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송시열의 그림 제작과 ‘學朱子’ 전통
“石室(金尙憲, 1570~1652)의 자손이 그의 할아버지께서 그림에 대한 癖이 지극하시고 또 품격을 깊이 아는 까닭에 모아 둔 것이 많다고 이야기하였네. 나는 伊川(程頤, 1033~1107)이 그림 감상을 즐기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좋아하는 바가 다른가 생각했었네. 후에 朱先生의 말을 보니 스스로 이르기를,“매우 그림을 좋아하여 남에게서 상자를 전부 빌려다가 감상하였다.”하였네.”14
“요즘 하는 일은 어떠한가? 그대를 그리는 마음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겠네. 나의 병은 거의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네. 가만히 邸狀을 보니 나의 이름이 자주 소장에 올라 마음이 매우 불안하네. 待罪하는 소가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네. 겸하여 또 泮題에 공자를 업신여기는 말로 선비를 시험보였던 것은 그 근원이 대체로 적 尹鑴(1617~1680)가 주자를 공격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尹拯(1629~1714)의 집안이 당을 지어 그를 도왔기 때문에 그들 派黨이 크게 확대되어 이런 극악한 데 이르게 되었네. 이는 또한 내가 尹을 배척하여 격동시킨 데 연유된 것이기도 하네.(中略)
또 한 가지 일이 있네. 石潭이 매몰되어 감은 진정 차마 말 못할 일이네. 예부터 책상에 간직했던 高山九曲歌를 어제 金季達(金昌直, 1653~1702) 편에 서울과 東郊(동대문 밖 김수항 집안)에 보냈네. 이는 노선생께서 지으신 것을 金南窓(金玄成, 1541~1621)이 쓴 것이네. 본을 떠서 板本을 만들려고 하는데, 이어서 구곡도를 그 아래 그려 붙이고, 또 무이구곡시의 韻자를 가지고 각 곡마다에 시를 지어서 써넣는다면 훌륭한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고 할 것이네. 이미 여러 老成한 이들께 자세히 말하였네. 무이구곡시의 첫 수 운자는 내가 망녕되이 책임지기로 하고 그 아래 아홉 수의 운자는 곡운 김수증 형제와 仲和(김창협의 字) 외에 부탁할 만한 사람이 어디 있는지, 역시 중화와 상의하여 회답해 주기 바라네. 지금의 영상(領相)은 어떻겠는가?(後略)”21
Ⅲ. 17세기 후반 <취성도>의 제작 배경과 기능: ‘春秋大義’의 勸戒畵
“세설의 기록을 살펴보니, 陳太丘[陳寔]이 荀朗陵[荀淑]을 찾아가는데, 집이 청빈하여 부릴 하인이 없어서 곧 元方(진식의 장자 紀의 字)이 수레를 몰고 季方(진식의 차자 諶의 字)이 지팡이를 들고 뒤를 따르고, 長文(진식의 손자이자 陳紀의 아들 陳群의 字)은 아직 어려서 수레에 태웠다./이윽고 도착하자 순낭릉은 叔慈(순숙 셋째 아들 靖의 字)를 시켜 문을 열어주게 하고, 慈明(순숙의 여섯째 아들 爽의 字)을 시켜 술을 따르게 하고 나머지 여섯 아들은 돌아가며 음식을 내오게 하였다. 文若(순숙의 손자로 순숙의 둘째 아들인 緄의 아들 彧의 字)은 아직 어려서 무릎 위에 앉아 있었다./그때 태사가 ‘眞人이 동쪽으로 행차였습니다.’ 하고 아뢰었다./考亭에 사는 陳氏는 전에 別館이 있었는데 이름을 聚星이라 한 것은 대개 춘추 가운데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곧 허물어져 근세에 다시 신축하고 마침 나의 집이 가까이 있었고 그 일이 서로 뜻이 맞아 이윽고 근본 된 일과 자취를 병풍에 글을 써서 아울러 찬을 지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按世說 陳太丘 詣荀朗陵 貧儉無僕役 乃使元方將車 季方持杖從後 長文尚小載著車/中旣至荀使叔 慈應門 慈明行酒 餘六龍下食 文若亦小 坐着膝前/于時 太史奏真人東行/考亭陳氏 故有離榭 名以聚星 蓋取續陽秋語中 更廢壞 近始作新適邇敝 廬因得相其役事 既又為之本原事 跡迹亘屛上 并爲之昔 以示來者云).”
여기 이곳 한 서원에 惟玆一院
모신 군자 여섯인데 凡六君子
형제 서로 앞다투어 壎篪競奏
선대 미덕 계승했고 堂構紹美
사우들과 어울리어 曁厥師友
한 마음에 같은 연원 一揆同貫
별들 모임 아닐쏘냐 豈聚星比
자양의 찬 합당하다 合紫陽贊
“(1) 아! 陳氏여, 신령스런 산악의 영기가 모여, 학문의 연원 깊고 예의범절은 아름답고, 道 넓으며 마음 화평하였네. 행동 고상하고 말 겸손하며 성쇠에 따라 나아감과 물러남 뜻대로 하니, 거의 바라는 대로요. 가함도 불가함도 없었도다. 자청하여 獄에 들어가 대중을 위안하고 환관[張讓]을 조문하니 나라의 사람들이 온전함 얻었도다. 환한 한 치의 가슴 속은, 차가운 강에 비친 가을 달이었네. 情談 원하고 마음에 그리워하는 이, 나와 뜻이 같은 故 낭릉군 荀淑으로 字는 季和라네. 훌륭한 자식들 두어 학문과 품성 닦으며 잠잠히 앞으로 나아가며, 사모하나 볼 수 없지만, 가만히 그 심정 느낄 수 있네.
(2) 잠시 벗 찾아 길 떠나는데, 부릴 하인 없어 두 아들 불러 수레 몰고 출발하니 푸른 꼴 실은 황소에, 베 휘장 덮은 땔감 실은 수레였네. 紀는 채찍 잡고 앞에서 호위하고 諶은 지팡이 들고 뒤 따랐네. 이른 곳 그 어딘가? 高陽이었네. 그때 荀淑은 옹께서 온다는 반가운 소식 듣고 靖에게 명하여 대문에 나아가 응접하게 했네. 용맹스런 일곱용들[일곱 아들] 자리 펴고 술잔치 열었네. 靖과 肅은 앞에 나아가 옹의 왕림에 절하였네. 어찌 오늘 아침에 맑고 정정하신 어른 뵐 줄 알았으리요. 爽에게 명하여 술잔 올리고 형제들 음식 장만하여 차례차례 진설하네. 잔을 주고 받으며 서로 얽히어 예법 따르나 정은 더욱 친근하여 곧 웃으며 담소 나누니 德과 義가 아님이 없도다. 도리에 더욱 매진하며 世道를 도왔네. 더벅머리 어린 두 아들 무릎 앞에 앉혔네. 근원 깊고 근본 확실하니 자식들 모두 어질었네. 오직 慈明[순상]은 유독 謝靈運(385~433)과 짝할 만하였네. 말년에 나라 혼란할 때 과감히 자취가 잦음을 꺼리어 贅旒의 운명으로 잠시 연장함을 믿었네. 붕당 만들어 정사 어지럽힌 괴수는 누가 먼저 시작했던가.
(3) 彧은 曹操(155~220)에 몸 맡겨 羣 역시 한나라 왕실을 잊었네. (가문의 명예) 지키고 잇기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니 탄식하네.
(4) 높은 누대에 북두성 돌며 지나가니 여기서 天文을 살피도다. 오히려 이곳은 시골 교외지만 현인이 모였었네. 정자 있어 잠시 묵으니 예전의 이 이름 남긴 유풍 입었네. 이제 전에 들은 것 풍자하여 모습과 거동 알리네. 산처럼 우러르고 만인이 걷는 큰 길처럼 덕을 좋아함은 같나니 忠과 孝 일과로 삼기 권하세. 오직 나의 참 마음은 이렇도다. 백성들 이곳 찾아와 살피고 거울처럼 상고하며 나태하지 말지어다. 나라에 충성하고 가문 계승하려면 明戒 길이 받들기 원하노라.”26
“취성도는 곧 陳寔·荀淑의 德星에 관한 일이다. 선생이 생각하기를, 이 일은 朱先生이 贊을 지어 뜻을 붙인 것이 이미 깊고, 또 朱子·南軒(張栻의 號)·勉齋(黃榦의 號)의 논설이 진실로 意義가 커서 衰世를 勸戒하는 하나의 큰 단서가 될 만하다 하여, 그 일을 그리고자 金公에게 말하였더니, 김공이 즐겨 듣고 경영하였다. 선생이 여러 차례 편지로 왕복하여, 그 그림의 곡절을 헤아린 다음, 먼저 주 선생의 찬문을 쓰고 다시 세 선생의 논설을 贊 아래에 붙이고 또 그 아래에 小跋을 붙여 동지에게 나누어 주었다.27
대개, 선생은 孝廟의 밝은 명을 받아 世道로 자임하다가, 기해년(1659, 효종10) 이후 비록 浩然히 물러나 돌아와서 다시 몸소 나아가 도를 행하지 않았으나, 평상시에 잊지 못하는 마음은 미상불 여기에 있었다. 진실로 편벽되고 방탕하고 간사하고 도망하는 나쁜 말[詖淫邪遁]이 정도를 해치고 사람을 모함하는 말을 들으면 惕然히 감개하여 밤에 잠을 자지 못하며, 준엄한 말과 바른 논의를 忌諱하는 바가 없이 했는데, 모두가 凜然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한편의 俗流가 대부분 듣기 싫어하였고, 심지어 눈을 흘겨 원수처럼 보기까지 하여 마침내 윤휴·허목과 모의하여 화를 얽었다. 윤증은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墓文을 받은 이후로 원망이 날로 깊어져서, 윤휴의 손을 빌려서 그 마음을 쾌하게 하려 하였다. 대개 그들 부자의 마음이 가리고 고체(固滯)된 지 오래되었으나 그 심술의 隱微함이 이때에 와서 점차 드러났다.
선생은 더욱 世道를 위하여 근심하고 탄식하여, 친구 중에 혹 구차하게 우물쭈물하여 그 사이에 젖어드는 자가 있으면 통렬히 경계하고 꾸짖어서 반드시 구해내고야 말았다. 어떤 사람이 혹 침묵을 지켜 화를 피하라고 諷諫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朱子의 말로 답하기를, “지금 화를 피하라는 말을 하는 것은 진실로 서로 사랑하는 데에서 나왔으나, 내가 만 길 우뚝이 솟아 있는 것을 보면 어찌 더욱 우리 도의 광채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또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趙忠簡·李參政 諸公이 海上에 있을 적에 門人과 친구들의 문안이 끊이지 않았고, 胡澹菴 같은 이는 날마다 知舊들과 唱和하고 왕래하면서 말하지 않는 바가 없었지만, 秦檜가 또한 다 잡아서 죽이지 못하였으니, 대개 스스로 천명이 있는 것이다.” 하고, 또 주자가 어떤 사람이 시속을 따르라는 설에 답한 말을 인용하여, “마치 약초가 鍛煉을 받아 본성이 없어지면 병을 구하지 못하는 것과 같게 될까 두렵다.” 하였다. 이 때문에 진실로 조금이라도 世道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危禍가 날로 급한 것 때문에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聚星圖>를 만든 것도 실은 퇴폐한 풍속에 경각심을 일깨우고[警勵] 또한 윤증의 무리를 슬며시 나무라서 그 일개 반개라도 구하려는 것이었다.”28
“일전에 두 차례로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즉시 답장을 써서 말씀하신 대로 監營 편에 보냈는데 미처 받아보기도 전에 또 하인을 보내어 葬禮 모실 날짜를 알려 주고 날짜를 고치게 된 곡절을 일러주어서 장사를 예절대로 치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의논할 것도 없네. 小正의 선택에 있어서는 엄연히 宗周의 뜻이 있으니, 이것은 관계된 바가 어찌 한 집안의 일일 뿐이겠는가. 삼가 敬服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네. 기억하건대 옛날 자네의 先王考(돌아가신 할아버지)이신 大相國 李廷龜의 무술년 상주문에, “明나라를 받드는 마음은 물이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것과 같아서 律法은 《大明律》을 사용하고 歷은 《大統曆》을 사용합니다.”라고 한 말이 있네. 매양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울음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는데, 지금 바로 그 집안에 훌륭한 손자가 있어서 그 법을 버리지 않았으니 참으로 ‘周 나라 禮가 魯 나라에 있다.’고 한 말은 자네를 두고 한 말인가 하네.
그런데 ‘물은 반드시 동으로 흐른다.’는 구절은 淸陰大老(김상헌)께서 정축년(1637, 인조 15)의 상소문에 인용하였다가 瀋陽에 끌려가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지금은 그 從孫이 斡難河가 세운 연호를 쓰며 예를 의논하는 사람이 《대명률》 인용한 것을 모함하고 있으니 어찌 朱子가 ‘聚星亭의 후손 彧이 바로 曹操의 패거리에 붙었으니 또한 漢 나라의 은덕을 망각한 것이다.’고 탄식한 일과 같지 않다고 하겠는가. 繼述하기 어려움은 예부터 그러하였으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로 허여해 주신 의리에 감동하여 이토록 말하니 송구하기 그지없네. 다만 슬픔을 절제하고 예를 삼가서 사모하는 정성을 저버리지 말게.”31
“荀彧의 아들 顗가 또 역적 司馬昭를 보좌하였고, 曹髦가 죽자 그는 또 그 조카인 陳泰를 권유하여 그로 하여금 역적 사마소를 돕게 하였네. 훌륭한 荀淑의 자손이 이와 같았는데, 그 논의를 文飾 엄폐하곤 하여 邪說이 제멋대로 흐르는 실상을 더욱 나타나게 하였네. 자손의 죄악이 커질수록 조상의 허물이 드러난다고 훈계한 朱先生의 뜻이 참으로 깊고 간절하다 하겠네. 삼가 생각건대, 선원 仙源相公(김상용)의 殺身大節은 古人에 비할 만하네. 그러나 듣건대 평소의 행실과 의논은 때로는 老先生과 더불어 전연 딴판이었다고 하네. 어찌 후인은 그 본받을 만한 것을 본받지 않고 자기 마음에 편리한 대로 하여 꼭 본받을 필요가 없는 것을 본받아서, 호랑이를 그리다가 개를 그리듯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아득한 후생으로서 망녕되이 先正을 논하는 것은 극히 온당하지 못한 줄 아나, 내가 들은 것이 확실치 못하기에 감히 질문하는 바이니, 잠깐 너그러운 마음을 베풀어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Ⅳ. 18-19세기 <취성도>의 世傳 양상과 의미
“聚星圖 족자를 보내 주며 꾸미지 않은 조그만 족자 하나를 보내는데 그것도 石室에게서 나온 것이네. 선을 쳐서 보내주면 어떻겠는가? 요사이 神明 글씨를 얻었는데 前例대로 보배롭게 보관하려 하니 향나무 판자로 작은 궤짝을 만들어 보내주면 좋겠네. 따로 그 사양을 그려서 동봉하네.”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