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1; 2021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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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土居次義, 「狩野山樂の帝鑑圖屛風」, 『佛敎美術』 20(1935), pp. 2-43; 中村溪男, 「狩野派合作の帝鑑圖屛風について」, 『ミュージアム』 79(1957), pp. 23-25.
2) Julia K. Murray, “What is ‘Chinese Narrative Illustration’?,” The Art Bulletin 80, no. 4(1998), pp. 602-615; _____, “From Textbook to Testimonial: The Emperor’s Mirror, An Illustrated Discussion in China and Japan,” Arts Orientalis vol. 31(2001), pp. 36-101; _____, “Didactic Illustrations in Printed Books,” ed. Cynthia Joanne Brokaw & Kai-wing Chow, Printing and Book Culture in Late Imperial China(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pp. 417-450; _____, Mirrorof Morality: Chinese Narrative Illustration and Confucian Ideology(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_____, “Didactic Picturebooks for Late Ming Emperors and Princes,” Cultures, Courtiers, and Competition-The Ming Court(1368~1644)(Harvard University Press, 2008), pp. 231-268; _____, “Narrative and Visual Narrative across Disciplines and Cultures,” Rethinking Visual Narratives from Asia(Hongkong University Press, 2013) pp. 13-26.
3) 刘蔷, 「《帝鉴图说》及其版本丛谈」, 『北方论丛』 No. 5(2000), pp. 124-128; 林麗江, 「晚明規諫版畫 《帝鑑圖說》 之研究」, 『故宮學術季刊』 33(2015), pp. 83-142.
4) 牛建强·汪维真, 「从《帝鉴图说》看16世纪末的中国帝政」, 『史学月刊』(2000), pp. 26-36; 莊慧敏, 「《帝鑑圖說》與 《養正圖解》之研究」(台北市立师范学院 应用语言文学研究所硕士论文, 2004); 陳士誠, 「從《帝鑒圖說》看張居正心目中理想君王的形象, 兼論他的帝師角色」(香港科技大學 哲學科 碩士學位論文, 2008); 王有英, 「从《帝鉴图说》管窥中国古代帝王教育」, 『广西师范大学学报』(2009), pp. 96-99; 颜丙震, 「《帝鉴图说》与清代的幼帝教育」, 『史学月刊』(2011), pp. 132-133.
5) 이성훈, 「숙종대 역사고사도 제작과 〈謝玄破秦百萬兵圖〉의 정치적 성격」, 『美術史學硏究』 262(2009), pp. 33-68; 김영욱, 「歷代 帝王의 故事를 그린 조선후기 왕실 鑑戒畵」, 『美術史學』 28(2014), pp. 219-254.
6) 김두은, 「조선후기 三皇五帝故事圖 병풍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미술사학 석사학위 논문, 2021); 양유경, 「조선시대 聚星圖 연구」(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1).
8) 張居正·呂調陽, 「進圖疏」, 『帝鑑圖說』, “……仍取唐太宗以古爲鑑之意, 僭名帝鑑圖說, 上呈睿覽……今臣等所輯, 則媺惡並陳, 勸懲斯顯…….” 국역은 장거정, 임동석 역, 『제감도설』(고즈윈, 2011), pp. 35-36을 참조했다.
9) 張居正·呂調陽, 「進圖疏」, 『帝鑑圖說』, “……臣等聞商之賢臣伊尹告其君曰, 德惟治, 否惟亂, 與治同道, 岡不興, 與亂同事, 岡不亡...乃屬講官臣馬自强等, 略倣伊尹之言, 考究歷代之事…….” 국역은 위의 책, pp. 33-35를 참조했다.
10) 『明史紀事本末』 卷61, “……一日上御文華殿, 講畢, 覽至漢文帝勞軍細柳事, 居正因言, 皇上當留意武備, 祖宗以武功定天下, 承平日久, 武備日弛, 不可不及早講求也, 上稱善…….”
11) 陸樹聲, 「帝鑑圖說叙」, 『帝鑑圖說』, “……公所進圖說 上嘉納 勅下禮官 宣付史館 公復梓其副 以揚休美…….”; 王希烈, 「帝鑑圖說後序」, 『帝鑑圖說』, “今元輔少師張公 旣輯帝鑑圖說奏御 刻其副以傳…….”
13) 필자의 석사학위논문에서는 1573년에 張居正과 潘允端(1526-1601)이 제작한 판본 2종을 각각 萬曆元年刻本 (A형)과 (B형)으로 칭하였으나, 해외 선행연구와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이 두 판본을 각각 張居正刻本과 潘允端本으로 정정한다.
14) 이 표는 선행연구들을 참조하되, 현존하는 판본들을 중심으로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다. 코노 모토아키(河野元昭)는 일본에 있는 『제감도설』의 명·청대 판본과 판본을 조사하고, 8종 11본으로 분류하여 소개하였다. 河野元昭, 앞의 논문, pp. 142-144; 고바야시 히로미츠(小林宏光)는 모토아키(河野元昭)의 논문을 바탕으로 『제감도설』 판본을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소개한 뒤, 명대 판본만 최소 6종 이상이 출판되었다고 언급하였다. 小林宏光, 「宮楽図屏風にみる帝鑑図説の転成: 近世初頭絵画におけ る明代版画変容の一例」, pp. 11-32; 刘蔷는 명대판본을 4종, 청대 판본을 4종으로 파악하였다. 刘蔷가 언급한 청대 판본 4종 중에는 만주어로 쓰인 順治年間 滿文抄本(북경고궁박물관 소장)과 청말 大臣 옹동화의 주가 달린 翁同和(1830~1904)批注本도 포함되어 있다. 刘蔷, 앞의 논문, pp. 124-128; 莊慧敏는 刘蔷가 언급한 판본에 명대 판본 2종, 청대판본 1종을 추가하고 일부 판본을 제외하여, 총 8종의 판본을 소개하였다. 莊慧敏, 앞의 논문, pp. 46-56; 陳理慧는 각종 판화집 등에 소개된 『제감도설』의 판본을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陳士誠, 앞의 논문, pp. 177-178; 줄리아 머레이(Julia K. Murray)는 2001년 논문에서 명대판본 4종과 청대판본 4종을 소개한 뒤, 2005년도에 이를 정리하여 명대판본 5종, 청대판본 1종에 대해 발표하였다. Julia K. Murray, “From Textbook to Testimonial: The Emperor’s Mirror, An Illustrated Discussion in China and Japan,” pp. 36-101과 “Didactic Illustrations in Printed Books,” pp. 417-450.
15) 純忠堂刻本(B형)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舊원문검색서비스(https://kyu.snu.ac.kr/)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16) 명말 만력연간에는 安徽省의 新安을 근거지로 하는 黃氏 일족들이 각공으로 활동하면서 소위 徽派가 형성되었다. 新安상인들이 중국 전역을 무대로 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둠에 따라 휘파판화를 제작하는 각공들은 신안뿐만 아니라 금릉, 건안, 양주 등지에서 판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小林宏光, 「明清人物版画の特質と発展状況:万暦期徽派版画、 陳洪綬から任熊まで」, pp. 41-42.
17) 『閨範圖說』은 만력18년(1590)에 呂坤(1536~1618)이 『烈女傳』 중에서 117명을 선별하여 편찬한 책이다. 太監陳矩가 이 책을 보고 만력제에게 진상하였고, 만력제가 이 책을 皇貴妃 鄭氏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황귀비 정씨가 이 책에 서문을 덧붙여 다시 출판하였다. 박동인, 「呂坤의 修養論」, 『人文硏究』 53(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7), p. 417, 주 1; 『규범도설』 三一三半葉 판화 좌측 상단에는 “黃師敎”라는 각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황씨 각공이 판각한 것을 알 수 있다.
18) 이 작품의 소장 사항은 國立故宮博物院 善本古籍資料庫 故殿 002222-002223이며, 원문 이미지는 『皇城聚珍—清代殿本圖書特展』(國立故宮博物院, 2007) DVD에 수록되어 있다.
19) 趙憲, 「朝天日記」, 『重峯先生文集』卷11 1574年 9月 14日條, “十四日乙酉. 晴而風. 留于永平城南朱大寶家. 始見帝鑑圖. 張閣老居正呂閣老調陽之所撰也. 許海嶽國曾送于李季眞而進上云……以此而刊頒于東國則甚善云. 余勤退而買之.” 이 때 조선에 유입된 판본은 장거정각본과 호현각본 2종으로 보인다.; 『제감도설』의 조선 전래 경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영욱, 앞의 논문, p. 225 참조.
21)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67, 「入燕記下」, 正祖 2年(1778) 5月 19日條, “十九日戊寅. 夜雷雨. 留館. 燕市書肆. 自古而稱. 政欲繙閱. 於是余與在先及乾粮官. 往琉璃廠. 只抄我國之稀有及絶無者. 今盡錄之……太岳集……帝鑑圖說…….”
22) 『承政院日記』 英祖 22年(1746) 12月 13日條, “(承旨·儒臣·司書韓光肇同爲入侍時, 右承旨宋翼輔, 校理尹鳳五, 修撰李彝章, 司書韓光肇, 假注書李萬育, 記事官安致宅·尹東星入侍.) 諸臣進伏訖……鳳五曰……又曰, 玉堂果有帝範矣. 上曰, 太宗所作耶? 後日召對, 持入, 可也. 帝鑑圖說, 亦始自何代, 而終於何代耶? 鳳五曰, 自唐堯至皇朝, 而監戒自桀·紂始矣. 此冊子置諸大內, 時時省覽, 以備破寂之資, 似宜矣. 上曰, 予之衰耗, 非但政令而已, 雖在看書時亦然. 向者手不釋卷, 而今則月異而歲不同, 日異而時不同, 以一年之內言之, 漸覺其衰老矣. 自省編是予所述, 而記有處僅十之一, 時或有不似予所自作者…….”
23) 『承政院日記』 英祖 22年(1746) 12月 13日條, “承旨·儒臣·司書韓光肇同爲入侍時, 右承旨宋翼輔, 校理尹鳳五, 修撰李彝章, 司書韓光肇, 假注書李萬育, 記事官安致宅·尹東星入侍. 諸臣進伏訖……鳳五曰……又曰, 玉堂果有帝範矣. 上曰, 太宗所作耶? 後日召對, 持入, 可也. 帝鑑圖說, 亦始自何代, 而終於何代耶? 鳳五曰, 自唐堯至皇朝, 而監戒自桀·紂始矣. 此冊子置諸大內, 時時省覽, 以備破寂之資, 似宜矣. 上曰, 予之衰耗, 非但政令而已, 雖在看書時亦然. 向者手不釋卷, 而今則月異而歲不同, 日異而時不同, 以一年之內言之, 漸覺其衰老矣. 自省編是予所述, 而記有處僅十之一, 時或有不似予所自作者…….”
24) 이정민, 「英祖 御製書의 편찬과 의의」, 『한국사론』 51(2005), pp. 364-365과 p. 388의 <부표 1> 참조; 이근호, 「영조대 중반 御製訓書의 간행 양상과 의의」, 『장서각』 26(2011), p. 72-74와 p. 96-97의 <부표> 참조.
26) 『承政院日記』英祖 22年(1746) 12月 24日條, “……明履曰, 頃者夜對, 以古鏡重磨方進講, 而字字句句, 講討奧義, 臣不勝欽仰矣. 上曰, 帝鑑亦欲於靜夜講論矣. 明履曰, 非特此也, 雖於經書之中, 拈出一書, 周覽於燕閒之暇, 而召見玉堂之時, 亦以此進講宜矣…….”
29) 이태진, 「奎章閣 中國本 圖書와 集玉齋圖書」, 『민족문화논총』 16(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 pp. 169-188; 황정연, 「고종연간(1863-1907) 궁중 서화수장의 전개와 변모양상」, 『미술사학연구』 259(한국미술사학회, 2008), pp. 79-16.
30) 1800년대 후반 상해에 있는 서점에서 판매하는 서책과 서화첩의 내역 및 가격을 왕실에서 기록한 『上海書莊圖各種書籍圖帖目錄』의 목록과 『집경당포쇄서목』 「書畵部」의 목록이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목록에 기재된 상당수의 작품을 왕실에서 구입하여 실제로 국내로 들여왔다는 점이 확인된 바 있다. 황정연, 앞의 논문, p. 100.
31) 한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일본 판본 2건에는 모두 “朝鮮總督府圖書之印”이 찍혀있고, 각각 “昭和13.6.25.”과 “昭和19.5.5.”이라는 입고일자가 적혀있다. 따라서 1709년 일본 판본은 1938년 6월 25일에, 1858년 일본 판본은 1944년 5월 5일에 각각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입고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입고 시기가 두 판본의 국내 유입시기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들이 일본에서 제작되었고 총독부도서관에 수장되어 있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 판본들은 일제강점기에 국내에 유입된 후 총독부도서관에 소장되었다가 광복 이후 현 소장처인 국립중앙도서관에 남아있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33) 김두은, 앞의 논문, pp. 14-18, pp. 42-43, pp. 46, p. 61 주163, p. 68; 한편, 이재호는 <명현제왕사적도>와 <고석성왕치정도>를 『제감도설』에 수록된 <해망시인>이나 <몽재량필> 삽화와 비교할 때, 서사 표현방식에 큰 차이가 있으며, 이 두 작품은 조선의 도화서 화원들이 감계적 고사인물화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보았다. 『조선시대 고사인물화 3』(국립중앙박물관, 2017), p. 244.
35) 『군왕좌우명』의 소장사항은 경기도박물관-2898이다.『도해역대군감』의 소장사항은 장서각 K2-5196 이며, 장서각 홈페이지(http://jsg.aks.ac.kr/)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도해역대군감』 중 일부 그림은 박정혜· 윤진영·황정연·강민기, 『왕과 국가의 회화』(돌베개, 2012), p. 123의 도 121, 도 121-1에 실려 있다.
37) 旋風葉은 반씩 접은 낱장들을 풀로 연결해서 펼쳤을 때 두 면씩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김경미·박윤희, 「조선왕실의 장황」, 『꾸밈과 갖춤의 예술, 장황』(국립고궁박물관, 2008), p. 154.
38) 이 표는 선행연구들을 참조하되, 현존하는 판본들을 중심으로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에서 제작된 판본들을 ‘판본’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본고에서는 다른 나라 판본들과 구분하기 위해 ‘日本 版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제감도설』 일본 판본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河野元昭, 「探幽と名古屋城寬永度造營御殿 中」, 『美術史論叢』 4(1988), pp. 142-144; 刘蔷, 앞의 논문, pp. 127-128; 특히 히데요리본에 관한 연구는 이가라시 킨자부로우(五十嵐金三郞)의 연구를 주목할만 한데, 킨자부로우는 일본에 남아있는 히데요리본의 活字를 조사하여 有跋本과 無跋本, 異植活字本으로 그 계통을 정리하였다. 킨자부로우의 연구를 통해 有跋本이 無跋本에 선행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無跋本 중에서도 일부 판본은 異植字版을 활용한 異植活字本으로 조사되었다. 여기서 異植字版이란 原版을 해체하고, 이전에 사용되었던 활자와 후대에 새로 제작한 활자를 합쳐서 後代에 再出版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해서 찍어낸 판본을 異植活字本이라고 한다. 五十嵐金三郞, 「 『帝鑑図説』異植字版小考」, 『參考書誌硏究』 32(1986), pp. 1-35.
39) 仲田勝之助, 『繪本の硏究』(美術出版社, 1950), p. 20; 森上修, 「〈館蔵資料紹介〉秀頼版 「帝鑑図説」(慶長11年刊古活字本6冊)」, 『香散見草: 近畿大学中央図書館報』 1(1985), p. 4; 小林宏光, 앞의 논문, p. 21; Karen M. Gerhart, “Tokugawa Authority and Chinese Exemplars: The Teikan Zusetsu Murals of Nagoya Castle,” Monumenta Nipponica vol. 52, no. 1(1997), p. 4; 伊豆田幸司, 「<本館所蔵貴重書紹介>秀頼版 「帝鑑図説」 慶長11(1606)年」, 『香散見草: 中央図書館報』 32(2004), pp. 18-19; 히데요리본과 조선 관련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지영, 앞의 논문, pp. 87-90 참조.
41) 『제감도설』 일본 판본들의 제작 방식 변천은 에도시대 정치, 사회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즉, 일본에서는 16세기 말 조선과 포르투갈 등을 통해 활자인쇄술이 유입되어 활자 인쇄가 이루어지다가, 간에이 연간(寬永年間, 1624~1644)을 기점으로 출판계의 주요 방식이 활자 인쇄에서 목판 인쇄로 회귀하게 되었다. 한편, 에도시대 초기에는 五山을 비롯한 사찰 주도로 서적 출판이 이루어졌으나, 막부 주도 하에 유교 관련 서적 출판이 적극 시행 및 장려됨에 따라 1650년대 이후에는 사찰 주도의 서적 출판이 급감하게 되었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무사와 죠닌에 의한 상공업 발달과 서민문화 부흥에 힘입어 서적도매업이 전국적인 규모로 커지게 되었다. David Chibbett, The historyof Japanese printing and book illustration (Tokyo: Kodansha International; New York: Distributed by Harper & Row Publishers, 1977), p. 79.
42) 1858년 일본 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https://www.nl.go.kr/)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43) 1880년 신보관에서 발행한 『제감도설』 서문에는 점석재 주인이 일본에서 구입한 판본을 사진으로 찍어 축소하여 판본을 제작했다고 기록하였다. 1858년 판본의 삽도와 구도, 산수, 인물 표현 등에서 신보관 발행본과 차이점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1880년 일본판본을 저본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汪業熉, 「石印帝鑑圖說序」, 『帝鑑圖說』, “帝鑑圖說一書 爲前明張江陵相國所輯 取古帝王可以爲法者 凡八十一圖 可以爲戒者 凡三十六圖……惟原本板已 漫漶 且卷帙甚巨 不便巾笥 今點石齋主人 購自東瀛 用照相灋縮印 其說則延請各人 以各體書法繕寫 每卷各有目錄可以一覽瞭然 洵爲藝林典貴之品 古今得失旣足以資考鏡 而披圖覽說 於書畵之法 亦有所悟當不僅稱以三節已也…….”
44) 大倉集古館 소장 <宮樂圖>에는 궁정 생활의 화려한 면모가 그려져 있는데, 고바야시 히로미츠(小林宏光)는 화면 구도와 인물, 건물 등을 분석하여 이 작품의 모티프가 『제감도설』 「광우복철」편 중에서 <寵信伶人>와 <列肆後宮>의 판화에서 왔음을 밝혀냈다. 또한 <궁락도>에서 본래의 감계적 의도가 소멸된 것은 『제감도설』이 모모야마 시대 풍속화에 흡수된 사례로 보았다. 小林宏光, 「宮楽図屏風にみる帝鑑図説の転成: 近世初頭絵画における明代版画変容の一例」, pp. 21-27; 한편 사사키 코우조우(佐々木剛三)는 중국 판화인 『제감도설』 이 일본에서 帝鑑圖로 회화화 된 것에 대해 중국의 선진 문화와 문물을 일본에서 수용한 예로 보았다. 佐々木剛三, 앞의 논문, pp. 4-6.
45) 나고야성은 도쿠가와 막부의 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1623~1651)가 축조하였고, 카노탄유(狩野探幽, 1602~1674)가 성 내부의 혼마루텐 죠라쿠텐(名古屋城 丸御殿 上洛殿)에 그림을 그렸다. 게하르트(Karen M. Gerhart)는 나고야성에 그려진 제감도들의 주제가 모두 「성철방규」편에 속한 漢代 고사이고, 이들이 개방적 공간인 후스마에 그려졌다는 점에서 선전(propaganda)을 목적으로 고사를 선별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17세기 무사들 중에서 『제감도설』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소양을 갖춘 무사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므로 특정 구절만 무사 엘리트들에게 유행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나고야 성에 그려진 제감도는 쇼군과 그 주변 인물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엘리티즘(elitism)의 시각적 상징이 고안된 것으로 해석했다. Karen M. Gerhart, 앞의 논문, pp. 29-31.
46) 김승일은 조선의 성리학이 일본 유학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상하 간의 신분질서를 명백히 하고 주종 간의 의리를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을 도쿠가와 막부가 신속하게 수용함으로써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일본 역사에서 가장 안정되고 오래 집권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나아가 조선의 성리학이 자본주의적 윤리정신의 확립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다른 동아시아지역의 국가들보다 빨리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승일, 「도쿠가와(德川) 막부시기, 일본의 조선성리학 수용과 그 의의에 대한 일 시각」, 『사학연구』(한국사학회, 2010), pp. 645-646 주 4, p. 660, p. 664.
49) 채색본인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의 소장사항은 IFN-10520492, 10520483이며, 프랑스국립도서관 웹사이트(https://www.bnf.fr/fr)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동판본인 『중국 황제들의 기념비적인 사실들』의 고찰을 위해 본고에서 사용한 판본은 Faits Mémorables Des Empereurs de La Chine, Tirés Des Annales Chinoises...- Primary Source Edition (Nabu Press, 2014)이다.
51) Julia K. Murray, “Narrative and Visual Narrative across Disciplines and Cultures,” p. 20; 서문(AVERTISSEMENT)에 적힌 원문은 다음과 같다. “Ce Recüeil a été préfenté à l’Empereur Regnant.”
52) Palola Dematte, “A Confucian Education for Europeans,” The Art Bulletin 98, no. 1(2016), pp. 46-47.
55) 시누아즈리(Chinoiseries)는 중국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시누아(chinois)’와 연속 혹은 유행을 의미하는 ‘세리(series)’의 합성어로, 18세기 프랑스 회화 및 장식 예술에서 나타난 중국풍의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시누아즈리 양식은 루이 14세 통치 시기 프랑스 미술에 처음 등장했으며 18세기 중엽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확산하였다. 중국풍 미술이 프랑스 사회에서 유행하였던 주요한 배경으로는 동인도 회사를 통한 중국 유물의 유입,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내온 자료들과 이를 기반으로 출간된 중국 관련 서적 등을 들 수 있다. 신상철, 「18세기 예수회 선교사를 통한 중국과 프랑스 간의 미술교류 역사: 프랑스 시누아즈리 미술의 지적 기반과 보베 공장의 ‘중국 연작’」, 『미술사학』 32(2016), pp. 263-265 및 271-276.
56) 17세기 중반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유일한 정보원이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내 가톨릭 개종자를 늘리기 위한 선교전략으로서 유가와 기독교의 가르침이 유사하며, 조상숭배나 국가제례 같은 유가의례는 종교성을 띠지 않는다는 견해를 견지했다. 그에 따라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에서 자료를 가공해 본국에 전달했고, 중국에 대한 선별적인 정보와 이미지를 통해 프랑스 지식인들과 대중들은 중국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특히 유가의 철학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18세기 전반 볼테르나 라이프니츠 같은 중국 애호적 계몽주의자들은 절대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유럽의 철학과 제도를 부정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가를 활용했으며, 공자를 ‘계몽주의의 후견 성인’으로 숭상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논의하였다. 박상현, 「계몽주의와 ‘중국 논쟁’」, 『사회와 역사』 113(2017), pp. 399-499 및 406-409.
57) 헬만의 번각본 서문에는 이 책이 재질과 가격별로 다르게 판매되고 있다는 광고가 실려 있다. 가장 비싼 판본은 네덜란드 산 종이로 만든 것으로 수채 판화를 추가하였으며, 대형 종이에 제작한 또 다른 판본은 16장의 ‘중국 전투(Batailles de la Chine)’ 삽화와 함께 판매하기도 했다. Julia K. Murray, “Narrative and Visual Narrative across Disciplines and Cultures,” p. 22.
58) 중국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미오로부터 『제감도설』의 채색본을 건네받았던 베르탱은 당시 프랑스의 내무 부장관이자 전직 재무부장관으로,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시아 무역을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입수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해 방대한 중국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베르탱은 유교 사상을 이용해 프랑스 왕정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에 따라 중국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프랑스 내 유통시키는 일을 후원하였다. 베르탱은 헬만에게 자신의 컬렉션을 보여주고 그 출판물들의 이미지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헬만은 1780년 베르탱이 은퇴한 이후에도 베르탱의 컬렉션을 계속해서 출판하였으나, 그 목적은 베르탱의 개혁사상에서 벗어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헬만이 『제감도설』을 통해 프랑스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했다고 주장한 근거로는 상나라 주왕이 달기에게 빠져 정치를 그르쳤다는 고사에 관한 <妲己害政>의 삽도에서 유럽식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된 달기를 마리 앙투아네트로 치환하여 볼 수 있는 것과 이 책의 서문에서 헬만이 루이 16세의 남동생의 부인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동서인 마리 조세핀(1753~1810)에게 헌정한다고 적은 점 등을 들 수 있다. 드마테는 헬만의 번각본이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은밀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앙시앙 레짐을 전파했다고 보았다. Palola Dematte, 앞의 논문, pp. 43-46, pp. 58-59.
60) Leah Price, “Vies privées et scandaleuses: Marie-Antoinette and the Public Interest,” The Eighteenth Century: Theory and Interpretation, Vol. 33(1992), p. 177.
Fig. 9 and 12. <夜分講經> 부분, 『君王左右銘』,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Gunwang jwaumyeong (The King's Motto), album leaf, ink and color on paper, Gyeonggi Province Museum; photo by author
Fig. 10 and 13. <夜分講經> 부분, 『帝鑑圖說』 張居正刻本,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Zang Juzheng edition, 1573, microfilm from National Palace Museum, Taiwan; photo by author
Fig. 11 and 14. <夜分講經> 부분, 『帝鑑圖說』 純忠堂刻本(B형),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Kyujanggak web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