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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3; 2022 > Article
明 末期 넓은굽 청화백자의 제작과 朝鮮 17세기 官窯 백자에 미친 영향

Abstract

그릇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형태와 크기가 달라진다. 鉢 같은 일상의 반상기는 조형의 변화 속도나 폭이 크지 않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릇의 세부 형태와 크기가 조금씩 달라진다. 기후 환경이 변하고 사회 규모가 성장하며 공동체의 민족 구성이 달라지는 등 다양한 요인이 食文化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진적인 문화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그릇의 모양 차이는 그 원인과 시점을 뚜렷하게 가늠하기 어렵다. 반면 특이한 형태와 문양의 그릇은 등장 원인과 변화상을 직접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17세기 중국을 비롯한 조선과 일본에서 만든 넓은굽의 백자는 동아시아 3국의 도자 문화에서 눈에 띄는 조형 요소다. 제작 기간이 한정되어 있고 겉모습이 특별하기 때문에 편년 유물로도 활용되고 있다. 실제로 넓은굽은 조선 도자사 연구에서 17세기 관요 백자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넓은굽은 명나라 말기 유행하던 골동과 완상 문화 속에 개념화된 前 시기 명품 자기들의 특징이 當代 중국의 민요 자기에 접목된 결과였다. 왜란과 호란이 일으킨 조선과 중국 사이의 접촉은 조선 왕실과 도성에 거주하는 일부 사대부들이 넓은굽 청화백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중국 자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왜란 이후 조선은 援軍을 파견해 준 명나라에게 극진한 예를 다했으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그릇의 수준을 높이고 형태를 중국식으로 만들었다. 이후 17세기 조선 관요는 중국 그릇의 특징이 반영된 백자를 제작했고 이러한 흐름의 연장에서 넓은굽의 백자도 등장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Abstract

The shape and size of the bowl vary depending on the region and the times. A bowl used every day does not change its shape significantly. Over time, the detailed shape and size of the bowl gradually change.
The shape of the bowl may change due to various factors, such as changing the climate environment, growing social scale, and changing the composition of the community's changes.
However, it is difficult to clearly analyze the cause and time of the difference in the shape of the bowl that changes according to gradual cultural changes. On the other hand, if there is a bowl of unusual shape and pattern, the cause and change of its appearance can be directly inferred.
The white porcelain with bi-shaped bottom made in Joseon and Japan, including China in the 17th century, is a prominent formative element in the ceramic culture of the three East Asian countries. Since the production period is limited and the appearance is special, it is also used as a material to determine the production period. In fact, bi-shaped bottom is recognized as one of the important characteristics of white porcelain in the 17th century in the study of Joseon ceramic history.
Due to their preference for antiques, which were popular in the late Ming Dynasty, the characteristics of the previous period’s Ming Royal kiln ceramics were reflected in the products of commercial kiln’s white porcelain in China at that time.
The contact between Joseon and China, which was caused by the Japanese Invasion of Joseon in 1592 and the Manchu war of 1636, allowed the Joseon royal family and the capital city to use various Chinese porcelain, including blue and white porcelain with bi-shaped bottom.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Joseon gave sincere services to the Ming court, diplomats and made the form Chinese.
Later, in the 17th century, Joseon Royal kiln produced white porcelain ref lecting the characteristics of Chinese vessels, and it can be understood that white porcelain with bi-shaped bottom also appeared in this trend.

Ⅰ. 머리말

朝鮮은 明과 다양한 문화를 공유했으며 사회 제도 또한 유사한 점이 많았다. 물론 명에서 유입된 문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초 모습에서 조금씩 달라져 조선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에 녹아들었다. 일상의 도구로 지역과 시대의 특징을 여실하게 드러내 주는 도자기 또한 양국의 생활문화와 제작 역량의 차이에 따라 비슷한 듯 다른 모습을 나타냈다.
조선과 명은 모두 官窯를 설치하여 중앙에서 필요한 瓷器를 제작했다. 물론 만들어낸 그릇의 종류와 수량, 질적 수준에 차이가 있었지만 두 나라 관요에서 만든 자기 중에는 비슷한 모양의 그릇들이 많았다.
관요는 운영의 기본 목적이 정부가 사용하는 일정량의 그릇을 제공하는 일이었으므로 관요의 그릇은 형태나 크기에 있어서 일정한 규범성을 지녔다. 관요 제품이 가진 시기별 특징은 형태나 크기의 차이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생활문화의 자연스러운 변화가 서서히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관요의 생산 방향성이 그릇의 모양이나 크기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17세기 조선 관요에서 만든 백자 가운데 굽의 접지면이 1cm 가깝게 넓은 그릇은 以前 시기 제작 사례를 파악하기 어려운 유물이다. 조선 시대 넓은굽 백자는 오직 17세기에 주로 관요에서 제작되었으며, 특이한 모습의 굽은 점진적으로 변한 생활문화가 반영된 결과라기보다 특정 기간에만 제작되었다가 사라진 현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넓은굽 백자는 현재 17세기 조선 관요 백자의 중요한 제작 특징 가운데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1
굽이 넓은 백자는 워낙 눈에 띄다 보니 이미 여러 선행연구에서 해당 유물의 제작 시기에 대해 언급했고, 조선의 넓은굽 백자가 명나라 말기 景德鎭 등 중국 民窯에서 만든 비슷한 형태의 청화백자를 본떠 만든 그릇이라는 점은 이미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2
17세기 조선 관요에서 제작한 넓은굽은 그릇의 기능이나 아름다움을 향상하기 위한 요소로 이해하기 어렵다. 굽을 넓게 만든 이유는 중국 그릇의 외형을 충실하게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조선 정부는 관요를 마련한 이후 중국 그릇의 외형 특징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자기들을 제작해 왔으며 17세기 들어서는 중국 그릇의 외형을 반영하려는 의지를 더욱 강하게 드러냈다.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宣祖(재위 1567~1608)와 光海君(1608~1623)에게 명나라에 대한 외교는 늘 정성을 다해야 하는 정무였다. 두 임금은 다른 왕들에 비해 자주 명의 사신을 접대했으며, 그때마다 다양한 행사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야 했다. 이 과정에 중국 그릇의 모양을 본떠 만든 백자는 의전 실무에 필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 그릇의 형태를 반영한 그릇은 광해군 이후로도 관요의 중요 생산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을 것이며, 이러한 관요 생산 경향의 연장에서 넓은굽 백자도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17세기 조선 관요가 중국식 그릇을 제작하기 위해 대상으로 삼은 중국 그릇 가운데는 당시 조선 사회가 직접 접했던 중국 그릇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사용되던 중국 자기의 면모는 최근 서울 시내 출토의 다양한 明末 청화백자들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넓은굽을 지닌 청화백자들은 조형의 특이성을 바탕으로 조선인들에게 중국 그릇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을 것이다.
실제로 넓은굽 백자는 17세기 조선 관요에서 일정한 규범성을 지닌 생산 품목으로 자리 잡았으며, 중국에서 접지면이 넓은 백자의 유행이 끝난 17세기 후반 이후로도 조선의 관요는 넓은굽 백자를 제작했다.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는 17세기 조선 관요 백자의 조형 특징에 선명한 영향을 미친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가 중국에서 제작된 시점과 배경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내외 학계에서 아직 공유되지 못한 편년 유물들을 소개하여 넓은굽 백자의 제작 시기를 보다 구체화하겠다. 또한 명말 넓은굽 백자들이 조선에 전래된 시점과 배경을 고찰하고 동시에 조선 관요에서 만든 넓은굽 백자의 사례를 파악하여 해당 유물들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도 도모하겠다. 이번 연구는 차후 별도의 접근을 통해 이루어질 17세기 조선 관요 백자에 투영된 중국 그릇의 조형 특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발판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

Ⅱ. 明末 넓은굽 청화백자의 제작 배경과 양상

중국은 넓은굽을 접지면 폭이 넓은 굽의 모습이 옛 禮器인 옥으로 만든 璧과 닮았다 하여 玉璧底足 등으로 지칭한다. 중국의 옥벽저 자기는 당나라 시기에 크게 유행했으며, 萬曆帝(재위 1572~1620) 치세 후반부에 다시 등장하여 주로 天啓帝(재위 1620~1627)에서 崇禎帝(재위 1627~1644)로 이어지는 시기까지 여러 점이 제작되었다.3
明末 중국에서 유행한 넓은굽 청화백자는 대부분 景德鎭 등 주로 民窯에서 만들어졌으며, 청나라 말기까지도 극소량이 간헐적으로 제작됐다.4
현재까지 경덕진 민요의 발굴조사에서 명말 넓은굽 백자가 등장한 시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만한 고고학 자료는 보고되지 않았다.5
이번 연구는 명나라 말기에 제작된 넓은굽 청화백자의 조형 특징들을 일부 편년 유물과 함께 분석하는 방식을 통해 해당 유물의 등장 배경과 시점을 구체화할 것이다.
명나라 말기에 만든 넓은굽 청화백자의 외면에는 東坡 蘇軾(1037~1101)의 赤壁賦 내용과 함께 뱃놀이하는 소식의 모습을 장식한 것들이 많고, 그릇의 내저면에 ‘永樂年製’라는 관지를 篆書로 써넣은 유물도 다수 남아있다(Fig. 1).
17세기 중국에서 만든 넓은굽 청화백자의 내저면에 자리한 ‘永樂年製’명은 1591년(만력 19) 高濂(1573~1620)이 지은 『遵生八牋』 등 여러 기록에 등장하는 ‘永樂 壓手杯’의 위상 확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6 영락 압수배는 영락년간(1403~1424)에 만든 손아귀에 딱 들어차는 작은 크기의 잔이다. 이 잔은 16세기 말 중국 사회에서 문양과 형태가 정교하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으며, 내저면에 전서로 쓴 ‘永樂年製’명이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었다.7
명나라 말기 간행된 서적들을 통해 확산한 16세기 이전의 여러 名窯에 대한 품평은 실제로 당시 중국 민요의 제품 생산에도 반영되었다.8
거듭된 명나라의 상업 발달 또한 여러 민요들이 사용자의 취향이나 요구를 반영한 그릇을 더욱 적극적으로 생산하도록 했다.9 당시 경덕진 등지의 민요에서 永樂, 成化, 宣德 등 이름난 자기를 만든 先代의 관지를 써넣은 그릇이 대량으로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러한 조류를 반영한 결과다.
앞선 시기 여러 유명한 가마의 제품들이 지닌 명성에 편승하려는 민요들의 발 빠른 움직임은 때로 당시 지식인이 비판을 가할 정도로 만연했다.10
그 가운데 탄생한 넓은굽 청화백자는 하나의 특정 대상을 본떠 만든 그릇이 아니라 당대 물질문화의 확산과정에 많은 사람이 선호했던 다양한 장르의 유행 요소들을 취합하여 창작해낸 결과물로 정의할 수 있다. 넓은굽만 하더라도 명나라 말기에 유행한 문헌들에 언급된 여러 앞 시기 이름난 가마의 제품들이 지니고 있던 각기 다른 특징들을 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景德鎭陶錄』 가운데 「拾靑日札」은 명나라 말기 田藝衡이 쓴 짧은 글이다. 글에는 永樂窯, 宣德窯, 嘉靖窯 등에서 만든 그릇의 굽 모양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이때 영락 압수배의 굽 특징을 ‘滑底沙足’으로 제시했고, 가정요는 ‘鏝心圓足’이라 묘사했다.11
『준생팔전』도 영락 압수배의 특징으로 『경덕진도록』의 묘사와 비슷한 ‘沙足滑底’를 꼽고 있다.12 명말 골동완상품에 조예가 있던 인물들은 당시에 이름을 날리던 명품들의 특징을 시기별로 구분해 인식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락 압수배의 특징인 沙足이란 꺼끌꺼끌한 굽, 즉 굽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현전하는 영락 압수배가 극히 소량이기는 하지만 역시 모두 접지면의 유약을 제거했으며, 비슷한 크기의 다른 잔들에 비해 접지면이 넓은 편이다(Fig. 2).
명말에 영락 압수배라는 별칭을 얻은 영락 시기 소형의 청화백자잔은 현재 중국 북경의 고궁박물원 등지에 5점 정도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명성을 더해가던 명나라 말기에도 압수배는 수집가들조차 쉽게 접했을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압수배를 모방한 그릇을 만드는 도중에 실제 유물의 조형 특징과 함께 『준생팔전』 등의 기록에 등장하는 여러 명요 제품의 조형 특징이 추가되었던 모양이다.
가정년간 제작된 그릇들 가운데 실제로 확인하기 어려운 조형 요소지만, 명말 지식인들이 가정요의 특징으로 간주했던 중심이 꽉 찬 둥근 굽[鏝心圓足]이 영락 압수배의 특징인 유약을 걷어낸 굽[沙足]과 결합한 것이 바로 명말 민요 청화백자의 넓은굽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넓은굽은 당시 중국 사회에 형성된 이름난 역대 御窯의 명품들이 지녔다고 개념화된 여러 조형 특징을 해석한 다음 연계하여 만들어낸 결과라 할 수 있겠다.13
명말에 등장한 옥벽 모양의 굽은 오래된 물건이라는 관념을 간직함과 동시에 당대 유행하던 골동품 완상 취향을 반영한 일종의 알레고리 역할을 한 것이다.
경덕진 등지의 중국 민요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前赤壁賦」, 「後赤壁賦」의 내용과 이미지처럼 당시 사회가 선호한 문학적인 요소까지 그릇에 추가했다. 최대한 당시 사람들이 선호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소량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편년 유물들은 넓은굽 청화백자의 제작 시점을 조금 더 구체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백자청화관음보살불경문발>은 동체 외면에 남아있는 명문을 통해 만력 치세 후반인 1616년(만력 44)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는 그릇이다(Fig. 3).
유물은 구연부가 외반하고 그 아래로 이어진 기측선이 비교적 곧추선 모습으로 이어지다가 굽으로 좁아든다. 굽은 접지면이 넓고 유약이 시유되지 않았다. 그릇의 외면에는 觀音菩薩과 善財童子가 그려져 있고, 그 사이에 파랑새[靑鳥]를 그야말로 파랗게 묘사했다. 그 외의 공간은 ‘南無大慈大悲救苦救難觀世音菩薩’로 시작하는 112자의 불경이 단정한 楷書로 쓰여있다. 경전의 말미에 ‘皇明萬曆四十四年岁次丙辰仲冬月吉日精造’라는 내용으로 이 그릇이 만력 44년인 1616년에 만든 것임을 기록했다.
그릇의 내면 구연단과 내저면 중앙에는 작고 둥근 고리 모양의 넝쿨이 문양을 이룬 花唐草紋이 자리한다. 구연부의 화당초문대를 이룬 꽃은 연꽃이며 내저면 중앙에 위치한 원형의 화당초문대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4송이의 국화꽃이 자리한다. 원형의 화당초문대가 둘러싼 내저면 중앙에는 ‘南無無量壽佛’이란 6자가 쓰여있다.
<백자청화관음보살불경문발>의 내면 화당초문대와 매우 유사한 문양은 1626년(천계 6) 만든 <백자청화접시형묘지>의 테두리에도 자리한다(Fig. 4).
영국박물관 소장 <백자청화접시형묘지>의 내용은 買地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大明天啓六年九月’명을 통해 제작 시기가 명시되어 있다. 구연부의 화당초문 문양대는 서울 시내에서 출토된 다수의 중국 넓은굽 청화백자들의 내저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로 ‘永樂年製’ 혹은 ‘玉堂佳器’ 등의 명문이 내저면에 자리하는 서울 시내 출토 넓은굽 청화백자들의 제작 시기 또한 위에서 살펴본 편년 유물 두 점과 비슷할 것이다(Fig. 5).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중국 민요에서 만든 넓은굽의 청화백자들이 주로 만력제 후반에서 천계제를 거쳐 일정한 문양 특징을 갖추어 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14
넓은굽의 청화백자는 주로 만력제 시기에 만든 청화백자를 해외로 운송하던 중에 침몰한 萬曆號(The Wanli shipwreck)에도 선적되어 있었다.15 명말 유행하던 넓은굽의 그릇들이 중국 외 여러 지역을 수출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실제 명말 넓은굽의 청화백자는 대만과 오키나와의 일부 유적이나 베트남의 Hội An은 물론 유럽에까지 전해졌으며, 중국과 육로로 연결된 조선의 한양에도 전래되었음이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속속 확인되고 있다.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는 조형 특징이 뚜렷한 만큼 해당 그릇을 본떠 만들려는 다른 나라들의 시도를 불러일으켰다. 멀리 네덜란드 Delft에서도 청화도기로 넓은굽의 그릇을 만들었으며, 중국과 가까운 일본과 조선 또한 넓은굽의 백자를 제작했다.

Ⅲ. 明末 청화백자의 조선 유입과 17세기 조선 관요의 넓은굽 백자 생산

1. 명말 청화백자의 조선 유입과 중국 넓은굽 청화백자의 국내 출토 양상

조선은 명을 사대의 예로 섬겼으며, 명 역시 조선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우대했다. 두 나라 사이의 문화교류 또한 부단하게 이루어졌다. 朝明 간 교류는 양국을 오갔던 사행단을 위주로 이루어진 매개형 교류였으며, 물품 거래를 포괄한 문화 전파의 성격이 강했다. 명나라의 다양한 물질문화는 조선의 문화와 미술에도 공유되고 있었다.16
이러한 양국의 문화 접촉을 더욱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만든 것은 壬辰倭亂이었다. 전쟁은 참혹한 일이지만 다양하고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직접적인 인적교류와 교역을 수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明軍은 전쟁 첫해부터 1600년(선조 33) 한양에서 완전하게 철수할 때까지 햇수로 9년간 조선에 머물렀다.17 명의 군대가 조선에 장기 주둔하는 동안 명나라 상인도 함께 건너와 장사했다. 明商은 자국 군대가 모두 철수한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가져온 물품을 판매할 때까지 체류할 수 있게 해달라 조선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18
근 10년간 이어진 전쟁은 당시 조선의 다양한 계층이 중국과 문물을 직접, 그것도 장기간 접촉할 수 있도록 만든 대사건이었다. 그 과정에 이루어진 다양한 문화교류는 사회문화 여러 부분의 모습을 바꾼 계기가 되었다.
상호 접촉은 양국의 정보와 문화가 상대편에 넓게 펴져 나가도록 만들었으며, 동시에 서로에 대한 이해를 확대할 수 있는 토대도 되었다. 더군다나 16세기 말 전쟁과 함께 동아시아에 닥친 극심한 가뭄과 냉해는 대외무역에 소극적이던 조선의 태도를 어느 정도 변화시켰다.19
이 시기 다수의 중국 그릇도 조선에 전래했으며, 일부 명나라 장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릇을 관계가 있던 조선 사대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20
그 결과 최근 서울 시내 유적들에서 다수의 만력 시기 청화백자들이 출토되고 있다.21 서울 시내에서 출토되는 이러한 중국 청화백자 중에는 명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관계를 맺은 조선인들이 사용했던 그릇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중국 자기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선에 유입되었다. 1636년(인조 14) 丙子胡亂에 패한 조선은 昭顯世子(1612~1645) 일행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냈다. 이후 세자 일행이 머문 瀋陽館은 조선과 청의 중요 교역 무대가 되었으며 심양관 주변에 들어선 시장에서는 양국의 관리, 역관, 상인 등이 다양한 물건을 거래했다.22 청 황실 역시 조선의 세자 일행에게 은그릇과 청화백자를 선물했다.23 또한 심양관에는 청 조정이 마련한 술과 饌品이 수시로 제공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조선 왕실에까지 전달됐다.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이어진 그에 대한 평가는 세자가 愛玩하는 일에 빠졌음을 지적했다.24 구체적인 상황을 가늠하기 어려우나 당시 조선 왕실은 싫든 좋든 청 황실과 자주 접촉했고, 그 연장에서 명말 이후 중국에서 유행하던 다양한 물품이 조선 왕실에 전해진 것은 분명하다.25
실제 1645년(인조 23) 청나라가 北京에 입성한 것을 경축하는 사신단의 正使였던 麟坪大君(1622~1658)은 북경으로 가는 도중 심양에서 귀국하는 조선 역관과 상인들의 말 30여 필을 빼앗았다. 인평대군 자신의 귀국길에 여러 물품을 운반하려는 의도였다.26
17세기 전반 조선 왕실이나 도성의 부유층이 사용한 중국 자기는 임진왜란 등을 통해 이미 조선에 들어와 있던 그릇이거나, 청나라를 통해 들여왔더라도 명말에 제작된 청화백자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孝宗(재위 1649~1659)의 장녀인 淑愼公主(1635~1637)의 묘에서 출토한 嘉靖帝(재위 1521~1566)와 만력제의 연호가 표시된 자기들이 그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다(Fig. 6).
숙신공주는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얻은 딸로 심양에서 포로 생활하던 중에 생을 달리했다.27 효종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직후인 1650년(효종 1)에 중국에서 죽은 숙신공주의 무덤을 조선 땅에 다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28 무덤에 부장된 총 8점의 청화백자와 오채자기에는 대부분 ‘嘉靖’, ‘萬曆’ 등의 관지가 적혀있으나 <백자청화화문소호>(덕수 6465)처럼 민요에서 만든 그릇도 포함되어 있다(Fig. 7).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 일괄품에 생산 시점과 질적 수준이 상이한 유물들이 포함되었던 것은 1650년 숙신공주 묘가 조성되기 전까지 조선 왕실이 다양한 시점과 경로를 통해 중국 청화백자를 확보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토 유물을 통해 조선이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한 이후에도 만력 시기 이전에 제작된 청화백자를 궁궐이 있는 도성을 중심으로 계속 사용했었음을 알 수 있다.
명말에 중국에서 만든 넓은굽 청화백자들 역시 조선 시대 도성의 곳곳에서 사용되었음을 서울 시내 출토 유물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Table. 1).29
특히 청진동 등 종로대로 주변에 자리하는 유적들에서 주로 출토되는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 중에는 앞 장에서 살펴본 1610년대와 1620년대 제작된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 편년 유물처럼 그릇 내저면 중앙에 ‘永樂年製’ 등의 관지와 그 둘레에 당초문대로 이루어진 폭이 넓은 원권문이 자리하고, 외면에는 적벽부의 내용과 소동파의 뱃놀이 전경이 묘사된 유물이 여럿이다.
또한 서울 시내에서 출토된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 가운데는 넓은굽의 그릇에 주로 장식되던 전형적인 명문과 적벽부의 이미지와 글귀 대신에 <백자청화난초문저부편>과 <백자청화국화문잔편>처럼 여러 가지 화훼문 등이 장식된 사례들도 확인할 수 있다(Fig. 8, 9).
『준생팔전』 등 16세기 말에 유행한 서적들에 언급될 정도로 구체화되었던 명말 지식인들의 완상 및 골동 취향은 1610년대와 1620년대 특정한 관지와 문양 요소들을 갖춘 넓은굽 청화백자를 만들었다. 다음 단계인 숭정년간 이후에는 넓은굽 청화백자가 특정한 조합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양 소재와 결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30
문양 소재 등을 고려하자면, 서울 시내에서 출토되는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는 만력 말기와 천순 시기에 제작된 사례가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숭정 시기 이후에 제작된 유물도 일부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출토 양상이 나타난 것은 왜란 이후 17세기 전반까지 명말에 제작된 다양한 그릇들이 도성을 중심으로 조선에 꾸준하게 전래했기 때문이다.
명말 경덕진 등지의 중국 민요에서 만든 넓은굽 청화백자들이 출토되는 국내 유적은 청진동 같은 시전행랑 주변이나 청계천 사이 등 주로 서울의 구도심에 자리한다(Fig. 10).
서울 시내에서 출토되는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는 높이나 구연부의 곡만도에 있어서 일부 차이가 드러나지만 대부분 鉢로 구분할 수 있다.
청진 8지구 유적에서 출토된 <백자청화포도문발편>은 17세기 조선 관요에서 만든 간지명 백자들과 함께 출토되었으며(Fig. 11),31 다른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들 역시 대체로 조선 관요에서 만든 백자들과 함께 출토되는 경향성을 드러낸다.
해당 유물들이 중국 민요의 제품이라고 할지라도 17세기 조선 사회에서 청화백자는 분명 희소한 그릇이었을 것이다. 특히 명나라 사회가 가지고 있던 골동과 완상에 관련한 다양한 물질문화가 확대함에 따라 조선 사회 역시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를 상대적으로 고급에 속하는 소비재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출토 양상만으로는 명말에 만든 넓은굽 청화백자를 사용할 수 있었던 한양의 거주민들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의 사용자들이 조선 관요에서 만든 백자를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이었으며 주로 청진동 등 도성에서도 중심지역에 거주했던 인물들임은 파악할 수 있다. 청진동은 주로 宗親과 戚臣을 포함한 사대부들과 부유한 상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중국 자기가 집중적으로 소비된 지역이다.32

2. 17세기 조선 관요의 넓은굽 백자 생산

17세기 조선 사회에서 고급 소비재로 인식되었을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는 같은 시기 조선백자의 조형에도 영향을 주었다. 실제 조선 관요는 적어도 1620년대부터 1670년대까지 넓은굽 백자를 제작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Table. 2).33
최근까지 전국에 걸쳐 이루어진 조선 시대 유적들의 발굴 내용을 살펴보면 17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넓은굽 백자는 경기도 광주에 자리하는 관요에서만 제작되었으며,34 주요 소비지는 한양도성에 국한되는 것을 알 수 있다.35
조선에서 넓은굽 백자가 관요에서 그것도 1600년대 대략 50년 정도만 한정적으로 생산된 것은 해당 그릇의 제작이 조선 정부의 의도와 연관된 일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것은 1606년(선조 39) 선조 임금이 명나라 사신 접대에 사용할 백자의 품질을 개선하고, 그릇의 모양도 중국 그릇의 체양을 반영하도록 지시했던 일 이후에 일어난 현상으로 사료된다.36
선조는 왜란을 종식하는 과정에 큰 도움을 준 명나라와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외교 의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들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1606년 선조의 명령은 이후 관요 백자 생산에 중요한 지침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더욱이 선조가 중국식 그릇을 제작하라고 관요에 명령하기 전인 1604년(선조 37)과 1605년(선조 38) 두 해는 관요 운영이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던 것으로 간주되는 시기다.37 그러므로 햇수로 2년 가까이 중지했던 관요 운영을 재개하기 직전인 1606년 음력 1월 하순에 임금이 내린 명령은 일정한 공백 이후 다시 시작된 관요의 백자 생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선조의 庶次男이었던 광해군 역시 명의 책봉과 고명을 받지 못한 한계 때문에 對明 외교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의전에도 정성을 다하려 애썼다. 실제 광해군 시절에는 다수의 『영접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이는 광해군이 명나라와의 외교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38
이미 선조 임금이 중국 그릇의 체양을 반영한 그릇을 제작하라고 명령한 바 있으니, 명나라 외교에 더욱 정성을 들이던 광해군 시절에도 관요의 중국식 그릇 제작은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17세기 전반에 운영된 관요 가마터들에서는 조선 전기에는 확인하기 어려운 새로운 조형의 백자들이 제작됐다.
선조 임금이 강조한 중국 그릇의 체양은 크기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관요는 임금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단면이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낮고 좁은 굽을 갖춘 작은 발과 접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내저원각이 없는 그릇이 나타나고, 발과 잔의 기측선이 수직에 가깝게 변하는 등 여러 가지 조형 변화가 감지된다.39
청화백자를 제작하기 어렵던 17세기 초 조선 관요는 문양 대신 다른 외형의 특징을 적극 반영하는 방식으로 중국식 그릇을 만들라는 국왕의 명령을 실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접지면의 폭이 1cm 이상에 달하는 넓은굽의 백자들이 등장한 것 또한 중국 그릇의 외형을 반영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1606년 선조의 명령을 구현하기 위해 당시 조선 관요가 차용한 중국 그릇의 조형 요소 가운데 넓은굽이 포함되었는지를 현재 단계에서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당시 국왕의 명령은 사신 접대용 자기의 품질을 향상하고 적절한 양의 음식을 담을 수 있는 작은 크기의 그릇을 제작하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넓은굽은 17세기 초 관요 백자가 중국식 그릇 제작을 위해 반영해야 할 중요 조형 요소에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17세기 초 조선 관요가 사신 접대용 고급 그릇을 중국식으로 제작했다는 것은 당시 고급 관요 백자 가운데 중국 그릇의 조형 요소를 반영한 사례가 증가했음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신 접대용이 아니더라도 상대적인 양질 제품으로 구분 가능한 범주의 관요 백자에도 중국 자기의 특징이 차츰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조류의 연장에서 넓은굽 또한 관요 제품 가운데 중국식 그릇을 만들기 위한 구현 요소로 추가되었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는 도성의 조선 관료와 지식인 사회가 실제 접했던 중국의 그릇이었으므로 중국식 그릇을 만들기 위한 模本으로 삼기에도 용이했을 것이며, 조선 관요가 반영할 수 있는 분명한 특징을 지닌 중국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Ⅳ. 맺음말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아시아 사회에서 이루어진 백자의 형태 변화는 當代의 사회문화 상황을 반영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1610년대와 1620년대를 중심으로 경덕진 등지의 중국 민요에서 만든 넓은굽 청화백자 또한 분명한 시대적 특징이다.
명나라 말기의 경제적 번영은 다양한 분야에 걸친 물질문화의 성장과 확산을 가져왔고, 중국 江南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치풍조는 중국의 사대부들을 포함한 여러 계층이 새롭고 화려한 그릇과 공예품을 선호하도록 만들었다. 중국 민요에서 만든 넓은굽 청화백자는 바로 이러한 번영기의 산물이다.
명말 지식인 사회는 역대 이름난 가마의 제품들이 가진 특징을 파악하고 골동품 감상의 기준으로 삼아 공유했다. 그러나 실제 과거의 명품을 실물로 대면할 기회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대신 앞선 시기 名窯에서 만든 골동 도자의 개념화된 특징들은 명말 민요의 제품으로 결합했고, 당시에 인기를 끌던 적벽부 같은 문학 소재가 문양으로 추가되어 넓은굽 청화백자를 탄생시켰다.
명말의 넓은굽 청화백자는 해외로도 수출되어, 당시 중국과 주변국의 도자 교류 양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의 도성에도 넓은굽 청화백자를 비롯한 다양한 중국 자기들이 전래했다.
이와 더불어 17세기 조선 관요는 넓은굽 백자를 생산했다. 조선 시대 넓은굽 백자는 관요에서 만들어졌다. 관요는 사옹원 주도로 조선 정부가 사용할 백자를 주로 생산했던 곳이므로 생산품의 종류, 수량,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에 정부의 의도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다.
17세기 조선 관요에서 크기가 작은 그릇의 생산이 증가하고 작고 단정하며 내저원각이 없는 그릇이 등장하는 등의 몇 가지 새로운 변화상이 나타난 것은 1606년에 선조 임금이 외교용 중국식 그릇을 제작하라고 명령한 이후에 강화된 생산 경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왜란 이후 조선 정부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 의전에 총력을 기울였고, 관요는 효과적인 명나라 사신 접대를 위한 그릇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중점 시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일조했다.
관요가 만든 중국식 백자는 당시 조선 사회가 실제 사용했던 중국 그릇의 외형 특징을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청화 안료의 수급이 어렵던 17세기 초반 조선 관요는 중국 자기의 중요한 요소인 문양은 배제한 채 형태의 특징만을 반영하기 위해 치중했다.
조선에서 전래된 명말 청화백자들이 가지고 있는 외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조형 요소인 넓은굽 또한 17세기 조선 관요의 중국식 그릇 제작 경향의 연장에서 새롭게 등장한 그릇으로 파악할 수 있다.
물론 당시 조선 관요에서 만든 넓은굽 백자를 사신 접대를 위한 최고급 반상기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중국 그릇이 가진 조형 요소를 가미한 양질의 식기는 도성의 궁궐이나 여러 관청을 포함한 일부 사대부들의 일상에서 반상기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번 논문은 명말 중국 넓은굽 청화백자의 제작 배경과 더불어 조선 유입 양상과 조선 시대 넓은굽 백자가 등장할 수 있었던 관요 백자의 생산 경향 등을 조망했으나, 조선에서 넓은굽 백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 추론이나 조형 변화 등은 숙제로 남기고 있다.
이 글을 통해 마련한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에 대한 이해가 차후 17세기 조선 관요 백자 생산에 반영된 중국 자기의 특징을 보다 세밀하게 가늠하기 위한 발판 역할을 하고, 당시 조선의 백자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도 연결되길 기대한다.

Notes

1) 이 글이 사용하는 ‘넓은굽’은 굽의 접지면이 넓다는 현상을 강조한 용어다. 관요 발굴을 주로 수행해 온 경기도자박물관은 넓은굽을 “굽의 접지면이 1.0~1.5cm 정도로 넓으며 높이는 1.0cm 미만이다. 발과 잔에서 나타난다.”라고 정의했다.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6차 발굴조사보고서』(2020), p. 45. ‘넓은굽’은 현재 학계에서 17세기 조선 관요에서 만든 접지면이 넓은 굽을 지칭하는 용어로 어느 정도 정착되어 있다.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특정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라면 ‘넓은’과 ‘굽’을 사이에 띄어쓰기 없이 하나의 단어로 활용 가능하다는 조언을 얻었다. 중국에서 만든 넓은 굽의 자기 또한 해당 유물을 지칭하는 중국 명칭을 제시한 후 본문의 논지가 보다 선명하게 연계될 수 있도록 조선 유물과 동일하게 넓은굽 자기로 설명했음을 밝혀둔다.

2) 넓은굽을 언급한 중요 선행연구는 명말 넓은굽 백자의 굽을 해무리굽으로 지칭했으며, 1620년대에서 1640년대 경덕진 민요에서 유행한 넓은굽이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에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조선 관요에서는 주로 1640년대에서 1660년대에 넓은굽 백자를 제작했음도 명문 자료를 통해 제시했다. 또한 명말 중국의 넓은굽 청화백자는 일본에서도 출토되며 17세기 전반 일본도 넓은굽의 그릇을 제작했음을 지적했다. 이후에 이루어진 다른 선행연구는 최근 발굴 자료들을 통해 조선 관요에서 1620년대 넓은굽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조형은 서울 시내에서 출토된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론했다. 방병선, 「17∼18세기 동아시아 도자교류사 연구」, 『미술사학연구』 232(2001), pp. 134-135; 이슬찬, 「조선 중기 관요 운영체제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17), pp. 89-92.

3) 謝明良, 「十七世紀 中國赤壁賦圖靑花瓷碗: 從臺灣出土例談起」, 『故宮文物月刊』 335(2011), p. 90.

4) 명나라 말기에 유행한 넓은굽 백자의 등장 시기 및 제작 가마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한 발굴 성과나 개별 논문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접하기 어렵다. 대신 赤壁賦圖가 장식된 17세기 중국 청화백자를 다룬 연구에 넓은굽 자기의 등장 배경과 제작 시기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謝明良, 앞의 논문, pp. 78-93.

5) 선행연구는 중국 경덕진의 민요인 湖田窯에서 내저면에 ‘永樂年製’라는 관지를 써넣은 넓은굽 백자편이 수습된 바를 간략히 언급했을 뿐이다. 선행연구가 제시한 호전요 수습 유물은 그보다 앞서 이루어진 다른 연구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謝明良, 앞의 논문, p. 83. 註 3은 三杉隆敏, 『世界の染付』6 陶磁片(京都: 同朋社, 1982), 圖43, 圖 244재인용.

6) 17세기 중국에서 만든 적벽부도가 장식된 청화백자를 다룬 선행연구 역시 외면에 적벽부도와 적벽부 내용이 장식된 그릇 내저면에 ‘永樂年製’라는 관지가 추가되는 것을 16세기 후반 중국 내 적벽부의 유행과 영락 압수배를 모방한 그릇에 대한 선호 취향이 맞물려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謝明良, 앞의 논문, pp. 89-91.

7) 『遵生八牋』 卷14 「論饒器新窯古窯」. “若我永樂年造壓手杯 坦口折腰 沙足滑底. 中心畫有雙獅 滚毬 毬內篆書永樂年制四字 細若粒米 為上品. 鴛鴦心者次之 花心者又其次也. 杯外青花深翠 式樣精妙 傳用可久 價亦甚高. 若近時仿效 規制蠢厚 火底火足 畧得形似 殊無可觀.” 원문은 『欽定四庫全書』 子部十 雜家類四(절강대학도서관 소장본)에 수록된 내용을 인용했다.

8) 『준생팔전』에는 영락 압수배만 아니라 다양한 앞선 시기 이름난 가마의 명품들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특히 文房과 飮茶에 두루 쓰인 哥窯에 대한 내용은 『遵生八牋』 卷14 「論官哥窰器」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명말 경덕진 민요에서는 가요의 특징인 빙렬이 가득한 그릇을 제작해 판매했고 그중 일부는 한양도성에서도 사용됐다. 서울 시내에서 출토된 명말 倣가요 자기에 대한 내용은 박정민, 「한양도성 내 조선 시대 유적 출토 백자의 특징과 양상」, 『동아시아의 도자문화 백자』(한성백제박물관, 2020), pp. 143-144.

9) 16세기 명나라의 경제적 성장은 다양한 분야에 걸친 소비 확대와 사치품의 수요증가로 이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그릇과 공예품에도 크게 반영되었다. 명말 사치풍조 만연에 따른 물질문화의 변화에 대해서는 巫仁恕 저, 김의정 등 역, 『사치의 제국』(글항아리, 2019).

10) 중국 문인 李漁(1611~1680)는 1671년(강희 10)에 지은 『閑情偶寄』를 통해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문자를 깨지기 쉬운 자기 그릇에 써넣는 행위를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이어가 기록을 남긴 17세기 후반에도 소동파의 문장이나 ‘成化年造’ 등의 관지가 장식된 자기 그릇들이 유행했음을 파악할 수 있는 대목이다. 명나라 말기에 등장한 문양 소재가 17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만큼 넓은굽 자기의 생산과 소비 역시 청나라 후반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李漁 저, 김의정 역, 『쾌락의 정원』(글항아리, 2018), pp. 267-270, 641-642.

11) 『景德鎮陶錄』 卷八 陶說雜編上 「拾靑日札」. “陶辨器足 永樂窯壓手杯 滑底沙足 宣窯壇琖 釜底線足 嘉靖窯魚扁琖 饅心圓足 凡陶器出窯 底足可驗火法.”

12) 각주 7) 참조.

13) 『경덕진도록』을 역주한 임상렬 선생 또한 ‘활저’를 태골이 드러나는 상태이고, ‘사족’이란 노태 상태 즉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이며, ‘만심원족’은 옥벽저 같은 굽일 것이라 추정했다. 藍浦 원저·鄭廷桂 보집, 임상렬 역주, 『역주 경덕진도록』(일지사, 2004), p. 311.

14) 선행연구가 언급한 홍콩 개인 소장의 넓은굽 청화백자 역시 동체에 남아있는 ‘皇明天啓年丙寅歲吉旦’명을 통해 1626년(천계 6)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선행연구에 해당 유물의 도판이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이 유물 역시 천계제 시절에 만든 다른 넓은굽 청화백자들과 유사한 문양이 장식되었을 것이다. 謝明良, 앞의 논문, p. 90.

15) Sten Sjostrand, Sharipah Lok Lok bt. Syed Idrus, THE WANLI SHIPWRECK AND ITS CERAMIC CARGO(Kuala Lumpur: Dept. of Museums Malaysia, 2007).

16) 조선 전기 미술 분야에서 이루어진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교류 양상에 대해서는 안휘준·한정희·박은경·문명대·이강근·김영원·주경미, 『朝鮮 前半期 美術의 對外交涉』(예경, 2006).

17) 『宣祖實錄』 129卷, 33年(1600) 9月 27日 丁卯. “上幸慕華館 餞慰李提督.”

18) 『宣祖實錄』 133卷, 34年(1601) 1月 6日 乙巳. “…卽者買賣人等五十餘名 投狀曰 初因軍前買賣接濟之令 辛苦出來今者遽令撤回. 俺等到日甚淺 貨物未發 極爲悶迫 照恕寬限 不致絶本云云.”

19) 조선은 1594년(선조 27)부터 압록강 하구 中江에 시장을 마련하여 중국, 특히 遼東의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中江開市의 설치 배경 및 주요 거래 품목에 대한 자세한 접근은 김문기,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역사와 경계』 85(2012), pp. 327-334.

20) 명나라 장수 吳惟忠(?~?)이 자신을 도운 尙州의 양반 李景南에게 건넨 선물 중에도 그릇이 포함되어 있다. 오유충은 浙江省 義烏 사람으로 遊擊의 신분으로 조선에 참전해 副摠兵의 지위에 올랐다. 이경남이 오유충에게 선물로 받은 ‘成化萬曆盃’와 ‘宣德爐’를 자기로 단정할 수 없으나 그릇에 구체적인 연호를 붙여 이름한 것을 보면 그릇에 款識가 표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력년간 경덕진 민요에서 만든 청화백자 중에는 당대와 선대의 관지가 쓰인 그릇이 많다. 이경남 집안에서 대대로 보관했다는 잔과 향로 역시 만력년간 만든 청화백자일 가능성이 있다. 이경남이 오윤충에게 받은 선물과 이후 이경남이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은 이경남의 10대손인 李在成이 1881년(고종 18)에 기록한 「東海寺事實記」에 담겨있다. “…吾先祖壺翁公 當皇明屋社之日 以魯仲連不願帝奏之義 戴蔽陽 着周衣 抱吳遊擊所賞成化萬曆盃 宣德爐 走隱於此寺 寺名東海故也. 構蹈海亭於寺傍 作蹈海八詠以見志. 又築焚香壇於擎天臺日月岩前 每丁三皇帝諱辰 則以明水貯盃 丹香注爐 奠于壇上 九節哭 四哭拜 享年九十 終身靡懈. 子姓相承 香壇拜哭之節 至于十世而勿替 盃爐硯作爲家傳之世珍焉.” 尙州産業大學校附設尙州文化硏究所·尙州市, 『古代沙伐國關聯 文化遺蹟 地表調査 報告書』(1996), pp. 348-350; 유사한 내용이 19세기 문인 관료인 韓章錫(1832~1894)이 지은 『眉山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眉山集』 1卷 「辭賦」 擎天臺辭. “李壺翁景南 當崇禎運訖 悲神州陸沉 皇靈不祀 獨上商山擎天臺 焚香慟哭. 胤子枝元遵父遺志 墠于臺 以高皇帝顯皇帝烈皇帝諱辰 用家藏遊擊將軍吳惟忠所贈成化萬曆二尊 崇玄酒以奠之. 子孫世守是禮.” 이경남의 행적을 비롯하여 오유충에게 받은 선물의 행방과 자세한 내역은 현재 조사 중이며, 파악한 내용을 학계에 소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1) 서울 시내 조선 후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중국 청화백자에 대한 언급은 박정민, 「출토유물로 본 조선 후기 한양도성 유입 외국 자기의 면모와 특징」, 『동양미술사학』 13(2021), pp. 186-194.

22) 『仁祖實錄』 46卷, 23年(1645) 6月 27日 戊寅. “…又募東人之被俘者 屯田積粟 貿換異物 館門如市…”

23) 1637년(인조 15) 淸의 太宗(재위 1626~1643)은 심양에 볼모로 머물게 된 소현세자와 鳳林大君(1619~1659)에게 은그릇과 청화백자를 보냈다. 청 태종은 둘 다 혼인하여 따로 가정을 이룬 세자와 대군 형제에게 각각 짝수로 수량을 갖춘 예물을 보낸 모양이다. 김종수·김남윤·신하령·이남종 역, 『역주 소현심양일기』 1(민속원, 2008), p. 308. “淸皇帝送銀椀四·銀貼匙二·銀盃臺具二·象箸二·畵沙貼匙二十·畵沙椀二·畵沙甫兒六·畵沙種子二·高足床二·食床一·平床一·交椅一·沐浴器一. 世子出庭中跪受. 送于大君亦如之 大君亦跪受.” 심양관에서 조선 조정에 보낸 장계들을 엮은 『심양장계』에도 같은 날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심양장계』에는 청화백자에 대한 기록은 누락 되었으며 목욕 그릇을 沐浴靑瓦盆이라는 단어로 기록해 두었다. 김남윤 역, 『심양장계』(아카넷, 2014), p. 78.

24) 『仁祖實錄』 46卷, 23年(1645) 4月 26日 戊寅. “王世子卒于昌慶宮 歡慶堂 …(중략)… 專廢講學 惟事貨利 且以土木之役 狗馬之玩爲事 貽譏敵國 大失人望…”

25) 『仁祖實錄』 46卷, 23年(1645) 3月 9日 壬辰. “世子下令 以彩段四百匹 黃金十九兩 歸之戶曹. 世子回轅時 多載北京物貨而來 衆頗失望 至是有是令.” 물론 이 시기에는 청을 배격하는 움직임이 강했으므로, 청의 문물이 조선 사회에 크게 확산할 여지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여러 고급 공예품의 유입과 도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확산 상황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26) 『燕行日記』 4月 27日. “且李信儉等及商人等落後 將還本國 大君奪好馬三十餘匹 使留待 蓋爲回還時用也. 人多怨之 雖諫不聽.” 이 기록은 鄭世規(1583~1661)가 1645년(인조 23)에 정사 인평대군을 따라 부사로 참여했던 사행 관련 사항을 기록한 『연행일기』에 수록된 것이다. 김일환, 「초기 대청 북경사행 기록과 사행 노정 검토」, 『온지논총』 61(2019), p. 151, 각주 101 재인용.

27) 김남윤 역, 앞의 책, p. 293. “…則皇帝使兩大君陞殿 後令范文程問于二大君曰 年歲幾何 大君答曰 今年十九矣. 仍問有子女否 大君以無爲答. 則又大君子女有無爲白去乙 大君答曰 丙子年前生有女息 而來此地後 因疫化去云則皇帝唯唯 行茶而罷爲白齊.” 1640년(인조 18) 2월 25일의 장계에는 청 태종이 인평대군의 肅拜를 받는 자리에 함께한 봉림대군에게 자녀가 있냐고 질문하자 봉림대군이 병자년(1636) 전에 딸을 낳았으나 심양에 온 뒤 역병으로 죽었다고 답하는 내용이 적혀있다. 이 대화에 등장하는 봉림대군의 딸이 숙신공주일 것이다.

28)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대장에 의하면 현재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에 자리했던 숙신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6점, 오채자기 2점, 은제합 2점은 1938년 李王職 禮式課가 취득했다가 이왕직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유물 대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당시 숙신공주 묘에는 무덤을 1650년(순치 7)에 조성했다는 내용이 담긴 비석도 자리했었음을 알 수 있다. 숙신공주묘 출토 백자들을 실견 조사하고 관련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국립중앙박물관 담당자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29) 현재까지 파악한 서울 시내 유적 출토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는 총 14점이다. 14점은 관수동 98-1번지에서 출토된 적벽부로 간주되는 시문이 장식된 동체부편도 포함한 수량이다. 세부 출토 수량은 청진동 일원에서 12점, 청계천 주변에서 2점 등이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5지구 유적』Ⅱ(2012), p. 25, 34;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 2~3지구 유적』Ⅱ(2013), p. 180, 376;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8지구 유적』Ⅱ(2013), p. 76, 86, 120; 한울문화재 연구원, 『종로 청진12~16지구 유적』Ⅳ(2013), p. 213, 233, 235, 237;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관수동 98-1번지 유적』 (2020), p. 106; 국방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구 관수동 4·5·6번지 유적』(2021), p. 296.

30) 명대 경덕진 민요에서 만든 그릇들의 문양과 기종에 대한 최근 정리는 秦大树·高宪平·翁彦俊, 「落马桥窑址明清遗存发掘的收获及相关问题」, 『文物』 2020-11(2020), pp. 90-95.

31)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8지구 유적』Ⅱ(2013), pp. 85-88.

32) 해당 지역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에 대해 정리한 최근 연구는 박정민, 앞의 논문, pp. 186-194.

33) 현재까지 넓은굽 백자는 왕산리(1626~1627)를 비롯하여 상림리(1618~1636), 선동리(1640~1648), 송정동(1649~1654), 유사리(1655~1664), 신대리(1664~1676) 등 주로 관요 가마터에서 출토되고 있다. 용인 왕산리 백자 가마터는 ‘丙寅’(1626)과 ‘丁卯’(1627) 등의 명문이 새겨진 백자가 출토되어 운영 시기 파악에 도움이 된다. 왕산리 유적에서 확인된 넓은굽 백자는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 시대 넓은굽 백자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가장 늦은 시기에 제작된 넓은굽 백자는 1673년(현종 14)부터 1676년(숙종 2)을 중심으로 운영된 신대리 12호 가마터 출토품이다. 1620년대에서 1670년대 사이에 운영된 관요 가마터 출토 넓은굽 백자에 대한 내용을 수록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 『龍仁 旺山里 窯址: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제2기숙사부지 시·발굴조사보고서』(2012);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조선백자 요지(사적 제314호) 6차 발굴조사 보고서』(2020); 경기도자박물관, 『사적 제314호 광주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서: 번천리 8호·선동리 2호 요지 일원』(2013); 경기도자박물관, 『광주조선백자요지(사적 제314호) 3차 발굴조사 보고서』(2019); 조선관요박물관, 『광주 송정동 5·6호 백자가마터』(2008); 경기도자박물관, 『광주 신대리 18호 백자가마터』(2008); 한강문화재연구원, 『광주 조선백자 요지: 광주 조선백자 요지 보존·정비를 위한 5차 시·발굴조사 보고서』(2019).

34) 관요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같은 광주지역에 자리한 오포읍 능평리 백자 가마터에서도 넓은굽 백자가 출토된 바 있다. 능평리 백자 가마터는 주로 발, 잔, 접시 등의 반상기를 포개구이로 제작했던 유적이다. 광주 주변의 여러 백자 가마터 가운데서도 능평리 백자 가마터처럼 넓은굽 백자를 만든 사례가 극히 적다는 것은 넓은굽 백자의 생산이 주로 관요에만 국한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당시 관요와 연접한 백자 가마에서는 넓은굽을 관요 백자의 가시적인 조형 특징으로 인식하고 모방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이러한 현상은 광주 이외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는 특징이다. 한울문화재연구원, 『광주 오포 능평리 백자가마유적』(2011).

35) 서울 시내에서 조선 관요의 넓은굽 백자가 출토하는 유적은 주로 종로대로 주변 청진동이나 궁궐 주변에 자리한다. 청진동 일대의 유적에서는 조선 관요에서 만든 넓은굽 백자가 중국에서 유입된 넓은굽 청화백자랑 함께 출토되기도 하지만 출토 수량은 중국산을 넘어서는 경향이 뚜렷하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5지구 유적』Ⅱ (2012);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2~3지구 유적』Ⅱ(2013);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8지구 유적』Ⅱ(2013); 한울문화재연구원, 『종로 청진12~16지구 유적』 Ⅳ(2013); 불교문화재연구소, 『서울 공평동 유적』(2016); 수도문물연구원, 『서울 통의동 70번지 유적』(2020); 국방문화재연구원, 『서울 종로구 관수동 4·5·6번지 유적』(2021).

36) 『宣祖實錄』 195卷, 39年(1606) 1月 23日 壬辰. “…前天使時 亦有下敎 深以飮食之臭爲戒 小臣亦聞之矣. 今者器皿之事 曾已磨鍊啓稟 而如匙箸等 則依古爲之 司饔院沙器 如磁器則中原之人必以爲美 若依唐制 精造用之則可矣. 大槪器皿體大 則所盛之物狼藉有臭矣. 上曰 司饔院官員下去時 自內已爲傳敎 使之一依唐器體樣 造之矣.”

37) 『宣祖實錄』 185卷 38年(1605) 3月 3日 丁丑. “…上年命勿造沙器 則本院再三啓辭 有若不造此器 則不能爲國者然 終不聽之 出其軍 移用於他處 不爲無補矣 …(중략)… 若今年又停燔造 專委其軍於竹山 則甚好 參酌事勢回啓 言于兵曹.” 제시한 기록만으로 1605년(선조 38)에 관요가 전혀 운영되지 않았다고 단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1604년(선조 37)에는 관요 백자 생산에 필요한 군사가 시급한 국가 사무에 활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선행연구 역시 1604년과 1605년에는 관요가 운영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했다. 이슬찬, 앞의 논문, p. 65.

38) 이들 의궤에 대해서는 한영우, 『조선왕조 의궤』(일지사, 2005), pp. 57-59; 신병주, 「광해군 시기 의궤의 편찬과 성격」, 『남명학연구』 22(2006), pp. 253-287.

39) 지면의 한계와 이번 글의 논지 선명성을 위해 17세기 관요 백자에 새롭게 나타나는 중국식 그릇의 조형 특징은 별도의 연구로 구체화할 예정이다.

Fig. 1.
<백자청화적벽부도문발>, Blue and white porcelain bowl with Ode on the Red Cliff, Late Ming Dynasty, Height 4.3cm,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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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백자청화 ‘永樂年製’ 명보상화당초문잔>, Blue and white porcelain press-hand cup with Yongle reign mark, Ming Dynasty Yongle period, Height 4.9cm, The Palace Museum Bei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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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백자청화관음보살불경문발>, Blue and white porcelain bowl with the Portrait of Avalokiteśvaras and Buddhist Scriptures, 1616(Wanli 44), Height 7.6cm, The Palace Museum Bei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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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백자청화접시형묘지>, Blue and white porcelain funerary land deed with inscription, 1626(Tianqi 6), Diameter 24.3cm, Britis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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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백자청화적벽부도문발>, Blue and white porcelain bowl with Ode on the Red Cliff, Late Ming Dynasty, Height 8.6cm, Excavated from Cheongjin district No. 8 Seoul, Seoul Beakj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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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숙신공주 묘 출토 일괄품>, Porcelain covered boxes and dishes, Ming dynasty Jiajing and Wanli period, Height 3~5.6cm, Excavated from tomb of Princess Sukshin,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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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백자청화화문소호>, Blue and white porcelain covered jar, Late Ming dynasty, Height 4.5cm, Excavated from tomb of Princess Sukshin,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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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백자청화난초문저부편>, Blue and white porcelain with Orchid pattern, Late Ming Dynasty, Height 1.7cm, Excavated from Cheongjin district No. 8 Seoul, Seoul Beakj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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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백자청화국화문잔편>, Blue and white porcelain cup with Chrysanthemum pattern, Late Ming Dynasty, Height 4.7cm, Excavated from Cheongjin district No. 12~16 Seoul, Seoul Beakj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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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가 출토한 서울 시내 유적 위치, The location of the relic sites of old town Seoul where Late Ming dynasty blue and white porcelain with bi-shaped bottom was excav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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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백자청화포도문발편>, Blue and white porcelain bowl with Grape pattern, Late Ming Dynasty, Height 6.7cm, Excavated from Cheongjin district No. 8 Seoul, Seoul Beakj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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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서울 시내 출토 명말 넓은굽 청화백자 Late Ming dynasty blue and white porcelain with bi-shaped bottom excavated from old town Seoul
No. Item Pattern & Inscription H.(cm) RimD.(cm) Foot D.(cm) Name of relic site
1 Bottom of Blue and white porcelain Inscription+Decorative patterns 2.2 Cheongjin district No. 2~3
2 Bottom of Blue and white porcelain 永■製■+Decorative patterns 2.2 Cheongjin district No. 2~3
3 Shard of Blue and white porcelain Odes on the Red Cliff 6.5 16.0 Cheongjin district No. 5
4 Bottom of Blue and white porcelain 永樂年製+Decorative patterns 2.1 6.4 Cheongjin district No. 5
5 Bottom of Blue and white porcelain 玉堂佳器+Decorative patterns 2.0 6.5 Cheongjin district No. 8
6 Blue and white porcelain bowl with bi-shaped bottom Grape pattern 6.7 19.0 7.3 Cheongjin district No. 8
7 Blue and white porcelain bowl with bi-shaped bottom 永樂年製+Odes on the Red Cliff 8.6 7.4 Cheongjin district No. 8
8 Bottom of Blue and white porcelain Orchid pattern 1.7 5 Cheongjin district No. 8
9 Blue and white porcelain bowl with bi-shaped bottom Odes on the Red Cliff 6.7 Cheongjin district No. 12~16
10 Bottom of Blue and white porcelain Grass flower pattern 2.3 9.2 Cheongjin district No. 12~16
11 Bottom of Blue and white porcelain 永樂年製+Decorative patterns 1.6 7.6 Cheongjin district No. 12~16
12 Blue and white porcelain bowl with bi-shaped bottom Chrysanthemum pattern 4.7 14.2 5.5 Cheongjin district No. 12~16
13 Shard of Blue and white porcelain Odes on the Red Cliff 3.8 Gwansu-dong 98-1
14 Bottom of Blue and white porcelain 永樂年製+Decorative patterns 1.95 9.0 7.3 Gwansu-dong 4
<Table 2>
관요 가마터 출토 넓은굽 백자 White porcelain with bi-shaped bottom excavated from Royal kiln Gwangju Gyeonggi-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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