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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1; 2021 > Article
『帝鑑圖說』 판본과 각국 수용 양상의 비교 연구

Abstract

『帝鑑圖說』은 명말 내각대학사였던 장거정(1525~1582)이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만력제(1572~1620 재위)의 교육을 위해 편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역대 제왕들의 선행과 악행에 관한 고사 117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고사마다 그림과 글이 실려 있다. 『제감도설』은 1572년 만력제에게 진상된 직후부터 19세기 말까지 궁궐 안팎에서 수차례에 걸쳐 판각되었고, 이웃나라인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예수회 선교사 등을 통해 프랑스에까지 전해졌다. 『제감도설』의 원본 화첩은 전해지지 않지만 동아시아에는 12종 이상의 판본이 남아있으며, 프랑스에는 동판으로 제작된 번각본이 있다. 특히 그림 부분을 직접 그리고 채색한 화첩으로는 중국과 프랑스에 각 1점이 있으며, 국내에는 경기도박물관 소장 <君王左右銘>과 장서각 소장 <圖解歷代君鑑>이 남아있다.
중국에서는 명조뿐만 아니라 청조에서도 『제감도설』을 황태자의 교육을 위해 사용하였고, 명·청대 상업 출판 시장의 부흥에 힘입어 중국 각지에서 8종 이상의 판본이 제작되었다. 조선에서는 『제감도설』을 제왕학 서적의 하나로 인식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한 반면, 일본에서는 에도막부의 쇼군들이 이 책에 수록된 삽도를 이용하여 자신을 이상적인 통치자로 선전하거나, 이국취미의 연장으로 중국 궁정풍속화로 그리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8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유행했던 시누아즈리와 계몽주의자들의 유가사상에 대한 관심 등을 배경으로 번각본이 제작되었다. 프랑스혁명 직전에 제작된 이 번각본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판 여론뿐만 아니라 차기 왕위계승권자였던 프로방스 백작과 그의 아내 마리 조세핀으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기 위한 제작자의 의도 등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제감도설』은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각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수용되었다. 한편, 『제감도설』은 각국의 위정자들에게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제감도설』이 중국 황제의 교육을 위해 제작된 책이라는 사실이 조선 왕실과 에도 막부, 프랑스 왕실 등 각국의 지도층과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유인과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감도설』과 같이 당시 지식과 정보, 문화의 총체였던 圖書가 유통되는 양상에 대한 연구는 각국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미술사적 맥락의 차이를 고찰하는 작업이자 동시에 각국이 공유했던 특징들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Dijian tushuo (帝鑑圖說; The Emperor's Mirror, Illustrated and Discussed) is a book compiled by Zhang Juzheng (張居正, 1525-1582), a great scholar during the late period of the Ming Dynasty of China. The book was made for the education of Wanli Emperor (萬歷帝, r.1572-1620), who rose to the throne at an early age. It contains 117 stories about the virtuous and evil deeds of previous emperors, complete with illustrations and relevant articles. After its presentation to the emperor in 1572, several editions of the book were produced by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and copies were distributed to neighboring countries like Korea and Japan and even to France via Jesuit missionaries. There are copies of more than twelve extant woodblock-printed and lithographic editions in East Asia, as well as copies reprinted with copper plates in France. Also, copies of the book with color illustrations remain in China and France. In Korea, colored illustrations of Dijian tushuo are kept under different titles such as Gunwang jwaumyeong (君王左右銘; The King's Motto) and Dohae yeokdae gungam (圖解歷代君鑑; The Mirror of Rulers throughout the Ages, An Illustrated Explanation) at the Gyeonggi Provincial Museum and the Jangseogak, the archive of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respectively.
In China, Dijian tushuo formed part of the education of the crown princes during the Ming and Qing Dynasties. More than eight different editions were made by the flourishing commercial publication industry during the two dynasties. In Joseon royal court, the book was recognized as one of the didactic books for the discipline of kingship. As for Japan, the shoguns of the Edo Bakufu used the book to advertise themselves as ideal rulers or to make Chinese royal palace genre paintings as an exotic hobby. Isidore Stanislas Henri Helman (1743~1809), a French engraver, made reprinted copies of the book amid Chinoiseries popularized in eighteenth-century France. The French edition reflects not only the public criticism of King Louis XVI and Marie Antoinette but also Helman’s implicit intention to receive financial support from Marie Louise Josephin de Savoie and the Count of Provence (later Louis XVIII), first in line to the throne at the time.
Dijian tushuo was adopted in various countries in East Asia and Europe between the end of the sixteenth century and the early twentieth century, although the way it was used differed from country to country depending on their respective political, social, and cultural situations. However, all these countries had one thing in common- they had future rulers read the book. Perhaps, the fact that it was written for the education of the crown princes of China served as the stimulus for leaders and intellectuals alike. Studies on the ways in which books like Dijian tushuo were distributed as an aggregation of knowledge, information, and culture are thought to be significant and useful in identifying certain characteristics shared by diverse countries and in shedding light on differences in their political and social backgrounds and their art history.

Ⅰ. 머리말

『帝鑑圖說』은 명말 내각대학사였던 張居正(1525~1582)이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萬歷帝(1572~1620 재위)의 교육을 위해 편찬한 책이다. 이 책에는 역대 제왕들의 善行과 惡行에 관한 고사 117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고사마다 그림과 글이 실려 있다. 『제감도설』은 1572년 만력제에게 진상된 직후부터 19세기 말까지 궁궐 안팎에서 수차례에 걸쳐 판각되었고, 이웃나라인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예수회 선교사 등을 통해 프랑스에까지 전해졌다. 『제감도설』의 원본 화첩은 전해지지 않으나 동아시아에는 12종 이상의 판본이 남아있으며, 프랑스에는 동판으로 제작된 번각본이 있다. 특히 그림 부분을 직접 그리고 채색한 화첩으로는 중국과 프랑스에 각 1점이 있으며, 국내에는 경기도박물관 소장 『君王左右銘』과 장서각 소장 『圖解歷代君鑑』이 남아있다.
『제감도설』에 대한 연구는 회화사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던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에서의 연구는 주로 『제감도설』의 삽화가 帝鑑圖로 구현되는 사례와 배경을 살펴보는데 집중되었다.1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구미와 중국 학계에서도 『제감도설』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초기에는 일본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중일 교류사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었으나, 2000년대 이후에는 줄리아 머레이(Julia K. Murray)를 필두로하여 고사도 및 감계화의 측면에서 『제감도설』을 고찰하는 연구들이 이어졌다.2 중국 학계에서도 『제감도설』의 명·청대 판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3 이 책을 명말 정치 상황이나 제왕학의 측면에서 조망하는 연구도 있었다.4 최근 국내에서도 『제감도설』을 조선왕실의 고사도나 감계화의 측면에서 고찰하거나,5 조선시대 회화 제작에 『제감도설』을 활용한 사례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어,6 『제감도설』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이 논문에서는 『제감도설』이 중국에서 편찬된 이후 한국과 일본, 프랑스에 전래 및 수용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간의 연구가 주로 중국과 일본의 회화사적 맥락에서 『제감도설』의 성격과 의미를 부여하거나, 조선 후기 감계화나 고사도의 제작과 『제감도설』 간 영향관계 등을 고찰했다면, 이 논문에서는 여러 나라에 흩어져있는 『제감도설』 판본과 채색본들을 한 자리에서 비교, 분석함으로써, 각국이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에 따라 이 책을 각기 다르게 활용하는 모습과 그 배경을 확인하는 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Ⅱ. 『제감도설』 의 편찬과 명·청대 판본의 특징

『제감도설』은 10살의 나이에 황제가 된 만력제를 위해 당시 내각대학사였던 장거정과 예부상서 呂調陽(1516~1580) 등이 주도하여 편찬한 책이다. 장거정은 어린 황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翰林院 관리들을 조직하여 『四書直解』, 『通鑑直解』, 『詩經直解』, 『謨訓類編』 등 여러 종류의 교재를 편찬하였다.7 그중 하나였던 『제감도설』은 1572년 만력제가 즉위한 직후에 진상되었다. 『제감도설』을 진상하면서 장거정이 작성한 「進圖疏」에 따르면, ‘제감도설’이라는 이름은 唐 太宗(626~649 재위)이 “옛 일로써 거울을 삼는다”라고 한데서 가지고 온 것이며, 제왕들의 선행과 악행을 구분한 것은 선은 권하고 악은 징계하기 위한 것이다.8 또한 장거정은 중국에서 가장 훌륭했던 재상 중 하나로 꼽히는 商나라 伊尹이 임금 太甲을 훈도한 것처럼 그 역시 『제감도설』을 통해 만력제를 聖君의 길로 이끌고자 하며, 이것이 이 책을 편찬한 의도라고 밝혔다.9
판본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제감도설』은 대체로 序, 「聖哲芳規」, 「狂愚覆轍」, 後序 등으로 구성된다. 본문에 해당하는 「성철방규」편에는 堯부터 宋대까지 제왕들에게서 본받을 만한 81가지 고사가, 「광우복철」편에는 夏부터 宋대까지 제왕들에게서 경계해야 하는 36가지 고사가 수록되어 있다. 각 고사는 그림과 글이 한 쌍을 이루고 있어 『제감도설』에는 총 117개의 그림과 글이 시대 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림이 먼저 나오고 글이 뒤따라오는 형식이며, 그림의 우측 상단에 각 고사의 핵심 내용을 축약하여 4자 제목으로 적어놓았다. 그림의 경우, 책의 내용을 도해한 여타의 삽도와 마찬가지로 『제감도설』에서도 건물이나 산수의 표현에 있어서 동일한 구도나 묘사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등장인물도 대부분 유사한 얼굴과 자세, 복식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삽도의 주목적이 감상이라기보다 고사의 내용 이해에 도움을 주는 데 있고, 20cm 내외의 작은 화면 속에 117개에 달하는 고사 속 다양한 인물들을 각기 다르게 묘사하기가 쉽지 않았기 0 보인다. 고사의 내용 중에서 중심이 되는 한 장면만 도해하는 일원적 구성방식을 주로 사용하고, 황제를 비롯해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그림 속에 적어놓은 점 등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말 『제감도설』은 만력제의 진강교재로 사용되었고, 장거정은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을 보면서 만력제에게 정치적 간언을 하기도 했다.10 또한 장거정은 『제감도설』을 만력제에게 진상한 직후 이를 판각하여 조정 대신들에게 배포하였다.11 이후 『제감도설』은 명에 이어 청 황실에서도 황태자의 교육용 교재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12 궁궐 안팎에서 8종 이상의 판본이 제작되었다(Table 1). 이 판본들은 정부에서 판각을 주도한 官刻本, 개인이 제작한 私刻本, 사찰에서 제작된 寺刹本, 상업적인 목적으로 출판된 坊刻本 등 제작 주체와 목적이 다르고 북경, 남경, 휘주, 상해 등 출판 지역도 다양하여, 각 판본에 수록된 판화에는 각기 다른 양식적 특징이 나타난다. 그중 주목할 만한 판본은 명 황실에서 판각을 주도한 張居正刻本과 명대 유명상업 출판지 중 한 곳이었던 徽州에서 제작된 金濂刻本이다.13 장거정각본은 『제감도설』의원본 화첩을 진상한 이듬해인 1573년에 장거정이 판각하여 대신들에게 배포한 것으로, 명황실의 司禮監에서 제작한 經廠本이다(Fig. 1). 이후 雲南省의 지방 관리였던 곽정오가 판각을 주도한 郭庭梧刻本이나 장거정의 후손이 그의 고향인 湖北省 江陵에서 출판한 純忠堂刻本은 장거정각본의 구성이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15
반면, 1606년 휘주에서 제작된 김렴각본은 장거정각본과 다른 새로운 구도뿐만 아니라 세밀하고 유려한 판각이 돋보이는데, 이는 만력연간 安徽省의 新安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했던 黃氏 刻工들에 의한 소위 徽派版畵의 특징이다(Fig. 2).16 무대 장치와 같은 배경을 설정하는 것이나 산수가 비중 있고 정밀하게 묘사되는 점, 인물의 표현에 있어서 작은 얼굴에 몸통과 팔다리를 길고 가늘게 묘사하는 점 등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閨範圖說』 三一三半葉과 같은 徽派版畵에서 자주 발견된다(Fig. 3).17
한편, 장거정이 제작했던 『제감도설』의 원본 화첩은 전해지지 않으나, 청대 황실에서 제작한 채색화첩이 대만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8 『寫繪本帝鑑圖說』은 청대 황실화가였던 沈振麟(?~?)이 그림을 그리고, 청말 고위 관리이자 금석학자였던 潘祖蔭(1830~1890)이 본문을 썼다(Fig. 4).
총 2책으로, 두 책은 모두 세로와 가로가 54cm인 정사각형 모양이며 표지와 내지에 사용된 비단의 종류와 색상, 장황 등에서도 동일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발문은 따로 없고 1책과 2책의 서두에 각각 ‘萬世玉衡’, ‘唘沃嘉謨’가 적혀있는데, 이는 명, 청대 판본들에서 각 책별로 부제를 붙이지 않고 선행고사와 악행고사를 각각 ‘성철방규’, ‘광우복철’으로 구분한 것과 차이가 있다. 1책에 26개, 2책에 30개 등 총 56개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고사들은 「성철방규」편에서 1~56번째까지 수록된 고사들이며 대부분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나머지 고사들을 수록한 책이 더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청대 황실에서 제작된 작품에 걸맞게 본문은 正書로 적고, 그림은 공필로 그린 뒤 黃, 靑, 赤, 綠色 등을 사용하여 정성스럽게 채색하였다. 원본 판화를 비교적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으나, <夢賫良弼>이나 <召試縣令>과 같은 일부 고사에서는 구도나 시점을 달리하거나 주요 장면을 선별 및 강조하였다(Figs. 5, 6).

Ⅲ. 조선시대 『제감도설』의 전래와 현전본

『제감도설』은 중국에서 편찬된 직후 명나라에 다녀왔던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전래되었고, 1573년 선조에게 진상되었다.19 이후 조선에서는 이 책이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되었다. 이는 삼강행실도 원간본에 수록되어 있던 제왕 관련 고사가 이후의 판본에서부터는 생략되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20 중국의 역대 제왕에 관한 고사들이 민간의 교화보다 왕이나 왕세자의 감계나 훈육에 적합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가 1778년 燕京의 琉璃廠을 방문하여 조선에 없는 책과 희귀본을 기록한 목록 중에 『제감도설』이 포함되어 있는데,21 이를 통해 당시 『제감도설』이 민간에는 널리 전파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실에서 『제감도설』에 관심을 보였던 왕으로는 영조를 들 수 있다. 영조대 『제감도설』 관련 기록은 1746년(英祖 22)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다음은 1746년 12월 13일 영조가 歡慶殿에서 대신들과 召對한 기록이다.
……모든 신하가 나아가 엎드리자……[尹鳳五가] 또 말하기를, “玉堂에 과연 『帝範』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太宗이 만든 것인가? 후일 召對할 때 가지고 오면 좋겠다. 《帝鑑圖說》은 어느 시대에서 시작하여 어느 시대에서 끝나는가?”라고 하자, 鳳五가 답하기를, “唐堯부터 皇朝(명나라)까지이며, 監戒는 桀王(夏)과 紂王(商)에서 시작합니다. 이 책자를 大殿 안에 두었다가, 때때로 省覽하여 심심파적의 도구로 갖추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쇠약해진 것은 정치를 할 때뿐만이 아니어서, 비록 책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날에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달마다 다르고 해마다 같지 않으며, 나날이 다르고 때마다 같지 않다. 1년을 보고 말하자면 점차 쇠로해짐을 깨닫게 된다. 『自省編』은 내가 서술한 것인데, 기억하는 곳은 단지 십분의 일이고, 간혹 내가 지은 것과 닮지 않은 곳도 있다”라고 하였다…….22
이처럼 영조는 『제감도설』의 내용에 관심을 보이면서 648년 唐 太宗이 太子를 위해 저술한 『帝範』과 1746년 영조 자신이 사도세자와 정조의 교육을 위해 편찬한 『御製自省編』을 함께 언급하였다.23 제작 목적이나 내용이 상통하는 두 책을 『제감도설』과 함께 언급한 것은 영조가 『제감도설』을 帝王書籍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52년의 재위기간 동안 방대한 저술을 남겼던 영조는 재위 중반기에 해당하는 1744년 이후부터 70여 종에 달하는 御製書들을 집중적으로 간행하였는데, 이 서적들은 後王을 대상으로 한 訓書類 御製에 편중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빈번한 어제훈서의 간행은 새로운 제왕학의 체계를 수립하려던 영조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이다.24 이러한 측면에서 1746년(英祖 22)에 『제감도설』 관련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당시 영조가 세자의 훈육을 위한 御訓書 편찬 과정에서 그 목적과 내용이 유사한 『제감도설』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조가 『제감도설』을 실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하기 어렵다. 다음날인 12월 14일에 영조는 대신들에게 『제감도설』을 가지고 입시하라고 명하였고,25 열흘 뒤인 12월 24일에는 영조가 『제감도설』을 講論하겠다고 언급하였다.26 이틀 뒤인 12월 26일에도 영조는 대신들에게 『제감도설』을 가지고 입시할 것을 명하였으나,27 대신들은 玉堂과 春榜에 모두 책이 없어서 가지고 오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28 이후의 기록들이 확인되지 않아 영조가 실제로 『제감도설』을 보았거나 이 책을 강론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당시 조선왕실에서 영조와 대신들이 모두 『제감도설』의 제작 목적과 내용에 대해서 널리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제감도설』 판본은 4점 정도이다. 청대 판본과 일본 판본이 각 2점이며, 이들은 모두 조선 후기 이후에 전래되었다(Table 2). 국내에 남아있는 청대 판본 2점은 규장각 소장 순충당각본(B형)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신보관발행본이다. 이 두 판본에는 모두 ‘集玉齋’ 장서인이 찍혀있고, 『集玉齋書籍目錄』과 『緝敬堂暴曬書目』에 각각 “帝鑑圖說 六券”과 “帝鑑圖說 四本”이 기록되어 있어, 고종연간 조선왕실에서 이 두 책을 보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집옥재는 고종의 집무실이자 서재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이곳에 소장되어 있던 대부분의 서적들은 고종이 구입한 것이었다.29 또한 『집경당포쇄서목』의 「서화부」 목록에 기재된 상당수의 작품들은 왕실이 직접 구입해 국내로 들여온 책이다.30 따라서 국내에 남아있는 청대 판본 2점은 고종연간 조선왕실에서 구입해 국내로 들여왔을 가능성이 높다.31
조선에서 『제감도설』을 다시 제작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최근 조선 후기 회화와 『제감도설』 간 영향관계에 관한 의미 있는 연구들이 발표되었다. 먼저, 숙종이 제작을 명한 16폭 병풍에는 16개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14개 고사가 『제감도설』에 수록된 고사의 제목과 내용이 일치한다는 점을 근거로 이 병풍과 『제감도설』과의 연관성이 제시되었다.32 또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古昔聖王治政圖>와 <名賢帝王事蹟圖>나,33 17세기에 송시열과 김수증의 주도로 제작된 『취성도첩』 등의 제작에 『제감도설』이 활용되었다는 연구들도 있었다.34 이러한 연구들은 조선 후기 고사도나 감계화 제작에 있어서 조선왕실 및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체들이 『제감도설』을 적극 수용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경기도박물관 소장 『君王左右銘』(Fig. 7)과 장서각 소장 『圖解歷代君鑑』(Fig. 8)은 작품명이 상이하지만 모두 『제감도설』의 고사 일부를 추려서 화첩으로 만든 것이다.35 두 작품은 현재 각기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지만 크기나 재질, 양식 등을 고려했을 때 본래 한 화첩이었을 것이다. 『군왕좌우명』과 『도해역대군감』은 모두 전체 크기가 세로 32.5cm, 가로 35.5cm 내외이고, 광각이 세로 20cm, 가로 28cm 내외로 거의 같다. 두 작품의 표지와 내지 재질은 모두 1mm 내외 두께의 다소 두껍고 딱딱한 종이이다. 표지는 금박이 있는 黃色, 내지는 白色이며, 백색 내지의 4면 테두리에 붉은색 종이띠를 둘렀다. 두 작품 모두 삽도는 채색하고 본문은 목판으로 찍었는데, 19行 19字의 본문 중에서 판심 자리였던 10행에 백지를 덧붙였다. 그림에서 靑, 綠, 黃, 赤 등 진채를 위주로 하고, 금색 안료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면모 등도 유사하다. 특히 『도해역대군감』은 문화재관리국에서 장서각으로 이관된 유물이고 『군왕좌우명』은 구입품이라는 점에서, 두 작품 모두 조선왕실에 수장되어 있다가 어느 시점에 분질되어 현재의 소장처에 분산 소장된 것으로 보인다.36
다만, 『군왕좌우명』은 내지가 낱장으로 떨어져있고, 가운데 접히는 부분의 양 끝에 구멍을 내고 실로 묶어 책으로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반면, 『도해역대군감』의 경우 각 장들을 앞뒤로 붙여 책으로 만들었고, 책등과 각 모서리에 백지를 덧붙였다. 특히 『도해역대군감』에 수록된 고사 중 <遇物敎儲>와 <召試縣令>은 본문이 잘린 채로 뒷면의 다른 고사와 붙어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와 같은 흔적들은 대부분 후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군왕좌우명』의 각 내지 뒷면 양 끝단에만 접착 흔적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원래 장황 형식은 旋風葉의 형태였을 것이다.37
내용 면에서, 『군왕좌우명』에는 夜分講經, 賞强項令, 臨雍拜老, 燭送詞臣, 後苑觀麥, 納諫遣女, 聽諫散鳥의 7개 고사가, 『도해역대군감』에는 兄弟友愛, 主明臣直, 澤及枯骨, 遇物敎儲, 敬賢懷鷂, 召試縣令의 6개 고사가 실려 있다. 이 고사들은 모두 「성철방규」편에 있는 선행고사들이며, 원본의 순서와 다르게 시대가 뒤섞여 수록되어 있다. 『도해역대군감』에 실린 6개 고사가 그림과 글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 것과 달리, 『군왕좌우명』에 수록된 7개 고사 중 3개 고사에만 그림이 남아있어 나머지 4개 고사의 그림들은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 작품의 저본이 되는 판본은 장거정각본과 같은 명대 판본으로 보인다. 『군왕좌우명』이나 『도해역대군감』과 같이 9行 19字의 판식을 갖고 있는 판본은 장거정각본을 비롯한 명대 판본들과 청대 판본인 순충당각본이다. 명대 판본들 중에서 이 두 작품과 양식상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호현각본과 김렴각본을 제외하고, 장거정각본과 곽정오각본 간에 차이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장거정각본과 순충당각본(B형) 정도를 두 작품의 비교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군왕좌우명』과 장거정각본 및 순충당각본(B형)에 수록된 <야분강경>의 세부 이미지를 비교하면, 본문의 “解”자와 같은 서체나 수목이나 건물, 인물의 표현 등에서 장거정각본이 『군왕좌우명』과 가장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Table 3) (Figs. 9-14).
Fig. 9.
<夜分講經> 부분, 『君王左右銘』,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Gunwang jwaumyeong (The King's Motto), album leaf, ink and color on paper, Gyeonggi Province Museum; photo by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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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夜分講經> 부분, 『帝鑑圖說』 張居正刻本,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Zang Juzheng edition, 1573, microfilm from National Palace Museum, Taiwan; photo by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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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夜分講經> 부분, 『帝鑑圖說』 純忠堂刻本(B형),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Kyujanggak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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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夜分講經> 부분, 『君王左右銘』,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Gunwang jwaumyeong (The King's Motto), album leaf, ink and color on paper, Gyeonggi Province Museum; photo by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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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夜分講經> 부분, 『帝鑑圖說』 張居正刻本,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Zang Juzheng edition, 1573, microfilm from National Palace Museum, Taiwan; photo by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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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夜分講經> 부분, 『帝鑑圖說』 純忠堂刻本(B형),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Kyujanggak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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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살펴보면, 앞서 살펴본 대만고궁박물원 소장 채색본이나 후설하게 될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채색본과 비교할 때, 『군왕좌우명』과 『도해역대군감』은 원본 판화의 요소를 가장 많이 반영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대만고궁박물원이나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본에서는 원본 판화와 달리 고사의 제목 주변에 四周를 두르거나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써넣는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으며, 원본 판화의 구도나 배경, 등장인물 등을 변형하기도 하였다. 반면, 『군왕좌우명』과 『도해역대군감』은 원본 판화를 모사하였기 때문에, 등장요소의 수나 형태, 모양 등에 있어서 차이가 거의 없다. 이 두 작품은 지금까지 확인된 『제감도설』 중에서 글씨는 목판으로 찍고, 그림은 모사하여 채색한 유일한 사례로, 조선왕실 수장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향후 紙質, 안료, 장황 등 다각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Ⅳ. 에도시대 『제감도설』의 판본과 제감도 제작

『제감도설』은 일본에도 전해졌으며, 일본에서는 4종 이상의 판본이 제작되었다(Table 4).
일본 판본의 시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 1593~1615)가 1606년에 제작한 이른바 히데요리본(秀賴版)이다(Fig. 15). 히데요리본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중 조선에서 전래된 판본 또는 활자 등을 기초로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39 즉, 히데요리본이 목판본이 아니라 古活字本이라는 점과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부친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점 등을 근거로, 히데요리본이 조선에서 복각한 『제감도설』 판본이나 조선에 있던 명대 판본 또는 조선에서 전래된 고활자 기술 등을 기초로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꾸준히 이어졌다. 이러한 주장들은 구체적인 문헌기록이나 현전본이 확인되지 않아 증빙에 한계가 있다. 다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임진왜란 이전인 1573년부터 『제감도설』 명대 판본이 조선에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 일본이 조선에서 획득한 고활자 기술을 이용해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점은 이미 많은 선행연구를 통해 검증되었다는 점에서,40 히데요리본의 탄생과 조선 간 정황적 개연성을 확인할 수 있다.
히데요리본이 제작된 이후 일본에서는 『제감도설』이 19세기까지 여러 차례 번각되었다. 17세기 초에 일본은 에도 막부(江戶幕府 또는 德川幕府, 1603~1867)가 성리학의 수용을 통해 사회질서의 개편을 꾀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막부의 주도로 조선과 중국에서 들여온 유교 관련 서적이 대량으로 출판되었고, 식자층이 늘어나면서 민간에서도 서적 출판이 늘어나 에도 중기 이후 상업 출판 시장은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정치, 상업적인 배경 속에서 『제감도설』은 官刻本, 坊刻本, 寺刹本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초기에 『제감도설』은 막부와 사찰 중심으로 활자본으로 제작되다가,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목판본으로 만들어졌다. 18세기 이후에는 상업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하였으며, 본문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41 히데요리본에 수록된 삽도는 명대 판본들의 판화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이후에 제작된 일본 판본들 역시 대부분 히데요리본의 삽도를 밑그림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양식적인 면에서 큰 변화가 없다. 다만 1858년에 제작된 일본 판본은 기존 판본들에 비해 유연하고 정교해진 각선이 특징이다.42 이 판본은 1880년에 상해 申報官에서 『제감도설』을 제작할 때 그 저본으로 사용되었다.43신보관은 영국 상인 어니스트 메이저(Ernest Major)가 설립한 회사로, 메이저는 신보관 외에도 點石齋石印書局을 설립하고 『點石齋畵報』를 발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제감도설』은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쇼군들은 어용화사였던 카노파(狩野派) 화가들에게 『제감도설』에 수록된 삽도를 바탕으로 帝鑑圖를 제작하게 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제감도는 20여 점 이상이며, 障屛畵 등 큰 화면에 금채를 활용하여 화려하게 채색한 것이 특징이다. 일본 내에서 제감도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제감도의 밑그림에 대한 문제나 작품에 수록된 고사의 종류와 내용 등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특히, 『제감도설』의 판화가 회화로 제작되는 면모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정도의 회화사적 의의가 부여되었다. 첫째는 중국에서 감계를 목적으로 제작된 『제감도설』이 일본에서 궁정풍속화로 변용되었다는 것이고,44 둘째는 나고야성에 그려진 제감도처럼 『제감도설』에 나타난 성군의 모습을 그림으로 시각화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가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장치로 사용하였다는 점이다(Fig. 16).45
이처럼 일본이 『제감도설』을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유는 성리학의 수용 시점과 관련이 있다. 일찍부터 성리학이 발전했던 중국과 한국에 비해,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하극상이 난무했던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에도막부를 개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603~1616 재위)에게 상하관계의 신분질서를 명확히 규정해주는 성리학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46 도쿠가와 막부가 정치사상으로서 불교 대신 유교를 수용하고 四書五經 등 유교 관련 서적의 출판을 적극 장려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47
여러 유교 서적들 중에서도 『제감도설』은 유독 도쿠가와 막부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이 책에 수록된 故事의 감계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삽화에 묘사된 황제와 궁정의 이미지가 주요한 역할을 했다. 즉, 나고야 성에 그려진 제감도의 예를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제감도설』에 묘사된 聖君의 이미지는 쇼군들이 자신을 이상적인 통치자로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데 적합했을 것이며, 특히 이와 같은 그림들은 글을 잘 알지 못하는 무사계층에게까지 큰 파급력을 미칠 수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모모야마 시대부터 중국, 서양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異國의 풍속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중국의 고사 속 인물들에 대한 그림이 선호되었다. 일본에서 제작된 제감도 중 많은 수가 화려한 연회나 사치를 일삼았던 폭군들에 대한 고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48 이는 삽화 속 호화로운 궁정의 모습이 大畵面의 장병화에 화려하게 그려 넣기에 적합한 제재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Ⅴ. 『제감도설』의 프랑스 전래와 번각본 제작

『제감도설』은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도 전해졌다. 프랑스에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진 작품은 2점으로, 채색본인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Recueil Historique de Principaux Traits de la Vie des Empereurs Chinois)』과 동판본인 『중국 황제들의 기념비적인 사실들, 중국의 역사로부터 나온 것들(Faits Mémorables Des Empereurs de La Chine, Tirés Des Annales Chinoises...,)』이다.49 18세기 예수회 선교사 아미오(Jean Joseph Marie Amiot, 1718~1793)가 루이 15세(1715~1774) 시기에 재무부 장관이었던 베르탱(Henri-Leonard Jean Baptiste Bertin, 1720~1792)에게 『제감도설』 채색본을 보냈는데, 이 채색본이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이고, 이 채색본을 토대로 1788년에 헬만(Isidore Stanislas Henri Helman, 1743~1809)이 제작한 판본이 『중국 황제들의 기념비적인 사실들』이다.50
먼저, 프랑스국립도서관 소장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은 프랑스에 전래된 후 가죽표지 등을 사용해 유럽식으로 장황하였다(Fig. 17). 총 2책이며, 1책의 서두에는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은 재임 중인 황제에게 진상되었다”고 적혀있고, 모든 그림에 황실도서관 장서인이 찍혀있어, 이 책은 루이 16세(1774~1792 재임)에게 진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1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은 프랑스어로 적힌 글이 왼편에, 그림이 오른편에 있어 그림과 글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다. 총 95개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고, 그림의 우측 상단에 改裝한 고사의 순서를 아라비아 숫자로 기입하였다. 각 책에 수록된 고사는 1책에 47개, 2책에 48개로, 두 책의 분량은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1책과 2책에 수록된 악행고사의 개수는 각각 27개와 3개로 현격한 차이가 있다. 또한 2책의 중반 이후부터는 선행고사들이 대부분 원본의 순서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이는 독자들이 먼저 감상하게 되는 1책에 보다 자극적인 소재와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써 프랑스 독자들의 관심을 높이려는 장치로 볼 수 있다. 그림의 경우, 고사의 제목을 별지에 적어 우측 상단에 부착했으며, 청색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비단에 청록 진채 양식으로 그렸으며, 구름을 선묘로 표현하거나 나뭇잎의 윤곽을 먹선으로 그리고 석록으로 채색하는 면모 등에서 궁중채색화 양식이 나타난다.
한편, 1788년 프랑스에서는 『제감도설』의 번각본이 만들어졌다. 이 번각본을 제작한 헬만은 프랑스 조각가 르 바스(Jacques-Philippe Le Bas, 1707~1783)의 제자로, 르 바스는 <중국 황제의 정복(Les conquêtes de l’empereur de la Chine, 원제: 平定准噶尔回部得胜图)> 제작에 참여했던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다.52 <중국 황제의 정복>은 건륭제의 명에 따라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1688~1766) 등이 그림을 그리고, 이 그림을 토대로 프랑스에서 제작된 대형 동판화이다. 헬만은 이 동판화의 축소판을 제작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제감도설』뿐만 아니라 <공자성적도>를 토대로 한 『공자 삶의 주요 특징들에 관한 역사적 요약(Abrégé historique des principaux traités de la vie de Confucius)』 등을 제작해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중국을 소재로 한 판화제작자로 유명해졌다.53
『중국 황제들의 기념비적인 사실들』의 서두에는 헬만이 작성한 서문 2개와 총 24개의 고사에 관한 그림과 글이 실려 있다. 중국이나 일본 판본들이 원본의 형식에 따라 선행고사와 악행고사를 나누어 수록한 것과 달리, 헬만의 번각본은 선행이나 악행을 구분하지 않고 시대 순으로 각 고사들을 배치하였다. 이는 헬만이 참조했던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에서 선행고사와 악행고사가 뒤섞여 배치되어 있는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에서는 각 고사의 제목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과 달리, 헬만의 동판본에서는 각 본문 상단에 ‘판화 1(I. ESTAMPE), 판화 2(Ⅱ. ESTAMPE), 판화 3(Ⅲ. ESTAMPE)…’ 등을 기입하여 각 고사를 구분하였다. 본문은 단순히 불어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주인공 황제들의 몰년을 양력으로 기입하는 등 프랑스 독자들을 위해 각색되었다.54
헬만의 번각본에 수록된 삽도들을 살펴보면, 기존 화면을 재구성하였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면, <捨身佛寺>는 양 무제가 불교에 심취해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삽도의 정면 상단에는 이국적인 모습의 불상 세 구가 놓여있고, 그 앞에 있는 향과 초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좌측에는 무제가 단상 위에 앉아서 설법을 하고 있으며, 단상 아래에서는 서구식 얼굴의 승려들과 남녀무리들이 무제를 올려다보고 있다(Fig. 18). 이는 헬만이 참조했던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이나 청대 판본의 화면구성과 큰 차이가 있다. 프랑스 채색본이나 청대 순충당각본에서는 가로로 길게 놓인 담장을 기준으로 화면이 위, 아래로 분리되어 아래쪽에는 무제를 기다리는 신하들의 모습이, 위쪽에는 승려들과 함께 불교 행사를 거행하는 무제의 모습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Figs. 19, 20). <사신불사>를 비롯한 헬만의 번각본 속 삽도들은 헬만이 중국의 역사나 문화, 건축, 불교 의례 등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헬만이 중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원본 판화를 그대로 복각하지 않고 굳이 새로운 삽화를 고안해 동판본을 제작한 이유는 상업적인 목적이 가장 컸을 것이다. 18세기 프랑스 사회에서는 중국풍 미술을 뜻하는 이른바 ‘시누아즈리(Chinoiseries)’ 양식이 유행했는데, 당시 상류층들 사이에서는 중국 유물에 대한 지식이나 소양보다 막연한 호기심과 소장 욕구가 먼저 형성되어 있었다.55 프랑스 내 중국 문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북경에 파견되었던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관련 자료와 보고서들을 대량으로 본국에 보냈고, 이 서적들은 프랑스에서 번역서 등으로 발간되었다. 그중에서도 유가 사상에 관한 문헌들은 볼테르와 라이프니츠 같은 계몽주의자들에게 애호되었고, 공자나 유교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도 크게 높아졌다.56 헬만은 이러한 중국 미술과 유가 사상에 대한 높은 수요를 상업적 이익으로 실현하기 위해 번각본을 제작했다.57
또한 헬만이 이 동판본을 제작했던 1788년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헬만이 번각본을 제작한 배경에는 상업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판 여론도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58 프랑스 혁명을 전후해 프랑스에서는 국왕과 왕비를 동물, 악마, 괴물 등으로 묘사한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들이 제작되어 대중에게 널리 퍼졌으며, 이러한 이미지들은 왕실의 신성성을 부정하고 혁명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형성하는 데 주된 역할을 했다.59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등장한 시기보다 훨씬 앞선 1774년부터 흡혈귀, 동성애자, 색전증 환자, 영아살해범 등 선정적이고 과격한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이러한 이미지들이 팸플릿 등을 통해 대중에게 배포되면서,60 혁명과 타도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이 책이 프랑스 왕실의 일원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와 동서지간이었던 마리 조세핀(Marie Louise Josephine de Savoie, 1753~1810)에게 헌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61 헬만은 중국 황제들에 관한 이야기에 빗대어 몰락의 문턱에 서 있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동시에 조세핀의 남편이자 차기 왕권을 노리고 있었던 프로방스 백작(Count of Provence, 후에 루이 18세, 재위 1815~1824)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암시함으로써 재정적 후원을 받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62

Ⅵ. 맺음말

명말 황실에서 편찬된 『제감도설』은 조선 왕실과 에도 막부, 프랑스 왕실에까지 전해졌다. 중국에서는 명조뿐만 아니라 청조에서도 『제감도설』을 황태자의 교육을 위해 사용하였고, 명·청대 상업 출판 시장의 부흥에 힘입어 중국 각지에서 8종 이상의 판본이 제작되었다. 『제감도설』은 명말 편찬된 직후 조선에 전래되어 선조에게 진상되었다. 영조는 『제감도설』을 제왕학 서적의 하나로 인식하며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영조의 어훈서 간행과 관련이 있으며, 고종은 이 책을 직접 구입해 수장했다. 경기도박물관 소장 『군왕좌우명』과 장서각 소장 『도해역대군감』은 지금까지 확인된 『제감도설』 중에서 글씨는 목판으로 찍고, 그림은 모사하여 채색한 유일한 사례로, 조선왕실 수장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제감도설』이 왕실을 중심으로 수용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본래의 제작 목적인 교훈적이고 감계적인 성격이 비교적 온전히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제감도설』이 여러 번각본과 제감도로 제작되면서 널리 유행하였다. 이는 에도시대 막부 주도의 성리학 수용과 전파, 상업 출판 시장의 발전, 중국 궁정풍속화 및 고사화 제작 전통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제감도설』 삽화 속 중국 황제와 화려한 궁정의 이미지가 선호되면서, 그림의 성격이 감계화에서 풍속화로 변용되었다. 『제감도설』은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도 전래되어 번각본이 제작되었다. 프랑스 번각본은 18세기 프랑스 사회에서 유행했던 시누아즈리와 계몽주의자들의 유가사상에 대한 관심 등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프랑스혁명 직전 제작된 이 번각본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판 여론뿐만 아니라 차기 왕위계승권자였던 프로방스 백작과 마리 조세핀으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받기 위한 제작자의 의도 등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제감도설』은 16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각국의 정치, 사회, 사상, 문화적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수용되었다. 한편, 『제감도설』은 각국의 위정자들에게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제감도설』이 중국 황제의 교육을 위해 제작된 책이라는 사실이 조선왕실과 에도막부, 프랑스왕실 등 각국의 지도층과 지식인들에게 중요한 유인과 자극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감도설』과 같이 당시 지식과 정보, 문화의 총체였던 圖書가 유통되는 양상에 대한 연구는 각국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미술사적 맥락의 차이를 고찰하는 작업이자 동시에 각국이 공유했던 특징들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제감도설』이 중국에서 편찬된 이후 한국과 일본, 프랑스에 전래 및 수용되는 양상을 살펴보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본고에서 상세히 다루지 못한 여러 주제들 특히, 한·중·일 삼국과 프랑스에서 『제감도설』에 수록된 여러 고사 중 어떤 주제들이 선호되었고, 각 고사의 내용이 어떤 방식으로 변형 또는 왜곡되었으며, 삽화 속 여러 도상들이 각 국의 회화 전통에 따라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등에 관해서는 필자의 후속연구에서 별도로 살펴보고자 한다.

Notes

1) 土居次義, 「狩野山樂の帝鑑圖屛風」, 『佛敎美術』 20(1935), pp. 2-43; 中村溪男, 「狩野派合作の帝鑑圖屛風について」, 『ミュージアム』 79(1957), pp. 23-25.

2) Julia K. Murray, “What is ‘Chinese Narrative Illustration’?,” The Art Bulletin 80, no. 4(1998), pp. 602-615; _____, “From Textbook to Testimonial: The Emperor’s Mirror, An Illustrated Discussion in China and Japan,” Arts Orientalis vol. 31(2001), pp. 36-101; _____, “Didactic Illustrations in Printed Books,” ed. Cynthia Joanne Brokaw & Kai-wing Chow, Printing and Book Culture in Late Imperial China(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pp. 417-450; _____, Mirrorof Morality: Chinese Narrative Illustration and Confucian Ideology(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7); _____, “Didactic Picturebooks for Late Ming Emperors and Princes,” Cultures, Courtiers, and Competition-The Ming Court(1368~1644)(Harvard University Press, 2008), pp. 231-268; _____, “Narrative and Visual Narrative across Disciplines and Cultures,” Rethinking Visual Narratives from Asia(Hongkong University Press, 2013) pp. 13-26.

3) 刘蔷, 「《帝鉴图说》及其版本丛谈」, 『北方论丛』 No. 5(2000), pp. 124-128; 林麗江, 「晚明規諫版畫 《帝鑑圖說》 之研究」, 『故宮學術季刊』 33(2015), pp. 83-142.

4) 牛建强·汪维真, 「从《帝鉴图说》看16世纪末的中国帝政」, 『史学月刊』(2000), pp. 26-36; 莊慧敏, 「《帝鑑圖說》與 《養正圖解》之研究」(台北市立师范学院 应用语言文学研究所硕士论文, 2004); 陳士誠, 「從《帝鑒圖說》看張居正心目中理想君王的形象, 兼論他的帝師角色」(香港科技大學 哲學科 碩士學位論文, 2008); 王有英, 「从《帝鉴图说》管窥中国古代帝王教育」, 『广西师范大学学报』(2009), pp. 96-99; 颜丙震, 「《帝鉴图说》与清代的幼帝教育」, 『史学月刊』(2011), pp. 132-133.

5) 이성훈, 「숙종대 역사고사도 제작과 〈謝玄破秦百萬兵圖〉의 정치적 성격」, 『美術史學硏究』 262(2009), pp. 33-68; 김영욱, 「歷代 帝王의 故事를 그린 조선후기 왕실 鑑戒畵」, 『美術史學』 28(2014), pp. 219-254.

6) 김두은, 「조선후기 三皇五帝故事圖 병풍 연구」(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미술사학 석사학위 논문, 2021); 양유경, 「조선시대 聚星圖 연구」(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1).

7) 왕진룬, 이영옥 역, 『중국의 황태자 교육』(김영사, 2007), p. 266.

8) 張居正·呂調陽, 「進圖疏」, 『帝鑑圖說』, “……仍取唐太宗以古爲鑑之意, 僭名帝鑑圖說, 上呈睿覽……今臣等所輯, 則媺惡並陳, 勸懲斯顯…….” 국역은 장거정, 임동석 역, 『제감도설』(고즈윈, 2011), pp. 35-36을 참조했다.

9) 張居正·呂調陽, 「進圖疏」, 『帝鑑圖說』, “……臣等聞商之賢臣伊尹告其君曰, 德惟治, 否惟亂, 與治同道, 岡不興, 與亂同事, 岡不亡...乃屬講官臣馬自强等, 略倣伊尹之言, 考究歷代之事…….” 국역은 위의 책, pp. 33-35를 참조했다.

10) 『明史紀事本末』 卷61, “……一日上御文華殿, 講畢, 覽至漢文帝勞軍細柳事, 居正因言, 皇上當留意武備, 祖宗以武功定天下, 承平日久, 武備日弛, 不可不及早講求也, 上稱善…….”

11) 陸樹聲, 「帝鑑圖說叙」, 『帝鑑圖說』, “……公所進圖說 上嘉納 勅下禮官 宣付史館 公復梓其副 以揚休美…….”; 王希烈, 「帝鑑圖說後序」, 『帝鑑圖說』, “今元輔少師張公 旣輯帝鑑圖說奏御 刻其副以傳…….”

12) 颜丙震, 앞의 논문, pp. 132-133.

13) 필자의 석사학위논문에서는 1573년에 張居正과 潘允端(1526-1601)이 제작한 판본 2종을 각각 萬曆元年刻本 (A형)과 (B형)으로 칭하였으나, 해외 선행연구와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이 두 판본을 각각 張居正刻本과 潘允端本으로 정정한다.

14) 이 표는 선행연구들을 참조하되, 현존하는 판본들을 중심으로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선행연구는 다음과 같다. 코노 모토아키(河野元昭)는 일본에 있는 『제감도설』의 명·청대 판본과 판본을 조사하고, 8종 11본으로 분류하여 소개하였다. 河野元昭, 앞의 논문, pp. 142-144; 고바야시 히로미츠(小林宏光)는 모토아키(河野元昭)의 논문을 바탕으로 『제감도설』 판본을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소개한 뒤, 명대 판본만 최소 6종 이상이 출판되었다고 언급하였다. 小林宏光, 「宮楽図屏風にみる帝鑑図説の転成: 近世初頭絵画におけ る明代版画変容の一例」, pp. 11-32; 刘蔷는 명대판본을 4종, 청대 판본을 4종으로 파악하였다. 刘蔷가 언급한 청대 판본 4종 중에는 만주어로 쓰인 順治年間 滿文抄本(북경고궁박물관 소장)과 청말 大臣 옹동화의 주가 달린 翁同和(1830~1904)批注本도 포함되어 있다. 刘蔷, 앞의 논문, pp. 124-128; 莊慧敏는 刘蔷가 언급한 판본에 명대 판본 2종, 청대판본 1종을 추가하고 일부 판본을 제외하여, 총 8종의 판본을 소개하였다. 莊慧敏, 앞의 논문, pp. 46-56; 陳理慧는 각종 판화집 등에 소개된 『제감도설』의 판본을 정리하여 소개하였다. 陳士誠, 앞의 논문, pp. 177-178; 줄리아 머레이(Julia K. Murray)는 2001년 논문에서 명대판본 4종과 청대판본 4종을 소개한 뒤, 2005년도에 이를 정리하여 명대판본 5종, 청대판본 1종에 대해 발표하였다. Julia K. Murray, “From Textbook to Testimonial: The Emperor’s Mirror, An Illustrated Discussion in China and Japan,” pp. 36-101과 “Didactic Illustrations in Printed Books,” pp. 417-450.

15) 純忠堂刻本(B형)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舊원문검색서비스(https://kyu.snu.ac.kr/)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16) 명말 만력연간에는 安徽省의 新安을 근거지로 하는 黃氏 일족들이 각공으로 활동하면서 소위 徽派가 형성되었다. 新安상인들이 중국 전역을 무대로 하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둠에 따라 휘파판화를 제작하는 각공들은 신안뿐만 아니라 금릉, 건안, 양주 등지에서 판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小林宏光, 「明清人物版画の特質と発展状況:万暦期徽派版画、 陳洪綬から任熊まで」, pp. 41-42.

17) 『閨範圖說』은 만력18년(1590)에 呂坤(1536~1618)이 『烈女傳』 중에서 117명을 선별하여 편찬한 책이다. 太監陳矩가 이 책을 보고 만력제에게 진상하였고, 만력제가 이 책을 皇貴妃 鄭氏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황귀비 정씨가 이 책에 서문을 덧붙여 다시 출판하였다. 박동인, 「呂坤의 修養論」, 『人文硏究』 53(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7), p. 417, 주 1; 『규범도설』 三一三半葉 판화 좌측 상단에는 “黃師敎”라는 각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황씨 각공이 판각한 것을 알 수 있다.

18) 이 작품의 소장 사항은 國立故宮博物院 善本古籍資料庫 故殿 002222-002223이며, 원문 이미지는 『皇城聚珍—清代殿本圖書特展』(國立故宮博物院, 2007) DVD에 수록되어 있다.

19) 趙憲, 「朝天日記」, 『重峯先生文集』卷11 1574年 9月 14日條, “十四日乙酉. 晴而風. 留于永平城南朱大寶家. 始見帝鑑圖. 張閣老居正呂閣老調陽之所撰也. 許海嶽國曾送于李季眞而進上云……以此而刊頒于東國則甚善云. 余勤退而買之.” 이 때 조선에 유입된 판본은 장거정각본과 호현각본 2종으로 보인다.; 『제감도설』의 조선 전래 경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영욱, 앞의 논문, p. 225 참조.

20) 이수경, 「조선시대 효자도」, 『美術史學硏究』 242·243(2004), pp. 202-203.

21)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67, 「入燕記下」, 正祖 2年(1778) 5月 19日條, “十九日戊寅. 夜雷雨. 留館. 燕市書肆. 自古而稱. 政欲繙閱. 於是余與在先及乾粮官. 往琉璃廠. 只抄我國之稀有及絶無者. 今盡錄之……太岳集……帝鑑圖說…….”

22) 『承政院日記』 英祖 22年(1746) 12月 13日條, “(承旨·儒臣·司書韓光肇同爲入侍時, 右承旨宋翼輔, 校理尹鳳五, 修撰李彝章, 司書韓光肇, 假注書李萬育, 記事官安致宅·尹東星入侍.) 諸臣進伏訖……鳳五曰……又曰, 玉堂果有帝範矣. 上曰, 太宗所作耶? 後日召對, 持入, 可也. 帝鑑圖說, 亦始自何代, 而終於何代耶? 鳳五曰, 自唐堯至皇朝, 而監戒自桀·紂始矣. 此冊子置諸大內, 時時省覽, 以備破寂之資, 似宜矣. 上曰, 予之衰耗, 非但政令而已, 雖在看書時亦然. 向者手不釋卷, 而今則月異而歲不同, 日異而時不同, 以一年之內言之, 漸覺其衰老矣. 自省編是予所述, 而記有處僅十之一, 時或有不似予所自作者…….”

23) 『承政院日記』 英祖 22年(1746) 12月 13日條, “承旨·儒臣·司書韓光肇同爲入侍時, 右承旨宋翼輔, 校理尹鳳五, 修撰李彝章, 司書韓光肇, 假注書李萬育, 記事官安致宅·尹東星入侍. 諸臣進伏訖……鳳五曰……又曰, 玉堂果有帝範矣. 上曰, 太宗所作耶? 後日召對, 持入, 可也. 帝鑑圖說, 亦始自何代, 而終於何代耶? 鳳五曰, 自唐堯至皇朝, 而監戒自桀·紂始矣. 此冊子置諸大內, 時時省覽, 以備破寂之資, 似宜矣. 上曰, 予之衰耗, 非但政令而已, 雖在看書時亦然. 向者手不釋卷, 而今則月異而歲不同, 日異而時不同, 以一年之內言之, 漸覺其衰老矣. 自省編是予所述, 而記有處僅十之一, 時或有不似予所自作者…….”

24) 이정민, 「英祖 御製書의 편찬과 의의」, 『한국사론』 51(2005), pp. 364-365과 p. 388의 <부표 1> 참조; 이근호, 「영조대 중반 御製訓書의 간행 양상과 의의」, 『장서각』 26(2011), p. 72-74와 p. 96-97의 <부표> 참조.

25) 『承政院日記』英祖 22年(1746) 12月 14日條, “……上曰, 半夜從容之時, 持帝鑑入侍…….”

26) 『承政院日記』英祖 22年(1746) 12月 24日條, “……明履曰, 頃者夜對, 以古鏡重磨方進講, 而字字句句, 講討奧義, 臣不勝欽仰矣. 上曰, 帝鑑亦欲於靜夜講論矣. 明履曰, 非特此也, 雖於經書之中, 拈出一書, 周覽於燕閒之暇, 而召見玉堂之時, 亦以此進講宜矣…….”

27) 『承政院日記』英祖 22年(1746) 12月 24日條, “傳于李喆輔曰, 儒臣持帝鑑入侍.”

28) 『承政院日記』英祖 22年(1746) 12月 26日條, “……明履曰, 儒臣持帝鑑入侍事, 命下, 而玉堂·春坊, 竝無此冊, 故不得持入…….”

29) 이태진, 「奎章閣 中國本 圖書와 集玉齋圖書」, 『민족문화논총』 16(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6), pp. 169-188; 황정연, 「고종연간(1863-1907) 궁중 서화수장의 전개와 변모양상」, 『미술사학연구』 259(한국미술사학회, 2008), pp. 79-16.

30) 1800년대 후반 상해에 있는 서점에서 판매하는 서책과 서화첩의 내역 및 가격을 왕실에서 기록한 『上海書莊圖各種書籍圖帖目錄』의 목록과 『집경당포쇄서목』 「書畵部」의 목록이 대부분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목록에 기재된 상당수의 작품을 왕실에서 구입하여 실제로 국내로 들여왔다는 점이 확인된 바 있다. 황정연, 앞의 논문, p. 100.

31) 한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일본 판본 2건에는 모두 “朝鮮總督府圖書之印”이 찍혀있고, 각각 “昭和13.6.25.”과 “昭和19.5.5.”이라는 입고일자가 적혀있다. 따라서 1709년 일본 판본은 1938년 6월 25일에, 1858년 일본 판본은 1944년 5월 5일에 각각 조선총독부도서관에 입고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도서관의 입고 시기가 두 판본의 국내 유입시기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이들이 일본에서 제작되었고 총독부도서관에 수장되어 있었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 판본들은 일제강점기에 국내에 유입된 후 총독부도서관에 소장되었다가 광복 이후 현 소장처인 국립중앙도서관에 남아있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32) 이성훈, 앞의 논문, p. 56, 주40; 김영욱, 앞의 논문, pp. 226-228.

33) 김두은, 앞의 논문, pp. 14-18, pp. 42-43, pp. 46, p. 61 주163, p. 68; 한편, 이재호는 <명현제왕사적도>와 <고석성왕치정도>를 『제감도설』에 수록된 <해망시인>이나 <몽재량필> 삽화와 비교할 때, 서사 표현방식에 큰 차이가 있으며, 이 두 작품은 조선의 도화서 화원들이 감계적 고사인물화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보았다. 『조선시대 고사인물화 3』(국립중앙박물관, 2017), p. 244.

34) 양유경, 앞의 논문, pp. 64-72.

35) 『군왕좌우명』의 소장사항은 경기도박물관-2898이다.『도해역대군감』의 소장사항은 장서각 K2-5196 이며, 장서각 홈페이지(http://jsg.aks.ac.kr/)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도해역대군감』 중 일부 그림은 박정혜· 윤진영·황정연·강민기, 『왕과 국가의 회화』(돌베개, 2012), p. 123의 도 121, 도 121-1에 실려 있다.

36) 소장이력에 대한 정보는 양 기관이 제공하였다. 정보 제공에 감사한다.

37) 旋風葉은 반씩 접은 낱장들을 풀로 연결해서 펼쳤을 때 두 면씩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김경미·박윤희, 「조선왕실의 장황」, 『꾸밈과 갖춤의 예술, 장황』(국립고궁박물관, 2008), p. 154.

38) 이 표는 선행연구들을 참조하되, 현존하는 판본들을 중심으로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에서 제작된 판본들을 ‘판본’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본고에서는 다른 나라 판본들과 구분하기 위해 ‘日本 版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제감도설』 일본 판본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河野元昭, 「探幽と名古屋城寬永度造營御殿 中」, 『美術史論叢』 4(1988), pp. 142-144; 刘蔷, 앞의 논문, pp. 127-128; 특히 히데요리본에 관한 연구는 이가라시 킨자부로우(五十嵐金三郞)의 연구를 주목할만 한데, 킨자부로우는 일본에 남아있는 히데요리본의 活字를 조사하여 有跋本과 無跋本, 異植活字本으로 그 계통을 정리하였다. 킨자부로우의 연구를 통해 有跋本이 無跋本에 선행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無跋本 중에서도 일부 판본은 異植字版을 활용한 異植活字本으로 조사되었다. 여기서 異植字版이란 原版을 해체하고, 이전에 사용되었던 활자와 후대에 새로 제작한 활자를 합쳐서 後代에 再出版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렇게 해서 찍어낸 판본을 異植活字本이라고 한다. 五十嵐金三郞, 「 『帝鑑図説』異植字版小考」, 『參考書誌硏究』 32(1986), pp. 1-35.

39) 仲田勝之助, 『繪本の硏究』(美術出版社, 1950), p. 20; 森上修, 「〈館蔵資料紹介〉秀頼版 「帝鑑図説」(慶長11年刊古活字本6冊)」, 『香散見草: 近畿大学中央図書館報』 1(1985), p. 4; 小林宏光, 앞의 논문, p. 21; Karen M. Gerhart, “Tokugawa Authority and Chinese Exemplars: The Teikan Zusetsu Murals of Nagoya Castle,” Monumenta Nipponica vol. 52, no. 1(1997), p. 4; 伊豆田幸司, 「<本館所蔵貴重書紹介>秀頼版 「帝鑑図説」 慶長11(1606)年」, 『香散見草: 中央図書館報』 32(2004), pp. 18-19; 히데요리본과 조선 관련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지영, 앞의 논문, pp. 87-90 참조.

40) 이재정, 「조선 활자 인쇄술이 일본 古活字本 인쇄에 미친 영향」, 『東北亞歷史論叢』 No. 46(2014), pp. 150-191.

41) 『제감도설』 일본 판본들의 제작 방식 변천은 에도시대 정치, 사회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즉, 일본에서는 16세기 말 조선과 포르투갈 등을 통해 활자인쇄술이 유입되어 활자 인쇄가 이루어지다가, 간에이 연간(寬永年間, 1624~1644)을 기점으로 출판계의 주요 방식이 활자 인쇄에서 목판 인쇄로 회귀하게 되었다. 한편, 에도시대 초기에는 五山을 비롯한 사찰 주도로 서적 출판이 이루어졌으나, 막부 주도 하에 유교 관련 서적 출판이 적극 시행 및 장려됨에 따라 1650년대 이후에는 사찰 주도의 서적 출판이 급감하게 되었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무사와 죠닌에 의한 상공업 발달과 서민문화 부흥에 힘입어 서적도매업이 전국적인 규모로 커지게 되었다. David Chibbett, The historyof Japanese printing and book illustration (Tokyo: Kodansha International; New York: Distributed by Harper & Row Publishers, 1977), p. 79.

42) 1858년 일본 판본은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https://www.nl.go.kr/)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43) 1880년 신보관에서 발행한 『제감도설』 서문에는 점석재 주인이 일본에서 구입한 판본을 사진으로 찍어 축소하여 판본을 제작했다고 기록하였다. 1858년 판본의 삽도와 구도, 산수, 인물 표현 등에서 신보관 발행본과 차이점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1880년 일본판본을 저본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汪業熉, 「石印帝鑑圖說序」, 『帝鑑圖說』, “帝鑑圖說一書 爲前明張江陵相國所輯 取古帝王可以爲法者 凡八十一圖 可以爲戒者 凡三十六圖……惟原本板已 漫漶 且卷帙甚巨 不便巾笥 今點石齋主人 購自東瀛 用照相灋縮印 其說則延請各人 以各體書法繕寫 每卷各有目錄可以一覽瞭然 洵爲藝林典貴之品 古今得失旣足以資考鏡 而披圖覽說 於書畵之法 亦有所悟當不僅稱以三節已也…….”

44) 大倉集古館 소장 <宮樂圖>에는 궁정 생활의 화려한 면모가 그려져 있는데, 고바야시 히로미츠(小林宏光)는 화면 구도와 인물, 건물 등을 분석하여 이 작품의 모티프가 『제감도설』 「광우복철」편 중에서 <寵信伶人>와 <列肆後宮>의 판화에서 왔음을 밝혀냈다. 또한 <궁락도>에서 본래의 감계적 의도가 소멸된 것은 『제감도설』이 모모야마 시대 풍속화에 흡수된 사례로 보았다. 小林宏光, 「宮楽図屏風にみる帝鑑図説の転成: 近世初頭絵画における明代版画変容の一例」, pp. 21-27; 한편 사사키 코우조우(佐々木剛三)는 중국 판화인 『제감도설』 이 일본에서 帝鑑圖로 회화화 된 것에 대해 중국의 선진 문화와 문물을 일본에서 수용한 예로 보았다. 佐々木剛三, 앞의 논문, pp. 4-6.

45) 나고야성은 도쿠가와 막부의 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 1623~1651)가 축조하였고, 카노탄유(狩野探幽, 1602~1674)가 성 내부의 혼마루텐 죠라쿠텐(名古屋城 丸御殿 上洛殿)에 그림을 그렸다. 게하르트(Karen M. Gerhart)는 나고야성에 그려진 제감도들의 주제가 모두 「성철방규」편에 속한 漢代 고사이고, 이들이 개방적 공간인 후스마에 그려졌다는 점에서 선전(propaganda)을 목적으로 고사를 선별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17세기 무사들 중에서 『제감도설』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소양을 갖춘 무사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므로 특정 구절만 무사 엘리트들에게 유행했을 것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나고야 성에 그려진 제감도는 쇼군과 그 주변 인물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한 엘리티즘(elitism)의 시각적 상징이 고안된 것으로 해석했다. Karen M. Gerhart, 앞의 논문, pp. 29-31.

46) 김승일은 조선의 성리학이 일본 유학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상하 간의 신분질서를 명백히 하고 주종 간의 의리를 중시하는 조선의 성리학을 도쿠가와 막부가 신속하게 수용함으로써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일본 역사에서 가장 안정되고 오래 집권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나아가 조선의 성리학이 자본주의적 윤리정신의 확립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다른 동아시아지역의 국가들보다 빨리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승일, 「도쿠가와(德川) 막부시기, 일본의 조선성리학 수용과 그 의의에 대한 일 시각」, 『사학연구』(한국사학회, 2010), pp. 645-646 주 4, p. 660, p. 664.

47) 미나모토 료엔,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예문서원, 2000), pp. 30-52.

48) 일본에서 제작된 帝鑑圖 22점에 수록된 각 고사들에 대해서는 박지영, 앞의 논문, pp. 102-104의 표 참조.

49) 채색본인 『중국 황제들의 주요 삶의 특징집』의 소장사항은 IFN-10520492, 10520483이며, 프랑스국립도서관 웹사이트(https://www.bnf.fr/fr)에서 원문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동판본인 『중국 황제들의 기념비적인 사실들』의 고찰을 위해 본고에서 사용한 판본은 Faits Mémorables Des Empereurs de La Chine, Tirés Des Annales Chinoises...- Primary Source Edition (Nabu Press, 2014)이다.

50) Julia K. Murray, “Narrative and Visual Narrative across Disciplines and Cultures,” pp. 13-26.

51) Julia K. Murray, “Narrative and Visual Narrative across Disciplines and Cultures,” p. 20; 서문(AVERTISSEMENT)에 적힌 원문은 다음과 같다. “Ce Recüeil a été préfenté à l’Empereur Regnant.”

52) Palola Dematte, “A Confucian Education for Europeans,” The Art Bulletin 98, no. 1(2016), pp. 46-47.

53) 위와 같음.

54) Julia K. Murray, “Narrative and Visual Narrative across Disciplines and Cultures,” p. 21.

55) 시누아즈리(Chinoiseries)는 중국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시누아(chinois)’와 연속 혹은 유행을 의미하는 ‘세리(series)’의 합성어로, 18세기 프랑스 회화 및 장식 예술에서 나타난 중국풍의 미술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시누아즈리 양식은 루이 14세 통치 시기 프랑스 미술에 처음 등장했으며 18세기 중엽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확산하였다. 중국풍 미술이 프랑스 사회에서 유행하였던 주요한 배경으로는 동인도 회사를 통한 중국 유물의 유입, 중국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내온 자료들과 이를 기반으로 출간된 중국 관련 서적 등을 들 수 있다. 신상철, 「18세기 예수회 선교사를 통한 중국과 프랑스 간의 미술교류 역사: 프랑스 시누아즈리 미술의 지적 기반과 보베 공장의 ‘중국 연작’」, 『미술사학』 32(2016), pp. 263-265 및 271-276.

56) 17세기 중반이후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유일한 정보원이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내 가톨릭 개종자를 늘리기 위한 선교전략으로서 유가와 기독교의 가르침이 유사하며, 조상숭배나 국가제례 같은 유가의례는 종교성을 띠지 않는다는 견해를 견지했다. 그에 따라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에서 자료를 가공해 본국에 전달했고, 중국에 대한 선별적인 정보와 이미지를 통해 프랑스 지식인들과 대중들은 중국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특히 유가의 철학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18세기 전반 볼테르나 라이프니츠 같은 중국 애호적 계몽주의자들은 절대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유럽의 철학과 제도를 부정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가를 활용했으며, 공자를 ‘계몽주의의 후견 성인’으로 숭상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동일한 수준에서 논의하였다. 박상현, 「계몽주의와 ‘중국 논쟁’」, 『사회와 역사』 113(2017), pp. 399-499 및 406-409.

57) 헬만의 번각본 서문에는 이 책이 재질과 가격별로 다르게 판매되고 있다는 광고가 실려 있다. 가장 비싼 판본은 네덜란드 산 종이로 만든 것으로 수채 판화를 추가하였으며, 대형 종이에 제작한 또 다른 판본은 16장의 ‘중국 전투(Batailles de la Chine)’ 삽화와 함께 판매하기도 했다. Julia K. Murray, “Narrative and Visual Narrative across Disciplines and Cultures,” p. 22.

58) 중국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 아미오로부터 『제감도설』의 채색본을 건네받았던 베르탱은 당시 프랑스의 내무 부장관이자 전직 재무부장관으로, 동인도회사를 통해 아시아 무역을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입수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해 방대한 중국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베르탱은 유교 사상을 이용해 프랑스 왕정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그에 따라 중국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프랑스 내 유통시키는 일을 후원하였다. 베르탱은 헬만에게 자신의 컬렉션을 보여주고 그 출판물들의 이미지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헬만은 1780년 베르탱이 은퇴한 이후에도 베르탱의 컬렉션을 계속해서 출판하였으나, 그 목적은 베르탱의 개혁사상에서 벗어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헬만이 『제감도설』을 통해 프랑스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했다고 주장한 근거로는 상나라 주왕이 달기에게 빠져 정치를 그르쳤다는 고사에 관한 <妲己害政>의 삽도에서 유럽식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된 달기를 마리 앙투아네트로 치환하여 볼 수 있는 것과 이 책의 서문에서 헬만이 루이 16세의 남동생의 부인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동서인 마리 조세핀(1753~1810)에게 헌정한다고 적은 점 등을 들 수 있다. 드마테는 헬만의 번각본이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은밀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앙시앙 레짐을 전파했다고 보았다. Palola Dematte, 앞의 논문, pp. 43-46, pp. 58-59.

59) 양희영, 「프랑스 혁명기 캐리커처에 나타난 혁명과 반혁명의 이미지, 1789-1792」, 『서양사학』 94(2007), p. 9 및 pp. 19-20.

60) Leah Price, “Vies privées et scandaleuses: Marie-Antoinette and the Public Interest,” The Eighteenth Century: Theory and Interpretation, Vol. 33(1992), p. 177.

61) 이 책의 서문에서는 마리 조세핀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 책을 헌정하는 대상을 ‘마담(Madame)’으로 칭하고 마리 조세핀의 초상화를 삽입하였다. 헬만은 헌정사에서 조세핀을 자비로운 후원가로 칭하면서 조세핀의 환심을 사려했다. Palola Dematte, 앞의 논문, pp. 58-59.

62) 프로방스 백작은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1781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들을 낳기 전까지 1순위 왕위계승권자였다. 루이 16세는 궁정에서 프로방스 백작의 질투와 음모 등을 경계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프랑스 혁명사 10부작 01』(여문책, 2015), pp. 154-156, p. 159, 189-191.

Fig. 1.
<夜分講經7gt;,『帝鑑圖說』 張居正刻本,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Zang Juzheng edition, 1573, frame 20.2×14.1cm, microfilm from National Palace Museum, Taiwan; photo by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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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夜分講經>, 『帝鑑圖說』 金濂刻本,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Jin Lian edition, 1604, frame 21.4 ×12.8cm. microfilm from National Library of China; photo by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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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呂坤>, 『閨範圖說』 徽州刊本 卷4 부분, Lu Kun, Guifan tushuo (Illustrated Explanation of Exemplary Women), Huizhou edition vol. 4, 1573; image from 『新編中國版畵史圖錄』 卷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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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夜分講經>,『寫繪本帝鑑圖說』,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painted by Shenzhen Lin, 19th c., album leaf, ink and color on silk, frame 36×46 cm, National Palace Museum, Taiwan; image from 『皇城聚珍—清代殿本圖書特展』(國立故宮博物院, 2007) 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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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夢賫良弼>, 『帝鑑圖說』 純忠堂刻本(B형), “Finding a minister seen in a dream,”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Illustrated and Discussed),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1819, frame 19.5×13.9cm,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Kyujanggak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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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夢賫良弼>, 『寫繪本帝鑑圖說』, “Finding a minister seen in a dream,”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Illustrated and Discussed) painted by Shenzhen Lin, album leaf, ink and color on silk, frame 36 ×46cm, National Palace Museum, Taiwan; image from 『皇城聚珍—清代殿本圖書特展』 (國立故宮博物院, 2007) D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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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夜分講經>, 『君王左右銘』,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Gunwang jwaumyeong (The King's Motto), album leaf, ink and color on paper, frame 20.1×27.6cm, Gyeonggi Province Museum; photo by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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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澤及枯骨>, 『圖解歷代君鑑』, “Mercy shown to dry bones,” from Dohae yeokdae gungam (The Mirror of Rulers throughout the Ages, An Illustrated Explanation), album leaf, ink and color on paper, frame 20.8 ×28.0cm, Jangseogak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Jangseogak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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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澤及枯骨>, 『帝鑑圖說』 秀賴版 無跋本, “Mercy shown to dry bones,”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Hideyori edition (no epilogue), 1606, frame 22.1×14.4cm, National Diet Library, Japan;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National Diet Library Digital Col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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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露臺惜費>, “Saving money by halting the balcony construction,” fusuma painting from Honmaru Palace, Nagoya Castle, Japan; image from 『王と王妃の物語 帝鑑図大集合』 (名古屋城,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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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夜分講經>,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Recueil Historique de Principaux Traits de la Vie des Empereurs Chinois, ink on silk, 52×48cm,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BnF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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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헬만, <捨身佛寺>, Isidore-Stanislas Helman, “Fanaticism in Buddhism,” from Faits Mémorables Des Empereurs de La Chine, 1788, engraving and etching, frame 17.7 ×11.7cm;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Primary Source Edition, Nabu Pres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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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捨身佛寺>, “Fanaticism in Buddhism,” from Recueil Historique de Principaux Traits de la Vie des Empereurs Chinois, ink and color on silk,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artwork in the public domain(image from BnF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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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捨身佛寺>, 『帝鑑圖說』 純忠堂刻本(B형), “Fanaticism in Buddhism,”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s)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1819, frame 19.5 ×13.9cm,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Kyujanggak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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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제감도설』 명·청대 판본, Ming and Qing dynasties editions of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Illustrated and Discussed)14
No 판본명 제작연도 제작지 匡郭 책수 소장처
Title Year of production Place of production Frame dimensions (cm) Number of volumes Holding institution
1 張居正刻本 1573 北京 20.2×14.1 6 臺灣故宮博物院
Beijing National Palace Museum, Taiwan Acc. No.1210
Zang Juzheng edition 1573 北京 20.2×14.1 12 臺灣國立中央圖書館 善本書室
Beijing National Central Library, Taiwan Acc. No.5239
2 潘允端本 1573 江蘇省 淮安 40.0×38.0 2 日本 宮內廳書隆部
Pan Yunduan edition Hwaian Library of Imperial Household Agency, Japan
3 胡賢刻本 1573 南京 20.7×14.1 6 臺灣國立中央圖書館 善本書室
Huxian edition Nanjing National Central Library, Taiwan Acc. No. 5240
4 郭庭梧刻本 1575 雲南省 20.3×14.2 - 北京圖書館 古籍診本叢刊 卷14
Guo Tingwu edition Yunnan Collection of Old Books of the National Library of China Vol. 14
郭庭梧 重刻本 1575 - 2 中國國家圖書館 古積館
Guo Tingwu re-engraved eidition National Library of China Acc. No.16094
5 金濂刻本 1604 安徽省 新安 21.4×12.8 6 中國國家圖書館 古積館
Jin Lian edition Xinan National Library of China Acc. No. 14125
6 天啓二年刻本 1622 - - 6 -
1622 edition
7 純忠堂刻本(A형) 1819 湖北省 江陵 - - -
Chunzhong Tang edition (Type A, no illustration)
純忠堂 重刻本(A형) 1819 Jiangling - 2 中國國家圖書館 古積館
Chunzhong Tang re engraved edition (Type A, no illustration) National Library of China Acc. No. 3988
純忠堂刻本(B형) After 1819 - 19.5×13.9 6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illustration contained)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cc. No. 奎중5034
8 申報館 申昌書畵室 發行本 1880 上海 12.4×8.4 4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
Shenbao Guan edition Shanghai Seoul National University Old Books Library Acc. No. 4300
<Table 2>
『제감도설』 국내 현전본,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Illustrated and Discussed) remaining in Korea
No 판본명 제작연도 匡郭 책수 소장처
Title Year of production Frame dimensions (cm) Number of volumes Holding institution
1 純忠堂刻本(B형) After 1819 19.5×13.9 6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illustration contained)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cc. No. 奎중5034
2 申報館 申昌書畵室發行本 1880 12.4×8.4 4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
Shenbao Guan edition Seoul National University Old Books Library Acc. No. 4300
3 日本 版本 1709 22.0×13.8 12 국립중앙도서관
Japanese 1709 edition National Library of Korea Acc. No. 古古6-28-48
4 日本 版本 1858 Total : 26.0×18.1 6 국립중앙도서관
Japanese 1858 edition National Library of Korea Acc. No. 古古3-70-6
<Table 3>
<夜分講經> 세부 비교, “Lecturing through the night,” detailed images comparison between Gunwang jwaumyeong, Zang Juzheng edition, and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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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and 12. <夜分講經> 부분, 『君王左右銘』,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Gunwang jwaumyeong (The King's Motto), album leaf, ink and color on paper, Gyeonggi Province Museum; photo by author

Fig. 10 and 13. <夜分講經> 부분, 『帝鑑圖說』 張居正刻本,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Zang Juzheng edition, 1573, microfilm from National Palace Museum, Taiwan; photo by author

Fig. 11 and 14. <夜分講經> 부분, 『帝鑑圖說』 純忠堂刻本(B형), Detailed image of “Lecturing through the night,” from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Chunzhong Tang edition (Type B),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rtwork in the public domain (image from Kyujanggak website).

<Table 4>
『제감도설』 일본 판본, Japanese editions of Dijian tushuo (The Emperor's Mirror, Illustrated and Discussed)38
No 판본명 제작연도 제작지 匡郭 책수 소장처
Title Year of production Place of production Frame dimensions (cm) Number of volumes Holding institution
1 秀賴版 有跋本 1606 - 22.0×14.2 6 近畿大學附屬圖書館
Hideyori edition (epilogue contained) Kindai University Central Library
秀賴版 無跋本 - 22.1×14.4 6 國立國會圖書館 漢籍古典籍資料
Hideyori edition (no epilogue) National Diet Library Acc. No. WA7-9
秀賴版 異植字版本 - Total : 27.0×18.5 6 大阪府立中之 圖書館
Hideyori edition (printed from re-set movable type) Osaka Prefectural Nakanoshima Library
2 日本 版本 1627 京都 23.0×17.0 12 國立國會圖書館 漢籍古典籍資料
Japanese 1627 edition Kyoto National Diet Library Acc. No. WA7-237
3 日本 版本 1709 江戶 22.0×13.8 12 국립중앙도서관
Japanese 1709 edition Edo National Library of Korea Acc. No. 古古6-28-48
4 日本 版本 1858 江戶 Total : 26.0×18.1 6 국립중앙도서관
Japanese 1858 edition Edo National Library of Korea Acc. No. 古古3-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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