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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2; 2021 > Article
조선 15세기 중국 북방 자기 문화의 유입과 분청사기에 미친 영향* **

Abstract

본고는 분청사기의 조형이나 장식 기법의 원류가 고려말 상감청자나 원·명대 자주요 자기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선행 연구보다 관점과 범위를 확대하여 중국 북방 지역에 형성된 자기 문화권 안에서 조망하고자 하였다.
한반도에는 조선초 건국세력의 일부였던 여진계 집단의 귀화와 고려말부터 조선 15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된 북방 이민족의 이주와 정착으로 중국 북방지역의 자기문화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었다. 따라서 15세기 초에 제작되는 상감분청사기의 조형에서부터 북방 자기의 요소가 확인되며 북방민족과의 교류 및 이주가 많아지는 15세기 후반에는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서 철화와 박지분청사기, 귀얄과 덤벙분청사기 등으로 확산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또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 중에 粉粧 자기의 단계를 거치는 현상은 조선 15세기 분청사기뿐만 아니라 원말·명초 중국 북방지역 자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중국의 경우도 남방 지역에서 청자에서 백자로의 전환이 빨리 이루어졌지만 북방지역은 청자에서 粉粧 자기의 단계를 거쳐서 백자로 이행되었다. 조선초 분청사기가 고려말 상감청자에 이어서 탄생·변화하는 과정 중에 한반도가 중국 북방 자기의 문화권 안에 포함되었고, 결과적으로 분청사기에 새로운 조형과 기법이 등장하는 배경이되었다.

Abstract

This paper is a study on Korean Buncheong ware in relation to the ceramic culture of North China. The focus on drawing connections between the ceramic industries of Korea and North China expands on views presented in previous scholarship. Research thus far has traditionally ascribed the origin of Buncheong forms and decoration techniques to the influences of inlaid celadon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and the Cizhou ware of the Yuan and Ming Dynasties.
The ceramic culture of North China was quickly transmitted to Korea due to the naturalization of the Jurchen people, who took part in founding the early Joseon Dynasty. Another factor was the migration and settlement of immigrants from North China, which began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and continued into the Joseon Dynasty or the fifteenth century. Therefore, the influence of North China is evident in various aspects of Buncheong ware from the early fifteenth century as observed in the forms of inlaid examples produced during this period. In the latter half of the fifteenth century, increased cultural exchange between the two regions and the growing number of migrants from North China were two important factors in the development of Buncheong in Korea. This is particularly true for examples featuring underglaze iron-brown (cheolhwa), sgraffito (bakji), slip-brushed (gwiyal), and slip-coated (deombeong) decorations fired in kilns populating the region of Chungcheong-do and parts of Jeolla-do.
Traces of ‘Bunjang (粉粧)’ ceramics, which served as the transition from celadon to White Porcelain, is detected not only in the fifteenth century Buncheong ware of Joseon, but also in the porcelain of North China produced in the late Yuan and early Ming Dynasties. Though South China also experienced a quick transition from celadon to White Porcelain, the inclusion of ‘Bunjang’ ceramics is unique to North China. In conclusion, early Joseon Buncheong originated and developed from the inlaid celadon of late Goryeo-a progression that occurred under the ceramic culture of North China, whose influences prompted innovations in form and technique vital to the development of Buncheong ware.

Ⅰ. 머리말

분청사기는 20세기 초 미시마테[三島手]라는 불확실한 의미의 일본식 용어에서 장식 기법, 태토, 유색의 특징을 반영한 粉粧灰靑沙器라는 명칭과 다섯 가지의 장식기법이 학술적으로 정의되었다.1 이후 연구에서 분청사기는 고려말 상감청자의 뒤를 이어 서서히 변화하면서 지역성을 띠는 다양한 장식 기법으로 발전하다가 덤벙분청사기 단계에서 백자에 흡수되는 자기로 정의되었다.2 지금까지 학계에서 분청사기의 탄생과 발전, 소멸 과정을 바라보는 시각은 외래적인 영향보다 내재적인 요인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하지만 분청사기에서 내재적인 요소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조형과 장식 기법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본고에서는 분청사기에 보이는 외래적 조형 요소와 그 배경에 집중하여, 14세기에서 15세기에 남방과 북방 지역으로 구분되는 동북아시아 도자의 흐름 안에서 분청사기의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분청사기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는 주로 중국 河北省에 위치한 磁州窯 자기와의 관련성이 언급되었다. 분청사기와 자주요 자기가 모두 백토 粉粧을 한다는 공통점을 들어서 분청사기가 자주요계 도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3 그러나 양자 간에 철화 안료의 사용, 분장한 바탕면을 긁어내는 剝地기법, 조화기법 등에서 유사성은 있지만 영향 관계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거나 영향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다.4 이러한 견해가 우세하였던 것은 당시에 접할 수 있었던 자주요 자기에 대한 자료만으로 분청사기와의 영향 관계를 단정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청사기 조형에서 외래 요소에 대한 연구는 중국 자료가 풍부해지는 2000년대 이후에 좀 더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중국에서도 ‘磁州窯系’ 자기나 요, 서하, 원, 명대 북방 지역 자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연구 성과가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분청사기의 문양, 구성, 장식 기법, 명문 증가 등이 원·명대 자주요 자기와 관련성이 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5 이후에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자주요 자기보다 더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중국 북방 자기와 분청사기와의 영향 관계로 범위가 확장되었다.6
중국 북방 자기는 서북쪽의 감숙성과 내몽고까지 포함되는 長江 북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된 일상 용기이다. 북방 자기는 주로 생활 용기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무역품이나 사치품, 국가 간 교류의 답례품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던 중국 자기와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북방 지역은 역사적으로 요, 서하, 금, 원 등 이민족이 지배한 세월이 길었기 때문에 유목 민족의 생활에서 비롯된 풍습이 북방 자기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북방 지역의 요지와 소비지에서 출토된 자기의 양상을 볼 때, 북방 지역에 형성된 자기 문화의 전통이 면면히 오랫동안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방 자기가 대부분 생활 용기로서 전세품으로 남아 있는 예가 드물고, 관련 요지나 소비지 등에서 출토된 예도 적기 때문에 분청사기와 비교할 수 있는 동시기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는 한계도 있다.
본고에서는 분청사기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가 중국 북방 지역에 오랫동안 형성된 자기 문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분청사기도 청자나 백자와 마찬가지로 동북아시아의 자기 문화권 안에서 생성 및 발전하였다는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조선 15세기 분청사기에 보이는 새로운 기종과 문양 등의 조형 요소에서 북방 자기와의 관련성을 살펴보고,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배경과 의미에서 두 가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분청사기에 북방 자기의 조형 요소가 보이는 현상이 조선의 건국 세력과 북방 지역에 거주하던 이민족 집단의 이주로 인한 북방 자기 문화의 유입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둘째, 분청사기가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자생적인 도자라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서 원말·명초 북방 지역에서 확산된 粉粧 자기와의 관계 속에서 보고자 한다.7

Ⅱ. 분청사기에 보이는 중국 북방 자기의 조형 요소

분청사기의 외래적 요소는 주로 철화분청사기나 박지분청사기에서 산화철 안료의 사용과 박지기법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8 이러한 선행 연구를 보면 상감분청사기보다 비교적 늦은 시기에 제작되는 박지나 철화분청사기부터 북방 자기의 영향이 시작되는 것 같지만 이미 상감분청사기부터 북방 자기의 조형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 본 장에서는 분청사기의 기형과 문양에 보이는 북방 자기의 조형 요소를 살펴봄으로써, 상감분청사기 단계에서 북방 자기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해서 조화, 박지, 철화분청사기까지 확산되는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상감분청사기에 보이는 새로운 기종 중에 자라병과 편병은 북방 자기와 관련되는 대표적인 예이다.9 중국에서는 자라병과 편병을 모두 扁壺로 분류하지만 본고에서는 몸체가 누워 있는 자라병과 앞뒷면이 편평하고 서 있는 편병을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먼저, 자라병은 술을 담아서 말에 싣고 다니기 편리하게 앞뒤를 불룩하게 만든 酒器로, 그 형태가 자라와 유사하여 酒鼈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0 중국에서 자라병이 주로 발견되는 지역은 내몽고, 하남성, 산서성, 산동성 등이며, 대부분 요, 금, 서하, 원대에 제작된 것이다.11 중국 內蒙古自治區 赤峰市 寧城縣 天義鎭郊區와 山東省 濟寜市東門小區에서 출토된 요대 <삼채자라병>은 자라병의 원형으로 인식된다.12 <삼채자라병>은 현존하는 예 중에서 제작 시기가 빠르고 자라 형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자기로 제작되는 자라병의 원류가 요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Fig. 1). 서하의 흑유자라병은 바탕면의 유약을 긁어내는 剔花기법으로 장식되었고, 寧夏 回族自治區 靈武窯에서 제작되었다.13 금대에는 하남성 노산단점요지에서 출토된 <흑유쌍이자라병>과 山西 지역에서 제작된 <갈유자라병>이 알려져 있다.14 원대에는 河南省 禹縣 扒村窯, 산서성 등지에서 발견된 <백지철화자라병>이 확인된다.15 이와 같이 중국에서 자라병이 발견되거나 제작된 지역은 모두 북방 지역에 한정되는 특징을 보인다. 제작 시기도 서하, 요, 금, 원대여서 자라병이 북방민족의 유목생활에 필수적인 기물로서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북방지역에서 주로 사용되던 자라병이 고려말 상감청자에는 보이지 않다가 조선 초에 상감분청사기로 제작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조선 15세기에는 상감, 철화, 조화분청사기뿐만 아니라 흑유자기, 청자, 상감백자 등 다양한 품종으로 만들어졌다. 조선 초에 제작된 자라병은 둥근 몸체가 누워있는 형태이며, 몸체 위아래가 불룩하고 아랫면에 굽을 붙이거나 굽이 없는 경우도 있다. 상감분청사기 자라병은 전세품만 알려져 있다가 최근 경상북도 상주 상판리요지에서 자라병편이 출토되었다.16 자라병의 주구 부분은 파손되었으나 몸체의 윗면과 옆면은 잘 남아있으며 아랫면에 굽의 일부가 남아있다. 자라병의 문양 구성과 소재는 고려말 상감청자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측면에는 물결을 헤치고 나아가는 橫龍이 상감되어 있다(Fig. 2). 용문이 장식된 상감분청사기 자라병은 처음 알려진 사례일 뿐만 아니라 왕실용 자기를 공납하던 상판리요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자료이다. 상판리요지는 ‘司膳’, ‘寜’ 등의 명문 자료뿐만 아니라 화분, 화분받침, 墩, 제기 등의 특수 기종이 다양하게 확인되어서 관청과 왕실 의례에서 사용되는 자기를 제작하여 공납하던 가마로 추정되었다.17 명문자료나 상판리 요지가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상주목에 기재된 자기소라는 점 등을 볼 때, 가마의 운영 시기는 15세기 1/4분기경으로 판단된다.18 용문이 상감된 자라병이 왕실 의례용이나 官司用 자기를 제작했던 요지에서 출토된 사실을 통해서 당시 조선 왕실용 기물에 북방 자기의 영향을 있었음을 유추하게 한다. 다음 장에서 논의될 조선 건국의 주역인 이성계의 핵심 세력이었던 북방 여진계의 유입과 분청사기의 새로운 조형 요소와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판단된다.
扁甁도 자라병과 같이 북방 유목민족의 대표적인 생활용기이다.19 편병은 몸체 원형판의 앞뒷면이 편평하거나 약간 불룩한 형태이고, 주둥이와 굽은 따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중국에서도 편병은 兩晉시기부터 요, 서하, 금, 원, 명대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북방지역에서 제작되었다. 요대에는 내몽고 代欽塔拉 3호 무덤 출토 <장유편병>, 요령성박물관 소장 <황유편병>, 내몽고 翁牛特旗 廣德公鎭 무덤 출토 <녹유편병> 등이 알려져 있다.20 조선 15세기에 제작되는 편병은 몸체의 앞뒤 원형판을 붙이는 제작 방법에 따라서 두 가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측면에 판이 없이 앞뒤 원형판을 맞닿아 붙여서 앞뒷면이 불룩한 형태의 편병이다. 둘째는 앞뒤 원형판 사이 측면에 판을 붙이기 때문에 앞뒷면이 판판한 형태를 가진 편병이다. 상감분청사기의 경우 두 가지 형식의 편병이 모두 제작되었지만 조화나 박지분청사기로 제작된 편병은 원형의 몸체가 약간 찌그러지는 비정형화된 형태로 둔탁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편병은 분청사기 외에도 청자, 상감백자, 흑유자기 등으로도 제작되어 조선 15세기에 유행한 기종이었다.21
경기도박물관 소장 <백자음각철채연화문편병>(이하 백자편병)은 조선 15세기에 제작되는 연질 백자 계통이지만 문양을 赭土로 감입하는 상감백자와 다르게 음각선에 산화철 안료를 덧바르듯이 장식하였다(Fig. 3). 이 백자편병은 매우 특이하게 요대에 제작된 <녹유편병>이나 <황유편병>과 기형뿐만 아니라 문양까지 유사하여 주목된다. 요대 편병은 원형의 문양대를 나누고 삼각형을 둘러서 鋸齒文처럼 보이지만 연화문이나 연판문을 표현한 것이다(Fig 4).22 백자편병의 앞뒷면에 장식된 삼각형 문양도 꽃잎이 이중으로 겹친 이중연판의 형태이며, 마치 활짝 핀 연꽃을 위에서 바라본 것처럼 표현하였다. 이와 유사한 문양이 장식된 분청사기가 고흥 운대리 분청사기 1호 요지와 학봉리요지에서 출토되었다.23 조선 15세기 백자편병이나 분청사기는 요대 자기와 제작 시기에서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조형의 자기가 명초까지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백자편병의 조형은 요대에 비롯된 편병의 전통이 북방 지역에서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조선초에 한반도까지 유입되었음을 보여주는 예로서 의미가 크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15세기 <분청사기 상감모란당초문 편병>과 내몽고자치구 伊克昭盟窯에서 제작된 서하의 <흑유척화 화당초문 편병>에서도 볼 수 있다(Fig. 5, 6).24 두 편병은 모두 몸체 윗면에 고리를 부착하였으며, 몸체 앞뒷면에 원형으로 삼단 문양대를 구획하였다. 문양대의 중앙에는 여덟 장의 꽃잎을 가진 화문이, 마지막에는 꽃을 소재로 한 당초문이 배치되었다. 장식 기법은 면상감과 剔花기법으로 차이가 있지만 꽃과 당초 형태가 面으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척화기법은 바탕면의 유약이나 백토분장을 긁어내어 바탕과 문양이 색과 질감에서 대비되는 효과를 주는 장식기법으로 분청사기의 박지기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양 구성은 주로 상감분청사기 편병과 유사하며, 박지나 조화분청사기 편병은 문양대를 구획하지 않거나 해체된 모란문, 물고기문, 태극문 등을 소재로 사용하였다. 서하(1038-1227)에서 제작된 편병도 조선초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지만 중국 북방지역에서 이러한 자기 전통이 지속되다가 조선 15세기 초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감숙성과 섬서성에서 출토된 두 점의 편병은 앞서 설명한 요대나 서하의 자기 전통이 명대까지 지속된 상황을 보여주는 예이다. 甘肅省 平凉市 출토 <갈유 쌍어수자문 사이편병>과 陝西省 韓城市 출토 <갈유 일두삼어문 편병>은 원형의 문양대에 연주문을 배치한 점이나 주문양으로 물고기 소재를 사용한 점이 유사하여 명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5 섬서성에서 출토된 <갈유 일두삼어문 편병>은 세 마리의 물고기가 하나의 대가리를 공유하는 一頭三魚文, 상단 양쪽에 태극문, 하단에 연지어문이 배치되었다(Fig. 7). 태극문은 하북성 彭城 자주요지 명대 층위에서 출토된 백지철화자기에서 확인되었으며 주로 명대 자주요 자기에 보이는 문양이다.26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분청사기상감 연화어문 자라병>은 윗면에 태극문이, 아랫면에 삼어문이 상감되었다(Fig. 8). 三魚文이나 태극문은 상감, 조화분청사기 편병이나 자라병에서 적지 않게 확인되는 문양 소재여서 북방 자기와 분청사기에 보이는 공통적인 조형 요소이다.27
명대 갈유 편병에서 가장 주목되는 문양은 세 마리의 물고기가 하나의 대가리를 공유하는 一頭三魚文이다. 일두삼어문이 중국 자기에서 많이 사용된 문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선초 상감이나 조화분청사기에 장식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일두삼어문이 장식된 분청사기는 전세품만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에 상주 우하리요지에서 일두삼어문이 흑백 상감된 초벌접시편이 출토되었다(Fig. 9).28 상주 우하리요지도 앞서 살펴본 상판리요지와 마찬가지로 ‘사선’ 등의 명문 자료와 국가 의례용 제기 등이 출토되어서 15세기 초인 1/4분기경에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15세기 초부터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사명자기와 의례용 제기를 만들던 요지에서 일두삼어문이 상감된 접시가 제작되었다는 점은 북방 자기의 유입 주체와 시기 등 여러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분청사기 기종 중에서 입지름이 30-40cm 이상의 대발도 새롭게 보이는 형태이며, 내면에 물고기가 장식되는 예가 많다. 대발은 전세품과 요지 출토품이 다수 전하는데, 입지름이 30cm가 넘고 측면이 사선으로 벌어지거나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형태의 대발편이 광주 충효동요지에서 여러 점 출토되었다. 1963년 발굴에서 출토된 입지름 32.5cm의 대발은 내면에 상감기법으로 물고기가, 외면에 상감·박지·조화기법으로 모란문이 시문되었다.29 1991년에 충효동 요지 W2N3에서 출토된 대발편은 박지기법으로 내측면에 물고기 세 마리를 시문하였고, W2-3층에서는 조화기법을 사용한 예도 두 점 확인되었다(Fig. 10).30 고창 용산리요지에서도 물고기나 모란문이 장식된 대발이 많이 출토되었다.31 완주 화심리요지, 공주 학봉리요지에서 출토된 대발에도 상감, 철화기법으로 장식된 물고 기문을 볼 수 있다.32 중국에서 이러한 형태의 대발은 觀臺磁州窯址 4기 전단계(1220-1307), 하남성 魯山 段店窯址 원대 층위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33 대발의 내측면에 물고기가 장식되는 자기는 요대 내몽고 巴林左旗 南山窯, 서하 靈武窯址, 원대 자주요 자기 등에서 확인된다(Fig. 11).34 물고기문이 장식된 대발 역시 요, 서하, 원을 거치면서 북방 지역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의 생활 속에서 오랜 시간동안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상감·인화·조화·덤벙분청사기로 제작된 소주자, 연적 등에서 注口 부분에 동물 얼굴처럼 눈을 만들어 붙이거나 동물 형상의 손잡이도 새롭게 보이는 조형 요소이다.35 주구 부분에 눈을 만들어 붙인 주자와 연적류가 광주 충효 동요지, 고창 용산리요지 등에서 출토되었다.36 상감, 철화, 덤벙분청사기로 제작된 소주자는 높이가 10cm 내외로, 몸체에 짧은 구연부와 손잡이가 달려 있고, 注口에는 간략화된 동물 형상이 貼塑되어 있다. 소주자의 손잡이나 주구를 동물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요, 금, 원, 명대에 제작된 북방 자기의 특징이다. 이러한 형태의 소주자는 감숙성 正寧縣 출토 요대 <녹유주자>, 섬서성 陳爐 출토 명대 <흑유주자>에서 볼 수 있다.37 섬서성 진로 耀州窯址에 제작된 명대 <흑유주자>는 요, 원대 자기보다 주구와 손잡이의 동물 형상이 간략화되어 분청사기의 조형과 유사성을 보인다(Fig. 12).38
둥근 구형의 몸체에 동물 형상의 주구와 손잡이가 달리고, 바닥에 구멍을 뚫어 관을 통해서 물을 주입하는 倒流式 연적도 분청사기의 새로운 기종이다. 동물 형상의 도류식 연적은 상감, 인화, 조화, 귀얄, 덤벙분청사기로 제작되었다.39 도류식은 몸체 바닥에 구멍을 뚫고 관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당대부터 원대까지 주로 북방 지역 가마에서 제작되었다.40 서하 靈武回民巷窯에서 제작된 연적은 도류식의 둥근 몸체와 손잡이에서 분청사기 도류식 연적과 유사성을 보인다.41 하남성 禹州요지에서도 백토 분장을 하고 산화철 안료로 장식한 동물모양 연적이 출토되었다(Fig 12).42
분청사기에 자주 사용된 물고기나 새와 같은 문양 소재도 내몽고 寧城 靈武窯址, 하남성 鶴壁窯, 섬서성 陳爐耀州窯址 등 서하, 원, 명대 북방 자기에서 자주 사용되었다. 상감, 조화, 철화분청사기 병이나 매병 몸체에 물고기 소재가 단독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예를 중국 靑海省 湟中縣에서 출토된 서하의 <흑갈유음각어문병>에서 볼 수 있다. 조선 15세기에 철화, 조화분청사기로 제작된 병의 몸체에 새 소재가 장식되는 경우도 원·명대 서북 지역에서 제작된 河南鶴煤博物館 소장 <흑유음각조문쌍이병>이나 명초 섬서성 진로요주요지 출토품에서 볼 수 있다(Fig. 13).43
물속에서 물고기가 해조류를 물고 있는 문양은 魚藻文이라고 하며, 물고기는 한 마리가 표현되거나 두 마리가 반대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되는 雙魚藻文도 있다. 이러한 류의 어조문이나 쌍어조문은 백토 분장을 하고 산화철 안료로 문양을 그리는 원·명대 백지철화자기에서 많이 확인된다. 어조문 자기는 원대에는 주로 하북성 자주요지나 하남성 鶴壁窯址에서 제작되다가 명대에 이르면 섬서성 陳爐 耀州窯址나 하북성 팽성 자주요지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원, 명대 북방 자기에서 보이는 어조문이나 쌍어조문이 조선 15세기 초에 제작되는 상감분청사기에서 시작하여서 조화나 철화분청사기에서 많이 확인된다. 명 15세기에 제작 되는 진로 요주요지의 <백지철화 쌍어조문 발>이나 팽성요지의 <백지철화 어조문 발>에 표현된 문양은 조선초 상감분청사기 접시, 공주 학봉리요지 출토 철화분청사기 접시, 조화 분청사기 편병 등에서 볼 수 있다(Fig. 14). 원대 자주요계 백지철화자기의 魚藻文이 명대 백지철화자기로 이어지면서 한반도까지 확산되어서 15세기 분청사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초 분청사기의 기형과 문양에서 보이는 새로운 조형 요소는 요, 서하, 금, 원, 명에 이르는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북방 지역 자기와 일관된 관련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 북방의 요, 서하, 금, 원대 도자의 조형이 명대까지 이어지면서 중국의 남방 지역과는 차별화되는 북방 자기문화의 권역이 형성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 제작되는 분청사기도 14세기 말부터 15세기까지 서서히 북방 자기 문화의 권역에 포함되면서 그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장에서 한반도에 북방 자기 문화가 유입될 수 있었던 배경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Ⅲ. 조선 15세기 중국 북방 자기문화의 유입 배경과 의미

조선 15세기 분청사기에 보이는 중국 북방 자기의 조형적 영향과 의미에 대한 문제는 지금까지 분청사기 연구에서 별로 주목되지 않았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북방 자기의 조형 요소는 상감분청사기 단계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영향의 범위가 점차 박지, 조화, 철화분청사기로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15세기 분청사기의 조형에 중국 북방 자기의 영향이 보이는 현상은 특정한 磁器群의 유입이 아니라 북방 자기문화의 확산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전기 유적에서 출토되는 북방 자기는 원말·명초 磁州窯系 백지철화자기가 유일하지만 유적 출토 양상을 보면 분청사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 먼저, 자주요계 자기는 왕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한양 도성, 여주 신륵사지, 경기도 광주 도마리요지 등 한정된 지역에서 출토되고 출토량도 매우 적다. 출토 기종도 모두 항아리에 한정되어서 분청사기에 영향을 미친 북방 자기만의 특수한 기형이나 문양을 가진 예는 확인되지 않았다.44 출토 품종은 모두 백지철화자기로 북방 자기의 대표적인 예이지만 백토 분장이나 산화철 안료를 사용했다는 점 외에 분청사기와의 유사점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조선초에 자주요계 백지철화자기가 유입되었지만 왕실이나 그에 준하는 계층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며 조형적인 면에서 분청사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백토 분장기법이나 산화철 안료가 적극적으로 사용된 분청사기 요지는 당시 왕실의 관리나 영향력에서 벗어난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 산재해 있다.
그러면 조선 15세기 분청사기의 조형에서 보이는 북방 자기의 영향은 어떤 배경에서 시작되고 확산되는 것일까. 앞장에서 살펴본 대로 자라병, 편병, 대발, 소주자, 연적, 물고기나 새의 문양 소재, 동물 형상 표현 등으로 확인된 북방 자기의 영향은 상감분청사기부터 보이고 있다. 상감분청사기부터 북방 자기의 조형 요소를 수용하고 있지만 고려말 상감청자의 전통이 함께 보인다는 점에서 조형적 유사도는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분청사기 자라병이나 편병은 북방 자기의 영향을 받은 기종이지만 문양 구성은 고려말 상감청자를 계승한 예가 많다.
또 다른 예로 15세기에 둥근 몸체에 注口와 반원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提梁壺 형식의 상감분청사기와 흑유자기 주자를 들 수 있다.45 고창 용산리요지에서는 분청사기 외에 회청사기, 흑유자기로 제작된 제량호 형식의 주자가 출토되었다.46 이러한 주자는 화로 위에서 찻물을 끓일 때 사용하는 것으로 북방 지역의 차문화와 관련성이 있다. 고창 용산리요지에서 출토된 <흑유주자>는 몸체 어깨면에 손잡이를 걸 수 있는 작은 고리를 부착하였는데, 이러한 형태는 요대 駙馬 무덤에서 출토된 <은제주자>와 유사함을 볼 수 있다(Figs. 15, 16).47 이러한 주자는 중국 북방 자기에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차문화의 유입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조선초에 유입된 북방 자기의 직접적인 영향보다 북방의 자기문화를 가진 집단의 이주가 분청사기의 조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고려 14세기 후반부터 조선 15세기까지 중국 북방 지역의 유이민이 한반도로 유입되는 상황은 몇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먼저, 원이 몰락하고 명이 건국되는 고려말 혼란기에 유입된 경우이다. 공민왕 8년(1359)에 요양과 심양[遼瀋] 유민 2,300호, 同王 19년(1370)에 女眞 1萬戶가 전란과 병화를 피하여 자발적으로 귀화하였다. 고려후기 귀화인의 수는 공민왕대(1352-1374) 이후부터 90%를 차지하며 모두 元系와 女眞系였다.48 고려말에 이어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15세기 내내 북방 지역 이민족의 유입과 교류는 계속되었다. 특히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가문은 북방 지역의 여진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성계 가문은 4대조 李安社 대에 동북면 宜州[현 함경남도 문천 일대]에 정착하여 원에 귀화한 이후에, 流移民 집단과 여진인의 세력을 결합하여 동북면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49 특히 조선 건국 후에는 동북면 일대에서 활약하거나 이성계 가문과 婚戚 관계에 있는 다수의 여진인들이 각종 공신에 책봉되면서 대거 귀화하였다.50 현재 확인되는 15세기 상감분청사기나 백자 자라병, 편병 등은 품질이 매우 좋고, 15세기 초에 왕실용 자기를 제작한 상주 상판리요지. 우하리요지에서 출토된 <분청사기상감용문자라병>이나 <일두삼어문초별접시편> 등을 볼 때 건국초부터 조선 왕실에 북방의 자기문화가 유입된 정황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北邊에 할거하며 ‘野人’ 또는 ‘胡人’으로 불리던 다양한 북방 민족과의 교류 및 귀화 정책을 들 수 있다.51 조선초 북방 야인과의 교류 관계를 볼 수 있는 상감분청사기 매병 두 점을 선행연구에서 소개하였다. <분청사기 상감연화문 ‘沙籠介’명 매병>(이하 <‘사롱개’명매병>)과 <분청사기 상감용문 ‘籠介’명 매병>(이하 <‘롱개’명매병>)은 기형과 문양 구성에서 전형적인 고려말 상감청자의 조형이지만 사롱개와 롱개는 松花江 하류에서 함경북도 북쪽 일대에 거주하던 여진계 忽剌溫 부족의 이름이다.52 이와 유사한 예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건판 사진으로 남아있는 인화분청사기 매병에서도 확인된다. 매병의 몸체에 ‘竜介 四升入’이라는 백상감된 명문이 남아 있다(Fig. 17). ‘竜介’는 상감분청사기 매병에 있는 ‘沙籠介’나 ‘籠介’처럼 여진계 부족의 이름이다. 실록에서 이들의 이름을 표기할 때 籠과 龍[竜]을 모두 사용한 예가 확인되어서, 이름을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혼용한 것으로 보인다.53 조선의 북변에 거주하던 야인들이 土宜나 土物과 같이 토산물을 바친 기사는 태종6년(1406)부터 15세기 내내 빈번하게 보인다. 15세기 전반에는 태종연간(1400-1418)에 37회로 집중되며, 후반에 세조연간(1455-1468) 156회, 성종연간(1469-1494) 111회로 더욱 빈번한 교류 양상을 볼 수 있다.54
고려말에서 조선 15세기까지 한반도에 정착하거나 귀화한 다양한 유이민들에 의해 북방지역의 자기 문화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실록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광해군 1년(1609)의 기록을 보면, 귀화한 胡人이 황해도부터 경기·호남·호서의 해안 여러 마을에 없는 곳이 없었고 그중에서도 兩湖에 더욱 많이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55 특히 그들이 兩湖, 즉 호서와 호남, 현재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흥미롭게도 15세기 후반에 북방 자기와의 영향 관계를 볼 수 있는 철화, 박지, 귀얄, 덤벙류의 분청사기는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 요지에서 주로 제작되었다.56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자기로 이해되어 왔지만 이러한 양상은 원말·명초 중국의 북방 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에 중국에서도 원말·명초에 운영된 북방 지역 요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연구 성과가 축적되었다. 중국에서도 북방의 여러 요지에서 청자에서 백자로 바로 이행하지 못하고 분장자기의 단계를 거치는 양상이 확인되었다. 하남성 禹州窯址는 일반적으로 鈞窯址로 알려져 있으며, 발굴에서 鈞瓷, 汝瓷, 天目瓷, 白地鐵畵瓷의 네 가지 종류가 제작된 窯區가 확인되었다. 보고서에서 발굴된 자기를 모두 宋代로 비정하였으나 최근 연구에서 원대에서 명대로 보는 의견이 대두되었다.57 특히, 균요지에서 제작된 백지철화자기는 원대 백지철화자기와 다른 조형적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명초인 15세기에서 16세기로 편년되고 있다.58 따라서 원대에 균요 자기나 여요 자기류의 청자를 제작하다가 명대 이후에 백토를 분장하고 산화철 안료로 장식하는 백지철화자기로 이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섬서성에 위치한 陳爐耀州窯址에서도 청자를 제작하다가 粉粧 자기로 이행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진로 요주요지는 섬서성 銅川市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졌으며, 황보 요주요지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陳爐鎭에 위치하고 있다. 진로요지는 금말·원초까지 청자를 생산하다가 원말부터 화장토를 바르고 간단한 문양을 새기고 명대부터 백토 분장을 하고 산화철 안료로 문양을 그리는 白地鐵畵 기법이 사용되었다.59
하남성 禹州窯址나 섬서성 陳爐窯址에서 출토된 병이나 호에서 몸체의 2/3 정도만 백토 분장을 하고 산화철 안료로 문양대를 구획하거나 당초문과 같은 추상화된 문양을 한 번에 그려내는 모습은 조선 15세기 후반에 제작되는 철화분청사기와 매우 유사하다. 명대 자주요계 백지철화자기에서도 철화분청사기의 물고기, 연화, 연지, 새 등의 문양 소재, 유사한 표현과 구성을 볼 수 있다(Fig. 18). 백지철화자기는 금, 원대에 하북성 觀台磁州窯址를 중심으로 하남성, 산서성 일대로 점차 확산되었고 명대에는 하북성 彭城窯址, 하남성 우주 요지, 섬서성 진로요지, 산서성 霍州窯址, 壺關窯址까지 더 넓은 지역으로 펴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60 중국도 원대 이후에 남방지역은 경덕진요를 중심으로 청자에서 백자로의 이행이 진행되었지만 북방지역은 청자에서 백자로 바로 이행되지 못하고 분장자기의 단계를 거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한국도자사에서만 보이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 당시 북방 지역의 자기 문화권에서 일어난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 분청사기는 고려말 상감청자를 계승하여 제작되었지만 새로운 조형 요소에서 북방 자기와의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선의 건국 과정에 일조했던 여진계 세력과 고려말부터 조선 15세기까지 북방지역 이민족의 지속적인 유입과 교류가 있었다. 조선초의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 북방에 오랫동안 형성된 자기문화의 유입과 수용은 막을 수 없는 큰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요 정착지가 충청도, 전라도 해안 일대였다는 점도 이 일대 분청사기 요지에서 북방 자기의 주요 특징인 백토 분장, 철화, 박지와 같은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된 양상과 일치한다. 조선초 한반도가 중국 북방 자기의 문화권 안에 포함되면서 북방 자기의 조형 요소와 분장, 철화, 박지와 같은 기법이 한반도 서남부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Ⅴ. 맺음말

분청사기는 고려말 상감청자를 계승한 상감분청사기를 시작으로 전면적인 백토 분장으로 백자화되는 덤벙분청사기 단계에서 소멸되는 독특한 자기로 인식되었다. 본고에서는 선행 연구보다 좀 더 시야를 넓혀서 14세기에서 15세기에 남방과 북방으로 구분되는 동북아시아 도자의 흐름 안에서 분청사기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분청사기에서 새롭게 보이는 조형 요소를 북방 자기문화의 유입과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넓은 시각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였다.
조선 15세기는 건국세력의 일부였던 여진계 집단의 귀화와 고려말부터 지속적으로 진행된 북방 이민족의 이주와 정착으로 북방의 자기문화가 빠르게 유입될 수 있었다. 따라서 15세기 초에 제작되는 상감분청사기의 조형에서부터 북방 자기의 요소가 확인되며 야인들과의 교류 및 이주가 많아지는 15세기 후반에는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서 철화와 박지분청사기, 귀얄과 덤벙분청사기 등으로 확산되는 것으로 보았다.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 중에 粉粧 자기의 단계를 거치는 현상은 조선 15세기 분청사기뿐만 아니라 원말·명초 중국 북방지역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볼 수 있었다. 중국도 남방의 경우 청자에서 백자로의 빠른 전환이 이루어졌지만 북방지역은 청자에서 분장자기의 단계를 거쳐서 백자로 이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초 분청사기가 고려말 상감청자를 이어서 탄생·변화하는 과정에서 한반도가 중국 북방 자기의 문화권 안에 포함되었고 분청사기의 새로운 조형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Notes

1) 高裕燮, 「高麗陶磁와李朝陶磁」, 『朝光』(朝鮮日報社, 1941), pp. 46-48.

2) 강경숙, 『粉靑沙器硏究』(一志社, 1986), pp. 13-20; 同著, 『韓國陶磁史』(一志社, 1989), pp. 266-267; 鄭良謨, 『韓國의 도자기』(문예출판사, 1991), pp. 354, 365-366; 윤용이, 『韓國陶瓷史硏究』(문예출판사, 1993), pp. 332-333.

3) 山田萬吉郞, 「全羅道の李朝窯址」, 『世界陶磁全集』 第14卷 朝鮮 李朝篇(東京: 河出書房, 1961), pp. 195-196.

4) 강경숙, 앞의 책(1989), p. 266; 정양모, 앞의 책, p. 354; 윤용이, 앞의 책, pp. 332-333.

5) 김영원, 「조선 전반기 도자의 대외교섭」, 『朝鮮 前半期 美術의 對外交涉』(예경, 2006), pp. 206-209.

6) 김윤정, 「朝鮮初 酒器의 조형 변화와 원인」, 『강좌미술사』 37호 (2011), pp. 141-146; 나상철, 「15세기 剝地粉靑沙器 硏究」(충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 pp. 4-34.

7) 본고에서는 중국 자기의 장식 기법을 지칭하는 용어 중에 黑花는 鐵畵, 劃花는 음각기법으로 대체하여 사용하였음을 일러둔다.

8) 김영원, 앞의 글, pp. 207-209; 나상철, 앞의 글, pp. 72-79.

9) 김윤정, 앞의 글, pp. 141-142.

10) 林洪, 『山家淸事』 酒具 “山徑, 必以蹇驢載酒詎容無具, 舊有偏提猶今酒鼈, 長可尺五而扁容斗餘, 上竅出入, 猶小錢大, 長可五分用塞, 設兩環帶以革唯漆爲之”(산을 지날 때 술을 담아서 당나귀에 싣는 용기를 예전에 ‘편제’라고 하다가 지금은 ‘주별’이라고 한다. 길이 5척의 편평한 용기이며, 용량은 한 말이 들어간다. 위에 구멍으로 출입하는데 마치 작은 동전 크기 정도여서 약 5푼 길이의 마개를 사용한다. 가죽으로 만든 두 개의 고리띠에만 칠을 하였다.…) (陶宗儀,『說郛』 卷 74 上, 欽定四庫全書本)

11) 任志錄, 「‘背峞’與‘酒鱉’」, 『鑑藏』 第六輯(北京:文物出版社, 2006), p. 54-56.

12) 張柏 主編, 『中國出土瓷器全集』 4 內蒙古(北京:科學出版社, 2008), p. 106; 張柏 主編, 『中國出土瓷器全集』 6 山東(北京:科學出版社, 2008), p. 143.

13) 中國社會科學院 考古硏究所 編著, 『寧夏靈武窯發掘報告』(北京: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5), pp. 38-42, 100-101, 117-119, 168-169; 杭天, 『西夏瓷器』(北京: 文物出版社, 2010), p. 84.

14) 河南省文物考古硏究院 외 編著, 『魯山段店窯遺珍』(北京: 科學出版社, 2017), p. 131; Kerr Rose, SONG DYNASTY CERAMICS, V&A Publication, 2004, p. 82.

15) 任志錄, 앞의 글, p. 56.

16) 상주박물관, 『상주 상판리 자기가마6 유적(Ⅱ)』(2018), p. 48, pl. 1143.

17) 박경자, 「상주지역 가마터 출토 명문자기의 의미와 제작시기」, 『상주지역 도자문화의 성격과 가치』 제8회 상주박물관 학술대회(2019), pp. 48-51; 심지연, 「제기·화분·기대·돈을 통해 본 상주 상판리 가마터의 성격」, 同書, pp. 38-41.

18) 박경자, 위의 글, pp. 49-50; 김윤정, 「고려말·조선초 供上用 銘文靑瓷의 이행 과정과 제작 배경」, 『석당논총』 제55집(2013), pp. 164-167.

19) 路菁, 『遼代陶瓷』(瀋陽: 遼寜畫報出版社, 2002), p. 93.

20) 興安盟文物工作站, 「科右中旗代欽塔拉遼墓淸理簡報」, 『內蒙古文物考古文集』 第2輯(內蒙古文物考古硏究所, 1997), pp. 651-667. 내몽고자치구 代欽塔拉 3호 무덤은 그 규모와 부장품의 양상을 통하여 피장자가 契丹 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中國陶瓷全集』 9 遼 ·西夏·金 (上海人民美術出版社, 2000), pl. 69; 項春松, 「內蒙古翁牛特旗遼代廣德公墓」, 『北方文物』 4期(1989), p. 43; 路菁, 앞의 책, p. 93.

21) 조선 1466년에 죽은 晉陽君 令人 鄭氏의 墓에서 출토된 상감백자 墓誌, 양이잔과 받침, 편병이 일괄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묘지에 의하면, 정씨는 1466년[成化丙戌]에 둘째 아들 潤이 縣監을 제수받은 언양에 따라와서 11월 21일에 병으로 사망하자 언양읍에 장사를 지냈다(국보 제17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22) 劉莉, 『中國陶瓷全集』 9 遼·西夏·金 圖版說明, p. 263.

23) 朝鮮總督府古蹟調査委員會 編, 『鷄龍山麓陶窯址調査報告』 昭和二年度古蹟調査報告 第1冊(朝鮮總督府, 1929), pl. 77-4: 고흥분청문화박물관, 『고흥 분청사기 덤벙에 물들다』(2019), p. 15, pl. 4.

24) 杭天, 『西夏瓷器』(北京: 文物出版社, 2010), p. 321.

25) 張柏 主編, 『中國出土瓷器全集』 15 陝西 (北京: 科學出版社, 2008), pl. 230; 杭天, 위의 책, pp. 133-134.

26) 葉喆民 主編, 『中國磁州窯』 上卷(石家庄: 河北美術出版社, 2009), p. 194: 同著, 『中國磁州窯』 下卷(石家庄: 河北美術出版社, 2009), p. 280.

27) 일본 大和文華館 소장 <분청사기상감 연지삼어문 편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분청사기조화 삼어문 편병>(덕수5632)에서는 三魚文, 국립나주박물관 <분청사기조화 모란당초문편병>,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분청사기조화 태극문 편병>, 일본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분청사기상감봉황문편병>(Acc. No.21832)에서는 태극문이 사용되었다.

28) 상주박물관, 『상주 우하리 유적 학술발굴조사 보고서』(2020), p. 74, pl. 16.

29)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분청사기』(2013), pp. 101, 116. W2-3층에서는 측면이 사선으로 벌어지는 입지름 약 35cm 정도의 대발이 제작되었다.

30)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충효동 가마터』(1993), p. 110, pl. 138-②, pp. 105-106, 386-387.

31)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龍山里窯址』(2004), pp. 84-85, 159-160. 용산리요지에서는 대발로 추정되는 자편 651점이 출토되었으며 이 중에 88점만 기형이 복원되었다. 복원된 대발의 입지름은 30cm 내외이며, 귀얄 粉粧 후에 음각으로 모란이나 물고기가 음각된 조화분청사기로 제작되었다.

32) 전북문화재연구원, 『完州 花心里 遺蹟』(2008), p. 246, pl. 496; 국립중앙박물관, 『계룡산 도자기』(2007), p. 156, pl. 232.

33) 北京大學考古學系 外, 『觀臺磁州窯址』(北京: 文物出版社, 1997), pp. 225-226, 圖版 54-4,5; 河南省文物考古硏究院 外 編著, 『魯山段店窯遺珍』(北京: 科學出版社, 2017), pp. 167-171.

34) 路菁, 앞의 책, p. 36; 中國社會科學院 考古硏究所 編著, 앞의 책, pl. 26; 杭天, 앞의 책, p. 201.

35) 동물형 주구와 손잡이가 달린 소주자는 호림박물관 소장 <분청사기상감추상문소주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수13502, 동원133, 신수18648, 건판11977, 건판11992, 일본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분청사기조화엽문주자>(Acc.No.20670) 등이다.

36) 국립광주박물관, 앞의 책(2013), pp. 118-119, 127; 국립전주박물관,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2016), p. 39.

37) 路菁, 앞의 책, p. 96. 도 3-175 참조.

38) 薛東星·禚振西, 『陳爐耀州瓷精萃』(北京: 文物出版社, 2007), p. 120, pl. 101.

39) 倒流式 동물형 연적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동원152, 153, 938,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광주1143, 호림박물관 소장 <분청사기귀얄문연적>, 일본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분청사기인화문연적> 등이 있다.

40) 謝明良, 「關於陶瓷倒灌壺」, 『미술사학연구』 제310호(2021), pp. 79-84; 路菁, 앞의 책, p. 99. 중국 도자에서 도류식은 당대에서 청대까지 사용되었지만 원대 이전에는 주로 북방 지역에서 제작되다가 원대 이후에 경덕진요, 덕화요 등의 남방 지역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오대, 요대, 송대에는 섬서성 黃堡窯址, 耀州窯址, 하북성 정요, 遼陽 江官屯窯址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41) 杭天, 앞의 책, pp. 278.

42) 河南省文物考古硏究所, 『禹州鈞台窯』(鄭州: 대상출판사, 2008), pp. 114-115. 圖 63-7. 圖版47-3.

43) 杭天, 앞의 책, pp. 232, 130, 158; 薛東星·禚振西, 앞의 책, p. 105.

44) 김윤정, 「한반도 유입 중국 磁州窯系 瓷器의 양상과 그 의미」, 『야외고고학』 39호(2020), pp. 58-62.

4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판 14563, 덕수 4098, 동원 1236, 본관 11411 등의 자료에서 제량호 형식의 상감분청사기 및 흑유자기 주자를 확인할 수 있다.

46) 호남문화재연구원, 앞의 책, pp. 103 유물번호 328, 116-117 유물번호 409-411.

47) 前熱河省博物館籌備組, 「赤峰縣大營子遼墓發掘報告」, 『考古學報』 3期 (1956), p. 20, 圖版柒; 中國歷史博物館 編, 『華夏之路』 第三冊 (北京: 朝華出版社, 1997), p. 251,

48) 朴玉杰, 『高麗時代의 歸化人 硏究』(국학자료원, 1996), pp. 155-158.

49) 柳昌圭, 「李成桂勢力과 朝鮮建國」(서강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5), pp. 11-19 참조.

50) 柳昌圭, 「李成桂의 軍事적 基盤 -東北面을 중심으로-」, 『震檀學報』 58호(진단학회, 1984), pp. 11-12. 이성계의 여진인 武將 중에 500여호의 家別抄를 거느린 李豆蘭은 개국공신에, 40여 호를 거느렸던 朱萬과 崔也吾乃는 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51) 나상철, 앞의 글, pp. 88-97.

52) 김윤정, 앞의 글, pp. 143-146; 『世宗實錄』 卷 96, 24年 5月 己丑條 “…嘗入寇本國邊境, 忽剌溫 沙籠介 第二子 多籠介也.”

53) 『太宗實錄』 卷 24, 12年 11月 16日 丁酉條; 『端宗實錄』 卷13, 3年 3月 24日 己巳條.

54) 실록 기사에서 조선의 북변에 야인들이 토물이나 토의를 바친 기록은 태종연간(1400-1418) 37회, 세종연간(1418-1450) 1회, 문종연간(1450-1452) 8회, 단종연간(1452-1455) 11회, 세조연간(1455-1468) 156회, 예종연간(1468-1469) 2회, 성종연간(1469-1494) 111회로 집계된다.

55) 『光海君日記』 卷 6, 1年 4月 10日 辛酉條 “胡人之向化者, 自海西歷畿甸, 兩湖濱海列邑, 無處無之, 而兩湖爲尤多. 以漁爲業, 伐木造船, 日以益滋, 盤據於四道者, 可至二百餘舡, 諳熟海路, 使舡如馬, 實我國之人所不能及也.”

56) 최명지, 「서울·경기·충청·전라도 분청사기 가마의 구조와 특징」, 『한국 가마터 발굴현황 조사 ②』 분청사기 一 上(국립광주박물관, 2020), pp. 303-304. 표 1 참조.

57) 河南省文物考古硏究所, 앞의 책, pp. 149-153.

58) 郭学雷, 「禹州磁州窯類型瓷器」, 『明代磁州窯瓷器』(北京: 文物出版社, 2005), pp. 43-55. 균요지 출토 백지철화자기가 명초 무덤 출토 紀年 瓷器나 명초 경덕진 청화백자와 기형과 문양이 유사한 점을 비교·분석하였다.

59) 薛東星·禚振西, 「陝西銅川陳爐地區瓷窯遺址考古調査的新發現」, 『中國古陶瓷硏究』 第8輯(北京: 紫禁城出版社, 2002), pp. 126-132; 同著, 앞의 책(2007), pp. 14-16; 郭學雷, 「其他窯口, 品種的磁州窯類型瓷器」, 앞의 책, pp. 113-115.

60) 郭學雷, 앞의 책, pp. 17-128. 명대 중국 북방지역에서 운영된 자주요계 백지철화자기의 특징과 확산 양상을 알 수 있다.

Fig. 1.
<삼채자라병>, Sancai turtle-shaped bottle, Liao Dynasty, China, length 25cm, Excavated from Nincheng County of Inner Mongolia, Liaozhongjing Museum (Image from Zhongguo chutu ciqi quanji 4, 2008, pl.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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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분청사기 상감용문 자라병>, Buncheong turtle-shaped bottle with inlaid dragon design, Early 15th century, Joseon Dynasty, Excavated from the Sangpan-ri kiln site in Sangju (Image provided by Sangju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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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백자음각철채연화문편병>, White Porcelain flat bottle with incised decoration of a lotus in underglaze iron, 15th century, Joseon Dynasty, Height 26.2cm, Gyeonggi Museum (Image provided by Gyeonggi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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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황유편병>, Yellow-glazed flat bottle, Liao Dynasty, China, Height 27.3cm, Liaoning Provincial Museum (Image from Zhongguo taoci quanji 9, 2008, pl.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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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분청사기 상감모란당초문 편병>, Buncheong flat bottle inlaid with peony foliage design, 15th century, Joseon Dynasty, Height 29cm, Private collection (Image by Kim Yun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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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흑유척화 화당초문 편병>, Black-glazed flat bottle with sgraffito designs, Western Xia Dynasty, China, Height 30.4cm, Yike zhaomeng kiln of Inner Mongolia, Nezu Museum (Image from Xixia ciqi, 2010, p.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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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갈유 일두삼어문 편병>, Brown-glazed flat bottle with fish design, Ming Dynasty, China, Height 30.5cm, Excavated from Hancheng city Shaanxi Province, Shaanxi History Museum (Image from Zhongguo chutu ciqi quanji 15, 2008, pl.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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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분청사기 상감연화어문 자라병>, Buncheong turtle-shaped bottle with inlaid fish design, Early 15th century, Joseon Dynasty, Length 22cm, 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Image by Kim Yun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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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일두삼어문초벌접시>, Bisque firing dish with inlaid fish design with one head and three bodies, Early 15th century, Joseon Dynasty, Excavated from the Uha-ri kiln site in Sangju (Image provided by Sangju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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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분청사기 박지조화어문 대발편>, Buncheong bowl with incised and sgraffito fish design, 15th century, Joseon Dynasty, Height 12.5 cm, Excavated from the Chunghyo-dong kiln site (Gwangju 4002), Gwangju National Museum (Image by Kim Yun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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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청유 파도어문 대발>, Large bowl with fish and wave design, Western Xia Dynasty, China, Diameter 59cm, Excavated from Western Xia imperial tombs, Xi Xia Museum (Image from Xixia ciqi, 2010, p.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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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중국 북방 자기와 조선 15세기 분청사기 동물 형상 소주자와 연적, Animal motifs in the stoneware of North China and 15th century Buncheong ware of the Joseon Dynasty (Edited by Kim Yun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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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중국 북방 자기와 조선 15세기 분청사기의 물고기와 새 문양, Fish and bird designs in the stoneware of North China and 15th century Buncheong ware of the Joseon Dynasty (Edited by Kim Yun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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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중국 북방 자기와 조선 15세기 분청사기의 魚藻文, Fish and seaweed designs in the stoneware of North China and 15th century Buncheong ware of the Joseon Dynasty (Edited by Kim Yun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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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흑유주자편>, Fragment of a blackglazed teapot, Height 12.4cm, Excavated from the Yongsan-ri kiln site in Gochang County, National Museum of Korea (Jeonju 18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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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은제주자>, Silver teapot, Height of body 10.7cm, Excavated from a Liao Dynasty Fuma tomb in the Songshan District of Inner Mongolia (Image from C, 1997, pl.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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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분청사기인화문 ‘竜介’명매병>, Buncheong maebyeong with stamped decoration and ‘yonggae (竜介)’ inscription, National Museum of Korea (Geonpan 23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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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명초북방자주요계백지철화자기와조선 15세기철화분청사기, Cizhou-type wares with black flower designs on white backgrounds of North China from the early Ming Dynasty and 15th century underglaze iron-brown Buncheong wares from the Joseon Dynasty (Edited by Kim Yunj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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