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제작과 사용*

The Making of White Porcelain Incense Burner in Early Chosŏn and their Uses in Royal Ceremonie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3;318():37-70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June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18.202306.002
**Ewha Womans University
신혜경**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본 논문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조선시대 백자향로(白磁 香 爐)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22)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2023년 춘계 미술사학대회에서 발표하였다.
Received 2023 March 31; Revised 2023 April 3; Accepted 2023 April 17.

Abstract

본 연구는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에 관한 단독연구로써, 유교식 향로 등장의 출발점인 조선 전기를 기준해 백자향로의 제작배경과 특징을 살펴보았다. 유교의례 내 향과 분향의식이 중요하게 인지됨에 따라 향로 또한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제례용 백자향로는 1420~40년으로 상정되는 번천리 21호 요지를 기점하여 등장하였고, 이는 초기 제례용 금속향로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시대에 따른 선택적 조형양식 수용과 분향방식의 차이로 유개정(有蓋鼎)을 차용하였고, 유교식 의례에 걸맞는 향로를 마련하고자 한 의지에서 나타난 결과로 여겨진다. 기록을 살펴본 결과 흙의 질박함을 표현하는 제기, 꾸밈새가 없는 소기(素器)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는 제례용 백자향로 제작에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주목되는 점은 조선 전기의 양식과 사용양상은 조선 중·후기를 거치면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를 통해 기물과 용도에 따른 재질 분류가 선행적으로 이루어졌고, 단순히 금속기명을 번안하고 대체하는 것 이상으로 독립적인 성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Trans Abstract

This study focuses on white porcelain incense burners used for royal ancestral rites in Chosŏn. Starting from early examples of Confucian incense burners, I have examined their production process and characteristics. As incense burning was an essential part of Confucian rites, incense burners also became important vessels. The earliest examples are found at Pŏnch’ŏn-ri site No. 21, dated to 1420-40, and they likely resemble the prototypes of ceremonial incense burners made of metal. Incense burners were influenced by the changes in the Chosŏn society and incense burning methods, and they took the shape of ding with cover. This testifies to the effort made to prepare suitable burners for Confucian rituals. Surviving records state that incense burners were to convey the simple and rustic beauty of the earth, and to work as simple so-gi, which were likely the reasons for making incense burners in white porcelain. It is also noteworthy that early Chosŏn style and uses continued to influence those of the mid-and late Chosŏn. In conclusion, the material of white porcelain and the shape of incense burners were chosen according to their uses, and they developed independently of metalware, not as mere substitutes.

Ⅰ. 머리말

향로란 분향(焚香)을 위한 기물로써 향이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의례기, 공양기, 완상기로 성격이 나뉘어 진다. 조선시대 향로는 불교의식, 개인적 감상의 수단으로도 쓰였지만 유교적 이념 실천을 위한 예기로 제정됨에 따라 제기로써 성격이 강화되었다. 유교의례에서 분향행위는 의식의 시작을 알리거나 신을 맞이하는 매개체로써 의례의 신성함을 고취시키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향로는 학계에서 주목받는 연구대상이었으나 불교 공양기, 왕실의 금속제 향로, 제기 구성품, 문방용구의 관점에서만 다뤄졌을 뿐이다.1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에 관한 단독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는데 이는 길례에서 주로 사용되는 금속제 향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왕실 제례용 백자 향로는 동시기 금속향로처럼 고동기 정(鼎)을 차용하고, 뚜껑이 함께 사용되는 구조로써 조선시대 내내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백자향로는 시기와 상관없이 구조가 유사하고 안료장식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며, 이는 조선 중·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 뿐만 아니라 민간의 백자향로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본고에서는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단독연구를 진행하여 기물의 제작배경과 사용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백자향로의 등장시점인 조선 전기(1392~1550년 경)라는 특정시기를 기준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이 시기 왕실 의례 안에서 이루어진 향의 사용에 대해 정리하여, 향로가 지니고 있는 의례적 성격을 이해하고자 한다. 다음 백자향로의 초기 원형을 파악하고, 기물이 사용된 사례를 분석하여 제례와 백자향로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다. 백자향로를 제작함에 있어 미쳤던 영향관계를 추적함에 따라 기물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조명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Ⅱ.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제작과 특징

조선시대 왕실 제례용 향로는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전례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등장하였다. 현전하는 기록과 도설을 참고하였을 때 제례용 향로는 금속과 백자라는 두 가지 재질로써 분화되고 있었으며, 용도에 따른 선별적인 분류가 일어났음을 추정케 하였다. 이 장에서는 제례용 백자향로의 제작배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상의 전개를 바탕하에 조형성을 분석하여, 유교식 의례에 부합하는 양식적 특징을 이해하고자 한다.

1. 조선시대 왕실 제례용 향로의 제작배경

삼국시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의례 내 향의 사용은 중요한 의식으로 간주되었다. 고려시대 불교의례에서 분향을 행하는 것은 부처님에 공양의 개념이었으나 조선시대 유교의례의 분향의식은 제사의 대상인 신을 흠향하게 하고, 권위와 신성함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특히 조선시대에서 향은 신을 위한 직접적인 매개체로 간주되면서 분향은 필수절차로 자리하였다.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의례의 절차 내 향의 사용에 관한 정황은 왕실을 비롯하여 사찰과 민간까지 기록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왕실의 향 소비가 집중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국가의 운영체제인 오례(五禮)로 분류되는 의식에서 분향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길례(吉禮)에서는 혼(魂)을 부르고 신을 맞이하는 수단으로써2, 흉례(凶禮)에서는 방충과 방향의 수단이거나3 예를 다하는 행위4였으며, 가례(嘉禮)5와 빈례(賓禮)6, 군례(軍禮)7에서는 의식의 시작을 알리거나 권력을 상징하며, 의례 공간으로 전환과 장엄을 위한 상황에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향로의 사용은 이동을 하거나 또는 벽체에 걸어두고 향을 피우기 보다는 어좌(御座) 또는 영좌(靈坐) 앞에 향안(香案)을 설치하여 사용되곤 하였다.8

한편, 왕실의 기록을 통해 국가 의례에서 향의 사용이 중요하게 인식된 정황을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향과 관련한 의식이 마련된 점이다. (Fig. 1) 제례에 사용될 향축(香祝)을 국왕이 직접 하사하는 전향의(傳香儀)가 『世宗實錄』「五禮」(1454)의 가례의식9을 통해 처음 제정되었고, 『國朝五禮儀序例』(1474) 길례의식의 전향축(傳香祝)10으로써 확립된 점이다.11 의주를 살펴보면 대사(大祀)와 중사(中祀)는 국왕이 직접 전달하고12, 이 외는 전교서(典校署) 관원이 향축을 올리면 승지가 왕이 축문에 서압(署押) 한 것을 대신 전하였다. 또한 향축을 받드는 의식인 수향축(受香祝)13이란 의식 또한 존재하였지만 『國朝五禮儀序例』를 기점으로 전향축 의식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Fig. 1.

<향축궤> Incense and Writ ten Invocations box, 18th century, Chosŏn, Wood, 26.4×36×8.7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oum of Korea, https://www.gog ung.go.kr)

두 번째, 향과 관련한 관직과 왕실 내 공간이 마련되었다. 중국 국상 시 향과 제문을 가지고 조위를 표하는 사절인 진향사(進香使)14, 왕의 명을 받들어 죵모 또는 능(陵)에 분향을 행하는 행향사(行香使)15와 각종 임시직책 등이 존재하였다.16 (Fig. 2) 또한 국가의 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향실(香室)이 각 궁마다 자리하고 있었으며, 향실별감(香室別監)과 교서관 참외관(參外官)을 두어 향축을 관리17하게 하였다. 더불어 관리를 소홀하게 한 관리에 대한 엄벌18을 내리도록 하는 기록도 전해져 왕실 내 향에 관한 중요성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 이로써 분향이 지닌 의미를 실천하는 가시적인 의물로써 향로 또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었다. 특히 왕실 제례에서 향로는 신을 흠향하고 맞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중요한 제기였다.

Fig. 2.

<동궐도 부분> The Eastern Palace (detail), 19th century, Chosŏn, Colors on Silk, 275×584cm, Korea University Museum (Munhwajae kwalliguk, Tonggwŏlto, p. 73)

조선 왕실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유교적 이념체제에 따른 운영체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태종 10년(1410) 8월 예제 정립을 위한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가 설치되었고, 이후 허조(許稠, 1369~1439)를 필두로 하여 길례19를 제정하기에 이른다. 허조는 삼대(夏·商·周)의 예를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였고, 고례(古禮)를 가장 밀접하게 구현해낸 당·송대 예제를 참용하여 『祭祀序例』(1416)를 상정하였다. 길례를 정비하고 이를 설행하기 위해 제기는 필수 기물이기에 『祭祀序例』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제기제도 또한 함께 정비되었다. 이는 『世宗實錄』 「五禮」 길례 제기도설(1454)로 계승된 것으로 추정되며20, 향로는 향기(香器)라는 역할로써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 왕실 제례용 향로는 국가전례서의 도설을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Fig. 3). 처음으로 확인되는 향로의 도설은 『世宗實錄』 「五禮」 흉례조의 명기도설(1454)로 기록된 것이다. (Fig. 4) 금속향로 도설의 경우 『祭器都監儀軌』(1611)에서 확인되는데 뚜껑이 없는 노신(爐身)만이 확인되고 있다. (Fig. 5) 그러나 이후 『宗廟儀軌』(1697)의 도설을 참고하면 『世宗實錄』 명기도설과 조형성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손잡이가 부착된 뚜껑과 원구형 노신, 직립한 목, 측면에 부착된 귀, 저부는 제족(蹄足)이 부착된 형태로써 (Fig. 6·7) 중국 고대 청동 예기인 유개정(有蓋鼎)21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鼎)이 지니고 있는 의미 즉, 강력한 왕권을 가시적으로 대변해주는 상징성에 주목한 것으로 여겨진다.22 따라서 명기 또한 흉례의 제기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조선 왕실 제례용 향로는 ‘의례기’라는 범주 안에서 양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Fig. 3.

<명기도설>, 『세종실록』 「오례」 “Illustrated Explanation of Myŏnggi (Incense Burner),” Five Rites of the Annals of King Sejong, 1454, Chosŏn, Ink on Paper, Institute of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Institute of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https://www.db.itkc.or.kr)

Fig. 4.

<향로도설>, 『제기도감의궤』 Illustrated Explanation of Incense Burner,” Chegi dogam ŭigwe, 1611, Chosŏn, Ink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www.kyu.snu.ac.kr)

Fig. 5.

<향로도설>, 『종묘의궤』 “Illustrated Ex planation of Incense Burner.” Chongmyo ŭigwe, 1697, Chosŏn, Ink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www.kyu.snu.ac.kr)

Fig. 6.

<有蓋鼎>, 『博古圖』 “Illustrated Ex planation of Ding with Cover,” Pakkodo, 1107, Song, Ink on Paper, Harvard Library (Harvard Library, https://curiosity.lib.harvard.edu/chinese-rare-books)

금속과 자기제 향로가 유사한 조형성을 지니고 있는 이유는 도자제기의 양식이 금속제기를 바탕하에 정리되었기 때문이다.23 이는 조선 전기부터 왕실의 제례 중 도자제기가 용인되는 예가 설행된 것에 기인하였다. 조선의 국가제사는 길례의 정제와 속제로 분류되며, 이들은 제수에 따라 그 성격이 명확히 드러난다. 정제의 경우 희생(犧牲)을 살육하여 제단에 바치는 혈식(血食)을 하며 이는 신을 위한 공궤이다. 속제는 상식(常食)이라 하여 살아있음과 같은 일상적인 제수를 올리고, 흉례의 경우 고기반찬이 제외된 소식(素食)을 올리는 것이 특징이다.24 따라서 각각의 제수를 수반할 기명들인 제기가 요구되는데 정제의 경우 신을 위한 금속제기, 속제와 흉례의 경우 신과 조상신이 아닌 망자의 개념으로써 생시와 같은 금은옥기, 사기, 목기 등이 허용된다.25

특히 상식과 소식의 경우 아침저녁으로 예를 올리는 조석상식(朝夕上食)을 행하였기에 다량의 제기들이 필요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제천의식26, 준원전(濬源殿)과 산릉(山陵)에 백자제기를 사용하게 하거나27, 문소전(文昭殿)과 휘덕전(輝德殿)의 은기를 백자제기로 대체할 것을 명하고28, 문소전·연은전(延恩殿)·영경전(永慶殿)의 제수상의 사기그릇은 사옹원이 진상하고29, 문소전에서 백자용준을 배치하는 등의 내용30이 확인된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부터 도자제기가 필요하였고, 제기를 제작함에 있어 왕실의 금속 예기제도를 참용한 것으로 생각된다.31

정리하자면 도자제기는 금속제기의 제도를 기반에 두고 있으며, 이에 따라 제기라는 공통된 속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도자제기는 길례의 속제, 흉례내에서 편향된 정황으로 보아 금속기명을 단순히 번안하고 대체하는 것 이상으로 의례의 성격에 부합하는 독립적인 제기로써 자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기의 주요 구성 중 하나인 향로도 자기로 제작된 것이며, 재질의 변화를 거치면서까지 필히 제작해야 하는 기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도자제기의 소비가 특정 제례에 집중된 것을 참고하면 백자향로도 금속향로와는 다른 쓰임이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2. 고동기를 모방한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특징

금속향로와 조형성을 공유한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는 생산유적 출토정황을 통해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살펴본 바 관요 설립 이전인 번천리 21호(1420~1440년 경)를 기점으로 양구 칠전리 1호 요지(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와 그 일대까지 확인되고 있다.

백자향로가 출토된 조선 전기 생산 유적으로는 번천리 21호(1420~1440년 경)32, 도마리 1호(15세기 말~16세기 초반)33, 무갑리 17호(1548년 전후 16세기 전반)34, 우산리 9호(1542년 전후 16세기 전반)35와 광주 충효동 W2지역 3층(1477~1483년 전후)36에서 향로편이 수습되었다.37 <Table 1> 백자향로 출토편은 뚜껑과 노신(爐身)으로 정리되었으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 생산유적 출토 정황 Excavation of White Porcelain Incense Burner for Royal Ceremonies in the Early Chosŏn Dynasty

<Table 1-⒜> 우선 뚜껑편을 살펴보면 번천리 21호 요지품은 일부가 결실되었지만 상면의 전면부를 타원형의 연공을 둘러싸듯이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Table 1-⒞> 충효동 출토품은 상면에 좌우로 대칭한 화문의 연공과 연봉형 손잡이가 부착되어 있다. 해당 양식은 번천리 21호 요지 수습품과 조형의 유사성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충효동 요지의 경우 1420년 경 요업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1호 퇴적층에서 출토된 「茂珍」銘 편을 통해 중앙 공납용 자기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고, 3·4호 퇴적층의 「公」·「光別」등과 같은 명문자기를 보아 중앙 공납자기를 제작하는 가마에서 광주지방의 관아 및 향교 소용 제기와 그 지역에서 소비되는 사기를 번조한 가마로써 성격이 이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8 특히 보(簠)·궤(簋)와 희준(犧尊) 등과 같은 중국 고동기물을 모방한 다량의 제기가 수습되어 조선 전기에 제작된 도자제기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충효동 요지 제작품은 다른 도자제기들과 함께 중앙의 양식을 기준한 것으로 생각되며,이 시기 향로 뚜껑 양식의 기준안으로 여겨진다. <Table 1-⒝> 또한 도마리 1호 출토품은 전면이 소실되었지만 상면부에 일부분 확인되는 투공으로 인해 향로 뚜껑임을 인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뚜껑 양식은 연봉형 손잡이에 화형 또는 타원형의 연공이 결합된 형태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 노신편의 경우 각각의 파편들을 종합하여 살펴보았다. <Table 1-⒟> 도마리 1호 편은 노신의 구연부 쪽에 뚜껑을 얹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아래턱이 확인된다. 굵은 모래가 있어 향로를 제작할 때 뚜껑을 얹어 함께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구연부와 연결되는 목 부분은 안쪽으로 눌리듯이 들어가 있으며, 견부에서 최대경을 이루는 원형의 동체이다. 함께 수습된 제족(蹄足)편은 상단부에 수면(獸面) 장식이 조성되어 있으며 노신편에 반해 양질로 제작되었다. <Table 1-⒡> 우산리 9호 요지 노신편을 살펴보면 동체의 측면에 판(版) 형의 귀가 견부와 구연부에 연결되어 부착되어 있다. 도마리 1호 요지품과 마찬가지로 구연부 쪽에 굵은모래가 확인되어 뚜껑을 얹은 채로 번조한 것으로 보인다. <Table 1-⒠·⒡> 그러나 무갑리 17호와 우산리 9호 요지 제족편을 보면 외측면을 예리한 칼로 깎아내어 마치 동물의 다리를 형상화 하였다. 도마리 1호품과 달리 상형장식은 사라지고 간략화 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수각형을 띠고 있는 것은 유사하다.

(Fig. 8·9) 한편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완형 출토 사례가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 중기 번천리 9호(1552~1558년) 제작품을 통해 그 조형적 특징을 참고할 수 있다.39 『世宗實錄』 「五禮」 흉례조의 명기도설(1454), 청동기 유개정(有蓋鼎)과도 조형적으로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번천리 9호 요지 뚜껑편은 전기 양식과 전체적으로 유사하나 손잡이 부분에 세로선으로 투각하였고 상면의 화문은 보다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노신의 경우 도마리 1호편과 비교하였을 때 동체의 최대동경이 중앙으로 이동하였고 귀도 구연부의 목 부분을 기준하여 L자형으로 직립한 상태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전기의 양식체계가 유지되고 있고 중기의 양식변화가 곤지암리 1호(1543~1572년 전후)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해당 출토품은 초기 백자향로의 원형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40

Fig. 8.

<백자향로뚜껑> White Porcelain Incense Burner Lid, 1552-1558, Chosŏn, H 6cm, D 11cm, Excavated from Pŏnch’ŏn-ri Site No.9 (Ihwa yŏja taehak kyo bangmulgwan, Excavation Report of Pŏnch’ŏn-ri Site No.9 on W hite Porcelain Kiln Site, p. 268)

Fig. 9.

<백자향로노신> White Porcela i n Incense Burner Cover, 1552-1558, Chosŏn, H 4.3cm, D 9.7cm, Excavated from Pŏnch ’ŏn-ri Site No.9 (Ihwa yŏja taehak kyo pangmulgwan, Excavation Report of Pŏnch’ŏn-ri Site No.9 on White Porcelain Kiln Site, p. 270)

<Table 2> 소비유적의 경우 종로 관철동 175번지 유적41, 중구 저동구역 제 2지구 유적에서 백자향로편이 출토되었다. 생산유적품과 양상이 유사하며, 15~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관철동 유적은 시전행랑이 조성된 상업지구와 인접하였고, 저동 제2지구 유적은 한성부 훈도방(薰陶防)에 속하는 구역으로 한성부 남부관아터, 영희전터가 근방에 위치하고 있다. 해당 유적에서 백자향로가 수습된 것은 기물의 사용계층이 왕실에서 저변확대 되었다기 보다 아전(衙前)의 사적증여 및 공물자기의 유출, 장물 판매와 같은 상황속에서 궁궐 밖으로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42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 소비유적 출토 정황 Excavation of W hite Porcelain Incense Burner for Royal Ceremonie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이상 출토 정황을 통해 조선 전기에 제작된 백자향로는 뚜껑과 노신이 함께 사용되는 (Fig. 6) 유개정을 충실히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향로의 외면에는 특정한 문양을 시문하지 않은 무문(無紋)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조선 중기와 후기를 더불어 조선 중기와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제작배경을 정리하면 『祭祀序例』(1416) 상정 당시 길례제도와 제기가 정비된 정황속에서 번천리 21호 요지를 기준한 1420~1440년 경에 초기 형태로써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世宗實錄』 「五禮」 흉례조의 명기 도설(1454)로 기록되면서 기본 양식으로 자리하였고, 관요 설립 이후 이를 기준하여 제작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나아가 백자향로가 금속향로와 양식이 공유된 상황을 염두했을 때, 국초 예제 정비 과정에서 설정된 금속향로의 원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 왕실 제례용 향로의 특징 중 하나는 뚜껑과 함께 사용되는 점이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청동기 정(鼎)이 지닌 기물의 상징성을 차용한 것은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예제 개혁 당시 송과의 교류를 통해 유입된 예서에 영향을 받았고, 대다수가 『宣和博古圖』(1119~1125)를 모본으로 두어 뚜껑이 없는 무개(無蓋) 형태로 제작되었다.43 그러나 당시 분향의식은 주로 불교식 의례에서 행해졌기에 유교체제로 전환된 조선의 제례에는 유교 이념에 합당한 향로가 필요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조형적 차별성을 두게 되었고, 이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새로운 국가이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발현된 결과이다. 국초 예기 정비 과정에서 참고한 중국 예서에는 향로 도설이 부재하였다.44 향을 사르는 행위는 고대부터 지속되었었기에 따로 제구의 영역으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는데, 이는 정조대 종묘 수복(守僕)들을 위한 지침서인『每事問』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분향의식은 고대부터 이어진 관습이었지만 송대에는 경령궁(景靈宮)의 조향 의식에서 삼상향(三上香)을 치뤘고, 『元史』 제사지의 종묘제의에서 향축을 전하는 의식과 삼상향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45 따라서 향로를 제작함에 있어 유교의례 내 분향이 이루어진 상황과 함께 당시 사용된 향로를 참고한 것으로 생각된다. (Fig. 10) 특히 원대 정형향로와 조형적 친연성이 확인되는 바이다.46 이는 동일한 기물을 두고 다른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시대에 따른 선택적인 조형 수용 결과로써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안료의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유교식 제례에 걸맞은 향로의 모습을 갖춰 나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Fig. 10.

<청자사자향로> Celadon Lidded Incense Burner with Lion Decoration, 13th~14th century, Yuan, Celadon, H 16.5 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o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두 번째, 분향방식의 차이이다. 분향방식의 경우 향의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향재를 채운 뒤 가느다란 선향(線香)을 꽂아 향을 피우는 방식47은 대체로 뚜껑을 연 채로 분향이 이루어진다. 향완과 같이 뚜껑이 없는 형태의 향로에서 주로 사용하는 방법으로 1649년 제작된 <보석사 감로도>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 노신에 노회(爐灰)와 향탄(香炭)을 채운 뒤 향재를 덩어리 형태 또는 분말로 가공한 뒤 사르는 방식48은 뚜껑을 덮거나 또는 연 상태로 분향한다. 여기서 뚜껑은 향을 피우면서 향재가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조선왕실은 제례에서 사용될 향을 향합(香盒)에 보관하며, 분향시 합에서 향을 꺼내어 사용한다. 향합의 규격은 높이 6~8cm 내외로써 따라서 제례에서 사용된 향의 형태는 향합에 보관하기 용이한 납작한 형태, 또는 분말형태로 추정된다.49 (Fig. 11) 또한 왕실 제례에서도 선향과 같이 긴 심지형태로 만든 부용향(芙蓉香)이 사용된 바 있지만 이 때 수반된 기물은 향로가 아닌 향꽂이였다.50 이로써 향의 형태에 따라 분향방식에 차이가 있었고, 이는 향로 조형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Fig. 11.

<효장세자가례도감의궤 반차도 부분> “Hyojang seja kar ye togam ŭig we,” Panch ’ado (detail), 1727, Chosŏn, Colors on Silk,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om of Korea, https://www.museum.go.kr/uigwe)

Ⅲ.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사용과 성격

조선 왕실의 국가 제사에서는 원칙적으로 금속으로 주조한 향로가 준비된다. 따라서 금속 향로와 관한 기록들이 대다수로, 백자향로는 금속향로를 갖추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대체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51 향로는 재질을 대체하면서까지 필수적으로 제작 및 사용이 되는 기물이었음을 보여주지만, 조선 전기 제례용 백자향로 제작배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도자제기가 허용되는 왕실의 제례가 있었기에 금속을 흙이라는 재질로 대신하는 것이 용인된 것이기에, 결론적으로 금속향로에 반하는 백자향로의 특수한 쓰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특정한 사용양상을 통해 기물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시작점으로 보이는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고 의의를 정리하고자 한다.

1. 왕실 제사의 성격에 따른 백자향로의 사용양상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가 언급된 가장 이른 기록은 세종대 제천례(祭天禮)의 제기로써 기록된 상황이다. 제천의식은 고려시대의 예를 이어 조선 전기에도 설행되었고, 복행과 폐지를 거듭한 끝에 세조대에 끝내 막을 내리게 되었다.52 세종대의 제천은 세종 1년(1419) 6월 7일 극심한 가뭄 탓에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원단의 기우제를 청하면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53 세종 5년(1423) 5월 16일자에 제천의식에 사용될 제기가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봉상시로 하여금 만들어 보관하라 명한다.54 이후 제천의식과 관한 의주들을 점차 의식화하여 정리하는 과정을 거쳐갔고, 세종 5년(1423) 9월 10일의 기사에서는 철저한 관리감독하에 원단의 제기를 주조할 것을 명한다.55

이후 원단 제기와 관련한 세종 5년(1423) 10월 27일자 기사가 주목된다.

“삼가 《두씨통전》을 상고하건대, … 이번 봉상시(奉常寺)에서 만드는 원단(圓壇)의 제기 속에 보(簠)·궤(簋)·대준(大尊)·상준(象尊)·호준(壺尊)·저준(著尊)·희준(犧尊)·산뢰(山罍)·뇌세(罍洗)·향로(香爐)는 자기(磁器)를 쓰고, 촉대(燭臺)와 전작은 백리목을 써서 모두 체제에 의하여 제조하고, 박술잔은 봉상시로 하여금 씨를 심어서 예비하게 할 것이며,그 촉대와 전작과 박술잔 등은 쓴 뒤에는 묻어버리도록 하고, 비록 제사에 쓰지 아니한 것이라도 입추(立秋)후에는 법식에 의하여 땅에 묻고, 다음 제사 때에는 다시 갖추어 제사하도록 하여야 되겠나이다”56

이는 예조에서 봉상시에서 제작하는 원단의 제기를 1423년 10월 27일자를 기점하여 새로이 만들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다. 이전에 금속으로 주조함을 명한 것과 달리 자기, 백리목, 박씨와 같은 재료를 사용함을 명하였고, 그 중 향로는 자기로 언급되었다. 이후 제천의식과 관한 세종대의 기록은 제례를 정례화하는 형태를 보이며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57 한편, 세종 25년(1443) 7월 10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확인된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제사를 지낸다면 반드시 친히 행하여 의물(儀物)의 성(盛)함을 갖출 것이요, 신하를 보내서 제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 그 의주(儀注)를 자세히 정하게 하고, 제기(祭器)는 질그릇[陶]과 바가지[匏]를 쓰고 정결(淨潔)을 귀(貴)하게 여기겠는데, 이제부터라도 미쳐 준비할 수 있는가. 만약 정결하지 아니하면 이것도 역시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58

세종 5년(1423)에 새로이 건의한 제천례의 제기와 의주들을 세종 25년(1443)에 다시 한번 상고시키는 상황이다. 비록 세종 25년(1443)에는 신하들의 반대로 인해 제천의식이 거행하지는 않았지만, 제례의 의물들과 절차에 대한 면밀한 고찰은 세종의 심도있는 예제 정립과 이해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제천의식도 여느 제례와 마찬가지로 분향의식이 이루어졌다. 특히, 천신인 상제(上帝)와 대명신(大明神), 풍운뢰우(風雲雷雨)를 맞이할 때 영신(迎神) 의물로 사용되었다. 신을 부르는 과정에서 하늘에 향을 올려보냄으로써 예를 표하고, 신성한 공간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의례적 장치였다. 당시 언급된 자기 재질의 제기는 백자가 아닌 분청사기로 추정된 바 있다. (Fig. 12) 특히 보(簠) 궤(簋) 등과 같이 금속제기의 복잡한 문양을 구현하기에 용이한 기법이었기 때문이다.59

Fig. 12.

<분청사기 궤> Grayish Blue Powdered Celadon Ritual Vessel, 15th century, Chosŏn, Gray ish Blue Powdered Celadon, H 17.4 cm, Horim Museum (Horim pangmulgwan, Punch’ŏngsagi chegi, p. 32)

하지만 당시 제천의식은 조선 전기라는 특정한 시기에 설행되었고, 의례에 대한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질박한 제기들로 꾸려지게 되었다. 당시 제작된 향로의 기법은 단언할 수 없지만, 이상의 정황들은 백자향로 제작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조선 전기 제천의식의 거행은 조선 후기 황단(皇壇) 의식에 영향을 미쳤고, 전기와 마찬가지로 향로에 관한 동일한 사용양상이 주목된다. 황단은 명 삼황을 대상으로 치루지만, 제단의 설정과 의절 내부에는 제천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60 특히 황단의 제기와 관련된 다음의 기사가 주목된다.

“임금이 명하기를, ‘…제기(祭器)·제준(祭樽)·잔(盞)·향로(香爐)·향합(香盒)은 자기(磁器)를 쓰며, 두(豆) 6개, 변(籩) 6개를 한결같이 유기로 만들어 역시 남루(南樓)에 두라고 분부하라.…명년 3월 황단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61

황단 또한 영조의 명이 떨어진 시점부터 향로는 자기제인 즉, 백자로 사용되었다. 황단의 향로를 백자로 전환하게 된 것은 제천의 성격에 부합하는 질박함이라는 기물로 준비된 상황 인 것이다. 나아가 1762년 자기향로로 전환을 명한 시점을 기준하여 분원리 요지부터 백자향로의 양식이 변하였고, 황단의 금속향로와 동일한 조형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로써 질박함을 요구하는 제천의식의 거행은 백자향로 제작에 영향을 주었고, 이를 통해 의례의 성격과 기물제작의 영향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62

다음으로 『世宗實錄』 「五禮」 흉례의식 중 국상(國喪)의 습전 절차(1454)에서 제례용 백자 향로의 용례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이 확인되었다.63 흉례 내 백자향로의 사용은 『世宗實錄』흉례의식을 기점하여 흉례 관련 의궤 총 21건64과 등록자료65, 일기자료66, 조선 후기 『國朝喪禮補編』(1752·1758)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이들 모두 염습의례(斂襲儀禮)의 전(奠) 의식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다. 흉례에 관한 의절이 조선 후기까지 큰 변화없이 지속된 것을 감안하면, 『世宗實錄』에서 제정한 흉례의절과 향로의 쓰임이 이들의 원본으로 작한 것으로 보인다.

<Table 3> 염습의례는 초종 직후 5일간 망자를 정돈하고 수습하는 절차이다.67 해당 의례에서는 습전(襲奠), 소렴전(小斂奠), 대렴전(大斂奠) 총 3번의 전(奠) 의식을 치루기 위해 제상이 준비된다. 국상의 제수는 망자의 위치에 따라 전(奠)과 제(祭)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시대 국상의 절차, The Process of the State Mourning Ritual in the Joseon Dynasty

전(奠)은 초종 직후 망자를 땅에 묻기 전으로 시신을 안장하기 이전까지 고인에게 예를 갖춰 살아생시와 같이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특징이다.68 전(奠) 의식의 제기는 아직 망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처 꾸밈새가 없는 기물인 소기(素器)가 준비된다.69 다음『世宗實錄』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갖추면 유밀과(油蜜果) 14기(器), 실과(實果) 6기(器)는 무릇 4줄이다. 화(花)·초(草)·면(麪)·병(餠)·탕(湯) 등 12기(器)가 있는데, 모두 길기(吉器)를 사용한다. 소렴전(小歛奠)으로부터 금은(金銀)의 주기(酒器)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기(素器)를 사용한다. … 내시가 전해 받들고 들어와서 대행왕(大行王)의 평상(平牀) 동쪽에 안(案)을 설치하고, 향로(香爐)·향합(香合)과 초[燭]까지 그 앞에 설치한다.… 대전관(代奠官)이 손을 씻고 동편계(東偏階)로부터 올라가서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서 북향하여 꿇어앉아 삼상향(三上香)하고 술을 따르어 안(案)에 전(奠)드리고, 연달아 3잔(盞)을 드린다.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70

『世宗實錄』의 기록을 보면 소렴전을 기점으로 소기로 전환되는데, 이는 애통의 단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Fig. 13) 당시 향로는 방충 방향의 목적과 예를 다하는 제구로 사용됨과 더불어, 소기의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71

Fig. 13.

<습전 진설도>, 『국조오례의서례』 “Illustrated Explanation of the table arrangement for a funeral ceremony before the burial,” The Illustrated Supplementary Book of the Five State Rites, 1474, Chosŏn, Ink on Paper, National Institue of Korean History (National Institue of Korean History, https://www.db.history.go.kr)

소기의 성격을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시 사용된 향로는 꾸밈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영조대 『國朝喪禮補編』의 기록과 조선 중기, 후기의 백자향로 유물을 통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로써 국상의 전(奠) 의식에서 사용되는 자기향로는 문양이 없는 백자향로가 사용되었고, 조선 전기를 기점하여 후기까지 영향을 준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아울러 전(奠)과 제(祭)로 구분되는 유교식 상례는 세종 4년(1422) 국상 이후 본격적으로 거행되었고72, 이는 『世宗實錄』「五禮」를 통해 규범으로 정리된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상례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를 마련하는 과정은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를 제작함에 있어 주요 동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더불어 일정한 양식이 지속되는 제기의 특성을 고려하면, 조선 전기부터 무문(無紋)으로 제작된 향로가 당시 흉례의 국상절차에서 소용된 것으로 보인다.

2. 제례에 내재된 성격을 대변해주는 기물

이상으로 살펴본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제작배경과 소비양상을 종합하면 금속향로와 동일한 조형성을 지니고 있지만 재질에 따라 금속향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의례와 기물간의 상호관계를 고려하였을 때, 백자라는 재질에 부합하는 상황에서 쓰인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백자’만이 지니고 있는 특수한 성격이 어떠한 의미로 발현되었는지 조금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제천의식은 질박함을 숭상하는 의식의 성격에 부합하는 제기로 사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천의례의 경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 시행되었고, 재단과 의식을 치루는 제기를 통해 의례의 성격을 읽어낼 수 있다. 제천의례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의미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만물이 시작하는 동지에 제례를 올림으로 만물의 시초로 돌아가 자신을 새롭게 쇄신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두 번째, 조상신을 하늘의 존재와 같이 만물의 시원으로 여겨 왕권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세 번째, 군주가 기곡을 통해 대지를 풍요롭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것에 있다.73

이를 실천하기 위해 의례의 절차 속 특정한 의식 행위로써 표출할 수 있지만, 제천례의 경우 제단과 의례기물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禮器』「郊特牲」에는 천자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원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면을 쓸고 예를 올리는 것은 질박함을 숭상하는 것이다. 제기는 흙으로 빚은 것을 사용하고, 그것은 천지의 성품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교제는 천도(天道)를 밝히는 것이다.”74

원구의 제단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구릉을 찾아 단으로 삼고, 기물은 천지의 성품 그 자체를 보여주는 흙으로 빚은 제기를 사용한다. 질박함, 즉 만물의 원초적인 속성에 대한 공경은 하늘이 뜻하는 도덕을 밝게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하늘을 통해 실천하고자 하는 초자연적 이념을 제단과 의물을 통해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제천의식은 제왕이 지낼 수 있는 가장 권위있는 제사로써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제례였다. 제후국인 조선은 참람한 예를 행한다고 여겨 제천의식 설행에 대한 갈등이 있었지만, 농경 사회를 기반으로 한 사회상에서 기곡과 기우제는 중요한 의식으로 간주되었다.

조선의 예제에 맞추어 정비과정이 이루어졌고, 태종대부터 『禮器』를 따라 희생을 고르고, 신주(神廚)와 재궁(齋宮)은 송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세종대에는 『通典』을 참고하여 제기를 갖추고, 세조대는 『開元禮』, 『諸司職掌』와 『詳定古今禮』등을 검토하여 의절을 보완하였다.75 이상의 예제 정비 과정들은 단순히 기곡과 기우제를 지내고, 조상신에 대해 배향하는 것 절차를 마련하는 것 이상으로 제천의식이 실천하고자 하는 목표를 더욱 밀접하게 구현하고자 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세종대에 질박함을 표방하는 제기를 정리하게 한 점은 『禮器』「郊特牲」에서 표방하는 이념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과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조선 전기 제천례에서 사용된 제기들은 천지의 질박함을 표방하는 의식의 속성에 부합하는 의물로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향로는 명확히 어떠한 재질로써 표현되었는지 단언할 수 없지만 상감청자 또는 백자라는 자기제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흙, 자기라는 기물의 원천적인 속성이 의례의 성격을 대변해 준 상황으로 정리할 수 있다. 나아가 제사의 위계가 높다 할지라도 제례의 속성과 이념에 부합하는 재질이 선택된 사례로써 주목할 필요가 있다.76 더불어 고려와 차이를 두어 유교식 향로로써 사용하기 위한 분향기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과정을 보여주는 향로 유물이 부재한 탓에 그 차이를 면밀히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 전기 국가전례서에서 유교식 향로의 조형으로 유개정(有蓋鼎)을 채택한 점을 고려하면, 당시 제천의식을 치룰 때도 정형의 향로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제작과 사용은 다음의 정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두 번째, 흉례 국상의 염습의례(斂襲儀禮) 내에서 절차의 성격에 따라 소기(素器)라는 역할로 사용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백자향로는 소렴전(小斂奠), 대렴전(大斂奠)에서 소기로써 사용된 것으로 해석되었는데 여기서 칭하는 소기의 개념을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윤휴(尹?, 1617~1680)의 『白湖全書』 44권 잡저편에서 기록된 내용은 “전(奠)을 할 때 소기를 쓴다는 것은 살아 있는 이에게 애소(哀素)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애소란 너무도 애통하여 꾸밈새가 없음을 말한다. 무릇 아무런 꾸밈새가 없는 물건을 소기라 한다…슬픔은 꾸밈새가 없는 것으로써 나타내고 공경은 꾸밈새가 있는 것으로써 나타내니, 예란 사람의 마음을 따를 뿐인 것이다.”77라 말하고 있다.

다음 1687년 출간된 『沙溪全書』 28권 「家禮輯覽」 상례편에서는 “…예는 질박한 것을 숭상하므로 꾸미는 데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식이 없는 소기(素器)를 사용하는 것이다… 대개 상은 애통함을 위주로 하고, 제사는 공경함을 위주로 한다. 그러므로 상에 전을 올리면서는 소기의 질박함으로써 하여 그 애통함을 보이고,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는 예의 형식적인 것을 다하여 그 공경하는 뜻을 붙이는 것이다.”78 라 언급하였다.

『沙溪全書』 31권 「喪禮備要」 소렴편에서 “《의례》 사상기에 제전에는 채색하지 않는 소기(素器)를 쓴다 하였는데 유씨(劉氏)가 말하기를 영좌 앞에서는 금·은으로 된 술그릇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기를 쓴다고 하였다79의 내용이 확인된다.

『禮記補註』 4권 「檀弓下」 제사편(1758)에서는 그 뜻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슬프면 흰 것을 사용하고 공경하면 꾸밈을 사용한다 라고 하였는데, 소에‘슬프면 흰 것을 사용한다’는 장례하기 이전을 이르고, ‘공경하면 꾸밈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제(虞祭)의 뒤를 이른다‘고 하였다. 흰 그릇으로써 전(奠)을 올리는 것은 산 자가 슬퍼하고 꾸미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80

이로써 소기에 대한 개념을 되짚어보면 ‘전(奠)-문양이 없고 채색하지 않은 그릇-부모에 대한 애통한 마음의 표현’으로 정리된다. 의식의 단계에 따라 의물이 변화하고, 이는 해당 절차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자식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의물을 갖추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모에 대한 공경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 향로를 원형으로 삼아 제작된 중기, 후기의 향로를 살펴보면 이들은 기면에 특정한 문양이 시문되지 않았다. 기록을 통해 국상의 염습절차에서 조선 후기까지 백자향로가 꾸준히 사용된 것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백자향로가 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Table 2> 하지만 이들은 뚜껑의 상면에 연공을 투각하였고, 특히 조선 후기의 경우 저부의 굽다리에 투공과 같은 장식적 요소가 확인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奠) 의식의 분향행위를 통해 소기의 의미를 더욱 밀접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전(奠) 의식에서는 삼상향 후 세 번의 술을 올린다. 그러나 제(祭) 의식에서는 ‘삼상향(三上香)-삼헌작(三獻爵)-전폐백(奠幣帛)’을 치루고 초헌(初獻) 때 축문을 읽었다.81 분향의식의 차이를 통해서 전(奠) 의식의 분향은 망자의 죽음을 완연히 받들지 못한 상태를, 제(祭) 의식의 분향은 조상신으로써 흠향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향로가 국상의 진행 과정에서 절차의 전환점을 제시하는 중요한 기준안이 된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따라서 염습의례에 내포되어 있는 애통하고 슬픈 심정은 당시 사용된 향로와 분향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있었고, 향로의 경우 꾸밈새가 없는 백자라는 재질 자체에 접목시킨 것이다.

이상 살펴본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는 의식의 성격이 기물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조선 중기와 후기에 이르러서도 백자향로 제작에 지속적으로 영향을준 것으로 보인다. 다른 제기들과 달리 제례용 백자향로와 관한 기록과 유적 내 출토 수량은 현저히 적은 편이다. 이는 왕실 제례에서 금속향로가 지향되었기 때문이지만 그럼에도 전 시기에 걸쳐 꾸준히 제작된 점은 금속과는 다른 백자향로의 특정한 성격과 의미에 집중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Ⅴ. 맺음말

본고는 그간 주목받지 못하였던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등장배경과 쓰임에 주목하였다. 특히 백자라는 재질이 선택되고 안료의 사용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가 유교의례에서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백자향로는 금속향로의 단순한 대체기물을 넘어서 재질의 특수한 의미와 성격에 주목한 독립적인 제기로써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본고는 조선시대 백자향로의 제작배경을 규명하기 위해 조선 전기의 제례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의 조형과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그러나 왕실을 넘어서 민간이라는 범주의 확장과 의례의 절차 분석에 있어서 보다 상세히 다뤄야 할 필요가 있다. 향후 대상의 확장과 면밀한 의절 분석, 나아가 기타 재질의 향로들을 포함하여 개진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추후 과제로 기약하고자 한다.

Notes

1)

조선시대 향로에 관한 대표적인 선행연구로는 李溶振, 「朝鮮後期 鼎形香爐 硏究」, 『東岳美術史學』 3 (2002. 12); 司空英愛, 「朝鮮 王室 古銅器形 香爐 硏究」, 『미술사연구』 28 (2014. 12); 전나나, 「19~20세기 궁궐 정전의 용향로에 관한 고찰」, 『古宮文化』 13 (2020. 1) 등이 있다.

2)

이욱, 「성물(聖物)기행 : 제기(祭器) : 신을 위한 기물(器物)」, 『종교문화비평』 3 (2013. 1), pp. 361-363.

3)

당시 사용된 향의 종류로는 침향과 부용향이 사용되었다. 이욱,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민속원, 2017), p. 60.

4)

『世宗實錄』 卷134, 五禮 凶禮儀式 朝夕哭奠及上食儀.

5)

『世宗實錄』 卷132, 五禮 嘉禮儀式 冊王世子儀.

6)

『世宗實錄』 卷1, 世宗元年(1418), 9月 2日.

7)

『世宗實錄』 卷133, 五禮 軍禮儀式 救日食儀.

8)

고려시대부터 향안(香案)은 의례 내 참여자들의 자리 배치 및 동선의 기준이 되는 중요한 의물이었다. 이는 의례에서 향의 사용이 중요하게 인식된 탓으로 여겨진다. 한혜선, 「고려전기 의례에 사용된 안(案)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 현실』 119 (2021. 3), pp. 153-154.

9)

『世宗實錄』 卷132, 五禮 嘉禮儀式 傳香儀.

10)

『國朝五禮儀序例』 卷1, 吉禮 傳香祝.

11)

『高麗史』 卷56, 地理一 王京 開城府 積城縣. 향축을 국왕이 직접 하사하는 의식은 고려시대부터 행해졌다. 이는 단순히 제향에 쓰일 의물을 전하는 것 이상으로 제례를 관장하는 왕의 직접적인 권력을 상징하였다.

12)

국왕이 직접 향축을 하사한 제향은 대사의 사직·종묘·영녕전과 중사의 풍운뇌우·선농·선잠·우사·문선왕이다. 전향축 의식은 국왕이 익선관, 곤룡표를 갖추고 관원이 올리는 축판에 직접 서명하거나, 향축을 초헌관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13)

『定宗實錄』 卷4, 定宗 2年(1400), 6月 20日.

14)

『太宗實錄』 卷14, 太宗 7年(1407), 9月 13日.

15)

『太祖實錄』 卷15, 太祖 7年(1398), 1月 29日.

16)

조선 전기에는 지방의 제향을 위해 향축을 전달하는 전향사,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의례 절차 내 향로와 향합을 받드는 사향(司香)이라는 임시관리직이 있었고, 또한 경공장에 향장을 두어 향을 제조하게 하였으며, 이 외 임 시직책인 봉향차비, 사향차비, 향로차비, 향꽂이 차비, 향안차비, 향합차비 등도 존재하였다. 신혜경, 앞의 논문, p. 22 참조.

17)

『世宗實錄』 卷89, 世宗 22年(1440), 5月 12日.

18)

『世宗實錄』 卷4, 世宗 1年(1419), 7月 14日.

19)

한형주, 「허조(許稠)와 태종~세종대 국가의례의 정비」, 『民族文化硏究』 44 (2006. 6), pp. 287-291.

20)

신혜경, 앞의 논문, pp. 24-27 참조; 김종임, 「朝鮮王室 金屬祭器 硏究 -宗廟祭器를 中心으로-」, 『美術史學硏究』 277 (2013. 3), p. 135; 『世宗實錄』「五禮」(1454)의 제기도설을 살펴보면 『釋奠儀』의 문묘제기의 도설을 대부분 참용였고, 『禮書』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 것으로 밝혀졌다. 구혜인, 「조선시대 왕실 제기(祭器)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p. 48.

21)

청동기 정(鼎)의 왕권과 권력의 상징성에 관한 연구로는 이용진, 「중국 고동기 鼎의 방제와 경향, 그리고 영향」, 『美術史學硏究』 306 (2020. 6)을 참조.

22)

司空英愛, 앞의 논문, p. 263.

23)

구혜인, 앞의 논문, p. 52; 왕실의 예기제도를 골조로 둔 관요의 설립과 기명체계의 확립에 관한 연구로는 윤효정, 「조선전기 官窯白磁의 器皿體系와 성격」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을 참조.

24)

조선 왕실 제사의 제수에 관한 이념에 관한 연구로는 이욱, 「조선시대 왕실 제사와 제물의 상징:혈식(血食)·소식(素食)·상식(常食)의 이념」, 『종교문화비평』 20 (2011. 1)를 참조.

25)

제례에서 사용되는 제기는 제수의 종류에 따라 변화한다. 이는 의례의 성격을 나타내는 지침이 제수 뿐 만이 아니라 제기를 통해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기명류의 차이가 아닌 사상적, 정치적 이념적인 배경들이 복합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구혜인, 앞의 논문, p. 199.

26)

『世宗實錄』 卷22, 世宗 5年(1423), 10月 27日.

27)

『太宗實錄』 卷35, 太宗 18年(1418), 5月 28日.

28)

『世宗實錄』 卷116, 世宗 29年(1447), 6月 4日.

29)

『中宗實錄』 卷62, 中宗 23年(1528), 8月 18日.

30)

길례 속제에서 사용된 백자용준은 조선 전기 문소전을 거쳐 숙종대 영희전, 진전들에서 반드시 사용되는 길례용 제기 중 하나였다. 구혜인, 앞의 논문, p. 205-209.

31)

고려말부터 지속된 금은의 부족상황 또한 조선 전기 백자제작에 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이다. 세종대까지 금은기의 대한 억제 정책은 계속되었고, 이를 대체할 사기, 칠기 등으로 금은기의 수요를 대신하였다. 15세기를 기점으로 관요를 통해 체계적인 자기생산이 가능하게 되자 관요 백자는 왕실 국용기의 중심으로써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윤효정, 앞의 논문, pp. 29-34 참조; 따라서 길례, 흉례 내 수요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회적 정황속에서 금은기를 대체할 기명이 필요하였고,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금속기를 모방한 제기들도 제작된 상황도 간과할 수 없다.

32)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 314호) 4차 발굴조사보고서』 (2019b), p. 90.

33)

국립중앙박물관, 『廣州郡 道馬里 白磁窯址 發掘調査 報告書 – 道馬里 1號 窯址 -』 (1995), p. 54, 74.

34)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 314호) 6차 발굴조사보고서』 (2020), p. 132.

35)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廣州 牛山里 9號 朝鮮白磁窯址 發掘調査報告書』 (1993), p. 75;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보고서』 (2019a), p. 120.

36)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충효동 가마터』 (1993), p. 129, 426;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분청사기』 (2013), p. 128.

37)

타 기물에 비하여 제례용 백자향로의 출토수량은 극히 소량이다. 이는 향로는 제례에서 단 1점만이 사용된다는 점, 이에 따라 파손율 및 제작실패율이 낮은 이유를 들 수 있다. 나아가 한정된 계층만이 사용할 수 있었기에 소량만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신혜경, 위의 논문, pp. 65-69; pp. 90-91 참조.

38)

국립광주박물관, 앞의 보고서, pp. 157-158.

39)

이 외에 참고할 만한 사례로 양주 회암사지 출토 정형향로편이 있다. 회암사지에서 수습된 향로편은 각각 청자와 백자로 제작되었고, 이들의 제작시기는 16세기로 편년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동기 정(鼎)을 모방한 향로의 양식은 재질을 넘어 공유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혜경, 앞의 논문, pp. 116-118 참조.

40)

곤지암리 1호 요지(1543~1572년 전후)를 기점으로 백자향로 노신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기존 3족의 제족은 원통형과 굽의 중앙부를 도려낸 할굽으로 바뀐 것이다. 신혜경, 앞의 논문, pp. 74-75 참조; 이는 17세기에 접어들어 나타나는 백자제기의 새로운 경향성으로 금속제기의 일부 특성만을 남긴 채 간략화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향로 또한 제기의 일부로써 다음의 경향성에 영향을 받아 양식이 변화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중기 백자제기에 나타난 신경향의 흐름과 배경에 관한 연구로는 안성희, 「16-17세기 朝鮮 白磁祭器의 새로운 경향」, 『美術史學』 22 (2008. 8)를 참조.

41)

백자향로편이 출토된 Ⅳ문화층의 시기폭은 16~17세기, 중심시기는 16세기로 정리되었다. 수습된 유물이 초기 백자향로 양식과 유사므로 이들의 제작시기는 16세기 경으로 보인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 관철동 175번지 유적』 (2015), p. 147.

42)

아전의 사적증여와 공물자기의 유출은 궁궐 내 잡인들의 잦은 출입과 궁궐 소용품을 시전에서 구입하였다는 기록등이 전해져 당시 기물이 관요산 백자로 추정하였다. 더불어 지방의 수령들이 자준(磁樽) 등과 같은 귀한 기물들의 개인적으로 취한 기록도 전해진다. 또한 내탕고, 제기고의 기용들은 주로 궁에서 일하는 종들에 의해 도둑맞은 경우가 빈번하였고, 그 중 관요에서 제작한 백자기명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지현, 「朝鮮前期 市廛出土 白磁와 消費性向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pp. 121-138 참조; 조선 전기 백자향로의 소비유적 출토수량은 매우 소량으로 다른 기명에 비해 본격적인 사용이 늦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왕실 및 관청에 국한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사대부를 포함한 민간 내 사용은 제한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윤효정, 앞의 논문, p. 258.

43)

당시 제작된 정형청자는 길례용 제기였을 가능성이 제시된 바 있다. 李溶振, 「高麗時代 鼎形靑瓷 硏究」, 『美術史學硏究』 252 (2006. 12)를 참조.

44)

조선 왕실 용향로의 경우 『大明集禮』(1370)의 도설을 참고한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司空英愛, 앞의 논문, p. 274 참조.

45)

이범직·최순권 역, 『정조대 종묘서 관리들의 종묘제향 학습서 : 역주 매사문譯註 每事問』 (민속원, 2016), pp. 160-161.

46)

특히 원대부터 종묘제사에서 향로가 본격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원대 용천요(龍泉窯),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제작된 자기제 향로는 명대에 영향을 미쳤고, 관요산 백자향로는 원·명대의 자기향로를 모방한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윤효정, 앞의 논문, pp. 254-255 참조.

47)

중국의 경우 송대 선향(線香)의 출현으로 무개(無蓋) 형태의 소형화 된 향로가 민간보급 되었다. 선향의 경우 뚜껑을 덮은 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닌 노신에 재를 채우고 향을 꽂아 분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기물을 사용하는 방식이 조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향방식의 차이와 변화가 향로의 조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혜경, 앞의 논문, p. 201 참조; 张馨予, 「论禅对宋代陶瓷香炉的影响」 (景德镇陶瓷学院 硕士学位论文, 2012), pp.9-11; 雷国强·李震, 「宋代龙泉青瓷香盒, 香瓶鉴赏与研究(上)」(文化瓷苑, 2016), pp. 69-72; 이용진, 「韓國 佛敎香爐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179 참조.

48)

조선시대 향 제조 방법에 대해서는 이경희, 「조선시대 香문화와 의생활」(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p. 102-113 참조; 비록 분향을 위한 향 제조법은 아니지만 향문화라는 범주 안에서 공통된 사용양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9)

향합에는 향나무의 중심부를 얇게 깎은 향을 보관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흙으로 빚은 조선의 제기』 (2016), p. 66 참조; 아사카와 다쿠미 지음·심우성 옮김,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2012), p. 105 참조.

50)

하수민, 「조선 왕실 가례의 부용향(芙蓉香) 연구 - 『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를 중심으로」, 『문화재』 52-3 (2019. 1), p. 231; 왕실 내 향꽂이[香串之]와 관련된 기록은 『宣祖懿仁王后祔廟都監一房儀軌』(1610)의 반차도에서 확인되며, 『進饌儀軌』(1848)에서 도설로 확인된다. 부용향에 대한 언급은 『燕山君日記』 卷62, 燕山 12年(1506), 4月 12日부터 언급되고 있다.

51)

『世宗實錄』 卷49, 世宗 12年(1430), 8月 6日. 주현제(州縣祭)에 사용될 주요 기종들을 임시로 도자로 제작하였다. 당시 제기는 고동기를 충실히 방제한 보(簠)·궤(簋)·작(爵)·변(籩)·두(豆) 등과 같은 일부 기종에 한정되었다. 향로 또한 고동기를 모방하였고 제례의 필수 기물이었기에 위의 기물들과 함께 도자로 번안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성희, 「朝鮮時代 陶瓷祭器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p. 15.

52)

태조~세종대는 기우제의 성격이 강하였고, 세조대는 정치적인 요소가 개입되었다. 조선 전기 제천의식에 관한 연구로는 한형주, 「朝鮮 世祖代의 祭天禮에 대한 硏究 - 太·世宗代 祭天禮와의 비교·검토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81 (1996. 6)를 참조.

53)

『世宗實錄』 卷4, 世宗 1年(1419), 6月 7日.

54)

『世宗實錄』 卷20, 世宗 5年(1423), 5月 16日.

55)

『世宗實錄』 卷21, 世宗 5年(1423), 9月 10日.

56)

『世宗實錄』 卷22, 世宗 5年(1423), 10月 27日.

57)

세종 5년(1423) 7월 3일에는 공복을 입게 하였으며, 세종 7년(1425) 7월 4일에는 원단 기우제에 쓰일 향축을 전하고, 세종 12년(1430) 2월 19일에는 악장에 대한 재정비를 논하였다. 『世宗實錄』 卷20, 世宗 5年(1423), 7月 3日; 卷29, 世宗 7年(1425), 7月 4日; 卷47, 世宗 12年(1430), 2月 19日.

58)

『世宗實錄』 卷101, 世宗 25年(1443), 7月 10日.

59)

당시 제기는 상감청자(象嵌靑瓷)로 추정된 바 있다. 상감·박지·조화 등의 기법이 제기의 복잡한 문양을 구현하기 적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유정, 「조선 전기 상감청자(象嵌靑瓷)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 p. 41; 한편 호림박물관 소장 분청사기 향로가 전해지고 있지만 조형적 특징과 제작기법면에서 조선 전기에 제작된 향로로 보기 어려웠다. 향로의 노신은 두(豆)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와 같은 고족형 노신은 향완을 제외하고 확인된 바가 없었다. 뚜껑은 연봉형 손잡이에 세로선을 투각하였는데 이는 번천리 9호 요지(1552~1558년)부터 나타나며, 손잡이를 둘러싼 톱니문 조각은 사천 봉계리 요지(17~18세기)부터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당 사례와 비교할 만한 유적출토품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어 본 연구의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60)

정우진·심우경, 「창덕궁 대보단의 공간구성과 단제 특성에 관한 고찰」, 『문화재』 46-1 (2013), p. 324 참조; 이욱, 「근대 제천의례를 통해 본 민족정체성 연구」, 『국학연구』 11 (2006), pp. 135-136 참조.

61)

『英祖實錄』 卷99, 英祖 38年(1762), 3月 20日.

62)

세종대 1423년 10월 27일자 제기의 재질을 질박함에 가까운 재료들로 전환을 명한 시점 이후에 치러진 제천의식은 세종대 2회, 세조대 7회가 확인된다.

63)

신혜경, 앞의 논문, pp. 46-48 참조.

64)

흉례관련 의궤기록은 다음과 같다. 『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1600), 『仁穆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1632), 『昭顯世子殯宮都監儀軌』(1645), 『仁祖殯殿都監儀軌』(1649), 『孝宗殯殿都監儀軌』(1659), 『顯宗殯殿都監儀軌』(1675), 『仁敬王后殯殿都監儀軌』(1680), 『明聖王后殯殿都監儀軌』(1683), 『莊烈王后殯殿都監儀軌』(1688), 『仁顯王后殯殿都監儀軌』(1701), 『端懿嬪殯宮都監儀軌』(1718), 『肅宗殯殿都監儀軌』(1720), 『景宗殯殿都監儀軌』(1724), 『宣懿王后殯殿都監儀軌』(1730), 『孝純賢嬪殯宮魂宮兩都監儀軌』(1751), 『懿昭世孫殯宮魂宮兩都監儀軌』(1752), 『思悼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1762), 『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1824), 『純明妃嬪殿魂殿都監都廳儀軌』(1904), 『孝定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1904), 『純獻貴妃殯宮魂宮儀軌』(1911).

65)

등록자료는 『各陵修改謄錄』(1637-1812), 『完和君宮護喪謄錄』(1880)에서 확인된다.

66)

일기자료 『孝正殿日記』(1859), 『孝慕殿日記』(1890), 『景孝殿日記』(1898)에서 백자향로가 기록되었다.

67)

국상을 기준하여 흉례의 절차를 시간과 공간, 의식의 목적과 망자의 상태에 따라 총 4단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Table 3>는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喪葬禮 設行공간의 건축특성 :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 27의 표 9, 이욱, 앞의 단행본, p. 40의 표 7, 홍은기·김상태·장헌덕, 「조선시대 혼전(魂殿)공간의 구성에 관한 연구」, 『문화재』 45-4 (2012), p. 85의 그림 12를 참고하여 재구성 하였다. 신혜경, 앞의 논문, p.49 참조.

68)

이욱, 앞의 논문, p. 214 참조.

69)

이욱, 「조선시대 망자(亡者)를 위한 음식: 국상(國喪)을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29 (2016), p. 211 참조.

70)

『世宗實錄』 卷134, 五禮 凶禮儀式 襲奠.

71)

이는 초종 후 망자의 영혼을 불러오는 복(復) 이후부터 본격적인 슬픔의 단계에 빠지는 유교상례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구혜인, 앞의 논문, pp. 283-284 참조.

72)

석창진, 「조선 초기 유교적 국상의례의 거행양상과 그 특징」, 『한국사학보』 58 (2015), pp. 166-173 참조.

73)

김문식 외 5명,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pp. 20-22 참조.

74)

『禮記補註』 卷2, 曲禮下, 第二.

75)

김문식 외 5명, 앞의 책, pp. 41-48 참조.

76)

구혜인, 앞의 논문, p. 103 참조.

77)

『白湖全書』 卷44, 雜著.

78)

『沙溪全書』 卷28, 家禮輯覽, 喪禮.

79)

『沙溪全書』 卷31, 喪禮備要, 小殮.

80)

『禮記補註』 卷4, 檀弓下, 第四.

81)

이지훈, 「조선 세종 국상의 의식 구성과 진행」, 『역사민속학』 45 (2014. 7), pp. 57-78 참조.

References

1. 『各陵修改謄錄』.
2. 『景宗殯殿都監儀軌』.
3. 『景孝殿日記』.
4. 『高麗史』.
5. 『國朝喪禮補編』.
6. 『國朝五禮儀』.
7. 『端懿嬪殯宮都監儀軌』.
8. 『禮記補註』.
9. 『明聖王后殯殿都監儀軌』.
10. 『白湖全書』.
11. 『沙溪全書』.
12. 『思悼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
13. 『宣懿王后殯殿都監儀軌』.
14. 『仁穆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15. 『昭顯世子殯宮都監儀軌』.
16. 『肅宗殯殿都監儀軌』.
17. 『純明妃嬪殿魂殿都監都廳儀軌』.
18. 『純獻貴妃殯宮魂宮儀軌』.
19. 『完和君宮護喪謄錄』.
20. 『懿昭世孫殯宮魂宮兩都監儀軌』.
21. 『懿仁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22. 『仁敬王后殯殿都監儀軌』.
23. 『仁祖殯殿都監儀軌』.
24. 『仁顯王后殯殿都監儀軌』.
25. 『莊烈王后殯殿都監儀軌』.
26. 『朝鮮王朝實錄』.
27. 『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
28. 『顯宗殯殿都監儀軌』.
29. 『孝慕殿日記』.
30. 『孝純賢嬪殯宮魂宮兩都監儀軌』.
31. 『孝定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32. 『孝正殿日記』.
33. 『孝宗殯殿都監儀軌』.
34.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보고서』, 2019a.
35.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4차 발굴조사보고서』, 2019b.
36.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6차 발굴조사보고서』, 2020.
37. 구혜인, 「조선시대 왕실 제기(祭器)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38.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분청사기』, 2013.
39. ,『무등산 충효동 가마터』, 1993.
40. 국립중앙박물관, 『흙으로 빚은 조선의 제기』, 2016.
41. ,『廣州郡 道馬里 白磁窯址 發掘調査 報告書 - 道馬里 1號 窯址 -』, 1995.
42. 김문식 외 5명,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43. 김종임, 「朝鮮王室 金屬祭器 硏究 -宗廟祭器를 中心으로-」, 『美術史學硏究』277, 2013.
44. 김지현, 「朝鮮前期 市廛出土 白磁와 消費性向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45. 文化財管理局, 『東闕圖』, 1991.
46. 司空英愛, 「朝鮮 王室 古銅器形 香爐 硏究」, 『미술사연구』28, 2014.
47. 석창진, 「조선 초기 유교적 국상의례의 거행양상과 그 특징」, 『한국사학보』58, 2015. 2.
48.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喪葬禮 設行공간의 건축특성 :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건축 공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49. 신혜경, 「조선시대 백자향로(白磁香爐)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2.
50. 아사카와 다쿠미 지음·심우성 옮김,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학고재, 2012.
51. 안유정, 「조선 전기 상감청자(象嵌靑瓷)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
52. 안성희, 「16-17세기 朝鮮 白磁祭器의 새로운 경향」, 『美術史學』 22, 2008.
53. ,「朝鮮時代 陶瓷祭器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54. 윤효정, 「조선전기 官窯白磁의 器皿體系와 성격」,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55. 이욱,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민속원, 2017.
56. ,「조선시대 망자(亡者)를 위한 음식: 국상(國喪)을 중심으로」, 『종교문화비평』 29, 2016.
57. ,「성물(聖物)기행 : 제기(祭器) : 신을 위한 기물(器物)」, 『종교문화비평』 23, 2013.
58. ,「조선시대 왕실 제사와 제물의 상징 : 혈식(血食)·소식(素食)·상식(常食)의 이념」, 『종교문화비평』 20, 2011.
59. ,「근대 제천의례를 통해 본 민족정체성 연구」, 『국학연구』 11, 2006.
60. 이경희, 「조선시대 香문화와 의생활」, 부산대학교 의류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61. 이범직·최순권 역, 『정조대 종묘서 관리들의 종묘제향 학습서 : 역주 매사문譯註 每事問』, 민속원, 2016.
62. 이용진, 「중국 고동기 鼎의 방제와 경향, 그리고 영향」, 『美術史學硏究』 306, 2020.
63. ,「韓國 佛敎香爐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64. 이지훈, 「조선 세종 국상의 의식 구성과 진행」, 『역사민속학』 45, 2014.
65.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廣州 樊川里 9號 朝鮮白磁窯址 발굴조사 보고서』, 2007.
66. ,『廣州 牛山里 9號 朝鮮白磁窯址 發掘調査報告書』, 1993.
67. 정우진·심우경, 「창덕궁 대보단의 공간구성과 단제 특성에 관한 고찰」, 『문화재』 46-1, 2013.
68. 하수민, 「조선 왕실 가례의 부용향(芙蓉香) 연구-『순조순원왕후가례도감의궤』를 중심으로」, 『문화재』52-3, 2019.
69. 한울문화재연구원, 『서울 저동구역 제2지구 유적』, 2020.
70. ,『서울 종로 관철동 175번지 유적』, 2015.
71. 한형주, 「허조(許稠)와 태종~세종대 국가의례의 정비」, 『民族文化硏究』 44, 2006.
72. ,「朝鮮 世祖代의 祭天禮에 대한 硏究 - 太·世宗代 祭天禮와의 비교·검토를 중심으로」, 『진단학보』 81, 1996.
73. 한혜선, 「고려전기 의례에 사용된 안(案)의 종류와 의미」, 『역사와 현실』 119, 2021.
74. 호림박물관, 『분청사기 제기』, 2010.
75. 홍은기·김상태·장헌덕, 「조선시대 혼전(魂殿)공간의 구성에 관한 연구」, 『문화재』 45-4, 2012.
76. 雷国强·李震, 「宋代龙泉青瓷香盒, 香瓶鉴赏与研究(上)」, 文化瓷苑, 2016.
77. 张馨予, 「论禅对宋代陶瓷香炉的影响」, 景德镇陶瓷学院 硕士学位论文, 2012.
78.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ttp://kyu.snu.ac.kr.
79. 디지털 장서각, http://jsg.aks.ac.kr.
80.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8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82. 외규장각 의궤, http://museum.go.kr/uigwe.
83. Kangnŭng sugae tŭngnok.
84. Kyŏngjong pinjŏn honjŏn togam ŭigwe.
85. Kyŏnghyojŏn ilgi.
86. Koryŏsa.
87. Kukcho sangnye bop’yŏn.
88. Kukcho oryeŭi.
89. Tanŭibin pin’gung togam ŭigwe.
90. Yegiboju.
91. Myŏngsŏng wanghu pinjŏn togam ŭigwe.
92. Paek’ojŏnsŏ.
93. Sagyejŏnsŏ.
94. Sado seja pin’gung hon’gung togam ŭigwe.
95. Sŏnŭi wanghu pinjŏn togam ŭigwe.
96. Inmog wanghu pinjŏn honjŏn togam ŭigwe.
97. Sohyŏn seja pin’gung togam ŭigwe.
98. Sukchong pinjŏn togam ŭigwe.
99. Sunmyŏngbi pinjŏn honjŏn togam toch’ŏng ŭigwe.
100. Sunhŏn’ gwibi pin’gung hon’gung ŭigwe.
101. Wanhwagun kungho sangdŭngnok.
102. Ŭisoseson pin’gung hon’gun kyangtogam ŭigwe.
103. Ŭiin wanghu pinjŏn honjŏn togam ŭigwe.
104. In’gyŏng wanghu pinjŏn togam ŭigwe.
105. Injo pinjŏn togam ŭigwe.
106. Inhyŏn wanghu pinjŏn togam ŭigwe.
107. Changnyŏi wanghu pinjŏn togam ŭigwe.
108. Chosŏn wangjo sillok.
109. Hyŏnsagung pyŏlmyo yŏnggŏn togam ŭigwe.
110. Hyŏnjong pinjŏn togam ŭigwe.
111. Hyomojŏn ilgi.
112. Hyosun pin’gung hyŏn’gung togam ŭigwe.
113. Hyojŏng wanghu kyŏngnŭng sallŭng togam ŭigwe.
114. Hyojŏngjŏn ilgi.
115. Kyŏngjong pinjŏn togam ŭigwe.
116. Kyŏnggi toja pangmulgwan. Kwangju chosŏn paekchayoji (sajŏk che314ho) 3ch’a palguljosabogosŏ. Sŏul : Thepress, 2019a.
117. . Kwangju chosŏn paekcha yoji (sajŏk che314ho) 4ch’a palgul josa pogosŏ. Sŏul : Betterway systems, 2019b.
118. Kwangju chosŏn paekcha yoji (sajŏk che314ho) 6ch’a palgul josa pogosŏ. Sŏul : Samsumg munhwa press, 2020.
119. Ku, Hyein. “Chosŏn sidae wangshil chegi yŏn’gu.” PhD diss., Ewha Womans Univeristy, 2019.
120. Kungnip kwangju pangmulgwan. Mudŭngsan punch’ŏngsagi. Sŏul : Design nanoom, 2013.
121. .Mudŭngsan ch’unghyodong kamat’ŏ. Kwangju : Samhwa munhwasa, 1993.
122. Kungnip chungang pangmulgwan.Hŭlgŭro Pijŭn Chosŏnŭi Chegi. Sŏul : Design nanoom, 2016.
123. .Kwangju-gun Toma-ri paekcha yoji palgul josa bogosŏ. Sŏul : Samjŏng press, 1995.
124. Kim, Munsik and Chyeŏng Kim, Ryekyŏng Parkm, Chiwon Song and Seŭnggu Sim. The Rites for Heaven and Earth of Joseon Royal Court. Sŏul : Tolbegae, 2011.
125. Kim, Chŏngim. “Chosŏn wangsil kŭmsok chegi yŏn’gu : Chongmyojeg I Rŭl chungshimŭro-.” Misulsahak yŏn’gu 277 (March 2013) : 133-165.
126. Kim, Chihyŏn. “Chosŏn chŏn’gi sijŏnch’ult’o paekcha wa sobi gyŏnghyang yŏn’gu.” Master’s thesis, Hongik Unversity, 2012.
127. Munhwajae kwalliguk. Tonggwŏlto. Sŏul : Samsung namgook press, 1991.
128. Sagong, Yŏngae. “Chosŏn wangshil kodonggihyŏng hyangno yŏn’gu.” Misulsa yŏn’gu 28 (December 2014): 259-281.
129. Sŏk, Ch’angchin. “Chosŏn ch’ogi yugyojŏng kuksan gŭirye ŭi kŏhaeng yangsang kwa kŭ t’ŭkching.”Han’guksahakpo 58 (February 2015): 151-183.
130. Sin, Chihye. “Sukchongdae wangshil sangjangnye sŏrhaeng gonggan ŭi kŏnch’uk t’ŭksŏng: pinjŏn sallŭng honjŏn ŭl taesang ŭro.” PhD diss., Gyeonggi University, 2011.
131. Sin, Hyekyŏng. “Chosŏn sidae paekcha hyangno yŏn’gu.” Master’s thesis, Ewha Womans Unversity, 2022.
132. Asakawa takumi. Joseon’s Traditional Table and W hite Porcelain Colletctions. Translated by Sim, Useong. Sŏul: Hakgojae, 2012.
133. An, Yuchŏng. “Chosŏn chŏn’gi sanggam ch’ŏngja yŏn’gu.” Master’s thesis, Ewha Womans Unversity, 2021.
134. An, Sŏnghŭi. “16-17segi chosŏn paekcha jegi ŭi saeroun kyŏnghyang.” Misulsahak 22 (August 2008): 7-41.
135. . “Chosŏn sidae tojajegi yŏn’gu.” Master’s thesis, Ewha Womans Unversity, 2005.
136. Yun, Hyochŏng. “Chosŏnjŏn’gi kwanyo baekcha ŭi kimyŏngch’egye wa sŏnggyŏk.” PhD diss., Ewha Womans University, 2020.
137. I, Uk. Death of King of the Joseon Dynasty and funeral rites - Ritualization of sorrow, honor, and memory. Sŏul: Minsokwon, 2017.
138. . “Chosŏn sidae mangja rŭl wihan ŭmshik: kuksang ŭl chungshimŭro.” Chonggyo munhwa pip’yŏng 29 (January 2016): 208-239.
139. . “Sŏngmulgihaeng : chegi : shinŭl wihan kimul.” Chonggyo munhwa pip’yŏng (January 2013): 349-360.
140. . “Chosŏn sidae wangsil chesa wa chemul ŭi sangjing: Hyŏlsik sosik sangsik ŭi inyŏm.” Chonggyo munhwa pip’yŏng (January 2011): 221-260.
141. . “Kŭndae chech’ŏnŭirye rŭl t’onghae pon minjok chŏngch’esŏng yŏn’gu.” Kuk’ak yŏn’gu 11 (May 2006): 107-140.
142. I, Kyŏnghŭi. “Chosŏn sidae hyangmunhwa wa ŭisaenghwal.” PhD diss., Busan University, 2011.
143. The Joseon royal court. A Study on Jongmyo Hyanggyo by the officials of the Jongmyo Book of King Jeongjo’s reign. Translated by Lee, Peomjik and·Choe Sunkwon. Sŏul: Minsogwŏn, 2016.
144. I Yongjin. “Chunggung kodonggi chŏng ŭi pangjewa kyŏnghyang, kŭrigo yŏnghyang.” Misulsahak yŏn’gu 306 (June 2020): 137-161.
145. . “Hanguk pulgyo hyanglo yŏn’gu.” PhD diss., Dongguk University, 2011.
146. I, Chihun. “Chosŏn sejong kuksang ŭi ŭisik kusŏng kusŏng kwa chinhaeng.” Yŏksa minsok’ak 45 (July 2014): 51-92.
147. Ihwa yŏja taehakkyo pangmulgwan. Kwangju pŏnch’ŏlli 9ho chosŏn paekcha yoji palgul chosa pogosŏ. Sŏul: Searo munhwa, 2007.
148. .Kwangju Usan-ri 9ho chosŏnbaekchayoji palguljosabogosŏ. Sŏul: Ace color, 1993.
149. Chŏng, Uchin, and Ukyŏng Sim. “Ch’angdŏkkung taebodan ŭi konggan’ kusŏng kwa tanje t’ŭksŏng e kwanhan koch’al.” Munhwajae 46, no. 1 (January 2013): 318-345.
150. Ha, Sumin. “Chosŏn wangshil karye ŭi puyonghyang yŏn’gu: Sunjo sunwŏn wanghu garye togam ŭigwe rŭl chungsimŭro.” Munhwajae 52, no. 3 (January 2019): 222-239.
151. Hanul munhwajae yŏn’guwŏn. Sŏul chŏdong kuyŏk che 2 chigu yujŏk. Suwon: Hongsŏng comunication, 2020.
152. . Sŏul chongno kwanch’ŏltong 175 pŏnji yujŏk. Sŏul: Dayeon, 2015.
153. Han, Hyŏngchu. “Hŏjowa t’aejong-sejongdae kukka ŭirye ŭi chŏngbi.” Minjok munhwa yŏn’gu 44 (January 2006): 272-321.
154. . “Chosŏn sejodaeŭi chech’ŏllye e taehan yŏn’gu: t’aet’psejongdae chech’ŏllye wa ŭi pigyo Kŏmot’o rŭl chungsi mŭro.” Chindanhakpo 8 (June 1996): 107-133.
155. Han, Hyesŏn. “Koryŏ jŏn’gi ŭirye e sayongdoen anŭi chongnyu wa ŭimi.” Yŏksa wa hyŏnshil 119 (March 2021): 131-163.
156. Horim bangmulgwan. Punch’ŏng sagi chegi. Sŏul. Sŏngbo munhwa jaedan, 2010.
157. Hong, Ŭnki Sangt’ae Kim, and Hŏntŏk Chang. “Chosŏn sidae honjŏn’ konggan ŭi kusŏng e kwanhan yŏn’gu.” Munhwajae 45, no. 4 (January 2012): 74-91.
158. Lei, Guoqiang, and Zhen Li. “Songdai longquan qingci xianghe, xiangpíng jianshang yu yanjiu (shang).” Wenhua ciyuan (2016): 69-72.
159. Zhāng, xīnyǔ. “Lunchan dui songdai taoci xianglu de yingxiang.” Master’s thesis. Jǐngdezhen taoci xueyuan, 2012.
160. Kyujanggak Institue for Korean Studies, http://kyu.snu.ac.kr.
161. Digital Changsŏgak, htpp://jsg.aks.ac.kr.
162. Institu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http://db.itkc.or.kr.
163. National Institue of Korean History, http://db.history.go.kr.
164. Oegyujanggak Ŭigwe, https://museum.go.kr/uigwe.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향축궤> Incense and Writ ten Invocations box, 18th century, Chosŏn, Wood, 26.4×36×8.7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oum of Korea, https://www.gog ung.go.kr)

Fig. 2.

<동궐도 부분> The Eastern Palace (detail), 19th century, Chosŏn, Colors on Silk, 275×584cm, Korea University Museum (Munhwajae kwalliguk, Tonggwŏlto, p. 73)

Fig. 3.

<명기도설>, 『세종실록』 「오례」 “Illustrated Explanation of Myŏnggi (Incense Burner),” Five Rites of the Annals of King Sejong, 1454, Chosŏn, Ink on Paper, Institute of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Institute of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https://www.db.itkc.or.kr)

Fig. 4.

<향로도설>, 『제기도감의궤』 Illustrated Explanation of Incense Burner,” Chegi dogam ŭigwe, 1611, Chosŏn, Ink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www.kyu.snu.ac.kr)

Fig. 5.

<향로도설>, 『종묘의궤』 “Illustrated Ex planation of Incense Burner.” Chongmyo ŭigwe, 1697, Chosŏn, Ink on Paper,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www.kyu.snu.ac.kr)

Fig. 8.

<백자향로뚜껑> White Porcelain Incense Burner Lid, 1552-1558, Chosŏn, H 6cm, D 11cm, Excavated from Pŏnch’ŏn-ri Site No.9 (Ihwa yŏja taehak kyo bangmulgwan, Excavation Report of Pŏnch’ŏn-ri Site No.9 on W hite Porcelain Kiln Site, p. 268)

Fig. 9.

<백자향로노신> White Porcela i n Incense Burner Cover, 1552-1558, Chosŏn, H 4.3cm, D 9.7cm, Excavated from Pŏnch ’ŏn-ri Site No.9 (Ihwa yŏja taehak kyo pangmulgwan, Excavation Report of Pŏnch’ŏn-ri Site No.9 on White Porcelain Kiln Site, p. 270)

Fig. 10.

<청자사자향로> Celadon Lidded Incense Burner with Lion Decoration, 13th~14th century, Yuan, Celadon, H 16.5 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o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11.

<효장세자가례도감의궤 반차도 부분> “Hyojang seja kar ye togam ŭig we,” Panch ’ado (detail), 1727, Chosŏn, Colors on Silk,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om of Korea, https://www.museum.go.kr/uigwe)

Fig. 12.

<분청사기 궤> Grayish Blue Powdered Celadon Ritual Vessel, 15th century, Chosŏn, Gray ish Blue Powdered Celadon, H 17.4 cm, Horim Museum (Horim pangmulgwan, Punch’ŏngsagi chegi, p. 32)

Fig. 13.

<습전 진설도>, 『국조오례의서례』 “Illustrated Explanation of the table arrangement for a funeral ceremony before the burial,” The Illustrated Supplementary Book of the Five State Rites, 1474, Chosŏn, Ink on Paper, National Institue of Korean History (National Institue of Korean History, https://www.db.history.go.kr)

Table 1.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 생산유적 출토 정황 Excavation of White Porcelain Incense Burner for Royal Ceremonies in the Early Chosŏn Dynasty

Table 2.

조선 전기 왕실 제례용 백자향로 소비유적 출토 정황 Excavation of W hite Porcelain Incense Burner for Royal Ceremonie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able 3.

조선시대 국상의 절차, The Process of the State Mourning Ritual in the Joseon Dynasty

Duration 5 Days 5 Months 3-10 Days 22 Months -
Procedure Cleaning and Dressing a Body Making the Royal Coffin Hall Burial of a Coffin Offering a Memorial Tablet to a Shrine Offering a Memorial Ceremony at the Royal Ancestral Shrine
Ceremonial Space Place of Death Royal Coffin Hall Mound/Shrine for the Spirit Tablet Royal Ancestral Shrine
Table of Memorial Ceremony Pre-Funeral Memorial Ceremony Morning and Evening Memorial Ceremony/Daily Memorial Ceremony After Funeral Memorial Ceremony/Daily Memorial Ceremony After Funeral Memorial Ceremo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