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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09; 2021 > Article
소식(蘇軾, 1037-1101)의 회화론과 근대기 중국미술사

Abstract

20세기 초의 중국에서는 서구로부터 미술사라는 학문이 도입됨에 따라 중국회화사 관련 논저의 편찬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시기 미술사학자 가운데 텅구(滕固, 1901-1941)는 현대적 의미의 중국미술사를 선구적으로 저술한 인물이다. 본 논문은 텅구의 글 「미술평론가로서의 소동파(Su Tung P’o als Kunstkritiker)」(1932)를 분석하여 그가 중국회화사에서의 소식(蘇軾, 호는 東坡居士, 1037-1101)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이를 통하여 텅구가 ‘근대적 주체’로서 중국회화사를 어떻게 정립하려 하였는지도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근대기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비판과 옹호가 공존하며 미술계에서도 문인화에 대한 재평가가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미술사가 서술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에 문인화의 개념을 태동시킨 인물인 소식의 회화관을 깊이 있게 다룬 사례는 드물다. 이러한 점에서 이글은 중국회화사를 보는 텅구의 통찰력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소식의 회화관에 대한 텅구의 새로운 해석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텅구는 동시기 서구의 사조인 감정이입설, 미술평론가라는 개념, 유미주의 등을 대입하여 소식을 재평가함으로써 서구의 보편적 미술사라는 범주에 중국회화사를 이입시키려 하였다. 이는 전통의 수호와 서구화의 추진이라는 근대기 동아시아 지식인의 양가적(兩價的) 가치관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Abstract

In early 20th century China, the publications on the history of Chinese painting burgeoned with the introduction of the field of art history from the West. Teng Gu (滕固, 1901-1941), among other Chinese art historians of this era, played a pioneering role in writing the history of Chinese art from a modern perspective. This paper carefully examines Teng Gu’s “Su Tung P’o als Kunstkritiker” (1932) to bring to light his interpretation of the significance of Su Shi (蘇軾, 1037-1101) in the history of Chinese painting. Through this, it will also be possible to understand how Teng Gu, as ‘a modern subject,’ tried to establish the history of Chinese painting.
In modern times, the criticism and advocacy of traditional culture coexisted in China, and accordingly the literati paintings were also reevaluated in the art world. Su Shi’s writings, however, was rarely studied despite his contribution in establishing the concept of literati painting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this respect, the Teng Gu’s text is notable in that it not only recognizes Su Shi’s insight into the history of Chinese painting but also provides a new interpretation of Su Shi’s role in the history of Chinese painting. By reexamining Su Shi’s work through the lens of contemporary Western thoughts, including the theory of empathy, art criticism, and aestheticism, Teng Gu aimed to incorporate the history of Chinese painting into the “universal scope of Western art history.” The undertaking of Teng Gu distinctly demonstrates the idea of the twofold values of modern East Asian scholars: protecting tradition and advocating westernization.

Ⅰ. 서론

20세기 초반의 중국은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새로운 사상과 학술을 도입하며 자국의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미술사학계의 여러 학자도 전통적인 화론(畫論)이나 화사(畫史)의 체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중국미술사를 편찬하였다. 이 시기의 미술사학자 가운데 텅구(滕固, 1901-1941)는 현대적 의미의 중국미술사를 선구적으로 저술한 학자이다. 본 논고는 텅구의 글 「미술평론가로서의 소동파(Su Tung P’o als Kunstkritiker)」(1932)를 분석하여 텅구의 중국 미술사 인식 그리고 동시기 중국 미술사학계의 소식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려는 시도이다.1
소식(蘇軾, 호는 東坡居士, 1037-1101)은 ‘사인화(士人畵)’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여 문인화의 개념을 태동시킨 인물이다. 그에 의해 사인화가 화공화(畫工畵)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으며 이는 이후 중국회화사의 성격 형성에 하나의 기준점이 되었다. 명말(明末)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 이 개념을 선(禪)의 남북종론(南北宗論)에 대입하여 회화의 남북종론을 정립시킨 이후 근대기에 이르기까지 문인화는 모든 회화 장르 가운데 최상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문인화의 역사에서 소식의 역할은 매우 지대하며 그에 대한 평가는 중국회화사를 보는 시각을 대변한다.
텅구는 1901년 상하이(上海) 바오산(寶山)현에서 출생하여 1924년에 도쿄 도요대학(東洋大學)의 문화학과를 졸업하고 1932년에 베를린의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Friedrich Wilhelm University, 현재의 Humboldt University of Berlin)에서 미술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2 즉 텅구는 일본에서 기초적 인문학을 학습하였으며 서구의 앞선 미술사학을 직접 습득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중국인이다. 그는 1930년에서 1932년까지의 독일 유학 시기에 중국 문인화 관련 논고 세 편을 『동아시아 잡지(Ostasiatische Zeitschrift)』에 발표하였다. 이는 각각 소식의 회화 이론, 묵희(墨戱), 산수화에서 남종화의 의미에 관한 글이다.3 텅구가 일본과 중국에서 발표했던 논고들 가운데에는 문인화와 관련된 주제의 개별 논고가 없음을 생각하면 독일어로 현지에서 발표된 이 세 글은 주목을 끈다. 이 가운데 소식에 관한 이 논고는 텅구의 독자적인 해석이 돋보이는 글로 동시기 중국의 여타 미술사 저자들과는 차별화된 인식을 보여준다.
근대기 중국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비판과 옹호가 공존하였으며 미술계에서도 문인화에 대한 재평가가 다양한 시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국미술사가 서술되기 시작한 20세기 초반에 소식의 회화관을 깊이 있게 다룬 사례는 드물다. 따라서 텅구의 글 「미술평론가로서의 소동파」에 대한 고찰은 근대기 지식인이 평가한 중국회화사에서의 소식의 역할은 물론 텅구의 해석이 가지는 근대성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다.

Ⅱ. 소식의 회화론과 20세기 초반 중국 미술계의 소식 평가

소식은 북송(北宋)의 학자 관료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로 시인, 서예가, 화가이자 사상가였다. 송나라는 개국 초부터 문치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며 이 시기에 확대된 과거제는 문인들의 개인의식 성장과 강화에 큰 작용을 하였다. 그리고 북송대 개인의식의 성장은 회화론을 포함한 예술론의 성격을 규정하기에 이르렀다.4 즉 북송의 사대부들은 학문과 치세에 무해한 선에서 예술 작품의 창작과 감상을 통해 개인의 가치를 실현하는 ‘자락(自樂)’을 추구하였다. 더욱이 소식이 활동하던 북송의 중후기는 격심한 당쟁으로 소식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이 지방으로 좌천되며 정치적 무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였다. 이들은 시서화의 창작에 몰두하고 서화에 관한 담론을 나누며 개인의 정신세계 표출이라는 회화 이념을 수립하였다.
이 시기에 정립된 소식의 묵희 이론은 문동(文同, 字는 與可, 1018-1079)의 묵죽화와 더불어 수묵화 발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 배경에는 위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함께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추진한 ‘고문(古文)운동’의 영향도 있었다.5 구양수는 만당(晩唐)과 오대(五代)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글을 비판하며 강건하고 질박한 정취를 가진 성당(盛唐)의 문풍(文風) 계승을 주장하였다. 소식이 구양수의 제자였던 만큼 그의 회화에 대한 사유에 이 고문운동은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식을 포함한 11세기의 문인들은 회화를 문학적 틀에 맞추려 노력하였으며 강건함과 질박함을 추구하던 문학의 경향은 자연히 수묵화의 흥기로 이어졌다. 전문화가가 아닌 이들이 숙련된 기법을 요하는 채색화나 대형화 보다 소형의 수묵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수묵은 추상성과 상징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주관주의적 내면 표현에 적합한 기법이므로 북송 문인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회화였다고 할 수 있다.6 이에 따라 수묵화는 시(詩)와 서(書)에 익숙한 문인들이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인의 문화로 발전하였다.7
소식은 여러 시와 제발에서 자신의 회화관을 표출하였다. 「언릉 왕주부의 절지화에 쓰다(書鄢陵王主簿所畵折枝)」라는 소식의 다음 제화시는 매우 유명하다.
  • 그림을 대상과 닮은 것으로만 논한다면 그림 보는 안목이 아이와 다름없다. 시를 짓는데도 반드시 이 시여야만 한다고 하면 시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시와 그림은 본래 한 가지 이치이니 태생의 재능(天工)과 독창성(清新)이 있을 뿐이다.8

이는 회화가 형사(形似)에 얽매이거나 시가 특정 주제에 제한되면 진정한 의미를 표현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위 구절과 함께 「마힐 왕유의 〈남전연우도〉에 쓰다(書摩詰藍田煙雨圖)」의 다음 구절 역시 소식을 논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이다.
  • 마힐의 시를 음미하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9

이 문구는 소식이 회화와 시를 동등한 예술로 보았으며 그 접점을 분명히 하였음을 시사한다. 그가 「한간이 말을 그린 시(韓幹畵馬詩)」에서 “두보가 지은 시구는 형태 없는 그림이요 한간이 그린 그림은 말 없는 시이다(少陵翰墨無形畵 韓幹丹靑不語詩)”라고 쓴 문장도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시와 회화의 서로 다른 형식에도 불구하고 공통성을 부각하여 두 장르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즉 소식은 시화본일률(詩畫本一律)과 시화합일(詩畫合一)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인물이다.
한편 소식이 최초로 사용한 ‘사인화’라는 용어는 그가 친구 송적(宋迪, ?-1083)의 조카 송자방(宋子房, 1101-1125)의 그림에 쓴 다음 글에 등장한다.
  • 문인들의 그림을 보는 것은 마치 제국(帝國) 최고의 말을 검열하는 것과 같아 누구나 그 의기(意氣)가 이른 바를 취한다. 화공의 경우는 왕왕 채찍, 가죽과 털, 구유의 여물만을 취할 뿐 한 점도 뛰어난 것이 없다. 몇 발짝 떨어져서 보면 곧 싫증을 느끼게 된다. 한걸(漢傑, 송자방의 字)의 그림은 진짜 사인화이다.10

이로써 소식은 사인화라는 사회적인 용어로 회화를 분류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즉 그는 회화의 창작과 감상을 사대부의 문화로 정립하고 문인 화가들을 발굴하여 그 특징을 제시한 회화사적 업적을 남겼다. 이 용어는 이후 동기창이 제시한 ‘문인지화(文人之畵)’의 선구적 역할을 하면서 중국회화사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소식은 회화 이론뿐 아니라 묵죽(墨竹)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석거보급(石渠寶笈)』이나 『식고당서화회고(式古堂書畫滙考)』 등의 문집에는 소식의 작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문여가소동파묵죽합권(文與可蘇東坡墨竹合卷)〉, 〈절지묵죽도(折枝墨竹圖)〉, 〈풍강노죽도(風江老竹圖)〉, 〈호석신황도(湖石新篁圖)〉 등 대나무 주제의 작품과 〈목석도(木石圖)〉, 〈해용도(海榕圖)〉, 〈고백괴석도(古栢怪石圖)〉, 〈송도(松圖)〉 등 자연물의 그림은 물론 불교회화인 〈응신미륵도(應身彌勒圖)〉를 그렸다는 기록도 있다.11 즉 소식은 시(詩)와 서(書)는 물론 회화를 통해서도 자아를 구현하였던 북송 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북송 사회의 문학화 경향에 따라 소식이 기초를 마련한 새로운 회화 이념의 출현은 중국회화사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북송 문인들의 수묵화와 그 이론은 동한(東漢) 이후 ‘기운(氣韻)’과 ‘신운(神韻)’을 강조한 중국의 예술 관념을 한층 공고히 하였다. 즉 북송 문인들로 인하여 작가의 인격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본질적 요소가 되었으며 소식은 그 토대를 만들었다.12
소식의 이러한 회화사적 역할에 대하여 20세기 초반의 중국 미술계는 어떤 평가를 하였을까? 이 시기 미술사 및 미술 이론에 관한 논저를 남긴 인물로는 천스쩡(陳師曾, 원명은 陳衡恪, 1876-1923), 정우창(鄭午昌, 1894-1952), 판톈서우(潘天壽, 1897-1971), 푸바오스(傅抱石, 1904-1965), 퉁수예(童書業, 1908-1968), 텅구 등이 있다. 이들의 소식에 대한 평가는 이들의 문인화관(文人畵觀)과 나아가 중국회화사관을 살펴볼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소식과 그의 회화관을 주제로 개별 논고를 남긴 인물은 텅구가 유일하다. 여타의 저자들은 중국회화사 등의 글에서 단편적으로 소식을 다루었을 뿐이다.
천스쩡은 20세기 초 베이징 전통파 화단(畵壇)의 주요 인물로 화가, 미술 교육자이자 미술 이론가였다. 천스쩡은 1902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에서 박물학(博物學)을 전공하였다. 1909년 졸업 후 귀국한 그는 국립베이징미술학교(國立北京美術學校)를 포함한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회화 실기와 함께 중국미술사도 강의하였는데 그 교재로 사용할 『중국회화사(中國繪畫史)』를 펴내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3 그런데 천스쩡이 소식에 관하여 언급한 사례는 그의 대표 논저 『중국 문인화의 연구(中國文人畵之硏究)』(1922)에 실린 다음 구절뿐이다.14
  • 동파는 자신의 시에서 ‘그림을 대상과 닮은 것으로만 논한다면 그림 보는 안목이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는 극단적으로 형사를 타파하려는 주장이며 또한 문인화를 대표하는 설법이다. 즉 시대적 사상의 변천으로 북송에 이르러 문인의 그림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문인화가 발달하지 않을 수 없는 추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15

이 간략한 문단은 단순히 형사(形似)의 배척만이 문인화의 특성이라고 해석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천스쩡이 북송의 회화 이론을 설명한 부분은 단지 이 구절뿐이어서 북송 문인화론을 대변하는 인물이 소식이라는 그의 인식이 드러난다.
판톈서우는 저장제일사범학교(浙江第一師範學校)를 졸업하고 상하이미술전과학교(上海美術專科學校)와 항저우(杭州) 국립예술전과학교(國立藝術專科學校)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중국 회화의 전통을 지켜나가는 틀 내에서 혁신을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 『중국회화사(中國繪畵史)』(1936)에서 송대 회화의 특질은 형사를 경시하고 그림의 ‘이치(理)’와 ‘뜻(意)’을 추구함에 있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송대의 화법(畫法)을 논하며 소식의 다음 글을 인용하였다.
  • 내가 일찍이 화법을 논할 때 인물, 새, 궁전, 기물 등 모든 객체의 그림은 변함없는 형상이 있다고 여겼다. 산, 바위, 대나무, 나무, 물, 파도와 구름 등은 변함없는 형상은 없으나 변함없는 원리를 가진다. 변함없는 형상이 본 모습을 잃으면 사람들은 즉시 알아차리지만 변함없는 원리는 적절하게 표현되지 않으며 그림을 잘 아는 사람조차 쉽게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속이고 명성을 얻으려는 모든 자는 반드시 일정한 형상이 없는 것에 의지해야 한다. 비록 그러하나 변함없는 형상이 본 모습을 잃게 되면 단지 그것을 잃을 뿐 그 전부가 병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변함없는 원리가 합당하지 못하면 전체를 폐해야만 한다. 바로 그 형상이 일정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원리를 명심해야만 한다.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들도 혹 그 형상을 잘 그릴 수 있겠으나 그 원리에 이르러서는 뛰어난 사람과 재능있는 자가 아니고서는 분별 있게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16

이 구절은 희녕(熙寧)3년(1070)에 봉상부(鳳翔府, 현 산시성에 위치)의 유명 사찰인 정인원(淨因院)에서 소식이 문동과 풍류를 즐기며 문동의 그림에 남긴 「정인원화기(淨因院畵記)」의 일부이다. 이 글의 요지는 ‘신사(神寫)’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물 이면의 본질적 속성을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소식은 사물의 본질인 ‘상리(常理)’를 꿰뚫어 보는 안목의 중요성을 말하였으며 이러한 안목은 ‘뛰어난 인품과 재능을 가진 자(高人逸才)’만이 가질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판톈서우는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소식의 상리, 미우인(米友仁, 1072-1151)의 궁리(窮理), 장회민(張懷民, 10세기 후반 활동)의 조리(造理)가 모두 하나의 이치”라며 이것이 송대의 회화 사상이라고 설명하였다.17 즉 판톈서우는 소식의 화론이 ‘이(理)’를 중시하는 송대 철학의 기반 위에 정립된 것으로 보아 소식만의 독보적인 이론으로 평가하지는 않았다.
정우창은 상하이의 중화서국(中華書局)에서 미술부 주임을 역임하였으며 상하이미술전과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중국화학전사(中國畫學全史)』(1929)는 ‘중국 화학을 집대성하였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18 정우창은 이 책에서 송대 도화(圖畫)는 학술과 종교의 영향을 받아 용의(用意)와 용필(用筆)에서 ‘문학화(文學化)’가 이루어졌다고 규정하였다. 정우창은 송대에는 사군자 가운데 매(梅)와 죽(竹)은 ‘그린다(畵)’라고 하지 않고 ‘쓴다(寫)’라는 어휘를 사용할 만큼 문인들의 특별한 취미였음을 밝혔다. 이어서 그는 문동과 소식을 묵죽의 명가(名家)로 소개하였다.19 정우창은 송대 화론을 다루면서 판톈서우도 인용했던 위 「정인원화기」의 구절을 동일하게 소개하였다. 정우창이 판톈서우와 다른 점은 “소동파의 상리, 미우인의 궁리, 심괄(沈括, 1031-1095)의 초리(超理)는 모두 하나의 이치이다. 즉 물리(物理)와 화리(畵理)는 하나의 이치이다”라는 규정이다.20 즉 정우창은 판톈서우가 말한 장회의 조리를 심괄의 초리로 대체하였을 뿐이다. 아울러 정우창은 “송대의 화론은 기운(氣韻)을 중히 여겼는데 이는 송대의 공론(公論)이었다”라고 서술하였다.21 즉 정우창도 판톈서우와 마찬가지로 소식의 이론은 송대 철학과 문예사상의 조류에 따라 정립된 것으로 보고 여타 이론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퉁수예는 고사변파(古史辨派)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로 중국회화사 관련 논고도 상당수 발표한 인물이다. 그는 「송대 화론에 표현된 송화의 특색(宋代畫論中所表現的宋畵特色)」이라는 논고에서 송대의 여러 화론을 인용하며 송대 화론은 ‘이(理)’라는 한 글자를 가장 중시한다고 말하였다.22 그리고 여러 화론 가운데 판톈서우와 정우창도 인용한 소동파의 「정인원화기」를 가장 먼저 소개하였다. 퉁수예는 이 글에서 송대의 회화가 물질의 기본 법칙인 이(理)를 중시한 결과 ‘하나의 형체로 전체의 의미를 얻는다’는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퉁수예 역시 이 글에서 소식의 문장들을 소개함으로써 그를 송대의 대표적 회화 이론가로 보는 시각을 드러내었으나 그의 회화사적 역할을 분석하거나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위에서 언급한 천스쩡, 판톈서우, 정우창, 퉁수예 등은 20세기 초반 중국 미술사학계에서 손꼽히는 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소식의 글을 인용하여 송대 회화의 특징을 서술함으로써 소식이 송대의 대표 이론가라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미술사적인 의미에서 소식의 역할을 깊이 고찰하는 시도는 하지 않았으며 모두가 ‘이(理)’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송의 회화를 해석하였다. 소식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미술사학계에서보다는 문학계에서 중시되고 있었다.

Ⅲ. 텅구 시각 형성의 배경

앞 장에서 언급한 천스쩡, 판톈서우, 정우창은 모두 화가이자 이론가, 교육자였다. 이들과 달리 텅구가 소식에 각별히 주목한 바탕에는 그가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다수의 소설과 희곡 등을 발표한 작가였다는 점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동시기 일본과 중국에서 고조되었던 문인화 열기 역시 텅구가 소식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 20세기 초반 중국과 일본 문인들의 소식 열기

소식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의 문단에서 꾸준히 추앙되어 왔다. 흥미로운 점은 소식에 대한 추모 열기가 청대 중후기인 18-19세기에 가장 고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의 바탕에는 청대의 사상과 학문의 전개 상황 그리고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청(淸)을 세운 만주족은 한족에 대한 지배력 강화의 일환으로 학문 체계의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송과 명의 이학(理學)을 극복하기 위한 고증학(考證學)이 발전하였다. 고증학은 건륭·가경(乾隆·嘉慶)연간(1735-1820)에 가장 발달하였는데 옹방강은 당시의 고증학을 주도한 학자였다.23 옹방강은 청 초기에 배척되었던 송학(宋學)의 재인식을 촉구하면서 정주학(程朱學)과 대립 관계에 있었던 소학(蘇學)을 부흥시키고자 하였다.24 송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문학에서도 송시(宋詩)가 재평가되며 당시(唐詩)에 경도되었던 이전의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송시운동(宋詩運動)이 일었다. 이와 더불어 소식의 서체를 배우고 따르려는 경향이 성행하는 등 소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25
옹방강은 1773년 12월 17일에 송대의 판본인 『시주소시(施注蘇詩)』를 입수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틀 후인 19일에 소식의 생일을 기념하는 수소회(壽蘇會)를 열었다.26 이후 옹방강은 소식의 생일에 지인들을 초대하여 초상화 앞에서 절을 올리고 시를 짓는 수소회를 해마다 개최하였다.27 옹방강이 시작한 이 행사는 그의 사후에도 여러 지역에서 이어져 20세기 초반까지 열리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신문이나 정기간행물 등을 통하여 문인들의 시사(詩社)나 사사(詞社) 모임이 공고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단체가 신문과 잡지를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거나 동인(同人)을 모으는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소식의 생일을 기리는 수소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수소회 관련 기사 가운데 이른 예로는 1906년에 『국수학보(國粹學報)』에 실린 두 편의 기사가 있다. 이 기사들은 수소회 모임을 알리고 각각 축하시를 실었다.28 그리고 1908년에는 『저작림(著作林)』에도 동파 생일 기념시가 실렸다. 이 『저작림』은 원앙호접파(鴛鴦蝴蝶派)의 대표 문인 천디에셴(陳蝶仙, 1879-1940)이 창간한 간행물이다. 수소회 관련 기사는 이뿐 아니라 1904년에 창간된 중국 최초의 정기간행물이자 영향력이 가장 컸던 『동방잡지(東方雜志)』, 1909년에 결성된 혁명문학단체 남사(南社)의 『남사총각(南社叢刻)』, 혁명가 루쉰(魯迅, 1881-1936) 등이 1917년에 창간한 『월탁일보(越鐸日報)』에서 증간한 『소탁(小鐸)』, 1923년 사상가 장병린(章炳麟, 1869-1936)이 발행한 『화국월간(華國月刊)』 등 당시 영향력 있던 여러 간행물에 꾸준히 실렸다.29
이러한 문학계에서의 소동파 추모 열기는 문학에 상당한 관심과 조예를 가지고 있던 텅구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텅구는 중학 졸업을 앞둔 1917년부터 1918년 7월까지 『저작림』을 창간한 천디에셴에게서 고체(古體)의 시문을 배웠다.30 텅구는 어린 시절의 고전문학 학습과 더불어 천디에셴으로부터의 교육으로 고체의 시사(詩詞) 창작에 매우 능하였다.31 또한 텅구는 1918년 7월에 문학단체 동남사(同南社)에 가입하였다.32 동남사는 1909년 쑤저우(蘇州)에 설립된 남사(南社)의 지사(支社)로 1911년 10월 30일에 형성된 단체이다. 이렇게 텅구는 『저작림』이나 『남사총각』 등을 간행한 단체와는 직접 관련이 있었으며 여타의 간행물들도 포괄적으로 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텅구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20년까지 문학에 전념하였으며 일본에서도 재일(在日) 중국인 문학단체인 문학연구회(文學硏究會), 창조사(創造社), 민중희극사(民衆戲劇社), 사후사(獅吼社) 등에서 활동한 바 있다. 따라서 텅구는 이 시기 문학계의 소식 열기를 체감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더하여 텅구가 유학을 하고 있던 시기의 일본에서도 소식 열기는 고조되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에도 후기인 분세이(文政)연간(1818-1829)에 송시(宋詩)가 다시 부상하면서 모소(慕蘇) 활동이 흥기하였으며 강물에 배를 띄우고 적벽의 뱃놀이를 재현하는 ‘적벽유(赤壁遊)’가 성행하였다.33 이러한 전통 위에 20세기 초반에 수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는 나가오 우잔(長尾雨山, 1864-1942)과 도미오카 뎃사이(富岡鐵齋, 1837-1924)에 의하여 주도되었다.34 나가오 우잔은 저명한 한학자(漢學者)이자 화가였으며 도미오카 뎃사이는 ‘일본의 마지막 문인화가’라고도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이들은 1916년, 1918년, 1920년, 1927년, 1937년의 5회에 걸쳐 수소회를 개최하였다.35
나가오 우잔과 도미오카 뎃사이는 수소회 이외에도 1922년에 적벽회(赤壁會)를 성대히 개최하였다. 이들은 소식의 적벽지유(赤壁之遊)로부터 14개 갑자(甲子) 즉 840년이 지난 임술(壬戌)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큰 규모의 행사를 치르고자 하였다.36 이에 신문에 홍보 기사를 게재하고 각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9월 7일에 교토 인근의 우치천(宇治川)에서 성대한 적벽회를 열었다. 이날의 적벽회는 교토 이외에도 도쿄, 오사카, 나라 등 여러 지역의 학자와 문인들이 발기하여 참가 인원이 300명이 넘은 전국적인 행사였다. 또한 같은 날 도쿄에서도 저명한 정치가 미주노 렌타로(水野鍊太郎, 1868-1949)가 홍엽관(紅葉館)에서 적벽회를 성대하게 열고 관련 시집인 『임술아회집(壬戌雅會集)』을 출판하였다.37 이 행사는 교토 행사의 주관자와 협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임술아회집』에는 교토 행사 참여자들의 시도 다수 수록되어 있다.
한편 교토와 도쿄에서 적벽회가 열린 이 날 중국의 다롄(大連)에서도 적벽회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다롄에 거주하던 일본의 시인 타오카 마사키(田岡正樹, 1861-1936)를 주축으로 일본과 중국의 문인 100여 명이 모인 행사였다.38
이와 같이 1922년 9월 7일에 도쿄, 교토, 다롄의 세 도시에서 동시에 열린 적벽회는 당시 일본과 중국 지식인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으며 그들의 서화 수집 열기를 고조시켰다. 그리고 이 적벽회는 당시 도쿄의 도요(東洋)대학에 유학하고 있던 텅구가 소식을 다시 주목하게 된 계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교토의 적벽회에는 중국학의 대가 나이토 코난(内藤湖南, 1866-1934)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그는 당송변혁론(唐宋變革論)을 제기하며 중국 역사에서 송대에 근세(近世)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였다.39 텅구는 코난의 직속 제자인 이세 센이치로(伊勢專一郞, 1891-1948)의 중국 미술 관련 논저를 읽고 유사한 글을 쓴 바 있다. 이세는 코난에게서 중국미술사를 배웠으며 따라서 텅구가 코난의 이론을 접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코난의 이론과 일본 문단의 소식 열기는 텅구의 소식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2. 20세기 초반 문인화의 위상

텅구는 재독(在獨) 시기에 소식 관련 논고 이외에도 묵희(墨戱)와 남종화의 의미에 관한 논고를 각각 한 편씩 발표하였다.40 즉 이 시기에 독일에서 발표한 세 논고가 모두 문인화와 관련된 주제였다. 이처럼 텅구가 문인화에 주목하게 된 배경에는 동시기 동아시아에 형성되었던 문인화 재인식 열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문인화는 서양미술의 영향이 거세었던 20세기 전후에는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낡고 고루한 문화의 대표로 인식되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20-30년대에는 맹목적인 서구화에 대한 회의가 싹트면서 문인화를 비롯한 전통문화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문인화 열기는 다이쇼시기(1912-1926) 일본에서 먼저 태동되었는데 이는 일본 내부와 외부의 요인이 맞물리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내부적 요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적 문화정책을 들 수 있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서구 열강들과 맺었던 불평등조약들을 개정하고 ‘세계의 1등국’ 대열에 진입하려는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이전의 입장인 ‘서구의 모방’에서 ‘서구와의 대립’으로 선회하였으며 일본 미술의 정체성을 새로이 확립하여 서구 미술에 대립시키고자 하였다. 오무라 세이가이(大村西崖, 1868-1927)를 비롯하여 타키 세이치(瀧精一, 1873-1945), 타나카 토요조(田中豊藏, 1874 -1945) 등 일본의 학자들은 문인화 관련 논저를 연이어 발표하며 일본의 문인화 즉 남화(南畫)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은 남화에 내포된 ‘기운생동’의 원리와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주관성’이 동일한 성질이라고 주장하였다.41 이들에 의하여 문인화의 성격으로 상정된 객관과 대비되는 주관, 사실에 대비되는 기운 등은 모더니즘 미술의 주관성과 표현성을 이미 내포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논리로 이 학자들은 문인화에 근대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여 서구의 미술에 필적할 분야로 재정립하였다. 더불어 이들의 주장에는 동아시아를 문인화를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 군국주의적 침탈의 정당성을 마련하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동시기 중국 정세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오랜 왕조가 붕괴함에 따라 궁정내부와 고관 및 황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고미술품들이 대량 유출되었다.42 그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유입되었는데 이 가운데에는 이전의 일본에는 많이 소개되지 않았던 명청(明淸)시기의 명작들이 대량 포함되어 있어 일본 미술계 인사들의 명청대 문인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43
위와 같은 요인들에 의하여 일본에서 문인화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현상은 동시기 중국에서도 나타났다. 중국은 19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신문화운동을 필두로 하여 적극적인 서구화를 추진하였다. 그런데 이 급격한 개혁은 곧이어 대중들에게 불안감과 전통으로의 회귀 욕구를 가지게 하였다.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와 량슈밍(梁漱溟, 1893- 1988) 등 학자들은 중국의 정신문명이 서구 물질문명의 파산을 구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전통문화를 옹호하였다.44 이러한 사회적 조류와 일본의 문인화 열기는 위축되어 있던 전통파 화가들의 입지를 확장시켰다. 이에 따라 1921년에는 전통파 회화사단(繪畵社團)인 ‘중국화학연구회(中國畫學硏究會)’가 베이징에 설립되는 등 전국적으로 다수의 전통회화사단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천스쩡은 『중국문인화의 연구(中國文人畵之硏究)』(1922)를 출간하여 문인화의 우수한 가치를 역설하였다.
이처럼 일본과 중국에서 고조되었던 문인화의 재평가 열기는 이 시기에 미술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텅구의 시각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텅구는 여러 논저에서 문인화와 남북종론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였으며 남종화과 북종화의 대립 관계를 중국회화사 발전의 축으로 보았다.45 텅구는 남북종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일생 동안 일관되게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기창을 비롯한 남북종론의 주창자들을 ‘종파론자(宗派論者)’라고 규정하면서 이들의 이론은 스스로를 옹호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하였다.46 나아가 텅구는 기존 남북종론의 ‘원체화(院體畵)’와 ‘문인화(文人畵)’라는 용어를 ‘관각화(館閣畵)’와 ‘고답화(高踏畵)’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였다.47 이는 ‘문인’이나 ‘화원(畫員)’ 등의 용어에서 파생하는 상하 우열의 이미지를 지양해야만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텅구의 비판 대상은 문인화 자체가 아니라 동기창 등이 주장한 남북 종론일 뿐이었다. 텅구는 문인화와 원체화 모두를 중국회화사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텅구가 일찍이 문인화의 개념을 창출했던 소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음은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텅구는 그의 최초 미술사 저서 『중국미술소사(中國美術小史)』(1925)를 서구로부터 도입된 학술 사조인 사회진화론에 의거하여 집필하였을 만큼 서구 학술과 중국미술사의 접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소식에 관한 그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Ⅳ. 텅구의 「미술평론가로서의 소동파 (Su Tung P’o als Kunstkritiker)」

「미술평론가로서의 소동파」는 1932년의 『동아시아 잡지』에 실렸다.48 이 간행물은 유럽 최초의 동아시아 미술 전문지였는데 발행인은 텅구의 박사학위 지도교수 오토 큄멜(Otto Kümmel, 1874-1952)이었다. 텅구는 이 글에 『동파제발(東坡題跋)』, 『동파지림(東坡志林)』 등의 문헌에서 발췌한 소식의 문장들을 번역하여 실었을 뿐 아니라 원문까지 직접 필사하여 첨부하였다. 이는 그가 중국 고문의 번역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준다.49
이 글은 소식의 예술관과 중국회화사에서 그 의미를 정리하여 서구의 독자들에게 소개한 논고이다. 텅구의 여러 논저를 종합해 볼 때 그의 중국회화사 연구를 관통하는 주제는 남북종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도 텅구는 왕유가 남종의 시조라는 남북종론의 주장이 오류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텅구의 비판 대상은 소식의 예술관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남북종론이었다.
이외에 이 글은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서 독자성을 가진다. 첫째, 소식의 이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감정이입(感情移入, Einfühlung)’이라는 근대의 학술 개념을 사용한 점이다. 두 번째는 시인, 문학가, 사상가 등으로 규정되는 소식에게 미술평론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바라본 관점이야말로 소식의 예술관이 가지는 시대적 의의라는 분석이다. 이러한 텅구의 새로운 시도는 서구화를 추구했던 동아시아 근대기 학술의 양상을 시사한다. 즉 서구에서 미술사 교육을 받은 저자는 서구의 독자들에게 중국 문화와 그 대표 이론가인 소식을 서구 학문의 키워드로 해석하여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텅구는 글의 전반부에서 소식의 언설을 빌려 사인화의 성격을 제시하였다. 텅구는 중국에는 사인화와 직업화의 두 가지 회화가 있다고 설명하며 그 구분은 화가의 사회적 지위와 작품의 풍격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사인화가들이 첫 번째로 배척한 풍격이 자연주의(Naturalism)인데 소식이 이를 천명한 인물이라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텅구가 인용한 소식의 문장들은 “대상의 모습과 닮음만으로 그림을 논한다면 그림 보는 안목이 아이와 다름없다”, “시와 그림은 본래 같은 이치이니 태생의 재능과 독창성이 있을 뿐이다”, “예로부터 화가는 속된 선비가 아니며 사물의 형상을 묘사함이 대략 시인과 같다(古來畫師非俗士 摹寫物象略與詩人同)” 등의 널리 알려진 구절들이다. 그리고 텅구는 소식이 오도자와 왕유를 비교했던 다음 구절을 인용하였다.
  • 내가 본 화가의 그림 가운데 이 두 사람의 그림만큼 존귀한 그림은 없다. 오도자의 풍격은 실로 웅장하고 자유분방하여 호탕함이 바다의 파도와 같이 용솟음친다. 그가 붓을 들어 비바람이 몰아치듯 그림을 그리면 그 기운이 붓이 닫지 않은 곳까지도 삼킨다…(중략) 마힐은 본래 존경받는 시인으로 시풍이 향낭 찬 듯 아름답고 향기로운데 지금 이 벽화는 마치 그의 시와 같이 청아하고 질박하다…(중략)오도자의 그림이 절묘하기는 하지만 뛰어난 화공에 지나지 않는다. 마힐은 형상 밖의 것도 체득하여 새장에서 벗어난 범속을 초월한 새와 같다. 내가 본 두 사람의 그림은 모두 신묘하고 걸출한데 왕유에 대해서는 옷매무새 가다듬고 할 말을 잊는다.50

텅구는 소식이 오도자와 왕유를 모두 높이 평가하면서도 왕유를 우위에 둔 이유는 그가 시인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텅구는 소식이 ‘추동력(Schwung)’을 시와 회화의 기본 원소로 보아 이를 갖추지 않으면 그 누구도 시인이나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졌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소식은 문인화가만이 순간적 긴장을 포착하여 대상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시인화가(詩人畵家)만이 진정한 화가라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즉 텅구는 시와 그림의 본질은 같다는 소식의 사상을 소개함으로써 사인화의 성격을 서구 독자들에게 설명하였다.
아울러 텅구는 왕유가 당대(唐代)에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으나 소식으로 인하여 송대 이후부터 최고의 존숭(尊崇)을 받았다고 설명하면서 남종화파의 창시자가 왕유라는 오해가 소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왕유에 대한 평가가 송대 이후에 높아졌다는 견해는 퉁수예도 제기한 바 있다.51 퉁수예는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와 『당조명화록(唐朝名畫錄)』은 왕유를 오도자나 이사훈보다 낮은 단계의 화가로 분류하였으며 형호(荊浩, 9세기 말-10세기 초 활동)의 『필법기(筆法記)』에서부터 평가가 높아지기 시작하여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 것은 원대(元代)에 들어서라고 분석하였다. 이를 볼 때 왕유에 대한 역대 평가의 변화에 대한 자료는 20세기 초반의 개혁적 학자들이 공유하던 정보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를 학술 논고에 서술한 학자는 텅구가 최초인 것으로 추정된다.52
그런데 텅구가 말한 이 오해는 남북종론을 창시한 후대 인물들의 오해일 뿐 소식의 오류라는 지적은 아니다. 오히려 텅구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소식에 대한 높은 평가를 드러냈다.
  • 내가 생각하기에 예술가는 자연의 하인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그 자체로 자연의 일부이다. 마찬가지로 소동파는 자연주의자가 아니며 외재(外在)하는 자연에 가까이 가기 위해 예술가의 감수성을 억누르지도 않았다. 그는 또한 자연을 표현 수단으로 삼는 개인주의자도 아니며 그의 창작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이른바 태생의 재능(天工)이다. 그의 시는 이런 태도를 표방한다. “시가 글자의 공교함을 구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며 천진난만은 곧 나의 스승이다”, “(용면)거사는 그저 산에 있을 뿐이다. 특정한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정신은 만물과 교감하고 지혜는 모든 장인과 통한다.”53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진정한 예술가란 자연의 일부이며 소식이 그러한 예술가라고 규정한 텅구의 인식이다.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경지는 당대(唐代)까지 뛰어난 화가의 덕목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장자(莊子)』의 「전자방(田子方)」에 등장하는 도를 깨달은 화가에 기원이 있다.54 그러나 이 개념은 창작에 임하는 태도를 말할 뿐 화가의 인품까지 포괄하지는 않는다. 북송의 문인들은 작가의 인품이 화면에 투영된 결과물로의 문인화를 추구하였으며 이는 ‘자연과의 합일’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이렇게 볼 때 텅구의 분석은 자아의 분출이라는 문인화의 핵심 개념을 곧 공장(工匠)의 ‘인위’와 대비되는 장자의 ‘무위(無爲)’와 동일시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텅구의 이러한 서술은 뒤따라 이어지는 ‘감정이입’의 주장과 연결하려는 서두라고 볼 수 있다. 윗글에 이어 텅구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이어갔다.
  • 소식에게 이러한 자연과의 일치는 진정한 예술가의 조건일 뿐 아니라 예술품을 평가하는 표준이다. 예술비평가 역시 품평하려는 작품에 대하여 강렬한 공감(Einfühlung)을 응당 가져야 한다…(중략) 소식은 예술평론도 곧 예술이라는 점을 제시하였다...(중략)소식은 모든 예술 비평의 기본원소는 곧 작가와 비평가가 일체를 이루는 것이라 하였다. 그가 널리 알린 이 관점은 동시대인들의 흠모와 탄복을 받았다.55

텅구는 이 구절에서 ‘예술비평가로서의 소동파’와 ‘예술비평의 기본인 감정이입’이라는 두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텅구는 소식이 문동의 묵죽을 평가한 다음의 문구를 인용함으로써 소식이 예술비평가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 세간의 화공들도 혹 그 형상을 곡진하게 그릴 수 있겠으나 그 원리에 이르러서는 뛰어난 사람과 재능 있는 자가 아니면 능히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문동의 죽석과 고목 그림을 보면 그가 진실로 이치를 터득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 죽어가며, 이렇게 휘감고 위로 올라가서는 말라서 비틀어지며, 이렇게 가지가 곧게 뻗어 나가 무성한 숲을 이루며 뿌리, 줄기, 마디, 잎, 각진 이빨 모양 같은 잎맥과 줄기가 있고 천 가지 만 가지 모양으로 변화를 부리며 잎들은 결코 서로 파고들지 않아서 각각 적절한 곳을 차지했다.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고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켰다. 대개 (사리에 능통한) 달사(達士)가 의탁한 바가 아니겠는가?56

이 글은 소식이 문동의 그림에 남긴 화제(畫題)로 판톈서우, 정우창, 퉁수예 등의 학자가 인용했던 「정인원화기」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 학자들은 모두 사인화의 특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윗 구절에서 “…그 이치를 터득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까지만 인용하였는데 텅구는 문동의 그림에 대한 소식의 구체적인 평가 부분을 실었다. 소식은 이 글에서 문동의 그림을 직접 보며 대나무 형상의 특질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그 안에 내재하는 정신을 논함으로써 그림을 평가하였다. 즉 텅구는 이 구절을 빌려 소식이 화가는 물론 그의 작품을 평가하는 비평가였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텅구가 소식을 이론가나 화가가 아닌 예술비평가로 규정한 배경에는 서구 학술의 기준에 중국의 전통을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텅구의 이러한 의도는 ‘미술비평’과 ‘감정이입’이라는 용어의 사용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1715년 영국 학자 리차드슨(Jonathan Richardson, 1667-1745)은 An Essay on the Whole Art of Criticism에서 미술비평과 미술사의 구별을 최초로 시도하였고 이로부터 현대적 형태의 미술비평 개념이 태동되었다.57 이후 파리 살롱전(Salons)에서의 비평과 인상주의의 등장은 18세기 후기부터 19세기에 걸쳐 미술비평이 독립적 분야로 정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19세기 말 독일의 미학자 립스(Theodor Lipps, 1851-1914)가 발전시킨 감정이입설(Empathy Theory)은 학계의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58 감정이입이란 관찰자가 자신의 감정을 관찰 대상인 예술 작품에 이입하여 대상과 자신이 융합하는 과정을 인식함을 말한다. 이 학설은 미술비평에도 ‘미술작품의 신체적 체험을 통한 재창조로서의 미술비평’이라는 관념을 제공하였다.59 이 시기 미술비평에서 감정이입설의 영향은 미국 학자 듀이(John Dewy, 1859-1952)가 “미술작품에 대한 완전한 파악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비평가 스스로의 생명 활동으로 체험할 때 이루어진다”라고 정의한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60
서구에서 크게 흥기한 감정이입설은 시마무라 호게츠(島村抱月, 1871-1918)에 의해 일본에 소개되어 문학, 철학, 미술계에 널리 수용되었다.61 특히 미술사학자 이세 센이치로는 감정이입설의 ‘주체와 객체의 융합론’을 동양 화론의 ‘기운생동’과 비교하며 기운생동의 우위를 역설하였다.62 이세의 이러한 주장은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문화정책에 부응하여 문인화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텅구는 일본 유학 시기에 감정이입설을 학습하였다고 추정된다. 텅구가 이세의 연구를 접하였음은 1926년에 발표한 「기운생동약변(氣韻生動略辯)」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63 또한 텅구는 자신의 논고 「체험과 예술(體驗與藝術)」(1923)에서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설서가(設書家) 유경정(柳敬亭, 1587-1670)을 감정이입설을 체현한 예술가로 제시하기도 하였다.64 텅구에 의하면 유경정이 명의 멸망에서 온 자신의 절망감을 ‘설서’를 통해 구현하였기에 당시의 대중들에게 커다란 호소력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도 텅구는 소식이 ‘감정이입을 통한 미술비평’이라는 개념을 구현했던 인물로 파악하고 있다. 그 예로 텅구는 소식의 다음 문구를 소개하며 소식이 감정이입을 비평의 기준으로 삼았음을 보여주었다.
  • 여가(문동)가 대나무를 그릴 때에는 오직 대나무를 볼 뿐 사람을 보지 않는다. 단지 사람을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황홀하여 스스로를 잊고 만다. 그의 몸은 대나무가 되고 무궁하게 청신함을 내뿜는다.65

미술비평의 기본적 개념을 ‘특정한 이론에 입각하여 미술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평가하는 작업’이라고 할 때 텅구는 소식이 ‘감정이입설’을 기준으로 작품을 판단하였으므로 곧 미술비평가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텅구의 이러한 주장은 미술비평이라는 분야가 서구보다 훨씬 이른 시기인 북송대에 이미 싹텄으며 소식이 그 대표적 이론가였음을 말하려는 의도라고 해석된다.
끝으로 텅구는 소식의 예술관이 가지는 시대적 의의는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본 관점에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소동파는 심지어 종교예술조차도 관념의 도해(圖解)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그가 예술에서 구한 것은 관념의 구상(構想), 즉 문자의 설명 없이도 관상자에게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소동파는 이로써 예술을 두 번째의 지위로부터 끌어올렸다. 그 이전에는 누구도 공개적으로 이 점을 강조하지 않았다. 시대를 가르는 소동파의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66

텅구는 소식 이전의 회화에 대한 평가는 그 사회적 효능에 의하여 좌우되었다고 보았다. 즉 그는 송대 이전 회화의 가치는 유교나 불교 등의 덕목 교육 또는 지배층의 정치적 선전이라는 제작 의도가 얼마나 잘 전달되는가에 있었다고 파악하였다. 텅구는 소식이 이런 전통을 깨고 회화를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함으로써 예술의 지위를 제고(提高)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즉 텅구는 소식의 회화사적 기여는 문인화의 위상 정립이 아닌 종교나 정치를 배제한 순수한 예술관에 있다고 분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텅구의 시각은 그가 심취했었던 유미주의(唯美主義)의 예술관 그리고 그와 두터운 친분을 지녔던 류하이쑤(劉海粟, 1896-1994)의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9세기에 유행하였던 유미주의적 세계관은 ‘미(美)’를 가장 지고한 가치로 보고 모든 것을 미의 견지에서 파악하는 사조이다. 민국시기(民國時期, 1912-1949) 일련의 개혁주의자들은 봉건적인 사회 관념에 대한 반발로 유미주의를 통해 개성의 해방을 추구하였다. 문학계에도 1920년대를 전후하여 유미주의가 크게 성행하였다. 여기에는 궈모뤄(郭沫若, 1892-1978), 위다푸(郁達夫, 1986-1945) 등 저명 작가들이 1921년 일본에서 설립한 유미주의 문학단체 ‘창조사(創造社)’의 역할이 지대하였는데 텅구 역시 이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바 있다. 텅구는 「시가와 회화(詩歌與繪畵)」(1920), 『유미파의 문학(唯美派的文學)』(1927) 등 유미주의 관련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67 「시가와 회화」에서 텅구는 소식의 ‘화중유시 시중유화(畵中有詩 詩中有畵)’라는 문장을 소개하며 “우리는 시가나 회화를 접할 때 동일한 감정을 가지게 된다”라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 글에서 텅구의 관심은 소식의 문인화 이론보다는 문학과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한 미감(美感)에 있었다. 텅구를 비롯한 유미주의 작가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며 작가의 내적 요구에 의한 창작과 유미적이고 낭만적인 천재성을 지향하였다. 여기에서의 작가의 내적 요구와 천재성은 곧 문인화의 기본 조건과 상통하며 이는 텅구의 소식 해석에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텅구가 문인화를 ‘예술을 위한 예술’을 실천하는 장르로 여겼음은 그의 동시기 논고 「묵희(墨戱, Tuschespiele)」(1932)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이 글에서 ‘묵희’는 문인화에 속하며 그 본질은 곧 빛의 반사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회화 또는 유미주의 작가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의 문학과 상통한다고 주장하였다.68
또한 텅구는 1920년대에 순수미술운동을 펼쳤던 류하이쑤와 친분이 깊었다. 류하이쑤는 1912년에 상하이도화미술원(上海圖畫美術院)을 설립하여 이 학교를 중국의 3대 미술학교 가운데 하나인 상하이미술전문학교(上海美術專門學校)로 키워낸 인물이다.69 그는 교육 현장에 실물 사생이라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으며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교수 이념을 확립하였다.70 텅구는 이 학교의 교수로 재임하는 한편 류하이쑤가 조직한 순수미술 연구 및 전시단체 ‘천마회(天馬會)’의 회원으로도 참여하였다. 또한 류하이쑤와 함께 장쑤성교육위원회(江蘇省敎育委員會)에서 활동하면서 전국미술전람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71 따라서 텅구는 류하이쑤를 비롯한 개혁적 미술가들과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이념을 공유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을 실천한 역사적 인물로 소식을 지목하여 이 글을 집필하였다고 생각된다.

Ⅴ. 결론

20세기 초 중국에는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미술사라는 학문이 도입되어 중국회화사 관련 논저의 편찬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중국회화사의 성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소식에 관한 이 시기의 논고로 텅구의 글이 유일하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는 텅구가 중국회화사를 꿰뚫어 보는 독보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텅구는 동시기 범세계적인 사조였던 감정이입설, 미술비평의 개념, 유미주의적 관점을 적용하여 소식의 회화관을 해석하였다. 이는 텅구가 서구의 학술 사조를 폭넓게 숙지하고 있었으며 매우 실험적이고 선구적인 학자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서술은 중국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 독자들을 위한 배려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서구 학문의 기준으로 중국 미술사를 해석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즉 텅구의 집필 의도는 소식의 회화관 더 나아가 중국회회사를 ‘현대적이며 보편적인 미술사 이론’으로 정립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텅구의 이 글은 「묵희」, 「중국 산수화에서 남종의 의미에 대하여」와 함께 독일의 독자들을 위하여 쓰인 글로 세 글 모두 문인화와 직접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함께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중국의 역대 화론을 다룬 「당송시기의 중국 회화 이론(Chinesische malkunsttheorie in der Tang und Sung-zeit)」이라는 사실은 주목을 끈다. ‘문인화’와 ‘고대부터 저술된 풍부한 화론’은 서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중국 미술의 독자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텅구가 이 두 분야를 주제로 서구 독자들을 위한 글을 썼다는 사실은 서구인들에게 중국 회화 나아가 중국 문화의 독자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여겨진다. 즉 텅구의 이러한 시도는 근대기 세계적 사상의 조류였던 민족주의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텅구는 소식을 다룬 이 글에서 문화민족주의적 관점을 드러내는 한편 서구의 보편적 미술사라는 범주에 중국회화사를 이입시키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는 전통의 수호와 서구화의 추진이라는 근대기 동아시아 지식인의 양가적(兩價的) 가치관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Notes

1) Ku Teng, “Su Tung P’o als Kunstkritiker,” Ostasiatische Zeitschrift Neue Folge 8(1932), pp. 104-110.

2) 텅구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에 관하여는 정수진, 「텅구(滕固, 1901-1941)의 중국미술사 연구」(서울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0) 참조.

3) “Su Tung P’o als Kunstkritiker” 이외에 다음의 두 논고이다. Ku Teng, “Zur Bedeutung der Südschule in der chinesischen Landschaftsmalerei,” Ostasiatische Zeitschrift Neue Folge 7(1931), pp. 156-163; 동저, “Tuschespiele,” Ostasiatische Zeitschrift Neue Folge 8(1932), pp. 249-255.

4) 북송대 문인들의 개인의식 발달과 문인화의 연계는 정혜린, 「북송대 문인화-사대부 문화의 시각화-소식의 논의를 중심으로」, 『인문과학』 112(2018.4), pp. 233-246 참조.

5)  謝術福·金鍾斗, 「論中國文人畵的筆墨精神與時代危機」, 『中國學』 48(2014.8), p. 104.

6)  최선호, 「蘇東坡의 文人畵論考」, 『美術敎育論叢』 3(1993), p. 179.

7)  수전 부시, 김기주 역, 『중국의 문인화-소식에서 동기창까지』(학연문화사, 2008), p. 30.

8) “論畫以形似 見與兒童鄰. 賦詩必此詩 定非知詩人. 詩畫本一律 天工與清新”, 王文誥 輯注, 『蘇軾詩集』 5(北京: 中華書局, 1982), pp. 1525-1526.

9) “味摩詰之詩 詩中有畫, 觀摩詰之畫 畫中有詩”, 屠友祥, 『東坡題跋校注』(上海: 上海遠東出版社, 2011), p. 250.

10) “觀士人畵 如閱天下馬 取其意氣所到. 乃若畵工 往往只取鞭策皮毛. 槽櫪芻秣 無一點俊發 看數尺許便倦. 漢傑眞士人畵也”, 蘇軾, 『東坡題跋』(浙江: 人民美術出版社, 2008),p. 314.

11) 卿三祥, 「蘇軾畵目滙錄」, 『文献』(1994.1), pp. 233-245.

12) 안영길, 「송대 사회의 문학화 경향과 소동파의 시서화이론」, 『중국어문학』 11(1986), p. 213.

13) 천스쩡의 『中國繪畫史』는 그의 사후 1925년에 제자 류졘화(兪劍華, 1895-1979)가 그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출간하였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일본의 나카무라 후세츠(中村不折, 1866-1943)와 코지카 세이운(小鹿靑雲, 생몰년 미상)의 『支那繪畫史』(東京: 玄黃社, 1913)와 거의 유사하다. 曹鐵錚·曹鐵娃, 「論民國時期美術史學研究中的“日本影响”」, 『藝術百家』 104(2008), p. 100.

14) 천스쩡은 자신의 글 「文人畵之價値」(1922)와 오무라 세이가이(大村西崖, 1968-1927)의 「文人畵之復興」(1921)을 엮어 『中國文人畵之硏究』(1922)를 편찬하였다. 천스쩡의 이 논저에 대하여는 정수진, 「「문인화의 가치(文人畵之價値)」: 천스쩡(陳師曾)의 문인화론」, 『미술사와 시각문화』 21(2018), pp. 72-103 참조.

15) 李運亨 外 編, 『陳師曾畫論』(北京: 中國書店, 2008), p. 162.

16) “余嘗論畵 以爲人禽宮室器用皆有常形 至於山石竹波煙雲 雖無常形而有常理. 常形之失 人皆知之; 常理之不當雖曉畵者有不知. 故凡可以斯世而取名者 必託於無常形者也. 雖然常形之失 止於所失 而不能病其全 若常理之不當 則擧廢之矣. 以其形之無常 是以其理不可不謹也. 世之工人或能曲尽其形而至于其理 非高人逸才不能辨”, 潘天壽, 『中國繪畵史』(北京: 團結出版社, 2005), p. 158에서 재인용.

17) 위의 책, p. 159.

18) 베이징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 1868-1940)는 정우창의 『中國畫學全史』에 대하여 “중국에 화사(畫史)가 있은 이래의 집대성이다”라고 평하였다. 周博, 「國畵復興與民族主義活語實踐-以鄭午昌的畵學實踐位中心的探討」, 『美術硏究』(2014.3), p. 54.

19) 鄭午昌, 『中國畫學全史』(上海: 中華書局, 1929), p. 256.

20) 위의 책, p. 317.

21) 위의 책, p. 321.

22) 童書業, 「宋代畫論中所表現的宋畵特色」, 『童書業繪畵史論集(上)』(北京: 中華書局, 2008), p. 105.

23) 김울림, 「18·19세기 동아시아의 蘇東坡像 연구: 淸朝 고증학과 관련을 중심으로」(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 학위논문, 2018), pp. 21-26.

24) 청 초기의 고증학은 송학(宋學)을 멀리하며 한대(漢代) 훈고학(訓詁學)으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가졌다. 이후 청 중기에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학술의 등장으로 한학과 송학의 절충이 시도되었다. 위의 논문, p. 30.

25) 錢超, 「“宋詩運動” 與蘇軾書法在晚清的接受」, 『書法賞評』(2012.5), pp. 39-44; 특히 건륭제(乾隆帝, 1735-1796 재위)는 소식의 서법과 사상을 추종하여 그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수집, 임모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王亦旻, 「開卷如親書興豪—乾隆皇帝對蘇軾書法的臨學」, 『故宫博物院院刊』(2020.10), pp. 263-281.

26) 옹방강이 구입한 『施注蘇詩』는 송락(宋犖, 1634-1714)이 매각한 송대 판본이다. 송락은 강소순무(江蘇巡撫)로 근무했던 시기 이 판본의 구입을 기념하기 위하여 『蘇詩補注』를 편찬하고 소식의 생일에 기념회를 거행하였다. 송락은 소식이 애호했던 음식과 술, 초상화 〈동파입극도(東坡笠屐圖)〉 그리고 소식의 여러 문집과 후대의 관련 작품 등을 제물로 올려 후대 수소회의 기본 형식을 제시하였다. 衣若芬, 「時間·物質·記憶-淸代壽蘇會之文化圖景」, 『長江學術』 52(2016.4), p. 59.

27) 張莉, 「淸代壽蘇會硏究」(南京大學 碩士學位論文, 2014), p. 7-12.

28) 판당스(範當世, 1854-1905)의 시 「東坡生日臨觞有感复和敬如」는 1906년 2권 10기에, 정샤오쉬(鄭孝胥, 1860-1938)의 시 「東坡生日集翁鐵梅齋中」은 1906년 2권 12기에 각각 실렸다. 焦寶, 「論晩晴民國報刊詩詞中的東坡生日雅集」, 『社會科學硏究』(2016.4), p. 186.

29) 위의 논문, pp. 187-189.

30) 천디에셴은 당시 상하이에서 가장 이름이 높은 해파문인(海派文人)이자 통속문학 작가였다. 韋昊昱, 「同南賢聚-滕固早年藝文思想再探」, 『中國美術』(2019.2), p. 62.

31) 沈寧, 「我記起你的一雙眼」, 『博覽群書』(2011.1), p. 12.

32) 沈寧 編, 『滕固年譜長編』(上海: 上海書畫出版社, 2019), p. 12-13.

33) 정세진, 「東坡同生日 富岡鐵霽의 崇蘇 활동과 그 의미」, 『중어중문학』 65(2016.9), p. 65.

34) 도미오카 뎃사이는 자신의 생일이 소식과 같은 12월 19일이라는 이유로 소식에 특별한 관심과 동질감을 가졌다. 위의 논문, p. 66.

35) 이 모임들은 각각 『을묘수소록(乙卯壽蘇錄)』, 『병진수소록(丙辰壽蘇錄)』, 『정사수소록(丁巳壽蘇錄)』, 『을미수소록(己未壽蘇錄)』, 『수소집(壽蘇集)』 등의 출판물을 남겼다. 卞東波, 「漢詩, 雅集與漢文化圈的餘運-1922年東亞三次赤壁會考論」, 『文學史硏究』 47(2019.1), p. 24.

36) 도미오카 뎃사이와 적벽회에 대하여는 柏木知子, 「富岡鉄斎の見た赤壁会」, 『書論』 39(2013.8), pp. 130-148 참조.

37) 이 행사를 기념한 『淸風明月集』에는 타오카가 초청한 30여 명의 시사 작품과 참가하지 못한 문인들의 투고 글 등 100여 명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卞東波, 앞의 논문, p. 24.

38) 위의 논문, p. 27.

39) 코난의 당송변혁론에 대하여는 內藤湖南, 『支那論』(東京: 文會堂書店, 1914) 참조.

40) 주 3) 참조.

41) Aida-Yuen Wong, “A New Life for Literati Painting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Eastern Art and Modernity, A Transcultural Narrative?,” Artibus Asiae 62(2000), pp. 300-304; 박은수, 「근대기 동아시아의 문인화 담론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0(2009), pp. 34-37.

42) 吳孟晉, 「辛亥革命と京都國立博物館の中國繪畵」, 『美術フォ―ラム21』 26(2012.11), pp. 42-47.

43) 이 시기 중국회화의 유입이 일본 미술계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는 김용철, 「근대 일본의 문인화(文人畵) 담론과 중국회화의 유입」, 『일본연구』 32(2019), pp. 387-411 참조.

44) 李茂民, 『在激進與保守之間: 梁啓超五四時期的新文化思想』(北京: 社会 科學文献出版社, 2006), pp. 112-176; 홍석표, 「梁漱溟의 동서문화론과 중국문화부흥의 학술적 담론」, 『中國語文學誌』 35(2011), pp. 55-64.

45) 텅구의 이러한 시각은 단행본인 『中國美術小史』(上海: 商務印書館, 1926)와 『唐宋繪畵史』(上海: 神州國光社, 1933)뿐만 아니라 “Zur Bedeutung der Südschule in der chinesischen Landschaftsmalerei,”(1931)와 「關于院體畵和文人畵之史的考察」, 『輔仁學報』 2卷 2號(1931) 그리고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Chinesische Malkunsttheorie in der T’ang und Sungzeit,” (OstasiatischeZeitschrift 10, 1934; 11, 1935) 등에서 읽을 수 있다.

46) 滕固, 『中國美術小史』(上海: 商務印書館, 1926), p. 49.

47) 滕固, 「關于院體畵和文人畵之史的考察」, 彭萊 編, 『滕固論藝』(上海: 上海書畫出版社, 2012), p. 81.

48) 바흐호퍼(Ludwig Bachhofer, 1894-1976)는 A Short History of Chinese Art에서 소식과 송대의 회화 사상을 논하며 텅구의 이 글과 박사학위논문을 소개하였다. 바흐호퍼는 “이 논문들은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글들이다”라며 텅구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Ludwig Bachhofer, A Short History of Chinese Art(London: B. T. BAtsford, Ltd., 1946), p. 131의 주 98) 참조.

49) 큄멜은 중국어에 능통한 학자였는데 텅구의 박사학위논문을 매우 높이 평가하여 “그의 번역과 해석은 지금까지의 어느 글과 비교하여도 본질적으로 훨씬 훌륭하다”라고 언급하였다. 李雪濤,「有關滕固博士論文的幾份原始文献(中)」, 『美術研究』(2017.4), pp. 49-50.

50) “吾觀畫品中 莫與二子尊 道子實雄放 浩如海波翻. 當其下手風雨快 筆所未到氣已吞....摩詰本詩老 佩芷襲芳蓀今觀此壁畫亦若其詩清且敦....吳生雖妙絕 猶以畫工論. 摩詰得之以象外 有如仙翮謝籠樊. 吾觀二子皆神俊 又於維也斂衽無間言”, 滕固, 「藝術批評家蘇東坡」, 畢斐 編, 『墨戱』(北京: 常務印書館, 2017), p. 226에서 재인용.

51) 童書業, 「王維的畵格和他在唐宋時的地位」, 『童書業繪畵史論集(上)』(北京: 中華書局, 2008), pp. 127-128.

52) 텅구와 퉁수예 논고의 선후 관계는 정수진, 「텅구(滕固, 1901-1941)의 중국미술사 연구」, p. 289 참조.

53) 滕固, 앞의 글, p. 227.

54) 정혜린, 앞의 논문, p. 247.

55) 滕固, 앞의 글, p. 228에서 재인용.

56) “世之工人 或能曲盡其形 而至於其理 非高人逸才不能. 與可之於竹石枯木,真可謂得其理者矣. 如是而生 如是而死 如是而攣拳瘠蹙 如是而條達遂茂 根莖節葉 牙角脈縷 千變萬化 未始相襲 而各當其處. 合於天造 厭於人意蓋達士之所寓也歟”, 위의 글, pp. 223-224에서 재인용.

57) James Elkins, “Art Criticism,” In Jane Turner ed.. Grove Dictionary of Art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 6.

58) Joseph Imorde and Richard George Elliott, “‘Empathy’ in Art History,” Art in Translation 4(2014), p. 378.

59) 위의 논문, p. 3.

60) 위의 논문, p. 3에서 재인용.

61) 権藤愛順, 「明治期における感情移入美学の受容と展開-新自然主義から象徴主義まで」, 『日本研究』 43(2011), pp. 143-190.

62) 伊勢專一郞, 『支那の絵画』(京都; 東京: 內外出版社, 1922), pp. 1-14.

63) 텅구의 「氣韻生動略辯」은 이세의 『支那の繪畵』의 서문 1절 ‘기운생동’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滕固, 「氣韻生動略辯」, 彭萊 編, 『滕固論藝』(上海: 上海書畫出版社, 2012), pp. 59-62.

64) 설서(設書)는 평서(評書)라고도 하며 화자(話者)가 자신의 설명과 감정을 곁들여 고사(古事)나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표현 예술이다. 설서사(設書史)에서 유경정의 위치에 대하여는 汪俊明·汪维寅, 「柳敬亭的英雄情結與設書藝術淺析」, 『曲藝』(2011.12), pp. 38-42 참조.

65) “與可畵竹時 見竹不見人 豈獨不見人 嗒然遺其身, 其身與竹化 無窮出淸新”, 滕固, 앞의 글, p. 227에서 재인용.

66) 滕固, 「藝術批評家蘇東坡」, 畢斐 編, 『墨戱』(北京: 常務印書館, 2017), p. 229.

67) 텅구의 유미주의 관련 논고에 대해서는 彭建華, 「現代中國的蘭波評述」, 『阜陽師範學院學報(社會科學版)』 159(2014.3), pp. 36-37 참조.

68) 滕固, 「墨戱」, 畢斐 編, 『墨戱』(北京: 常務印書館, 2017), p. 231, 243, 245.

69) 근대기 중국의 미술학교와 그 정책에 관하여는 이보연, 「중화민국 전기 미술정책과 미술학교의 대응 발전(1912-1928)」, 『미술사논단』 42(2016), pp. 225-253 참조.

70) 이보연, 「류하이쑤(劉海粟)와 1920년대 순수미술운동」, 『미술사논단』 31(2010), p. 134.

71) 정수진, 앞의 논문, pp. 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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