (2007); 趙慶生, 「山西右玉寶寧寺水陸畫造型藝術再認識」, 『文物世界』 第2期 (2007), pp. 59-63; 趙慶生, 「傳承文化遺產弘揚民族藝術—寶寧寺明代水陸畫臨摹劄記」, 『文物世界』 第5期 (2012), pp. 60-63; 陳俊吉, 「寶寧寺水陸畫裝飾風格與粉本傳承研究」, 『史物論壇』 第7期 (2008), pp. 127-205; 陳俊吉, 「山西寶寧寺水陸道場繪畫研究」, 國立臺灣藝術大學 碩士論文 (2009a); 陳俊吉, 「寶寧寺水陸畫的繪畫製作年代與賞賜年代探究」, 『書畫藝術學刊』 第6期 (2009b), pp. 357-393; 陳俊吉, 「寶寧寺水陸畫的佛與菩薩像之繪畫技法探究」, 『兩岸重彩畫學術研討會』 (2009c), pp. 393-418; 吳承山, 「右玉寶寧寺水陸畫初探」, 『文物世界』 第6期 (2010), pp. 44-47 참고. 기존 한국 연구자의 관련 논문은 金廷恩, 「조선시대 三藏菩薩圖의 기원과 전개 - 중국 明代 水陸畫와의 비교」, 『東岳美術史學』 8 (2007. 6), pp. 125-148 참고.
5) 1928년 훼손을 염려한 사찰 측이 내몽고의 綏遠城으로 수륙화를 이관했고, 이후 大同雲岡古迹保養所을 거쳐 1955년에는 山西省 文物管理工作委員會 소유로 넘어가며 山西博物院이 소장하게 되었다. 李德仁, 앞의 논문, pp. 88-90; 孔有生, 「山西右玉寧寺水陸畫探究」, 『文物世界』 第5期 (2005), p. 62.
6) 명대 민간 발원 수륙화에서는 불보살을 제외한 나머지 천신의 옷이 강렬한 색과 복잡한 옷주름으로만 장식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륙벽화의 경우 청대가 되면 장식성을 위해 여러 문양이 삽입되는 경우가 있지만 섬세하지 못하고 도식화된 모습이다. 100폭이 넘는 화폭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황실 발원에 비해 민간 발원 수륙화에서는 섬세한 표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폭 이상 확인된 기년명 민간 발원 중국 수륙화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 萬曆 18년(1591) 수륙화(신수13565, 신수15301) 등이 있다. 이외 도록으로 출간된 적은 없으나 중국 山西博物院 소장 강희 8년(1669) 수륙화가 2019년 山西博物院 특별전시에 소개되기도 했다. 추후 중국 내 수륙화 자료가 더 공개된다면 구체적인 양식 비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7) 명 成化 연간(1465-1478)에 판각된 《水陸道場神鬼圖像》에 그려진 나한은 구름 속에서 한 방향을 향해 하강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기에 보녕사 수륙화의 나한도는 일반적인 수륙화의 나한과 다른 구성임을 알 수 있다. 《水陸道場神鬼圖像》의 세부적인 도상과 보녕사 수륙화가 모두 일치하지는 않지만 수륙화로 그려지는 존상 구성은 거의 동일하다. 翁連溪, 李洪波 主編, 『中國佛敎版畵全集』 卷18 (北京: 中國書店, 2014) 참고.
10) 명 景泰 5년(1454) 발원 수륙화나 1443년 御用監 李童이 궁정 화가를 불러서 조성한 北京 法海寺 벽화와 함께 명대 전기 불화를 대표하는 기준작으로 여겨졌다. 陳俊吉, 앞의 논문(2009a) 참고.
11) 중국 학자의 연구는 대부분 제작 시기를 추정하거나 도상을 정리하고 분류하는 수준에 그쳐 있다. 다만 대만 학자인 陳俊吉는 戴曉雲의 연구를 바탕으로 수륙의궤에 근거하여 보녕사 수륙화 도상이 『天地冥陽水陸儀文』을 따르고 있음을 밝혔다. 陳俊吉, 앞의 논문(2009a) 참고.
12) 같은 존상을 그린 불화도 공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따라 관자에게 수용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나, 의례와 의식 수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전각 내부와 외부로 이동해 온 조선시대 후기 불화에 대한 연구가 참고가 된다. 정명희, 「이동하는 불화: 조선 후기 불화의 의례적 기능」, 『미술사와 시작 문화』 10 (2011), pp. 100-141.
15) “大同西路右衛城寶寧寺於景泰乙亥請勒 天順庚辰蓋造 碑文既攜,但未果立(중략)命石工修琢高合 擇吉建立 以垂不朽 予故庸書 以此記歲月雲旨 大明成化十年秋月吉旦 承事郎大同府通判淮南曹書.” 「敕賜寶寧寺記」. 해당 원문은 吳承山, 앞의 논문, pp. 46-47 참고.
16) 景泰 5년 수륙화에 대해서는 カロリヌジス.ヴ=ェルマンド(Caroline Gyss-Vermande), 明神洋 譯, 「明, 景泰5年在銘 「水陸齋圖」をめぐる圖像學的考察」, 『佛教藝術』 215 (1994), pp. 104-124 참고.
17) 명대 황실 발원 불화에 대해서는 Marsha Weidner, “Buddhist Pictorial Art in the Ming Dynasty(1368-1644): Patronage, Regionalism & Internationalism,” in Latter Days of the Law: Images of Chinese Buddhism, 850-1850 (Lawrence, KS: Spencer Museum of Art;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4), pp. 51-87 참고. 한편 1609년 慈聖皇太后(1546~1614) 발원 수륙화에서는 존상의 턱이 강조되고 얼굴이 다소 짧아지며 평면적이고 도식화된 신체 표현이 나타난다. 자성황태후 발원 수륙화에 대해서는 首都博物館, 『畫中三千界: 首都博物館館藏明清道釋人物畫像展』(北京: 文物出版社, 2023) 참고.
18) 기존에는 수륙화 하사의 상한 시점인 1460년부터 正統帝(天順帝)의 재위 마지막 해인 1464년 이전에 불화가 하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변방에 계속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고 발원 주체를 正統帝로 한정지을 단서가 부족하기에 시기를 수정하였다.
20) 명 만력 9년(1581) 山西省 聞喜縣 郭氏 일가가 <四天王圖> 1점을 조성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銀五百이었다. 許志平, 『中國佛畫之美 佛陀篇: 善綠無量』 (臺北: 應眞藏, 2006), p. 16.
22) Phillip E. Bloom, “Descent of the Deities: The Water-Land Retreat and the Transformation of the Visual Culture of SongDynasty (960~1279) Buddhism,” Ph.D. dissertation, Harvard University (2013), pp. 153-154.
23) 後晉 天福 7년(942) 高祖(892~942)가 內班衛 延韜를 鎭州(현 하북성 正定)에 보내 수륙단을 세우고 전쟁으로 죽은 자를 구제하도록 하였다. “…七年正月遣內班衛延韜鎮州開置水陸道場.” 王欽若, 楊億, 『冊府元龜』 卷52, 晉高祖 天福 7年 正月.
24) 『續資治通鑑長編』 卷162, 宋 仁宗 慶歷 8年 閏正月 甲辰; 『續資治通鑑長編』 卷389, 宋 哲宗 元佑元年 10月 乙酉朔; 『續資治通鑑長編』 卷273, 宋 神宗 熙寧 9年 2月 辛酉.
26) 광천법회는 널리 초도한다는 의미를 더욱 강조한 것으로, 洪武 元年과 2년에는 冥暘水陸, 水陸會로 기록되나 洪武 3년부터 5년까지는 법회 이름이 ‘廣薦’으로 기록된다. 홍무 4년의 廣薦佛會는 元年과 2년에 수륙회가 거행되었던 蔣山寺에서 열렸다는 기록이 있기에 같은 의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楚石梵琦禪師語錄』 X1420, 71:658c; 『釋教部彙考』 X1521, 77:53b-53c.
29) 토목의 변 이후 경태제 재위 기간 중 발생한 자연재해와 변고에 대해서는 Timothy Brook, The Troubled Empire: China in the Yuan and Ming Dynasties (Cambridge, MA.: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10), pp. 95-97 참고.
30) 보녕사 수륙화의 전모를 소개한 『寶寧寺明代水陸畫』(1988)에서는 1705년 중수문 중 일부만 소개되어 있다. 2019년 산서박물원 특별전 ‘蓮花與世相’에서 두 점으로 구성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는 두 중수문을 구분하기 위해 팔기군에 대한 내용을 적은 중수문을 첫 번째 중수문, 일반 공양자 명단이 있는 중수문을 두 번째 중수문으로 나뉘어 분석했다.
31) “恒城自駐防以來 凡寺宇古刹 處處煥然 而寶寧寺尤為美備 寺中相傳有 敕賜鎮邊水陸一堂 妙相莊嚴 非尋常筆跡所同 但歷年已久 而香燭薰繞 金彩每多塵蔽 住持廣居立志重新 已非一日 客歲冬募懇將軍都統諸大人以暨八旗諸公捐資攢裱 俾向之塵封者今則光彩倍增 輝煌奪目矣 欲誌其善 以傳不朽 屬於弁言以記之 至於將軍諸大人之美蹟 別有瑱珉 茲亦不能盡敘耳 時 康熙乙酉季春吉旦 邑人鄭祖僑書.”
32) 『淸史稿』 卷218, 列傳 第5 豫通親王多鐸. 이 費揚古는 그보다 앞서 건위장군으로 임명되었던 棟鄂 費揚古와 구분하기 위해 宗室 費揚古로 기록되었다. 그는 正藍旗 소속으로 1696년(강희 35)에 부임했다. 23년 동안 이 지역에서 장군으로 있었으며 후에 奉國公에 봉해졌다. 비양고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유수란, 앞의 논문, pp. 44-47
34) 팔기제도의 확립에 대해서는 임계순, 『청사: 만주족이 통치한 중국』 (신서원, 2000), pp. 28-26 참고. 팔기주방에 대해서는 마크 C. 엘리엇, 이훈·김선민 옮김, 『만주족의 청제국』 (푸른역사, 2009), pp. 253-257 참고.
40) 신사 계층과 불교 후원의 관계에 대해서는 Timothy Brook, Praying for Power: Buddhism and the Formation of Gentry Society in Late Ming-Qing Society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참고.
41) 인맥으로 활동하는 상인에게 지역의 공공사업은 중요한 기회였고, 이들은 지역 사회의 중심이 되는 사원의 대규모 사업을 후원했다. 조영현,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민음사, 2011), pp. 360-366.
42) 산서 상인은 중국 최대의 鹽湖와 관련된 관우 설화를 바탕으로 관우를 財神으로 여기고 관우 사당인 關帝廟를 자신들의 會館으로 삼았다. 오성근 외 지음, 『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이산, 2007), pp. 568-570.
43) 彭栓紅, 「多元文化共存的邊塞古城: 右衛鎮」, 『山西大同大學學報(社會科學版)』 28卷 6期 (2014), p. 40; 馮俊傑, 劉梅, 「長城要塞殺虎口滿族駐軍修複的明代樂樓」, 『戲劇』 第3期 (2007), pp. 86-97 참고.
46) “…每於歲之浴佛節森然陳設 焚香頂禮 四方檀那咸畢集而瞻拜焉…” 이 중수문은 아직 실물로 공개되지 않았다. 강희 연간의 중수문으로 보아 이 중수문 역시 하단에 시주자 이름이 적힌 축 형식일 가능성이 있다.
49) Bloom, 앞의 논문, pp. 184-191. 조선 『英祖實錄』의 1753년 기록에 따르면, 청 皇太后 壽宴 후 13省에서 水陸齋를 개최한 기록이 확인된다. 『英祖實錄』, 英祖 29年 1月 11日.
50) 아귀를 위한 의례라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우란분재는 목련이 그의 어머니를 餓鬼道에서 구제해내는 『佛說盂蘭盆經』(T685)에서 파생된 의례이고 수륙회는 면연귀왕이 아난에게 나타나서 아귀도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준 『佛說救拔焰口餓鬼陀羅尼經』(T1313), 『佛說救面然鬼陀羅尼神呪經』(T1314), 『瑜伽集要救阿難陀羅尼焰口軌儀經』 (T1318)을 소의경전으로 한다.
51) 수륙회가 盂蘭盆齋의 부분으로 인식되면서 우란분재와 함께 7월 15일로 고정된다. 常建華, 『歲時節日裏的中國』 (北京: 中華書局, 2006), p. 165. 중원절, 7월 15일의 수륙회는 근대기까지 이어진다. Holmes Welch, The Practice of Chinese Buddhism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67), pp. 185-187.
60) H. C. DuBose, Dragon, Image, and Demon: the Three Religions of China Confucianism, Buddhism, and Taoism (London: Partridge, 1886), pp. 459-4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