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Search

CLOSE


Korean J Art Hist > Volume 318; 2023 > Article
신라 하대 철불의 연원과 의미*

Abstract

불상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으나 철로 만든 불상인 철불은 신라 하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려 이후 거의 나타나지 않는 시대적 특수성 때문에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 학계에서는 철불의 등장에 대해 선종의 유입, 호족의 영향, 동의 부족 등으로 설명하였으나, 본고는 철불 조성 원인을 주석 수급의 문제로 보았다. 신라는 동이 부족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주석은 청동제품 제작에 꼭 필요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아 신라에서 귀한 금속이었다. 당시 왕실은 지방지배를 위해 곳곳에 자리 잡은 선종에 관심을 가졌고, 선원에 대형 불상을 조성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귀한 주석이 들어가는 동불이 아닌 철불을 조성하였다.이렇게 만들어지기 시작한 철불은 도량의 장엄을 위한 것으로, 왕실과 같은 후원 세력의 뜻에 따라 조성되었으며, 선승은 처음에는 불상 조성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선승도 적극적으로 철불을 조성하게 된다. 사찰 장엄과 망자 추복을 위해 조성한 철불은 사회 혼란기를 지나면서 사찰의 수호와 호위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 하대의 경제와 정치, 사회 양상에서 철불에 부여한 신라인의 인식과 의미가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Abstract

Among the various materials used for Buddhist statues, iron is noteworthy in the history of Korean art as it only started to be used for Buddha statues in late Shilla and almost disappears after Koryŏ. Previous studies have attributed the emergence of iron Buddha statues to the introduction of the Sŏn(Chinese Chan) Buddhism to Shilla, rise of local powers, and shortage of copper, but this study argues that the lack of tin brought the production of iron Buddha statues. Shilla was not short of copper, but tin, another indispensable material when making bronzeware, was not mined in the Korean peninsula and therefore was expensive. At the time, to effectively exert power in the provinces, monarchs of Shilla turned to the Sŏn Buddhism, which had spread to all corners of the country. Large Buddhist statues were made for Sŏn temples to demonstrate the royal authority. For this purpose, iron was used in the place of bronze, whose production process required tin, a precious material.
First made with above reasons, iron Buddha statues fulfilled the wishes of patrons including the royal family, to decorate temples. At first, Sŏn monks were not enthusiastic about making iron statues, but as time passed, they also participated actively. Iron Buddha statues were initially made to decorate temples and to pray for the souls of the dead but they came to take on the role of supporting and protecting the temple in the chaotic late Shilla society. In conclusion, the perception and the significance attributed to iron Buddha statues changed according to the economical, political, and social changes in late Shilla.

불경에는 불상의 재료에 대한 제약은 없으므로, 불상은 금, 은, 동, 철과 같은 금속부터 돌, 흙, 나무, 직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로 만든 불상인 ‘철불’은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신라 하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고려를 지나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시대적 특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철불의 등장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논의를 이어왔으며, 철불 조성의 원인을 세 가지 정도로 추론하여 왔다. 신라 하대는 통일 이후의 시대 변혁기로, 선종이 유입되고, 지방세력이 득세하는 등 중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사회 배경을 통해 철불이 선종의 유입과 관련이 있다고 보거나,1 호족이 보유하고 있던 철물이 철불을 발생시켰다고 하였다.2 또는 신라가 동 사용량이 많아져 동이 부족하여 대체재로 철불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보았다.3 이 학설들은 철불의 시작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원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렇다면 기존의 철불 조성 이유에 대해 어떤 점을 재고해야 하는가. 철불은 왜 나타난 것일까. 필자는 신라 철불 조성 배경에 “朱錫”의 수급 문제를 추가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우리나라 철불 조성 원인에 대한 학설을 검토하고, “주석” 및 동·철의 자원과 불상 조성과의 관련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최근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금동불 및 철불의 과학적인 조사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이러한 조사는 철불 조성 배경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또한 신라 하대 철불의 조성시기를 파악하고, 여러 자료를 통해 당시 사회에서의 철불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여 신라 하대 사회에서 철불의 의미를 추정해 볼 것이다. 그러므로 철불 조성이라는 새로운 문화 양상이 발생하고, 이 문화 현상에 따른 신라 하대 사회에서의 의식 변화를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Ⅱ. 신라 철불 조성 배경에 관한 학설 검토

불상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었는데, 불상 재료 가운데 철은 용융점이 1,500℃ 이상이며 강도가 강하여 주조 후에 손질이 어렵기 때문에 불상 조성에 적합한 재료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신라 하대부터는 철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인은 왜 철불을 만든 것일까. 기존에는 우리나라 철불 조성 원인과 배경을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첫째는 선종의 전래이다. 9세기에 교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사상체계인 선종에서 불상을 조성할 때, 기존 불교와 달리 사치스럽지 않은 재료인 철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의견에서는 중국에서 유학한 선승이 중국에서 성행하고 있던 철불을 보고, 귀국 후 철불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고 보았다.4 선종이 철불을 조성한 이유에 대해서는 선종이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지향하기 때문에 질박한 느낌의 철에 관심을 가졌다고 보며,5 강철같은 의지가 없으면 깨닫는 것이 불가능함을 상징하기 위해서라고도 한다.6 실제로 신라 하대 선종 유입으로 개창된 선문에 철불이 봉안된 예가 많은데, 實相山門의 實相寺, 迦智山門의 寶林寺에 철불이 현전하며, 銅裏山門 泰安寺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鐵製 佛手도 있다. 또한 曦陽山門 鳳巖寺에도 智證大師가 철불을 조성했었고,7 聖住山門의 聖住寺 철불에 관한 기록도 존재한다.8 신라 하대는 선종의 영향으로 승탑이라는 새로운 불교 조형물이 등장하고 불교계의 변혁이 일어나는 시기이므로, 이와 맞물려 철불 역시 선종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선종과 철불, 혹은 철이라는 재료가 관계성이 있어야 이 추측이 타당하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는 없으므로 선종의 교리와 철불이 관련있다고 보기 어렵다. 唐 德宗元年(784) 百丈懷海(720~814)가 제정한 선원 총림의 대원칙인 淸規에 따르면 선종사원에는 불상을 모신 佛殿을 두지 않는다고 하여 원칙상 선종이 불상 조성에 적극적인 종파가 아님을 추정할 수 있다.9 또한 신라 하대 철불은 선종 외 다른 종파에서도 조성되었는데, 강원도 동해시 三和寺 鐵佛의 명문에는 華嚴大德 決言이 명시되어 있고 철원군 到彼岸寺 철불에서도 선종과의 관련성은 찾을 수 없다.
둘째, 지방 호족과의 관련성이다. 선문이 지방에 생기면서 그 지역의 호족과 연계하였고, 호족 세력은 철 보유량과 제철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철불을 주조하였다고 보는 것이다.10 이 의견은 9세기부터 지방분권화가 진행되어 지방 호족이 군림하게 되었고, 호족이 새로운 유학층을 후원하거나 독자적인 사원을 건립하면서 제한이 있는 銅 대신 병장기 재료인 철로 지방의 주물 공장에서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추론한다.11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선종의 후원자와 철불 발원자의 시초가 누구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처음 선종산문을 개창하고 철불을 조성한 발원자는 대부분 신라 왕실 관련 인물이다. 실상산문을 개창한 洪陟(?~?)은 830년 무렵부터 興德王(재위 826~836)과 宣康太子(?~835)와 관계를 맺었으며,12 보림사 철불은 憲安王(재위 857~861)의칙서로 조성하였다.13 삼화사 철불은 명문에 국왕의 바람으로 조성했음이 명시되어 있고,14 智證大師 道憲(824~882)은 왕실의 端儀長翁主(?~?)의 후원으로 안락사를 창건하였으며 철불을 조성하였다고 전한다.15 이를 통해 선문 개창과 철불 조성 시작은 신라 왕실이 배경이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호족과 철불을 연관시켜 보는 원인은 무엇인가.
호족의 호전성과 철 소재를 연결시켜 철불 조성의 배경을 추정한 학설은 일본의 철불 연구 경향을 수용한 결과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가마쿠라시대부터 철불이 조성된 이유에 대해 무사가 철 소재를 애호하기 때문이라고 보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견이다.16 이러한 일본의 학설은 호족의 호전성에 부합하는 재료가 철이라는 것과 호족이 무기로 무력을 과시하고자 철불을 만들었다고 보는 우리나라 철불의 연구 방향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철불 조성에는 분명히 신라 왕실의 영향이 존재하므로, 호족의 성향이나 영향으로 한정하기 어렵다.17
셋째는 銅의 부족이다. 8세기부터 불상을 포함한 금속공예품의 수요 증가로 동이 부족하게 되어 국가에서 동의 사용을 제한하였기 때문에 철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18 동 부족을 원인으로 보는 연구에서는 신라 하대에 백성의 동 사용을 제한하는 禁令이 선포되었다고 본다.19 이 금령은 興德王(재위 826~836) 9년 사치를 금하는 법령을 말하며, 철은 육두품 이하 평민이 사용하였다고 보았다.20 한편 동의 부족을 교역 문제로 보는 의견도 있다. 장보고 선단이 중국과 교역하여 중국 동전으로 동을 확보하였는데, 841년 장보고 사망 이후 청해진이 폐지되고 944년 중국의 會昌廢佛로 교역이 원활하지 않자 동 수급이 어려워 철불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21 이 의견은 우리나라 철불 시작에 대해 지금까지 학계에서 통용되는 가장 합리적인 의견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주요금속광물자원분포도에 따르면 동은 다량 분포하고 있다. 신라 하대의 기록으로 동 자원 생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찾아볼 수 없으나 흥덕왕의 교서, 중국의 기록, 신라의 중계무역 양상 등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국가가 동 사용을 제한한 예로 제시해왔던 흥덕왕의 교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사실 평민의 색복 가운데 帶와 靴帶에 철과 동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22 동을 금지하는 내용이 아니며, 철과 동의 차별이 없다. 또한 중국 『册府元龜』에 淄靑節度使가 정부에 신라에서 熟銅[순동]을 가지고 오면 교역을 승인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당 정부는 동을 포함한 반출금지 품목을 알려주며 회신하였다.23 이 기록으로 본다면 신라에서는 숙동을 중국에 교역품으로 수출했고, 중국은 동을 반출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신라는 동 자원에 여유가 있으며, 동 자원의 유출을 막고 있는 중국이 동 부족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신라는 당과 일본과의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는데, 수출품은 동기와 香藥이 많았다. 신라는 중국에서 동남아, 인도, 아랍의 진귀한 물품을 동으로 구매하여 신라 제작의 동기와 남해 무역품을 일본에 판매하고, 일본으로부터 綿을 들여왔다.24 일본 正倉院 병풍 배접지에서 발견된 ‘買新羅物解’의 내역과 正倉院 및 法隆寺獻納寶物에 전해지는 다수의 신라 청동 제품을 통해 신라가 동기를 일본에 판매했음을 알 수 있다.25 신라의 중계무역이 가능했던 것은 풍부한 동 생산에 기인한 것이므로, 동이 부족하여 철불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26

Ⅲ. 신라 하대 철불의 시작: 朱錫의 수급 문제

앞서 필자는 신라에 동이 부족하지 않았으므로, 동 수급 때문에 철불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기존에는 동 자원의 부족때문에 철불을 조성한 중국 철불 조성 배경의 영향을 받아 신라도 같은 이유로 철불이 조성되었다고 보았으며, 신라가 수입한 중국 동전이 신라의 동 부족을 증명하는 자료로 제시되었다. 국제사회에서 당의 동전은 거래를 위한 화폐로 사용되었으나, 신라 안에서는 화폐로 이용하지 않는데도 수입했기 때문이다. 신라는 동전 형태의 전용 화폐가 없었고, 금속과 베로 이를 대신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금속 가운데 鐵鋌이 화폐기능을 담당하였고, 이후 무게와 부피 문제로 금·은 위주로 바뀌었다. 금과 은은 거래대상과 교환수단으로 존중되었으나, 일정한 형태의 보편적 가치가 인정하는 화폐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철정은 화폐 대용이지만 전용화폐는 아니고, 金·銀鋌은 외국이나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일반교환 매개물은 米穀과 麻布·絹布 등의 布를 사용하였다.27 그렇다면 신라는 화폐로 이용하지 않는데도 왜 중국에서 동전을 수입했을까. 이와 관련하여 신라 하대 철불의 시작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14세기 일본으로 향하던 중국 무역선이 신안 앞바다에 침몰했는데, 그 신안 해저선에는 중국 동전 28톤이 실려있었다. 일본은 수입한 중국 동전을 무역에 사용하였으며,28 재료로도 활용하였다. 1252년 조성한 일본의 가마쿠라대불은 동전을 녹여서 조성하였다고 전해지며,29 1150년부터 일본에서 경통의 재료로 동 수요가 증가하자 宋錢을 녹여 사용하였다.30 당시 일본이 동제품을 만들기 위해 중국 동전을 사용한 이유는 헤이안시대부터 가마쿠라시대까지 熟銅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비쌌기 때문이다. 宋錢과 일본의 숙동을 비교하면 송전이 일본 동의 1/3 가격이었고, 일본의 금은 남송 금의 1/2 가격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금을 수출하고 동전을 수입하였다.31 신안선과 일본의 예를 통해 중국 동전은 불상이나 동기 제작을 위한 원료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경주의 청동공방 유적인 황오동 341-12번지에서는 唐 開元通寶가 발굴된 바 있다.32
그렇다면 통일신라 동제품의 원료는 중국의 것이 맞을까. 중국 동전을 들여와 동기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통일신라 동기의 원료 산지는 중국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동기는 납동위원 소비를 통해 원료의 산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통일신라의 청동제 화형 접시를 분석하였는데, 그 결과 화형 접시와 동종의 시료가 중국 남부지역의 원료 시료와 가까웠다.33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경주 인용사지에서 출토된 청동개 2점, 청동완 2점, 청동대단금구 1점의 납동위원소비를 분석하여 동북아시아 방연석 분포도에 대조하였는데 청동완 1점과 청동개 1점이 중국 남부의 범위에 해당하였다.34 이외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초기철기~조선시대 청동기의 납동위원소비 분석 자료 673건을 이용하여 산지추정 연구를 수행한 바 있다. 이 가운데 통일신라시대 유물의 경우 동북아시아 방연석분포도에 따르면 대부분 중국 남부지역에 해당하고, 한반도 납동위원소비 분포도에 도시할 경우 옥천대 및 영남육괴를 포함한 지역이다.35
일본의 경우에는 동이 부족하여 중국 동전을 수입해 동제품을 만들었지만, 신라는 일본과 달리 동이 부족하지 않았는데도 동전을 수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朱錫” 때문이다. 동전을 주조할 때, 동[구리]만 사용하지 않는다. 開元通寶는 구리 64.1~8.1%, 납 23.4~4.7%, 주석 7.4~11.7% 범위의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36 동전 외에도 동제품과 불상은 동에 주석을 합금한 청동을 사용하여 주조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우리나라 동 제품의 성분을 조사하였는데, 금동불 63점을 분석했을 때 소형불상은 10% 미만, 중형 이상 불상은 10% 이상의 주석이 함유되어 있었으며, 86점의 청동 용기 및 범종에도 구리, 주석, 소량의 납이 함유되어 있었다.37 따라서 불상과 동기 제작에는 소량이라도 주석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주석은 稀有金屬 가운데 하나로, 매장량이 적어 희귀하며,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산출되지 않는 반면 중국에는 많다.38
당시 신라에서 주석의 가치는 어느 정도였을까. 신라에서의 주석 가치는 『三國史記』를 통해 알 수 있다. 흥덕왕의 교서 중 屋舍 규정을 살펴보면 육두품은 집을 지을 때 金·銀·鍮石·白蠟·五彩로 꾸미지 못하고,39 오두품은 金·銀·鍮石·銅鑞·五彩로 꾸미지 못한다.40 육두품 옥사 규정에서 금지하고 있는 白蠟은 주석과 납 비율이 8:2인 주석을 말하며, 오두품 옥사 금지 항목의 銅鑞은 동과 백랍, 즉 주석을 넣은 동합금을 일컫는다. 즉 신분에 따라 주석이나 주석 합금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色服 규정에서 육두품의 帶와 靴帶는 검은 무소뿔과 鍮·鐵·銅 만 사용하며, 오두품은 腰帶는 鐵, 靴帶는 鍮·鐵·銅만을, 사두품과 평민의 요대와 화대는 철과 동만 사용할 수 있다.41 육두품 색복에서의 鍮는 동에 주석을 섞어 만든 동합금인데,42 육두품은 대와 화대 모두 유를 사용할 수 있지만, 오두품은 화대에만 사용할 수 있었고, 사두품 및 평민은 유를 사용할 수 없다. 반면 동과 철은 평민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 사료를 통해 신라에서 동은 규제하지 않았고, 주석과 주석-동 합금에 대한 규제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주석이 귀했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석, 혹은 주석-동 합금의 유통은 국가에서 제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주석이 귀한 재료였기 때문인데, 불상을 조성할 때 합금을 위한 朱錫鋌 수급은 왕실에서도 부담이었을 것이므로, 신라에서는 당의 동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당의 동전에는 주석이 함유되어 있었기에 신라는 산출한 동을 순동으로 만들어 동전과 교환하여 고가의 주석 자원을 확보하였다.43
9세기 당에서는 동기 1근이 600文의 가치가 있었으므로, 동전 1,000문은 1,000문의 화폐 가치보다는 가공하여 3,600문 가치의 동기를 만드는 재료로 변질되었다.44 『宋史』에는 민간에서 동전을 녹여 그릇을 만들면 다섯 배에 가까운 폭리를 취할 수 있어 동전을 녹이는 爐의 수가 증가한다고 하였다.45 『송사』는 당이 아닌 오대부터 송대에 이르는 기록이지만 당시 화폐 상황을 잘 보여준다. 또한 市舶使가 동전을 훼손하여 동기를 주조하는 일이 있으므로 국가에서 이를 금지한다고 하였는데,46 이 기록 역시 1034년의 일이지만 錢荒이 심각했던 당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동전을 화폐가 아닌 원료로 사용한 예가 중국에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은 원료보다 돈의 가치가 하락해있었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동전 수입으로 쉽고 저렴하게 주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47
신라는 주석이 귀했기 때문에 청동 원료 및 제작을 국가에서 관리했다. 그러므로 왕실에서 사용하는 동기와 불교 공양구, 불상 조성에 한정된 자원을 쓰고, 중국에 수출하기 위한 숙동을 만들며, 제작한 동기는 일본에 수출하였다. 신라가 일본으로 수출한 동기는 신라 관청문서로 포장된 예가 있어, 관영공방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에 있는 佐波理碗에 ‘乃末’이라는 관등명이 새겨져 있어, 완을 제작한 장인이 관영청동공방 소속임을 알 수 있다.48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동광산인 長登銅山이나 고려시대 銅所 운영을 보면 국가의 관리와 통제 아래에 동을 채취하고 생산하였으므로, 신라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49
실제로 통일신라의 청동관련 유적은 경주지역에서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는데,50 이를 반영하듯 중형 이상 금동불은 신라 왕경과 그 인근지역에서만 나타난다. 따라서 통일신라 청동제품과 주석, 철불에 관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신라 하대에는 지방에 많은 사찰이 건립된다. 신라 하대에 건립된 사찰은 문헌에서 96개 사원을 찾을 수 있으며, 17개가 경주 지역에 건립되었고 나머지는 지방에 세워졌다. 지방 사원 건립의 급격한 증가는 신라 하대의 큰 변화이다.51 왕경 외의 지역에 사찰이 증가하면서 불상 및 각종 청동제품의 수요 역시 급증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대형의 금속제 불상을 경주 외의 지방 사찰에 조성할 때, “주석”을 함유한 동합금을 이용한다면 주석의 수급, 혹은 주석 원료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청동불상의 대체품으로 “철”을 사용한 금속제 불상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동의 부족이 아닌, “주석 수급”의 어려움 때문에 “철불”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신라는 철불을 조성할 수 있는 원료와 기술을 갖고 있었다. 통일신라 제철유구는 경주 외 지역에 퍼져 있었으며, 철은 신라가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자원이었고, 철의 생산에 주석은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신라는 제철산업이 발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양한 기록 속에서 신라의 칼이 외국에 많이 알려져 있었으며, 칼은 철제품 중 기술이 가장 집약적으로 들어간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은 대형 철불 조성의 기반이 되었다.52

Ⅳ. 신라 하대 철불의 특징과 의미 변화

필자가 신라 하대로 추정하고 있는 철불은 5구이다<Table 1>. 필자는 실상사 철불은 840년, 보림사 철불은 859년, 삼화사 철불은 경문왕대, 도피안사 철불은 865년, 한천사 철불은 9세기 후반에 조성했다고 보는데, 보림사와 삼화사, 도피안사 철불은 명문이 있어 조성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53 859년 명문을54 가진 보림사 철불은 얼굴이 크고, 얼굴의 크기에 비해 신체 폭이 좁으며, 몸에 비해 손이 작은 9세기 불상의 특징이 있다(Fig. 1). 또한 코 옆에 팔자 주름이 명확하고 인중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옷주름은 장식적이며, 다리 앞 옷주름의 모양은 좌우대칭 부채꼴이 아닌 非定型인데,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Fig. 2)과 유사하다<Table 2>. 실상사 철불과 보림사 철불을 비교하면 큰 얼굴, 머리에 비해 좁은 신체 폭, 도식적이고 많은 옷주름, 명확한 팔자 주름과 도드라진 인중 표현이 유사하여 실상사 철불은 9세기 중반 불상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Fig. 3).55 또한 실상사 철불은 왕경의 금동불인 백률사 금동불(Fig. 4)이나 불국사 비로자나불좌상(Fig. 2)과 귀의 형태, 인중과 입의 얼굴 구성, 옷주름 표현 방식 등이 일치하므로, 실상사 철불의 장인은 관영공방 소속으로 보이며, 왕실이 후원했을 것이다.
이것은 제작기법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철불은 만드는 과정에서 외형틀을 조합할 때 틀과 틀 사이에 쇳물이 새어 나와 분할선이 생긴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은 외형틀 분할선이 안면과 가슴에는 없고, 신체 측면이나 옷주름에 배치되어 있으며, 형지 역시 안면과 가슴 같은 부위는 피해서 설치되어 있다<Table 3>.56 실상사 철불의 이러한 주조 특징은 이 불상이 시원적인 형태의 철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금동불 제작이라는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실상사 철불은 철이라는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57 이러한 실상사 철불 제작기법은 왕실 발원인 보림사 철불과도 유사하다<Table 3>.58
따라서 실상사 철불은 보림사 철불과 인접한 시기에 조성했을 것이다.59 실상사는 洪陟(?~?)이 829년 창건했다고 추정하며, 830년경부터 興德王(재위 826~836)을 통해 왕실과 연결되었다.60 그러나 선종이 사회·정치적으로 주목을 받고 왕실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인 시기는 閔哀王(재위 838~839) 이후이다. 당시는 많은 선승이 귀국하여 지방에 정착하고, 다양한 단월을 받아들여 지방에 영향력과 세력을 확장하였기 때문에, 왕실은 선사를 통해 지방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61 흥덕왕 이후 민애왕, 神武王(재위 839)까지 왕위쟁탈전이 있었으며, 이 혼란을 진정시키고 왕이 된 文聖王(재위 839~857)은 나라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문성왕은 지방세력에 의해 왕이 되었으므로, 지방지배 강화에 관심이 많았다. 문성왕은 선종을 지원하여 실상사 외에도 惠哲(785~861)의 大安寺, 無染(800~888)의 聖住寺를 추인하였으며,62 실상사 뿐아니라, 대안사, 성주사에도 철불이 존재했던 흔적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문성왕이 선종을 후원할 때, 대형 금동불 조성은 사회·경제적 부담이 컸기 때문에 대형 철제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63 9세기 중반의 실상사 철불 양식, 문성왕의 선종에 대한 열의, 840년 이후로 추정하는 홍척의 입적 연대를 통해 실상사 철불 조성은 840년 즈음으로 생각된다.
삼화사 철불 역시 큰 얼굴, 얼굴 대비 신체 폭이 좁거나 길어지는 비례, 다수의 도식적이고 구불거리는 선 형태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Fig. 5). 구불거리는 등간격의 형식적 옷주름은 봉화 축서사 석조불상(867년)과 유사하다(Fig. 6).64 명문에는 석가불 말법 3백여 년에 조성한 내용과 화엄종 고승 決言이 나오므로,65 명문과 불상 양식을 종합해 볼 때 景文王(재위 861~875)대 조성했을 것이다. 제작기법도 앞선 두 불상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삼화사 철불은 21개의 외형틀로 제작했다고 추정한다<Table 3>.66 실상사나 보림사 철불의 치밀한 주조계획에 비해 삼화사 철불은 신체 정면에 분할선이 있으므로 섬세함이 떨어진다.67 도피안사 철불은 경문왕 6년(865) 조성했다는 조상기가 있으며,68 얼굴 크기에 비해 좁은 동체부 폭, 상체 길이에 비해 좁은 하체 폭, 등간격의 층단식 옷주름과 작은 손의 표현 등은 9세기 양식과 동일하지만69 조형미가 떨어지는데(Fig. 7), 도피안사 철불은 왕실과 관계없이 향도 1,500명이 발원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도피안사 철불은 외형틀 7개로,70 삼화사 철불에 비해 제작이 더 간소화되었다<Table 3>.
한천사 철불은 도드라진 인중이나 긴 상체 표현이 9세기 불상과 같다(Fig. 8). 한편 다리 앞 옷주름은 불국사 금동불이나 보림사 철불과 같이 非定型이며,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의 다리 앞과 허벅지의 옷주름 형태가 유사하다<Table 2>. 옆으로 넓은 얼굴, 오른쪽 겨드랑이와 가슴 표현방식도 해인사 비로자나불상과 비슷한데(Fig. 9), 해인사 불상은 中和 3년(883)의 묵서명이 있어,71 한천사 철불도 9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을 것이다. 한천사 철불은 실상사나 보림사 철불처럼 분할선을 가슴부위에 두지 않고 삼도나 옷주름을 따라 구성하고 있다. 복식과 가슴을 나누는 외형틀은 편단우견의 주름에 감춰져 있으며, 옷주름이 복잡한 전면부는 외형틀을 다수로 조성하였는데, 섬세한 조성기법은 실상사 철불의 제작기법과 유사성이 있다<Table 3>.72
문성왕대부터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철불을 조성하였고, 주조기술도 중국과 상관없는 신라의 기술로 보인다. 현존하는 철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로 볼 수 있는 실상사 철불과 그 뒤를 잇는 보림사 철불은 주조할 때 외형틀 분할선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만드는 특징이 있는데<Table 3>, 중국 철불은 외형틀 분할선이 등간격으로 나타나므로 조성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Fig. 10). 중국은 이른 시기부터 철불을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현존하는 상은 당대 이후부터이며, 그마저도 다른 재질의 불상에 비해 매우 적고, 현존하는 철불 대부분은 송대 이후의 것이다.73 현존하는 상이 많지 않아 다수의 사례를 비교할 수는 없으나, 현존하는 당대 철불인 중국 山西省 大云寺 철불, 山東省 濰坊市博物館 철불, 開花寺 철불(Fig. 10)과 나한상을 통해 보면 촘촘한 등간격의 외형틀 분할선이 나타난다. 陝西省 西安博物 館의 靜法寺 철불은 외형틀이 촘촘하지는 않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상·하·좌·우 외형틀이 나뉜 것을 볼 수 있다.74 한천사 철불 역시 실상사와 보림사 철불과 마찬가지로 외형틀 분할선을 옷주름 등에 숨기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삼화사 철불 및 도피안사 철불의 경우 실상사나 보림사 철불에 비해 외형틀 분할선이 정면에도 배치되며, 비슷한 크기의 한천사 철불보다 외형틀 개수가 줄어드는 등 제작 방법이 단순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단순화 경향은 고려시대 철불에서 더욱 가속화된다<Table 3>.
철불 조성 시기를 토대로 철불의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실상사 철불은 문성왕이 관여한 것으로 보이고, 보림사 철불은 憲安王(재위 857~861)의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므로, 초기 철불이 왕실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실상사 철불은 선문이 개창되었을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보림사의 경우 859년 보림사 철불을 조성했을 때 體澄(804~880)은 武州 黃壑蘭若에 있었고, 859년 겨울 왕이 가지산사(보림사)로 옮기기 청한 후에야 보림사에 주석하였으므로, 체징이 없을 때 철불은 조성되었다.75 이를 반영하듯 보림사 철불 명문에 체징은 언급되지 않는다. 신라 왕실은 원활한 지방 지배를 위해 지방의 선종 사찰을 지원한 것으로 보이는데, 왕실의 후원을 드러내기 위해 대형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 청동제품 수요의 증가와 주석 수급과 같은 경제적인 요건으로 인해 대형 불상의 조성은 신라가 충분히 보유하고 있던 철을 이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는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절을 장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76 신라 왕실은 거대한 불상으로 장엄한 도량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후원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후 왕실의 위엄과 장엄한 도량이라는 철불 조성의 목적은 조금씩 변화하였고, 선종의 인식도 달라진다. 경문왕이 秀澈(817~893)에게 禪·敎에 대해 묻자 수철은 선과 교가 다르지 않다고 답한다.77 이러한 선사의 유연한 사고의 전환을 반영하듯 선승이 철불을 주도적으로 만드는 모습이 점차 나타난다. 都憲(824~882)은 왕실의 端儀長翁主(?~?)의 후원으로 864년 사찰을 만들었고 철불을 주조하여 절을 수호하고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고자 하였다.78 망자 추복 및 내세 기원은 전통적인 불상 조성의 이유이지만 절을 수호한다는 새로운 조성 이유를 밝히는 것이 독특한데, 앞선 시기 철불의 장엄함에 대한 느낌이 “수호”의 의미를 철불에 추가적으로 부여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경문왕 즉위(861년) 이후 만든 삼화사 철불은 명문을 통해 화엄종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문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불교계의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선종뿐 아니라 화엄종을 통해 지방 사찰에 불상 조성을 독려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종과 마찬가지로 왕권강화를 위한 왕실의 불교지원 확대와 9세기 화엄 사찰의 확산 속에서 화엄종에서도 철불을 조성했다. 다만 경문왕대부터 왕실의 후원은 왕실 사람이나 승려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이는데, 왕의 바람과 결언으로 말미암아 시방의 단월이 발원했다는 삼화사 철불 명문을 통해79 실상사·보림사 철불과는 달리 다수의 단월이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 왕이 언급되어 있음에도 삼화사 철불의 크기가 줄어든 점이나 제작기법이 기존과 달리 세밀하지 않은 점이 이를 반영한다. 도피안사 철불은 865년에 조성되었는데, 크기는 신라 하대 철불 가운데 제일 작다. 이 철불은 향도 1,500명이 발원한 것으로 왕실과 상관이 없다. 이것은 지방민이 동으로는 시도할 수 없던 금속제 불상을 철로는 만들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금속제 불상 대중화의 일례이다. 현존하지는 않으나 장안사에서 862년 철불이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80 이를 통해서 860년대에는 철불이 종파나 후원 세력과 관계없이 확산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동불에 비해 저렴한 철불이 기층사회에 퍼져나간 것이다.
이러한 일반화된 철불 조성은 880년부터 의미의 변화를 보인다. 도헌은 봉암사를 만들면서 철불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81 이 내용 때문에 철불을 풍수비보와 연결하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러한 관념은 앞서 살핀 철불 조성 배경을 볼 때 철불의 시작과 동시에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 880년 憲康王(재위 875~886)은 신하들과 태평성대라고 자축하였는데82 이것은 왕경에 한한 것이며, 879년 信弘의 반란 등으로 보아 870년 후반에는 국가가 혼란스럽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진성왕 3년(889년)에 이르러 지방에서 공물과 조세를 보내지 않아 국가가 궁핍해지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83. 혼란이 889년 시작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그 이전부터 왕실이 지배력을 상실하여 889년 전국에 난으로 촉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도헌이 880년대 조성한 철불에 투영된 호위에 대한 인식은 9세기 말 혼란스러운 사회를 경험하면서 생긴 인식이 철불의 위엄있는 형상에 반영된 것이다.84

Ⅴ. 맺음말

본 논문에서는 철불을 만들기 시작한 원인이 “주석”의 수급 문제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추정하였다. 주석은 청동제품을 만들 때 소량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금속으로, 지금도 다량 수입하고 있다. 신라에 동이 충분하더라도 주석 때문에 왕경 내의 불상 및 각종 청동제품 제작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왕실이 지방지배를 위해 선종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성왕은 지방에 대형 불상을 조성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고, 자체 조달이 가능한 철로 철불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기법을 통해 봤을 때 신라의 철불은 중국 철불 제작 기술과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철불은 도량의 장엄을 위한 것이었고, 선종 외의 종파에서도 만들었다. 철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무렵의 선승은 불상에 큰 관심이 없었고, 왕실과 같은 후원 세력과 결부되어 조성되었으나, 시대가 흘러 선승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선승도 적극적으로 조성하기에 이르렀다. 사찰 장엄과 망자 추복을 위해 만들었던 철불은 사회 혼란기를 경험하면서 사찰의 수호와 호위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철불을 통해 신라 하대의 경제·정치·전쟁 등 사회 모습에서의 변화 양상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사회의 흐름에 따라 신라인이 철불에 투영했던 인식과 의미도 변화하고 있음을 검토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신라 하대 철불 조성 배경에 대한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철불을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Notes

1) 황수영, 「통일신라시대의 철불」, 『미술사학연구』 154·155 (1982), p. 24; 최성은, 『철불』 (대원사, 1995), pp. 29-30; 최인선, 「한국철불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p. 38; 동저, 「한국의 철불」, 『박물관기요』 22 (2007), pp. 42-44; 최완수,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3』 (대원사, 2007), p. 156.

2) 최완수, 위의 책, p. 156; 이인영, 「고려시대 철불상의 고찰」, 『미술사학보』 2 (1989), pp. 63-64; 문명대, 「신라철불 조성문제와 실상사 철아미타불좌상 연구」, 『불교학보』 37 (2000), p. 101.

3) 강우방, 「통일신라 철불과 고려철불의 편년시론-충남 서산군 운산면의 철불과 운산면 보원사지 장륙철불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41 (1998), p. 21; 문명대, 위의 논문, p. 101; 최성은, 「장보고 선단과 신라하대 불교조각」, 『선사와 고대』 32 (2010), p. 13; 강건우, 「실상사 철불 연구」, 『불교미술사학』 15 (2013), pp. 76-78; 동저,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재고」,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pp. 109-113; 정동락, 「신라 하대 선종 사원과 철불」, 『한국고대사탐구』 2 (2017), pp. 92-93.

4) 최인선, 「신라하대 철조불상의 연구」 (단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1), pp. 17-18; 동저, 앞의 논문 (1998), p. 38; 동저, 앞의 논문 (2007), pp. 42-44; 최성은, 앞의 책, pp. 29-30.

5) 황수영, 앞의 논문, p. 24; 동저, 『황수영전집1: 한국의 불상(상)』 (혜안, 1998), p. 459.

6) 최완수, 앞의 책, p. 156.

7)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有甲騎爲前騶之異乃錫挺樵溪而歷相 焉且見山屛四迾則獄鳥翅掀雲水帶百圍則虬 腰偃石旣愕且唶曰獲是地也庸非天乎不爲靑衲之居其作黃巾之窟 遂率先於衆防後爲基起瓦▨3四注以壓之鑄鐵像二軀以衛之至.”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8) 『滄溪集』 第一卷 詩 「聖住洞」 “瓦礫何年寺. 空山鐵佛愁. 孤雲碑欲缺. 白月塔猶浮. 峽水尋源到. 崦村問舍留. 前林見光氣. 採玉過東丘.”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참조.

9) 윤창화,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민족사, 2017), pp. 21-24, 56-57. 백장회해의 청규의 원형은 산실되어 알 수 없으나, 『宋高僧傳』과 『景德傳燈錄』에서 『古淸規』라고 할 수 있는 문헌을 통해 당시 청규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여기에 불전을 세우지 않고 법당을 설립한다는 내용이 있다(허훈, 「『선원청규』의 직제변화에 대한 고찰」, 『보조사상』 36 (2011), p. 199). 그러나 실제 중국의 선종사원에는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불립불전”의 원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한지만, 「중국 당대 선종사원 성립에 관한 문헌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31-11 (2015), p. 151).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능은 ‘수행하고자 하면 집에서도 할 수 있고 반드시 사원이 아니어도 된다’고 한 바 있어(『南宗頓教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六祖惠能大師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 一卷 “若欲修行, 在家亦得, 不由在寺”(T.48, No. 2007, p. 0341c11)) 선종의 성격이 타 종파에 비해 불상이나 사원에 구애받지 않는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0) 최완수, 앞의 책, p. 156.

11) 이인영, 앞의 논문, pp. 63-64; 문명대, 앞의 논문, p. 101.

12) 조범환, 「신라 하대 홍척선사의 실상산문 개창과 철불 조성」, 『나말여초 선종산문 개창 연구』 (경인문화사, 2008), pp. 32-41.

13) 보림사 철조여래좌상 명문에 명시되어 있으며, 명문은 다음과 같다. “當成佛時, 釋迦如來入滅後一千八百八年耳. 時情王卽位第三年也. 大中十二年戊寅七月十七日, 武州長沙副官金遂宗聞奏情王, 情王八月廿二日, 勅下躬辨, 不覺勞困也.” 상기 명문은 최연식, 「신라 하대 철불 명문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28 (2002), p. 99 참조.

14) “國, 八云踈勒, 又靑丘, 時云新, [釋]迦佛末法三百余年成佛. 時国王願由, 決盡敎華嚴業決言大大[德][由], 伯士 釋氏乘[焒], 發心旦越, 釋氏聽默氏僧道初朩上首, 十方旦越, 同心同願.(중략)” 최연식, 위의 논문, p. 114 참조.

15)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言咸通五年」冬端儀長翁主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謂下生厚資上供以邑司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乃告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寺名安樂僧盍住持從之徙焉居則化矣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行」藏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金公嶷勳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傅之以銑爰用鎭仁宇導冥路使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16) 山本浩二, 「造仏素材としての鉄に関する考察 : 東アジアの鉄仏と製鉄技術についての実証的研究」, 『共立女子大学文芸学部紀要』 62 (2016), pp. 82-83.

17) 권보경, 「신라 하대·고려 철불 연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p. 23.

18) 강우방, 앞의 논문, p. 21; 문명대, 앞의 논문, p. 101.

19) 최성은, 앞의 논문, p. 13.

20) 최인선, 앞의 논문 (2007), p. 44.

21) 강건우, 앞의 논문 (2013), pp. 76-78; 동저, 앞의 논문 (2017), pp. 109-113; 정동락, 앞의 논문, pp. 92-93.

22)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色服 “平人. 幞頭只用絹·布. 表衣·袴只用布. 内衣只用絹·布. 帶只用銅·鐡. 靴禁烏麖皺文紫皮. 靴帶只用鐡·銅. 履用麻已下. 布用十二升已下.”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

23) 『册府元龜』 卷九百九十九 外臣部 四十四 互市 “開成元年六月, 淄靑節度使奏, 新羅渤海將到熟銅 請不禁斷. 是月, 京兆府奏, 准建中元年十月六日勑, 諸錦罽綾羅縠繡織成細紬絲布氂牛尾眞珠銀 銅鐵奴婢等, 竝不得與諸蕃互市. 又准令式, 中國人不合私與外國人交通買賣, 婚娶來往. 又擧取蕃客錢, 以産業, 奴婢爲質者, 重請禁之.” 中国哲学书电子化计划 www.ctext.org/zhs 참조.

24) 서영교, 「신라의 남해품 중계무역과 銅」, 『사회과학저널』 1-2 (2012), pp. 47-55.

25) 서영교, 앞의 글, pp. 31-41; 전덕재, 「통일신라 동·청동제품의 생산과 유통」, 『한국문화』 66 (2014a), p. 187.

26) 권보경, 앞의 논문, pp. 36-38.

27) 박방룡, 「신라왕경과 유통」,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006), pp. 72-75.

28) 국립중앙박물관,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2016), p. 240.

29) 사쿠라기 신이치, 「신안선 출토 동전의 용도와 성격」, 『신안선의 금속공예』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2007), p. 207.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대불의 원료로 송전을 녹여 만든 것을 正說로 본다. 新井 宏, 「金屬を通して歷史を觀る. 鎌倉の大仏と宋錢」, 『バウンダリー』 16(4) (コンパス社, 2000), p. 59.

30) 헤이안시대 후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일본에서는 말법사상의 영향으로 경통을 다수 만든다. 경통의 재료를 분석하였을 때 헤이안시대 말기인 1100년부터 1140년경까지는 일본산 구리가 이용되었다. 1140년경부터 1150년경이 되면 일본산 재료의 경통은 감소하고, 1150년경 이후에는 중국 재료가 이용되었다. 일본산 구리의 원료 광석이 없으므로 구리를 생산하기 어려워지자 중국의 재료를 수입한 것이다. 平尾良光, 「日本における銅·鉛生産の歷史的變遷」, 『保存科学硏究集會』 (奈良文化財研究所, 2018), pp. 8-9.

31) 新井 宏, 앞의 논문, pp. 59-60.

32) 한국문화재단, 『2012년도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 X』 (2015), pp. 350-351.

33) 통일신라 화형접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관13562-4, 5, 6, 7, 8이며, 고려 동종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원 1797과 1915가 분석 대상 유물이었다(강형태·안주영·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금속유물의 납동위원소비 데이터베이스 구축(Ⅰ)」, 『박물관보존과학』 8 (2007), pp. 82-86). 본관13562-9, 10, 11, 12, 13, 14, 15, 16, 17, 18의 10개의 화형접시 역시 중국 남부지역권에 포함되어 있다(강형태·안주영·전효수,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청동유물의 납동위원소비 데이터베이스 구축(Ⅱ)」, 『박물관보존과학』 9 (2008), pp. 109-112).

34) 이은우·김소진·한우림·한민수·황진주, 「납동위원소비 분석을 활용한 인용사지 출토 청동기의 원료 산지 연구」, 『보존과학회지』 30 (2014), p. 350. 이 논문에서는 각 유물 사진 및 소장처 등을 제시하지 않고 과학적인 분석 결과만 제시하였다.

35) 김소진·한우림·황진주·전영중·한민수, 「출토 지역과 시대에 따른 한국 청동기의 납동위원소비 분류 특성」, 『보존 과학연구』 36 (2015), pp. 6-7. 이 논문에서도 결과 데이터만 제시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유물의 납동위원소비는 대다수 Zone 3에 해당하는데, 동아시아 방연석 분포도에 적용하는 경우 Zone 3은 중국 남부 지역에 해당하며, 한국 분포도에 적용하는 경우 옥천대 및 영남육괴 지역으로 가장 넓다. Zone 2는 우리나라 고유의 납동위원소비 특징이지만 Zone 3은 중국과 구분이 안되며(김소진 외 4인, 위의 논문 (2015), p. 6), 원료물질이 혼합된 청동기의 납동위원 소비가 위치하는 구역이기도 하다(이은우 외 4인, 앞의 논문 (2014), p. 349). 납동위원소비 분석은 아직 한계가 있으나, 통일신라 유물의 납동위원소비 분포도가 중국 남부지역일 수도 있는 점과 원료 물질이 혼합된 구역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36) 자세한 성분 분석은 문화재청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선의 금속공예』 (2007), p. 216 참조.

37)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 과학적 분석-재질별 연구사례』 (2018), pp. 107-112.

38) 전호석 외 3인, 「국내 희유금속광 부존 현황 및 개발기술」, 『한국자원공학회지』 55-1 (2018), pp. 74-75. 주석광의 매장량은 약 480만 톤으로 추정하며, 중국(23%), 인도네시아(17%), 브라질(15%), 호주(10%), 볼리비아(8%)에 주로 매장되어 있다. 생산은 중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볼리비아 등에서 이루어진다.

39)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屋舍 “六頭品. 室長廣不過二十一尺, 不覆唐瓦, 不施飛簷·重栿·栱牙·懸魚, 不餙以金·銀·鍮石·白鑞·五彩. 不置巾校勘階及二重階, 階石不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밑줄 필자).

40)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屋舍 “五頭品. 室長廣不過十八尺, 不用山楡木, 不覆唐瓦, 不置獸頭, 不施飛簷·重栿·花斗牙·懸魚, 不以金·銀·鍮石·銅鑞·五彩爲餙.”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밑줄 필자).

41) 『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 色服 “六頭品. 幞頭用繐羅·絁·絹·布. 表衣只用綿紬·䌷·布. 内衣只用小文綾·絁·絹·布. 袴只用絁·絹·綿紬·布. 帶只用烏犀校勘·鍮·鐡·銅. 襪只用絁·綿䌷·布. 靴禁烏䴢皺文紫皮. 靴帶用烏犀·鍮·鐡·銅. 履只用皮·麻. 布用十八升已下. 五頭品. 幞頭用羅·絁·絹·布. 表衣只用布. 内衣半臂只用小文綾·絁·絹·布. 袴只用綿紬·布. 腰帶只用鐡. 襪只用綿紬. 靴禁烏麖皺文紫皮. 靴帶只用鍮·鐡·銅. 履用皮·麻.布用十五升已下. 四頭品. 幞頭只用紗·絁·絹·布. 表衣·袴只用布. 内衣·半臂只用絁·絹·綿紬·布. 腰帶只用鐡·銅. 靴禁烏麖皺文紫皮. 靴帶只用鐡·銅. 履用牛皮·麻已下. 布用十三升已下. 平人. 幞頭只用絹·布. 表衣·袴只用布. 内衣只用絹·布. 帶只用銅·鐡. 靴禁烏麖皺文紫皮. 靴帶只用鐡·銅. 履用麻已下. 布用十二升已下.”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밑줄 필자).

42) 상원사 동종 명문에는 鍮 3,300鋌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鍮銅을 鍮라고 표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동은 구리-주석 합금을 말하는 것이다. 鍮를 鍮石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으나, 유석은 구리-아연 합금으로 수입품이며 귀금속이고, 유동은 구리-주석 합금으로 신라가 생산할 수 있는 합금이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구리-주석 합금을 표현할 때 鍮를 사용하지 않지만, 신라는 자국의 동합금에 鍮라고 표기하였다(김민수, 「신라의 유석 인식과 그 특징」, 『한국고대사연구』 96 (2019), pp. 314-316).

43) 권보경, 앞의 논문, pp. 48-49.

44) 유원적, 「동전과 장보고 해상무역」, 『위진수당사연구회회보』 2 (1994), p. 100.

45) 『宋史』 志 第一百三十三 食貨 下 二 “錢本中國寶貨,今乃與四夷共享,又自廢罷銅禁,民間銷毀無復可辦. 銷熔十錢得精銅一兩,造作器用,獲利五倍. 如此則逐州置爐,每爐增數.” 中国哲学书电子化计划 www.ctext.org/zh 참조. 『송사』는 五代의 周부터 317년간의 史實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至正 5年(1345)에 간행하였다.

46) 『續資治通鑑長編』 卷一百十五 “權度支判官李申言,廣南蕃舶多毀錢以鑄銅器,請自今陳告者皆倍給賞錢,公人遷一資. 從之.” 中国哲学书电子化计划 www.ctext.org/zh 참조.

47) 권보경, 앞의 논문, p. 50.

48) 전덕재, 「경주 동천동 왕경유적의 성립과 그 성격」, 『신라문화』 43 (2014b), pp. 422-423.

49) 전덕재, 앞의 논문 (2014a), pp. 177-178. 일본의 長登銅山에 대해서 八木 充, 「長登木簡からみた古代銅生産」, 『長登銅山跡』 Ⅱ (日本 山口県 : 美東町敎育委員會, 1993), pp. 234-235 참고.

50) 경주지역에 있는 청동 공방 유적에 관해서는 전덕재, 앞의 논문 (2014a), p. 171; 차순철, 「경주지역의 청동생산 공방 운영에 대한 일고찰」, 『문화재』 38 (2005), pp. 199-206 참고.

51) 정병삼, 「승려의 활동과 사원의 운영」, 『신라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13 : 신라의 불교 수용과 확산』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 2016), p. 338.

52) 권보경, 앞의 논문, pp. 61-62.

53) 이 논문에서는 지면 관계상 명문을 모두 수록할 수 없었다. 본고의 철불 명문과 해석은 최연식의 논문(최연식, 앞의 논문, 2022)을 참고하였다.

54) 최연식, 앞의 논문, p. 99.

55) 보림사 철불 양식은 실상사 철불과는 다른 새로운 불상양식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서지민은 보림사 철불이 唐代 철불과 통일신라 후기 승상의 사실적인 불상양식을 반영한다고 보았다. 또한 헌안왕이 보림사 철불의 후원자이며, 김수종이 불사를 총괄했다고 본다(서지민, 「寶林寺 철조비로자나불상의 後援과 制作工程 연구」, 『동악미술사학』 32 (2022), pp. 146-153).

56) 실상사 철불의 제작기법에 관한 조사는 국립중앙박물관, 『남원 지역의 철불』 (2011), pp. 44-57 참조.

57) 국립중앙박물관, 앞의 책, pp. 45-57, 106-108.

58) 권보경, 앞의 논문, pp. 86-87. 장흥 보림사 철불의 경우 실상사 철불과 같이 과학적인 조사를 진행한 바 없으므로, 본고에 실린 보림사 철불의 외형틀 분할선 도면은 필자의 육안 조사에 의거하여 작성하였다.

59) 실상사 철불 조성 편년에 대한 연구는 다수 있다. 9세기 초기 930년 무렵을 추정하는 논문은 中吉功, 『新羅·高麗の佛像』 (東京: 二玄社, 1971), p. 140; 황수영, 앞의 논문 (1982), pp. 18-21; 최인선, 앞의 논문 (1998), p. 42; 조범환, 앞의 논문 (2006), pp. 57-58; 정동락, 앞의 논문, p. 81. 828년부터 840년으로 제작시기를 추론하는 논문도 있으며(최성은, 「신라 하대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고찰」, 『한국사학보』 54 (2014), pp. 180-185), 9세기 2/4분기를 제작시기로 보기도 한다(문명대, 앞의 논문, pp. 97-98). 840년 무렵으로 추정하는 논문 가운데 문성왕의 후원으로 수철이 조성했다고 보는 의견(강건우, 앞의 논문 (2017), pp. 111-115; 진정환, 「신라 하대 선종 미술의 모태, 실상산문의 불교미술품」, 『전북사학』 53 (2018), pp. 7-11)과 현욱의 영향으로 조성했다는 의견(배제훈, 「신라 하대 철불의 수용과 후원세력」,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pp. 25-27)이 있다.

60) 조범환, 앞의 책, pp. 32-41.

61) 최인표, 『나말려초 선종정책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pp. 24-25.

62) 문성왕의 혜철 후원은 혜철의 武州 지역의 영향력 때문이며(조범환, 「신라 하대 선승과 왕실」, 『신라문화』 26 (2005), p. 14), 무염에 대한 후원 역시 熊川州 지역에 대한 지배권 행사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최인표, 「신라하대 선종교단의 동향과 왕실의 대응」, 『신라문화』 27 (2006), p. 14).

63) 권보경, 앞의 논문, pp. 119-122.

64) 축서사 삼층석탑은 탑에서 나온 납석사리호의 명문에 따라 867년에 따라 조성되었다고 본다.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등간격의 형식적 옷주름, 작은 손, 대좌의 중대 형태와 공양자 상, 중대와 하대 사이의 고임석 등의 양식을 볼 때 삼층석탑과 함께 조성되었으며, 조성연대는 867년이라고 할 수 있다(임영애,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목조광배」, 『이화사학연구』 55 (2017), pp.45-47, 54-59).

65) 최연식, 앞의 논문, p. 114.

66) 한나라·이찬희·이정은, 「방사선 투과촬영을 활용한 철불의 손상도 평가 및 제작기법 고찰」, 『보존과학회지』 30-1 (2012), p. 91.

67) 권보경, 앞의 논문, p. 99.

68) 도피안사 철불 명문은 다음 논문을 참고하였다. 최연식, 앞의 논문, pp. 106-107.

69) 권보경, 앞의 논문, pp. 108-109.

70) 한나라·이찬희·이정은, 앞의 논문, pp. 89-91.

71) 최연식,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복장 백지묵서사본의 기초적 검토」, 『한국사상사학』 48 (2014), pp. 9-11.

72) 권보경, 앞의 논문, pp. 110-111. 예천 한천사 철불좌상은 2002년 수리조사보고서 외에 과학적 조사를 시행한 바 없는데, 이 보고서는 불교조각원, 『보물 제667호 한천사 철조여래좌상 수리조사보고서』 (2002)이다. 보고서에는 외형틀 분할선에 대한 내용은 없으므로, 한천사 철불좌상의 외형틀 분할선 도면 역시 필자의 육안 조사를 바탕으로 작성하였다.

73) 권강미, 「중국 당대 철불의 신례-濰坊市博物館 및 平遙縣博物館 所藏品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79 (2010), p. 149.

74) 권보경, 앞의 논문, pp. 14-19.

75) 진정환, 앞의 논문, p. 14.

76) 「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宣帝十四年仲春副守金彦卿夙陳弟子之禮嘗爲入室之賓減淸俸出私財市鐵二千五百斤鑄廬舍那佛一軀以莊禪師所居梵宇(중략)”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77) 곽승훈, 「신라 경문왕대 法弼의 선 사상과 보현행원사상」, 『사학연구』 126 (2017), pp. 139-141.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咸通▨年贈太師景文大王以在山別赴降趺急從一日八角堂請敎禪同異對曰深宮自有千迷道▨▨終無”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78) 「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言咸通五年」冬端儀長翁主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謂下生厚資上供以邑司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乃告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寺名安樂僧盍住持從之徙焉居則化矣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行」藏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金公嶷勳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傅之以銑爰用鎭仁宇導冥路使行”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www.portal.nrich.go.kr 참조.

79) 최연식, 앞의 논문 (2022), p. 114.

80) 임영애, 「신라 하대 경문왕대 불교조각의 재조명」, 『미술사학연구』 278 (2013), pp. 12-13. 『강원도회양부금강산장안사 사적』에 「장안사 비로자나불배석각」이 실려서 조상기를 전하고 있지만, 현재 불상과 광배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81) 비문은 주 7 참조. 도헌의 봉암사 창건은 880년에서 881년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881년에 국가에서 사액하였기 때문이다. 봉암사는 창건 후 국가의 사액을 받았으나 지방 세력 沈忠(?~?)이 희사하여 창건한 것이므로 왕실이 아닌 지방세력이 후원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왕실에서는 선승을 세력 아래 두고자 나중에 사액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860년대와는 달리 880년 이전 시기부터 지방세력이 확대되고 왕실의 지배력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82) 『三國史記』 卷第十一 新羅本紀 第十一 憲康王 六年 “九月九日, 王與左右, 登月上樓四望, 京都民屋相屬, 歌吹連聲. 王顧謂侍中敏恭曰, “孤聞今之民閒, 覆屋以瓦不以茅, 炊飯以炭不以薪, 有是耶.” 敏恭對曰, “臣亦甞聞之如此.” 因奏曰, “上即位以來, 隂陽和, 風雨順, 歳有年, 民足食, 邉境謐静, 市井歡娱, 此聖徳之所致也.” 王欣然曰, “此卿等輔佐之力也, 朕何徳焉.””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

83) 『三國史記』 卷第十一 新羅本紀 第十一 眞聖王 三年 “三年國内諸州郡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所在盗賊蜂起. 於是, 元宗·哀奴等, 㩀沙伐州叛. 王命奈麻令竒捕捉.”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www.db.history.go.kr 참조.

84) 신라 하대 조성하기 시작한 철불은 고려 전기에 다수 만들어지고 고려 중기 이후에는 점차 사라지게 된다(권보경, 앞의 논문, pp. 294-295). 철불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는 추후 별도의 논고를 마련할 것이다.

Fig. 1.
<장흥 보림사 철조여래좌상> Seated Iron Vairocana Buddha of Porimsa, Changhŭng, 859, Unified Silla (Photograph by the author)
kjah-318-202306-001f1.jpg
Fig. 2.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Seated Gilt-bronze Vairocana Buddha of Pulguksa, Kyŏng ju, Unified Silla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https://www.heritage.go.kr/)
kjah-318-202306-001f2.jpg
Fig. 3.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Seated Iron Buddha of Silsangsa, Namwŏn, Unified Silla (Photograph by Yŏngae Im)
kjah-318-202306-001f3.jpg
Fig. 4.
<경주 백률사 금동약 사여래입상> Standing Gilt-bronze Bhaisajyaguru Buddha of Paengny ulsa, Kyŏngju, Unified Silla (Photograph by Yŏngae Im)
kjah-318-202306-001f4.jpg
Fig. 5.
<동해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 Seated Iron Rocana Buddha of Samhwasa, Donghae, Unified Silla (Photograph by the author)
kjah-318-202306-001f5.jpg
Fig. 6.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Seated Stone Vairocana Buddha of Ch’uksŏsa, Ponghwa, 867, Unified Silla (Photograph by Sojung Kim)
kjah-318-202306-001f6.jpg
Fig. 7.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Seated Iron Vairocana Buddha of Top ’iansa, Ch’ŏrwŏn, 865, Unified Silla (Photograph by Yŏngae Im)
kjah-318-202306-001f7.jpg
Fig. 8.
<예천 한천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Seated Iron Vairocana Buddha of Hanch ’ŏnsa, Yech’ŏn, Unified Silla (Photograph by the author)
kjah-318-202306-001f8.jpg
Fig. 9.
<합천 해인사 법보전 목조비로자나불 좌상> Seated Wooden Vairocana Buddha in Pŏpponjŏn of Haeinsa, Hapch ’ŏn, 883, Unified Silla (Photograph by Yŏngae Im)
kjah-318-202306-001f9.jpg
Fig. 10.
<開花寺 鐵造如來坐像>, Seated Iron Buddha of Kaihua, Taiyuan Shanxi, China, Tang (National Museum of Korea, Iron Buddha Statues of Namwon Area, p. 115)
kjah-318-202306-001f10.jpg
Table 1.
〈통일신라 철불 목록〉 Iron Buddhas of Unified Silla period
Name Period
Size (cm)
Current Dating Mt Dating
<남원 실상사 철불> the Late Silla Period 840 273.59
Seated Iron Buddha of Silsangsa, Namwŏn
<장흥 보림사 철불> 859 859 273.5
Seated Iron Vairocana Buddha of Porimsa, Changhŭng
<동해 삼화사 철불> Late Silla King Kyŏngmun’s Reign (861-875) 120 after repairing
Seated Iron Rocana Buddha of Samhwasa, Donghae 144.4 before repairing
<철원 도피안사 철불> 865 865 104.5
Seated Iron Vairocana Buddha of Top’iansa, Ch’ŏrwŏn
<예천 한천사 철불> the Late Silla Period the Late 9th Century 153
Seated Iron Vairocana Buddha of Hanch’ŏnsa, Yech’ŏn
Table 2.
<통일신라 여래좌상의 다리 앞 옷주름> The draper y folds bet ween the legs of the seated Buddha Statues from Unif ied Silla period
kjah-318-202306-001i1.jpg
Table 3.
<통일신라 철불의 외형틀 분할선> The outer mold lines of Unif ied Silla Iron Buddha Statues
kjah-318-202306-001i2.jpg

REFERENCES

『高麗史』.

『金史』.

『南宗頓教最上大乘摩訶般若波羅蜜經六祖惠能大師於韶州大梵寺施法壇經』 (T.48, No. 2007).

『三國史記』.

『三國遺事』.

『宣和奉使高麗圖經』.

『續資治通鑑長編』.

『宋史』.

『新五代史』.

『册府元龜』.

林泳, 『滄溪集』.

강건우, 「실상사 철불 연구」, 『불교미술사학』 15, 2013.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재고」,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강우방, 「통일신라 철불과 고려철불의 편년시론-충남 서산군 운산면의 철불과 운산면 보원사지 장륙철불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41, 1998.

강형태·안주영·허일권,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금속유물의 납동위원소비 데이터베이스 구축(Ⅰ)」, 『박물관 보존과학』 8, 2007.

강형태·안주영·전효수,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청동유물의 납동위원소비 데이터베이스 구축(Ⅱ)」, 『박물관 보존과학』 9, 2008.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 과학적 분석-재질별 연구사례』, 2018.

국립중앙박물관, 『남원지역의 철불』, 2011.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 2016.

국립해양유물전시관, 『신안선의 금속공예』, 2007.

김민수, 「신라의 유석 인식과 그 특징」, 『한국고대사연구』 96, 2019.

김소진·한우림·황진주·전영중·한민수, 「출토 지역과 시대에 따른 한국 청동기의 납동위원소비 분류 특성」, 『보존과학연구』 36, 2015.

곽승훈, 「신라 경문왕대 法弼의 선 사상과 보현행원사상」, 『사학연구』 126, 2017.

권강미, 「중국 당대 철불의 신례-濰坊市博物館 및 平遙縣博物館 所藏品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79, 2010.

권보경, 「신라 하대·고려 철불 연구」,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문명대, 「신라철불 조성문제와 실상사 철아미타불좌상 연구」, 『불교학보』 37, 2000.

박방룡, 「신라왕경과 유통」,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006.

배제훈, 「신라 하대 철불의 수용과 후원세력」, 『한국고대사탐구』 27, 2017.

불교조각원 외, 『보물 제667호 한천사 철조여래좌상 수리조사보고서』, 2002.

서영교, 「신라의 남해품 중계무역과 銅」, 『사회과학저널』 1-2, 2012.

서지민, 「寶林寺 철조비로자나불상의 後援과 制作工程 연구」, 『동악미술사학』 32, 2022.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편찬위원회,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13 : 신라의 불교수용과 확산』, 2016.

유원적, 「동전과 장보고 해상무역」, 『위진수당사연구회회보』 2, 1994.

윤창화, 『당송시대 선종사원의 생활과 철학』, 민족사, 2017.

이은우·김소진·한우림·한민수·황진주, 「납동위원소비 분석을 활용한 인용사지 출토 청동기의 원료 산지 연구」, 『보존과학회지』 30, 2014.

이인영, 「고려시대 철불상의 고찰」, 『미술사학보』 2, 1989.

임영애, 「신라 하대 경문왕대 불교조각의 재조명」, 『미술사학연구』 278, 2013.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목조광배」, 『이화사학연구』 55, 2017.

전덕재, 「통일신라 동·청동제품의 생산과 유통」, 『한국문화』 66, 2014.

,「경주 동천동 왕경유적의 성립과 그 성격」, 『신라문화』 43, 2014.

전호석 외 3인, 「국내 희유금속광 부존 현황 및 개발기술」, 『한국자원공학회지』 55-1, 2018.

정동락, 「신라 하대 선종 사원과 철불」, 『한국고대사탐구』 2, 2017.

조범환, 「신라 하대 선승과 왕실」, 『신라문화』 26, 2005.

,『나말여초 선종산문 개창 연구』, 경인문화사, 2008.

진정환, 「신라 하대 선종 미술의 모태, 실상산문의 불교미술품」, 『전북사학』 53, 2018.

차순철, 「경주지역의 청동생산 공방 운영에 대한 일고찰」, 『문화재』 38, 2005.

최성은, 『철불』, 대원사, 1995.

,「장보고 선단과 신라하대 불교조각」, 『선사와 고대』 32, 2010.

,「신라 하대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고찰」, 『한국사학보』 54, 2014.

최연식, 「해인사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복장 백지묵서사본의 기초적 검토」, 『한국사상사학』 48, 2014.

,「신라 하대 철불 명문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28, 2022.

최인선, 「신라하대 철조불상의 연구」, 단국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1991.

,「한국철불연구」, 한국교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한국의 철불」, 『박물관기요』 22, 2007.

최인표, 「신라하대 선종교단의 동향과 왕실의 대응」, 『신라문화』 27, 2006.

,『나말려초 선종정책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7.

최완수,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3』, 대원사, 2007.

한국문화재단, 『2012년도 소규모 발굴조사 보고서 X』, 2015.

한나라·이찬희·이정은, 「방사선 투과촬영을 활용한 철불의 손상도 평가 및 제작기법 고찰」, 『보존과학회지』 30-1, 2012.

한지만, 「중국 당대 선종사원 성립에 관한 문헌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31-11, 2015.

허 훈, 「『선원청규』의 직제변화에 대한 고찰」, 『보조사상』 36, 2011.

황수영, 「통일신라시대의 철불」, 『미술사학연구』 154·155, 1982.

,『황수영전집1: 한국의 불상(상)』, 혜안, 1998.

中吉功, 『新羅·高麗の佛像』, 東京: 二玄社, 1971.

八木 充, 「長登木簡からみた古代銅生産」, 『長登銅山跡』Ⅱ, 日本 山口県 : 美東町敎育委員會, 1993.

新井 宏, 「金屬を通して歷史を觀る. 鎌倉の大仏と宋錢」, 『バウンダリー』 16(4), コンパス社, 2000.

山本浩二, 「造仏素材としての鉄に関する考察 : 東アジアの鉄仏と製鉄技術についての実証的研究」, 『共立女子大学文芸学部紀要』62, 2016.

平尾良光, 「日本における銅·鉛生産の歷史的變遷」, 『保存科学硏究集會』, 奈良文化財研究所, 2018.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https://portal.nrich.go.kr/kor/index.do.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中国哲学书电子化计划 https://ctext.org/zhs.

Ch’anggyejip.

Cefu yuangui.

Jinshi.

Koryŏsa.

Nánzōng dùnjiào.

Zuìshàngdàchéngmóhēbōrěbōluómìjīngliùzǔhuìnéngdàshīyúsháozhōudàfànsìshīfǎtánjīng.

Samguk sagi.

Samguk yusa.

Songshi.

Xin Wudaishi.

Xuanhe fengshi Gaolitujing.

Xu Zizhi tongjian changbian.

Ch’a, Sunch’ŏl. “Kyŏngju jiyŏk ŭi ch’ŏngdong saengsan kongbang unyŏng e taehan ilgoch’al.” Munhwajae 38 (2005): 179-222.

Chin, Jŏnghwan. “Shilla hadae sŏnjong misul ŭi mot’ae, shilsangsanmun ŭi pulgyo misulp’um.” Chŏnbuksahak 53 (2018): 5-40.

Cho, Bŏmhwan. “Shilla hadae sŏnsŭng kwa wangsil.” Silla munhwa 26 (2005): 259-281.

.Namaryŏch’o sŏnjong sanmun kaech’ang yŏn’gu. Sŏul: Kyŏnginmunhwasa, 2008.

Ch’oe, Inp’yo. “Shillahadae sŏnjonggyodanŭi tonghyanggwa wangshirŭi taeŭng.” Shillamunhwa 27 (2006): 75-109.

.Namallyŏch’o sŏnjong jŏngch’aek yŏn’gu. P’aju: Han’guk haksul chŏngbo, 2007.

Ch’oe, Insŏn. “Silla hadae ch’ŏljo pulsangŭi yŏn’gu.” Master’s thesis, Dankook University, 1991.

. “Han’guk ch’ŏlbul yŏn’gu.” Ph.D. diss., Korea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1998.

. “Han’guk ŭi ch’ŏlbul.” Pangmulgwan’giyo 22 (2007): 33-71.

Ch’oe, Sŏngŭn. Ch’ŏlbul. Sŏul: Taewŏnsa, 1995.

. “Changbogo sŏndan’ kwa silla hadae pulgyojogak.” Sŏnsa wa kodae 32 (2010): 5-33.

. “Silla hadae silssangsa ch’ŏljoyŏraejwasange taehan koch’al,” Han’guksa hakpo 54 (2014): 157-190.

Ch’oe, Wansu.Han’guk pulsang ŭi wŏllyurŭl ch’ajasŏ 3. Sŏul: Taewŏnsa, 2007.

Ch’oe, Yŏnsik. “Haeinsa taejŏkkwangjŏn pirojanabul pokchang paekchimuksŏ sabon ŭi kich’ojŏk kŏmt’o.”Han’guk sasangsahak 48 (2014): 5-48.

. “Silla hadae ch’ŏlbul myŏngmun ŭi chaegŏmt’o.” Mokkan’ kwa munja 28 (2022): 93-117.

Chŏn, Dŏkchae. “T’ongilsilla tong ch’ŏngdong chep’um ŭi saengsan kwa yut’ong.” Han’guk munhwa 66 (2014): 169-206.

. “Kyŏngju tongch’ŏndong wanggyŏng yujŏk ŭi sŏngnip kwa kŭ sŏnggyŏk.” Shillamunhwa 43 (2014): 397-432.

Chŏn, Hosŏk, Sangho Paek, Sŏngmin Kim, and Byŏnghŏn Ko. “Kungnae hŭiyugŭmsokkwang pujon hyŏnhwang mit kaebal kisul.”Han’gukchawŏn’gonghak’oeji 55, no.1 (2018): 67-82.

Chŏng, Tongnak. “Silla hadae sŏnjong sawŏn’ kwa ch’ŏlbul.” Han’guk kodaesa t’amgu 2 (2017): 57-102.

Han, Nara, Ch’anhŭi I, and Jŏngŭn I. “Pangsasŏn t’ugwa ch’waryŏng ŭl hwaryonghan ch’ŏlbul ŭi sonsangdo p’yŏngga mit chejak kibŏp koch’al.” Pojon’gwahak’oeji 30, no. 1 (2012): 81-93.

Han’guk munhwa jaedan. 2012 nyŏndo sogyumo palgul chosa pogosŏ Ⅹ. Kyŏngju: Han’gungmunhwajaedan, 2015.

Hŏ, Hun. “Sŏnwŏn ch’ŏnggyu ŭi chikche pyŏnhwa e taehan koch’al.” Pojosasang 36 (2011): 193-226.

Hwang, Suyŏng. “T’ongil silla sidae ŭi ch’ŏlbul.” Misulsahak yŏn’gu 154·155 (1982): 17-24.

.Hwangsuyŏng jŏnjip 1 : Han’guk ŭi pulsang. Sŏul: Hyean, 1998.

I, Inyŏng. “Koryŏ sidae ch’ŏlbulsang ŭi koch’al.” Misulsa hakpo 2 (1989): 51-98.

I, Ŭnu, Sojin Kim, Urim Han, Minsu Han, and Jinju Hwang. “Naptongwiwŏn sobi punsŏk ŭl hwaryonghan inyongsaji ch’ult’o ch’ŏngdonggiŭi wŏllyo sanji yŏn’gu.” Pojon’gwahak’oeji 30 (2014): 345-351.

Im, Yŏngae. “Silla hadae kyŏngmunwangdae pulgyojogak ŭi chaejomyŏng.” Misulsahak yŏn’gu 278 (2013): 5-30.

. “Ponghwa ch’uksŏsa sŏkcho pirojanabul chwasang kwa mokcho gwangbae.” Ihwasahak yŏn’gu 55 (2017): 41-75.

Kang, Kŏnu. “Silsangsa ch’ŏlbul yŏn’gu.” pulgyomisul sahak 15 (2013): 71-100.

. “Namwŏn silsangsa ch’ŏlcho yŏrae chwasang chaego.” Han’guk kodaesa t’amgu 27 (2017): 103-136.

Kang, Hyŏngt’ae, Chuyŏng An, and Ilgwŏn Hŏ.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sojang kŭmsok yumul ŭi naptongwiwŏn sobi teit’ŏ peisŭ kuch’uk.” Pangmulgwan pojon’gwahak 8 (2007): 81-95.

Kang, Hyŏngt’ae, Chuyŏng An, and Hyosu Chŏn.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sojang ch’ŏngdong yumul ŭi naptongwiwŏn sobi teit’ŏ peisŭ kuch’uk.” Pangmulgwan pojon’gwahak 9 (2008): 105-116.

Kang, Ubang. “T’ongilsilla ch’ŏlbul kwa koryŏ ch’ŏlbul ŭi p’yŏnnyŏn siron: ch’ungnam sŏsan’gun unsanmyŏn ŭi ch’ŏlbul kwa unsanmyŏn powŏnsaji changnyuk ch’ŏlbul ŭl chungsimŭro.” Misulcharyo 41 (1998): 1-31.

im, Minsu. “Silla ŭi yusŏng insik kwa kŭ t’ŭkching,”Han’guk kodaesa yŏn’gu 96 (2019): 289-322.

Kim, Sojin, Urim Han, Chinju Hwang, Yŏngjung Chŏn, and Minsu Han. “Ch’ult’o chiyŏk kwa sidae e ttarŭn han’guk ch’ŏngdonggi ŭi naptongwiwŏn sobi pullyu t’ŭksŏng.” Pojon’gwahak yŏn’gu 36 (2015): 4-10.

Kungnip munhwajae yŏn’guso. Munhwajae kwahakchŏk punsŏk: chaejilbyŏl yŏn’gu sarye. Taejŏn: Kungnip munhwajae yŏn’guso, 2018.

Kungnip h’aeyang yumul chŏnsigwan. Sinansŏn ŭi kŭmsok kongye. Mokp’o: Kungnip h’aeyang yumul chŏnsigwan, 2007.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Namwŏn chiyŏk ŭi ch’ŏlbul. Sŏul: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2011.

Sinan hae jŏsŏn esŏ ch’ajanaen kŏttŭl. Sŏul: Kungnip chungang pangmulgwan, 2016.

Kwak, Sŭnghun. “Silla kyŏngmunwangdae pŏpp’il ŭi sŏn sasang kwa pohyŏnhaengwŏn sasang.” Sahakyŏn’gu 126 (2017): 119-148.

Kwŏn, Pogyŏng. “Silla hadae koryŏ ch’ŏlbul yŏn’gu.” Ph.D diss., Dongguk University, 2022.

Kwŏn, Kangmi. “Chungguk tangdae ch’ŏlbul ŭi sillye: yubangshi pangmulgwan mit p’yŏngyohyŏnbangmulgwan sojyangp’umŭl chungsimŭro.” Misulcharyo 79 (2010): 145-162.

Mun, Myŏngdae. “Sillach’ŏlbul chosŏng munje wa silsangsa ch’ŏramit’abulchwasang yŏn’gu.” Pulgyohakpo 37 (2000): 91-107.

Pae, Chehun. “Silla hadae ch’ŏlbul ŭi suyong kwa huwŏn seryŏk.” Han’guk kodaesa t’amgu 27 (2017): 7-56.

Pak, Pangnyong. “Shillawanggyŏnggwa yut’ong.” Shillamunhwajehaksulbalp’yononmunjip (2006): 63-104.

Pulgyo chogagwŏn. Pomul che 667 ho hanch’ŏnsa ch’ŏlcho yŏrae jwasang surijosa bogosŏ. Pulgyo chogagwŏn, 2002.

Silla ch’ŏnnyŏn ŭi yŏksa wa munhwa p’yŏnch’an wiwŏnhoe, Silla ch’ŏnnyŏn ŭi yŏksa wa munhwa yŏn’gu ch’ongsŏ 13: Silla ŭi pulgyo suyong kwa hwaksan, Kyŏngsang bukto munhwajae yŏn’guwŏn, 2016.

Sŏ, Chimin. “Porimsa ch’ŏlcho pirojanabulsang ŭi huwŏn’ kwa chejak kongjŏng yŏn’gu.” Tongang misulsahak 32 (2022): 141-169.

Sŏ, Yŏnggyo. “Silla ŭi namhaep’um chunggyemuyŏk kwa kyŏl.” Sahoe gwahak chŏnŏl 1, no. 2 (2012): 23-66.

Yu, Wŏnjŏk. “Tongjŏn’ kwa changbogo haesang muyŏk.” Wijinsudangsa yŏn’guhoe hoebo 2 (1994): 100-102.

Yun, Ch’anghwa. Tangsong sidae sŏnjong sawŏn ŭi saenghwal kwa ch’ŏrhak. Sŏul: Minjoksa, 2017.

Arai, Hiroshi. “Kinzokuo tōshite shio kanru 16. Kamakura no daibutsu to Sō.” Baundari 16, no. 4 (2000): 58-62.

Hirao, Yoshimitsu. “Nippon niokeru dō namari seisan no teki.” Hozon kagaku shū, Nippon Nara: Nara bunkazai kenkyūjo, 2018.

Nakagiri, Isao. Shiragi· Kōrai no hotoke-zō. Tōkyō: Nigensha, 1971.

Yagi, Takashi. “Naganobori mokkan kara mita kodai dō seisan.” Naganobori dōzan ato Ⅱ. Yamaguchiken: Mitōmachi iin, 1993.

Yamamoto, Kōji. “Miyatsuko Futsu sozai toshite no tetsu nikansuru kōsatsu : Higashiajia no tetsu Futsu to seitetsu gijutsu nitsuite no jisshōteki kenkyū.” Kyōritsu joshi daigaku bungei gakubu kiyō 62 (2016): 77-96.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https://www.heritage.go.kr/.

Chinese Philosophy Books Electronic Project, https://ctext.org/zhs.

Database for the Collection of Korean Classics, https://db.itkc.or.kr/.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https://portal.nrich.go.kr/kor/index.do.

The Korean History Database, http://db.history.go.kr/.



ABOUT
BROWSE ARTICLES
EDITORIAL POLICY
FOR CONTRIBUTORS
Editorial Office
Rm. 601. Harvard Officetel Bldg. 1794, Nambusunhwan-ro, Gwanak-gu, Seoul 08786, Republic of Korea
Tel: +82-2-884-0271    Fax: +82-2-884-0277    E-mail: ahak@korea-art.or.kr                

Copyright © 2024 by Art History Association of Korea.

Developed in M2PI

Close layer
prev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