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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09; 2021 > Article
베트남 阮朝(Nguyễn) 明命帝(r. 1820-1840)의 <孝陵> 연구

Abstract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와 달리 베트남 지역의 전통 왕조는 한자를 사용하고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유학을 국시로 통치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황릉, 혹은 왕릉을 지어 국가적 정통성과 권위를 확립했다. 베트남의 마지막 전통 왕조인 응우옌 황조의 황릉은 조선과 중국 명청의 왕릉·황릉과 달리 베트남 시대의 변화가 즉각적으로 반영되며, 제도와 능 조성에 있어 비교적 유연하여 각 황릉마다 황제의 개성이 부여된다는 특징이 있다.
응우옌 황조의 황릉 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황제는 2대 明命帝(r.1820-1840)이다. 1대 嘉隆帝(r. 1802-1820)가 제도와 문물을 갖추어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민망제 통치기에는 응우옌 황조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거대해진 영토를 통합하기 위하여 강력한 大南帝國秩序를 표방하였다. 이를 위해 儒敎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하여 통치체제를 마련하였으며, 국가의 가장 큰 행사인 喪葬禮와 황제의 무덤인 皇陵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본 논문에서는 민망제가 구현한 국가적 이상과 그 형성 과정을 皇陵의 제도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료를 통해 응우옌 영주기의 능을 검토하여 응우옌 황릉의 원류를 탐구하였고, 그 시원을 이룬 가륭제의 <천수릉>을 비교 파악하였다. 민망제는 이를 계승하면서 중국 황릉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孝陵>을 통해 응우옌 황릉의 제도적 완성을 이루었다. 그러나 명청 황릉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베트남식으로 변용하여 베트남化된 황릉 제도를 성립하였다. 이러한 황릉 제도는 국내외 격변하는 응우옌 황조의 역사 속에서도 계승되어 다른 국가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문화 현상을 형성하였다.

Abstract

The dynasties that ruled the present-day Vietnam differed from other South-East Asian states as they used Chinese characters and actively embraced other cultural elements of China. They established administrative system with Confucianism as the national policy, and built royal mausoleums to affirm the legitimacy and authority of the kingdom. The mausoleums of Nguyễn dynasty, the last dynasty to rule Vietnam, are distinguishable from royal tombs of Joseon or Ming and Qing China as they reflect the immediate changes in Vietnamese history. Moreover, the conventions that govern the building of the royal tombs were more adjustable that the monuments show each emperor’s individuality.
Emperor Minh Mang(r. 1820-1840), the second emperor of Nguyễn dynasty, established the structures of the dynasty’s system. After the first emperor, Gia Long, laid the foundations of government and culture, Minh Mang manifested the policy of Imperial Great Vietnam Order to consolidate the empire, greatly expanded in its heyday. He adopted Confucianism as the national policy and ideological basis for the administrative system, and influenced the building of imperial tombs and funeral rites, the most important among the empire’s national events.
This study examines the political ideals of Emperor Minh Mang and how he realized them through royal mausoleums. The origins of Nguyễn imperial tombs were considered through the historical records of the tombs of Nguyễn lords in comparison to the Thien Tho Mausoleum of Emperor Gia Long. Emperor Minh Mang inherited this tradition and took on elements of Chinese imperial tombs. His Hieu Mausoleum presents the complete program for Nguyễn imperial tombs, based on those of Ming and Qing, but modified in Vietnamese style. This scheme for imperial tombs, a unique part of Nguyễn culture unlike any other in history, was maintained through the fast-changing history of the dynasty.

Ⅰ. 머리말

현재 베트남의 영토를 최초로 통일한 阮朝(Nguyễn, 응우옌 황조, 1802-1945)는 총 13명의 황제가 통치했으며, 수도 順化(Huế, 후에)에는 6기의 皇陵이 남아있다(Table 1). 응우옌 황조는 144년간 베트남의 마지막 전통 왕조로 자리하며 다양한 유, 무형의 문화를 남겼으며, 황릉을 포함한 후에의 구시가지는 ‘후에 기념물 복합지구(Complex of Hué Monuments)’로서 세계적인 보편가치를 인정받아 베트남 최초로 1993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1
후에 문화유적의 활발한 복원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관련한 연구는 현재까지 미진한 실정이다. 후에 문화유산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초 프랑스 <Association des Amis du Vieux Hué> 협회에 의해 시작되었다.2 해당 연구는 인도차이나 조사 연구에서 현재 사라진 능묘 사례를 전하는 등 방대한 기초 자료를 전하지만, 응우옌 황조기 예술에 대해서 상당히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3 1945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탈바꿈한 베트남에서도 응우옌 황조는 식민지로 전락한 亡國이라는 부정적인 인식과 함께 응우옌 황조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성과가 집적되지 못했다.4
그러나 1986년의 도이머이(Đổi mới) 이후 현재까지 베트남에서는 새로운 역사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5 기존에 만연했던 역사적 평가절하에 관한 문제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6 베트남의 자체적인 연구뿐 아니라,7 일본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8 간사이 대학(関西大学)과의 연계를 통해 종합적인 연구 환경을 조성하였다.9 무엇보다 한국 문화 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와의 협력이 주목되는데, 2006년 <베트남 황실 보물 특별전> 개최,10 그리고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 연구 사업을 통해 후에 문화유적에 대한 이해와 양국의 문화 비교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1 이렇듯 다양한 국가적 협업과 노력을 통해 응우옌 황조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황릉에 대한 주목도는 높지 않으며, 비단 응우옌 황조뿐 아니라 베트남 전 시기 능묘 미술에 관한 전수조사와 연구는 미진한 실정이다.
이 글에서는 응우옌 황릉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로써 응우옌 황조의 2대 황제인 明命帝(Minh Mạng, 민망제, r. 1820-1840)의 <孝陵>에 주목하고자 한다. 여느 동남아시아 국가와 달리 베트남 지역의 전통 왕조는 한자를 사용하며 중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유학에 근거한 통치철학과 禮制를 기초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응우옌 황조 역시 베트남 이전 왕조처럼 유학을 國是로 통치 체제를 구축한 국가로서 『五禮』와 같은 예제를 정비해 국가체제를 확립하였고, 『大南會典事例』 등 성문화된 상장례를 근거로 황릉을 건립하였다. 황릉 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왕릉에서 황릉으로의 체제변화와 중국 제도의 자구적 수용은 민망제의 <효릉>이 성립하며 기인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우선 민망제의 생애와 사상을 확인하고 민망제 제위기 유교의 성립과 부흥의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후 <효릉> 이전 응우옌 영주기의 왕릉과 1대 황제인 嘉隆帝(Gia Long, 자롱제, r. 1802-1820)의 <天授陵>의 능제를 살펴보고, <효릉>과의 차이를 통해 황릉 제도가 성립되는 과정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효릉>의 모범이 되었던 중국 황릉과의 비교를 통해 베트남 응우옌 황릉의 시각 문화 양상과 독자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민망제의 생애와 사상

응우옌 2대 황제인 민망제는 1대 황제 자롱제의 넷째 아들이자 順天高皇后의 친자로 이름은 阮福膽(Nguyễn Phúc Đảm)이다. 1814년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12 1820년 1월 1일 즉위했다.13 민망제의 정책은 강력한 베트남인 중심주의를 반영한 ‘베트남化’라 할 수 있다. 1832년 민망제는 대외적으로 참파(Champa)를 완전히 병합하고 전국토를 통일했다. 또한 1834년 캄보디아와 연합하여 시암(Siam)을 캄보디아 밖으로 축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강력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14 정벌로 거대하진 영토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베트남 역사상 가장 적극적인 중앙집권화 정책이 수행되었다.15
민망제는 유교와 중국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大南帝國秩序’로서 국가를 통치하고자 하였다.16 1838년, 민망제는 清과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호를 ‘越南(Việt Nam)’에서 ‘大南(Đại Nam)’으로 바꾸었다.17 물론 선대 자롱제 때부터 일찍이 稱帝建元하여 황제로 칭하고 연호를 사용했으며, 南郊壇을 皇城 남쪽에 건립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나, 이는 淸의 허락 하에 행한 일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18 그러나 자롱제가 건국 이전 西山(Tây Sơn) 정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도움을 얻고자 鄭懷德(Trịnh Hoài Đức, 1765-1825)을 如淸正使로 광둥에 보냈는데, 이처럼 청에 보낸 사절을 ‘여청사’라 칭한 사례에서 선대 때부터 이미 淸과 대등한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19 또한 민망제가 문예군주로 명성이 높던 淸 乾隆帝의 시어 수준이 낮음을 지적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20 스스로를 中國으로 칭하면서 태국과 같은 다른 국가를 오랑캐[夷狄]으로 취급했다고 한다.21 이러한 사례는 민망제가 중화사상의 계승자이며, 응우옌 황조의 국력과 문화적 자신감을 淸보다 크게 여겼음을 드러낸다.
민망제는 중앙집권화를 위하여 국가 이념으로 유학을 강조하여 권력을 강화하고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22 즉위한 후 國子監을 세우고 백성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7, 8세가 되면 『忠經』, 『孝經』, 『小學』, 『小學』 등 忠君孝親과 仁義禮智의 마음가짐을 키우는 것을 종지로 삼았다.23 몸소 『明命政要』를 저술하여 본인의 유교적 이념을 설파하였고,24 지배계층에게는 『朱子家禮』에 따른 가례와 가훈을 보급하였다.25 이는 응우옌 황조에서 문화와 인재 양성을 추진하는 촉매로 작용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 文廟(Văn Miếu)를 세우고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26 1834년에는 十條訓要를 반포했으며, 敦人倫, 崇正學, 慎法守의 條目에서 유교적 통치 질서의 강화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는 능묘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Ⅲ. 초기 응우옌 황릉 제도의 기원과 변화

1. 前代 응우옌 領主墓의 封陵

응우옌 황릉의 성립 과정에서 초대 황제 자롱이 건국 직후 1808년 선대 조상의 능묘를 수리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응우옌 황릉 이전에도 능묘가 조성되었으나 빈발한 전쟁으로 온전히 남아있는 사례가 드물며, 아직 베트남 내에서 전수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일부 현전하는 능묘와 석물을 살펴보면 중국에서 연원한 묘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27
자롱제는 順化의 유력가인 廣南阮氏의 후예로, 응우옌 왕조를 개창할 때부터 정통성을 廣南阮氏에서 찾았다.28 따라서 선대에 대한 추증이 이루어졌으며, 묘도 그에 걸맞게 封陵했다. 수리 및 봉릉한 영주릉은 총 21기에 달하며,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보성과 침전의 이원구조는 아직 없었으며, 단지 시신을 안치한 석곽을 중심으로 앞에 제단과 屛風砌을 차례로 두고, 이를 이중의 보성으로 보호했다.29 보성 높이는 영주릉 대부분 유사하며, 안쪽 담장의 높이보다 바깥쪽 담장의 높이가 높다. 보성 앞에는 문을 하나씩 두었고, 禁甎柱를 사방에 놓았다. 이 밖에도 능묘 내외에 각색의 나무를 심고, 능 앞쪽 강가에 위치한 계단 좌우에는 表杻을 두어 일반인이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표시했다.30
응우옌 영주릉 가운데 <長原陵>과 <基聖陵>, <瑞聖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03년 廣南阮氏의 선조인 烈祖 阮潢(Nguyễn Hoàng, r.1558-1613)과 靖皇后(Tĩnh Hoàng Hậu)의 묘가 오랜 내전으로 일찍이 파괴되어 재건을 시작하고, 1808년 능호를 <長原陵>이라 올렸다.31 중건 당시 <장원릉>의 이중 보성과 내부의 병풍석, 석곽의 모습은 다른 영주기 능과 동일하나, <장원릉>은 다른 능과 달리 碑亭과 石碑를 건립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후 1822년 이전보다 더 작은 크기의 석비를 세워 御製記銘을 새기고, 1843년 御製詩를 새긴 석비를 추가했다.32 선대 능묘에 대한 관심이 자롱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민망제와 紹治帝(Thiệu Trị, r.1841-1847)까지 이어졌고, 이는 역대 황제들이 응우옌 황조의 정통성 확립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지로 여겨진다.
자롱제의 부모인 興祖와 孝康皇后의 능묘인 <基聖陵>과 <瑞聖陵>에서도 영주릉 기본 구조에 변화가 있다. 1806년 興祖를 추존하며 수리, 1814년 <기성릉>을 다시 수리하는데,33 기존 영주릉의 ‘석곽-제단-병풍석-보성-금전주-표축’에 이어 2층의 拜庭과 동서로 부속건물 更衣堂과 神庫를 추가하였다.34 1812년 <서성릉>에서는 가운데에는 석곽을 넣은 石室을 두었고, 앞으로 3층의 배정에 돌계단을 3칸씩 두었다. 보성 왼편에는 <瑞星殿>을 영건하며 동서에 廡[곁채]를 세웠다. 보성과 침전을 陰瓦[암키와]와 陽瓦[수키와], 용 문양으로 장식하였으며, 능역 앞에는 방형의 호수를 두었다.35
응우옌 영주릉은 자롱제가 추존하고 봉릉한 것으로 본래의 형태를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록을 통해 석곽, 제단, 보성, 표축, 금전주를 공통적으로 갖추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응우옌 왕조의 창건자 자롱제의 부모 능묘에서는 다른 응우옌 영주릉에서 더욱 발전한 형태를 갖춘다. 1812년 <서성릉>을 축조하며 1806년 <기성릉>을 조성할 때보다 배정이 2칸에서 3칸으로 확대되었으며, 계단과 난간이 추가되고, 용으로 장식하여 墓보다 陵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보성과 침전을 나누어 영건하였으며, 현재 소실되었으나 <서성전>은 祭室의 기능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更衣堂과 神庫, 廡는 능묘의 기능이 강화되며 건설한 부속 건물로 짐작된다. 또한 석실에 석곽을 안치한 구조는 <천수릉>의 석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영주릉은 자롱이 추존하고 봉릉한 것으로 처음 세워졌을 당시 본래의 형태를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록을 통해 천수릉의 기본형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민망제의 <효릉>에서 중국 황제릉 제도와 결합하기 이전 황릉 제도의 기본 형태였다는 데에 의의를 둘 수 있다.

2. 민망제 이전 응우옌 황조의 陵制

1대 황제인 자롱제의 <천수릉>은 석곽, 제단, 보성, 표축, 금전주 등 응우옌 영주릉의 요소와 <기성릉>과 <서성릉>의 부속 건물과 보성 앞 배정, 屛風砌를 모두 갖추었다. 배정이 확대되고 神道와 石物이 추가되었으며,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지어진 寢殿과 능주의 행장을 기록한 비석을 둔 碑亭 영역을 병렬로 조성했다(Fig. 1).
1814년 承天高皇后가 먼저 사망함에 따라 자롱제는 그의 생전에 능역 조성을 시작하여36 왼편의 석곽에 승천고황후의 시신을 안치하였다.37 이후 1819년 2월 19일 자롱제가 5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38 5개월간의 장례절차를 거친 이후 1820년 4월 16일 자롱제를 예장하며 천수릉을 증축하였다.39 이후 1836년 月湖를 수리하고,40 1845년에는 나무로 만들었던 기존의 보성 문비를 법식에 의거하여 구리를 사용하여 다시 만드는 등 지속적인 수리 과정을 거쳤다.41
천수릉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가륭제와 승천고황후의 석곽이 좌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방형의 보성 내부의 석곽 앞에 제단이 있으며, 屛風砌로 모습을 가렸다. 2중의 보성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앞에는 7층의 배정이 있다.42 배정 앞 外廷 좌우에는 원변석형 넷, 시위석형 여섯, 석상과 석마가 각 둘씩 시립했다. 신도 뒤로 월호가 있으며, 半月山 앞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하여 돌로 쌓은 표주를 두었다.43 천수릉의 능묘 오른편에는 침전인 明成殿이 위치하였으며, 가륭제가 살아있었던 1814년에 건립되었다.44 안쪽에는 좌우에 3칸의 直房, 바깥쪽에는 좌우에 3칸의 곁채[廡]를 두었다.45 직방은 현재 소실되었으나, 복원 중에 있다. 천수릉의 능묘 왼편에는 神功聖德碑亭을 세웠으며, 비정 내부에 세워진 성덕신공비는 자롱제 사후 1820년 건립되었다.46 본래 글씨를 새기고 금으로 칠했으나 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47 비정 왼편에 地神인 后土地神을 모신 묘비석이 있다. 능역의 바깥쪽에는 금전주와 표축을 세워 일반인이 가까이하기를 금했다.
이러한 능역의 조성은 『大南會典事例』와 『大南寔錄』, 『大南一統志』 등의 사료를 통해 당시 능역의 위치, 구성, 조성 절차 등의 세부 구성을 파악할 수 있다. 천수릉은 선대 능역을 수리할 때 조성했던 석곽, 제단, 보성, 표축 그리고 금전주가 모두 나타나며, 나아가 <기성릉>과 <서성릉>에서 추가로 보여지는 부속 건물과 보성 앞 배정, 병풍체를 갖추었다. 그리고 침전과 비정 영역을 따로 두어 각 영역의 기능을 확대하였다. 이를 통해 선대 조상 능묘 수리의 경험이 이후의 황릉 능제 성립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민망제가 중국 황릉 제도와 결합하기 이전 기본 형태를 갖추었다는 데에 의의를 둘 수 있다.

Ⅳ. 陵制의 완성: 민망제의 <효릉>

1. <효릉>의 제도와 현황

1826년, 민망제는 일찍이 자신의 능지를 구하기 위해 여러 유명 사당에 金玉을 헌납하고 만년길지를 찾을 것을 명했다. 이들은 吉地를 찾아 그림으로 그려 민망제에게 바쳤고,48 마침내 1839년 黎文徳(Lê Văn Đức, 1793-1842)이 安憑邑 錦雞山을 가장 적합한 능지로 아뢰었다.49 민망제는 錦雞山을 孝山으로 이름하기를 유지내리고,50 鄧文和(Đặng Văn Hòa, 1791-1856)와 謝光巨(Tạ Quang Cự, 1770-1862)의 감독 아래 3개월 안에 공사를 완료하기를 하교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 4월, 민망제가 병을 앓기 시작하여 12월 19일 사망함에 따라 1841년 1월 20일 紹治帝(Thiệu Trị, 티에우치제, r. 1841-1847)가 즉위하고,51 능묘 조영을 옛 제도에 따라 이어갔다.52 같은 해 7월 9일, 티에우치제는 선황의 시신을 안장하고 능호를 ‘효릉’이라 올렸다.53
<효릉>의 능역은 보성, 침전, 비정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Fig. 2). 보성 구역은 시신을 안치한 보성, 연못, 橋脚, 三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효릉>에서는 과거의 황릉과 달리 석실 대신 봉분을 사용하고 봉분 아래 地宮을 두어 내부에 민망제의 보의를 안치하였고, 墳丘에 소나무를 조성하고 寶城을 둘러 보호하였다. 보성 앞 新月池에는 꽃 벽돌로 만든 난간으로 장식된 聰明正直橋를 세웠다. 다리 양 끝에 3문으로 된 방문을 세웠으며, 扁額에는 琺瑯 기법으로 연꽃이 늘어진 모습[蓮朵], 櫺星을 그리고 금으로 글씨를 썼다. 방문의 양 기둥에는 升龍과 降龍이 마주보는 모습이 시문되어 있다. 중앙 편액 앞쪽에는 ‘聰明正直’, 뒷판에는 ‘正大光明’이라 썼다.
수로를 따라 明樓로 이어지는데, 보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명루의 3층 계단을 오르내리도록 구성되었다. 명루 주변에 산을 인공적으로 조영하여 정면은 三才山, 좌측은 成山, 우측은 平山이라 이름짓고 각 산에 표주를 하나씩 세웠다. 벽돌로 쌓은 4면의 계단의 각 가운데에 3층의 臺를 만들고 지붕에 금보주를 안치했다.54
침전 구역에는 奉宸山의 중심에 황제와 황후의 위패를 모신 崇恩殿과 賢德門 안쪽 좌우에 從院, 바깥쪽 좌우 配殿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55 이후 명명제의 사적을 기리기 위한 神功碑가 모셔진 비정으로 이어진다. 신공비는 1841년 12월 15일에 세웠으며,56 비문에는 효릉의 주인공인 명명제의 생애와 업적에 관해 상세하게 기술하였다.57 비정 앞 外庭 좌우에는 금을 입힌 麒麟 2기, 원변석형 4기, 시위석형 6기, 석마 2기, 석상 2기가 시립했다.58
보성의 가장 바깥쪽으로 길이 2000m, 높이 3.6m의 외벽에 정문인 大紅門과 좌우로 左紅門과 右紅門이 자리한다.59 대홍문 밖 좌우에 돌로 만든 사자가 양 옆으로 마주보고 있다. 정가운데 屛風砌가 있는데, 황색으로 칠하고, 황유리와를 덮었다고 하나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있다. 황릉 세로축의 좌우에 釣魚亭, 迎凉館, 觀瀾所, 從房, 馴鹿軒, 神庫, 靈芳閣, 虛懷榭, 追思齋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60

2. 중국 황릉 제도의 수용과 베트남식 변용

1) 중국 황릉 제도의 수용

(1) 보성, 침전, 신도의 직렬화

1대 황제인 자롱제의 <천수릉>에서 확립된 보성과 침전, 비정 영역 구성은 2대 황제인 민망제의 <효릉>에서도 이어졌으나 전체 배치에서 큰 변화가 나타난다. <천수릉>은 <서성릉>을 계승하여 영주릉의 기본 능제에서 추가로 침전의 배정과 좌우에 벽돌 담장을 두르고 능 정면에 호수를 두었다. 또한 보성을 중앙에 두고 동서로 침전과 비정을 병렬로 배치하였으며, 계단을 확대하고 부속 건물을 두어 보성, 침전, 비정의 각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와 달리 <효릉>에서는 보성, 침전, 비정이 일직선으로 배치하여 직렬화되어 있다. 나아가 능역을 확대하여 인공산과 인공호수, 부속 건물을 축의 좌우로 배열하였고, 주변 지형물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러한 직렬형 배열은 앞선 시기 능묘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의 묘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흔적으로 여겨진다. 중국에서 산릉제도에 대한 문헌규정은 송대부터 찾아볼 수 있으며,61 唐, 宋, 明, 淸 모두 보정부터 신도까지 직렬형 배치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효릉>의 구성요소 및 배치는 明과 淸의 능침제도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Fig. 3).
<효릉> 이후의 응우옌 황릉에서도 직렬형 능역이 이어진다. 3대 황제 티에우치제의 <昌陵>에서도 신도를 중심으로 한 직렬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침전을 보성의 동쪽에 배치하였고 새로운 건축물인 靈星門이 있다는 차이를 제외하면 세부 건물과 위치가 전반적으로 <효릉>과 유사하다(Fig. 4). 이는 민망제를 이어 유교를 국시로 삼았으며, 효릉을 참고해 능역을 조성할 것을 하교한 티에우치제의 유훈을 따른 결과로 여겨진다.62 이후 4대 嗣德帝(Tự Đức, 뜨득제, r. 1847-1883)의 <謙陵>과 <겸릉> 능역 내에 위치한 建福帝(Kiến Phúc, 끼엔푹, r. 1883-1884)의 <陪陵> 역시 직렬형 능역이며, 9대 同慶帝(Đồng Khánh, 동카인, r. 1885-1888)의 <思陵>과 12대 啓定帝(Khải định, 카이딘제, r. 1916-1925)의 <應陵>에서도 직렬형 능역이 유지된다.

(2) 중국식 명칭과 구조물

<효릉>의 능제가 중국의 어떤 시기의 산릉제도를 도입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효릉>과 중국 산릉제도를 비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본 항에서는 효릉의 건축물 중 寶城과 地宮, 明樓, 神功聖德碑 등의 명칭과 활용을 통해 중국 능제의 유입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가. 寶城과 地宮

응우옌 황조 이전부터 베트남에서 전통적으로 봉분을 쌓아 피장자를 매장했는지는 현재까지 알려진 물질 자료가 영성하여 단언할 수 없으나, 다만 1839년 민망제와 신하와의 대화에서 대남 이전 왕조의 묘제와 관련한 단초를 엿볼 수 있다. 『大南寔錄』 기사에서 黎(레, Lê) 왕조의 분묘는 봉분과 나무가 없으며, 후대 사람도 능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음을 언급하였다.63 따라서 봉분을 만들고 지하에 피장자를 매장하는 것은 베트남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의례가 아니었음을 간접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수릉>이 지면에 석곽을 노출하여 매장하였다면, <효릉>은 石室 대신 地宮을 두어 보의를 안치하고, 封墳을 쌓아 墳丘에 소나무를 심어 寶城을 둘러 보호하였다(Fig. 5). 중국 황릉에서 寶城이 조성된 것은 明 永樂帝의 長陵에서부터로 기록되며,64 淸 山陵을 영건하는 과정에서는 地宮과 寶城이 등장한다.65 따라서 과거의 선례를 깨고 보성과 지궁을 만들고 봉분을 사용한 것은 민망제가 새로 제정한 능침제도에서 기인하며, 이는 중국 황릉 제도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와 함께 새로운 의례 역시 행해졌는데, 淸明節 전날 <효릉>에서 敷土禮[負土禮]를 행하며 봉분의 흙을 새로 다지는 의식은 중국 황릉에서 행하던 의례 요소를 따른 것이다.66
이후 <겸릉>, <사릉>, <응릉>에서 봉분 대신 이전의 석곽으로 회귀하였지만, 시신을 안치한 석곽 주변을 寶城이라 명칭한 것은 유지되었다.

나. 明樓

중국 황릉에서 明樓는 明代에 등장한다.67 당, 송대에는 성채의 형태였으나 명대에 와서 이를 없애고 단순화했으며, 명대에는 明樓, 淸代에는 崇樓라 칭했다.68 明 永樂帝 <長陵>을 살펴보면 보성 위에 명루를 올렸으며, 내부에 陵表石이 건립되어 있다. 반면 <효릉>에서는 보성과 명루가 별도의 건축물로 건립되어 있으며, 명루 내에 아무것도 건립하지 않았다(Fig. 6). <효릉> 외 다른 응우옌 황릉을 살펴보면, <창릉>과 <겸릉>, <사릉>의 보성 앞에 명루터가 동일하게 남아있다. 이를 통해 <효릉>의 제도가 응우옌 황릉에서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변용은 응우옌 황릉이 일방적으로 중국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중국 능제의 수용과 베트남식으로의 변용으로 주목할 수 있다.

2) 능제의 베트남식 변용

민망제는 중국의 능제를 온전히 수용한 것이 아니라 베트남식으로 변용하였고, 이것은 후대 황릉에 계승되었다. 중국 능침과 달리 <효릉>에서는 진입문인 대홍문을 중심으로 신도를 지나 비정의 순서로 건립되었다. 명대 황릉의 경우 대홍문에서 비정을 거쳐 신도로 이어지는 능역을 구성하고 있어 중국과 베트남의 능역은 배치 순서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침전 명칭을 살펴보면, 明은 모두 祾恩殿으로, 淸은 隆恩殿으로 침전의 명칭이 동일하다. 그러나 베트남 응우옌 황릉에서는 <천수릉>은 明成殿, <효릉>은 崇恩殿, <창릉>은 表德殿, <겸릉>은 良謙殿, <思陵>은 凝禧殿, <應陵>은 啟成殿이라 하여 각 능마다 침전의 명칭을 다르게 사용하였다. 아래에서는 베트남식 변용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명구와 시문, 길상문의 장식과 능역 내 인공산과 인공호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명구와 시문, 길상문의 게시

중국 명청 황릉에서는 비석과 현판을 제외하고는 문자를 찾아볼 수 없으나, 베트남 황릉에서는 다양한 명구와 시문, 길상문이 설치되어 있다. <효릉>의 침전, 비정, 보정 앞 방문 등 곳곳에 명문와 시구를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하였다. 침전의 용마루와 외벽, 비정의 외벽에는 자신이 문예군주임을 자부했던 민망제가 직접 지은 시구로 장식했으며, 보성 앞 방문의 3문 중앙 扁額에는 정면에는 聰明正直, 후면에는 正大光明이라 시문했다. ‘총명정직’은 孔子의 역사서 『春秋』의 대표적인 주석서인 『春秋左氏傳』에 등장하며,69 ‘정대광명’은 宋代 朱熹의 『朱文公文集』에서 따온 성어이다.70
또한 황릉에 기쁨을 뜻하는 ‘囍’, ‘喜’, 장수를 뜻하는 ‘壽’, 복을 뜻하는 ‘福’과 같은 글자를 황릉 건축물 전반에 걸쳐 새겨놓았고, 문자뿐 아니라 다양한 문양을 망자를 추모하는 황릉에 다수 사용한 것도 응우옌 황릉의 특징이다. <효릉>의 비각과 침전 외벽에 시문과 함께 중앙에 고동기를 배치하였으며, 좌우로 묵죽화와 화병, 두루말이[橫卷], 복숭아, 連環, 박쥐로 장식하였다.(Fig. 7) 침전 賢德門에는 상단에 시문과 함께 經卷, 박쥐, 천도복숭아, 파초선과 七寶로 장식하였고, 하단에는 다람쥐와 잉어, 포도와 같은 多産의 상징을 배치하였다(Fig. 8). 보성 앞 방문 중앙에는 부채와 비파를 좌우대칭으로 그려놓고 좌우에는 珠鈴 등을 그려넣었다(Fig. 9).
이후 <겸릉>에서도 비각과 같은 건물 외벽을 황제의 시문으로 장식했으며, <응릉>에서는 길게 뻗은 주련 형태로 계승되었다.71 또한 채색기법은 물론 유리와 자기, 법랑, 콘크리트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장엄하는 전통이 계승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효릉>에서부터 시작된 응우옌 황릉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 인공산과 인공연못의 조영

<효릉>에서부터 강에 가까운 곳에 萬年吉地를 택하고 인공으로 산과 호수를 조영하였으며, 垓子와 같이 보성 주변을 물길로 다시 둘러 물을 강조하고, 산 이름을 붙여 비석을 세웠다. 인공산은 실제 산이라고 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이지만, 風水를 통해 황릉을 명당으로 만들려는 의미로 여겨진다.
이러한 특징은 <창릉>에서도 반복되어 보성과 침전 앞에 月湖가 나란히 조영되며, <겸릉>에 이르러서는 정자, 수상가옥, 인공섬을 조영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Fig. 10). 이를 통해 망자의 공간인 능역의 엄숙함을 넘어 생과 사가 함께 드러나게 되는데, 이처럼 능역에 물을 끌어들여 호수를 만드는 방식은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베트남 특유의 조영법이다.
명청 황릉과 조선왕릉은 능역지 선정 과정에서 물이 시신을 해하지 않도록 관서를 설치하고 상설제도를 갖추어 택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도 화성 만년제의 괴성과 하수문지가 발견되고,72 동구릉 내 연지 발굴조사를 통해 기존 인식과 달리 능의 풍수에서 물을 다양하게 활용했음이 밝혀졌다.73 베트남과 중국, 한국의 능묘에서 明堂水라는 개념은 유사하지만 응우옌 황릉은 능역에 큰 연못이 있고, 능역 안에 작은 산을 조영한 것은 베트남의 독자성이라고 할 수 있다.

Ⅴ. 맺음말

베트남 역사 이래 가장 큰 영역이 한 정권 아래 지배되기 시작한 응우옌 왕조는 지역 갈등 해소와 국가 통합이라는 과제에 직면했다.74 초대 황제 자롱제는 떠이썬 왕조가 흐트러트린 문화 세계를 베트남을 응우옌 황조가 재건하였음을 천명하며 국가적 통합을 꾀했으며, 참파와 시암을 통제 하에 두며 국가가 더욱 확장된 민망제 집권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응우옌 황조는 유학에 근거한 예제를 기초로 사회질서를 유지하였고, 중국식 통치 체제의 도입은 황릉 제도에서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응우옌 황릉의 제도는 자롱제가 구축한 응우옌 영주릉과 <천수릉>에서 민망제의 <효릉>으로의 발전과정을 통해 초기 왕릉에서 황릉으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또한 <효릉>과 중국 능제와의 비교를 통해 응우옌 황릉의 독자적인 특징이 드러난다. 1대 황제 자롱제가 수리, 봉릉한 응우옌 영주묘는 석곽과 제단, 병풍체, 이중 보성, 표축 그리고 금전주를 배치한 단순한 형태였다. 자롱제의 <천수릉>에서는 보성의 좌우로 침전과 비정을 두어 영역을 확대하고 추가 부속 건물과 배정을 두어 황릉의 기본 형태를 갖추었다. 민망제의 <효릉>에서는 세로축을 기준으로 보성과 침전, 비정이 신도를 중심으로 직렬화되었다. 또한 석곽 대신 봉분을 쌓아 보성을 두르는 제도가 효릉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건축물의 명칭, 명루의 변형, 황릉 내 건축물의 배치 순서 등을 통해 단순한 유입이 아닌 능제를 베트남식으로 변용하여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 조선의 황릉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명구와 시문, 길상문을 능역 전반에 장식하였으며, 인공산과 인공호수를 조영하여 풍수지리적 이해와 함께 베트남 능묘의 독자적인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응우옌 황조는 프랑스 식민 지배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황릉 건립을 면면히 이어왔으며, 유교와 그 예법에 따라 조영되었다. 응우옌 황릉은 다른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베트남만의 고유한 문화적 소산으로, 앞으로 응우옌 황릉에 대한 주목과 더불어 황릉과 석물에 대한 동아시아 내에서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

Notes

1)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https://whc.unesco.org/en/list/678)

2) 1914년부터 1944년까지 프랑스 <Association des Amis du Vieux Hué> 협회에 의해 『Bulletin des Amis du Vieux Hué』가 발행되어 9,000장의 이미지와 13,000장 이상의 텍스트를 출간하였다. (https://www.aavh.org/)

3) 응우옌 황조기 “위대한 예술은 없다.”고 단언하며, “장식 예술에 불과하다.”고 전한다. (L. Cadière, L'Art à Hué, London: Forgotten Books, 2018, pp. 10-36.) 또한 “19세기 후에의 궁정 예술은 퇴보되었고, 경직된 양식으로 예술이 아니다”라 평한다. Ed Castagnol, Sculptures en funéraires pierre des sites annamites Bulletins et travaux pour 1939, Tome 2, fascicule 2, 1939, pp. 243-245.

4) 후에의 시각 예술은 ‘낙후(lạc hậu)’되었으며, 특히 석조물은 중국을 흉내 낸 가치 없는 예술이라 평가하였다. (Nguyễn Phi Hoành, Lược sử mỹthuật Việt Nam, Hồ Chí Minh: Khoa Học Xã Hội, 1970, pp. 119-130; Nguyễn Phước Hải Trang, Huế xưa tìm lại, Hà Nội: Hội Nhà Văn Việt Nam, 2012, pp. 7-17.)

5) 도이머이(Đổi mới)란 ‘쇄신’이라는 뜻으로 1986년 사회 모든 부분에 걸친 개혁 정책을 말하며, 특히 경제 개혁 정책을 위해 이루어졌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외국과의 관계가 개방되며 다채롭고 다양한 예술 활동이 이루어졌다.

6) Alexander Woodside, Vietnam and the Chinese Model: a comparative study of Vietnamese and Chinese government in the first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Harvard, 1988; Nola Cooke, Nineteenth-Century Vietnamese Confucianization in Historical Perspective: Evidence from the Palace Examinations (1463-1883),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 25-2, 1994.

7) Hue City, Management Plan of the Complex of Hue Monuments: for the period 2015-2020, vision 2030, 2015.

8) 나카가와 타케시(中川武)가 주도한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과의 1995-2011년 장기간의 현지조사와 연구를 통해 후에의 도시 복원에 초점을 맞춘 160여 편의 연구가 출간되었다.

9) 간사이대학(関西大学) 문화교역연구소(文化交渉学研究拠点, Institute for Cultural Interaction Studies, Kansai University, ICIS)의 시노하라 히로카타(篠原啓方)는 2012년 응우옌 황릉과 관련한 연구를 출간하였고, 베트남 석학 판 탄 하이(Phan Thanh Hải)와 함께 황릉에 관한 독자적인 연구를 시도하였다.

10) 2006년 한국 문화재청은 베트남의 관계 기관과의 교류 협력 약정을 맺고, 주한 베트남 대사관과 Hue Monuments Conservation Centre(H.M.C.C)의 후원을 받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베트남 마지막 황실의 보물> 특별전을 개최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베트남 마지막 황실의 보물』, 2010.)

11) 2006년 착수한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 연구 사업에서는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 베트남, 중국의 능에 대한 연구사 검토와 제도적 기원, 주변국 능묘와의 비교 등 조선 왕릉과 연관된 다양한 문제를 연구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동아시아의 릉』 2017. ; 흰낫비, 「베트남 원조시대(阮朝時代) 왕릉과 조선왕릉의 비교」, pp. 356-361.)

12) 「孝陵神功碑文」, “嘉隆十五年, 冊立爲皇太子, 時嘉定河清, 上下數百餘里.”

13) 『大南寔錄』 「正編」 列傳, 初集 第2紀 卷1 [34]1452, “庚辰明命元年(淸嘉隆二十五年)春正月戊五朔 帝卽皇帝位….”

14) David P. Chandler, A History of Cambodia (Colorado: Westview Press, 2008), pp. 149-150.

15)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편, 『중국 없는 중화: 동아시아한국학 연구총서 1』(인하대학교 출판부, 2009) p. 171.

16) 유인선, 「베트남 阮朝의 성립과 ‘大南’ 帝國秩序」, 『아시아문화』 10(1994, 12), pp. 81-87.

17) 『大南寔錄』 「正編」 第2紀 卷190 [315]4229-[316]4230, “明命十九年… 是準嗣後國號宜稱爲大南國.”

18) 『清仁宗實錄』 卷12 道光元年 正月 十五日, “○諭軍機大臣等, 據趙慎畛奏, 越南國嗣阮福晈因奉到仁宗睿皇帝遺詔. 擬請遣使齎遞表文品儀. 來京進香. 又齎遞表文方物. 慶賀登極. 並呈進辛巳年例貢等語. 越南國備列藩封. 虔修職貢. 今該國嗣阮福皎以接奉.”

19) 유인선,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양국 관계의 어제와 오늘』(창비, 2012), p. 257.

20) 『大南寔錄』 「正編」 第1紀, 卷159 葉29b, “帝嘗從容與侍臣論詩曰, 大清乾隆所製詩什甚多, 我觀之皆是直寫情景, 不事雕琢浮辭, 然多有粗字者.”

21) 『大南寔錄』, 正編 第1紀, 卷26, 22a, “帝諭曰, 中國之於外夷治以不治….”, 『大南寔錄』, 正編 第1紀, 卷38, 12a, “帝召羣臣議諭曰,暹與我好於義 不可不救. 但步兵從上道千溪萬嶺跋涉艱勞, 朕不忍驅中國之兵 以爲遠人役也.”, 『大南寔錄』, 正編 第1紀, 卷44, 19a, “帝謂羣臣曰, 暹人辭遁 詐可知也. 然中國之於夷狄. 但當待以至誠數日召暹使也.”

22) 유학뿐 아니라 ‘베트남의 전통’을 만들기 위한 여러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일환 중 하나로, 『嶺南摭怪列傳』의 增補가 이루어져 『大南寔錄』에 언급되었고, 베트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역할을 하였다. (Victor H Mair, Liam C. Kelly, Imperial China and Its Southern Neighbours (Singapore: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5), pp.161-193)

23) 何成軒, 『중국 유학의 남방 전파』(계명대학교 출판부, 2005), p. 448.

24) 국립고궁박물관, 『베트남 마지막 황실의 보물』(국립고궁박물관, 2010), p. 87.

25) Alexsander B. Woodside, Vietnam and the Chinese Model (Cambridge: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Harvard, 1971), pp.38-41.

26) 何成軒 著, 홍승표 역, 『중국 유학과 남방 전파』(계명대학교 출판부, 2005), pp. 444-460; Ly Tung Hieu, “Confucian Influences on Vietnamese Culture”, Vietnam Social Sciences 5, (2015), pp. 71-81 참고.

27) 吳(Ngô), 丁(Đinh), 前黎(Tiền Lê), 李(Lý), 莫(Mạc) 그리고 後黎(Hậu Lê)의 능묘에 관한 간략한 내용은 김지혜, 「베트남 응우옌(阮) 황조의 전기 황릉 연구: 효릉(孝陵)을 중심으로」(서강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9). pp. 12-17 참고.

28) 「天授陵御製聖德神功碑文」, “洪惟我太祖皇帝, 肇基王迹, 列聖相承, 垂二百載.”

29) 예외적으로 기성릉은 제단이 석곽의 뒤에 위치하며, 석곽과 병풍석이 붙어있다. 또한 병풍석이 석곽 앞뒤로 2기 있다. 그러나 석곽 뒤쪽의 병풍석과 제단은 각각 분리되어 있으며, 병풍석의 부조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제단이 붙어있다. 따라서 이는 단순히 현대에 기성릉을 복원하며 일어난 실수로 추정된다.

30)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2a “恭照諸尊陵 四旁竝列以界禁甎柱 基禁限. 內外 植以各色木. 前面江岸 表杻 甎砌左右各一竝同.”

31)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15a, “長原陵 ○嘉隆七年 恭上陵號….”

32)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1a-2a, “奉 聖祖仁皇帝 御製記銘勒石. 又亭一 … 內石碑一 …奉 聖祖仁皇帝 御製記銘勒石.”

33)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15a “嘉隆七年 修理 長基陵….”

34)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5b “興祖 孝康皇帝 陵號 基聖陵. 在承天府 興業山. 寶城 高六尺三寸, 周圍二十八丈.磚砌前闢門一. 又前爲 二級 拜庭, 左右欄楯, 東爲更衣堂 西爲神庫 各三間.”

35)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6a-b “孝康皇后 陵號 瑞聖陵. … 寶城 …… 又前爲 三級 拜庭, 每級 石陛三. 龍虬欄六, 左右磚牆, 前爲方湖. 左爲瑞星殿, 正脊 三間, 前脊 五閒 重梁 重簷 龍吻覆平瓦. 石階 石陛 前 三陛 陛三級, 龍虬欄楯. 又東西廡 各三間. 前爲殿門 三間 二層 覆陰陽瓦. 基面列右內外 石階 石陛 內 二級 外五級 龍楯周圍繚牆.”

36)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19a-20a, “天授陵 嘉隆十三年 勅建 天授陵 其右 奉 承天高皇后 寶衣之藏.”

37) 「天授陵御製聖德神功碑文」, “其右奉我皇妣高皇后寶衣之藏, 左則壽陵也.”, 『事例』 卷216 葉20a, “天授陵 其右奉 承天高皇后 寶衣之藏.”

38) 「天授陵御製聖德神功碑文」, “越十八年己卯十二月丁未, 駕崩, 聖壽五十有八.”

39) 「天授陵御製聖德神功碑文」, “今年庚辰四月辛丑, 山陵禮成.”

40)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20a, “(明命)十七年 修理天授陵前湖岸.”

41)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20a-b, “紹治五年 諭天授陵寶城門扉 年前製用木質 玆著依式 製用銅質 天授右陵.”

42)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6b-7a, “世祖高皇帝 承天高皇后 陵號 天授陵 在承天府 定門社山分. 寶城 內重 高七尺五寸, 周圍二十二丈. 中砌石室二. 外重 高八尺三寸, 周圍二十九丈八尺二寸. 前砌 石門 銅扉. 陛五級, 左右龍欄用石爲. 前爲七級拜庭砌, 以山石, 中爲石甬道. 每級 有石陛三. 龍虬欄六, 左右磚牆.”

43)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6b-7a, “拜庭 前爲 外庭 列 鐵磚 左右侍立 員弁石形四 侍衛石形六 石象馬各二. 又 爲月湖 又前爲半月出上左右 磚砌 表柱各一. 又半月山前爲.”

44)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20a, “天授陵 … 建 寢殿 于其右 號 明成殿.”

45) 타케무라 모토이(竹村基)는 直房과 廡를 혼용하여 모두 配殿으로 표기하였으나, 『大南會典事例』에서는 별개로 다루어 이에 준한다. (竹村基, 中川武, 中沢信一郎, 「天授陵·孝陵·昌陵の配置計画: ヴィエトナム·フエ·阮朝王宮の復原的研究」, 『日本建築学会関東支部研究報告集Ⅱ』 72(2002, 2), p. 522).

46) 「天授陵聖德神功碑文」, “功碑時明命元年七月丙辰日也.”

47)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7b, “靑山. 上建 神功聖德碑亭 一間. 重簷 覆以平瓦, 周以繚牆. 前砌磚陛 九級 左右龍欄. 內 石碑一, 高七尺 橫三尺八寸 趺長四尺七寸, 高二尺. 碑字湘金.”

48)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20b, “明命七年 諭準 文武廷臣 帶同欽天監 前赴定門. 金玉各社山分 預擇萬年吉地. 繪圖進呈.”

49) 확정되기 이전의 능지 후보에 관해서는 Mai Khắc Ứng, Le mausolée de l'empereur Minh Mạng (Hà Nội: Société des historiens vietnamiens, 1993), pp. 152-155 참고.

50)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23b, “(明命)二十一年廷臣遵奉相擇萬年吉地一局 在安憑邑分之 錦雞山繪圖 呈進奉旨安憑邑之 錦雞山著攺名爲孝山.”

51) 「昌陵神功碑文」, “(明命)二十一年庚子冬十二月二十八日, 恭受遺命. 越明年辛丑正月二十日, 卽皇帝位, 建元紹治.”

52) 「孝陵御製聖德神功碑文」, “以紹治元年秋七月初九日戊戌時, 奉安梓宮, 用隧禮, 古制也.”

53) 「孝陵御製聖德神功碑文」, “…奉尊上陵號, 曰孝陵”, 『大南一統志』 卷1 「山陵」, “紹治元年 上陵名曰 孝陵.”

54)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9a-b, “前爲 三才山 單稱, 於左爲成山, 右爲平山, 竪以 表柱. 磚砌各一中爲三層臺, 四面石級, 龍欄花 磚欄. 渠上建 明樓. 三間二層. 頂安金寶珠, 覆黃琉璃瓦. 基列花磚 石階 石陛. 陛四出皆三級, 龍虬欄楯.”

55)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9b-10a, “前正中 爲 奉宸山, 山上建 崇恩殿. 正脊五間, 前脊七間, 重梁 重簷 承榮 龍吻. 頂安琺瑯 金料壺. 覆黃琉璃瓦, 基列花磚, 石階石陛, 前三陛 皆四級, 龍虬欄楯. 庭列鐵磚 石甬道 左右 限牆. 月門 各一 內爲左右從院, 外爲東西配殿. 各三門四圍, 繚牆前後 闢門各一. 後爲 弘澤門 前爲顯德門. 崇恩殿前面及 顯德門 皆朱漆 金銀湘飾. 門外爲 三級拜庭 列鐵磚 石甬道 每級 有石陛三, 龍虬欄六, 左右花磚欄杆, 進前數百武 正中砌重臺, 內外石陛龍欄周以花磚欄堞.”

56) 「孝陵御製聖德神功碑文」, “時紹治元年十二月十五日也. 謹拜手稽首, 敍而銘曰.”

57)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10a-b, “進前數百武 正中砌重臺, 內外石陛龍欄周以花磚欄堞. 上建 神功聖德碑亭, 一間 重簷, 覆黃琉璃瓦. 基列花磚, 前後石陛各一, 皆三級左右龍欄. 內石碑一. 身高七尺二寸, 橫三尺三寸 趺長四尺九寸 高二尺七寸. 碑字湘金”

58) 『大南會典事例』 卷216 葉10b, “前爲外庭 列鐵磚 左右侍立 金湘麒麟二 員弁石形四 侍衛石形六 石馬二 石象二.”

59) Phan Thanh Hải, 西村昌也 역, 「フエ·阮朝期の皇族の陵墓について」, 『周縁の文化交渉学シリーズ3 『陵墓からみた東アジア諸国の位相―朝鮮王陵とその周縁』 』(2011, 12), pp. 138-139.

60) 국립문화재연구소, 『동아시아의 릉』(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p. 363.

61) 『宋會要輯稿』 禮32, “太常禮院言准詔同司天監詳定山陵制度”

62) 「昌陵聖德神功碑文」, “皇考遺命, 山陵不得多費財力, 玉音在耳. 小子曷敢有越厥志. 謹遵成命, 奉于香水南之順道山, 營建玄宮隧道, 一遵孝陵規制.”

63) 『大南寔錄』 「正編」 第2紀, 卷299, 명명20년 2월 22일, “朕聞, 故黎墳墓 不封 不樹 不欲後人知葬處.”

64) 『大明會典』 卷203, 工部23, “寶城 惟長陵最大 經一百一丈八尺….”

65) 『淸文獻通考』 卷152, 王禮考, “…吉壤工部營治山陵. 其制 甃石爲 地宮築以黃土, 環以寶城.”, 『欽定大淸會典』 卷76, 工部, “凡山陵規制, 甃石爲地宮, 築以黃土, 環以寶城.”

66) 『大南寔錄』 「正編」 第3紀 卷29, 소치3년 3월 6일, “孝陵行敷土禮再展謁, 孝東陵禮成回鑾.”

67) 『大明會典』 卷203, 工部23, “明樓 有靈寢門 惟永陵中爲券門左右墻門各一.”

68) 『淸文獻通考』 卷152, 王禮考, “前起方城, 覆以崇樓. 上題陵名內碑一, 鐫廟號.”

69) 『春秋左氏傳』, 「庄公」 三十二年, “…听于神, 神聪明正直而壹者也.”

70) 『朱文公文集』, 卷38, 「答周益公」, “至若範公之心,則其正大光明,固無宿怨,而惓惓之義,實在國家.”

71) ファン·タイン ハイ, 西村昌也, 新江俊彦, 「フエ·阮朝期の皇族の陵墓について」, 『周縁の文化交渉学シリーズ3 『陵墓からみた東アジア諸国の位相―朝鮮王陵とその周縁』, 2011, p.146.

72) 화성시·경기문화재단, 『만년제 복원·정비계획 보고서 2: 만년제 2차 시·발굴조사』(화성시·경기문화재단, 2012), pp. 13-137.

73) 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 『구리시 동구릉(숭릉) 연지 정비를 위한 문화재 발굴(시굴)조사』(동서종합문화재연구원, 2014), pp. 7-54.

74) 최병욱, 『동남아시아 -전통시대』(산인, 2006), p. 195.

Fig. 1.
<천수릉>의 구조, Structure of Thien Tho Mausoleum, Nguyen dynasty (Drawing by Kim, Ji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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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효릉>의 구조, Structure of Hieu Mausoleum, Nguyen dynasty (Drawing by Kim, Ji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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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明 <長陵>과 淸 <景陵>의 구조, Structure of Chang Imperial Tomb of Ming Dynasty and Jing Imperial Tomb of Qing Dynasty (Illustration from 帝王陵寢建築, p.69 (left), 大淸皇陵秘史, p.99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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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효릉>과 <明十三陵> 건축물 비교, Comparison of buildings between Hieu Mausoleum (Left) and Ming Dynasty Tombs (Right) (Drawing by Kim, Jihye (left), Illustration from 明朝十九陵, p.65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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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Left) <천수릉>의 石槨, Stone coffin of Thien Tho Mausoleum (Photo by Kim JiHye).
(Right) <효릉>의 封墳, Tumulus of Hieu Mausoleum (Photo by Kim Ji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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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효릉>과 淸 乾隆帝 <裕陵>의 明樓 비교, Comparison of Soul Tower between Hieu Mausoleum and Yu Imperial Tomb of Qing Dynasty. (Left) <효릉>의 明樓, Soul Tower of Hieu Mausoleum (Photo by Kim JiHye). (Right) 淸 <裕陵>의 明樓, Soul Tower of Yu Imperial Tomb of Qing Dynasty (Photo by Kim, Ming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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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효릉> 碑亭 외벽의 시문과 길상문, Poetry and Lucky omen pattern on the outer wall of pavilion housing a stele in Hieu Mausoleum (Photo by Kim Ji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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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효릉> 寢殿 현덕문의 시문과 길상문, Poetry and Lucky omen pattern on hyeon-deog-mun in the Bed Room of Hieu Mausoleum (Photo by Kim Ji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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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孝陵> 坊門 중앙의 ‘正大光明’ 명구와 부채, 비파, Famous phrase and folding fan, Chinese lute at the center of the Hieu Mausoleum door (Photo by Kim Ji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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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謙陵>의 구조, Structure of Kiem Mausoleum (Transformation of Google Map, Drawing by Lim, Mook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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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응우옌 황조의 황제와 능호, Emperors Imperial Tombs of the Nguyen Dynasty
연번 재위기간(음력) 연호 묘호 능호
1 1802.05.01.~1819.12.19. 자롱 (Gia Long, 嘉隆) 세조 (Thế Tổ, 世祖) 천수릉 (Lăng Thiên Thọ, 天授陵)
2 1820.01.01.~1840.12.28. 민망 (Minh Mạng, 明命) 성조 (Thánh Tổ, 聖祖) 효릉 (Hiếu Lăng, 孝陵)
3 1841.01.20.~1847.09.17. 티에우찌 (Thiệu Trị, 紹治) 헌조 (Hiến Tổ, 憲祖) 창릉 (Xương Lăng, 昌陵)
4 1847.09.17.~1883.06.16. 뜨득 (Tự Đức, 嗣德) 익종 (Dực Tông, 翼宗) 겸릉 (Khiêm Lăng, 謙陵)
5 1883.06.17.~1883.06.20. 죽득 (Dục Đức, 育德) 공종 (Cung Tông, 恭宗) 안릉 (An Lăng, 安陵)
6 1883.06.27.~1883.10.30. 히엡호아 (Hiệp Hòa, 協和) - -
7 1883.11.03.~1884.06.10. 끼엔푹 (Kiến Phúc, 建福) 간종 (Giản Tông, 簡宗) 배릉 (Bồi Lăng, 陪陵)
8 1884.06.12.~1885.08.11. 함응이 (Hàm Nghi, 咸宜) - 프랑스 토낙(Thonac) 묘지
9 1885.08.11.~1888.12.17. 동카인 (Đồng Khánh, 同慶) 경종 (Cảnh Tông, 景宗) 사릉 (Tư Lăng, 思陵)
10 1889.01.03.~1907.07.26. 타인타이 (Thành Thái, 成泰) - -
11 1907.07.28.~1916.04.05. 주이떤 (Duy Tân, 維新) - -
12 1916.04.17.~1925.09.20. 카이딘 (Khải Định, 啓定) 홍종 (Hoằng Tông, 弘宗) 응릉 (Ứng Lăng, 應陵)
13 1925.09.20.~1945.07.23. 바오다이 (Bảo Đại, 保大) - 프랑스 빠씨(Passy) 묘지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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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南一統志』.

『大南會典事例』.

『朱文公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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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陵聖德神功碑文』.

『天授陵御製聖德神功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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