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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09; 2021 > Article
조선 후기 <聚星圖>의 제작과 그 의미*

Abstract

본고는 최근 공개된 작품들을 포함하여 중국 後漢 陳寔과 荀淑의 가문의 故事를 그린 <聚星圖>의 제작배경을 면밀히 살펴보고 조선 후기 시대적 맥락 속에서 그림의 속성과 기능 그리고 전개양상에 따른 그 의미를 고찰한 연구이다.
조선에 내우외환이 극심했던 17세기를 살았던 송시열은 주자학의 전통을 고수하며 진순고사를 퇴폐한 세속을 경계하고 학문과 大義의 결속을 다지는 주요 일화로 자주 인용했다. 또한 김수증과 함께 화가 조세걸에게 <취성도> 제작을 의뢰하고, 직접 그림에 주자의 글을 장첩하여 동지들에게 권계화로 감상하게 했다.
<취성도>는 北伐, 明의 禮法과 曆法 존숭, 朱子 性理學의 정통성 등 송시열의 ‘春秋大義’를 표상하는 하나의 그림으로 기획되고 유통된 것이다. 18세기 영조와 정조 시기의 ‘황극탕평’의 정치문화의 맥락 속에서 진순고사의 ‘취성정’은 德星의 모임으로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외세에 의해 급변하던 19세기 중후반 <취성도>는 송시열 후손에 의해 다시 제작되어 성리학을 바로 세우고 후손을 교육하며 상호 간의 결속을 다지는 상징적 그림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Abstract

This essay closely examined the production background of ‘Ch'wisŏngdo’, a narrative figure painting about the virtuous gathering of Chen and Xun family and explores the attributes, functions, and transmission patterns of the paintings in the context of the late Chosŏn Dynasty. When the descendants of Chen Shi, a famouse literary in the late Han Dynasty of China, rebuilt the family shrine ‘Juxingting’, Zhu Xi(1130-1200) as the local bureaucrat helped them and wrote a preface and a commentary for the memorial folding screen. His content was an anecdote of the gathering of people with virtues, and a warning that could harm the great virtues of the ancestors by the fault of the descendants.
Song Si-Yŏl(1607-1689), who regarded Zhu Xi School as an orthodox theory of Neo-Confucianism, was well aware of this content and frequently cited it as a major anecdote to bind comrades as a cause and watch out for decadent secularity. With Kim Su-jŭng(1624-1701), he asked the artist Cho Se-gŏl(1636-after 1705) to produce the Ch'wisŏngdo and directly made the album of the paintings with the comments of Zhu Xi and his disciples. This work was passed down as a symbolic picture of the consciousness of the pro-Ming Dynasty and the anti-Ching Dynasty and the legitimacy of Zhu Xi school.
In the context of Hwanggŭkt'angp'yŏng political culture during the period of King Yŏngjo and King Chŏngjo, the narrative of the virtuous Chen and Xun family to have been used as a gathering of Confucian talents. On the other hand, in the mid-19th century, Song Si-Yŏl's descendants recreated the Ch'wisŏngdo along the painting of Chŏng Sŏn(1676-1759) as a local style. This work on the representation of Song Si-Yŏl’s Just and Great Cause shows the function to defend the Neo-Confucianism against foreign thoughts and culture.

Ⅰ. 머리말

<聚星圖>는 後漢 때 명사 陳寔(104~187)과 荀淑(83~149)의 가족이 만나자 하늘에 德星이 모이는 천문현상이 일어났다는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1 南宋 朱熹(1130~1200)는 福建省 考亭의 陳氏의 의뢰로 ‘聚星亭’ 중수를 돕고 두 현인을 선양하기 위한 글을 지었다.2 조선의 성리학자이자 서화 애호가 깊었던 宋時烈(1607~1689; 號 尤庵)과 金壽增(1624~1701; 號 谷雲)은 <취성도>를 평양 출신 화가 曺世傑(1636~1705 이후)에게 의뢰하여 주희의 찬문과 함께 기록하여 제작하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했다.3
송시열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도통을 형성한 대학자로, 사상사·정치사·문학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일생과 학문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었다. 미술사에 있어서는 그의 초상화 연구가 대표적이다.4 또한 정통주자학이 조선 李珥(1536~1584; 號 栗谷)로 그 맥이 이어졌기에 송시열이 직접 학문적 스승인 이이의 은거지인 석담구곡을 그리도록 해서 <高山九曲圖>와 차운시를 결합하여 판화를 제작하게 한 배경 그리고 그의 사후 문인인 권상하와 후학들에 의해 기획된 송시열의 은거지를 그린 <華陽九曲圖> 등 주로 도통의 상징적 그림인 구곡도가 논의되어 왔다.5
여기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취성도>는 송시열과 김수증에 의해 제작되었고 그들의 문인에 의해 世傳된 그림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현재 삼성미술관 Leeum에 소장되어 있는 축 형식의 <취성도>가 처음 소개된 이후 주로 鄭敾(1676-1759)이 그린 故事人物畵의 한 사례로 설명되었다(Fig. 11 참조).6 한편 17세기에 조세걸이 그린 <취성도>(1677년경)는 첩 형식의 그림으로 송시열이 직접 기획한 것이다(Figs. 7-Fig. 8.Fig. 9.10 참조). 현재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7세기 말 정치사회적 맥락 속에서 화첩의 제작배경을 해석한 선행 연구가 있다.7 그러나 <취성도>는 <구곡도>처럼 하나의 성리학적 주제의 회화로 주목받거나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지는 못했다. 이는 시기와 그림 형식이 서로 다른 두 작품만이 전해져 전체적인 전개 양상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미술사에서 주자 성리학 주제의 회화 연구가 성현 초상화와 구곡도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8 그런데 2017년 대전시립박물관에서 개최된 ‘은진 송씨’ 특별전에서 19세기에 제작되어 송시열 후손에 의해 家傳되던 <취성도>가 처음 공개되었다(Fig. 12 참조).9 그리고 2019년에는 K-옥션을 통해 축 형식의 17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취성도>가 소개되었다(Fig. 6 참조).10 새로운 작품들이 공개되면서 기존에 매우 소수의 집안만이 공유했을 것으로 여겨졌던 <취성도>가 여러 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게 되었으며, 시기별로 <취성도> 그림이 다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이 그림의 기능에 대한 재고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최근에 발굴된 작품들을 포함하여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제작되고 전해지는 양상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주자의 도통을 계승한 송시열이 주희의 행적도 철저하게 구현하고자 했다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그림의 제작과 수장에 대한 그의 관심 역시 ‘學朱子’ 실천의 일환이라고 봤기 때문이다.11 또한 송시열과 연관된 성리학 주제의 작품들 중 <취성도>가 조선 후기 전반에 걸쳐 제작되고 감상된 배경을 통해 그림의 기능을 살펴보고 송시열의 ‘春秋義理思想’과 관련성을 밝혀, 그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12

Ⅱ. 송시열의 그림 제작과 ‘學朱子’ 전통

내우외환이 극심했던 조선 17세기에 살았던 송시열은 일생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그 大義를 계승하여 世道를 바로잡고자 했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1635년 11월 大君 師傅에 제수된 그는 ‘崇明排淸’을 다짐하고 북벌 계획을 도모했던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의 조력자이자 봉림대군 시절부터의 스승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239호인 深衣를 입은 모습을 그린 <송시열의 초상>은 그의 성리학자의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Fig. 1). 그림의 상단 우측에는 1651년(효종 2)에 쓴 송시열의 글과 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가 1778년에 직접 지은 찬시가 예서로 적혀 있다. 기록된 정조의 御製는 송시열을 ‘절개와 의리’로 존경받는 士林의 우두머리라고 평하였다. 또한 정조는 『朱子大全』에 따라 간행한 우암 문집을 『宋子大全』(1787)이라 높이고, 宋代 학자 朱熹와 조선의 송시열의 문집에서 사상적으로 서로 조응되는 詩文들을 직접 선별하여 『兩賢傳心錄』(1795)을 편찬하게 하였다.13
이렇듯 조선의 주자와 같이 칭송된 송시열은 서화 수장과 제작도 주자의 행적을 따르는 하나의 실천으로 여겼던 것 같다. 병진년(1676) 12월 그믐, 송시열은 李選(1632~1692; 字 擇之)에게 답장 편지를 보내는데, 거기에는 장동 김문의 서화 애호와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이 전한다.
  • “石室(金尙憲, 1570~1652)의 자손이 그의 할아버지께서 그림에 대한 癖이 지극하시고 또 품격을 깊이 아는 까닭에 모아 둔 것이 많다고 이야기하였네. 나는 伊川(程頤, 1033~1107)이 그림 감상을 즐기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좋아하는 바가 다른가 생각했었네. 후에 朱先生의 말을 보니 스스로 이르기를,“매우 그림을 좋아하여 남에게서 상자를 전부 빌려다가 감상하였다.”하였네.”14

여기서 김상헌의 자손은 김수증을 비롯한 장동 집안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글은 도학의 학문적 스승인 정이와 달리 주희가 그림 감상을 좋아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송시열은 장동 집안 김씨의 서화 수장과 그림 감상의 애호 취향까지도 주자와 연결하여 생각한 것이다.15 김상헌이 서화수장과 문방청완의 가풍을 계승하였고 서화벽이 깊었음을 다수의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의 서화 애호벽은 중국 東晋 시기 顧愷之(344~406경)나 宋나라 米芾(1051~1107)의 ‘癡’와 ‘顚’의 취미 경지와 비교되기도 했다.16 김상헌은 스스로도 이들의 서화벽을 고상하고 속됨이 없어 아름다운 것이라 여길 만하다 평가했으며, 그림의 감상은 ‘마음을 모으고 고요히 앉아서 눈으로 보고 정신으로 합치’하는 늙고 병들어도 즐길 수 있는 묘함이 있는 취미라고 설명했다.17
이러한 서화 애호벽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졌으며, 金昌業(1658~1721)의 경우 1680년경 직접 <송시열의 74세 초상>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Fig. 2).18 또한 김수증은 강원도 華川의 와용담 계곡에 ‘농수정’을 짓고 그의 은거처로 삼았으며, 그가 머문 곡운구곡의 풍경을 조세걸에게 의뢰해 그리게 하는 등 그림 제작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Fig. 3).19
한편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자학을 정통 성리학으로 규정하고 이를 계승했다. 주희를 존숭했을 뿐 아니라 주희가 중국 복건성 무이산의 ‘武夷九曲’에 강학의 은거처를 마련하고 무이산 아홉 경치를 읊은 武夷九曲詩를 하나의 교본처럼 여겼으며 주희의 문인들이 주희의 시를 차운하여 전승하였듯이 이를 모범으로 삼아 주자시의 운을 따라 차운시를 지었다. 또한 이들은 그의 은거처였던 무이산 승경을 그린 <무이구곡도>를 구하여 ‘주자의 초상’과 같이 여기고 모사하고 제작하였으며 그림에 시를 결합하여 감상하였다. 이러한 詩畵 전통은 후학에 의해 스승을 숭모하고 그들 학맥의 도통을 상징하는 하나의 시각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스승의 학문의 뜻을 기리며 향유된 ‘구곡 문화’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주자학과 주자의 행적을 따르는 ‘學朱子’의 한 방식이었다. 특히 당시 주자성리학으로 학문적 정통성과 도통의 계보를 바로 확립하고자 했던 송시열은 구곡도 제작에 선구적인 중심 역할을 했다. 실제로 1688년 그는 조선의 주자라 여겼던 이이가 한글로 노래한 ‘高山九曲歌’를 漢譯하고 <고산구곡도>의 제작을 발의했다.20 그가 이이의 석담구곡을 그림으로 제작하도록 한 것으로 주자의 행적을 구현하고자 하는 배경이었음을 제자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 글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 “요즘 하는 일은 어떠한가? 그대를 그리는 마음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겠네. 나의 병은 거의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네. 가만히 邸狀을 보니 나의 이름이 자주 소장에 올라 마음이 매우 불안하네. 待罪하는 소가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네. 겸하여 또 泮題에 공자를 업신여기는 말로 선비를 시험보였던 것은 그 근원이 대체로 적 尹鑴(1617~1680)가 주자를 공격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尹拯(1629~1714)의 집안이 당을 지어 그를 도왔기 때문에 그들 派黨이 크게 확대되어 이런 극악한 데 이르게 되었네. 이는 또한 내가 尹을 배척하여 격동시킨 데 연유된 것이기도 하네.(中略)

  • 또 한 가지 일이 있네. 石潭이 매몰되어 감은 진정 차마 말 못할 일이네. 예부터 책상에 간직했던 高山九曲歌를 어제 金季達(金昌直, 1653~1702) 편에 서울과 東郊(동대문 밖 김수항 집안)에 보냈네. 이는 노선생께서 지으신 것을 金南窓(金玄成, 1541~1621)이 쓴 것이네. 본을 떠서 板本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어서 구곡도를 그 아래 그려 붙이고, 또 무이구곡시의 韻자를 가지고 각 곡마다에 시를 지어서 써넣는다면 훌륭한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네. 이미 여러 老成한 이들께 자세히 말하였네. 무이구곡시의 첫 수 운자는 내가 망녕되이 책임지기로 하고 그 아래 아홉 수의 운자는 곡운 김수증 형제와 仲和(김창협의 字) 외에 부탁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지, 역시 중화와 상의하여 회답해 주기 바라네. 지금의 영상(領相)은 어떻겠는가?(後略)”21

송시열은 권상하에게 주자의 시를 차운해 지은 동료 문인들의 시를 받는 일을 상의하고 구곡도와 함께 판화로 꾸며 제작하도록 기획했다. 실제로 그들의 차운시는 서시부터 구곡까지 차례로 그림 각 곡의 상단에 적혀 있다(Figs. 4, 5).22 詩作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송준길 및 송시열과 교유한 문인이었으며, 그림의 상단에 시를 함께 꾸미는 것은 그들의 공동 뜻을 결속하고 도통을 시각화하려는 정치사회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고산구곡도> 판화 제작을 도모하는 일에 앞서 같은 편지 글의 서두에는 당시 윤증과의 갈등이 거론되어 있다. 주자의 주해와 다른 견해를 가진 윤휴를 윤증의 아버지 尹舜擧(1596~1668)가 두둔한 이후 당파의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주자의 해석을 따르지 않는 것과 명나라 예법과 달리하는 것은 송시열에게 올바르지 못한 일이었으며 가장 큰 사상적, 정치적 고민이었다. 당시 제자였던 윤증과의 갈등은 상당히 골이 깊었으며, 이듬해 송시열의 사후까지 노론과 소론 간의 정치적 갈등의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송시열은 ‘대의’를 따르지 않는 무리에 대한 경계와 위기감 속에서 <고산구곡도>의 제작을 통해 주자와 이이의 성리학 학맥을 잇는 문인들의 결속을 도모하고 도학의 정통성과 뜻을 공고히 했던 것이다.
<구곡도>의 제작에 앞서 윤증과 송시열이 서로 대립하는 상황 하에 제작된 또 다른 작품이 있다. 바로 <취성도>이다. <취성도>는 윤순거의 사후 윤증과의 갈등이 표면화되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이 고사인물화는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옳은 것을 따르고 그른 것을 비판하여 ‘대의’를 밝히는 ‘春秋大義’의 상징적 매체로 사용되었다. 옛 이야기를 담은 그림과 관련 글을 적은 서화 작품을 통해 의도적으로 실천적인 비판정신을 전달하고 직설적인 시각화 효과를 도모한 것이다.

Ⅲ. 17세기 후반 <취성도>의 제작 배경과 기능: ‘春秋大義’의 勸戒畵

조선 후기에 제작된 <취성도>의 그림 형식은 벽에 걸 수 있는 족자 형태의 축 형식 작품과 화첩으로 전하는 그림 등 두 가지로 나뉜다. 또한 화면은 진숙이 순숙의 집에 도착하여 접대를 받는 모임 장면이 그려지고 제목과 주희가 지은 「聚星亭畵屛贊竝序」, 및 진식과 순숙 관련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주희와 張拭(1133~1180), 黃幹(1152~1221)의 논설, 그리고 송시열이 직접 제작 의도를 밝힌 발문 등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최근 미술품 경매를 통해 일반에 소개된 축 형식의 <취성도>는 17세기 작품으로 소개되었는데, 작품의 鑑識은 청록 산수 화풍과 그림 상단의 기록을 근거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Fig. 6).23 그림에서 故事에 나오는 인물들이 우측에 위치하며 문 밖에는 진식 일행이 타고온 수레와 수레를 끈 소가 나무에 연결된 줄에 매여 있다. 마당에서 진식의 두 아들과 손숙의 일곱 명의 아들이 마주하는 장면이며 취성당에는 우측에 손숙과 손자 욱 그리고 그의 아들이 손님을 대접하고 다과상의 좌측에 진식과 그의 손자 군이 앉아 있다. 두 집안의 모임에 대한 서사 구조를 압축적이고 효과적으로 한 화면에 보여주는 고사 인물화이다. 건물 뒤편에 청록 진채로 채색된 우뚝 솟은 기이한 암석의 산이 있어, 전체 화면 구도를 고려할 때 안정감보다는 불안한 인상을 준다.
그림의 상단에는 제목이 전서체로 적혀 있는데, 세 개의 점을 연결하는 것과 같이 형상화된 星자는 무수한 별을 의미하다. 제목 아래에 예서체로 주자의 원문에서 축약한 서문과 찬문 전체가 배치되었고 이어서 기록된 주자·장식·황간의 논설은 서문에서 생략된 인물 관련 주요 역사사건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24 끝으로 송시열의 발문이 있다. 그림과 관련된 기록 역시 송시열에 의해 기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에 축약되어 쓰여진 주자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 “세설의 기록을 살펴보니, 陳太丘[陳寔]이 荀朗陵[荀淑]을 찾아가는데, 집이 청빈하여 부릴 하인이 없어서 곧 元方(진식의 장자 紀의 字)이 수레를 몰고 季方(진식의 차자 諶의 字)이 지팡이를 들고 뒤를 따르고, 長文(진식의 손자이자 陳紀의 아들 陳群의 字)은 아직 어려서 수레에 태웠다./이윽고 도착하자 순낭릉은 叔慈(순숙 셋째 아들 靖의 字)를 시켜 문을 열어주게 하고, 慈明(순숙의 여섯째 아들 爽의 字)을 시켜 술을 따르게 하고 나머지 여섯 아들은 돌아가며 음식을 내오게 하였다. 文若(순숙의 손자로 순숙의 둘째 아들인 緄의 아들 彧의 字)은 아직 어려서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그때 태사가 ‘眞人이 동쪽으로 행차였습니다.’ 하고 아뢰었다./考亭에 사는 陳氏는 전에 別館이 있었는데 이름을 聚星이라 한 것은 대개 춘추 가운데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곧 허물어져 근세에 다시 신축하고 마침 나의 집이 가까이 있었고 그 일이 서로 뜻이 맞아 이윽고 근본 된 일과 자취를 병풍에 글을 써서 아울러 찬을 지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按世說 陳太丘 詣荀朗陵 貧儉無僕役 乃使元方將車 季方持杖從後 長文尚小載著車/中旣至荀使叔 慈應門 慈明行酒 餘六龍下食 文若亦小 坐着膝前/于時 太史奏真人東行/考亭陳氏 故有離榭 名以聚星 蓋取續陽秋語中 更廢壞 近始作新適邇敝 廬因得相其役事 既又為之本原事 跡迹亘屛上 并爲之昔 以示來者云).”

이 기록을 통해 송시열과 김수증이 제작한 <취성도>의 도상이 주희가 쓴 「聚星亭畵屛 贊竝序」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福建省 考亭에 살던 陳氏 집안의 부탁으로 그들의 선조인 진식과 또 다른 名士 순숙의 학문과 덕성을 宣揚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後漢 때의 太丘의 현령을 지낸 陳寔은 『後漢書』 권62 「列傳」의 ‘梁上君子’ 일화로 도둑도 교화시키는 인자한 성품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두 아들 紀와 諶 역시 덕망있는 인물로 유명하다. 宋代에 편찬한 최대 규모의 類書인 『太平御覽』 권384에는 진식이 許昌에 있는 순숙을 만난 고사가 전한다. 진식은 두 아들과 진기의 아들인 손자 群을 데리고 순숙의 집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만났을 때 하늘에 德星이 모이는 祥瑞가 나타났고, 천문을 관장하는 太史가 “오백 리 안에 賢人이 모였을 것”이라고 임금님께 아뢰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의 모임에서 순숙의 여덟 아들인 儉·緄·靖·燾·江·爽·肅·敷 등이 시중을 들었는데 진식의 아들 형제 못지않게 ‘荀氏八龍’이라 일컬어지며 모두 德行과 才行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고사에서 ‘聚星’은 문자 그대로 별들의 모임이자 덕이 있는 인재들의 모임이란 뜻이며, 이들이 있던 곳을 ‘聚星亭’이라 불렀다.25
한편, 『농암집 별집』 제2권 「석실서원 사제문」(1803, 순조 3)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여기 이곳 한 서원에 惟玆一院

  • 모신 군자 여섯인데 凡六君子

  • 형제 서로 앞다투어 壎篪競奏

  • 선대 미덕 계승했고 堂構紹美

  • 사우들과 어울리어 曁厥師友

  • 한 마음에 같은 연원 一揆同貫

  • 별들 모임 아닐쏘냐 豈聚星比

  • 자양의 찬 합당하다 合紫陽贊

여기서 여섯 군자는 석실서원에 봉안된 金尙容(1561~1637), 김상헌, 김수항, 민정중, 이단상, 김창협이며 별들의 모임은 취성정의 모임을 비유한 것이다. 또한 紫陽은 주희의 조상들을 모신 서원 이름이자 그의 별호로 주자를 의미하고, ‘자양의 찬’은 주희가 복건성 고정의 취성정 중수를 돕고 潁川 진씨 집안의 사람들을 위해 직접 지어준 찬문이다.
<취성도> 상단 가운데에 위치한 주희의 찬은 전체 문장이 기록되었고,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 아! 陳氏여, 신령스런 산악의 영기가 모여, 학문의 연원 깊고 예의범절은 아름답고, 道 넓으며 마음 화평하였네. 행동 고상하고 말 겸손하며 성쇠에 따라 나아감과 물러남 뜻대로 하니, 거의 바라는 대로요. 가함도 불가함도 없었도다. 자청하여 獄에 들어가 대중을 위안하고 환관[張讓]을 조문하니 나라의 사람들이 온전함 얻었도다. 환한 한 치의 가슴 속은, 차가운 강에 비친 가을 달이었네. 情談 원하고 마음에 그리워하는 이, 나와 뜻이 같은 故 낭릉군 荀淑으로 字는 季和라네. 훌륭한 자식들 두어 학문과 품성 닦으며 잠잠히 앞으로 나아가며, 사모하나 볼 수 없지만, 가만히 그 심정 느낄 수 있네.

  • (2) 잠시 벗 찾아 길 떠나는데, 부릴 하인 없어 두 아들 불러 수레 몰고 출발하니 푸른 꼴 실은 황소에, 베 휘장 덮은 땔감 실은 수레였네. 紀는 채찍 잡고 앞에서 호위하고 諶은 지팡이 들고 뒤 따랐네. 이른 곳 그 어딘가? 高陽이었네. 그때 荀淑은 옹께서 온다는 반가운 소식 듣고 靖에게 명하여 대문에 나아가 응접하게 했네. 용맹스런 일곱용들[일곱 아들] 자리 펴고 술잔치 열었네. 靖과 肅은 앞에 나아가 옹의 왕림에 절하였네. 어찌 오늘 아침에 맑고 정정하신 어른 뵐 줄 알았으리요. 爽에게 명하여 술잔 올리고 형제들 음식 장만하여 차례차례 진설하네. 잔을 주고 받으며 서로 얽히어 예법 따르나 정은 더욱 친근하여 곧 웃으며 담소 나누니 德과 義가 아님이 없도다. 도리에 더욱 매진하며 世道를 도왔네. 더벅머리 어린 두 아들 무릎 앞에 앉혔네. 근원 깊고 근본 확실하니 자식들 모두 어질었네. 오직 慈明[순상]은 유독 謝靈運(385~433)과 짝할 만하였네. 말년에 나라 혼란할 때 과감히 자취가 잦음을 꺼리어 贅旒의 운명으로 잠시 연장함을 믿었네. 붕당 만들어 정사 어지럽힌 괴수는 누가 먼저 시작했던가.

  • (3) 彧은 曹操(155~220)에 몸 맡겨 羣 역시 한나라 왕실을 잊었네. (가문의 명예) 지키고 잇기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니 탄식하네.

  • (4) 높은 누대에 북두성 돌며 지나가니 여기서 天文을 살피도다. 오히려 이곳은 시골 교외지만 현인이 모였었네. 정자 있어 잠시 묵으니 예전의 이 이름 남긴 유풍 입었네. 이제 전에 들은 것 풍자하여 모습과 거동 알리네. 산처럼 우러르고 만인이 걷는 큰 길처럼 덕을 좋아함은 같나니 忠과 孝 일과로 삼기 권하세. 오직 나의 참 마음은 이렇도다. 백성들 이곳 찾아와 살피고 거울처럼 상고하며 나태하지 말지어다. 나라에 충성하고 가문 계승하려면 明戒 길이 받들기 원하노라.”26

주희 찬문의 첫째는 진식을 선양하는 내용이며, 둘째는 진식이 두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뜻이 같은 순숙을 찾아가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 내용은 故事圖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네 번째는 주희가 이들의 덕성을 기리고 후세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아 忠孝의 덕목을 권하는 것으로 맺은 부분이다. 그런데 세 번째 부분은 주희가 순숙의 손자 순욱이 조조에게 투탁한 것과 진군이 魏 나라의 司空이 된 것을 가지고 後漢의 名士의 후손들이 失節한 것을 개탄한 것으로 앞서 진식과 순숙의 학문과 덕성을 선양한 것과는 대조된다. 진숙 고사에서 ‘대의’를 따르지 않은 순욱과 진군의 역사적 이야기를 예로 들어 비판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주희 의리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으며, 이는 송시열이 김수증과 함께 <취성도>를 제작할 때 주희가 지은 ‘취성병찬’ 내용의 함의를 논한 핵심적인 내용이었을 것이다.
<취성도> 제작 내용과 의도는 『송자대전』 「연보」의 1675년 상세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취성도는 곧 陳寔·荀淑의 德星에 관한 일이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이 일은 朱先生이 贊을 지어 뜻을 붙인 것이 이미 깊고, 또 朱子·南軒(張栻의 號)·勉齋(黃榦의 號)의 논설이 진실로 意義가 커서 衰世를 勸戒하는 하나의 큰 단서가 될 만하다 하여, 그 일을 그리고자 金公에게 말하였더니, 김공이 즐겨 듣고 경영하였다. 선생이 여러 차례 편지로 왕복하여, 그 그림의 곡절을 헤아린 다음, 먼저 주 선생의 찬문을 쓰고 다시 세 선생의 논설을 贊 아래에 붙이고 또 그 아래에 小跋을 붙여 동지에게 나누어 주었다.27

  • 대개, 선생은 孝廟의 밝은 명을 받아 世道로 자임하다가, 기해년(1659, 효종10) 이후 비록 浩然히 물러나 돌아와서 다시 몸소 나아가 도를 행하지 않았으나, 평상시에 잊지 못하는 마음은 미상불 여기에 있었다. 진실로 편벽되고 방탕하고 간사하고 도망하는 나쁜 말[詖淫邪遁]이 정도를 해치고 사람을 모함하는 말을 들으면 惕然히 감개하여 밤에 잠을 자지 못하며, 준엄한 말과 바른 논의를 忌諱하는 바가 없이 했는데, 모두가 凜然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한편의 俗流가 대부분 듣기 싫어하였고, 심지어 눈을 흘겨 원수처럼 보기까지 하여 마침내 윤휴·허목과 모의하여 화를 얽었다. 윤증은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墓文을 받은 이후로 원망이 날로 깊어져서, 윤휴의 손을 빌려서 그 마음을 쾌하게 하려 하였다. 대개 그들 부자의 마음이 가리고 고체(固滯)된 지 오래되었으나 그 심술의 隱微함이 이때에 와서 점차 드러났다.

  • 선생은 더욱 世道를 위하여 근심하고 탄식하여, 친구 중에 혹 구차하게 우물쭈물하여 그 사이에 젖어드는 자가 있으면 통렬히 경계하고 꾸짖어서 반드시 구해내고야 말았다. 어떤 사람이 혹 침묵을 지켜 화를 피하라고 諷諫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朱子의 말로 답하기를, “지금 화를 피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진실로 서로 사랑하는 데에서 나왔으나, 내가 만 길 우뚝이 솟아 있는 것을 보면 어찌 더욱 우리 도의 광채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趙忠簡·李參政 諸公이 海上에 있을 적에 門人과 친구들의 문안이 끊이지 않았고, 胡澹菴 같은 이는 날마다 知舊들과 唱和하고 왕래하면서 말하지 않는 바가 없었지만, 秦檜가 또한 다 잡아서 죽이지 못하였으니, 대개 스스로 천명이 있는 것이다.” 하고, 또 주자가 어떤 사람이 시속을 따르라는 설에 답한 말을 인용하여, “마치 약초가 鍛煉을 받아 본성이 없어지면 병을 구하지 못하는 것과 같게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 때문에 진실로 조금이라도 世道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危禍가 날로 급한 것 때문에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聚星圖>를 만든 것도 실은 퇴폐한 풍속에 경각심을 일깨우고[警勵] 또한 윤증의 무리를 슬며시 나무라서 그 일개 반개라도 구하려는 것이었다.”28

윗글을 통해 송시열이 김수증과 <취성도>를 제작한 배경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송시열이 적은 <취성도>의 발문은 그림의 기획 형식을 서술했는데, 한나라의 신하였던 진식과 순숙의 후손들이 후에 조조가 세운 魏를 위해 일했다는 비판적인 내용이다. 송시열은 진숙의 고사에 대한 주희의 해석이 단지 진식을 선양한 것이 아닌 그의 비판정신이 반영된 것임을 정확히 밝히고 세상 이치와 학문사상[世道]에 바르지[直]못한 것을 ‘퇴폐한 풍속[衰世意]’으로 보고 이에 대한 경각심[警]을 깨닫게 하는 권계화를 제작한 것이다.
둘은 송시열이 진숙의 고사를 인용한 데에는 주자의 경전해석 그대로 세도의 뜻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그의 견해와 이견을 보이며 대립한 세력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송시열의 경전해석에 대한 대표적인 논쟁사례는 1653년(효종 4) 7월 황산서원(죽림서원의 옛이름)에서 있었던 논쟁이다. 당시 송시열은 윤휴를 사상이 어긋나고 교리를 어지럽히는 斯文亂賊이라 비판했다. 윤휴가 주자의 주해를 변개하며 중용의 장구를 제거하고 윤휴 자신의 해석으로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金長生(1548~1631; 號 沙溪)과 金集(1574~1656)의 문인으로 동학이었던 윤선거가 윤휴의 입장을 옹호하자 밤새 토론을 벌였고, 이들은 1659년 기해예송으로 더욱 대립하게 되었다. 1665년 『율곡연보』를 교정하며 윤선거가 윤휴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서인 내의 갈등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윤선거 사후 1673년 윤선거의 아들이자 송시열의 제자였던 윤증이 윤선거의 묘갈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할 때 윤선거가 썼으나 보내지 않았던 권면의 글[기유의서(1669)]을 전하며 촉발하게 된다. 그 내용은 “윤휴와 화해하라”는 것이었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을 속이고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더욱 배척했으며, 윤선거가 胡亂 당시 김상용처럼 순국하지 않고 신분을 숨기고 탈출했던 과오를 비난하는 묘문을 지었다. 윤증은 송시열이 지어준 묘문이 자신의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무성의하게 지어준 것이라 주장하며 둘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29 한편 1674년 甲寅禮訟에서 남인이 승리하고 송시열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취성도>가 제작된 시기는 1675년에서 1677년경으로 서인과 남인 간에 대립이 격화된 시기였다. 송시열은 주자가 쓴 진순의 고사를 인용하여 ‘大義’를 바로 세우고자 한 의도를 상징적으로 표방했으며 동시에 남인과 결탁했던 윤증과 그의 문인들을 질책했다.
끝으로 <취성도>는 “윤증의 무리를 슬며시 나무라서 그 일개 반이라도 구하려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누어진 서인의 재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궁극에 ‘皇極’과 ‘德’으로 함께 했던 때를 생각해 ‘春秋大義’를 함께 일깨우고 기억하기 위한 송시열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송시열에 의해 기획된 <취성도>는 일종의 숨은 일화를 전하는 상징적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에서 경각심을 일깨우는 圖像의 중심인물은 바로 陳寔의 손자 陳羣과 荀淑의 손자 荀彧이다.30
윤증의 무리에 대해 성토할 때 순숙의 손자 彧에 대한 일화를 주로 언급하는데 송준길의 문인이었던 李端相(1628-1669; 字 幼能)과 송시열 사이에 오간 편지 중 律法과 曆法을 논하며 ‘義理’를 행한 감사함을 답한 1666년 2월 18일 글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 “일전에 두 차례로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즉시 답장을 써서 말씀하신 대로 監營 편에 보냈는데 미처 받아보기도 전에 또 하인을 보내어 葬禮 모실 날짜를 알려 주고 날짜를 고치게 된 곡절을 일러주어서 장사를 예절대로 치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의논할 것도 없네. 小正의 선택에 있어서는 엄연히 宗周의 뜻이 있으니, 이것은 관계된 바가 어찌 한 집안의 일일 뿐이겠는가. 삼가 敬服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네. 기억하건대 옛날 자네의 先王考(돌아가신 할아버지)이신 大相國 李廷龜의 무술년 상주문에, “明나라를 받드는 마음은 물이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것과 같아서 律法은 《大明律》을 사용하고 歷은 《大統曆》을 사용합니다.”라고 한 말이 있네. 매양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 바로 그 집안에 훌륭한 손자가 있어서 그 법을 버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周 나라 禮가 魯 나라에 있다.’고 한 말은 자네를 두고 한 말인가 하네.

  • 그런데 ‘물은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는 구절은 淸陰大老(김상헌)께서 정축년(1637, 인조 15)의 상소문에 인용하였다가 瀋陽에 끌려가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지금은 그 從孫이 斡難河가 세운 연호를 쓰며 예를 의논하는 사람이 《대명률》 인용한 것을 모함하고 있으니 어찌 朱子가 ‘聚星亭의 후손 彧이 바로 曹操의 패거리에 붙었으니 또한 漢 나라의 은덕을 망각한 것이다.’고 탄식한 일과 같지 않다고 하겠는가. 繼述하기 어려움은 예부터 그러하였으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 허여해 주신 의리에 감동하여 이토록 말하니 송구하기 그지없네. 다만 슬픔을 절제하고 예를 삼가서 사모하는 정성을 저버리지 말게.”31

송시열은 이정귀의 손자 이단상이 ‘大義’를 따름을 칭찬하며 반대로 청나라 연호를 쓰며 자신이 명의 율법을 따른 것을 모함한 세력에 대해 주자의 일화를 비유적으로 언급했다. 주자가 손숙의 손자 욱이 漢나라를 배신한 것을 비판한 사실을 들며 비유한 것이다. <취성도> 족자를 제작하기 10여 년 전부터 송시열은 대립하는 반대 세력을 ‘춘추대의’를 따르지 않는 무리로 규정하고 ‘취성정의 고사’를 인용하여 비판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단 윤증의 무리에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禮論에 있어서 송시열은 期年說을 비난했다. 또한 그는 明나라 崇禎 연호를 쓰는데 반하여 淸나라 康煕 연호를 쓰자고 주장했던 김수증의 6촌 형이자 김상용의 손자인 金壽弘(1601~1681)의 비행을 언급하며 순숙의 자손이 충절을 저버린 일화를 인용하기도 했다.32
  • “荀彧의 아들 顗가 또 역적 司馬昭를 보좌하였고, 曹髦가 죽자 그는 또 그 조카인 陳泰를 권유하여 그로 하여금 역적 사마소를 돕게 하였네. 훌륭한 荀淑의 자손이 이와 같았는데, 그 논의를 文飾 엄폐하곤 하여 邪說이 제멋대로 흐르는 실상을 더욱 나타나게 하였네. 자손의 죄악이 커질수록 조상의 허물이 드러난다고 훈계한 朱先生의 뜻이 참으로 깊고 간절하다 하겠네. 삼가 생각건대, 선원 仙源相公(김상용)의 殺身大節은 古人에 비할 만하네. 그러나 듣건대 평소의 행실과 의논은 때로는 老先生과 더불어 전연 딴판이었다고 하네. 어찌 후인은 그 본받을 만한 것을 본받지 않고 자기 마음에 편리한 대로 하여 꼭 본받을 필요가 없는 것을 본받아서, 호랑이를 그리다가 개를 그리듯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득한 후생으로서 망녕되이 先正을 논하는 것은 극히 온당하지 못한 줄 아나, 내가 들은 것이 확실치 못하기에 감히 질문하는 바이니, 잠깐 너그러운 마음을 베풀어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취성도>는 이러한 노론과 소론 간의 혹은 노론 내 이견으로 대립되는 가운데 ‘춘추의리’를 표상하는 권계도로 제작되고 기능한 작품이었다. 송시열이 김수증과 <취성도> 제작을 기획한 1675년의 이듬해인 1676년 6월 20일경 <취성도> 족자를 받은 것으로 보이며 족자의 완성본을 받고 箕城(평양) 畫手 조세걸이 여전히 집에 머물러 있는지 묻고 족자를 삼단으로 나눠 찬문과 발문을 쓰며 서너 집만 소장하도록 의견을 제기한다.33 족자 형식의 작품은 앞서 살펴 본 최근 옥션을 통해 소개된 작품 구성과 일치한다(Fig. 6).
한편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소장의 <취성도>는 曺世傑이 그린 그림 3폭과 1675년에서 1677년 오간 편지 글의 의견들을 종합해 찬문을 모아 김수증이 성첩한 것이다. 화첩의 표지는 송시열의 의장임을 밝히고 있다(Fig. 7).34
조세걸의 이 작품은 1677년경 제작된 것으로 역시 청록 진채로 그려졌으나 족자 그림과 비교하면 채색이 소략하다(Figs. 8-Fig. 9.10). 그러나 주자의 글에서 확인한 내용이 그대로 그림의 도상에 반영된 중요한 작품이다. 진식이 손숙을 찾아가는 여정과 만남 그리고 대접을 받는 3폭의 장면이 시간 순으로 각각 구성되어 있다.
조세걸 <취성도>는 화첩의 포개지는 두 면이 하나의 장면을 이루며, 첫 번째 그림 좌측 상단에 별지를 붙여 평양인 조세걸이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Fig. 8). 먼저 첫 번째 그림을 살펴보면,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계곡 어귀에 밝은 연두 빛의 초록 채색이 칠해 있고 넓은 공간감을 보여주는 한산한 길과 낮은 언덕에 듬성한 풀의 표현이 초봄의 계절감을 보여 준다.
나무를 엮어 지탱하는 좁은 다리 사이를 급하지 않은 물결이 돌아 흘러가고 막 그 다리를 건너온 진씨 삼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배경이 확 트여 있고 가운데 인물에 초점을 맞추며 이야기의 시작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진식이 손자 진군을 품에 안고 소가 끄는 수레차를 타고 있으며 첫째 아들 진기가 수레를 앞에서 끌고 둘째 아들 진심이 뒤에서 진식의 几杖을 단정히 들고 동행하고 있다. 진심의 붉은 옷깃이 계곡에서 오는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모습까지 간결하면서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폭의 그림 장면은 진식 일행이 순숙의 집에 도착한 장면이다(Fig. 9). 순숙의 집이 계곡 근처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곡과 집 대문에는 버드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집 뒤에는 대나무와 소나무 등이 위치하고 있다. 수레에서 내린 진식은 지팡이를 집고 효성스런 두 아들의 부축을 받고 있다. 대문 앞에는 순숙의 명으로 셋째 아들인 순정이 이들을 맞이한다. 집안에서는 분주히 손님맞이를 준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서 붉은색 웃옷을 입은 진군이 할아버지를 끌고 순곤의 막내아들인 순욱은 푸른색 옷을 입고 아버지를 끌고 있어 옷의 색상 대비와 함께 화면에 대칭적인 대각선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이들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여주게 하는 장치로 보인다. 한편 순숙이 앉아 있는 마루에 그와 진식을 위한 돗자리가 놓여 있어 주목된다. 순숙이 자리한 원형의 돗자리는 당시 文士의 대표적인 초상화나 인물화 양식에 있어서 문사 혹은 그들의 모임에 상징적으로 쓰이는 오브제이기 때문이다.35
세 번째 폭은 그림의 마지막 장면이다. 진식 가족과 순숙 가족의 모임 장면으로 진식과 순숙이 서로의 손자를 데리고 마주하고 있다(Fig. 10). 마당에는 진식의 두 아들이 서있고 순숙의 아들 靖과 肅이 술을 따르고 있다. 세 번째 모임 장면은 이후 축형식 <취성도>의 전형이 되는 구도의 도상이다. 앞서 살펴본 축 형식 작품에서 뒷산 배경은 생략되었고, 대나무와 소나무, 버드나무 등 특징적 수목과 계곡만 그려져 인물의 서사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산수의 생략적인 배경 구성은 18세기 聖賢의 고사를 그린 성적도 그림과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대문 밖에는 버드나무에 진식이 타고 온 소가 위치한다. 진식이 타고 온 소는 검소함의 표상이자 전통적인 의로움[義]의 상징으로 이들의 만남과 모임의 의의를 더욱 직시하게 한다.36

Ⅳ. 18-19세기 <취성도>의 世傳 양상과 의미

송시열은 <취성도>가 후세에 귀하게 전승되도록 궤짝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하기도 했다.
  • “聚星圖 족자를 보내 주며 꾸미지 않은 조그만 족자 하나를 보내는데 그것도 石室에게서 나온 것이네. 선을 쳐서 보내주면 어떻겠는가? 요사이 神明 글씨를 얻었는데 前例대로 보배롭게 보관하려 하니 향나무 판자로 작은 궤짝을 만들어 보내주면 좋겠네. 따로 그 사양을 그려서 동봉하네.”37

윗글에서 그림의 보관방식까지 기획한 송시열의 세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림 도상의 근거가 된 주희의 찬문은 조선 중기부터 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림의 제작과 수장은 18세기까지도 장동 김문과 송시열 가문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지고 전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7세기 후반 송시열과 김수증에 의해 기획되고 제작된 <취성도>는 18세기에 장동 김문 집안과 긴밀한 관계였던 정선에 의해 재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Fig. 11). 순숙의 집과 모인 사람의 구성은 동일하지만 이전 시기의 작품들과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대문 밖 양쪽에 수목의 배치와 오른쪽 하단 계곡을 위치시킨 구도 등은 그대로 19세기에 제작된 작품에 영향을 준다. 이 작품은 현재 삼성미술관 Leeum에 소장되어 있으며 가장 잘 알려진 <취성도>이다.38 평화롭고 안정된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주름잡힌 계곡을 피마준과 태점으로 처리하고 원경의 고산준봉의 섬세한 구성과 청록산수로 작은 기물까지 매우 꼼꼼하고 치밀하게 그린 채법이 돋보인다. 그림의 상단에는 주자의 찬문과 주자·장식·황간의 논설 그리고 송시열의 발문이 적혀 있어 송시열이 기획한 衰世에 대한 경계의 내용과 도학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정선의 고사인물화에서도 중요한한 사례이며 완성도가 높은 필치를 보여준다. 섬세한 채법의 산수 구성이 뛰어난 이 작품은 이전 시기의 작품들보다 두 손자가 암시하는 쇠세 권계의 의미가 약화되어 보인다. 인물의 관계성보다 덕성스런 인물이 함께 모였다는 ‘취성’의 의미 자체에 초점을 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앞서 살펴본 「석실서원 사제문」과 같이 18세기에 진식과 순숙의 모임 고사는 ‘결속’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이는 영정조 시기의 ‘대의’의 뜻을 같이 하는 ‘황극탕평’의 정치적 맥락과도 연계하여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弘齋全書』 권7 「시편」에 정조가 김홍도가 그린 그림을 보고 ‘취성정의 남긴 뜻이 자못 있네’라고 적은 글이 전한다.39 그림이 주자의 시에 대한 깊은 뜻을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로 당시 ‘취성정’은 주자의 ‘의리’와 학문적 권계의 뜻 그리고 덕성의 모임의 의미로 상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조 9년(1809) 규장각 녹취재의 화제로 출제되었던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한편 2017년에 개최된 대전시립박물관 ‘山林之門-학덕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다’ 특별전에서 충북 영동의 송시열 후손 집안에서 家傳하는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취성도> 한 점이 일반에 공개되었다(Fig. 12).40 이 작품은 18세기 <취성도>와 동일한 구도와 경물의 배치로 구성되어 있어 더욱 주목된다. 작품의 소장가 송준호에 따르면 약 150여 년 전에 제작되어 집안 사랑방에 걸어 두었던 작품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사랑방에는 산수 감상이나 교훈적인 그림들이 걸리는데 이 19세기 작품은 정선의 작품을 보고 지역 화가에 의해 민화풍으로 다시 그려진 작품으로 보인다.41
그림에서 비록 대나무의 필치는 활달하여 필력이 있는 필사가나 화가의 기운이 보이지만 그려진 산등성이의 바위의 표현과 수목의 표현에서 과장된 필치가 두드러진다. 또한 산수 배경이 매우 장식적으로 변형되었다. 산수의 배경에 비하여 인물은 소략한 필치로 묘사되었으나 화가는 그림의 고사와 관련된 인물들의 정보를 분명히 알고 이를 정확히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배경 산수가 수묵으로 되고 수목과 인물의 의복 색이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대비되어 구도는 18세기 작품을 그대로 모방했으나, 오히려 17세기의 고사의 내용을 강조한 작품과 친연성을 보여준다. 이는 진순 고사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작품을 의뢰한 송시열 후손들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송자대전』에는 衰世의 경계를 일깨우며 순숙의 손자 순욱이 주로 언급되었는데 이 작품에서 진식의 손자 진군과 순숙의 손자 순욱이 대등하게 더욱 강조되어 표현되어 있다. 둘 다 조조와 조비에게 붙었던 인물들로 한나라의 ‘대의’를 따르지 않고 조상의 ‘덕’에 해를 끼친 인물로 표상되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대내외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19세기 중후반 <취성도>가 제작된 것은 선비들의 계회보다는 외세의 침략이나 도리에 거스르는 일을 경계하고 ‘道學’을 바로 세움으로써 학문적 ‘의리’를 지키는 결속과 권계의 의미로 후손을 교육하는 기능을 가졌을 것이다.42
기존 연구에서 <취성도>는 서너 점의 작품이 제작되어 김수증과 송시열의 집안 등 소수의 집안에서만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19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송준호의 소장 작품 역시 송시열의 집안에서 家傳된 작품이다.43 그러나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유형화된 작품의 구성을 충실히 모사하고 반영하고 있다. 이는 <취성도>가 적어도 19세기까지는 잘 알려졌던 화제 중에 하나고 여러 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이 작품은 송시열의 10대손인 송낙헌(1889-1943)이 소장했던 것으로, 그는 집안 내에서 世傳하던 서화 작품들을 정리하고 그의 문인들과 함께 감상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가전하던 <화양구곡도>(1809)에 제목을 직접 쓰고 조부인 송달수(1808~1858)의 차운시를 적어 새로 장첩하기도 했다(Fig. 13).44 이러한 그의 詩畵의 기획은 주자에서 송시열, 그리고 송시열의 후손들로 이어지는 도통의 시각화 전통을 재현한 것이다. 또한 송낙헌에 의해 수장되었던 두 작품 모두 송시열의 ‘춘추대의’의 뜻을 현창하고 계술하는 의미로 감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Ⅴ. 맺음말

본고에서는 송시열과 김수증에 의해 제작된 <취성도>가 송시열에 의해서 기획되었으며, 주자의 도통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진식과 순숙 가문의 고사를 통해서 세속을 경계하는 권계의 의미와 송시열의 ‘대의’를 계술하는 다층적 의미에서 해석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취성도>는 조선시대 성리학 관념을 상징화하는 시각적 표상의 중요한 사례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 주제의 그림이 제작되고 전승된 배경의 중심에는 송시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송시열과 관련하여 제작된 그림들의 성리학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효종(봉림대군)의 스승으로의 위상을 보여주는 그의 초상화와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시민당야대도> 등이 있으며, 둘째로 주자의 도학을 잇고 북벌의 의지를 표상하며 도통을 시각화한 구곡도 그림들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취성도>는 학문과 명분의 ‘의리’를 상징하는 매개체로 衰世에 ‘춘추대의’로 결속을 다지는 권계의 기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송시열은 은유적 예시로 주자의 글을 다수 인용했으며 <취성도>를 제작하기 십여 년 전부터 ‘진순고사’를 종종 빗대어 주자의 해석을 거스르거나 ‘춘추대의’를 따르지 않는 반대세력을 비판했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다. 그는 남인뿐 아니라 서인 내 갈등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김수증과 함께 <취성도>를 기획하고 제작하여 그 의미를 공고히 했다. 따라서 17세기 후반 제작된 <취성도>는 공자 유학의 한나라에서 송나라 주자 그리고 조선에 이르는 ‘春秋’ 문화와 ‘崇明’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송시열의 의지가 그림에 적극 구현된 쇠세의 경계를 일깨우는 권계화였다.45 한편 18세기 장동 김문의 석실서원이나 세화로 김홍도에 의해 그려진 <주부자시의도> 관련 기록으로 판단컨대, 정선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취성도>는 ‘취성’이 모인 때의 결속의 의미가 그대로 해석되어 ‘태평성세’나 ‘황극탕평’을 위한 인재의 등용 및 덕성의 모임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송시열 후손과 문인들에 의해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취성도>는 18세기 그림을 모본으로 하지만 그림의 제작 배경과 기능은 사뭇 차이가 있어 보인다. 장동 김문과 달리 송시열 가문은 산림에 머물며 정치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는 위정척사 사상이 대두되던 시기로 성리학자들에게 학문적 위기의식과 경각심을 느낄 수 있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위정척사의 일환으로 성리학적 질서 수호를 당대의 ‘大義’로 삼았을 것으로 짐작된다.46 따라서 지방화가에 의해 민화풍으로 새롭게 재탄생한 <취성도>는 가전되어 비록 사랑방에 자손과 문하인들을 일깨우는 교육적 매체로 사용되었으나 20세기까지 이어지는 위정척사 운동의 상징적 기능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취성도>는 각 시대의 특수성에 따라 ‘춘추의리’의 중요한 텍스트로 기능하며 성리학으로의 ‘大義’를 결속시키는 하나의 상징적인 시각문화였다.

Notes

1) 통상 “聚星”관련된 고사는 後漢 陳寔의 고사와 北宋 歐陽修와 蘇軾이 눈이 오는 날 聚星堂에서 빈객들과 함께 시를 지었던 일이 잘 알려져 있다. 강관식, 「Ⅴ. 인물화계 화문의 화제」, 『조선후기 궁중화원 연구[상]: 규장각의 자비대령화원을 중심으로』 1(돌베개, 2001), p. 182 및 각주 148.

2)  『朱子大全』 권85 「聚星亭畵屛贊竝序」.

3) 조선시대 관련 기록을 통해 陳荀의 고사가 조선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회자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희의 찬문은 奇大升(1527~1572)이 편찬한 『朱子文錄』 人권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는 朴珪壽(1807~1876)가 조경평의 부탁을 받고 주희의 글을 옮겨 쓴 <팔곡병풍> (신수 14794)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순조 9년(1809, 己巳) 6월 1일. 今夏等 祿取才 再次榜에“聚星圖” 화제가 출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劉義慶(403~444)의 『世說新語』에 이 고사가 전하며 이후 陳씨의 별장을 “聚星”이라고 하였다. 녹취재 및 『세설신어』 관련 기록은 강관식, 앞의 책, pp. 180-183; 규장각 녹취재 기록을 먼저 알려주신 고연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4) 송시열의 초상화는 조선시대 사림 초상화의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송시열을 그린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수작이다. 견고한 필선과 음영을 표현하지 않은 직선 위주의 간명한 옷 주름은 17세기 초상의 특징이 보여 정조 연간에 원본을 충실하게 따라 그렸을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자 송시열의 초상화과 관련한 미술사 논고는 강관식, 「조선시대 초상화의 도상과 심상: 조선 중후기 선비 초상화의 수기적 의미를 통해서 본 재현적 도상의 실존적 의미와 기능에 대한 성찰」, 『미술사학』 15(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1), pp. 16- 24 참조; 동저, 「털과 눈: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의적 명제와 조형적 과제」, 『미술사학 연구』(한국미술사학회, 2005), pp.99-103; 동저, 「우암 송시열의 화상 기문과 주자성리학적 영정 제의관」, 『미술사학』 33(한국미술사 교육학회, 2017), pp.95-121; 고연희, 「송시열의 영정」, 『문헌과 해석』 17(문헌과해석사, 2001), pp. 124-127; 송은미, 「그림에 담긴 宋子의 모습」, 안휘준·민길홍 편, 『역사와 사상이 담긴 조선시대 인물화』(학고재, 2009), pp. 322-337; 이성훈, 「조선 후기 사대부 초상화의 제작 및 봉안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 학위 논문, 2019), pp.96-133 참조.

5) <고산구곡도>에 대해서는 윤진영, 「朝鮮時代 九曲圖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석사학위논문, 1997) pp. 71-76; 동저,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과 고산구곡도」, 『신사임당 가족의 시서화』(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2006), pp. 276-282 등이 있으며, <화양구곡도>에 관한 대표 연구로는 진준현, 「『華陽九曲圖』 연구」, 『한국고지도연구』 9(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17), pp. 5-29 등이 있다. 한편 필자는 2020년 10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구곡문화 콜로키움을 통해 송시열 주도로 제작된 <고산구곡도>와 이형부가 그린 <화양구곡도>를 예로 들어 그림 위에 차운시를 적는 것으로 학맥의 전통을 보여주는 ‘도가도식 구곡도’의 시각문화에 대해 발표한 바 있다. 강신애, 「무이구곡도와 조선시대 구곡도의 전개」, 『동아시아의 구곡문화와 강원』(국립춘천박물관, 2020), pp. 91-112.

6) 정선의 <취성도> 도판은 『동양의 명화』(삼성출판사, 1985)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이후 이태호·유홍준 편, 『조선후기 그림과 글씨』(학고재, 1992)에서 <장주묘암도>와 함께 정선의 화풍으로 논의되었으며 유홍준은 『화인열전1』(역사비평사, 2001), pp. 289-292에서 중국 고사인물화로 그 내용을 소개했다. 또한 송희경은 「18세기 전반 회화의 새 경향 -鄭敾 故事人物畵의 유형과 그 표상」, 『한국문화연구』 제17권(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9), pp. 226-230에서 간송미술관 소장의 <여산초당도> 및 <사문탈사도>(1741)과 구도와 도상을 비교·고찰하였고 이러한 정선의 고사인물화의 18세기 후반 이후 영향관계를 밝힌 바 있다.

7) 조규희는 18세기 정선 작품의 주문 및 감상과 정치사적 맥락에서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소장 <취성도>(1677년경)를 중요한 비교 사례로 분석하였다. 이 연구는 17세기 <취성도>가 18세기 정선의 작품과 정치적 배경의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주목된다. 조규희, 「1746년의 그림: ‘시대의 눈’으로 본 <장주묘암도>와 규장각 소장 『관동십경도첩』」, 『미술사와 시각문화』 6(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07), pp. 224-253 참조.

8) 주자학과 주희 이미지의 시각화 양상에 대해서는 朴晶愛, 「조선시대 朱子 崇慕熱과 그 이미지의 시각화 양상」, 『大東文化硏究』 제93호(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16), pp. 199-242 참고.

9) 대전시립박물관, 『2017 한국의 명가 Ⅲ. 은진송씨 특별전 ‘山林之門-학덕으로 나라의 부름을 받다’』(대전시립박물관, 2017), p. 157

10) “2019년 5월 22일, 메이저 경매 319”, K-옥션 홈페이지(http://www.k-auction.com).

11) 여기서는 주자 성리학뿐 아니라 주희의 행적을 따르는 것을 주자를 배우고 體現한다는 의미에서 ‘學朱子’라 칭하고자 한다.

12) ‘춘추의리’란 孔子가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하여 褒貶을 가하여 大義를 밝힌 비판정신을 말한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한 당시 조선 지식인으로서 송시열은 淸나라의 무도한 침략에 대항하여 崇明排淸論과 北 伐論을 주장하였으며, 북벌계획의 구체적인 방도로서 朱子가 언급한 內修外攘의 방책을 제시하였다. 이는 송시열의 憂國愛民의 정신과 실천의리 사상의 바탕이 되었다. 그의 ‘대의’를 실천하는 사상은 조선 말 도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송시열의 ‘춘추의리사상’에 대해서는 오석원, 「우암 송시열의 춘추의리사상」, 『유학 연구』 제17집(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8), pp. 41-65 참고; 본고에서는 주자성리학을 중심으로 하며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비판정신이 내포된 송시열의 실천의리 사상을 ‘춘추의리사상’이라 정의하고자 한다.

13) 송시열은 주자학 연구의 방법론적인 면에 있어서 이황의 연구를 계승했으며, 1683년 숙종의 경연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朱文抄選』을 편찬하였다. 이는 영조를 거쳐 정조의 세손 시절 주자학 이해의 핵심 연구서였다. 송시열의 朱熹 연구서 편찬에 관해서는 유탁일, 「『朱子書節要』 주해의 맥락과 그 주해서들」, 『서지학연구』 5·6(한국서지학회, 1990), pp. 6-10; 강문식, 「宋時烈의 『朱文抄選』 편찬과 그 의미」, 『한국문화』 63(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3), pp. 277-307 그의 서연 참여의 중요 시각문화는 서연의 장소였던 창경궁 ‘시민당’의 작품들이 서울대박물관과 송시열 후손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한편 효종 때부터 경연과 서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송시열은 왕실의 주자학 연구에 기틀을 마련했고 주자서 편찬에 적극적이었던 정조에 의해 그 학문적 위상이 드높여졌다. 정조의 주자서 편찬에 대해서는 김문식,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문헌과 해석사, 2000), pp. 233-297. 특히 정조는 주자학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시각화하는데 기여했으며 대표적인 작품은 김홍도 《주부자시의도》이다. 《주부자시의도》에 대해서는 오주석, 「김홍도의 <주부자시의도>: 어람용 회화의 성리학적 성격과 관련하여」, 『미술자료』 56(국립박물관, 1995), pp. 49-80; 김성경, 「김홍도의 <주부자시의도>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6); 장진성, 「정조에게 바친 마지막 그림: 《주부자시의도》」, 『단원 김홍도: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pp. 319-333 참조.

14) 『宋子大全』 권72, 「答李擇之 丙辰十二月晦日」, “石室後人。 說其大爺。 極有畫癖。 亦深知品格。 故畜之多。 愚謂伊 川不肯觀畫。 何其所好之異也。 後見朱先生說。 則自謂甚愛之至。 從人借全笥而觀之。”

15) 유홍준은 미술품 수장 애호와 후에 김수증이 ‘곡운구곡’을 그리도록 한 서화를 제작하고 감상한 가풍의 전통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유홍준, 앞의 책, pp. 201-202 참조.

16) 김상헌의 서화벽에 대한 문헌 분석은 홍선표, 「조선시대 문사들의 고동서화 수집과 감상 취미」, 『조선회화』 (한국미술연구소, 2014), pp. 22-24.

17) 『淸陰集』 권38, 「題尹洗馬敬之所蓄古今名畫後序」 참고.

18) 이 작품은 안동 권씨 문순공파 종중 소장으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2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북 제천의병전시관에 위탁되어 있다. 그림의 오른쪽 상단에 金昌協(1651~1708; 號 農巖)의 찬문을 통해 1680년경 동생 김창업이 그린 것을 알 수 있으며, 왼쪽 상단에는 權尙夏(1641~1721)과 蔡之洪(1683~1741) 글이 있다.

19)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곡운구곡도> 두 가지 본이 전하는데, 하나는 『曺世傑筆九曲圖帖』(본관 10681)으로 題箋에는 『谷雲九曲圖丁己改粧』이라 題簽되어 1682년 장첩되었음을 알 수 있고 다른 한 점은 이를 토대로 원본보다 크기가 축소된 후대 모사본으로 장동 김문의 차운시가 적힌 구곡도가 후대에도 도통의 시각적 상징 매체로 전해졌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20) 이이는 1575년(선조 8)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주희의 무이정사를 모범으로 삼아 해주 고산면 석담에 隱屛 亭舍를 세우고 은거했다. ‘고산구곡가’ 序詩에서 그의 은거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서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高山九曲潭을 살이 몰으든이, 誅茅卜居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즙어, 武夷를 想像하고 學朱子를 하리라.” 화첩의 제작배경에 대해서는 송시열, 『宋子大全』 권56, 「答金久之戊辰六月二日」 참조. 1688년 이이의 시의 한역과 주자의 「武夷櫂歌」 운을 따라 차운시의 제작한 배경에 대해 노론이 소론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제작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상원, 「조선후기 <고산구곡가> 수용 양상과 그 의미」, 『조선시대 시가사의 구도와 시각』(보고사, 2004), pp. 233-258; 조규희, 「조선 유학의 ‘道統’의식과 九曲圖」, 『역사와 경계』 61(부산경남사학회, 2006.12), pp. 9-11.

21) 권치도에게 보냄-무진년(1688) 6월 18일. 『송자대전』 제89권, 「與權致道 戊辰六月十八日」

22) 기록과 관련한 <고산구곡도>가 횡권 형식으로 현전하며 그림 상단에는 이이의 高山九曲歌를 비롯해 송시열의 漢譯詩와 金壽恒(1629~1689), 宋奎濂(1630~1709), 李畬(1645~1718), 鄭澔(1648~1736), 金壽增, 權尙夏 (1641~1701), 李喜朝(1655~1724) 宋疇錫(1650~1692), 李喜朝(1655~1724) 등 9人의 次韻詩와 雲谷 金壽增의 書가 있다. 윤진영, 앞의 논문(1997), pp. 71-76 참조; 17세기 이후 그림과 시가 함께 기록되어 제작된 판화본은 대전시립박물관 소장 <고산구곡도>와 원주 무릉고서화미술박물관 소장 板本(舊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41호; 서울 중랑구, 2007, 12: 황송환 소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전시립박물관 本과 무릉고서화미술박물관 本은 동일 판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대전시립박물관 소장본에 대해서는 대전시립박물관, 앞의 책, pp. 10-11.

23) 개인 소장 작품으로 2019년 5월22일자로 K-옥션 경매 고미술 분야에 출품되어 17세기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당시 17세기 평양출신 화가 조세걸에게 의뢰해 그리게 한 기록이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수표현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세걸의 <곡운구곡도>와도 상이한 화풍을 보이며 그가 다양한 화제와 화풍을 구사한 화가로 추정되지만 화가의 기록이 전하는 1677년경 그려진 <취성도>와도 전혀 다른 화면을 보여주고 있어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조세걸의 행적과 화풍에 대해서는 윤진영, 「평양화사 조세걸의 圖寫 활동과 화풍」,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평론, 2006), pp. 238-263 참조.

24) 그림에 기록된 주희의 序와 贊은 「聚星亭畵屛贊竝序」를 기본 골자로 하나 『주자대전』에 수록된 전체 원문과 비교한 결과, 글의 序 부분이 진식이 순숙을 방문한 내용으로 간략하게 축약되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주로 생략된 내용은 옛 기록에 소개된 각 인물 덕성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것이며, 서문에서 축약된 내용이 주자의 贊 이후 이어지는 세 사람의 논설로 보충된 것으로 보인다. 1200년 정월에 지은 주희 글의 전체 국역 해석은 奇大升 編; 박경래 국역; 최두남 조역, 『(국역) 朱子文錄』 3(2015), pp. 28-36. 본고의 주희 글에 관한 해석은 위의 책을 참고했으며 필요 내용은 필자가 보충하고 수정하였다.

25) 중국 허난성 쉬창의 西湖公園에 이들의 모임을 기념한 ‘聚星亭’이 위치하며, 陳寔을 선조로 모시는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집안 사원과 가묘를 ‘聚星堂’, ‘德星堂’, ‘德聚堂’이라 명명하며 그들의 선조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 <聚星圖>는 주로 천문 별자리 그림들이었으며, 주자의 序에 진식이 두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순숙을 방문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지만 전하는 내용이 병풍의 그림의 도상을 설명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차후 발굴자료를 통해 중국 陳荀의 故事를 그린 <취성도>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리라 본다.

26) 『朱子大全』 권85 「聚星亭畵屛贊竝序」, “(1)猗歟陳子 神嶽鍾英 文淵範懿 道廣心平 危孫汚隆 卷舒自我 是曰庶 幾 無可不可 獻身安衆 弔竪全邦 炯然方寸 秋月寒江 願言懷人 曰我同志 故朗陵君 荀季和氏 連峯對起 麗澤潛 滋 僾而不見 有黯其思 (2)薄言造之 顧無僕役 獨呼二兒 駕予以出 靑芻黃犢 布幰柴車 策紀前衛 杖諶後趨 所造 伊何 高陽之里 維時荀君 聞至而喜 顧謂汝靖 往應于門 七龍矯矯 布席開尊 靖肅而前 翁拜其辱 何悟斯晨 得見 淸穆 命爽行觴 旅饋次陳 獻酬交錯 禮度情親 載笑載言 罔非德義 益邁乃猷 以輔斯世 髡髦兩稚 亦寘膝前 原深 本固 莫出匪賢 維此慈明 特謝儔匹 晩際國屯 敢憚濡迹 贅旒之命 恃以少延 邦朋之最 孰與爲先 (3)彧乃附曹 羣 亦忘漢 嗣守之難 古今共歎 (4)崇臺回極 于以占天 猶曰玆野 德星萃焉 我寓有亭 舊蒙斯號 今刺前聞 象儀以告 高山景行 好德所同 課忠責孝 獨槩余衷 百尒窺臨 鏡考毋怠 死國承家 永奉明戒”, 국역 해석은 奇大升 編; 박경래 국역, 앞의 책, pp. 32-36; 주자의 서문에 의하면, 緄의 아들 彧은 소싯적부터 아버지가 재앙을 당할까 두려워 환관 唐衡의 딸에게 장가보냈다고 한다. 후에 曹操를 따랐는데 조조가 謀主로 삼고 가까이 하였다. 子房이 조조에게 장차 九錫의 은전을 받으려 할 때 욱이 간하여 중지하게 하였는데 마침내 해를 당하자 이름 ‘彧’을 ‘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위의 책, p. 31 참조; 따라서 필자는 (3)해석 부분의 순숙의 손자 이름 ‘郁’(해석본)은 ‘彧’으로 수정하여 그림 상단의 기록과도 동일하게 했다. 또한 ‘群’을 무리(해석본)로 해석했는데 이는 진식의 손자 ‘羣’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정했다. 글의 구성과 이해의 편의를 위해 네 부분으로 나누어 표시하였다.

27) 본 내용은 『宋子大全』 권146 「聚星圖跋」에서도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송시열이 김수증과 족자 형태의 <취성도>를 제작한 후 1675년(崇禎 乙卯)에 쓴 글이다. 송시열의 발문은 다음과 같다: 金壽增延之取朱夫子聚 星贊爲簇 將以傳於士夫間 亦衰世意也 然贊中弔豎濡迹等語 覽者或昧夫子微辭 則大有害 故幷書三先生說於下 方 以爲足以發明原贊之意云 崇禎旃蒙單閼元日 恩津宋時烈識.

28) 『宋子大全』 附錄 권7, 年譜 6, 「與谷雲金延之 壽增 作聚星圖」; 본고의 『송자대전』 원문과 국역은 한국고전 번역원 DB 참조; 중요 내용은 밑줄로 강조하였다.

29) 윤선거의 묘문에 대한 갈등은 1681년 윤증은 송시열을 ‘義利雙行(의리와 이익을 함께 병행)’하고 ‘王覇幷用 (왕도와 패도를 같이 씀)’한 것 같다고 쓴 글[擬與懷川書]이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을 통해 송시열에게 알려지자, 이를 계기로 송시열은 남인과 결탁했던 윤증을 더욱 비판하고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으며 1684년 4월 스승을 배반한 죄로 숙종에게 처벌을 요구해 정치적 분쟁으로 첨예화하게 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肅宗實錄』 15권, 「숙종 10년 甲子(1684) 8월 21일(甲寅)」; 1688년 6월 박세채가 붕당을 억제하는 ‘황극탕평론’을 내놓았으나 이듬해 송시열이 죽을 때까지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윤증과 신유년 이후 왕복한 편지 내용은 『明齋遺稿』 별집 제3권, 「擬與懷川書 辛酉夏○辛酉以後往復」 참고.

30) 이야기 그림을 한 화면에 압축적이고 효과적으로 표현한 이른 예의 작품은 李公麟(1049-1106)의 효자 고사도를 들 수 있으며 <취성도>는 명대 《帝鑑圖設》과 같이 거울로 삼아야 할 덕목을 그림으로 그린 전통과 연계해서 고려해 볼 수 있다. 유교적 서사의 그림에 대해서는 Julia K. Murray, Mirror of Morality: Chinese Narrative Illustration and Confucial Ideology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참조.

31) 『宋子大全』 권64, 「答李幼能 丙午二月十八日」.

32) 『宋子大全』 권51, 「答金延之 丙辰九月」.

33) 『宋子大全』 권51, 「金延之 乙卯六月十二日」; 조규희, 앞의 논문, p. 230 참고 및 각주 13) 재인용.

34) 조규희, 위의 논문, p. 227.

35) 조선 전기 그림 중 우정을 돈독히 하는 문사의 모임과 돗자리가 표현된 예는 신말주의 그림으로 전하는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십로도상계축>이 대표적이다. 조선 전반 문사들의 모임에 대해서는 안휘준, 「16세기 중엽의 계회도를 통해 본 조선왕조시대 회화 양식의 변천」, 『미술자료』 18(1975), pp. 36-42 로 시작되었으며, 계회 모임 성격의 고사 인물도 유형에 대해서는 이원복, 「傳 신말주 필 <십로도상계축>에 관한 고찰-조선시대 계회도의 한 양식」,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2006), pp. 180-208 참고; 필자는 원형 돗자리가 동아시아문사 표현의 오래된 전통이기 때문에 조세걸이 <취성도>에도 의도적으로 고안한 도상이라고 생각한다. 문인 인물화의 표상과 관련해서는 Craig Clunas, “Artist and Subject in Ming Dynasty China”, Proceedings of the British Academy, 105(2000), pp. 43-72 WEBLEARN 참조.

36) 趙纘韓(1572~1631)이 지은 『玄洲集』 上, 「義牛圖序」에 호랑이로부터 주인을 구한 충성스럽고 의로운 소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편 실제로 희생한 소를 위한 義牛塚이 구미 산동면 인덕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무덤에는 숙종 11년(1685)에 화공이 그림 의우도 팔폭을 옮겨 새긴 비석이 둘러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06호이다. 소는 불교와 도교의 깨달음의 상징이자 17세기 조선에서는 유교적 忠義의 상징으로도 여겨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37) 『宋子大全』 권72, 「答李擇之 丙辰十二月晦日」, “聚星簇奉納。 並有一小簇未粧者。亦出於石室者也。 幸加邊緣以 還之如何。 比得神明書。 欲依例寶藏之。 如以香板作小櫃下投之則幸矣。 別有紙樣耳。”; 조규희는 1676년 12월경 <취성도>가 同志들에게 전해진 시기로 추정하였다. 조규희, 앞의 논문, p. 230.

38) 1985년 중국 고사 그림으로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1992년 학고재 화랑을 통해 일반에 공개되면서 진식과 순숙의 고사 내용도 알려지게 된다. 이때 작품에 그려진 인물들의 고사를 알려준 이는 바로 송시열의 후손인 송준호(1936~)였다고 한다.

39) 『弘齋全書』 권 7, 「謹和朱夫子詩 八首」. “金弘道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그의 이름을 안 지 오래되었다. 30년 전에 그가 御眞을 그린 이후로는 그림 그리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다 그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畫師는 으레 세초(歲初)마다 첩화(帖畫)를 그려 올리는 규정이 있으므로, 올 해에는 김홍도가 熊勿軒이 주석한 朱夫 子詩 8수를 소재로 그림을 그려서 8폭의 병풍으로 만들었는데, 聚星亭의 남긴 뜻이 자못 있다. 이미 쓴 原韻에 화답의 시를 붙여 쓰고, 항상 눈여겨볼 바탕으로 삼는 바이다(金弘道工於畫者 知其名久矣 三十年前圖眞 自是凡屬繪事 皆使弘道主之 畫師例於歲初 有帖畫寫進之䂓 今年弘道以熊勿軒所 註朱夫子詩 畫爲八幅屛風 深得聚星亭餘意 旣書原韻 附寫和章 以爲常目之資 云爾).”; 이 기록과 관련된 <주부자시의도>는 8폭 중 6폭이 현재 삼성미술관 Leeum에 소장되어 전한다. 이 그림이 1995년 소개된 이후 정조의 대학의 의미와 君師가 되고자 했던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특히 장진성은 이 작품이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임을 강조하며 정조의 『御定大學類義』의 완성과 연관하여 설명하였다. 장진성, 앞의 책, pp. 322-325. 필자는 이 병풍이 제작되고 감상되는데 있어 수양과 정조의 도학적 성격뿐 아니라 권계적 성격이 강조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취성도>를 중심으로 다루기에 차후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40) 이 전시는 새로운 <고산구곡도> 작품이 출품되어 매우 주목받았으며 이외에도 은진송씨 집안에 가전하던 여러 유물 중 山林으로 창덕궁 時敏堂에 나아가 왕세자와 학문을 토론한 <시민당야대도>, <취성도>, <화양구곡도> 등 송시열 관련 회화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 작품들은 송시열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위상과 철학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유물들이다.

41) 2020년 12월에 있었던 학술발표의 토론에서 이 작품이 사대부 집안에서 유통되는 화풍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지적을 받았다. 은진 송씨 집안이 매우 명문가이지만 19세기 송시열의 후손은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지 못하고 지역의 스승 혹은 산림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가문을 중심으로 모임을 구성했고 모임과 교육의 장이 되었던 사랑방은 남성의 공간이었다. 사랑방은 여성의 공간의 화조, 초충 등 장식적인 화제의 민화와는 차별되지만 <취성도>나 <효제문자도>와 같은 교훈적 족자와 병풍으로 공간을 꾸몄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을 그린 화가가 민화를 그린 화가와 차별화되는 또 다른 범주의 화가군인지의 문제는 차후 재고하도록 하겠다.

42) 19세기 선비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 중 1859년 중양절에 충청도 옥천과 회덕 등지의 선비들이 모여 결속을 다진 『輔仁稧帖『이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전하여 주목된다. 이 작품 역시 비전문적인 화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송준호 소장의 <취성도>와 비교해 보면 그림의 기능에 있어서 전통은 상이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위정척사 등 학자들의 모임에 대한 논의를 차후 진행하고자 한다. 『규장각 그림을 펼치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5) pp. 224-225.

43) 소장가 송준호에 따르면, <취성도>는 약 150여 년 전 제작되어 사랑방에 걸어뒀던 것으로 그의 조부 송낙헌과 그의 문인들에 의해 감상되었다고 한다. 또한 어려서부터 사랑방에서 집안 웃어른으로 부터 이 그림을 통해 퇴폐한 풍속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배웠다고 한다. 이 작품은 충북 영동 집에서 유출되었던 것을 다시 사들여 개인 소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44) <화양구곡도>는 송시열 사후 그의 문인 권상하에 의해 기획되어 제작되었으며 현전하는 작품은 송준호 소장의 『화양구곡도첩』(1809)이다. 이 작품은 송시열의 장인인 이덕사의 7대손이자 이규상의 증손인 이형부의 筆로 제작되었다. 이형부의 <화양구곡도>에 대해서는 진준현, 앞의 논문과 이상주, 「이형부의 「화양구곡도」에 대한 고찰」, 『온지논총』 56(온지학회, 2018.7), pp. 41-76 참고; 송준호 家藏으로 후학들에 의해 축소 제작된 「화양구곡도첩」 필사본도 함께 전한다(Fig. 14 참조). <취성도>와 <화양구곡도> 작품들을 직접 보여주시고 인터뷰에 응해 주신 소장가 송준호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45) 송시열은 일생 근본을 바르게 하는 ‘춘추의리’를 추구하고 실천했다. 이는 그의 학문적 계통 및 시대 상황과 연계된다. 그의 ‘의리’는 바로 북벌과 正學을 숭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비를 가려 엄정히 비판했으며, 그가 스승이었던 이이와 같이 경전과 그 경전의 고사를 근거로 삼는 의리론을 주장했다. 또한 17세기 호란 이후의 상황에서 송시열에게 대의의 표상은 석실 김상헌이었으며 그 후손들과 긴밀한 협력과 교유를 보여준다. 곽신환, 「6장 석담·중봉·석실-우암 의리학의 연원과 후원」, 『우암 송시열』 (서광사, 2012), pp. 173-218 참고.

46) 한말 위정척사운동 관련은 박민영, 「華西學派의 형성과 衛正斥邪運動」, 『한국근현대사연구』 10(한국근현대사학회, 1999), pp. 37-70 참조.

Fig. 1.
<宋時烈肖像>, Portrait of Song Siyeol, Joseon Dynasty, 18th century, silk fabric, 188.0 × 79.0cm (Hanging scroll painting), 89.7 ×67.6cm (Image), National Museum of Korea (Deoksu 2828), National Treasure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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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宋時烈肖像>, Portrait of Song Siyeol,, Joseon Dynasty, 18th century [original version, ca,1680], silk fabric, 92.5 ×62cm, the collection of the head of the Munsungongpa of Andong Kwon Family, tangible cultural heritage No. 332 in Chungcheongbu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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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Jo Se-Geol, <臥龍潭> 『谷雲九曲圖帖』, “Wayongdam” from the Album of Paintings of Gokun Gugok, Joseon 1682, paper, 42.5×64.0cm, National Museum of Korea (Bongwan 106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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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高山九曲圖卷>, Handscroll Painting of Gosan-gugok, Calligraphy by Kim Soo-jeung, between 1688-1701 in Joseon, referred to the plate 16 in the Compilation of Historical Records of Joseon vol. 1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Chosun,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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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Anonymous,<高山九曲圖卷>, Handscroll Painting of Gosan-gugok, Joseon 18th century, printing, 14×223 cm, Museum of Daejeon Metropolitan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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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聚星圖>, A Narrative Figure Painting about the Virtuous Gathering of Chen and Xun Family, attributed to Jo Se-Geol, 17th century, ink and color on Silk, 140×60.5cm,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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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The Front Cover of the Chuiseong-do, Joseon, ca.1677,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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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Jo Se-Geol, <聚星圖> 1幅, Virtuous Gathering of Chen and Xun Family, first picture of the Chuiseong-do album, ca.1677, ink and color on paper, 29.8×45.5cm,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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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Jo Se-Geol, <聚星圖> 2幅, Virtuous Gathering of Chen and Xun Family, second picture of the Chuiseong-do album, ca.1677, ink and color on paper, 29.8×45.5cm,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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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Jo Se-Geol, <聚星圖> 3幅, Virtuous Gathering of Chen and Xun Family, the third picture of Chuiseong-do album, ca.1677, ink and color on paper, 29.8×45.5cm, Harvard-Yenching Library at Harvard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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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Jeong Seon, Virtuous Gathering of Chen and Xun Family, 18th century, color on silk, 145.8×61.5cm, Leeum, Samsung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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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Virtuous Gathering of Chen and Xun Family, mid 19th century,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178×91cm, Song Joon-Ho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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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Lee Hyeongbu(1791~1851), <五曲 ·六曲7gt; 『華陽九曲圖帖』, “Fifth and Sixth Stream” from the Album of Paintings of Huayanggugok, Joseon 1809,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38×25.5cm, Song Joon-Ho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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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A Miniature Copy of the Album of Paintings of Huayanggugok, 20th century,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24 ×16cm, Song Joon-Ho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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